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체질이 하다하다 별 까탈을 다 부린다. 조직 검사 결과 암은 아니라고 했다. 다행스럽지만, 만성 염증은 쉽게 낫지 않는다는 진단에 마음이 또 내려앉는다. 작은 상처 하나를 씻은 듯이 치료해 주지 못하는 의술이 원망스럽고, 나을 듯 말 듯 다시 덧나는 피부에 화가 치민다. 심통을 부리는 피부가 나는 늘 못마땅하다.
입술 부르트는 것쯤이야 피곤하면 종종 있는 일이다. 이런 상황이 벌어질 줄 짐작이나 했는가. 한 달이 지나도록 상처가 아물 기미가 없어 피부과를 찾았고 급기야 대학병원까지 오게 되었다. 작은 상처라고 아픔이 덜한 건 아니다. 아랫입술 한쪽이 약간 헐었을 뿐인데 온몸이 다 불편을 느낀다. 따가운 입술로 음식을 먹거나 발음하기도 고통스럽다. 하필 두 입술 사이에서 생성되는 양순음이 우리말에 왜 그리 많은지. 처음으로 알았다. 오래된 상처는 뿌리도 깊기 마련이다. 애초에 상처를 방심한 게 화근이었고 타고난 체질을 모른 척한 탓이 크다.
나이를 먹으면 웬만큼 단련될 만도 하건만, 유별나게 예민하고 약한 내 피부다. 타고난 민감성은 수시로 올무가 되어 사람을 옥죈다. 트러블을 일삼는 피부뿐이랴. 걸핏하면 여기저기 고장을 일으키는 몸을 감당하느라 ‘사람은 존재 그 자체가 병’이라는 말이 실감 난다. 질병은 인간이 흠을 지닌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면, 내 상처에도 서사적인 고통이 있다고나 해 둘까.
누군가는 몸의 질환이 부정적이면서 긍정적인 요소가 된다고도 역설했다. 불완전함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삶의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질병을 벗으로 여길 만큼 대범함을 갖추진 못했으니 내 심신이 복닥거릴 수밖에. 건축에서는 ‘리모델링’이란 것이 있다. 낡은 건물을, 기존의 골조를 바탕으로 새롭게 뜯어고치는 것이다. 삭은 파이프를 교체하고 내부 구조도 스마트하게 재구성되며, 어수선한 부엌이 아늑한 현대식 주방으로 탈바꿈한다. 우중충한 화장실도 산뜻하게 바뀐다. 닳고 색 바랜 것들을 벗겨낸 자리에 환한 도색으로 빛을 넣어 주면, 같은 건물이나 공간일지라도 확 달라진다. 마치 새로 지은 것 같다.
말쑥하게 리모델링한 건축물을 보고 있으면 나도 거듭나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말썽을 일으키는 육체는 물론 바작거리며 죄어드는 성격까지 바꿔 봤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시시각각 이성과 감정 사이에서 소모전을 치를 때나, 절제하지 못한 말과 옹졸한 행동이 실망스러울수록, 부속품을 갈아 끼우듯 내 안팎을 바꾸고 싶다. 안달하지 않고 느긋하게, 애태울 필요 없이 평화롭게, 전혀 다른 사람인 양 한번 살아 보고프다.
어느 땐 미용실을 찾았다가 팽팽하게 부풀던 기운이 스르르 빠져나가곤 한다. 겉모양이나마 바꿔 보겠다며 마음 내어본 곳이다. 한데 거울 앞에서 마무리된 모습을 볼라치면 타고난 것과 몸에 밴 것, 자기만의 무엇이나 익숙한 것으로부터의 탈바꿈이란 가당찮은 일이라 여겨진다.
그렇더라도 ‘아름다우면서 건강하게 살고 싶다.’는 게 모든, 사람들의 소망 아닌가. 사람은 마음 안의 선(善)과 그것들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욕망의 균형추가 맞아야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비탈길과 벼랑과 불길로 부대끼는 마음속인데 저울추가 어찌 균형을 유지하겠는지…….
생각해 보니 사람이 선천적 불완전함을 극복해 간다는 것은, 평생에 걸친 ‘리모델링’ 이지 싶다. 여태 살아도 하루가 서툰 터에 ‘깜짝 변신’ 이야 어찌 기대할 수 있으랴. 날마다 조금씩 새로워지는 거다. 아픔을 다독거리며 익숙한 것도 비워낼 줄 알고 낯선 것도 받아들이는 지혜를 터득해 가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그만큼 넉넉해져 새로움에 닿아 있지 않을까. 오랫동안 보아 온 선배가 그랬다.
“나도 이 나이는 처음 살아 봐.”
그 말을 들으니 뜻밖에 새뜻했다. 내게도 처음인 지금, 아픔 때문이 아니라 아픔 덕분에 고장 난 것들을, 시치고 꿰매면서 한번 걸어가 볼까. 잔잔한 바람에 흔들려도 보고 마음의 단추를 하나쯤 풀어 놓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것이 허망하고 어리석은 꿈이라 해도, 그리워하며 맞이할 오늘이 있다는 걸 축복이라 여기면 삶이 좀 달라질 법도 하다. 그런 하루가 모여 언젠가는
은빛 머릿결을 나부끼면서 유유히 살아갈 모습을 연상해 본다.
녹색 가로수 잎이 다른 모양으로 바뀔 때쯤, 나는 또 한바탕의 몸살을 앓을게다. 몸과 마음이 몸살을 앓는다는 건 새로움을 향한 부추김일 수도 있겠다. 계절에조차 민감한 내 체질은 아무래도 타고난 ‘리모델링’ 추구형인가 보다. 처음 살아 보는 오늘에도 어쩐지 그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첫댓글 염 작가님 께선 피부가 너무 예민한가 봅니다. 그래도 잘 대처하시면서 지내시네요. 애쓰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