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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산동여행이 재미있고 유익해서 친구들 생각이 나서 여기 그 여행기를 올립니다. 바삐 다니며 보는대로 써내린것이라 동서남북이 때로는 없겠지만 심심풀이로 笑鑑해 주면 기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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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7. 8 日. 曇
靑島行
오후 1시 인천공항 발 KAL기에 올라 한 시간쯤 날라서 靑島에 到着했다. 靑島에 있는 中國海洋大學 化學化工學院長 王海增 교수의 초청으로 토요일까지 嚴性鎭박사와 산동여행을 하게 된 것이다. 포항공대 다닐 때 옆방에서 嚴박사의 지도를 받던 王박사를 자주 만나기도 했는데 공항에 차를 몰고 나와 다시 만나니 고맙고 반가웠다.
靑島는 두 번째 오는데 첫 번째 온 것이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도 기억에 감감하다. 한 십 년은 되었을 텐데 그동안 공항도 크고 깨끗한 것이 새로 들어서 있고 市內 들어가는 고속도로도 넓고 깨끗하다.
10시도 안 된 시간에 보이는 발전상이 놀랍다. 海洋大學의 學術交流 中心도 아주 훌륭한 호텔이다. 150개 객실이 있는 큰 곳이니 이 대학의 국제학술의 규모가 어떠한지 알 듯하다. 커다란 침대 두 개가 있는 객실에 엄박사와 함께 旅裝을 풀고 한 두 시간 쉬도록 王교수가 우리에게 배려를 해 주었다.
저녁식사를 학술중심의 커다란 식당에서 하는데 중국인의 hospitality는 정말 마음에 들었다. 생선찜, 대하 등 해물요리, 버섯탕과 어육회 등 山海珍味에 靑島맥주를 한 없이 들었다. 王교수는 나를 상대로 “一口”나 “乾杯”를 계속 권해서 한 열 댓 잔은 마시게 되었다. 그래도 음식과 분위기가 좋은지 크게 취기를 느끼지 않았다. 사십대와 이렇게 對酌할 수 있다는 것도 복이다.
식후에 대학 경내를 산책했다. 아름들이 나무들이 줄이어진 아름다운 공원 안 같다. 오래된 건물이 무겁고 튼튼하면서도 자연 속에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인조잔디가 깨끗이 깔린 운동장에는 사람들이 해가 질 때까지 축구를 하고 있고 그 주위로 트랙을 걷거나 뛰면서 도는 男女老少들의 모습이 보인다. 복잡하고 아직도 이곳저곳 빈곤의 함이 보이는 대도시 안의 별천지 같이 보였다. 건물들은 독일 사람들이 지난 세기 초에 지은 것들이 많다. 일찍 숙소에 돌아와 9시쯤 잠자리에 든다.
2007. 7. 9. 月. 曇
靑島→濟南→泰安
아침 8시. 靑島 발 고속기차 승차 和諧로 두 시간 반을 쾌속으로 달려 濟南에 도착했다. 첫 번째 왔을 때 소형버스타고 털털대며 대여섯 시간이나 고생하며 갔을 때를 생각하면 그동안의 변화가 놀랍다. 그 전엔 濟南驛에서 택시로 고속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길은 먼지도 많이 먹고 예전과 별로 차이 없는 인파를 헤쳐야 했다. 버스 정류장도 새로 크게 지었지만 하도 사람이 많아서 주위 건물과 비해서 새것 같지도 않다. 버스가 떠나기 전에 뒷간에 들렀는데 그 곳 참 대단한 데였다. 소변 받는 큰 plastic 통이 여기저기 놓여있고, 한쪽으로는 뒤 보는 사람들이 한 줄로 뚫어진 구멍 속에 그대로 일을 보고 있다. 나는 비위가 좋은 사람인데도 소변이 잘 안 되어서 한 시간 반 동안 버스타고 泰安까지 오는 길 尿氣를 참느라고 참 고생이 많았다. 그동안 고속도로가 시원히 뚫려 시속 120km가 제한속도인데 오래된 버스라 80km도 잘 내지를 못한다. 尿氣 참는 것 때문에 더위는 잊어버렸다. 泰安에는 王海增박사가 미리 연락을 해둬 자동차가 버스정류장에 나와 泰山學院 앞의 虹橋賓館에 편하게 旅裝을 풀었다. 태산 학원의 馬총장이 王교수의 동창생이어서 이곳서도 호강을 하게 된 것이다.
오후 2시가 되어 1층 식당에 내려가 식사를 하는데 그런대로 먹을 만하다. 전에 이곳에 왔을 때 너무 불결해서 일행이 모두 음식에 입을 대지 못했는데 나만 잘 먹었다는 것을 아직도 內子는 가끔 자랑을 하고 있다. 오후에는 이번 여행을 따라온 王교수의 學生 鄧培昌君의 안내로 岱廟觀光을 두어 시간했다. 漢代에 시작해서 본격적인 건설은 唐代에 시작하고 宋代에 틀이 잡혔으며 그 후로도 계속되었던 역대황제가 泰山神에 제사드리던 곳인데 웬만한 궁궐보다 큰 규모이다. layout도 중국의 궁궐을 상기시키는 점이 많았다. 岱廟 안에는 곳곳이 중국의 書法史에 관한 전시가 많아서 嚴박사와 나는 정말 신이 나서 구경을 했다. 한 3년 가까이 서예공부를 했으니 그 좋은 획 하나 하나를 감상하는 기분이, 그리고 전체적인 멋을 느낄 수 있는 감각이 그만큼 생겼기에 그만큼 시간가는 줄 모르며 관람을 한 것이다. 옛 碑石의 글자는 많이 훼손되었지만 그 가운데 그래도 보존이 잘 된 글자를 골라서 많이 사진에 담았다. 현존 작가의 詩碑가 한 공원을 이룬 곳이 특히 좋았다. 역사적인 중국대시인으로부터 모택동의 시까지 망라해서 쓴 글씨들이 그야말로 淸勁하면서도 現代感覺과 뛰어난 藝術性을 보인다. 이런 곳은 하루 이틀에 다 보는 데가 아니다. 찍어간 사진들을 자주 들여다보면 글씨 배우는데 산 교육재료가 될 것이다.
岱廟관람을 끝내고 나오는 길에 정문 앞 반반한 돌길 위에 긴 작대기 끝에 붓을 달아 물로 글씨를 쓰는 한 노인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동네 할아버지치고는 藏鋒. 蹲, 收筆이 제대로 된 예사스럽지 않은 솜씨다. 내가 사진 좀 찍으면 안 되겠냐고 물어봤더니 선선히 좋다고 하면서 論語의 한 구절을 써 보였다.
有明自遠方來 不亦樂乎
그것을 비디오에 담고나서 나도 노인에게
四海之內 都兄弟
라며 和答해 주었다. 노인이 활짝 웃으며 좋아하는걸 보니 이 순간이 天國이다. 이럴 때는 그동안 나름대로 중국말 공부했던 보람을 느낀다.
숙소로 돌아와서 한 시간쯤 휴식을 취한다음 1층에 내려가서 오늘 저녁에는 채식 위주로 간단히 식사를 하기로 했다. 식후 산책을 하러 잠깐 밖에 나갔다. 널따란 신작로 건너편 바로 泰山學院 東校區여서 학생들 모습이 반가운데 자동차들이 험하게 지나쳐 건널 엄두가 나지 않는다. 도시는 아직 허름하지만 도로구획이 정연하고 우리나라처럼 亂開發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計劃經濟에도 장점은 뭔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여행 중에 집에 있을 적보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게 된다. 엄박사는 8시 좀 지나 금세 코를 골고 나는 일기 쓰고 곧 이어 잠을 청한다.
2007. 7. 10. 火. 曇晴
曲阜
孔子동네인 曲阜 에는 늘 한 번 가보고 싶었는데 오늘 하루 그곳에 가서 종일 흐뭇하게 구경을 했다. 아침 7시에 泰山學院의 왕기사가 와서 함께 간단히 식사를 하고 널따란 신작로를 신나게 달려 8시 반도 안 되어 曲阜에 도착했다. 어느 식당이 있는 곳에 차를 세워놓고 오전 중에 孔廟와 孔府家를 둘러보았다.
이천오백년 동안 수많은 황제와 성현들이 孔子의 덕을 기린 흔적들을 들여다보는 감회가 깊다. 그 규모와 건축물의 배치가 가히 궁궐에 못지않다. 그 가운데우리 둘의 눈을 가장 끈 것은 2500년의 역사가 어린 수많은 孔子의 공덕비들이다. 皇帝 친필이거나 皇帝특명으로 쓴 것들이라 모두 最高 名筆들의 글씨였을 것이다. 비문들이 五體 각가지로 된 것들이 보여 많은 시간을 들여 공부 겸 감상을 하고 비디오와 디지털에 전체로 그리고 마음에 드는 글자는 확대해서 담았다. 모두가 교과서 보는 듯하면서 狀麗하고 淸勁하기 그지없다. 어제 본 岱廟에서의 글씨도 그렇고 오늘 본 것도 모두 大陸書法의 깊이와 수준이 대단한 것으로 보며 자만하는 우리나라의 자칭명필들은 한참 더 노력해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孔廟 바로 東쪽에 있는 孔府는 중국현대 최대 귀족가문의 주거지로 이곳 역시 궁궐같이 첩첩으로 한 없이 이어진 孔氏代代로 살아왔던 흔적이 있다. 지금이 孔子의 77代孫까지 있다니 그 피야 과연 孔子의 몇 분의 일이나 될까 생각하면 그런 것 따지는 것 참 우습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孔子가 그 옛날 이곳서 살고 가르치고 했겠지 하니 이곳에 우리도 와서 잠시나마 거닌다는 사실 자체가 감격스럽다.
자동차 세워놓은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는데 식당 안이 시원하게 냉방이 되어 있고 熏豆腐 등 이 동네 음식이 깨끗하고 맛있어서 기분 좋게 먹었다. 黑龍江出身이라는 老板이 우리말도 두어 마디하며 우리에게 서비스를 잘 해주었다.
식후에 孔林에 가기 전에 잠깐 顔廟에 들렀다. 孔子가 가장 사랑하던 제자였던 顔回를 모신 사당이다. 32才 나이로 夭折했지만 이렇게 큰 사당이 지어진 것은 그의 덕을 칭찬한 孔子의 덕이기도 한 것이다. 입구에서 만난 사십 대 부부와 얘기를 나누는데 아들이 한국어전공학생인데 淸州大學에 유학중이라며 우리 만난 것을 너무 반가워했다. 이럴 때는 스스로 생각해도 중국말 회화가 잘 된다. 아직 많이 부족한 말이니 통하는 정도가 기분에 따른다.
孔林은 3000Acre나 된다니 여의도의 네 배가 되는 넓은 숲이다. 아름지기 나무가 가득 들어선 울창하고 아름다운 숲속에 80代 가까이 내려오는 孔氏들의 묘가 이곳에 들어서 있다. 孔子의 묘도 그의 손자의 묘도 있고 子貢이 손수 심었다고 하는 나무도 있어 그곳에 관광객들이 들끓고 있다. 엄박사는 또 도사 같은 말을 뱉는다.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누가 봤나.”
사실 이 자리가 바로 그 자리다 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긴 세월이 지났다. 그러나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이 언저리에서 그 옛날 孔子와 그 후손들이 살다갔다는 것을 느끼려 하는 것이 어리석은 관광객의 기분만일까. 우리 셋은 사람들이 들끓던 곳을 둘러본 후에 한참동안 한적한 孔林內를 산책하며 수많은 묘비를 둘러보고 자연을 즐겼다. 적막을 더 적막하고 아름답게 노래하는 이름 모를 이 새 저 새들, 이름 모를 작은 꽃따라 아무리 걸어도 피로를 느끼지 않게 하는 좋은 것들이었다.
호텔로 돌아와 목욕한 후 호텔 1층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오늘은 요리 몇 가지와 수발을 들었는데 특히 水餃가 맛있었다. 식후에 호텔 밖을 잠시 산책한 후 돌아와 일찍 잠자리에 든다.
2007. 7. 11. 水. 晴. 雨. 晴
泰山
두 번째 泰山에 오르니 이 까맣게 사라졌던 기억이 하나씩 둘씩 되살아 나온다. 일찍 서둘러 택시를 타고 8시 전에 泰山에 도착했다. 125원의 입장료가 이 나라 사람한테는 아주 큰 부담일텐데도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올라가기 시작이다.
버스타고 고도 800m 정도의 中川門까지 올라가 거기서 정상(1545m)근처까지는 cable car를 타고 가는 것은 첫 번째 왔을 때와 같았지만 내려올 때는 중천문부터는 걸어서 하산했다. 걷는 것이 태산의 정기를 더 받을 수 있는 것도 이유의 하나였지만 經石峪을 둘러보고 싶은 마음이 피로를 잊게한 것이다. 下山하고 나 보니 별거 아닌 것이었다. 鄧君이 우리가 나이 들었다고 미리 너무 겁을 준 것이다. 우리가 山行 자주해서 단련이 되어 있는 걸 몰랐었겠지……. 山頂 玉皇頂까지 가는 길에는 도교사원이 꽤 큰 것이 들어서 있고 唐代부터의 글씨가 많이 새겨져 있다. 皇帝의 글 중엔 唐太宗의 隸書가 좋아보였고 宋眞宗의 楷書는 별로 잘 쓴 것 같지 않은 것 같았다. 五岳無尊이란 비석 앞에는 사진 찍는데 5원씩 받는데도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고 있었다. 알고 보니 그것이 중국 5원짜리 돈에 나온 것인데 嚴박사나 내 눈에는 글씨가 크기만 했지 별로라고 보였다.
王皇頂에는 秦始皇 때 아니면 漢武帝 때 세워졌을지 모른다는 無字碑가 높이 올라가 있고 양쪽에 그 보다 약간 낮은 비석이 세워 있다. 왼쪽이 郭沫若 바른 쪽이 張銓의 글씨다. 둘 다 아름답고 나를 듯한 草書이다. 굵고 가는 것이 自由自在로 明暗을 조화시켜 참 멋있다.
25억년 되었다는 黑云石英閃長岩 위에 齊人들이 예서로 썼다는 金剛經 구경은 정말 기가 막히게 했다. 한 字가 50cm나 되는 것으로 二千字 넘는 金剛經을다 썼다니 그 바위 크기가 얼마나 한 것인가. 조금 구경하고 있노라니 갑자기 하늘이 까매지고 구름이 으슬하게 올라온다. 마침 지척에 돌기둥 세워진 사각정이 있어 서둘러 그 안에 대피하니 곧 천둥번개와 함께 소나기가 쏟아진다. 산봉우리마다 吐雲呑煙의 모습이 그야말로 壯觀이었다. 마침 이럴 때 이곳에 편안히 대피할 수 있는 사각정이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絶妙한 timing이었던가. 이 순간에는 세상 모든 것이 그대로 祝福인 것 같다. 비가 막 들이쳐도 사각정이 충분 히 커서 중앙의 돌상에 다과를 놓고 점심 대신으로 먹으며 지내기 편하고 좋았다. 비가 걷히면서 구름이 산봉우리에서 벗어날 때의 陽光은 기가 막힌 기분을 느끼게 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經石峪 金剛經구경을 한참동안 했다. 비스듬한 사각을 이룬 암반 위에 쓴 글씨는 기본적으로 예서인데 자연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楷書, 篆書 등 他體의 要素가 섞이어 藝術性이 보인다. 주위로 돌로 낮은 담이 세워지고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 있는데 73才의 嚴박사는 그걸 뛰어 넘어 비와서 잘못하면 미끄러질 위험있는 데를 마구 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참 극성이지만 그만큼 볼만한 데였다. 내려오는 길은 거의 다 돌길층계가 많았는데 발에 좀 힘이 가지만 아주 세련되게 모든 걸 만들어 놓았다. 입구근처에는 길 양쪽에 관광가게들이 줄이어 있는데 깨끗하고 난잡하지 않아 우리 도봉산이나 계룡산 입구 같은데를 생각하면 부끄런 생각마저 들었다. 택시로 호텔로 돌아오는데 온 市가 대로로 잘 구획정리도 되고 아름답다. 아직 뒷골목에는 빈곤이 남아 있겠지만 발전의 기틀이 잘 마련되어 있는 것이다. 오늘 저녁도 호텔서 먹었는데 모두 잘 먹을 수 있는 것이 그것도 옛날과 다르다. 9시가 되자 엄박사는 벌써 코를 골고 나 혼자 늦게까지 일기 쓰고 잠자리에 든다.
2007. 7. 12. 목. 晴
靑島
3박 4일의 흐뭇한 泰山旅行을 마치고 靑島에 돌아왔다. 호텔 앞 길 건너서 淸南行 버스를 아침 8시 좀 지나 타고 淸南서 고속열차편으로 靑島에 왔다.
濟南行 버스 안에서는 바로 옆에 앉아있던 아가씨가 나한테 말을 걸어왔다.
“你從哪兒來嗎?
나는 중국 사람인 척 능청을 떨었다.
“你猜一下吧?"
아가씨는 한참만에야 내가 韓國人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아가씨와 얘기 나누느라 濟南까지 오는 한 시간 반이 금세 지나갔다.
濟南서는 기차시간까지 한 시간 여가 남는데 역 근처 德衡律師 사무실에 안내를 받아 뜨뜻한 차대접을 받으며 안락한 의자에서 아주 편히 쉬었다. 중국서 세 번째로 크다는 이 변호사 사무실은 45층 건물의 38층에 있다. 이 사무실에서 王교수의 부인이 잘 나가는 변호사 중의 一人이라고 한다.
기차 안에서는 郭培昌君 옆에 앉아 내내 중국말 공부를 했다. 孔子에 관한 글을 몇 장 읽으니 금세 靑島에 도착했다. 시원하고 빠르고 편안한 고속 기차 안이었다. 첫 번째 왔을 때 덜컥대는 소형버스 안에서 여러 시간 고생하며 오가던 길이었다.
靑島驛에는 王海增박사가 자동차를 몰고 나와 첫날 머물렀던 中國海洋大學國際交流中心에 데려다 旅裝을 풀고 곧 좋은 水餃집에 가서 맛있게 점심을 먹었다. 이곳 만두는 종류도 많고 정말 맛있다. 王박사는 우리가 나이 들었다고 식사 후에 숙소에서 한 두 시간 휴식을 취하게 해주는 배려를 한다.
점심을 늦게 많이 먹었더니 더 먹고 싶지 않다. 그래서 밤거리 많이 거닐며 시내구경을 했다. 書城이라는 아주 큰 책방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큰 책방이 있다는 것 자체가 중국이 크게 발전해 갈 것이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嚴박사는 書法책을 많이 사고 나는 老, 庄子와 小說책들을 샀다. 이번에 장만하고 싶었던 魯迅과 嚴連科의 책은 보이지 않았다. 중심가에는 고층건물도 많이 들어서고 아주 깨끗하고 호화로워서 또 다시 중국의 발전상에 놀라게 된다. 우리가 이들과 共生共營할 길은 무엇인가. 앞날이 어찌 펼쳐질까 그런 생각하면 걱정이 많이 생기는 것은 나이든 사람의 老婆心일까. 靑島에 사는 우리 동포수가 15만이나 된다고 한다. 그들도 모두 알아서 살고 있겠지. 도처에 보이는 한국식당과 회사간판들이 세상 달라졌고 또 달라질 것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저녁때도 水餃를 아주 맛있게 먹었다. 점심 때 이어 靑島啤酒를 많이 마셨다. 기분 좋게 숙소로 돌아와 곧 잠자리에 든다.
2007.7. 13. 金. 曇
靑島
중국식 buffet의 음식이 맞는다. 豆漿, 油조, 삶은 달걀 등 기름기 없는 건강식이다. 중국 사람들 무척 많이 잘 먹는 모습 보고 최근 읽은 중국현대소설에서의 중국 민중의 비참했던 생활상과 큰 대조가 된다.
아침식사가 끝나자 王교수가 7시 반에 와서 海洋大學의 嶸山新校區까지 상당한 거리를 운전해 갔다. 王교수의 男學生三人 女學生三人이 극진히 우리를 맞이해 주어서 우리는 모처럼 젊은 정기를 듬뿍 받는 즐거움을 누렸다. 王박사가 한 시간 반쯤 시험 감독 등 일을 하는 사이 학생들이 우리를 안내해 주어서교내 산책을 흐뭇하게 했다. 작년에 신축한 이 캠퍼스는 규모도 엄청나고 건물들과 layout이 세련되고 조화가 너무 잘 되어있다. 중국정부가 해양진출과 교육을 중시하여 이렇게 투자를 많이 하고 있는 것이다. 靑島에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독일인들이 와서 점령했을 때 튼튼한 건물들을 많이 세웠다. 그 건물들이 많이 남아있어 중국 사람들은 이 캠퍼스를 지을 때도 참고할 모델들이 많았던 것이다. 이 사람들은 또한 무얼 하는데 멀리 보고 천천히 튼튼히 한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들이다. 이 학교 도서관 앞에는 아주 큰 인공호수가 있고 그 안에 水仙花가 이쁘게 피어있었다. 圖書館이라는 글자는 당대 名筆이라는 舒同이 쓴 것이라는데 지난 며칠 역사적 명필들을 본 다음이라선지 큰 印象은 받지 않았다.
학생들과 얘기 나누는 것이 참 즐거웠다. 그들의 英語나 나의 中國語나 그만그만한 것이지만 서로 기분이 통해서 별로 소통에 지장을 느끼지 않았다. 화학연구보다도 書法, 文學 얘기가 더 많았다. 학생들을 남겨 놓고 王교수가 운전해서 靑島觀光을 했다. 청도 바닷가에는 40km에 걸친 백사장 주위를 아주 깔끔하게 정리해 놓았다. 잘 빠지는 길, 아름다운 공원 안의 야외조각, 휴식처 각종 예술 공원과 문화시설… 그 어마어마한 일을 어찌 했는지……. 계획경제의 장점도 있을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어찌했든 우리 같은 나그네가 기분좋게 거닐 수 있는 것이니…….
王박사가 또 맛있는 만두집에 점심초대를 해 주었다. 이 동네의 유명하다는 군만두 鍋貼이 정말 맛있었다. 식사 후에는 저녁식사 때까지 숙소에 와서 목욕하고 쉬었다. 嚴박사는 잠시 동안 코까지 골며 잠을 잤다.
저녁에는 交流中心 식당2층의 좋은 방에 6인이 모여서 좋은 식사시간을 가졌다. 우리 둘을 위해 王박사는 고등학생인 아들을 데려오고 이곳서 사업을 하고 있는 崔銀三社長은 올해 淸華大를 졸업한 아들 丁元君을 대동하여 참석했다.
崔社長은 서울대학 화학과를 나와 첫 직장을 KIST에서 嚴박사 밑에 가서 가진 인연이 있다. 과학원에 들어갔다가 학위시험에 합격해 놓고도 개척정신을 발휘하여 중국에 길을 터서 오랫동안 이곳에 회사를 차려놓고 성공적인 사업가로 살고 있다. 나는 이런 사람들 보면 존경심이 가고 좋은 환경에서도 큰 이룸을 만들지 못한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崔社長의 중국서 사업하는 데 대한 실감나는 얘기를 재미있게 들으면서 한중관계에 대한 서로의 생각을 펼치는 자리도 되었다. 王박사와 崔丁元君과 ‘一口’도 많이 하며 흥겹게 靑島啤酒도 마셨다. 어렵게 자라서 自手成家한 崔社長은 한 때 反政府運動하다가 핍박을 받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 때를 오히려 낭만으로 회상하고 있다. 어쩌면 각자 위치에서 나름대로 나라 발전에 공헌한 사람끼리도 많이 부딪히고 때로는 서로 힘들게 한 일이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모두 살만치 되었으니 쌓인 恨이 있으면 풀고 서로 용서하며 앞 날을 合心해서 해쳐 나가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이 자리에 나온 崔丁元君이나 王교수의 아들 瀟(xiao)君 같은 젊은이들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未來에 대한 希望을 갖는다. 매일 지나갈 때는 하루가 길게 느껴졌지만 엿새의 시간이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갔다. 중국친구들의 극진한 환대는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뜨뜻한 마음으로 여행의 마지막 밤을 보낸다.
첫댓글 몇년 전에 수원모임에서 바로 똑같은 코스로 중국단체여행을 다녀왔다오. 이 여행에 나를 끼어준 정주영 회장과 수원모임 회원들이 그립소. 얼마나 즐겁고 행복했는지.. 또 정주영 학형의 은덕과 배려로 얼마나 대접과 대우도 잘 받았는지.. 이러한 추억과 감사를 다시 일깨워준 김호기 학형도 고맙소.
멋쟁이
105가 꼬리리말에 적었지만 수원모임에서 산동성에 갔을 때, 찍었던 사진들을 다시 편집해서 올립니다 . 참조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