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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앞에 선다는 것
마가복음 9:30~37
30 그 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31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32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33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34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35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36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반드시 통과해야 할 관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주관하시는 심판대입니다. 히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어윈 W. 루처는 『영원한 상급』이란 글에서 심판대 앞에 설 때 『아무것도 감출 수 없다. 당신이 했던 일을 좋게 만들 수 있는 더 이상의 기회는 없다. 당신을 대변해줄 변호인이 없다. 그리스도의 눈에 비춰진 모습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원하든 원치 않든 언젠가 우리가 직면해야 할 심판대의 모습입니다. 고후 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심판하시는 자리를 원에서는 ‘베마, βῆμα’라고 하는데 문자적으로 ‘베마’는 이긴 자에게 영광의 관을 씌워주거나 많은 사람에게 환영을 받을 수 있도록 높이 세워진 연단을 뜻합니다. 심판대에서 예수님께서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마 25:21) 하시는 말씀을 들을 사람들을 위해 준비된 영광이라면, 이와는 반대로 사람이 평생을 쌓은 악에 대하여 정죄하여 멸망의 자리에 이르게 하는 것도 이뤄지는 곳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심판대 앞에 ‘나타나’라고 말했을 때, ‘다 나타나게 되는’이라는 의미가 있는 헬라어 ‘파네로오, φανερόω’를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안에 든 것을 뒤집어 모두 다 꺼내놓는’ 모습을 묘사하는 데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행한 선악간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숨길 수 없이 드러나게 됨을 말씀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아야 심판의 날에 이뤄질 진노에서 건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육신으로 지낼 때 날마다 순간마다 복음 앞에 서서 자신을 점검하고 죄 사함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심판대에서 건짐을 받기 위함입니다. 오늘의 말씀에서 예수님은 복음 앞으로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이 땅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막9:30 “그 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과 함께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을 떠나셨을 때 많은 기적의 일들이 일어났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복음이 완성되기 전에는 그런 기적과 이사의 일들이 전파되는 것을 막으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막 9:31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전하고자 하는 핵심은 복음입니다. 이 복음의 내용이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입니다.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확실하게 믿고, 자신들의 입으로 그 사실을 분명하게 고백했습니다. 그런 그들이지만 예수님이 전하시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단순합니다.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지 않았기에 복음의 내용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삶 속에 적용할 수 없었습니다. 요 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은 하늘의 비밀을 말하는 영적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거듭나 영의 사람이 되기 전에는 복음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사심에 대하여 막9:32에서는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번 당신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깨닫고 적용하려는 의도보다는 오히려 제자들은 서로 누가 크냐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두고 논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세상을 다스리는 왕이 되신다면 누가 그다음 자리를 누가 차지할 것에 대하여 큰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복음을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면 세상의 것이 커 보이고 그것을 얻으려고 힘을 쓰게 됩니다. 복음 앞에 바르게 서는 것이 중요합니다. 복음을 바르게 인식하고 그 내용대로 적용하는 것이 심판을 이기고 승리하는 자의 반열에 들어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 앞에 선다는 것에 대하여 세 가지로 말씀드리려 합니다. 첫 번째는 전적인 헌신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늘의 속한 자로 세상의 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대가성 없는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 가지로 말씀을 드리며 은혜를 나누길 원합니다.
첫 번째 복음 앞에 바르게 서기 위하여 전적인 사랑의 헌신이 필요합니다.
복음의 시작은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에서 시작합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사람의 손에 의하여 죽임을 당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죽으신 이유에 대하여 롬 5:6-8에서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가장 큰 이유는 죄인인 우리를 살리시기 위함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였습니다. 누구도 죄의 문제에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죄는 큰 죄이든 작은 죄든 터럭 끝만 한 죄가 있으면 사망과 저주에 이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죄인으로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가치가 없고 쓸모없을 때 그런데도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복음의 의미를 내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리하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하지 않을지라도’라는 내용의 이야기는 다니엘서 3장에서 나온 말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예루살렘에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우상숭배에 젖어 살게 되자 하나님의 징계가 임하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느부갓네살 왕은 금 신상을 만들어 그것에 절하게 하여 숭배하게 했습니다. 금 신상에 절을 하지 않으면 풀무불에 들어가야 합니다. 이것을 알면서도 다니엘의 세 친구는 절대 금 신상에 절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과 그 세 명의 친구는 극렬히 타는 용광로에 버림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구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또한,“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는 왕의 신에게 절하지 아니하겠고, 왕이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겠습니다’며 단호한 의지를 보였습니다.
이 모습이 복음 앞에 선 성도가 가져야 자세입니다. 복음에 응답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생명을 주어 우리를 사랑하셨으므로 우리 역시 온전히 자신을 드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내가 기대하는 것이 이뤄지지 않더라도 하나님께 자신을 드려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복음 앞에 바르게 선다는 것은 하늘에 속한 자로 세상의 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죽음과 사심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죄에서 놓여 하늘에 속한 생명체로 변환됩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함께 부활의 영광을 누리게 된다는 약속입니다.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은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태도에 대하여 막 9:35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버리시고 낮고 낮은 피조물의 자리로 내려앉으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단 하나의 이유는 땅에 속한 성도를 하나님 나라에 이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것을 믿고 반응하려면 당연히 예수 님처럼 낮은 자리에 앉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천국은 교만한 자가 가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한 자가 가는 곳입니다. 천국은 사람을 압제하고 높은 자리에서 군림하는 자가 가는 곳이 아니라 종의 모습으로 섬기는 자가 가는 곳입니다.
세 번째 복음 앞에 바르게 선다는 것은 대가성 없는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사심에 나타난 복음에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형언할 수 없는 영원한 소망이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살리셔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예수님과 함께 누릴 영광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랑과 소망을 내가 믿는다면 내 안에서 이것이 흐르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막 9:36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고전 13:7에서 사랑에 대하여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는 것을 ‘아가페 αγάπη’라고 합니다. 이것은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무한하며 영원한 사랑을 말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이런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 사랑이 내게 흐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에게 사랑을 주는 것은 대가성이 없습니다. 아이를 섬기며 그 아이를 존귀하게 여겨 필요를 채워주고 보살피는 행위는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바른 모습입니다. 어린아이를 섬기듯 이웃을 향하여 당장 어떤 보상이 따르지 않더라도 아낌없이 주는 것이 사랑의 실천입니다. 마 5: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웃이 내게 빌리고자 하면 돌려주지 않을지라도 상처를 받지 않고 원망하지 않을 정도라면 빌려주십시오! 설령 빌려준 것을 되돌려 받지 않더라도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복음 앞에 서 있는 사람의 참 모습입니다. 전 11:1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참 무모하게 보입니다. 떡을 물 위에 던지면 물고기 밥이 되거나 물에 흐트러져 없어질 뿐입니다. 이웃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보상을 바라지 않고 행하는 사랑의 실천이 때로는 허무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바르게 인식하고 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헛되게 보이는 사랑을 실천합니다. 사람에게는 돌려받을 수 없으나 우리를 죽음의 저주에서 건지신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를 보시고 상급으로 함께 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복음 앞에 서서 복음의 내용을 믿고 절대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반응하여 이 땅에서 낮은 자리에 머물러 있더라도 기뻐하며 사랑을 하다가 실망하지 않고 인내의 경주를 할 때 주님의 심판대에 설 때 마음에 거리낌이 없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대가 두렵지 않은 것은 복음의 능력이 내 안에서 왕 노릇 하였고, 성령의 동행이 있었기에 그렇습니다.
주님의 심판대에서 육신으로 있을 때 행한 모든 것이 죄악으로 드러난 사람에게는 두렵고 떨리는 무서운 정죄에 의하여 지옥의 형벌로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날마다 복음 앞에 바르게 선 사람에게는 주님의 심판대는 칭찬과 상급이 준비된 영광스런 자리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능력으로 모든 죄를 사라지고 전혀 기억하지 못한 선한 행위에 넘치도록 안겨주는 상으로 보답하기에 그러합니다. 마 10: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보잘것없는 것이라 기억에도 남아있지 않는 것을 주님은 기억하시고 상으로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심판이 영광과 설레는 칭찬과 상급이 순간을 맞이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