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공군 제5차 공세(4월, 5월)와 유엔군의 반격
제 1 절 개 요( 전장상황 요약)
중공군의 제5차 공세와 재반격은 유엔군이 중공군의 제4차 공세를 저지하고, 반격작전으로 전환하여 철원-평강-김화 지역으로 공격을 게속 중이던 1951년 4월 22일부터 1951년 6월 초까지의 기간 중에 공산군측이 3개 병단 15개군(군단) 47개 사단 규모의 병력을 투입하여 두 차례에 걸쳐 대규모 공세를 실시하고, 이에 맞서 국군 과 유엔군은 6개 군단 21개 사단을 동원하여 공산군측의 공격을 저지하고 재반격을 실시한 6.25전쟁 기간중의 최대규모의 격돌을 의미한다.
중공군의 춘계공세로 불리는 제5차 공세는 계속되는 유엔군의 반격작전에 맞서 중공군이 다시 서울을 점령함으로서 유엔군의 전쟁 의지를 포기하도록 하는 한편, 휴전협상에서 유리한 입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하에 실시한 대규모 작전이다.
제5차 공세 기간 중에 중공군이 주공을, 북한군이 조공을 각각 담당하였다. 공산군의 대표적인 전술은 주로 돌파작전과 원거리 양익 포위작전이었으며 적극적인 게릴라전을 수행하기도 했다. 그들은 서부전선과 동부전섡에서 인해전술을 통해 광대한 정면을 돌파하는 공세적 특징을지니고 있다.
제5차 공세를 통해 공산군은 1951.4.22~30일 까지의 4월 공세시는 서울 점령을 목표로 중서부에 주력을 집중시켜 서울 북방의 구파발에서부터 홍천을 연결하는 선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1951.16~22일까지 실시된 5월 공세시 에는 국군 주력을섬멸하는데 목표를 두고 동부전선에 주력을 집중시켜 홍천-하진부리-강릉을 연하는 선에 대규모의 돌파구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이 참전하여 최대규모이며 최후의 공세작전이었던 제5차 공세는 서울을 반드시 사수한다는 국군과 유엔군의 확고한 의지에 의하여 서울-홍천-하진부리-양양을 연하는 선 이북에서 저지된다.
이어진 유엔군의 반격으로 6월 중순 경 임진강 하구-연천-철원-화천-간성을 연하는 선의 북방에 새로운 방어선이 형성되어 전쟁 이전의 38도선 부근의 회귀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공군 지도부가 지구전과 평화회담을 통해 전쟁을 마무리 한다는 새로운 전쟁지도 방침을 들고 나오게 되고, 유엔군도 전쟁을 유엔기구를 통해 적절한 휴전협정으로 적대행위를 종결하는 목표르르설정하게 되면서 전쟁 1년 만에 "일면 전투와 일면 협상"이라는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한다.
제 2 절 중공군의 4월 공세와 유엔군의 방어
1 . 개 요
미 행정부와 합참은 '51년 1월 하순 무렵 국군과 유엔군이 반격을 통해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함에 따라 한국ㄹ 문제를 정치와 군사의 두 가지 노선, 즉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통일 독립국가의 건설, 군사적 측면에서는 침략격퇴와 평화회복을 통해 해결한다는 전쟁지도전략을 수립하였다. 새로운 전쟁 지도전략 개념은 군사적으로 전쟁 전의 현상을 확보한 후 휴전에 의거 전쟁을 해결하며, 통일 국가 수립을 이후 정치적으로 해결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미 제8군사령관 밴플리트 중장은 38도선을 전술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임진강 남안-화천저수지-동해안의 양양을 연결하는 캔사스선 점렴을 계획하였다. 이후 계획대로 '51.4월 초 캔사스선을 확보한 미 제8군은 중부전선의요충지역인 철원-평강-김화 일대의 적이 병력과 보급품을 집결시켜 공격준비에 나서자, 이를 저지할 목적으로 다시 연천-고대산-화천저수지를연하는 와이오밍선에 대한 공격을 지시하였다. 그너나 목표선을 향해 진격을 개시한 미 제1군단과 제9군단이 4월 22일 오후 중공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진출이 저지되자, 미 제8군 사령관은 예하 부대에 공격을 중지하고 신속히 바어태세로 전환하도록 명령하였다.
반면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에 후퇴를 거듭하돈 공산군은 북한군 제1군다능ㄹ 추가로 편입받은 제19병단을 임진강 북쪽의 구하리-덕사리 선, 제3병단을 삭령-신탄리 선, 제9병단을 철원-감화 선에 배치하였다. 북한군은 제3군단과 제5군단을 양구-원통 선에 배치하였다.
조중연합사령관 팽덕회는 대병력으로 서울을 포위하여 유엔군 주력을 격멸하고, 서울을 탈환하여 모택동에게 노동절(5.1일) 선물로 바치겠다고 호언하고. 와이오밍선에 대한 공격으로 중동부 전선의 돌출된 유엔군의 약점을 간파하였다.
중공군과 북한군은 4월 22일 해가 질무렵 제5차 공세, 이른바 4월 공세를 개시한다. 이때 주공인 제19병단의 3개 군단은 임진강 부근, 제3병닺ㄴ 3개 군단은 연천 북쪽, 제9병단 5개 군단은 김회 부근에서 미 제1군단의 좌우및 정면을공격하였다. 그리고 조공인 북한군 제3군단과 5군단은 양구 남쪽의 미 제10군단과 인제 부근의 국군 제3군단을 공격하였다.
고산군의 4월 공세에 직면한 유엔군은 서부 지역의 국군 제1사단이 파평산일대에서, 영국군 제29여단이 설마리 이대에서 최대의 혈전을 벌였고, 중부지역의 국군 제6사단이 사창리 일대에서 붕괴되는대참사를 겪었다. 공산군의 4월 공세는 유엔군의 강력한 방어와 중공군의 치명적이 한계였던 보급상의 제한 등으로 공세개시 약 일주일만인 5월 초에 종료됨으로써 공산군이 최초 의도했던 서울을 탈취하고 유엔군을 격멸한다는 작전목표는 실패했다.
2. 상황평가 및 의도
가. 공산군측 상황 평가
(1) 작전 기도 및 방침
제3차 및 제4차 공세에서 전쟁 수행의 어려움과 작전 지속성의 중요성을 인식한 중공군 수뇌부는 '51. 3월 말경 "장기전을 준비하되 최대한 단기전으로 군사작전을 실시한다"는 전쟁 수행 방침을 확정한다. 또한 우세한 병력을 집중하여 적을 각개 섬멸한다는 원칙에 따라 공세시 충분한 병력으로 전진하는 국군과 유엔군을 붖할함과 동시에 전술적으로는 대집단을 다시 수개의 소집단으로 분할하여 우세한 병력과 화력을 집중함으로써 신속히 섬멸한다는 작전지도 방침을 구체화 하였다.
이러한 방침 하에 국군과 유엔군이 38도선 이북지역으로 재반격을 단행하고, 중공군 증원 부대기 한반도를 향헤 이동을 개시하자, 중공군 지휘부는 대대적인 공세로 국군과 유엔의 진격을 저지함은 물론 전장상황을 전환시키는 문제를검토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국군과 유엔군이 동부 산악지대를 점령한 후서해안 진남포로 상륙한 병력과 연합하여 안주-원산선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출할 것으로 판단하고 이렇게 될 경우 보급선이 단절되는 위기상황이 초래하기 때문에 유엔군의 작전기도를 분쇄하고 신속하애 작전 주도권을 회보하기 위해 제5차 공세를 실시하기로 결정한다.
이렇게 하여 국군과 유엔군을 유리한 지형으로 유인해 운동전으로 저지하는 한편, 시간을 획득하기로 하였다.
(2) 작전계획
제5차 공세를 단행을 결정한 중공군 지휘부는 증원부대의 집결이 완룓되지 않은 점을 고려하여 유엔군이 김화=문등리-간성을 연하는 선까지 진출하며 공세를 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공세 시기는 전황에 따라 결정하기로 하고, 유엔군의 진출 속도에 따라 4월 20일 무렵 또는 5월초순에 공세를 개시하기로 하였다.
이들은 서부전선에 주공을 지향하고, 동부전선의 인제지역에서 보조적인 작전을 전개한다는 기존의 계획에 따라 구체적인 작전계획을 마련하였다.
유엔군이 38도선 북쪽으로 반격작전을 펼치는 동안 중공군은 2월 공세의 실패로 실추된 위신을 만회하고 다시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할 목적으로 대규모 공격작전을 준비하였다.
중공군 사령부는 '51년 초에 증원부대로 압록강을 건너 신의주로 들어온 제19병단(제63, 제64, 제65군)을 임진강 북쪽의 구하리-덕사리 선에, 제3병단(제12, 제15, 제60군)을삭령-신탄리 선에, 지난번 장진호 전투에서 피해를 입고 함흥에서 재정비를 완료한 제9병단(제20, 제26, 제27군)을 중부전선의 철원-김화선에 배치하였다.
그리고 북한군 제3, 5군단을 양구-원통 선에 배치하여 조공으로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3군단을 공격토록 하였다.
적은 이 기간중에 화력과 기동력을 보강하기 위해 야포, 장갑차, 차량 등을 대폭 보강하고 산악지대에서의 기동력을 살리기 위해 말을 수송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특히 중공군은 공군을 투입하기 위하여 신의주, 의주, 신안주, 평양, 원산, 연포 등에 비행장을 건설했으나 유엔군의 폭격으로 파괴되어 항공기를 춘계공세에 투입할 수 없게 되었다.
북한군 제1군단(제8, 19, 47사단)은 개성과 장단의 국군과 유엔군을 섬멸한 후 주력은 임진강으로 도하, 문산-고양-서울을 점령한 다음 방어임무로 전환하며 중공군 제19병단에 작전지휘를 받도록 했다.
중공군 제19병단(제63, 64, 65군)은 신속히 임진강 서안의 국군 제1사단 방어선을 돌파하여 1개 군이 고랑포리 부근에서 임진강을 도하한 후 의정부를 우회하여 국군 과 유엔군의 퇴로 및 증원을 차단하고 , 주력은 감악산 일대의 영 제29여단을 섬멸한 후 동두천-왕방산- 포천방향으로 진격한다.
중공군 제9병단(제20, 26, 27, 39, 40군)은 신속히 영국군 제27여단을 섬멸하고 일부는 미 제24사단을 견제해 영 제27여단과의 연결을 차단한 후 기산리-만세교리-포천으로 진격하여 제19병단 및 제3병단과 협동으로 미 제24사와 미 제25사단을 섬멸한다
중공군 제40군은 가평방향으로 전진하여 국군 제6사단을 섬멸한 후 춘천-가평간 도로를 차단하여 동부전선과 서부전선의 연결을 차단한다.
중공군 제39군은 일부 병력이 화천 이북에서 국군과 유엔군을 견제하는 한편 주력은 논미리-원천리 방향으로 돌격하여 미 제1기병사단과 미 제1해병사단의 서쪽 증원을 차단하여 병단의 좌측익 보장한다.
중공군 제3병단(제12, 제15, 60군)은 연천의 미 제3사단과 터키여단을 섬멸한 후 초성리-종현산으로 진격하여 제19병단 및 제9병단과 협동으로 미 제24사단과 미 제25사단을 섬멸한다
조공으로 동부전선을 담당한 북한군 제3군단과 제5군단은 일부 병력이 양구 이북에서 중공군 제39군과 연합해 미 제2사단과 국군 제7사단을 적극 견제하고, 주력은 국군 제3사단과 제5사단의 전투지경선인 서호리와 인제를 공격하여 국군 1~2개 연대를 섬멸한 후 평창-강릉 방면으로 진격한다. 아울러 북한군 제2군단은 회양일대에서 머물며 일부가 해안경계를 담당하여 통천-양양 일대의 국군과 유엔군의 상륙을 저지하도록 하였다.
. 나. 유엔군측 상황 평가 및 의도
(1) 작전 목표 및 기도
유엔군은 중공군 제3차 공세로(1.4후퇴) 서울을 상실하였으나, 3월 중순 1.4후퇴로 상실한 서울을 재수복하고 4월 초에 주력부대들이 38도선 북쪽의 임진강-전곡-화천저수지-양양을 연하는 이른비 캔사스선에 진출하였다. 이로써 전쟁전의 영토를 회복하고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확보하게된 유엔군은 휴전을 모색하기 위한 전략에 따라 이 선에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게 된다.
이로써 미 제1군단(국군 제1사, 미 제3, 제24, 제25, 영 제29여, 터키 여단)은 임진강-한탄강 선에, 중부전선의 미 제9군단(국군제6사, 미 제1해병사, 영 제27여)은 석룡산-유촌리 선에, 중동부 전선의 미 제10군단(국군 제5사, 미 제2사, 미 제7사)은 소양강 북쪽에 주저항선을 편성하였다. 그리고 국군이 담당한 동부전선은 태백산맥을 경계로 제3군단(제3, 제7사)이 내륙 산악지역에, 제1군단(수도사단, 제9사)은 동해안 지역에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당시에 미 제8군 예비인 미 제1기병사단은 수도권 지역으로 진입이 용이토록 금곡 부근에 제187공수연대는 대구에 집결하여 대기하고 있었다. 육본 직할인 제8사단은 대전, 광주, 진주 부근에서, 제2사단은 춘양, 제천, 안동 부근에서 연대별로 후방지역 공비 토벌작전을 실시하고 있었다.
유엔군이 방어선 보강에 주력하는 동안 공산군도 38도선 북쪽에 방어진지를 편성하는 한편 중부전선의 요충지인 철의 삼각지대라 명명된 평강, 철원, 김화 일대에 병력과 보급품이 집중되고 있고 후방지역에 방어진지를 구축하지 않는 점등을 고려 공격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2) 작전계획
이에 미 제8군사령관 벤플리트 중장은 중부전선의 방어 종심을 깊게 하고 적의 공세준비를 차단할 목적으로 철원-김화를 통제할 수 있는 연천-고대산-와수리-화천저수지를 연하는 새로운 통제선인"와이오밍선"을 설정하고 미 제1군단과 제9군단이 이 선을 점령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동부전선에 배치된 적을 고착 견제하여 중부전선으로 유입을 차단하기 위해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3군단, 제1군단도 4월 24일부터 양구-가전리-송도진리를 연하는 "알라바마선"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이 계획에 의거 제1단계 작전으로 미 제1군단 예하 3개 사단(미 제3, 24, 25사단)과 제9군단의 영 27여단이 4월 11일 캔사스선 북쪽 약 20km에 위치한 금학산-광덕산-백운산을 연하는 우타선을 목표로 공격하여 적의 포격과 강우로 다소 고전하였으나 20일 우타선을 점령하였다.
이에 미 제1군단(미 제25, 제24사)과 제9군단(국군 제6, 미 제1해병사단)은 21일 항공 및 포병화력의 엄호하에 최종 목표선인 와이오밍선을 향해 공격을 개시한다.
그러나 이때 적의 저항이 강화되고 체포된 포로들의 진술이 22일 야간에 중공군의 대공세가 개시될 것이라 진술하였다. 또한 도처에서 진출이 돈좌되자 제8군 사령관은 공격을 중지하고 신속히 방어태세로 전환토록 명령한다.
3. 전투 경과
가. 서울 북방의 전투
서부전선을 담당한 미 제1군단은 좌전방 김포반도에 해병 제5독립대대(국군 제1사단에 배속), 임진강 남쪽의 오금리-마지리에 국군 제1사단, 마지리-도감포에 영 제29여단( 미 제3사단 배속), 도감포-군자산에 미 제3사를 배치하였다.
이때 군단 중앙과 우전방에 터키여단(미 제25사 배속), 미 제25사, 미 제24사단을 각각 배치하여 미 제9군단과 함께 와이오밍선을 공ㄹ격하게 된다. 와이오밍선으로 공격 중에 돈좌되어 급편방아로 전환하였다. 터키여단은 대광리 남쪽 고지군에, 미 제25사단은 금학산-장흥리 일대에, 미 제24사단은 신술리-문혜리에 각각 방어진지를편성하고 군단의 우인접으로 방화동-백적산에 진출한 미 제9군단의 좌전방 국군 제6사단과 연결하였다.
'51. 4. 22일 어둠이 깔리자 중공군 주력인 제19병단의 공격이 개시되어 군단은 축차적으로 적에게 출혈을 강요하면서 캔사스선, 델타선, 골든선으로 철수작전을 펼치게 된다.
(1) 설마리-금굴산(194) 전투('51.4.22~4.23)
영 제29여단은 1개 대대를 감악산 좌전방 적성 부근에, 1개 대대를 감악산 북쪽에, 그리고 배속받은 벨기에 대대를 금굴산에 배치하고 1개 대대를 봉암리에 예비로 확보하여 임진강을 방어하고 있었다.
설마리-금굴산 전투('51.4.22-25)
중60군단 적188사
백한 마전리 금굴산 벨기에 대대 전곡
111 Y중 도감포
적187사
적 149
257
가여울
153 X중 장암리
260 푸대대
중성산 A중 적성 144 B중 탄광촌 398 엘대대
182 D중 송산리
영29여=미65연
마지리 적188사 푸대대
235 314 글대대
국1-12-3대대= 영29여 357 감악산 마차산
동두천
414 황방리 안흥리
사기막
적189사 구암리 영29여
366 349 신산리
[설마리 전투]
국군 제1사단의 우인접 영 제29여단은 마지리-도감포 간 11KM의 광정면을 방어하고 있었다. 4월 22일 아침부터 임진강 주변에서 정찰대와 중공군의 접촉이 빈번하였다.
이 날은 영국인들이 신성시 여기는 "성 조지의 날" 전야로서 행사준비에 바빴다. 바로 이런 취약점을 이용하여 22:00시에 적은 1개 연대 규모로 도하공격을 개시하였다. 특히 도하지점인 가여울의 통제가 가능한 중산산의 A중대는 중대장이 전사하는 ㄷ우 최악의 상황에서 23일 임진강 남쪽에 교두보를 허용하고 말았다.
결국 글로스터 대대가 포위되고 이를 구출하기 위해 필리핀 제10대대와 영 제8전차대대 C중대의 보전협동 작전을 실시하였으나 도로 노폭이 협소하여 전차의 기동이 제한 되는 등의 악순환 속에서 대대는 각자 흩어져 탈출하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하였다. 이런 와중에 남쪽으로 철수하는 부대원은 대부분 포로가 되었으나 북으로 철수한 D중대는 아군의 국군 제1사단과 합류하여 복귀하게 된다.
한편 여단 주력도 철수과정에 전차에 200여 명의 부상자를 분승한 채 중공군의 포위망을 돌파하여 봉암리로 철수하게 되는데 포탑을 회전시킬 수 없을 정도로 부상자들이 탑승하여 화력이나 기동성을 발휘하지 못하면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게 된다.
하지만 중공군을 3일간이나 고착 견제하여 군단 주력부대의 안전한 철수를 보장하고 서울 방어의 준비 시간을 획득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결국 영 제29여단의 글로스터 대대는 D중대를 제외하고 대대가 포로가 되고 전체 병력의 1/3이 손실을 입게 된다
[금굴산 전투]
이곳 전투는 22일 자정 무렵부터 시작되어 교량을 점령한 후에 마포리 동남쪽이 257고지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철수로가 차단되어 우전방의 미 제3사단이 우타선에서 전곡으로 철수할 때까지 진지를 사수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금굴산에 고립된 벨기에 부대를 구출하기 위해 제3사단의 예비인 제7연대에서 1개 보병중대와 전차 2개 소대를 지원하여 전차 1개 소대가 진지에 진입하는데 성공하였다. 미 제3사단의 헬기로 부상병을 후송하는 등의 유기적인 방어작전으로 진지를 고수하며 동쪽의 임진강변의 15m 천연장벽을 넘고 차량화 부대는 공중에서 근접 항공지원으로 탈출하여 전곡에 집결 후에 다시 차량으로 동두천을 경유하여 봉암리 일대로 재배치 된다.
(2) 파평산 전투
중공군 64군 백학
백학
대덕산
고랑포 가여울
개성
판문점 장좌리 중성산 적성
백학산 국1사=영29여
덕현리 마지리
북1군단 장파리
청운동
일월봉 파평산496
마산리 11연=12연 금곡리
영평산
문산 법원리 덕정
강정리
임진강
오금리 대전차대대 =11연 봉서산
월롱산
금촌
미 제1군단의 좌전방 국군 제1사단은 좌전방 문산 복쪽의 고지군에 제11연대, 우전방 파평산 일대에 제12연대, 그리고 제15연대를 사단 예비로 대고령일대에 각각 배치하였다.
4월 22일 20:00시를 전후하여 중공군 제64군이 일부 병력으로 임진강 북쪽으로 진출한 다음 사단 수색대의 퇴로를 차단한 후 포위공격을 기도하였다. 좌전방 제11연대 지역은 강폭이 넓고 수심이 깊어 도하공격에 불리하므로 우전방 제12연대의 석포, 자지포, 석교 일대에서 도하지점을 확보하는데 주력하였다.
23일 02:30를 전후하여 조수의 영향으로 강물의 수위가 낮아진 점을 이용하여 2개 중대로 도하공격을 감행하였다.
이 무렵 우인접 중성산의 영 제29여단을 공격한 중공군이 제12연대의 우측방 돌파를 시도했으나 연대는 이들을 마지리 벌판으로 유인하여 살상지대 화력을 집중하여 3,000여 명의 중공군을 사살하며 적의 예봉을 꺽었다.
이에 중공군도 임진강변에서 한판 승부를 결정하기 위하여 임진강 도하와 정면에서 파평산을 공격하여 국군 제1사단을 분리 격파하려 하였다. 그러나 날이 새면서 아군의 항공폭격과 포병의 집중 사격에 좌측으로 침투한 부대는 영평산과 주변고지에 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결국 제11연대와 제15연대의 보전협동 공격으로 돌파구를 회복하였다.
그러나 우전방 제12연대는 파평산과 그 동쪽의 주저항선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이렇게 되어 사단의 주저항선에 적의 돌파구가 형성되었다.
반면 중공군은 제63, 64군의 임진강 돌파가 국군 제1사단과 영 제29여단의 분전으로 지연되자 예성강변에서 재편성을 완료한 북한군 제1군단을 임진강으로 진출시켰다.
북한군 제1군단(제8, 19, 47사)은 짙은 안개를 이용하여 선두인 제8사단이 임진강을 철교로 도하하여 제11연대 좌전방을 제47사단의 1개 연대는 청운동에서 도하하여 우전방을 공격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우전방 제12연대 우측에서 방어중인 영 제29여단 글로스터 대대가 중성산이 돌파되면서 D중대가 철수를 하게 되고 그 인원의 상당수가 제12연대쪽으로 유입되면서 중공군이 이 틈을 이용하여 연대를 포위섬멸 하려 하자 금곡리로 철수하게 된다.
사단은 25일 돌파구를 회복하기 위해 공격을 하였으나 실패하고 금촌과 문산사이의 월롱산-부곡리-삼방리를 연하는 델타선으로 철수하였다.
(3) 철원. 연천-동두천. 포천 지연전('51. 4.22~4.25)
철원 중공군 27군
중공 12군
신탄리 중공군 60군 와이오밍선
대광리 금학산
미24연 미27연
중공군 15군 장흥 미5연 신술리 국19연
터어키여단
지장봉 문혜리 미19연
필리핀대대 미1군단=미9군단
장승천
율동 나미현 광덕산
군자산
연천 운천
미3사=미25사
미25사=미24사
전곡 금곡 구정동
캔사스선
장암
영평 *국망봉
* 1010
초성리 만세교 일동
마차산
동두천 왕방산 포천 운악산
칠봉산
델타산
가납리 덕정 수원산 신팔리
연천 동쪽에서 철원-김화를 목표로 공격하던 미 제1군단의 미 제25사(터키여단 배속)과 미 제24사단이 4월 22일 중공군이 완강한 저항으로 공격이 돈좌되자 좌전방 터키여단을 대광리 남쪽 고지군에, 중앙의 미 제25사는 철원 남쪽의 금학산 일대에, 우전방 미 제24사는 문혜리-신술리에 급편방어 진지를 편성하였다. 그리고 터키여단의 좌인접에는 미 제 3사단에 배속된 필리핀 제10대대가 우타선을 점령하고 있었다.
중공군이 4월 22일 19:00시에 터키여단이 점령하고 있는 대광리 남쪽의 장승천 일대에 공격준비사격을 시작하여 주요 철수로상의 나미현을 차단함으로써 큰 피해를 입었고 율동 부근에 배치된 필리핀 제10대대 지역에서 공방전이 계속되는 과정에 미 제9군단의 사창리지역에 이어 제1군단의 감악산 지역도 부분 돌파되어 미 제8군사령관은 이들 부대를 임진강-전곡-화천저수지로 연결되는 캔사스선으로 철수하도록 명령했다.
중공군의 전사에 의하면 제9병단이 유엔군을 추격하여 영평, 금곡, 구정동 일대에서 5개 중대를 포위 했으나 유엔군의 항공기 출현에 위협을 당하여 실패하였다고 한다. 당시에 미 제56공군은 신정공세시 주력부대가 일본으로 이동하여 한국엔 3개 비행단과 미 제1해병비행단, 그리고 다수의 함재기들이 있었으나 소요에는 절대적으로 부족하였다. 하지만 '51. 4. 23일 전례없이 340회의 출격을 하여 미 제1군단의 철수를 지원하였다.
중공군의 계속적인 압력으로 미 제1군단과 미 제9군단은 성동리-노고산-덕정-포천을 잇는 델타선으로 철수하게 된다. 이때 우전방 미 제24사단을 엄호하기 위해 투입된 제8유격중대가 국망봉 아래 1010고지일대에서 중공군에 포위 되었으나 미 제24사단은 전차 5대를 투입하려 부상자 65명을 구출하여 마지막으로 철수 하였다.
(4) 유해발굴을 위한 탐사 및 탐문결과
(가) 금굴산 남겨진 영국군의 야외 화장터와 전투흔적(수많은 전투화), 염수골 영구군 유해
연천 미산면 동이리에 금굴산(194)이 있고, 이곳에 영국군 화장터가 남아 있다. 당시 벨기에 대대가 금굴산에서 방어전투를 수행하는 동안, 임진강 남안의 영29여단의 글로스터 대대가 감악산 서북방향 314고지일대에서 방어진지를 편성하여 중공군의 야간공격에 대비하고 있던 시기였다. 설마리지역의 300~100고지군의 낮은 구릉지대에서 중공군에 4면이 포위되어 중공군의 압박이 가해지면서 도감포 하단(금굴산 남쪽)의 257고지가 피탈되어 역습을 실시하였으나 실패하고 이에 미 제3사단장은 예비인 제7-1대대를 투입했으나 이것 마저도 실패하자 벨기에 대대에 철수명령을 하달한다.
4월 22일, 고립된 상황에서 17시 30분부터 항공 및 전차의 엄호하에 차량제대는 교량지역을 돌파하고, 병력은 동쪽의 임진강을 도섭하여 15m의 천연단애를 기어 넘는 방식으로 철수 18시 30분에 남계리의 미 제3-65연대 진지로 철수하는데 성공한다.
지금도 산 정상 지맥상 능선에는 개인호나 교통호가 그물망처럼 구축되어 흔적이 남아있다. 전쟁 이후에 일정기간 영국군이 이 일대에 주둔한 적이 있다는 지역주민들의 제보에 우린 정밀탐사를 실시한 결과 야산 전체에 유품(전투화, 탄피, 탄창 수통 등)이 여기저기 흙속에 그대로 남아 아 있음을 확인하였다.
바로 마전리에서 동이리로 들어서는 길 바로 옆에 당시 영국군의 화장터가 자리잡고 있다. 대부분 페허가 되었지만 형태만은 그대로 남았다. 영국군은 1.4후퇴 당시는 고양 일영터널 부근에서 대량 피해를 입었고, 이어서 중공군 4월 공세시 설마리에서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되는데 아마도 이곳의 시설은 설마리 전투간 발생한 전사자들의 화장을 실시하거나 아니면 가매장 후 재반격간 다시 이곳으로 진입하면서 그 유해들을발굴하여 처리했던지 어떤 경우든 영국군을 한국 현지에서 화장을 한 것은 사실인 것이다.
우린 이지역에서 제보를 받아 백학 염수골에서 영국군 추정 유해 1구를 발굴하게 된다. 당시에 이곳 염수골에 중공군이 통제하는 포로 수용소가 있었고, 대부분의 포로(400여 명)가 영국군이었으며 미군도 일부 있었다고 한다. 중공군은 집집마다 포로를 분산시켜 관리하면서 낮에는 절대로 밖에 못나가게 하고 야밤에만 일부 용변등을 위해 움직이게 했다고 한다.
하지만 영국군 사상은 "영웅은 현장에 남겨진다"는 가치아래 전쟁터에 있어야 한다는 논리로 현장에 다시 모시든지 아니면 부산 유엔군 묘지에 안장을 한구군에서 알아서 하라는 것이 내부 방침이라 한다. 물론 유해의 특징이 아시아계 두개골 모습인 면도 작용했으니라 본다. 그렂나 당시 영국군은 백인은 별로 적었고 흑인부터 여러인종이 혼합편성된 군대였다.
(나) 임진강 단애(수직절벽)를 넘어 죽기살기로 철수하는 군인(지역주민 제보)
벨기에 군대가 동쪽의 임진강을 도섭하여 탈출하는 광경은 한편의 영화같았다고 한다.전곡의 남계리나 황지리로 올라서기 위해서는임진강의 15m수식 단애를 기어올라야 한다. 뒤에서는 중공군이 따발총을 갈기며 쫒아오니 죽기살기로 올라서야 했다. 누가 서커스를 해본 것도 아니지만 바로 이심전심으로 목마를 태워 올리고 오리고 해서 먼저 올라간 전우가 손으로 잡아서 올리는데 그러다 어느 구역에서는 무넞져서 다치지만 바로 일어서 또 목마를 만들어 올리고 올리고 해서 거짓말 처럼 몇명 피해를 제외하고 모두가 철수에 성공하게 된다.
(다) 마지리 벌판에 흩어진 중공군 시신들
국군 제1사단이 방어한 파평산 지역은 제1사단의 완강한 저항ㅇ으로 정면 돌파가 불가능해지자 중공군은 제192사단을 파평산 정면에 투입하고 제190사단을 제11연대와 제12연대의 전투지경선인 두포리-마산리-법원리 축선으로 진출시켜 제1사단의 전선을 분리한 후 연결작전으로 파평산의 제12연대를 포위 격멸하고자 하였다. 특히 중공군 제190사단 제568연대는 24일 새벽 전투에서 국군 제11연대와 제12연대의 전투지경선을 돌파해 4km를 진출하기도 한다. 이들은 날이 밝은 후 개시된 유엔군의 항공폭격과 집중적인 포병사격에 의해 큰 피해를 입고 영평산(276) 과 주변고지에 방어진지를 편성한다.
이렇게 되자 국군 제1사단은 항공지원과 포병의 엄호하에 전차 1개 중대와 제15연대 2개대대로 전투지경선에 형성된 돌파구를 회복하기 위해 역습을 개시한다. 이렇게 되자 중공군은 역포위를 우려하여 서둘러 철수함으로써 제15연댄즌 4월 24일 17시에 돌파구를 완전 회복하였다.
그러나 우전방 제12연대는 중공군의 집요한 파상공격에 사단방어의 요충인 파평산과 그 동쪽의 주저항선에서 물러나 돌파구가 형성되었다. 이에 사단은 이에 대한 역습을 준비하게 되는데 공산군도 이 지역에서의 공격을 지원하기 위하여 예성강변에서 재편성을 완료한 북한군 제1군단을 임진강변으로 진출시켰다.
이렇게 하여 국군 제1-11연대 지역으로 투입되어 일진일퇴의 혈전을 펼치게 되었다. 새벽의 안개가 사라지고 기상이 호전되자 근접 항공지원과 포병화력으로 북한군은 공격기세가 둔화된다.
한편 중앙으로 진출하려는 중공군과의 전투는 제12연대와 제15연대가 돌파구 회복에 별다른진전이 없는 가운데 파평산 동쪽의 북암리로 진출해 중공군과 대치하던 제12-3대대가 설마리의 영국군이 중공군의 포위망을 탈출하고 있음을 통보받고 미 전차중대와 함께 보전 협동으로 구출작전을 펼쳐 를로스터 대대 D중대원 40명을 구출하였다. 그러나 이러는 상황에 중공군이 제3대대의우측방을 우회하여 연대의 퇴로차단을 기도함으로써 제12연대는 부득이하게 금곡리로 철수하였다.
중공군 전사에도 중공군 제64군이 장파리, 고사동 일대를 점령했으나, 미타사 북쪽 에서 국군 제1사단의 저지를 받아 아군의 주진지를 신속히 돌파하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바로 마지리가 파평산(496)과 감악산(675) 사이에 있는 평야지대다. 마지리 우측이 설마리고 북방이 바로 임진강이며 도섭이 가능한 가월리와 두지리가 있다. 마지리 180고지 (지금 사격장 위치)를 올라서서 남쪽으로 내딛다 좌우측으로 올라서면 파평산과 감악산이고 남쪽으로 계속 내려서면 법원리-고양, 양주-의정부로 치닫게 되는 단거리 접근로였다. 미타사는 파평산 정상 부근에 위치했었다.
북암리는 지금의 웅담리(파평면 웅담리)에 있으며 북쪽에 남산 (211)이고 그 바로 우측에 만월봉과 무건리(포사격장), 그 북쪽이 180고지이다. 그러니 이곳을 점령하려 중공군은 우리 1개 사단이 방어하는 지역에 거의 6개 사단을 투입(북한군 제1군단 제외), 신속히 국군을 격멸하고 법원리 양주 방향으로 진출하여 좌우측에서 미 제1군단과 미제9군단을 포위섬렬하려 했다.
여기에 미군은 가용한 근접항공지원과 무지막지한 포병화력을 퍼부어 허허벌판(아직 농사가 시작되기 전이라 텅비어 있었다)이었는데 거의 무방비로 포탄을 얻어맞고 벌판에 까마귀떼처럼 중공군이 죽었다.
그럼 그 유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일부는 중공군이 수습해 갔고 주월리에 임시 묘지가 주월교회와 임진강 사이에 있었다. 전후에 그 유해들은 대부분 강물에 떠내려 보내거나 일부는 중공군이 가져갔고, 포로 교환시 시신도 일부 발굴되어 보내졌다. 하지만 더 많은 시신들은 마지리 벌판에 그대로 버려져 있었다. 포탄에 시신이 파열되어 인원확인이 어렵고, 눈으로 뜨고서 바라볼 수 없기 때문에 논고랑이나 이런 곳에 부역자들을 동원하여 처리하게 되었다고 한다.
(라) 파평산의 사라진 유해(공군 레이다 기지건설 등)
파평산은 적어도 3회에 걸쳐 백병전이 벌어진 곳이다, 최초 전투와 1.4후퇴 그리고 중공군 4월 공세시에는 국군 제1사단이 전담하다시피 이곳에서 공방전을 벌였다.
[수없이 훼손된 주요 전투 고지군의 영웅]
따라서 주요전쟁지역 고지군의 고지 정상 일대는 최소한 소대나 중대 규모의 개인호 아니면 교통호(전투산일대. 숲데미산.유학산.가산산성. 영천 전투산. 형제봉 . 횡성 오음산. 갈기산 일대. 화악산. 백석산. 가칠봉. 351고지 남측 능선. 피의 능선. 1090고지 남측 능선. 백암산. 흑운토령일대. 735고지. 백마고지. 화살머리 고지. 고왕산. 박달산 등)가 굴토돠어 있다. 전후 70년 동안 주로 그런 곳에 전투진지 공사를 실시해 온 우리다. 얼마나 많은 영웅들의 유해가 훼손되었는지는 물어 무엇하리오.
파평산 정상에 지금 공군레이다 방공망 기지가 있다. 적어도 지표면이 10m는 족히 내려갔을 것이다. 그곳이 총칼로 백병전을 벌이고 수류탄이 터진 곳이다. 사실 꼭대기 고지는 포탄의 화력은 영향력이 적고 상대적으로 근접항공 폭격에는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다. 위력이 어마어마 하기 때문이다. 이곳도 수도 서울을 사수하기 위한 주요 접근로의 목이기에 앞에서 언급된 마지리 만큼의 피해, 다만 이곳은 방어시는 개인호나 교통호에 국군이 점령하고 있었으니 아무리 낮게 평가해도 상당한 피해가 발생했을 것이다. 그런데 전후에 이런 주요 격전지 고지군에 군사시설물 공사를 진행하면서 통제대책이 전무 했다.
그러니 주봉에 가장 많이 발생한 유해는대부분 훼손되어 발굴 되더라도 조각으로 모습을 들어낸다. 당연히 유전자 감식도 많은 제한이 따르기 마련이다.(신뢰도 측정이 어렵다) 우린 이 파평산 주요 고지군은 기지가 위치하여 발굴조차 못해봤고 그 좌측, 남쪽에서 바라보아 좌측 능선과 그 뻗어내린 계곡 등에서 100여 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또한 마지리 180고지군의 능선 지맥에서도 100여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북암리일대 고지군 포함) 나중에 언급이 ㄷ되겠지만 국군 제2사단이 전투한 735고지는 400여구가 발굴되었다.
(마) 두포리 임진강변에 남겨진 반공애국자의 유해(발굴하여 재 가매장)
이곳은 경기도지역 민간인 피해관련 내용 안급시에 기록된 내용이다. 태극단과 지역 경찰, 북한군 파락치들의 얽힌 피해현장이다. 국군이 진격시에 고양 금정산 피해는 북한 프락치라고 해서 붙잡아 처형한 곳이라면 이곳 두포리 일대는 북한군이 남한 유력인사를 남치하여 끌고 임진강을 건너려다 우군이 폭격 등 국군이 쫒아오다보니 못데려가는 상황해서 집단으로 사살해 버린 비운의 현장이다. 지금 임진강을 바라보고 파주지역 반공애국자 묘비가 세워져 있다.
[강가에서 숨져간 2천여명의 희생자는 흔적조차 없어졌다]
나는 이곳 일대와 탄현지역에서 제보를 받아 탐문과정에 이곳을 찾았고 실제 묘비에 연락처를 남긴 결과 한 명의 유족(전직교사)을 만나게 되었다. 추모비가 서 있는 곳에는 유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위령비 성격이다. 장소도 원래는 강가쪽으로 밑에 있었는데 지금 순환도로가 생기먄서 위로 올라와 세워졌다.
원래 있던 곳은 지금 조그만 텃밭처럼 밭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그 주인도 수소문 끝에 찾아서 만났다. 우선 유족이란 분은 전직 여성 선생님인데 알아보니 전교조 출신이라는 참고사항을 들었다. 우리가 발굴하여 명예를 고양하는 것이 어떠냐고 물으니 절대 건드리지 말라고 한다. 다른 50여 명의 유족들도 같은 생각이냐고 물으니 다른 분들의 의견은 본인에게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그냥 아버지 자리는 그대로 둬라하니 우리도 유족이 반대하니 발굴을 못해봤다.
다음 위령비가 있던 텃밭지역에 관련된 내용은 내가 만난 싯점은 공무원으로 은퇴한 분이 주인 이었다. 어떻게 이곳을 사게 되었느냐고 물으니 솔직히 다음에 안보공원 등이 검토되리라 보고 값이 오를까 해서 사게 되었다 한다. 그리고 밭을 경작하려 주변을 굴토하는 과정에 유해 조각도 나오고 전투 유품도 있어서 모아놓았다고 하여 우리가 수습했다. 태극단원은 법상 우리가 발굴하는 대상이 된다. 안보공원 문제는 우리가 모르겠다고 하고 제보비를 소정 드렸다.
그래서 그 주변 야산을 굴토하기 시작하여 5분의 유해를 발굴했다. 손목이 묶인 상태, 바지에 고무줄 등 전형적인 당시의 모습 그대로 발굴되었으나 내 윗선에서 겁이 나서 덮으라 해서 어쩔수 없이 당시 발굴자리에 태극기로 관을 덮고,유해를 깨긋하게 재 수습하여 묻었다. 이유는 어느 유가족이(앞선 그런 전직 교사처럼) 나서서 시끄럽게 하면 안된다는 판단과 파주시에서도 혹시 민원이 제기되어 안보공원을 검토하게 되면 안그래도 많은 지역인데 골치아프다는 뉘앙스가 전해진 모양이다.
"반공 애국자님 죄송합니다. 저는 여기까지 입니다." 우린 술을 한 잔 따라 올렸다
그리고 강가에는 지금 고수부지처럼 되어 있고 이곳에서 당시 강북으로 도섭하였다고 한다. 그 수많은 납북자들을 이곳으로 끌고와 못 데리고 가다보니 무차별 사격으로 죽이고 도망갔다는 제보다. 그런데 지금 그 자링에 제1사다늬 전투시설물이 있다. 수풀로 우거져 출입도 어렵다. 하지만 이곳에는 그런 내용의 안내간판이 없다.
(바) 중성산의 전투 흔적(산성을 이용하여 축성, 중요 문화재 지역)
이곳은 국군은 전쟁초기에 전투를 하다 철수하였으며, 가장 치열한 전투는 중공군 4월 공세시 영국 군이다. 이곳은 3국시대 축성이 남아있는 문화재관리 구역으로 문화재청과 협조하여 실무자가 현장에 입회하여 발굴작전에 대한 실무협상을한 후 진행되었다. 실제 성터가 부분적으로 많이남아 있는데 그 성터를 따라 개인호가 구축되어 있었다.
여기서 북으로로 내려서면 주월리로 바로 임진강이다. 그러니 삼국시대나 지금이나 주요 고지군의 보는 눈은 같은 모양이다. 여기의 개인호 분포는 성벽을 따라 원형으로, 남죽으로 길게 타원형으로 수백개는 구축되어 있었다. 그런 전쟁터가 사실 어느 연대의 작전단계별 지휘소로 그동안 사용되었으니 얼마나 많은 유해나 유품이 훼손되었는가는 짐작이 간다.
우리는 1달여의 발굴기간에 10여 구의 유해를 발굴하였고, 많은 유품을 발굴하게 되는데 유럽인종과 비슷한 형태는 없었고 모두가 동양계로 판명되었다. 그러면 중공군인지 아니면 우리 국군 제1사단인지 정말 어려운 문제다
(사) 장승천과 까치봉의 터키군, 율도의 필리핀 대대의 분전 그리고 다시 묻어야 했던 군인!
연천 동쪽에서 철원 김화를 목표로 공격하던 미 제1군단의 미 제25사단(터키여단 배속)과 미 제24사단은 4월 22일 중공군의 완강한 저하에 부딪치자 방어로 전환하였다. 이때 좌전방 터키여단은 대광리 남쪽 고지군에 미 제25사단은 철원 남쪽의 금학산(947) 일대에, 우전방의 미 제24사다는 문혜리-신술리에 급편 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그리고 터키여단의 좌인접에는 미 제3사단의 제65연대에 배속된 필리핀 제10대대가 율동에서 유타선을 따라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중공군은 4월 22일 야음을 틈타 19시에 공격을 개시하여, 장숭천 일대에 40분간 공격준비사격을 실시한 후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때 터키군은 진내로 접근한 중공군 제60군 예하 제179사단과 공방전을 펼치며 주저항선을 고수하였다. 그저자 중공군은 정면공격과 병행하여 좌인접 필리핀 대대 및 우인접 제25사단 제24연대와의 전투지경선 부근으로 1개 연대 규모의 병력을 투입해 포위공격을 시도한다.
이에 터키여단은 한탄강 남쪽 캔사스선 진지로 철수하라는 사단의 명령을 받고 철수를 개시하지만 중공군이 철수로의 중요 거점인 나미현(까치봉)을 먼저 차단함으로써 철수 과정에 큰 피해를 입었다.
한편 터키여단이 격전을 펼치고 있을 무렵 좌인접 율동 부근에 배칟된 필리핀 제10대대는 4월 22일 23시부터 중공군 제12군 제34사단의 파상공격을 받아 진내에서 근접전투가 시작되어 통신망의 두절에도 불구하고 총력전으로부터 총력전을 펼쳐 새벽까지 진지를 고수해서 미 제3사단의 철수를 엄호하였다.
터키여단과 필리핀 대대의 선전에도 23일 오전 미 제9군단의 사창리 지역에 이어 미 제1군단의 감악산 지역에서 부분적으로 방어진지가 돌파되자, 미 제8군사령관은 미 제1군단과 미 제9군단에 임진강-전곡-화천저수지를 연하는 캔사스선으로 철수하여 방어진지를 편성하도록 명령한다.
먼저 터키군이 최초 방어진지를 편성한 곳은 연천 도신리 지역이다. 지금 도신리에서 동쪽으로 들어서면 신산리가 나오고 늦었지만 언젠가 터키군 전적비가 자리를 잡았다.
이곳에서 중공군이 배후에서 공격을 하여 철수하는 가운데 나미현(일명 까치봉)에서 많은 피해가 있었다고 한다. 물론 터키군은 북한지역 군우리에서 미 제2사단과 같이 죽음의 계곡에서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금량장 전투('51.1.25)에서 그 원한을 갚았다. 터키군은 포로가 되는 것을 거부하며 착검한 채 적진으로 돌진하는 용맹성을 간직한 부대다. 작전 기간 중에 터키군은 3623명이 참가하여 721명이 전사하고 실종이 175명, 포로가 234명이다. 전사 숫자만으로도 미국이 5만 4천 여명, 영국이 1,100명 수준이며 다음이 터키군이다.
이곳 도신리 장승천 일대에서 시작하여 철수간 좌우측이 포위되어 신산리에서 산악지역으로 들어서 철수하면서 심원사지 부도에서 남쪽으로 형성된 계곡을 따라 오다 부곡리 713고지군으로 잘 못 들어서 엄청난 피해를 가져오고 실종자가 발생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포위망을 뚫고 고문리-신흥리-고소성리로 들어서 영평천 미25- 35연대지역으로 들어선다.
나는 장숭천 일대와 나미현에 올라 그 흔적을 찾으려 무척이나 노력했으나 713고지군 일대는 실제 전투편성을 하지 못한 곳이라 그런지 그 흔적은 찾기가 어려웠다.
필리핀군의 율동지역은 신망리역에서 서쪽으로 78번 도로상에 전적비가 현재 있다. 상리지역 일대다. 나는 제28사단에서 이곳 옥계리 -상리지역에서 전투진지 공사도 하면서 군자산을 포함한 이 일대 산악지역은 모두 탐사를 해봤다. 하지만 전투흔적은 그렇게 발견하지 못했다. 그런데 우연히 이곳에서 참전용사 한 분을 만나 본인이 율동지역으로 철수를 하는 가운데 어느 지역인지는 모르지만 중공군의 추격을 피해 뛰어 내렸는데 발이 빠져 허부적 거리게 되었는데 손으로 집어보니 사람다리들이 얽혀있어 기겁을 하고 기어서 빠져나왔다고 한다. 1.4 후퇴시 제8사단의 일부 부대가 이곳을 그렇게 철수한 사례가 있다는 것을 들었기에 우리는 합수리 167고지군과 그 뒤 민간인 통제선으로 동행 탐사를 했지만 정확한 곳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이상한 군인의 가묘, 아픈 사연을 나는 다시 묻어야 했다]
하지만 중요한 현자을 확인했다 167고지군 일대 능선에 가묘가 30여 곳이 있다는 사실이고, 대상이 군인이라는 것이다. 많은 의아함을 갖게 하였는데 결국은 이곳 능선 남쪽지역에 배치된 군인이 북쪽으로 넘나들다 지뢰폭파 사고와 일부는 상리의 마을과 관련된 인사 사고로 현장에서 즉결처분 되었던 인원들의 묘지라는 것을 지역주민의 제보로 알게 되어 발굴 도중에 중단시킨 사례가 있다.
필리핀군은 미군측의 무기로 무장하고 '50. 9.20일도착해 10일간의 적응교육을 마치고 후방 게릴라 소탕 작전에 투입되었다가 이번 와이오임선 공격간 미 제65연대에 배속되어 군자산 공격에 참가하였다. 그 후에도 '52.5월에는 지금의 제5사단 전방 에리고지 전투와 휴전에 임박해서는 지금의 제21사단 전방의 1090고지 크리스마소 고지 전투 등에 참여하여전사 112명, 전상 299명, 실종 16명 , 포로 41명이 발생한다.
나. 사창리-가평 축선의 위기
중부전선을 담당한 미 제9군단도 4월 21일 좌인접 미 제1군단과 병진하여 좌전방 국군 제6사단이 김화로, 우전방 미 제1해병사단(배속:국군 제1해병연대)은 화천저수지 북쪽 와이오밍선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반면에 중공군 조공인 제9병단은 화천-가평 축선으로 신속히 진출하여 유엔군의 동서간 증원을 차단할 목적으로 주공부대에 앞서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미 해병 제1사단지역은 화력의 열세와 북한강을 도하하는 불리점 때문에 산악기동의 장점을 살려 좌전방 국군 제6사단 지역을 집중 공격하였다.
(1) 사창리 전투
국군 제6사단은 4월 21일 석룡산-화악산에서 와이오밍선의 육단리와 복주산(`1057)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좌전방 제19연대가 상해봉(1019), 우전방 제2연대가 백적산(883)을 점령, 중간 목표를 확보하였다.
사단이 정비중 항공관측으로 중공군이 대규모로 집결하고 있음을 발견하여 방어태세로 전환하여 좌전방에 제19연대는 방화돟일대에, 우전방 제2연대는 백적산 일대에 급편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예비인 제7연대를 두류산(993)부근으로 전진 배치하고 제27포병대대, 뉴질랜드 포병대대, 미 제2박격포 대대 C중대가 배속되어 사창리 부근에 배치되었다.
중공군은 '51.4.21 17:00에 방화동, 실내리 일대에 포격을 시작으로 제20군 제60사단과 제40군 제120사단의 일부로 정면공격과 부대 간격을 이용하여 사단 후방지역으로 침투하여 북진 작전시 운산지역에서 당한, "포위되면 끝장이다"는 강박관념이 되살아나 무질서하게 후방으로 후퇴하기 시작한다.
이로 인해 좌전방 제19연대가 포위되고 우전방의 제2연대와 예비인 제7연대, 화력지원 부대들이 무기를 버리고 사창리-신포리간 도로를 따라 탈출을 시도하여 통제 불능의 상태가 되어 버렸다.
한편 제6사단의 우측방 미 해병 제1사단도 4월 21일 제5, 7연대와 국군 제1해병연대로 화천저수지 북쪽의 와이오밍선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곳 역시 중공군 제40군 주력의 공격과 좌측의 국군 제6사단의 철수로 포위 위기에 들기도 했으나 우세한 화력으로 극복하며 북한강 동쪽으로 철수하여 춘천을 중심으로한 캔사스선을 점령하였다.
김화
와수리 육단리 대성산 사방거리
복주산 재안산
*1190
신술리 방화동 실내리 *486 *509
국 제19 미 제5해병 국 제1해병
*상해봉 미 제7해병
*광덕산
명월리 *백적산 국 제2 화천 화천 저수지
*두류산 구만리
국 제7
사창리 원천리 용화산
신포리
캔사스선
*국망봉 *석룡산 *화악산 *매봉
*677 죽둔리 *504 춘천
캐나다 내촌 호주군
미들섹스
가평
국군 제6사단은 미 제9군단으로부터 캔사스선 점령을 하도록 통제되었으나 이미 지휘체계가 무너져 국망봉-매봉선에서 견디지 못하고 중공군의 계속되는 압력에 영국군 제27여단의 엄호하에 가평 계곡을 통하여 철수하여 24일 아침 가평 남서쪽 불기산(601) 일대를 점령하였다.
이때 사단은 소총 2,263정, 자동화기 168정, 2.36"로켓포 66문, 대전차포 2문, 박격포 42문, 곡사포 13문, 차량 87대의 막대한 손실을 입었으며 미군도 105밀리 곡사포 15문을 비롯하여 4.2"박격포 13문과 242대의 무전기, 차량 73대의 손실을 입었다. 이후 낙오병들이 재합류하여 25일에 병력은 6,313명이 된다.
(2) 가평 전투
가평에서는 이곳을 방어하고 있던 영 제27여단과 국군 제6사단을 추격한 중공 제118사단 간에 결전이 전개 되었다. 영 제27여단은 공세가 시작되기 직전에 4월 19일 사창리 서쪽에서 방어지역을 국군 제6사-19연대에 인계하고 가평에 집결하였다. 이때 한국 근무가 만료된 아질 대대의 홍콩 원대복귀 문제로 여단의 분위가 어수선 하였다.
23일 미 제9군단장은 국군 제6사단의 캔사스선(석룡산-화악산) 점령이 불투명하자 뉴질랜드 제16포병대대와 군단의 213포병대대는 계속 국군 제6사단을 지원하고 여단 주력은 후방의 가평 계곡에 방어진지를 편성하여 춘천-가평 도로를 목표로 진출 중인 중공군을 차단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영 27여단은 내촌을 중심으로 677고지에 캐나다 대대, 가평 계곡을 통제하도록 504고지에 호주 대대, 아질 대대를 예비로 가평에 집결 보유하였다.
국군 제6사단을 추격한 중공군 제118사단은 영국군의 배치현황을 모르고 종대 대형으로 도로와 계곡을 따라 내려오다 우전방 호주 대대의 집중 포화로 격퇴되었다. 적은 계속하여 돌파를 시도했으나 강력한 항공 및 포병화력에 다수의 시체를 유기한 채 철수하였고 수색대는 40명을 생포하였다.
중공군 제354연대는 24일 야간 22:00에 다시 공격을 좌전방 캐나다 대대 방향을 중점으로 시작하여 , 25일 야간 02:00에도 재차 공격을 하였으나 포병화력의 집중과 강력한 저항으로 결국 3일간의 공격을 실패로 철수하였다.
여단은 25일 밤에 군단에 배속된 미 제1기병사단의 제5기병연대에 작전지역을 인계하고 양평으로 이동하여 군단 예비가 되었다. 이후에 부임한 여단장 테일러 준장이 부대명칭을 제28여단으로 개칭하였다.
(3) 유해발굴을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가) 국6-19연대는 상해봉, 광덕산에서 전투하지 않았다. 국군 제2사단이 '51. 6월에 재진격간 전투(참전용사 증언)
현재 우리 전사는 제1사. 3사, 제6사 전투사가 지배적이다. 물론 잘 싸웠고 운명의 주요 국면에서 혈전으로 승리하거나 적의 진출을 저지시킨 공적이 많은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면 그런 전투에 희생 또한 많아 발생할 것이다. 하지만 우린 그에 대한 기록이 미흡하다. 쉽게 말하면 약간 과장된 면도 있다는 것이다. 이곳 방학동 상해봉과 광덕산은 내가 포병대대 작전과장 시절에 우리 진지가 있는 곳이다. 당연히 지역주민들과 교류도 많았다. 하지만 국군과 관련된 증언은 별로 없었다. 중공군이 이러쿵 저러쿵 하는 내용은 많이 들어왔다. 그런데 내가 유해발굴 통제장교로서 발굴지역 선정간 참고하려 제6사단 제19연대 참전용사 한 분을 모시고 현장을 찾았다. 결론은 제19연대가 상해봉과 광덕산에서 멋진 전투를 하고 명에 따라 철수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참전용사님을 대상으로 증언청취 사업을 진행히면서 만난 제2사단 참전용사님은 본인들이 백운산지역에서 지금의 광덕계곡 정상(654)에서 광덕산 주봉 좌측 지맥을 타고 공격을 감행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본인의 소대는 다 죽었고 중대도 두 세번 교대로 들어가 몇 명만 남고 다 전사했다는 것이다. 정상 지역에는 중공군이 강력한 진지를 구축하고 있어서 근접항공지원과 포병 화력의 지원으로 탈취하고 이어서 복계산으로 그리고 우측에서는 대성산을 이어서 삼천봉과 735고지, 저격능선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우리는 박달봉-광덕산-상해봉-하오고개 간 능선에서 400여구의 유해를 발굴한다. 발굴되는 개인호의 위치가 주로 정상 9부능선에 남쪽방향으로 굴토되어 있어 공산군이 점령했을 것으로 판단되며 이는 국군 제2사단 참전용사님의 증언과 일치한다. 국군이나 미군이 점령했다면 북쪽으로 혹은 고지정상에서는 원형으로 방어진지를 구축했을 것이다.
그러면 누가 진실을 이야기 하는지 의문이다. 또다른 제6사단 참전용사 한 분을 모시고 실내고개로 달렸다. 제19연대출신이라며 길따라 걸어서 가는데 적과의 접촉은 없었다고 한다. 실내고개를 넘어 우측으로 들어가 방학동까지는 일부 부대가 들어갔다고 한다. 우측에는 다른 연대가 같이 진입하는가운데 갑작스레 중공군의 따발총 소리와 꽹과리가 울려 우리는 운산의 악몽이 더올라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산으로 달려 광덕산(1046)에서 밑으로 내려서 다시 도마치 고개(931)로 달려가다 여기서 매복중인 중공군에 다 죽어가거나 포로가 되고 말았다고 한다. 또한 부대는 사창리에서 하오고개를 넘어들어 가는 과정에 중공군의 기습을 사창리가 먼저 포위기습으로 무너져 진출하는 부대들은 북진작전간 운산 전투에서 당했던 트라우마가 살아나 너나나나 살기위해 탈출하기 바빴다며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다 살아남으려 몸부림친 것이 사창리 전투고 도마치를 넘어서서 영국군이 보였다고 한다.
(나) 백적산의 유해는 국군인지 중공군이지?
지역주민은 미군 비행기 폭격으로 중공군이 죽어 나중에 모아서 묻었다고 제보를 해왔다. 전사에는 우리 국군 제6-2연대가 점령했다고 기록한다. 좌측이 제19연대로 상해봉(1019)을 점령했다는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와이오밍선의 육단리와 복주산(1057, 북계산으로 추정되고 복계산이 그보다 남서쪽으로 솟아 1152m다)
나는 실내고개에서 우측으로 상만산동지역으로 들어와 우측 으로 능선을 타고 재치고개를 지나 두류산(983)-명지고개(927용담리로 내려서고, 춘천 사북 오탄리에서 토보산(589)-812-813-명지고개-만월고개로 내려서고, 상만산동-하만산동구간의 북쪽 산악지역인 비녀바위군을 탐사하고 재치고개-백적산-구운리고지군-논미리 홍고개로 내려서는 탐사를 했다. 이곳은 내가 대대장 시절에 비녀바위산군과 백적산군에는 우리 음향소대 진지가 있어 자주 올라섰던 곳이다. 백적산 남쪽 안평리는 장군산(847)군이 좌우로 펼쳐지는 산악지역으로 전차 사격장이 있다. 이곳에는 개인호가 많이 남아 있어 우린 재치고개-두류산-명지고개 방향으로 발굴과 재치고개-백적산-홍고개 방향으로 발굴작전을 실시하여 백적산 정상 8부능선 일대에서 40여구의 유해를 발굴한다. 유품 중에 뼈부적이 나오고 모시나칸트 탄피와 방방이 수류탄 등 주로 중공군 유품이 많이 나왔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군대가 점령하여 전투를 실시하여 사살한 시신인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지역 주민 제보는 중공군이 모여 있다 미군기가 폭탄을 퍼부어 집단으로 죽었고 마을사람들이 올라와 폭탄 구덩이에 주로 묻었다는 제보를 얻었다. 국군은 보질 못했다고 한다.
나는 달성군에서 올라온 한 명의 참전용사님을 만났다. 용문산 전투시 중공군을 무력화 시킨 진내사격 진지에 중대장과 함께 살아난 용사님인제 바로 사창리 전투에서 중대장 무전병으로 따라 다니다 중공군에게 포위되어 중대에 나와 있던 무전차가 폭파되고 화악산 북쪽 촛대봉으로 철수하다 여기서도 포위되어 많은 희생을 받으며 화악산을 넘어 가평으로 철수했다는 것이다. 그때는 중공군과 전투를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지휘자도 없고 삼삼오오 짝을 지어 그저 산 꼭대기를 보고 올라서 밑으로 내려가는 것 밖에는 다른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분과 설악 352고지군은 실제 한여름에 탐사를 함께하여 전투 현장을 찾았고 발굴작전으로 30여 구의 유해를 발굴하는데 나오는 유품이 주로 우리 것이고 실제 증언도 더이상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라 전우가 전사하면 개인호에 밀어넣고 혈전으로 결국 중공군 1개 군단이 제6사단 1개 연대의 옥쇄작전에 무너지고 5월전투는 아군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조금 조심스런 판단이지만 우리 제6사단은 중공군이 기다리는 함정으로 올라가다 포위 공격을 받고 무질서한 후퇴로 살아남은 군인들이 가평으로 집결하게 되었다고 본다. 적극적인 전투는 어려웠다. 따라서 상해봉이나 광덕산, 백적산에서 전투는 재검토 되어야 한다.
(나) 도마치 계곡에 숨져간 군인은 누구인가?
[지역주민 제보}
이 질문은 앞에서 전투사실은 열거하였다. 따라서 도마치봉 일대의 좌우 능선에 대한 탐사로 많은 개인호가 확인되고, 적목리 조무락골에서 실제 전투 당시부터 살아온 지역 주민을 만나 많은 제보를 들었다. 본인이 13살에 전쟁은 났고 이곳이 삼팔선이라 북한군을 알고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북한군이 내려가고 이어서 다시 올라오며 양키군대가 온다며 함께 가지고 해서 따라가다 산속으로 빠져서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이때 까지는 이곳에 아무런 피해가 보이질 않았다.
그러나 봄에 영국군이 먼저 고개를 넘어 갔는데 뒤이어 국군이 올라가고 다시 영국군인지 호주군인지는 다시 내려와서 가평 방향으로 갔다고 한다. 그런데 바로 같은 시기에 중공군인지 북한군인지 들어왔고 마을은 그 사람들이 판을 치는데 국군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불과 국군이 올라간지 채 하루도 안되어 난리가 났는데 군인들이 달려오고 중공군이 뒤에서 앞에서 총을 쏘고 난리가 난 것이다. 1.4후퇴시에도 일부 국군(국군 제2사단 병력)이 들어왔다가 중공군에 밀리어 가면서 길거리에 그저 시신들이 즐비했는데 다시 그런 상태가 되어 산짐승들이 날뛰고 동네 개들이 물어뜯고 정말 무서워서 집에도 못있고 화악산 게곡으로 들어가 숨어 있곤 했다.
그런데 중공군이 쓸고 내려갔는데 계곡에서 나와서 도마치고개 쪽으로 가다 보니 산계곡에 군인드이 베낭을 짊어진체로 엎드려 있어서 가보니 전투복에 국군 6사단 마크가 선명한데 많은 인원이 고개를 냇물에 처박고 죽어있었다는 것이다. 바로 어떻게 처리도 할 방법이 없었고 다시 국군이 올라 오면서 한여름이 되었는데 냄새가 진동하다 보니 동네 마을사람들이 울려으로 나와서 옆에 있는 숯가마터같은 곳에 옮겨서 가매장하기도 하고 대충 강가에파인 곳이 있으면 그곳에 묻어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본인도 석룡산 좌측 개인호에 시신이 있어 아버지와 함께 몇 구 묻었다며 현장에 직접 올라가 알려주어 실제 유해를 몇구발굴 했다. 그러니 내가 판단하건데 아마도 국군 제6-19연대는 상해봉 광덕산이 주 전장이 아니고, 그곳은 와이오밍선을 점령하라는 명령이 육단리와 광덕산군이고 이곳으로 진출하다 중공군에 포위되어 광주산맥을 이용하여 남으로 철수하다 도마치봉에서 다시 중공군에 전방 19연대는 대량 피해을 입었다고 판단 된다.
[도대리 백자동의 30여구 유해의 진실?]
앞에서 조무락골 제보자의 말처럼 1.4후퇴시 국군이 많이 길거리에 죽었다고 하였다. 이곳은 이미 우리가 명지산 일대를 탐사하러 갔다가 백둔리에서 점심을 먹으며 한 여자분으로부터 직접 제보를 받고 함께 현장으로 가서 위치를 확인하야 발굴결과 철모를 쓰고 전투화를 신은 채로 길가에 묻혀진 30여 구를 발굴한다.
"제보자의 제보내용"
추운 겨울인데 집에는 할아버지와할머니 8살인 본인이 살고 있었고 다른 어머니나 오빠들은 모두 피난을 떠났다. 북으로 올라가는 군인이 많아서 곧 통일이 된다고 동네도 피난간 사람들이 속속 들어오고 있는데 갑작스레 다시 피난길을 갔다. 그런데 정말 군인들이 산에서 우르르 내려왔고 집집마다 들어가 먹을 것을 찾아 먹고 밤이 왔는데 쉬고 있었는데 이제는 나팔불고 꽹과리 치는 중공군이 다시 이곳저곳에서 들이닥쳐 집에서 쉬던 군인들이 미처 도망도 못하고 전부 죽어버렸다. 그리고 다시 조용해졌다가 어느날 밤인가 할아버지가 지계를 지고 나가는데 따라 나가서 보니 나이드신 분들이 모여서 시체를 지게에 지고 바로 길옆 큰 웅덩이같은 곳에 집어넣고 흙을 덮었다. 여기저기 그런 곳이 몇군데 있었다. 나중에 몇 군데는 장마에 훼손되어 버렸고 어느 곳은 밭을 개간한다며 없어지기도 했는데 백자동은 누가 손대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우린 이곳을 발굴하고 1.4후퇴 전사를 통해 제2사단의 일부 부대가가평에서 명지산을 넘어 가평 방향으로 철수해 가다 중공군의 포위에 대량 피해를 당한 것으로 결론지었으며 실제로 여기서 발굴된 용사님 중에는 유가족드르이 유전자 감식으로 신원이 확인되기도 했다.
(다)춘천 사북면 오탄리에 있었던 비극(지역 주민 목격담)
이곳은 1.4후퇴시와 구군과 우엔군의 와이오밍선 진출 작전간 중공군의 역습으로 물러나던 '51년 4월공세, 그리고 다시 중공군 5월 공세이후에 유엔군과 국군의 재반격으로 진격하는 과정에 많은 피해가 있던 곳이다.
실제 4월 공세시 사창리에서 국군 제6사단이 무너질 당시에 화력지원부대인 미 포병부대와 일부 전차 부대, 신포리 일대에 있던 미 해병사단의 전투및 전투지원부대들이 단차로에 몰리면서 많은 피해를 입게 된다. 여기서 노획한 전차로 살아있는 국군을 길에서 깔아 죽이는 운전 연습을 했다는 것이다. 56번 도로상 서오지리에서 서쪽으로 사창리에 이르는 구간에 수많은 부대들이 엉키어 제대로 철수를 못하고 장비를 유기한 채로 후퇴해 버렸다.
다음 5월 공세부터 다시 북으로 철수해 가는 짧은 1개월 어간에 공산군들은 길거리에 부상당하여 신음하는 군인들을 그대로 방치하는가 하면 심지어 미군 탱크를 노획하여 운전연습을 한답시고 길거리에 시신이 있는데 그대로 괘도로 깔아뭉개며 운전연습을 하곤 했다는 것이다.
중공군 5월 공세 이후에 국군이 진주하면서 정말 기막힌 일이 벌어진다. 지금 지촌리 교회가 있는 자리가 당시에 야전 화장자리였다고 한다. 노무자들이 시신을 산속이나 길거리에서 들것에 실어오면 나무 위에 올려놓고 기름을 부어 화장을 하는데 갑작스레 불위에 누워 있는 시신이 벌떡 일어서는 바람에 화장을 통제하는 중사 혼비백산하여 들고 있는 칼빈 총을 마구 쏘아대는 미친 모습을 직접 옆에서 보았다는 지역주민이다.
실제 시신을 뒤집어 놓아야 하는데 잘못하여 앞으로 놓고 화장하다 보면 배가 먼저 부풀어 오르고 뻥 터지는 경우도 있고 이런 과정에 아픙로 일어서는 모습이 연출될 수 있다고 한다.
[화천 원천리 건넌들에 남겨진 유해와 산 나, 그리고 소유주와의 인연]
서오지리에서 춘천호의 연꽃 단지로 들어서면 건넌들이 나오고 이곳에는 광산굴도 있다. 이곳은 댐이 만들어지며 수몰지역인데 원래 국민학교도 있었다. 이곳은 최초 전투간에는 모원평리의 모진교가 이어지던 곳으로 많은 피해가 발생한다. 여기에 미 해병 제1사단이 와이오밍선으로 진출하는 지역으로 바로 좌측이 국군 제6-2.7연대가 진출하는 상황이었다.
건넌들의 산악 마지막 부분에 엄청난 교통호와 유해가 묻혀졌다는 제보를 받아 현장에 달려갔다. 눈을 의심할 지경이었다. 교통홍에 유해가 부분 유해로 남아 있고 일부유해는 들짐승들이 물어 뜯고 할퀸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유해가 50여 구나 된다. 제보자의 이야기로는 이곳이 수몰된 학교 뒤로 교통호는 중공군이 들어와 있으면서 굴토된 것이고 유해는 동네에 죽어있던 군인들로 중공군과 함께 온 북한군이 통제하여 마을 사람들이 들것에 들어다 교통호에 옮겼다고 한다. 국군 제6사단 병력일거라고도 하였다.
그런데 얼마 후에 산 주인이 나타나 국방부에 민원을 넣겠다며 보상하라는 것이다. 발국작전을 실시했던 제27사단 감찰에서 관련 조치를 제대로 못한 것으로 몹시나 화나는 문제였다. 그러나 알고 보니 본인 땅이야 맞지만 우리가 몇 번 연락을 취했으나 연라기 되지 못했고 지번을 확인하니 본인 땅은 얼마 안되고 몇 명의 소유주들은 모두 발굴 허락을 한 상태였다. 여기에 춘천시에서 춘천호 정화사업으로 이 일대를 매입 추진하고 있던 실태였다.
[너놈 누구의 짓이냐, 개망나니 같은 놈..}
그 주인이 나에게 퍼부었던 욕이다. 사실 나는 발굴을 통제는 하지만 지역 사단장의 책임하에 진행되는 사업으로 심한 욕을 내가 먹어야할 이유는 없다. 그러면서 누군가 국방부 감사관실에 있다고 큰소리를 마구 질러 소란을 피웠다. 그래서 민원을 내라고 하며 국배심으로 처리해 드린다고 하고 현장을 떠나 버렸다. 실제 야산 실평수가 300평도 안되었고 원래 굴토되어 있던 교통호를 걷어 올린 것 밖에는 없기에 큰 배상은 되지 않는다. 우리의 예산에도 일정의 보상금을 주도록 되어 있어 국배심보다는 많은 액수다. 땅값이야 더 업서서 한평에 불과 천원 정도 였으니 땅을 사도 불과 100만원 미만이었다.
그래서 나는 떠나기 전 한마디 남겼다, " 아저씨 세상 독하게 살면 그리고 그렇게 막말하고 사시면 더 오래 사시느냐"고 묻고 민원을 내셔도 되니 알아어 하시라고 했다. 그 분은 나에게 협박하면 무슨 진급을 바라보는 입장에서 혹시나 입막음용으로 뭔가 색다른 용돈이 생기나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에 이미 10년전에 그런 걸 다 잊고 있었다. 인사법상 해당이 안되는 고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사시면 행복하시겠다고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미안하게 됐소, 없던 일로 봐 주시오.]
그런 몇 일이 지나 사단 실무자를 통해 편지가 전해졌다. 그 아저시의 편지다. 뜯어보니 순간에 눈이 멀어 아프게 해서 미안하다고 하며 이해해 달라는 내용이다. 나는 모욕적인 언동에 정말 분개했다. 하지만 또 한편 어른이 이렇게 나오니 다시 연락하여 만나서 우리가 정한 사유지 발굴처리 기준에 따라 일부 보상금을 드리고 발굴작전을 계속 하였다.
우린 그곳에서 소총도 발굴하고 2~3년에 걸쳐서 100여 구의 유해를 일대에서 발굴하였다. 지금도 그곳에는 일부 발굴해야 할 작은 아기 무덤군이 있다. 제보에 의하면 아기 무덤이 아니고 동네에 널부러져 있던 유해 조각을 동네 사람들이 옮겨서 묻었다는 것인데 정확한 인증절차를 거쳐야 하기에 그 당시는 발굴하지 않았는데 10여 년이 지난 지금은... .
다.소양강 부근 전투
중동부 전선의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 3군단은 3월 초순부터 반격작전으로 중서부전선의 부대들이 캔사스선에서 철의 삼각지대를 공격할 무렵 공격축선에 지형이 험준하고 적의 저항이 완강하여 화천저수지-남전리-한계령을 연하는 캔사스선에 도착하여 전선을 정비하였다.
제8군 사령관은 4월 20일 중부전선에서 미 제1, 9군단이 와이오밍선 공격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동서로 배치된 국군 제1군단과 제3군단에 주보급로인 홍천-인제-간성- 도로를 확보하기 위하여 이 도로의 북쪽 10~22km에 위치한 양구-대암산-가전리-사천리-고성 남쪽을 연하는 "알라바마선"을 목표로 24일부터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런데 북한군 제5군단이 양구-원통선에서 먼저 22일 선제공격을 함으로써 국군 제3사단과 제5사단이 북한군과 치열한 전투를 하게 된다.
(1) 인제 쟁탈전
미 제10군단에 배속된 국군 제5사단은 4월 19일 소양강을 도하, 좌전방 제35연대가 가아리로, 우전방 제36연대가 원통북쪽의 봉화산(579)으로 진출하여 인제를 확보하고 있었다.
알라바마선을 공격하기 위해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3군단은 전투지경선을 일부 조정하여 제5사단은 인제 북쪽의 제36연대 지역을 제3군단의 좌전방으로 투입된 국 제7사단 제5연대에 인계하고, 양구 동쪽의 좌인접 미 제7사단 제32연대 지역을 인수하게 되었다.
이 계획에 의거 제36연대는 22일 18:00에 제5연대에 지역을 인계하고 사단 예비로 인제로 철수하고, 작전지역의 변동없이 사단의 우전방이 된 제35연대는 대암산(1316) 공격준비에 들어가고 예비인 제27연대는 미 제32연대의 양구 동쪽 야촌리 지역을 인수히기 위하여 남전리로 진출하였다.
그러나 북한군은 아군의 진지교대를 하는 취약시간을 이용하여 22일, 제45사단이 양구, 제12사단이 인제, 제6사단이 한석산(1119)을 목표로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국5-35연대의 전초진지 873고지를 점령하고 주저항선으로 접근하였다.
펀치볼 서화리 간성
북5군단
대암산 적12사 매봉산
*873 소양강 적6사
35연대
가아리 명당산
적45사
36연대, 국7-5연대
양구 야촌리 봉화산 한계리 *안산
제5해병 제36연대 원통 제22연대 장수대
송정리 제36연대 양양
*915 *940 23연대
제27연대
*539 한양동 *1228 제18연대 가리봉
인제 덕산리
개운리 남북리 *한석산
제27연대 제36연대 제22연대
관대리 검발리 *매봉
제3연대
남전리 *733 검우석
신남리 제8연대
내린천
홍천
현리
제35연대는 자정부터 백병전과 화력전으로 적의 돌파를 저지하였으나 우인접 제5연대와 전투지경선의 배치 공간으로 침투한 적의 포위공격에 인제로 물러나고 있었다. 23일 미 제8군사령관의 알라바마선 공격을 취소하고 군단간 전투지경선을 조정하여 적의 공세를 저지하도록 하였다.
이 명령으로 국 제7사단 제3연대와 제5연대가 제5사단에 배속되어 작전지역이 동쪽으로 확대되었다. 이에 제5사단장 민기식 준장은 제27연대를 인제 북서쪽 고지군에, 중앙 제36연대를 인제 북쪽 고지군에, 제5연대를 원통리에 배치하였고 제3연대는 예비로 소양강 남쪽 한양동에 배치하고 인제 남쪽으로 철수한 제35연대는 재편성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적이 계속 제5연대의 좌우측으로 돌파하여 포위를 시도함으로써 사단은 인제로 철수를 하여 제27연대는 개운리 북쪽에, 중앙 제36연대를 남북리에, 예비인 제3연대를 소양강 동쪽 검발리를 점령토록 하였다.
미 제10군단의 인제탈취 명령으로 25일 06:00시에 제36-2대대와 미 제7사단에서 배속된 전차 5대로 인제를 공격하여 정오 경에 탈환했으나 20:00시경 다시 적에게 넘겨주고 인제를 포기하고 소양강 남쪽으로 철수하게 된다.
(2) 한석산 쟁탈전
제3군단의 국 제3사단은 인제-간성 도로와, 원통-양양 도로를 통제할 수 있는 한석산-가리봉으로 진출하여 좌전방 한계리에 제22연대, 우전방 가리봉에 제23연대를 , 그리고 제18연대를 예비로 덕산리에 배치하였다. 그리고 제7사단이 군단 예비로 후방지역에서 공비소탕 작전 중에 알라바마선 공격으로 4월 22일 오후에 제5사단의 원통지역을 인수하고 제3군단의 좌전방 사단으로 투입되었다.
이날 저녁 좌인접의 미 제10군단 우익인 국5-35연대가 격전을 펼치고 있을 때에 국 제3군단 정면에서도 제22연대 전초부대가 한계리 북쪽에서 적 대규모 부대의 공격을 받고 주저항선으로 철수하였다.
23일 전선 조정에 따라 제7사단의 제3, 5연대가 국 제5사단에 배속되었고, 8연대가 제3사단에 배속되어 전투지경선이 조정되었다.
북한군 제6사단은 이날 오전 정오부터 공격을 재개하여 제5연대와 제22연대 전투지경선의 간격을 집중공략하여 제5연대 지역이 돌파되면서 급격히 약화되어 한석산을 피탈당하고 매봉일대로 후퇴하였다.
이에 사단장 김종오 준장은 24일 제22-2대대와, 제18-2대대로 고지쟁탈전을 벌려 한석산을 탈환하였다. 고지를 물러난 적은 25일 다시 1개 연대 규모로 공격을 하여 다시 피탈당하고 매봉으로 물러났다. 26일 새벽에 적이 다시 매봉으로 진출을 기도했으나 2차례에 걸친 백병전에서 적을 격퇴하였다.
사기가 오른 제22연대는 다시 한석산을 재공격하여 탈환하게 된다.
(3) 유해발굴을 위한 탐사 및 탐문결과
(가) 한석산-매봉 쟁탈전의 진정한 전투부대는 누구인지, 제3사단(4월전투)냐 아니면 제9사단이냐?
중공군 4월 공세관련 전사 기록은 이미 앞에서 언급했듯이 국군 제3사단이 주도했다. 그 내용을 다시 한번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
"북한군 제6사단은 이날 오전 정오부터 공격을 재개하여 제5연대와 제22연대 전투지경선의 간격을 집중공략하여 제5연대 지역이 돌파되면서 급격히 약화되어 한석산을 피탈당하고 매봉일대로 후퇴하였다.
이에 사단장 김종오 준장은 24일 제22-2대대와, 제18-2대대로 고지쟁탈전을 벌려 한석산을 탈환하였다. 고지를 물러난 적은 25일 다시 1개 연대 규모로 공격을 하여 다시 피탈당하고 매봉으로 물러났다. 26일 새벽에 적이 다시 매봉으로 진출을 기도했으나 2차례에 걸친 백병전에서 적을 격퇴하였다. 다시 한석산을 공격항여 재탈환하는데 성공하였다. 북한군 제6사단과 국군 제3사단은 한석산을 확보하기 위하여 4일 동안 한치의 양보도 없이 고지쟁탈전을 펼쳤지만 결국 국군 제3사단이 이 고지의 주인이 되었다."(한국전쟁사 8권 480~)
하지만 고약한 예비역 장군 한 분이 본인이 이곳 한석산-매봉전투의 진정한 승자라며 오직 제9사단만의 전공을 앞세우는 주장을 펼치며 원대리 31번 도로변에 세워진 충혼비에 제9사단 공적이 전적으로 새겨진다. 본인이 당시 연대장이었다. 손00장군의 강변(?)이다.
나는 이곳 한석산을 가리산리 장승고개에서 군용차로 들어가고 이곳에서 산을 타고 매봉을 탐사하기를 몇 번이고 했다. 물론 지역 주민들과의 간담회도 하고 탐문활동를 많이 했다. 덕적리 하추리 고사리 원대리 지역에서 제9사단 관련 제보는 받지를 못했다.
한석산-매봉지역은 중공군 4월 공세를 격퇴한 후 국군과 유엔군이 '51. 4월 30일을 기해 골든-노네임선에서 부대 재배치와 방어진지 보강에 주력하다 공산군의 적정을 탐지하기 위해 정찰기지 확보 작전을 하게 된다. 특히 중동부 전선의 중요 전술도로인 홍천-인제-간성을 연결하는 도로를 탈환하여 보급지원 문제를 해결하고 차후 화천저수지 동쪽에서 공세작전으로 전환시 유리한 기동로를 확보할 목적으로 홍천-인제-간성간 도로의 10km~25km 북쪽 가리산-신월리-915-1037-대진리를 연하는 미주리선 확보를 계획하였다.
이에 따라 '51.5.7일 미주리선 확보를 목표로 공격을 개시, 이때 제9사단이 한석산을, 제5.7사단이 한석산 좌측에서 소양강남쪽의 부평리-청구리일대를, 수도사단이 설악산을 목표로 공격을 실시하였다.
당시에 한석산(1119)과 그 남쪽 매봉(1066)은 4월 25일 제3사단의 22연대가 북한군에게 피탈당한 고지로서 , 북한군 제6사단이 소야양강에 배수진을 치고 이들 고지에 2개 연대로 강력한 거점방어 진지를 구축했다. 제9-30-3대대는 5월 7일부터 3일간 공격을 하여 탈환하게 되며 39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북한군 890명을 사살하여 대대 전 장병이 일계급 특진하게 된다.
이어서 예비인 제30-1대대를 투입하여 10일 저녁에 한석산을 점령한다.
그러다 다시 중공군 5월 공세시 제9사단은 좌측에 국군 제7사단이 우측에는 국군 제3사단이 방어하고 있었다. 제30연대는 사단의 우측 연대로서 5월 17일 01시경 중공군의 전후방 동시타격을 받아 한석산-매봉 전방이 돌파되어 제29연대를 매봉과 원대리 계곡 북쪽으로 기동싴켜 적을 저지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현리-용포로 철수를 개시한다.
그렇다면 '51.4월의 중공군 공세시는 국군 제3사단이 혈전을한 것이 틀림없고, 중공군 5월 공세 직전에 실시된 정찰기지 확보작전간에는 제9-30-3대대가 피탈된 매봉을 탈환한 것이 맞다. 그후에 북한군의 공격을 받아 너무도 쉽게 적에게 내주고 말았다.
(나) 원통-가아리-광치령 서쪽 계곡 고지군의 전투흔적
이곳은 인제 북방 개골령에 관한 탐사 결과다. 전사에는 주로 전투가 관대리와 남북리 사이의 725-940-909-902-광치령, 관대리-곧은골 715-907-909-902-광치령 능선에 관한 기록이 많다.
[전투진지 공사로 훼손된 전투흔적]
청리 두무동고개에서 동쪽으로 산악도로를 이용하여 907고지 하단 붕에서 내려서 가파른 산을 올라서면 거의 수평선처럼 고지군이 동-서, 남-북으로 펼쳐져 탐사에는 큰 어려움이 없다. 907-909고지구간, 특히 909고지군에는 엄청난 개인호와 교통호가 있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그동안 지역일대에 대한 전투진지 공사로 대부분 훼손되어 있으며 유해 발굴 숫자도 20여 구다.
반면에 인제 상동리에서 개골려에 오르다 우측 720-923 고지군일대는 많은 개인호와 교통호가 살아 있으며, 실제 유해도 이곳에서 100여 구가 발굴 되었다.
(다) 과연 제5사단은 적의 보급창고였을까?.
국군 제5사단은 '48.6.15일 경기도 수색에서 창설되 ㄴ제5여단이 증강되어사령부를 광주로 옮긴 후 1949. 5. 12일 제5사단으로 승격되며 제15연대와 제20연대 출발하여 전라도 지역의 공비토벌 작전 임무를 수행한다.
그러다 전쟁이 발발하여 봉일천과 창동에서 국군 제1사단과 제7사단을 지원하여 지연작전을 수행한 후 6월 28일 한강 이남으로 철수하면서 대부분의 병력이 분산하여 철수하며 7월 17일 경남 마산에서 사단이 해체되었다가 다시 '50. 10.8일에 제27연대(대구), 제35연대(마산), 제36연대(부산)을 근간으로 재창설되어 제3군단에 배속되어 포항.지리산.김천. 영주 등지에서 공비소탕작전에 투입된다.
다시 중공군이 개입되면서 11월 22일 육군본부로 예속 변경되어 서울로 이동, 가평.청평. 춘천지구 경비 임무를 수행하다(당시 1개 연대는 제2사단에 배속되어 연천-철원지역으로 들어와 북한군 제2전선 차단 작전 수행) '51.1월 3일 미 제10군단으로 배속되어 원주-충주-점촌-영주로 철수해 내려간다.
이어서 중공군 2월 공세간에는 2월 1일 영주에서 횡성으로 이동하여 부대정비 및 교육훈련을실시한 후 '51. 2월 5일 부터 미 제10군단의 홍천 포위 공격인 라운드업 작전에 횡성 우측방 포동리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받고 대량 피해가발생하면서 주천으로 이동한다. 여기서 단양-풍기간 보급로 경계 및 부대 정비를 실시하고 3월 3일 일선으로 복귀하여 안흥-운교리선에서 미 제2사단과 교대하여 안흥-태기산(아이다호선)으로 진격하고, 4월 초에 캔사스선 진격에 따라 원통으로 진출했다가 중공군 4월 공세를 받아 아야리로 철수한다. 다시 5월 초에 아야리에서 소양강 남안 음양리-어론리선 (미조리선)으로 진격하다 중공군 5월공세로 풍암리선(수정된 노네임선)으로 철수하여 대량 피해로 인한 부대 재편성을 실시한다.
이와같이 크게 4번에 걸쳐 부대가 재편성되다 보니 지휘결속체계가 문제가 없을 수 없었다고 본다 패배의식에 병사들은 익숙해져 있다보니 중공군 꽹과리 소리만 들어도, 북한군 사투리만 들어도 질겁하여 휴대한 장비 다 놓고 도망치기 일쑤였다고 제5사단 참전용사님이 말하였다.
그렂나 그 이후에 51. 8월의 양구북방 피의 능선 전투와, 9월의 가칠봉 전투,'52년도 7월의 고성 351고지 전투, '53년 6월부터 휴전직전까지 화천 수리봉과 백암산 그리고 금성천 전투간에는 혈전으로 전투임무를 그 어느 사단보다 용맹분투한 사단이다.
라. 서울 고수 방어 작전
중공군은 승리를 확신하고 4월 22일 공세를 개시하였다. 공격개시 5일 만에 26일 조공부대는 중부전선의 가평-춘천과 종동부 전선의 소양강에서 저지되어 이 전선에서 소강상태가 지속되었다.
그러나 주공으로 서부전선에 투입된 제19병단과 인민군 제1군단은 국군 제1사단과 영 제29여단의 강력한 저항에 맏대한 인명피해를 입었음에도 초격의 고삐를 늦추지않고 서울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는 과감하게 주간 공격으로 전환하여 서울 외곾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펼쳐지게 된다.
(1) 미 제8군사령관의 작전 방침
적의 4월 공세가 시작되기 전에는 미 제8군의 작전개념이 와이오밍선 공격간 적의 공격을 받아 철수하게 되면 3개의 축차적인 통제선을 따라, 먼저 성동리-노고산-덕정-포천-가평을 연하는 델타선과, 서울 외곾의 수색-북한산-덕소를 연하는 골든선, 그리고 한강-양평-횡성-양양을 연하는 "네바다선"으로 철수하면서 공산군에게 최대의 출혈을 강요한 후 반격작전으로 다시 캔사스선을 회복하는 것이였다.
제8군은 미 제1군단이 골든선을 점령하면 다른 군단들도 기 계획에 의거 네바다선으로 철수하여 상황에 따라서는 다시 한강이북의 서울을 포기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제8군사령관은 26일 새로운 "노네임선"을 설정하고 제1군단이 골든선으로 철수상황에 네바다선보다 30~40KM 북방의 용문산-홍천-한계령-속초를 연하는 "노네임선"을 방어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와간은 명령은 미 제1군단의 서울 외곾 골든선 확보를 우측에서 지원하고 부득이 철수하더라도 동측방에서 서울을 재탈환하는 발판을 확보하겠다는 의도였다.
이 방침에 따라 미 제8군사령부는 미 제1군단이 서울 방어에 주력할 수 있도록 그동안 우측방을 엄호하던 미 제24사단을 미 제9군단으로 배속 전환하여 방어정면을 축소하고 군 예비인 미 제1기병사단을 미 제1군단에 배속하여 강력한 예비대를 보유할 수 있게 했다.
(2) 미 제1군단의 골든선 점령
미 제1군단은 중공군의 공격으로 4월 25일 성동리-덕정-포천을 연하는 델타선을 점령했으나 방어선이 준비된 것이 아니고 일시적 적의 진출을 저지하고자 선정된 선이다.
반면 중공군은 주저항선과 캔사스선에서 엄청난 인적, 물적 손실을 입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델타선 돌파를 시도하였다. 또한 일부 부대를 경춘 국도로 진출시켜 서울 방면에 대한 압력을 강화하여 미 제1군단은 델타 방어에 실패하고 서울 방어의 마지막 보루인 골든선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좌전방 국군 제1사단이 한강하구-구파발에, 중앙의 미 제1기병사단이 구파발-쌍문동에, 우전방 미 제25사단이 쌍문동-덕소간의 골든선을 점령하였다. 이때 연천-전곡-동두천-의정부 축선에서 중공군 제19병단과 전투를 한 미 제3사단은 예비로 전환하여 각 1개 연대씩 전방사단의 후방지역에 배치되었다.
이렇게 하여 미 제1군단은 어떤 때보다 더 강력한 전투력과 포병을 보유하고 적의 공격에 대비하게 되었고 반면 중공군은 28일까지 계속된 공격으로 전투력이 소멸되고 적시적 보충이 지연되어 계속하여 공격을 하지 못하고 일시적 방어로 전환하게 되었다.
(3) 화전리 전투
국군 제1사단은 북한군 제1군단 예하 제8사단과 금촌, 동거리일대에서 치열한 지연작전을 전개하여 적에게 큰 타격을 주면서 서울 외곾으로 철수하였다. 제11연대는 화전리 일대에, 제15연대는 불광동 일대의 골든선을 점령하였다. 골든선은 4월 초순부터 지역주민을 동원하여 유개호 진지와 교통호를 구축해 놓았다.
문산-서울 축선으로 진출한 북한군 제8사단은 28일 새벽 1개 연대규모로 행주나루터로 은밀히 침투시켜 김포공항방면으로 도하를 기도했으나 사단수색대에 발각되어 2시간 동안 인천 외항에 대기중인 순양함 톨레도호의 8인치 함포사격을 받고 다수의 시체를 유기한 채 북으로 철수하였다.
북한군 제8사단은 서울 탈취의 야욕을 멈추지않고 소규모 부대로 전초대대를 공격하였다. 이에 사단은 적을 유인하기 위해 전초대대를 철수시키자, 적은 다시 연대규모로 경의선 철도와 국도를 따라 종대대형으로 좌전방 제11연대 지역으로 접근하였다. 그러나 사전 준비된 화력으로 강타하자 순식간에 흩어져 피신하려 했으나 모든 지역에 이미 공병이 지뢰를 매설하여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되었다.
결국 북한군은 그후에도 10여 차례에 걸쳐 무모한 공격을 하였으나 백병전 속에 900여 명의 시신을 유기한 채 물러났다.
한편 중공군 제64군의 일부가 북한군을 지원하기 위해 우전방 제15연대 지역으로 양공작전을 실시하여 한때는 앵봉이 피탈당하였다. 사단은 예비대와 미 전차 중대를 투입하여 협동으로 중공군을 격퇴하였고 이로써 적 주력은 금촌-앵무봉을 연하는 선으로 철수하였다.
이 무렵 중앙의 미제1기병사단은 도로망의 결핍으로 북한산, 도봉산, 일대로 중대규모로 소부대로써 무려 39회에 걸쳐 침투공격을 감행한 중공군을 격퇴하였다. 우전방 미 제25사단도 퇴계원 부근에서 중공군 제65군을 포병사격으로 1,000여 명을 살상하고 방어진지를 고수하였다.
서울을 목표로 개성-서울 축선과 연천-서울, 포천-서울 축선으로 양익포위를 기도한 중공군의 4월 공세는 국군 제1사단과 영 제29여단의 임진간선 방어로 유엔군의 주력부대 포위에 실패하였고 항공 및 포병화력의 위력앞에 서울 북방에서 무려 7만 5에서 8만여 명이 사살되면서 실패하고 그들의 공격작전 지속능력이 일주일 이상 게속될 수 없음을 다시한번 드러냈다.
결과적으로 유엔군은 중서부지역은 60km, 중동부지역은 35km를 상실하였으나 서울 북방 골든선-마석우리-대포리를 있는 노네임선에서 서울을 방어하였다.
(4)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활동 결과
(가) 인천 앞바다에서 때리는 미 해군의 함포가 정말로 삼각산 뒷면에 떨어졌다(그곳에 숨어서 지낸 지역주민 제보)
북한산지역에 대한 탐사를 계획하여 거의 1주일간을 돌아 다녔다. 특히 태고사 지역은 초기 전투간 의정부지구에서 철수한 국군이 이곳으로 들어왔다가 1개 소대가 모두 전사햇다는 익명의 참전용사님 제보를 받았다. 하지만 태고사 지역은 이미 여러번 지형변화가 있엇다고 한다. 불이 자주 발생하여 시설물들이 불타버리면서 새로 증개축을 하는 과정에 유해를 직접 목격했다는 관계자는 만나지 못했다.
그러는 과저에 노적봉 밑에 들어갔는데 유품들이 다수 확인되었다. 노적사 절에 들어가 주지스님의 불교서적을 선물도 받았다. 하시는 말씀이 지금은 그 당시를 알고 있던 사람들은 지금 남아있지 않다고 하신다. 다만 그 당시에 북한산 속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숨어서 전쟁을 이겨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누가 군인이고 민간인인지 구별도 어려웠다고 한다.
노적사 입구 북한산성 입구에 90이 다 된 노인분이 살고 있다고 하여 찾아갔다. 마침 집에 계시는데 만나보니 할아버지가 바로 노적봉 일대에서 숨어서 전쟁기간을 보낸 장본인이다.
"노적봉(716)에 올라서면 멀리 인천앞바다가 보여요. 그 당시에 15세인데 끌려가니까 할아버지께서 산속에 숨겨놓고 때가 되면 밥을 들고 오셨지. 산속에 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몇 명이 함께 있는데 인천앞바다에서 배가 포탄을 때리는데 그게 훤히 잘보여요. 이곳 노적봉 일대도 폭탄이 떨어져 몇 명은 폭탄에 죽기도 했어요. 지금도 올라가 보면 바위에 그 폭탄 자국이 남아 있어요. 그때야 여기저기 죽은 시신이 널려있고, 들개나 여우들이 많아가지고 물어뜯고 난리야."
그런데 얼마지나 국군이 들어온 이후에는 산속에 숨어서 지내는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대부분 나무들이 불에 타버렸고, 죽은 사람들은 경찰이 통제하여 노무자들이 들어가 모두 수습하여 여기저기 묻어버려 찾기가 쉽지가 않다고 한다.
(나) 화전리에 900여 명, 퇴계원 부근의 1,000여 명의 공산군 시신은 어디로 갔는가?
한국전쟁사 기록이,"북한군 제8사단은 서울 탈취의 야욕을 멈추지않고 소규모 부대로 전초대대를 공격하였다. 이에 국군 제1사단은 적을 유인하기 위해 전초대대를 철수시키자, 적은 다시 연대규모로 경의선 철도와 국도를 따라 종대대형으로 좌전방 제11연대 지역으로 접근하였다. 그러나 사전 준비된 화력으로 강타하자 순식간에 흩어져 피신하려 했으나 모든 지역에 이미 공병이 지뢰를 매설하여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되었다.
결국 북한군은 그후에도 10여 차례에 걸쳐 무모한 공격을 하였으나 백병전 속에 900여 명의 시신을 유기한 채 물러났다.
이 무렵 중앙의 미제1기병사단은 도로망의 결핍으로 북한산, 도봉산, 일대로 중대규모로 소부대로써 무려 39회에 걸쳐 침투공격을 감행한 중공군을 격퇴하였다. 우전방 미 제25사단도 퇴계원 부근에서 중공군 제65군을 포병사격으로 1,000여 명을 살상하고 방어진지를 고수하였다."다고 한다.
나는 골든선을 따라 정말 웬만한 곳은 다 찾아 다니며 서울에서의 유해를 발굴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우이동으로 들어서 큰 바위밑에 낙엽속에 남겨진 유해 몇 구를 찾는데 만족해야 했다. 실제 이렇게 많은 북한군이 죽었다면 어떻게 처리했는지 의문점이 많다. 대부분의 전투지역에서의 북한군 유해처리는 미스테리하다.
향로봉-비봉-나한봉-노적봉, 그리고 지금 제30사단 유격장이 있는 오봉산 일대, 백운대에서 서단봉-보현봉, 상장봉-도봉산-사패산에 이르는 능선 등 많이도 찾아 다니고 등산객을 만나 혹시나 하는 기대감으로 용사님을 찾으려 했던 기억이 새삼스러운데 결국은 영국군 제29여단이 많은 피해를 보았다는 장흥의 일영리 일대나 호원동 회룡사 부근 등 발걸음은 쉬지않고 움직였으나 유해는 속시원히 찾지를 못했다.
또한 수색과 화전리에서도 유해를 찾는데 어려움이 많다. 이곳은 제30사단 사령부가 위치하는데 나는 이곳에서 소위시절 상황실에 근무하며 10.26사태로부터 12.2사태와 이듬해 5.18까지의 격동의 시절을 보냈다.화전동의 마월산과 흥국사가 있는 노고산 일대 등 고양 삼송리의 오금동 등 많은 곳을 탐사하고 탐문을 해보았지만 유해발굴은 쉽지않았다. 어느닐 오금동에서 문화재 지표조사간 수통과 유해가 발굴되어 우리에게 연락이 와서 문화재 발굴팀과 함께 공동으로 조사활동을 해보았지만 그 한지점외에는 특이점이 없어 대규모 발굴작전을 진행도지 않았다.
(다) 북한산 북쪽에 남아있는 6.25전투 흔적, 그리고 오봉산 유격장 안이 일제시대부터 화류계의 별장이 있었다.
나는 중소위 시절에 오봉산 유격장에서 자대 유격대장을 두번이나 했다. 그러니 웬만한 일대는 다 뒤져보았다. 하지만 오봉산 위로 해서 포대능선을 따라 사패산에 이르는 북한산 북쪽지역은 몇 개의 개인호가 존재하고 있다. 도대체 초기 전투간 의정부나 창동 일대에서 북한군에 포위되어 탈출했다는 전사기록과는 실제 많은 차이가 있다고 본다. 실제 북한산지역으로 철수해서 한강 행주나루나 이산포로 해서 도하를 했는지 말이다.
오봉산 유격장 안으로 들어서면 산악도로를 이용하여 남쪽의 우이동으로 내려설 수 있다. 그런데 이곳에서 우린 넓적바위 밑에 남겨진 유해를 등산객의 신고로 찾아내어 몇 구 수습을 했다. 이러는 과정에 교현리의 연세가 드신 분이 말하길 일제시대에 이곳 안에 별장이 있고 사람이 끄는 수레를 이용하여 화류계의 여인들이 많이도 이 계곡에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나 전쟁 통에 모두다 불타버려 지금은 그 흔적조차 없어졌다는 것이다.
마. 정찰기지 확보 작전
중공군의 4월 공세를 격퇴한 국군 과 유엔군이 골든선-노네임선에서 부대 재배치와 방어진지를 보강하고 있을 때에 포로들의 진술과 정보판단에 의하면, 적은 4월 공세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나 병력을 증원받아 재편성을 완료한 후 공격을 재개할 것으로 판단되었다.
이에 미 제8군사령관은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함은 물론 적의 기도를 탐지하기 위한 정찰활동을 강화하기 위하여 한강 하구-횡계에 이르는 주저항선 북쪽 10km 지점에 사단별로 연대 규모의 정찰기지를 설치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전방사단들이 정찰기지 확보작전을 수행하게 되는데 유일하게 국군 제1사단 전방의 북한군 제8사단이 정찰기지 확보작전을 거부하였다.
따라서 미 제1군단장은 제1사단의 정찰기지 확보는 물론 북한군 제8사단을 격멸할 목적으로 5월 6일 군단 예비인 미 제3사단으로 서울 북서쪽의 덕은리-용두리-불광동간 제1사단 지역을 인수토록 하고 국군 제1사단은 사단 공격을 하도록 하였다.
문산 법원리
내화산
동거리
봉일천 *277
금촌 동원리 박달산
*163 *앵무봉
봉일천 *명봉산
죽원리 곡릉천 * 비호봉 일영
벽제
* 고봉산 *138 관산리 대자동 *188 고양
일산 원당리
신원리
국사봉 삼송리
구파발
능곡
불광동
덕은리
한강
국군 제1사단은 제11연대를 능곡 일대로, 제15연대를 국사봉 일대로 진출시켜 5월 7일 06:00시에 미 제3사단의 엄호하에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좌전방의 제11연대가 고봉산 일대에서 적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항공 폭격과 보전포 협동 공격으로 무려 5시간의 혈전을 펼쳐 탈환하였다.
사단은 8일에 명봉산과 대자동의 188고지선으로 진출하여 정찰기지 확보작전을 완료할 무렵 미 제1군단장은 계속 공격을 명령하여 좌익의 제11연대는 내화산-동거리를 확보하였으나 우익의 제15연대가 163-박달산 진출작전이 중공군의 증원으로 돈좌되었다. 따라서 미 제1군단장은 1개 연대로 정찰기지 확보를 하고 주력은 주저항선으로 복귀할 것을 명령하였다.
마-1 :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1) 명봉산, 박달산의 발굴 되는 유해는 어느 나라인가?
명봉산과 박달산에는 일단 개인호와 교통호가 느언 전체에 남아 있다. 특히 박달산은 동서로 길게 능러진 약 5km정도에 개인호가 그대로 있다. 광탄면의 대부분 야산엔 전투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영장리의 계명산-앵무봉, 서서울 C.C 고지군, 분수리 지역은 현재도 많은 흔적이 있고, 실제 그 당시를 기억하는 지역주민들도 상당수 살아계셨다.
명봉산과 박달산 개인호나 교통호에서 발굴된 유해는 100여구다. 전투유품이 아군 것과 공산군 것이 혼재하여 발굴되는 곳이다.
그러나 영장리. 마장리. 분수리에서의 유해발굴은 검토해야 할 사항이 많다. 실제 국군이 묻혀있다고 제보한 지역은 없다. 이 일대에서는 100여 구의 유해가 발굴되지만 지역주민들 제보는 주로 중공군이 죽어서 버려져 있는 것을 마을 사람들이 삽을 들고 울력으로 가서 묻었다는 이야기와 영장리 한곳은 50여구의 유해가 발굴되는데 군인이기 보다는 민간인이 피해를 보아 묻혀진 곳이라는 것이다. 전쟁 당시에 이곳 일대는 북으로 납치되어 가는 사람들이 죽기도 하고, 반대로 부역에 참가했다 하여 죽은 사람들이 엉켜 매장되었다는 제보도 있다.
(2) 봉일천 동원리에 남겨진 수많은 묘지들의 얽힌 사연?
동원리 야산에 상당수의 묘지가 계곡에 형성되어 있다. 어느날 이곳을 탐사하는 가운데 아침 나절인데 한 아저씨가 나는 보더니 보자고 하였다. 아마도 산책을 나온 모양이었다.
"찾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지금 산에는 왜 올라 오셨습니까?'
"우리는 이곳이 6.25전쟁터라 전사힌 용사님들의 찾지못한 유해를 찾으러 탐사하고 있습니다"
"계급이 높으신 분이 어떻게 실제 산까지 올라오셨네요. 아랫사람들이 알아서 올라오지않고... ."
"그만큼 중요한 국가 사업이다 보니 또한 정확하게 분별이 되어야하니 직접 찾아다닙니다"
"아 그러세요. 아니 밑에서 올라오면 싸인하고 그러면 되는 것 아닙니까?'
나는 상당히 기분이 언짢아 졌다. 무언가 이 사람이 꼬뚜리를 잡아서 나쁜 욕을 하려는 좌익 세력같은 생각이 들어 한마디 하려다 참고서 정중히 대답했다.
"아 예, 그럴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선생님 혹시나 나쁜 의도를 가지고 지금 저하고 대화하시는 것은 아니지요. 무척 당황스러운데 옛날 군대를 생각하시면 안되고 지금 군대는 모두가 저처럼 다 합니다"
그랬더니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전혀 그렇지 않다고 답변했다
"아 오해 입니다. 그렇게 느끼셨으면 미안합니다. 나도 공무원 생활로 40년 하고 정년퇴직하여 지금 쉬고 있으면서 산책나온 것입니다. 다만 지금 보고 게시는 저 묘지의 사연이 기막혀서 억울한 생각에 대신 드린 말씀입니다."
"그러세요. 뭐가 그렇게 억울한 사연인지 알려주시면 우리가 혹시 도울 일이 있으면 돕겟습니다"
이렇게 하여 이야기를 들으니 묘지마다 쪽지가 푯말에 붙어 있고 거기에는 이름 석자가 씌여 있었다. 이 분들은 6.25 전쟁 당시에 북한군이 철수하면서 양민들을 납치해 데리고 가다 이 일대에서 더이상 함께가지 못하게 되니까 다 죽이고 갔는데 뒤따라 들어온 국군이 수습보다는 그들을 따라가는 프락치로 처리하여 한맺힌 세월을 부역자로 저렇게 방치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유가족들도 그 당시만 해도 부역자 집안이라 하면 손가락질 대상이 되나 누가 유족이라 나타나지도 않아 계곡에서 썩어가는데 너무 비참하고 냄새가 진동하고 동네 개들이 팔다리를 한점씩 물고 다녀 동네에서 사람들이 가묘를 한 명씩 만들어 주었다 한다.
그러다 무명묘지로 있었는데 진실과 화해위원회가 발족되면서 신고를 받았는데 신고를 했더니 어느날 유족들이 나타나 묘소마다 이름표를 붙여 놓았다는 것이다.
"그럼 그후로는 어떻게 되엇습니까?"
"지켜보고 있으니 몇 번 조사하는것 같더니 더이상 아무런 진척이 없고 그대로 남아 있어서 오늘 선생님을 보니 혹시나 했더니 군인만 발굴하는 발굴단이라 하니 조금 서운해서 말이 잘못나가게 되었습니다. 이해해 주세요"
"그렇습니까, 저도 기분이 상한 표정을 지었는데 죄송합니다. 듣고 보니 많은 사연이 있는 분들의 묘같습니다. 도울 일이 있을면 좋겠는데 일단 우리는 국군 전사자 발굴이 임무라 한번 진실과 화해위원회에 연락은 해보겟습니다"
"그럴 필요는없을 것 같습니다. 이미 조사는 되었는데 뭔가 문제가 있는 모양입니다. 어서 가보세요. 많은 시간 지체되었습니다"
나는 정중히 인사를 드리고, 그리고 그 묘역에도 경례를 올리고 현장을 떠나갔다.
바. 주보급로 확보 작전
미 제8군사령관은 중서부 전선의 골든-노네임선 방어진지가 강화되고 정찰기지 설치가 완료되자, 전선 조정에 따라 노네임선으로 철수하여 적에게 넘겨준 중동부 전선의 주요 전술도로인 홍천-인제-간성 도로를 탈환하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동부 산악지대에 배치된 국군 제1, 제3군단은 부대기동과 군수지워능 험준한 계곡 통로인 속사리-현리-인제 도로에 의존하고 있었다.
제8군사령관은 특히 제3군단의 보급 문제를 해결하고 또 아군이 차후 화천저수지 동쪽에서 공세작전으로 전환시 유리한 기동로를 확보할 목적으로 미 제10군단에 배속된 국군 제5사, 제7사, 국군 제3군단에 배속된 제3사, 제9사, 국군 제1군단에 배속된 수도, 제11사단을 투입하여 홍천-인제-간성도로의 10~25km 북쪽 가리산-신월리-915고지-1037고지-대진리를 연하는 "미조리선"을 확보하도록 하였다.
이 계획에 다라 국군 6개 사단이 5월 7일 이 선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하여, 소양강 남쪽의 부평리-청구리 일대를 공격한 제5, 7사단은 큰 저항없이 이 선에 도달했다. 그러나 한석산을 공격한 제9사단과 설악산을 공격한 수도사단은 북한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격전을 치르게 되었다.
(1) 매봉- 한석산 전투
중공군 4월 공세시 제9사단은 제1군단의 예비로 강릉에서 부대 정비를 한 후에 4월 25일 제3군단에 배속되었다. 27일에는 이성가 준장의 후임으로 최석 준장이 사단장으로 취임하여 5월 2일 제7사단 제8연대 지역을 인수하여 제3군단의 좌전방 사단으로 현리 북쪽 7km의 산악지대를 방어하던 중에 7일 미조리선을 공격하게 되었다.
사단의 공격목표인 한석산(1119)과 그 남쪽 매봉(1066)은 지난 4월 25일 제3사단 제22연대가 피탈당한 고지로 북한군 제6사단이 2개 연대규모로 거점 방어를 하고 있었다.
5월 7일, 제9-30연대는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매봉은 9일에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점령하였고 이어서 10일 저녁에 한석산 마저 점령하게 된다.
이 전투에서 제30-3대대는 390여 명의 전사장자를 낸 반면 895명을 사살하고 다수의 탄약과 장비를 노획하여 대대 전사병이 일계급 특진하였다.
[4월 공세시 한석산-매봉의 제3사단 방어 전도]
35연대
가아리 명당산
36연대, 국7-5연대
양구 야촌리 봉화산 한계리 *안산
제5해병 제36연대 원통 제22연대 장수대
송정리 제36연대 양양
*915 *940 23연대
제27연대 미10군단=국3군단
*539 한양동 *1228 제18연대 가리봉
인제 덕산리
개운리 남북리 *한석산
제27연대 제36연대 제22연대
관대리 검발리 *매봉
제3연대
남전리 *733 검우석
신남리 제8연대
내린천
홍천
현리
[매봉-한석산 전투('51.5.7-10)]
서화리 간성
적6사/ 적12사
와촌 안산
원통
국3사=국 수도사단
국3-18연
수도-1연 한계령
국3-22연 가리산 양양
1226
인제 958 국9-30연 국3사=국9사
국9-29-2대 한석산 국3사 국3군단=국1군단
점봉산
598 국9-28연 매봉 국9사
검우석
국7사=국9사 현리 국3/9사
도채동
적12-81연 매봉산 용포
대암산
오마치
(2) 설악산 전투
동해안으로 재반격작전을 개시한 제1군단은 4월 15일 한계령-오색리-관모봉을 연하는 선으로 진출하여 좌전방에 수도사단, 우전방에 제11사단을 배치하여 주저항선을 구축했다.
군단도 중공군의 4월 공세를 맞았으나 다른 군단과는 달리 적의 공격이 경미하여 공세작전으로 전환이 용이하였다. 사단은 설악산을 점령하고 가리봉-용대리선으로 진출하기 위해 약수리 부근으로 이동했다.
간성
용대리 미시령
*827 속초
노동 저항령
원통 백담사 *882 마등령 설악동
수도=국11사 제11-20연
*안산 *대승령 *972
원통 우화리 *1456 기갑=20연
수도1연=기갑연 설악산
한계령 약수리
국1군단 수도-1연
가리봉
국3군단
이때 인민군 제6사단은 가리봉-대승령-노동을 연하는 선에 강력한 거점방어를 준비하고 있었다.
사단의 공격은 8일 제1연대가 가리봉을, 제기갑연대가 백담사 부근의 노동을 공격하게 되었다. 가리봉과 972고지를 점령한 사단은 전과확대를 목적으로 적을 추격하였으나 적의 완강한 저항으로 진출이 돈좌되곤 했다.
당시 북한군 제6사단은 용대리-간성간의 주보급로를 유지하기 위하여 패잔병과 증원 병력으로 대성폭포-백담사-노동을 연하는 선에 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5월 10일에는 적 2개 중대규모가 가리봉을 기습하여 한때 피탈되어 3차에 걸친 역습으로 11일 새벽에 재탈환하였다. 이어서 사단은 적을 계속추격하여 좌전방 제1연대가 안산(1430)을, 우전방 제1기갑연대가 노동을 점령하였다.
한편 수도사단의 우인접으로 진출한 제11사단은 제20연대가 1,000m 이상의 험준한 설악산 준령을 따라 백설의 잔해를 밟으며 기동을 하여 11일 저항령 부근에서 31시간동안 격전을 펼쳤다.
이렇게 동부전선의 국군이 미조리선 공격작전이 순조롭게 38도선을 연하는 캔사스선 점령을 목전에 두데 되자 미 제8군사령관은 서부 및 중서부 전선 부대도 캔사스선으로 진출하여 문산-춘천 간과 인제를 공격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5월 11일 적군이 수일내 대규모 공격을 재개한다는 정보가 입수되어 모든 공격계획을 중지시켰다. 미조리선을 공격한 제3군단과 제1군단은 13일 인제-가리봉-설악산-대포리를 연하는 노네임선 전방에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전방 지역에 대한 정찰활동을 실시하게 된다. 결국 유엔군은 서부와 중서부, 그리고 대포리를 잇는 골든선-노네임선에서 중공군 5월 공세를 맞이하게 된다.
(3) 유해발굴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가) 한석산-매봉전투의 유해발굴 결과
이미 앞에서 언급했듯이 한석산-매봉전투의 주역은 누구인가는 4월 공세시까지는 분명 국군 제3사단잉 주로 전투를 했고 많은 전과와 피해를 입었다. 다만 지금 원대리 도로변에 세워진 한석산 전투 공훈비에 유독히 제9사단 30연대가 새겨진 것에는 너무나 손희선 장군(당시는 연대장)의 어떻게 보변 강압적인 요구로 이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제30연대가 '51.5월 초에 혁혁한 공로를 세운 것은 맞다. 하지만 제30연대 참전용사님 증언에 의하면 본인들이 한석산을 공격할 때는 북한군은 이미 북쪽으로 후퇴하여 거의 무혈 입성했다고 한다. 중공군 4월 공세시 제3사단 제22연대, 18연대의 전투가 더 치열했다.
이곳에서의 유해발굴은 전사에 나와 있는 것보다는 다소 발굴 정도가 미흡했다. 매봉에서는 3,000여개의 개인호가 분포하여 3년여에 걸쳐 발굴하여 그래도 70여 구를 발굴했다. 하지만 한석산 지역은 헬기장시설 구축 등으로 훼손되어 개인호가 700여개 남아 발굴숫자 몇 구에 불과했다.
그런데 장승고개 지역에서 많은 수의 유해가 발굴되었다. 전사에는 장승고개 일대의 전투기록은 없다. 지역주민 제보에 근거하여 장승고개에서 한석산으로 들어가는 산악 능선상에 전면 굴토로 60여 구의 유해를 발굴한다. 발굴되는 유품은 모시나칸트 탄과 중공군 수류탄이 많이 나오고 M1탄창과 탄피도 많이 나왔다. 이는 전투호에 매장된 형태보다는 일부 인위적으로 옮겨진 모습이었다. 어떻게 북한군이나 아군이 임시로 가맹장한 장소일 수도 있다.
(나) 80의 제20연대 참전용사님이 설악산을 올랐다( 마등령, 저항령에 남겨진 영혼들!)
현지 임관하여 대령으로 예편한 현대령님이 본인이 전투한 설악산에 많은 전우를 남겼다고 전투현장을 가겠다고 국방부에 요청을 했다. 우리는 부산에서 올라온 참전용사님을 모시고 설악산으로 향했다.
용사님은 국군 제11사단 제20연대 소속으로 마등령 저항령 일대에서 전투를 했다고 한다. 백담사에서 오색암 방향으로 행군이 시작되었었다. 영시암에 이르러 노 스님으로부터 전쟁관련 이야기를 함께 들었다.
[직접 설악산 일대 유해를 몇 백구 수습하여 화장, 한계령 오르다 좌측편 양지바른 곳에 묻었다]
"당시에 제12사단장인 박장군(영덕 출신, 학군장교 1기로 4성장군이 된다)과 협의하여 병력과 장비를 일부 지원받아 설악산 일원에 남아 있는 하얀 백골을 보이는 것은 다 수습하였다. 피아 구분이나 신분을 확인할 방법은 없었고 남겨진 신분증도 없었다. 군번줄은 몇개 있었지만 누구건지 알 수 없는 상태로 소청동 오르다 바위군이나 계곡 여기저기서 거둬 지장제를 올리고 야전화장을 하였다.
당시에 우리는 전사한 군인이 백골병단으로 알고 있었다. 설악산에서 백골병단이 용대리에서 백담사로 오색령으로 넘어 가다 많이 전사했다고 들었다. 화장하여 묻힌 곳에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이미 그 추모비가 있는 곳은 탐사를 통해 알고 있었다. 지금 우리와 동행한 참전용사님은 백골병단이 아니라 제11사단이었다. 우리는 관련 흐백사진 몇 장을 보고 다시 행군을 하여 오세암방향으로 가다 80이 넘은 용사님의 건강을 고려해야 했다. 그런데 용사님은 계속 걷겠다고 한다.
오세암까지는 얼마가 남았는데 갑작스레 저 위가 내가 올라갔던 고지라 한다. 우린 그곳으로 용사님과 함께 올라갔다. 900고지정도 되는데 올라서니 저 멀리 저항령이 보이고 봉정암 우측의 장군대도 보인다. 그리고 개인호가 즐비하게 있다. 당장 발굴하는 것이 아니라 탐사이기에 몇 군데를 시굴하여 보았다. 탄피가 일부 나온다. 여기서 용사님을 설득하여 하산하여 일부 병력이 모시고 내려가고 우리는 계속하여 탐사를 했다.
[너무 늦어 어둠이 내리고 저항령은 말이 없고, 백담사로 내려서는 발 길은 늪에 빠져... .!]
그리고 우린 다음에 다시 한계령에서 대청봉-화채봉-둔전리 저수지 방향으로 역ㅇ르로 제11사단의 진출로를 탐사하고, 다시 대청봉에서-오세암-마등령-저항령-황철봉-미시령으로 탐사를 했다. 또한 한번은 미시령에서 황철봉-저항령에서 백담사로 탐사를하다 밤이 깊어 길을 잃고 비상 구출작전이 벌어졌던 일화도 있다.
[용사님 저를 보호 하소서!]
한여름에 황철봉에서 비박을 하게 되는데 가랑비에 얼마나 추운지 사시나무보다 더 떨며 밤을 세우고 저항령에 다다랐다. 바위조각들이 산너미같이 있고 그 사이에 사람의 뼈조각들이 흩어져 있다. 전투화 잔해도 있고 탄피도 있고 아마도 이곳 일대에 모여 있다가 비행기 폭격이나 포병의 화력에 몸둥아리가 모두 분해되어 버린듯 하다. 이곳을 지나 백담사 계곡으로 들어서 내려가는데 밤이 어둠이 찾아오고 길이 잘 보이질 않는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발을 내딛었는데 수렁에 빠지듯 몸이 들어가는데 그 순간은 천길 물속으로 들어가는줄 알고 죽었다 싶었다. "용사님 저를 보호 하소서!" 눈을 감았늗데 살아 있다.
앞에간 동료를 불러 빠져나와 다시 걷는데 이미 9시가 지나 인근 부대에서는 긴급 구조대가 출동대기 하게 되었다 한다. 그러다 불빛이 보인다. 백담사에 머물고 있던 채중사가 손전등을 들고 역으로 우릴 찾아 나섰는데 어떻게 방향이 일치하여 마만나게 되어 살아났다.
마등령에서 저항령에 이르는 코스는 마법의 성같은 느낌이다.
오세암에서 마등령에 올랐다. 마등령도 저항령이나 미시령 북쪽 신선봉처럼 바위군이 폭격으로 큰돌이 산산조각이 나고 그 위치에 있던 군인이나 노무자들이 육신이 파쇄되어 돌틈을 무덤으로 50년 70년을 기다렸다. 마등령에는 그 돌을 이용하여 개인호를 만들었다. 완전히 비밀의 성같은 느낌이다. 그런 개인호안에 용사님이 무서움을 이기려 마시던 그 당시의 술병이 그대로 세월을 이고 있었다. 그 마등령을 뒤로 하고 저항령에 이르는 구간의 라일락꽃 군락은 장관이다. 산길 우측으로 우뚝 솟은 뾰족한 고지들은 정말 마법의 성이다. 엷은 구름속으로 보이는 보이는 모습은 환상이다.
그 라일락꽃 군락은 자연그대로 멋이 녹아, 전쟁은 모른다는 시침떼기처럼 향기가 얼마나 기막힌지 연신 코를 흔들어 보았다. 얼마를 걸어 40대 중반의 등산객을 만났다.
"여기 어떻게 들어 오셨어요, 지금 통제 구간인데?"
"그렇습니까, 잘 모르고 들어온 모양입니다. 결혼 20주년 기념으로 설악산 등반을 계획하여 설악동에서 대청동으로 그리고 공릉능선을 따라 마등령-저항령-활철봉-미시령으로 내려 가려 했습니다"
"통제 기간에 출입은 불법으로 설악산 지킴이나 관리소 직원을 만나면 쫒겨나지만 그보다 더 아닌 것은 안전사고입니다. 지금 이동하다 보면 미시령까지 최소 6시간은 걸릴텐데 하산시에 밤입니다."
"우리랑 함께 가시면 안되겠습니까?"
"우린 이동하면서 주변을 탐색하여 전사한 군인의 유해를 찾는 임무를 해야 하기에 도중에 야외숙영을 하고 내일도 계속합니다"
"좀 그렇습니다. 모처럼 결혼기념으로 등반을 계획했는데 한번 봐 주십시오, 안전하게 내려가겠습니다"
우린 더이상 강요할 입장은 아니였다. 정말 안전에 조심하라고 당부하고 현장을 떠나 먼저 앞에서 저항령으로 올랐다. 멈칫하던 그 부부는 나중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사고 뉴스는 없었다.
저항령에 이르니 세상이 완전 천상이다. 새소리 들리고 바람소리 들리고 저 멀리 백담사인지 용대리인지 마을 모습도 들어온다. 설악산 에덜바이스 꽃이 피어 반기고 있는데 탐사하던 강상사의 눈에 바위 틈에 뼈가 보였다. 돌틈마다 군인관련 탄창이나 전투화 조각 등이 널려있다. 이곳에서 2011년 1차로 50여 구의 조각 유해를 발굴하기 시작하여 100여구의 유해가 발굴되었다.
(다) 가리봉 계곡의 기관총 소리
가리봉(1518)은 그 좌측에 삼형제봉(1232). 주걱봉(1386), 우축으로 1000m 고지 능선이 한계령에 이른다. 인제 덕적리는 포병사격장이 있었다. 그러니 먹을 것이 부족했던 전후 시기에 피난민이나 동네 사람들이 모여 들어 포탄에 붙어 있는 신주를 찾으러 산에 올라 벌떼처럼 삽을 들고 남녀노소가 엉켜서 탄흔에서 발굴하다 갑작스레 포탄이 떨어져 죽기도 했던 곳이다.
그런 어느날 여름날에 엄청난 수해가 발생하여 이곳 일대가 완전 파괴되어 지역주민들이 임시거처에 머물고 있던 시기인데, 한 아주머니가 열을 올리며 나를 보고 말을 한다
[탄피를 발굴하여 자식을 공부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