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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우리 주의 성령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우리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은 우리 지난주 부활절 우리 말씀 또 칸타타 또 부활절 계란 나눔 마음을 가졌는데 동영상을 한번 만들어 봤습니다. 한번 보시고 오겠습니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손에 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위에 오실 길을 묻게 하라.
말씀이 육신이며 우리 가운데에 거하시며,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께서 가로사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이 너로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우리 모두 다 되게 하겠사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기쁘게 찬양합시다.
우리 박수 한번 하겠습니다.
지난 주일은 부활절이었습니다. 그리고 부활절에 관한 여러 행사를 가졌습니다. 조금 전에 동영상을 보았습니다만 부활절 말씀 또 부활절 칸타타 그리고 또 우리 우리 교육부 우리 아이들이 부활절 전도하러 나가는 모습들, 우리 남성교 여전도회도 다 나갔는데 사진을 담아오지를 못했던 것 같아요. 우리 남성교 여전도회에 다 나가서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또 지난 한 주간은 부활절 특별새벽기도회도 가졌습니다.
우리 기독교회에서 여러 절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중에 이 부활절 부활이 가져다주는 의미는 정말 대단하고 놀랍습니다. 만약 우리 주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저와 여러분의 신앙 자체도 아무것도 아닐 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오늘 주님을 위해서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뿐이겠습니까? 주님을 위해서 섬기고 봉사하는 것도 다 헛수고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여러분 아무리 잘했다 할지라도 예수님이 부활하지 못했다면 저와 여러분의 신앙은 그야말로 물거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인생의 가장 큰 축복인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예수님은 죽었다가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주님의 부활은 나의 부활입니다. 할렐루야 이 부활의 기쁨, 승리를 가지고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주님의 부활을 맞이했던 그 인물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누가 주님의 부활을 보았는가 하는 것이죠.
누가 예수님의 부활을 보았는가?
첫 번째 먼저 게바에게 보이셨다고 했습니다. 4절 5절 말씀 한번 읽어봅시다. 4절 5절 말씀 시작
감사 주님과 되셨다가 성령으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서 제발 기회를 주시고, 오늘 이 날 따라
아멘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누구에게 보이셨고 게바에게 보이시고, 이 게바 게바는 누굽니까?
베드로입니다. 게바는 바로 베드로 아람어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 그를 제자로 부르실 때도 예수님이 직접 찾아가 만나주셨고, 또 부활하신 이후에도 주님은 친히 개발을 찾아가셨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대단한 사건이라고 봅니다.
여러분 게바가 누굽니까?
베드로가 누굽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내가 져야 되겠다 질 것이라고 하니까, 그때 베드로가 하는 말이 주님 다른 사람들은 다 주님을 떠날지라도 저는 주님을 꼭 지키겠습니다. 저는 절대로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고백했던 제자였습니다.
그러니 지금 제자들 중에 가장 미안하고 주님을 뵐 면목이 없는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베드로지요. 비굴하게 계집종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한 것도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나는 저 사람 모른다고 부인도 하고 또 저주까지 하면서 그렇게 했던 자가 바로 게바였습니다. 정말 어찌 보면 제자 될 자격이 하나도 없는 그런 형편없는 자였습니다.
그러니 어느 제자들보다도 마이 게바는 마음에 정말 가슴을 치며 비통해 했던 그런 제자가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주님은 저희 부활하신 주님은 그를 직접 만나주시고 그를 용서해 주셨고 다시금 힘을 북돋아 주었습니다.
여러분 만일 주님이 한 번이라도 이 게바에게 너 같은 놈은 제자들 자격이 없다. 이제는 너하고 나하고 끝났다. 상종하지 말자. 섞어져라 그렇게 말했다면 아마 이 게바는 통 안에 눈물을 흘려야만 했을 겁니다.
하지만 주님은 부활하신 주님은 개발을 찾아왔습니다. 그에게 용기를 힘을 주셨습니다. 그러니 이 베드로는 그 남은 여생 인생이 복음을 위해서 어떻게 사용했겠습니까? 정말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고 끝까지 충성했던 자가 바로 게바였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이 베드로는 마지막 십자가를 지는 순간에 나는 주님처럼 바르게 십자가를 질 수가 없습니다. 거꾸로 십자가를 지게 해달라고 그렇게 했던 자가 바로 게바였습니다. 그리고 또 누구에게 보이셨을까요?
5절 하반절에 보니까 12 제자에게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흩어져 있던 열두 제자들에게 부활의 주님이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의심 많은 도마에게까지도 보여주셨습니다.
도마는 또 어떤 자입니까?
나는 절대로 주님의 창자국 손자국을 내 손으로 만져보지 않고는 나는 절대로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부인했던 자입니다. 그런 자에게도 주님이 보이셨습니다.
또 누구에게 보이셨습니까?
500여 형제에게도 동시에 보이셨다고 했습니다. 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6절 말씀 시작
내 어머이는 그녀에게 일주일을 보이셨나니 그중에 수육까지로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아멘 그 후에 500여 형제에게 어떻게 보이셨다고요?
일시에 보이셨다. 여러분 대단하지 않습니까? 개인적으로 주님이 부활을 보이신 사건도 있지만 500명 형제들에게 일시에 보이셨다.
또 누구에게 보이셨나 하고 보니까 7절에 야고보에게도 보이셨고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도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제가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에 주님의 부활을 가장 기뻐하고 가장 즐거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일까요?
그렇죠 사도바울이죠. 이 사도바울 부활의 사건도 정말 놀랍고 대단하고 또 제자들에게 보이신 사건은 정말 너무나 가슴 벅찬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놀랍고 가슴 벅찬 사건은 부활하신 주님이 나 같은 나 같이 미수가 같은 나를 찾아와 주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의 고백을 보면 정말 마음에 확 와닿습니다. 우리 8절 말씀 8절의 말씀 시작
우리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다음과 같은 세계로 보셨습니다.
아멘 왜 나중에 말하지 못하여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가 왔던 내게도 뭐 하셨느니라 보이셨느니라 사람은 여러분 10달을 다 채워야지 채우고 나와야 되지 않습니까?
그 일찍이 나오면 조사는 미숙아라고 표현을 하는 겁니다. 체중도 미달이고 건강 상태도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큐베이트에 들어가야 하는 미숙아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미숙아 같은 나 같은 자를 찾아오신 것에 대해서 바울은 정말 기뻐하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앞의 구절과 연결해서 보면 이런 의미도 있을 겁니다. 주님께서 베드로를 찾아오신 것은 그래도 이해가 된다라는 생각을 하시게 될 겁니다.
왜 베드로는 주님의 수제자니까 제자 중에 제자니까 그렇다. 그리고 또 12 제자와 또 야고보에게 찾아온 것도 이해가 됩니다. 왜냐하면 12 제자들이니까 또 주님의 형제들이니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같이 모자라는 자를 찾아오셨다는 것은 정말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너무나 기쁘고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직접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었거든요.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난 적도 있고 뵌 적도 있고 해서 그런데 바울은 자신은 직접 표현 적도 없는 분이신데 나 같은 미술과 같은 나를 주님이 나에게 보여주셨다.
그리고 바울은 자격이 없는 자를 찾아오신 것에 대해서 정말 기뻐하고 있습니다. 우리 9절 말씀도 볼까요? 9절의 말씀 시작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확대하였으므로 사고로 신랑 사기를 감당하지 못하였으니
아멘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한 바퀴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이 고백을 통해서 사도바울은 정말 나는 정말 작은 자 중에 작은 자, 별 볼 일 없는 자 사도라. 부름을 받기에 감당조차 할 수 없는 그런 자가 그런 자에게까지 예수님이 찾아오셨다. 지금 사도 바울은 엄청난 지금 간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찾아가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모세니까 엘리야를 찾아가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왜 엘리야니까 주님이 베드로를 찾아가신 것도 이해가 됩니다. 주님의 제자이니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주님이 나 같은 자를 찾아오셨다는 것은 그야말로 엄청난 사건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도 바울의 고백이 어떻게 들리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말씀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어떻게 다가오고 있습니까?
그냥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찬양하고 노래한다는 것 물론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오늘 이 사도 바울처럼 미숙과 같은 인간 같지 않은 사람에게 주님이 오셔서 나를 자녀 삼아주셨고 부활의 주님이 나를 만나주셨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대단하고 놀라운 사건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 그 은혜가 너무 벅차고 가슴이 활활 타오릅니다. 그래서 그 고백이 이렇습니다. 우리 10절 말씀도 한번 보겠습니다. 10절의 말씀 시작
하나님과 받을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본 것이니 내게 주신 너의 가 되지 아니하이다.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하였으나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눈을 하라.
아멘 자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오 오직 나와 함께하신 누구의 은혜로다. 하나님의 은혜 사도 바울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부활의 주님께서 나를 찾아오셨다는 것은 정말 너무나 감격스럽고 나는 정말 비참하고 비천하고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그 부활의 주님이 나에게 오셨다는 것은 한마디로 하면 이건 정말 하나님의 은혜구나 할렐루야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 하는 방법이 그렇게 다르게 말할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크게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나옵니다. 하나는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고, 다른 하나는 은혜를 많이 입었음에도 그 은혜를 오히려 원수로 갚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반면에 아주 작은 은혜를 베풀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평생을 잊지 않고 기억하면서 고마워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가 어제 어느 가정에 신방을 갔는데 그분은 늘 언제나 이맘때쯤 신방을 받습니다. 그분이 우리 교회를 온 후로부터 한 번도 신방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분의 형편은 넉넉지가 않습니다. 월급도 100만 원도 받지 않는데 하나님께 신방 감사도 하고 또 목회자가 왔다고 또 작은 선물도 하고 신방 대원들까지 챙겨서 선물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식사도 그냥 보통 집에 가는 것이 아니라 정말 좋은 집에 가서 식사를 정성껏 대접합니다. 그분이 이렇게 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자기가 농경에 처음 이사를 왔는데 새벽 기도 갈 교회를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무작정 저희 달성 교회로 전화를 해서 새벽 기도를 가고 싶은데 새벽 기도 갈 곳을 좀 가르쳐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 저는 우리 교회 오시면 좋은데 집하고 먼 곳에 있으니 가까운 교회를 한번 소개해 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 일이 집사님에게 어떻게 좋게 보였는지 그 일로 인해서 우리 교회를 등록하고 지금까지 한 번도 새벽 기도를 빠지지 않고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제가 이분에게 해준 것은 그냥 전화 한 통화로 친절하게 대해준 것뿐인데 이 집사님은 이 고마움을 엄청 크게 받아들이셔서 늘 감사를 잊지 않고 표현을 해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분의 마음속에는 작은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작은 것을 작은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귀하게 여기는 마음 있구나 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마음이 바로 주님의 마음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적지 않은 은혜를 받았고 또 큰 은혜를 여러 차례 베풀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중에는 섭섭하다는 소리가 들려오고 심할 경우에는 원수처럼 변해버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짐승도 은혜를 갚거늘 사람으로서 받은 은혜를 잊는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름지기 사람은 은혜를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은혜를 알게 될 때 사람은 겸손의 능력을 가지게 됩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이 은혜가 이 은혜를 어떻게 고백합니까?
우리 8절 말씀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8절 말씀 시작
내 가슴에 반사되지 못하여 가짜 같은 내게도 보기 시작합니다.
아멘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뭐 했다 보이셨다 만삭되지 못했다는 것은 열 달을 채우지 못한 채 태어난 사람. 한마디로 표현을 하자면 사람 같지 않은 사람, 인간 같지 않은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이 바울 자신은 그렇게 자신을 그렇게 깨달았다는 거죠.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보니까 참 나 같은 사람에게도 이런 미천한 자에게도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시네. 그래서 자신은 사도 중에 나는 사도라고 불릴 만한 자격도 없고 그저 나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 열심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면서 또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 보면 바울에 대해 자신을 고백할 때에 나는 15절 하반절에 죄인 중에 내가 무엇이니라 괴수니라.
여러분 이 고백도 처음의 고백이 아니라 사도바울의 사역 말기에 대한 고백이었거든. 그러니까 은혜를 자꾸만 처음 하다 보니까 자신이 얼마나 초라하고 미숙과 같고 불쌍한 자인지 내가 죄인 중에 큰 죄인이구나.
여러분 이런 고백이 어디서부터 출발될까요?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데에서부터 시작이 된다는 것을 여러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신에게 정말 고마운 사람에게 거들먹거린다든지 목에 깁스를 하고 힘줄 수가 있겠습니까?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에게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존경심이 나오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존중하고 마음에서 그를 영접하기 때문에 금방 지게 행동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잘 알 것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분이 한 분이 계십니다. 오래전에 담임 목사로 모셨던 분이 있습니다. 그분의 나이가 이제 90세가 되었습니다. 1년에 몇 차례 뵙는데 물론 전화는 자주 드립니다만 전화를 하든 만나든 어떤 항상 그분 앞에 서면 제가 부목사가 됩니다.
저도 제 자신이 스스로 생각해 볼 때 참 웃길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도 이제 담임 목사 한 지가 이제 17년이 되었고 조금 있으면 이제 20년이 되는데 이제 부목 삽시도 벗을 만도 한데 그러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바로 그분을 존경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분을 통해서 많은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은혜를 받은 사람 앞에는 결코 교만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사도바울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 고백하는 것이 무엇이게 되겠습니다. 주님 나는 정말 만삭되지 못한 사람 같지 않은 사람에게도 주님이 나에게 이런 부활의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여러분 이런 고백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 속에 거하지 아니하면 이런 고백이 나오지 않습니다.
여러 사람이 교만하면 어떤 마음이 듭니까? 그래도 내가 좀 낫지 그래도 내가 열심히 했지 그래도 내가 뭐 했다고 자기 스스로 자만에 빠지는 사람은 절대로 이런 고백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말씀의 결론입니다. 지난 주일 우리가 부활 주일로 섬겼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왜 바울에게 나타나셨을까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다른 것에 떠오르지 않고 바울은 참 겸손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모든 은혜를 주셨다.
그렇다면 오늘 이 시대 이 시대 속에 누가 부활의 주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역시 겸손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성도는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무엇이라고요?
여러분 우리가 신앙이 쌓이고 또 나이가 먹고 또 직분이 또 주어질 때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될 것이 겸손의 주님을 만나야 된다라는 것입니다. 겸손의 주님을 만날 때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내게 능력을 주셔서 더 큰 사명을 주시고 더 큰 은혜를 주셔서 우리의 일생을 책임지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오늘 여러분 겸손히 주를 따라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