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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百祖一孫之墓 )제주시 대정읍 상모리 586-1번지 사계리 합동묘지 장면총리의 주변에는 비단 국회뿐이 아니었다. 일제 시대 녹을 먹었던 법조인과 변절한 문학인, 교육계는 물론 미군정과 이승만정권에서 빌붙었던 민족의 모리배들(謀利輩)이 반공(反共)전선 최 첨병 (尖兵) 으로 위장하여 무장한채 우글거리고있었다. |
이승만정권이었던 1951년 장면(張勉) 국무총리 비서실장이었던 선우종원(鮮于宗源)은(1918년2월17일~2014년 3월8일)은 국민보도연맹조직에 깊이 관여했던것으로 알려졌으며 사상검사(思想檢事)로 활약한 법조인이었으며1918년 평안남도 대동에서 태어나 광복 전에 평양고보와 경성제대 법문학부 법학과를 마치고 고등문관 사법과 시험에 합격했다.
광복 후 서울지방검찰청 검사로 검사국 초대 검찰과장으로 활약하고 6.25전란 중 치안국 정보수사과장으로 재직하였다.
선우종원(鮮于宗源)은 한국전쟁 당시 맡았던 직책으로 보아 민간인 학살에 대하여 많은 부분을 알고있었으나 생전(生前)에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아서 민간인 학살의 실체적진실을 규명하는데 많은 아쉬움을 남기고 말았다.
이런 인사들을 국회나 진실화해위원회에서 단한번도 증인이나 피의자로 조사해본적이 없을뿐 아니라 기록도 전무하였다.
노덕술(盧德述松浦鴻(마쓰우라 히로)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경찰로, 본적은 일제 강점기 당시 고등계 형사 겸 친일 경찰이었으며 광복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부터 친일파 경찰에서 수도경찰청 간부로 활약하여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반공 투사"라고 극찬을 받기도 하였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된 바가 있었으나 반민특위 해체로 풀려나 경찰직 복귀 이후에도 대한민국 경찰직에서 고위간부로 지내는 등의 호사(豪奢)를 누렸다.
일제의 고등계 형사 노덕술. 독립운동가를 잔혹하게 고문한 것으로 악명이 자자했다. |
이승만은 '노덕술은 반공투사다. 그를 풀어줘라.'라고 그의 석방을 요구했고, 반민특위는 석방을 거절했으나 얼마 안가 대통령 이승만과 내무차관 장경근의 주도하에 노덕술은 풀려나고 경기도 경찰부 보안주임으로 영전한다. 이후 헌병 중령으로 변신하여 1950년 한국전쟁시는 육군 본부에서 범죄수사단장으로 근무하는 등 대공업무를 담당하였으며, 1955년 서울 15범죄수사대 대장을 지냈다.
1955년, 부산 제2육군범죄수사단 대장으로 재임 시의 뇌물수뢰 혐의로 그 해 11월 육군중앙고등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징역 6개월을 언도받으면서 파면되었다.
이후 1956년 이후 고향 울산으로 내려가 칩거 생활하면서 지내다가 1960년 7월 제5대 국회의원(민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 이후 행방이 묘연해졌다.
이사람 들뿐이였겠는가!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데도 이들은 학살문제에 비켜나갈수없는 사림들인데도 책임을 추궁당한일도 없었고 국가로부터 훈포상을 받고 민중위에 군림하다가 여생을 마쳤다 참으로 이상한 나라는 우리가 살고있는 대한민국이다.
이협우(李協雨)는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제2대~제4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대구 농림학교를 졸업하고, 일제 시대때 고등계 형사로 근무했으며대한청년단 내남면 오단부단장, 자유당 월성군당 위원장, 내남수리조합장을 지냈다. 1949년 경주시 내남면에서 명계리 마을 이장 김원도와 그의 친척 4가구 22명과 손씨 가족 8명 등 모두 30명을 학살하는데 앞장섰다(속칭 이협우 사건). 이 사건으로 4.19혁명 이후 체포 돼 1961년 사형을 판결받았으나, 5.16쿠데타 이후 무죄로 석방되었다.
이협우(李協雨)제4대 국회의원
1950년 6.25가 발발하자 6월28일 새벽에 망성리1리(일명 둥굴)의 11가구의 일가족을 몰살했다.(몰살장소는 일명 불송곳이라는 곳임). 50명이상일 것으로 추정 비슷한 시기에 같은 마을인 망성2리의 뒷마을에 사는 사람들을 몰살시켰다. 원인은 이협우는 망성2리(일명 새말)에 살고, 망성1리(둥굴) 사람들과 사이가 좋지않았고, 망성2리의 뒷마을 사람들과도 사이가 좋지 않아 빨갱이로 몰아서 전부 죽여버렸음.
원래부터 망성1리의 권씨문중과 망성2리의 이씨문중간에 알력이 있었다고 함. 소수문중인 이씨가 다수인 권씨들에게 눌려지냈다고 함. 뒷마을 사람들은 이씨문중의 사람들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아서 죽였다고 함.
배리(삼불사가 있는 마을)에 사는 사람의 말에 의하면 이협우의 청년단이 날마다 몇 트럭의 사람들을 남산(금오산)에서 처형했다고 함.
옛 성현 (聖賢) 들의말씀에 선(善) 한일을 행하면 세인 (世人) 들의 입에 백년(百年) 을 오르내리고 악(惡) 한일을 행하면 천년(千年 )을 입에 오른다고 하였다. 죽은자는 말이 없으나 진실은 항상 생물(生物)처럽 꿈틀거리며 살아있는것이다.
1960년 9월에 국민보도연맹(國民保導聯盟)희생자의 유족 송모씨 등이 곽상훈(郭尙勳)국회의장을 찾아가 피해사실에 대한 청원서를 제출하자 곽상훈(郭尙勳) 의장의 주선으로 장면(張勉) 총리는 그들과 만나 면담하고 50만원의 지원금을 지급해 주었다.
한편 피학살자 유족들의 요구가 빗발치자 장면(張勉)정부는 국회에 출석하여 정부의 공식적인 답변을 발표하였다.
당시 장면 총리는 국회 답변에서 양민학살사건은 “ 6.25 당시에 광범위한 교전 중에 일어나는 부득이한 사건으로 전국에 산재한 유골수습과 정부 주최하의 합동위령제와 위령비 건립에 대하여는 곤란하다”며 한마디로 일축하였다.
장면(玉岡勉)정부여!
오호통재(嗚呼痛哉) 라! 미국과 일제관료출신들과 일제군인들과 경찰출신들이 그렇게 무섭더냐! 오호통재(嗚呼痛哉) 라!
수많은 국민의 죽음은 보이지 않고 그들의 녹슬은 총칼만 보이더냐! 오호통재(嗚呼痛哉) 라!
초록은동색(草綠同色)인걸 이제야 알았구나 ! 오호통재(嗚呼痛哉) 라! 구밀복검 (口蜜腹劍)의 흉칙한 속내를 이제야 깨달았구나! 오호통재(嗚呼痛哉) 라! 금 오십만원의 독배를 마셨던 유족들이여!오호통재(嗚呼痛哉) 라!
3.장면(玉岡勉)은 누구인가
총리까지 역임한 장면(張勉)(다마오카 쓰토무(玉岡勉))이 창씨개명( 創氏改名)을 했고, 학교 다닐 때신사참배(神社參拜) 도 하였지만 국민총력천주교경성교구연맹 이사직을 맡았던 경력 때문에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렸던 것은 일제강점기에 국민총력천주교경성교구연맹이 매월 첫째 주를 애국주일로 정해 ‘무운장구기원미사제’를 지냈으며 미사(Missa ) 후에는 시국(時局) 에 대한 강론을 갖고 미사 후 단체로 신궁(神宮) 또는 신사참배 (神社參拜) 를 갖도록 독려했다는 데에 있었다. 그는 시대상황에 자신의 입장을 조정해가며 보신주의(保身主義) 에 물들은 처세(處世) 의 달인(達人) 으로 평가해야될것같다.
(神社參拜)
또한 199년 정운현의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에서 친일파(親日派)로 지목된 이래, 2004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파 708인에 선정되었다. 1940년 7월 동대문경찰서에 동성상업학교 교장으로서 국방 헌금을 냈고 1941년 8월 7일 종교계의 총동원을 논의하는 종교계 시국간담회에 노기남과 함께 천주교 대표로 참석했다. 1943년 6월 16일 동성상업학교 교유와 생도들로부터 모금한 항공기 구입비 130여 원을 동대문경찰서에 냈다. 1944년 9월 국민동원총진회 중앙위원을 맡았다는 것이다.2008년년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친일 인명사전수록 예정자명단 중 로마 카톨릭부문에 포함되었다.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
1946년초 이승만.김구, 김성수등의 주도로 열린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참여하였으며다. 그의 반듯하고 모범적인 이미지는 다른 사람들에게 신뢰감을 주기 충분하였고, 그러한 인사가 운동에 참여한다는 점을 이승만은 집중적으로 활용하였다.
1946년 2월14일 이승만. 김구에 의해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 28인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2월에는 미군정 자문기관인 남조선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에 선출되었고, 영어 구사에 능했던 그는 민주의원으로 활동할 당시 미군정과의 연락과 통역(通譯)을 맡아보았다.
그해 5월에 열리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석하여 내용을 참관하였다. 이승만은 미소공위에 강력 반대하였으나, 그는 미소공위에 참관하여 그 내용을 듣고 이승만에게 일일히 보고하였다.
1949년 1월1일 미국이 가장 먼저 대한민국 정부를 공식적으로 승인하자 그는 한국정부 특별대표(Special Representative)에 임명되어 주한미국대사관 개설 준비에 착수하여 외교 업무를 시작하였다. 1월2일 대통령 이승만은 장면을 주미대사로 인정해달라는 붓글씨를 친필로 작성해서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에게 보냈다.1949년 2월 정식 주미대사에 임명되어 1951년 2월까지 초대 주미 한국대사관 대사로 부임하였다.
1950년 6월3일 부인 신병 치료차 자녀 2인을 동반하여 출국, 미국에 건너갔다. 미국에 체류 중인 새벽에 한국전쟁이 발생하자 대한민국 정부의 긴급훈령을 받아 미국 국무성에 알려 사태의 절박성을 전하였다.6월25일 저녁 이승만과 통화 후, 미국의 상·하원을 찾아다니며 한국 파병을 역설하였고, 이후 UN과 국제사회에 북한군의 남침을 알리고 한국 전쟁에 참전해줄 것을 간청하여미군과 UN군의 한국 파병을 이끌어냈다.
1950년 6월 25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연설하였다.
6월26일 백악관으로 미국 대통령 트루먼을 만나 미군의 한국 파병을 요청하였고,6월27일의 미국의 대북한 선전 포고와 UN에 대한민국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여 UN군의 한국 전쟁 참전결정을 이끌어냈다.
장면은 미국을 신봉국가(信奉(國家)로 여겼으며 미국 또한 장면(張勉)을 측면에서 지원하는것을 주저하지 않았으며 이승만의 심복(心腹)으로서 자리매김을 하는데 성공하였다.
이승만정권에 의해 국무총리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인1951년 2월에 귀국한 후 장면(張勉)은 정식으로 취임하였다. 귀국 무렵 국회와 이승만은 갈등하고 있었다. 그는 중간에서 양자의 조정 역할을 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는 귀국 즉시 총리직에 취임하지 않고, 1주일 간의 여유를 얻어 요인들을 만나 의논해 보았다.그는 “일반적으로 이 박사에 대한 평이 좋지 않아 총리직을 맡을 생각이 간절하지 않았으나 이왕 인준도 받았으니 하는 데까지 하다가 할 수 없으면 그만두라”라는 주변의 의견대로 총리직을 맡게 되었다. 당초 이승만은 장면에게 인사권을 위임하겠다고 하였으나, “5석 중 3석을 총리가 정하였으니 내무에는 이순용 (李淳鎔),국방에는 이기붕을 써 주시오”하고 종용하자, 당초 약속과는 달랐으나 장면(張勉)은 받아들였다
8월에는자유당이 창당되자 자유당에 입당했다. 12월에는 원외 자유당이 결성되면서 장면(張勉)이 속한 자유당은 원내 자유당으로 불리게 되었다.
4.19 이후 과도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이승만 정권하의 부정축재자 처단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미국은 이들에 대한 과격한 처벌을 피하도록 시사(示唆)한 공문을 국무총리 허정과 민주당 대표최고위원인 장면(張勉)에게 보냈다.
차기 지도자 자리를 놓고 미국은 장면(張勉)을 지목하였다. 7월 29일로 예정된 제5대 총선거에 관심을 보인 미국은 친미성향이 강한 장면(張勉)을 선택했다. 7월11일 미국대통령 아이젠하워는 서울에 주한 미국대사에게 장문의 훈령을 보냈다. 훈령에서 장면을 지도자로 선발하는 것이 이상적(理想的) 인 선택임을 주지(周知 )시키고, 이 점을 허정에게 말한 뒤 장면(張勉)에게 지도자자리를 수락하도록 은밀히 요청하라고 주문하였다.
주한 미국대사 대리 마셜그린은 7월20일 대사관저에 있을 아이젠하워 주최 조찬 (朝餐)모임 때 민주당 지도자인 장면(張勉)을 대통령 오른편에 앉도록 좌석을 배치하고, 그에게 미 대통령과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라는 문건을 작성했다. 7월29일 총선 당일에는 총선이 한참 진행 중일 때 아이젠하워의 방문을 받고, 조찬 (朝餐)회동을 함께하였다.
미국의 내정간섭과 집중적 지원을 받은 장면(張勉)은 한국전쟁전후에 발생하였던 양민학살사건에 자유로울수없었고 문제 해결을 하는데도 적합한 인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한국전쟁때 미군의 파병을 요청한 장본인이었을뿐만 아니라 학살의 주 책임은 1950년7월14일 군사작적권을 위임받은 미국과 이승만에게 있다는 사실도 누구보다도 잘알고있었기때문에 민간인 학살의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 위령제봉행. 유해발굴문제를 한마디로 거두절미 (去頭截尾) 하였을것이다.
또한 그배경에는 미국의 절대적인 입김이 작용하였고 한민당출신 제5대 국회의원들이 민주당으로 대거 당선되어 장면(張勉)정부로서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곽상훈 국회부의장의 주선으로 송모유족을 만나 지원금 50만원을 주고 얼버무리려 했을것이다. 언제나 돈으로 문제해결을 하려고 하는 발상은 동서고금을 통하여 진실을 은폐하는 수단을 장면도 알고있었다. 역시 돈은 독약(毒藥) 이다라는 진리를 유족들은 깨달았을때는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였다.
장면정권은 한국전쟁민간인 학살 가해자 처벌은 물론이고 3.15부정선거와 4,19당시 당시 학생 시위 진압자에 대한 미온적 (微溫的) 인 처벌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가 자유당 관련자 처벌에 미온적이었던 배경에는 미국의 압력도 존재하였다.
미국은 허정 과도정부 시절부터 총리허정과 민주당 최고 대표위원인 장면(張勉)에게 보낸 서한에서 "한국의 4월 민주혁명은 계급혁명이 아니며, 계급혁명이 되어서도 안 된다. 이는 비민주적인 이승만 독재정권을 타도하는 데 있었다. (중략)..... 미국의 원조가 사실상 한국 경제의 동맥 역할을 하고 있으니, 설사 부정축재자(不正蓄財者 )들이 이 정권 하에서 원조자금, 세금포탈, 부정 금융대부, 그리고 여타 수단과 집권당에 아부로 인한 이권 취득으로 치부(致富)를 이루었다 하더라도 이의 국고환원, 범칙금에 의한 부정재산 회수가, 쿠바의 카스트로정권이 사유 개인재산을 몰수한 것과 같은 행위로 되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한국전쟁피학살자 유족들과 4.19혁명사망자유족및 부상자 단체와 노동계. 교육계와 학생단체들은 연일 가해책임자와처벌을 요구하고 시위에 나섰다.
그러나 장면(張勉)은 당초 정치보복이 행해져서는 안 된다는 점을 지적하며 자유당계 인사들에 대한 처벌에는 반대하였다.
민주당 정권이 집권하자 이종찬장군은 국무총리 장면(張勉)을 찾아 박정희의 중용을 건의하였다.그러나 장면(張勉)은 이 문제를 바로 답변하지 않고 주한미군사령관 매그루더사령관을 찾아 논의하였다 며칠 뒤 매그루더는 한국육군본부로 박정희의 신원조회를 요청하였고 김형일육군본부 참모차장은 '박정희는 좌익 (左翼) 이다'고 답변하였다. 매그루더는 다시 장면을 찾아 '그런 사람을 어떻게 그런 요직에 앉혀뒀냐'며 항의를 하였다.
이종찬(李鐘贊)은 재차 장면(張勉)에게 박정희"다카기 마사오"(高木正雄)를 참모총장으로 기용하면 반란(叛亂)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건의를 하였으나 장면은 이를 거절하였다. 한편 윤보선이 군통수권을 행사하려 하자 그는 1960년 11월30일 군 통수권은 내각에 있다는 의견을 발표하였다. 역설적으로 만약에 장면(張勉)정부가 박정희"다카기 마사오"(高木正雄)를 참모총장에 기용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라는 우매한 질문에 한국전쟁피학살자 유족들이 40여년동안 모질게 겪었던 고통은 받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은 아마 부질없는 꿈이라 생각해본다.
1960년 11월11일 장면은 정보기관 설치를 요구하는 미국중앙정보국 측의 요청을 수용하여 중앙정보위원회를 창설하였다. 나중에 1961년 3월2일에는 자신의 직속으로 또하나의 정보기관인 시국정화단을 조직한다.
1960년 11월11일 중앙정보조직인 중앙정보연구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에 취임하였다. 장면 총리는 미국 CIA 서울지부의 권유에 따라 총리실 직속의 중앙정보기관을 만들었다.
미국 CIA는 1961년 중앙정보연구위원회라는 이름으로 발족한 이 기관의 책임자로 이후락을 밀었다 이후락은 미국인들의 지원에 힘입어 육군소장 예편과 함께 정보연구실장(차관급)으로 취임했다. 중앙정보위가 설치되자 그가 만들어놓은 79부대는 중앙정보위에 편입되었다.
장면(張勉)이 이후락(李厚洛)을 중앙정보위의 정보실장과 연구실장으로 발탁된 것은 미국중앙정보국의 추천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이후락의 성품과 사람됨됨이를 불신했던 장면(張勉)은 1961년 3월28일 이기호(李岐鎬)를 행정이사관 임용과 동시에 연구실 부실장으로 임명하여 이후락이후락(李厚洛을 견제 감시하게 한다. 당시 당시국방부 정보비서관인 육군대령 이기호는 특명으로 육군준장 진급과 동시에 예편하고 중앙정보위 연구실 부실장으로 임명하여 이후락(李厚洛)을 견제, 감시케 했다. 박정희와 이후락(李厚洛(의 등용문제로 보았을때와 미국의 입장을 세밀하게 관측하고 대비하였더라면 몇개월후에 봉착할 장면정부의 붕괴는 사전에 방지하였을수있었을것이다. 정보기관의 신설은 장면(張勉)정부가 자기가 쳐놓은 그물에 자기가 걸려든 최악의 패착(敗着)이었다.
언론인 양호민은 그가 퇴폐적이고 향락적이며 그가 기용한 인물들 역시 '민족해방투사에 기여한 독립투사는 하나도 없고 그는 '정치적으로 식견도 없고 경륜도 없다고 비판을 가했다. 그에 의하면
"첫째, 민주당 내각에는 소극적으로나마 민족해방운동의 투사를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당시 아시아·아프리카 신생국의 지도층은 대개 반(反) 제국주의적 독립운동에서 혁혁한 경력을 쌓은 사람이라는 사실에 비추어볼 때, 집권당으로서의 민주당이 대중의 마음으로부터 존경받을 만한 정신적 권위를 가지지 못했음은 당연했다.
둘째, 민주당은 보수 정당으로서 자체의 이상과 경륜을 가지지 못하고 정치는 현실이라는 구실을 내세우며 잔재주로 눈가림을 해 이권을 찾기에만 바빴다. 경륜도 식견도 이상주의도 없는 퇴폐한 집단으로부터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릴 에너지는 나올 수 없다.
셋째, 민주당은 훈련과 기율과 정신적 통합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따라서 그 지도체제는 극도로 문란했으며 사색당쟁 (四色黨爭)의 양상을 방불케 하는 당내의 복잡한 파쟁이 속출해도 이것을 통제하고 내부적 단결을 회복할 지도력이 없었다. 그리하여 말기의 민주당은 오합지중으로 타락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장면(張勉)정권은 숭미주의(崇美主義)에 물들어 미국의 노골적인 내정간섭에 주권국가 (主權國家)로서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하였고 심지어 군 (軍)인사문제까지도 사사건건 주한미국대사와 워싱톤과 사전 협의하여 결정하는 미국 종속국(從屬國)으로서 면모를 유감 없이 발휘하여 민족주의자및 혁신계를 비롯한 청년학생들에게 심한 자주국가국민으로서 심한 모멸감 (侮蔑感) 과 수치심(羞恥心)을 앉겨주었다.
제2공화국 장면(張勉)정부는 경제분야에 있어서 4.19혁명 직후의 사회불안 요인과 노동운동, 시위의 증가 등 경제 불안요소 때문에 경제성장이 정체되었다. 실업률과 물가가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1960년 가을부터 1961년 봄까지 미국 달러화에 대한 대한민국 환(圜)화의 가치는 절반으로 폭락했다. 한편, 제2공화국 정부는 경공업과 농업의 생산력 증가, 실업자 해소, 국토개발 등을 목표로 한 5개년 경제개발계획을 입안하였으나 대미경제의존도에 집착하여 자립경제정책을 수립하지못하였다.
부정축재자(不正蓄財者) 재산환수에 미국의 부정축재자 재산환수 불가방침에 고개를 숙이고 말아 경제정책의 개혁에 실패를 하고말아 부익부 빈익빈(富益富貧益貧)의 경제구조의 악순환의고리를 끊지못하였다.
(8편에서 계속됩니다)
첫댓글 악함이 하늘을 찌르는군요~^^
민족정신이 결여된자들이 정권욕에만 치중했으니
군화발에 짖밣이는 모순이 연출 되었네요
장면정부의민주당의원들의 구성 분포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친일관료출신들과 군과 경찰들이 우글거리는 소굴이었네요.그런 사람들에게 진실규명을 요구하였다니 통탄할입니다. 역사가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섭니다. 필자님의 글을 통하여 많은것을 배우고 느끼고 있습니다. 얼마나 답답하셨으면 오호 통재라 하셨겠습니까. 좋은글 고맙습니다.
적절한 표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