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에서 만난 일본은 작고 소박하였다(수정)
조일전쟁(임진왜란)과 일제의 조선식민지 지배로 말미암아 대부분 한국인들의 DNA 에는 일본에 대한 적대감, 혐오의식이 있다. 나 또한 한국인으로서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증오를 품고 있다. 특별히 연변에서 1920년에 10월에서 1921년 5월 사이에 일어난 “경신대학살”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부터는 일본 놈들의 잔인성에 치가 떨려서 늘 화산이나 지진, 쓰나미로 일본이지구상에서 사라지길 염원하였다. 그런 마음이 지나쳐서 하나님 앞에 그들의 잔인하고 비열한 죄악상을 고발하면서 우리 조상들이 당한 고난과 고통과 억울한 죽음의 30배 100배로 그 후손들에게 심판과 징계를 내리시라고 빌었다.
코로나 카오스 시대를 통과하면서 코로나 바이러스가 선악을 개의치 않고 불의와 정의를 고려하지 않고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을 고통과 죽음으로 이끌어 가는 것을 보면서 비로소 나는 하나님께 정의의 이름으로 심판을 요청하는 기도를 멈추었다. 그리고 크리스천으로서 많은 고투와 잠 못 이루는 고뇌 끝에 비로소 일본과의 화해를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에 대하여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세계 사람들이 미국 다음 가는 경제 대국이 된 일본을 ‘경제적 동물’이라고 부르는 것 그리고 패전 독일과는 달리 자기들의 온갖 전쟁범죄를 인정하지 않고 역사왜곡과 교과서왜곡을 서슴지 않고 자행하는 아주 치졸한 위선과 악, 기만과 폭력의 나라라는 것 정도였다.
책을 읽으며 일본에 대한 다른 평가와 다양한 이해들을 발견하면서 한국의 교육과 언론과 지식인들이 나에게 심어준 일본에 대한 선입관과 편견을 분별하고자 하는 의지가 발생하였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는 생각에 일본 여행을 결심하였다.
간사이공항에서 오사카시내로 들어오면서 한국에 비하여 모든 것이 작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다 작은 나머지 과연 일본이 경제 대국인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차, 도로, 집들이 작아도 너무 작았다.
놀랍게도 일본의 첫 인상은 작다는 것이었다.
혼다, 도요타, 닛산, 마쓰다, 스즈키 등 세계적인 자동차 브랜드를 가지고 있는 나라의 도로에서 굴러다니는 대부분의 차들이 대우 티코보다 작은 소형차들이었다.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이었다.
도로 또한 상상 외로 좁았다. 조금 과장을 하자면 도심의 큰 도로가 중국 도심의 골목길 정도사이즈였다. 그런데 도로에 차량이 많지 않고 노변에 주차한 차량이 없어서 통행에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자동차가 없는 대신 자전거가 많았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자전거 중에 배달하는 자전거와 어린 자녀들을 태운 자전거가 눈에 자주 띄었다.
집들도 작았다. 보통 가정들이 10평의 대지에 3층으로 13평 정도의 집을 짓는다고 하였다. 집집마다 다른 디자인과 다른 건자재로 자기 분수에 맞게 집을 지었으므로 10평의 집의 규모가 저절로 구분이 되었다.
작은 차, 작은 도로 그리고 작은 집 앞에서 큰 차, 큰 도로, 큰 집을 선호하는 한국인으로서 할 말이 없었다. 일본에서 본 작은 것들은 열등하다. 가난하다, 초라하다는 느낌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아름답다, 평화롭다, 자연에 가깝다는 느낌을 주었다.
두 번째 인상은 근검절약, 소박하다는 것이다.
주택가 골목에 들어가도 가옥의 색상이 흰색, 회색, 미색, 나무색, 검정색으로 자연에 가까워서 눈에 더 잘 띄는 집이 없다. 집의 가치는 집 앞의 나무, 꽃과 풀로 매겨지는 것 같았다.
놀라운 것은 보도블록이었다. 보도블록이 색깔이나 재료가 다른 부분들이 흔하였다. 아무리 보도블록이 오래되었어도 쓸 만하면 교체하지 않고 깨지거나 부서진 보도블록만 교체를 하기 때문에 도보가 모자이크 그림을 보는 듯하였다.
소박한 절약 정신은 지하철의 계단, 육교의 계단 심지어는 호텔의 계단과 복도에서 조차도 여지없이 드러났다.
어떤 육교는 원재료가 철판이었다. 계단 여러 개가 부식되었는데 그 자리에 나무판자를 대놓았다. 발을 디디면 무너질 것처럼 위험하게 보여서 ‘위험하다’고 말했더니 “안전진단을 통과한 육교”라고 하였다. 만약에 그 육교가 한국에 있으면 ‘철거하라!’는 시위 때문에 안전진단도 하지 않고 벌써 철거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손상된 부분만 파내어 콘크리트로 땜질한 호텔의 계단, 지하철의 계단, 보행로를 어디서나 볼 수 있었다. 지붕이나 바닥이나 전부를 통째로 교체한 곳은 어디에서도 보지 못하였다.
긴자에서 다양한 빌딩은 보았지만 시선을 사로잡을 만한 화려한 옷차림의 사람들을 보지 못하였다. 뛰어난 화장과 요란한 장신구를 걸친 사람도 보지 못하였다.
세계적인 명 브랜드의 대형 승용차가 도로의 제왕이 아니었다. 한국에서는 날마다 보는 삐까뻔쩍한 오토바이를 원산지인 일본에서 보름 동안 단 한 대도 보지 못하였다. 오사카에서 물건을 배달하는 작은 오토바이를 하루에 한두 대 정도 보았을 뿐이다.
자녀들을 자전거로 학교에 등교시키는 것은 보았지만 승용차로 등교시키는 것은 보지 못하였다. 대학교 캠퍼스도 작지만 대학생들이 자가용 승용차를 몰고 다니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라고 하였다. 루터교대학교 캠퍼스에 학생주차장이라고 쓰여 있는 자리에 차가 한 대도 없었다.
한국은 리 단위 마을에 까지 화려한 커피숍이 있는데 도쿄에서 커피숍이 찾기 힘들었다.
화려한 거리라고 하는 이이다바시지하철역 부근의 거리도 결코 한국의 대학가처럼 화려하지 않았다. 의상, 신발, 액세서리, 레스토랑, 커피숍, 차 전문점 등이 한국에 비해 소박하였다.
세 번째 거리와 시가지 인상이 심플하고 깨끗하다는 것이다.
거리 보도블록에 씹다가 함부로 뱉어버린 껌의 흔적이 없었다. 길바닥에 붙은 껌을 벗겨 내어도 그 자리가 검정 색으로 떡칠이 되어 그대로 남아 있는데 거리에 그런 검정 때가 보이지 않았다. 껌 때가 없는 것이 신기하였다. 물론 거리에서 담배꽁초나 플라스틱류의 쓰레기를 거의 보지 못하였다.
건물에는 건물이름을 제하고 다른 간판이 붙어 있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그래서일까? 건물이 아주 심플하고 깔끔하게 보였다. 일본의 건물에는 한국의 건물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그 흔한 간판들이 어디에도 없었다.
일본에서 30년 사신 어느 목사님의 안내로 오래된 고급 요정이 있다는 골목길에 갔는데 간판이 없고 나무가 아름답게 심어져 있는 오래된 일본식 기와집들만 있었다. 목사님의 설명에 의하면 오래되고 유명한 집일수록 간판이 작고 아예 간판을 달지 않는 집도 많다고 하였다.
그 흔한 도요다, 혼다, 닛산의 자동차 선전 광고를 한 번도 보지 못하였다. 미쓰이나 미쓰비시의 선전 광고도 없었다.
껌의 때와 쓰레기가 없고, 간판과 선전광고가 없으니 거리가 깨끗해 보일 수밖에! 밤의 거리에 네온사인조차도 별로 없어서 도시가 이래도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도시가 조용하였다.
네 번째 인상은 친절하다는 것이다.
여행사의 패키지 투어로 일본에 온 것이 아니므로 날마다 지하철과 도보(徒步)를 이용하였다.
비행기 안에서 기초 일본어를 공부한 것으로 사람들에게 지하철 도착역과 승차하는 곳과 출구 번호 등을 물으면서 다녔는데 한 목적지를 가면서 최소한 삼사십 번 정도 길을 물어야 했다. “스미마센”하고 다가가면 모든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인내심으로 손짓발짓하는 나의 말을 듣고 친절하게 안내해주었다. 어떤 사람들은 목적지까지 안내해주면서 “다노시 료꼬!”(즐거운 여행이 되세요.)라는 말을 해주었다.
지하철 직원들, 경찰관들, 역의 직원들, 청년들, 행인들, 여행객들에게 묻고 또 물으면서 마지막으로 JR순환선에 있는 텐노지역 부근의 통국사에 다녀오기 까지 나는 삼사백 여 명에 가까운 사람들에게 길을 물었다. 나는 그들의 친절한 안내로 계획했던 일정을 생각보다 편안히 순조롭게 무사히 잘 마쳤다.
일본인들의 몸에 밴 친절이 놀라워 어느 한국 분에게 말했더니 긍정하였다. 그러나 그뿐이고 절대로 속마음을 보여주지 않으므로 만나면 만날수록 바위를 대하는 기분이라고 하였다. 일본인들은 '남에게 친절해야 한다는 것'과 '남에게 피해를 끼치면 안 된다'는 의식이 투철한 나머지 '자기 기분, 희로애락의 감정을 표현하지 않으며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잘 드러내지 않아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일본을 탐구하기 위하여 입구에 서있는 초보자로서 단순하게 표피적으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몇 자 적어 보았다. 앞으로 지속적인 탐구를 통하여 일본인의 진면목을 보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하면서 26년째 일본에서 사역하신 선교사님의 말을 되새겨본다.
“일본은 과거가 현재와 미래를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죽은 것들이 산 자를 지배하는 나라지요.
사람들이 운명을 믿으며 순종해요.
자신의 분수를 알고 분수를 지키는 것이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속담 중에 “모난 돌이 정에 맞는다.”는 말이 있어요.
일본 사람들은 정에 맞지 않으려고 사람들의 눈에 띄는 일을 하지 않아요.
그래서 역사와 전통, 정부와 사회가 만들어 놓은 규격과 규칙에 그대로 순응합니다.
일본인들은 정부가 하는 일과 말을 백퍼센트 그대로 믿어요. 비판과 의심이 거의 없어요.
일본인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이지메”지요.
이지메는 ‘사회적 집단적인 소외, 왕따’인데 일본인들은 “이지메”를 당하지 않으려고 사람들이 자신에게 획일화, 탈 개성화, 순종과 침묵을 강요합니다. 그래서 일본에는 자기 강박에 의한 우울증 환자, 정신질환자가 많고 자포자기(自暴自棄)한 노숙자가 많다는 생각이 들어요.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조심하는 것이 지나쳐서 이웃과 담을 쌓고 살아 이웃이 있음에도 고독사하는 문제가 사회문제로 크게 대두되고 있지만 그것이 오랜 역사와 전통 속에서 형성된 것이어서 하루아침에 풀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가 악순환이 되어 사회 전반을 어둡게 하는 시대적 상황과 우울감이 있습니다.
어쨌든 일본이 우리 한국과 역사적으로 숙적이지만 죄악의 도시 소돔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니 죄가 죄인지 모릅니다.
부디 일본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
지금은 우리가 요나처럼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할 때 입니다”
2023년 7월 11일. 화요일. 인시
우담초라하니 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