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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646. [역경의 열매] 김석기 (1-25) 내 인생은 언제나 하나님 손에… 눈먼 걸음을 바른길로
하나님의 부르심 믿고 걸어온 지 30년
복음으로 이끄신 주님 이름 찬양하며
이민의 꿈 잃은 형제들에겐 희망 되길
믿고 따라와 준 가족들의 헌신에 감사
김석기 목사와 김경숙 사모가 2011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부에나파크(Buena Park)에 있는 오네시모선교회 사무실 앞에서 환하게 미소짓고 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믿고 걸어온 지 이제 30년이 되었다. 돌아보니 내 인생은 언제나 하나님 손에 있었다. 내가 바른길을 알지 못했을 때에도, 때로는 어리석은 비둘기처럼 애굽과 앗수르를 향해 눈먼 걸음을 걸었을 때에도, 하나님은 결코 나를 놓지 않으셨다.
언젠가 은퇴하면 지난 삶을 글로 정리하고 싶다는 소망을 품은 적이 있다. 그 글의 제목을 두 가지로 정해 두었는데 하나는 ‘5번 프리웨이’, 또 하나는 ‘101번 프리웨이’였다. 글의 주제 성구는 로마서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였다. 그 이유는 곧 알게 되리라.
내가 이 글을 쓰는 목적은 세가지다. 첫째 하나님을 높이고 사랑하기 위해서다. 미련하고 쓸모없던 내게 생명을 불어넣으시고 하루하루 복음의 감격 속에 살게 하셔서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신 그분을 찬양하고 싶다. 둘째 남의 나라에서 이민의 꿈을 안고 왔다가 원치 않는 감옥살이를 하며 절망 속에 존재의 가치를 잃고 탄식하는 형제자매들을 위해서다. 나의 이야기들이 신앙적이고 영적인 메시지가 되어, 갇힌 이들에게 “피투성이라도 살아내라”는 소망의 말씀이 되기를 바란다.
셋째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서다. 무턱대고 아버지를 따라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믿고 따라와준 민정이와 재승이, 그리고 평생 미련한 남편 곁을 헌신으로 지켜 준 영원한 동역자, 사랑하는 아내 김경숙 사모에게 드리는 글이 되기를 바란다. 김 사모는 나와 함께 오랜 세월 복음의 길을 걸어온 동역자다. 미국 이민의 삶 속에서도 변함없이 교회와 선교를 섬겼다. 지금도 기도와 사랑으로 나를 돕고 있다. 무엇보다 이 기록이 개인의 한탄이나 서러움을 푸는 탄원서가 되지 않기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한다.
나는 1990년 미국으로 건너가 사역을 시작했고 1993년 미주 한인예수교장로회(KAPC)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후 1994년 갈릴리 선교교회와 오네시모선교회를 설립했다. 갈릴리 선교교회는 미국 교회에 조그마한 교실을 빌려 시작했다. 오네시모선교회는 재소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감옥 속에서 회심한 이들이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모임이다. 오네시모는 사도 바울이 빌레몬서에서 언급한, 감옥에서 회심하여 복음의 일꾼으로 세워진 종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이 이름은 곧 우리 사역의 정체성을 상징한다. 과거의 죄와 실패 속에서도 복음의 능력으로 새롭게 태어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쓰임 받는 인생이 될 수 있다는 소망을 담고 있다.
초기에는 로컬 카운티 교도소(Local County Jail) 방문 사역으로 시작했고 점차 주립 교도소(State Prison)와 연방 교도소(Federal Prison)까지 가게 됐다. 또 가석방자 및 출소자 재활 사역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현재는 미국 전역과 중남미 지역까지 사역의 지경을 넓혀, 복음적 회복과 재사회화, 그리고 세계 선교적 파송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약력>△1951년생 △1990년 미국 사역 시작 △1993년 미주 한인예수교장로회(KAPC)에서 목사 안수 △1994년 갈릴리 선교교회와 오네시모 선교회 설립
* [역경의 열매] 김석기 (1) 내 인생은 언제나 하나님 손에… 눈먼 걸음을 바른길로
* [역경의 열매] 김석기 (2) '겹사돈' 극복하고 결혼… 병상에서 처음 만난 하나님
* [역경의 열매] 김석기 (3) "하나님 위해 살겠다" 병상에서 한 서원 지키기로 결심
* [역경의 열매] 김석기 (4) 신학교 입학할 생각에 모든 일 제쳐두고 미국행
* [역경의 열매] 김석기 (5) '밤엔 청소, 낮엔 전도' 고된 미국살이… 교도소와 첫 인연
* [역경의 열매] 김석기 (6) 교정사역에 뿌린 씨앗, 믿음의 싹으로 돌려주시는 주님
* [역경의 열매] 김석기 (7) 한국인 재소자의 마음 흔든 복음방송 사역 간증
* [역경의 열매] 김석기 (8) 영주권 문제로 뒤통수… 하나님만 바라보고 정면돌파
* [역경의 열매] 김석기 (9) 정로로 인도하신 하나님… 9년 4개월 만에 받은 영주권
* [역경의 열매] 김석기 (10) 교도소 사역 갔다가 미국 목회자와 예비된 만남
* [역경의 열매] 김석기 (11) 교도소 사역 시작한 첫날,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 [역경의 열매] 김석기 (12) 엘살바도르 방문… 교도소 사역자로 섬기게 된 보리스
* [역경의 열매] 김석기 (13) 하나님께 화났던 형제, 10년 정성에 마음 열고 회심
* [역경의 열매] 김석기 (14) 회심 후 하나님 자녀 된 형제, 기적처럼 32년 만에 출소
* [역경의 열매] 김석기 (15) 이민 사회 무너진 가정… 눈물로 남편을 품은 아내
* [역경의 열매] 김석기 (16) 가족은 하나님의 축복이자 살아가게 하는 힘
* [역경의 열매] 김석기 (17) 진정한 사랑과 긍휼을 베풀 수 있는 용기와 은혜
* [역경의 열매] 김석기 (18) 교도소 사역은 주님이 주신 특권… 기쁨과 감사로 헌신
* [역경의 열매] 김석기 (19) 곧 돌아갈 조국, 살아갈 걱정에 결국 죽음 선택한 형제
* [역경의 열매] 김석기 (20) '재판 방청'만으로도 재소자에겐 회개와 소망으로
* [역경의 열매] 김석기 (21) "내가 하는 이 사역이 정말 주님 원하시는 일인가요?"
* [역경의 열매] 김석기 (22) 마약중독으로 고통받는 한인 자녀들, 주님의 손길 닿길
* [역경의 열매] 김석기 (23) 종신형 재소자의 결혼식… 조건 없는 아름다운 사랑
* [역경의 열매] 김석기 (24) "선을 간절히 찾는 자에게는 은총을 주시거니와…"
* [역경의 열매] 김석기 (25·끝) 인생 흔적엔 모두 하나님뿐, 남은 인생 은혜와 감사로
정리=전병선 선임기자 junbs@kmib.co.kr
***[역경의 열매] 김석기 (2) ‘겹사돈’ 극복하고 결혼… 병상에서 처음 만난 하나님
제대 후 형님 집에 얹혀 지내던 중
따뜻한 사돈처녀에게 한눈에 반해
그 시절 직장 문화는 술자리가 일상
밤낮없이 일하다 간염에 걸려 입원
형의 처제였던 아내에게 첫눈에 반했다. 아내는 지금도 청초하고 아름답고 헌신적이다. 오네시모선교회가 멕시코 티후아나에 있는 세운 교회 앞에서 2005년쯤 현지 아이들과 찍은 사진.
나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가정에서 여섯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인천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시골 마을, 6·25전쟁을 맞아 부모님이 피란 내려와 정착한 곳이었다. 중·고등학교를 인천에서 마치고 서울에 있는 대학에 들어간 나는 입학과 동시에 군에 자원입대했다. 제대 후 복학을 위해 서울 형님댁에 머물며 작은아버지가 운영하시던 T그룹에 들어가 경영을 배우고 밤에는 공부했다. 세상을 하나하나 배워 가던 그때,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막 군을 제대하고 형님 집에 얹혀 지내던 나는 외로움이 컸다. 무엇보다 채워지지 않는 ‘정’이 그리웠다. 형님이 처제를 집으로 불러 “내 동생이 서울을 잘 몰라서 그런데, 데리고 나가 점퍼 하나 맞춰 주라”라고 부탁했다. 가죽을 건네받아 노량진 거리의 작은 양복점에 함께 갔을 때 내 옷을 정성껏 챙겨주던 그녀의 손길과 표정에서 어머니의 정을 느꼈다.
조카들이 ‘이모’라 부르던, 지금의 아내를 나는 사랑하게 되었다. 밥도 잘 먹히지 않았고 잠도 오지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 감명 깊게 읽었던 알퐁스 도데의 ‘별’, 황순원의 ‘소나기’가 심어 준 순정의 사랑이 내 안에서 꿈틀거렸다.
우리 사랑은 요즘 기준으로 따지면 ‘겹사돈’에 해당하는 복잡한 관계였기에 양가 어른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나는 집안 막내라는 특권 덕분에 결국 축복 속에 결혼할 수 있었다. 아내는 아름답고 헌신적이며 청초하고 사려 깊었다. 우리의 결혼생활은 행복했고, 민정이와 재승이를 얻었다.
30대 초반 나는 그룹의 해외 차관을 담당하며 밤낮없이 일했다. 성실하고 충성스러웠다. 그러나 그 시절 한국 직장 문화는 퇴근 후 술자리가 일상이었다. 나는 수입과를 맡아 미국에서 원면을, 세계 각국에서 염료와 방직기계를 들여왔다. 당연히 술 접대 자리가 많았다. 아내는 달력에 내가 술 먹은 날 빨간 동그라미를 표시했는데, 1년 365일이 거의 다 붉게 칠해져 있었다.
그러다 30대 후반, 큰 충격을 맞았다. 지방간과 간염을 진단받은 것이다. 입원한 병동에 한 중년 여인이 들어와 전도지를 건네고 갔다.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죽음을 생각했다. 젊은 아내와 두 아이, 부모님이 떠올랐다. 눈물이 났다. 전도지를 집어 들고 병원 예배당으로 내려갔다. 예배당은 칠흑같이 어두웠지만 문은 열려 있었다. 나는 생애 처음으로 기도했다. “하나님, 살려 주십시오. 살려 주시면 하나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부모님도 아내도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처지임을 인정한 밤이었다.
다음 날 중학교 졸업 후 20여년 간 소식도 없던 친구가 병실을 찾아왔다. 외항선을 타다 잠시 한국에 들른 그가 여의도에서 내 소식을 듣고 온 것이었다. 그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예수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외항선을 타고 낯선 나라들로 향하던 밤, 밀려오는 쓸쓸함과 외로움과 두려움 속에서 주님이 지켜 주셨다는 간증이었다. 나는 그날 저녁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구원자로 영접했다. “머리털 하나도, 키 한 자도 스스로 더할 수 없다”라는 말씀을 가슴에 품으며 아직 희미하지만 확실히 입술로 고백했다. 따뜻한 손길로 주님이 나를 안아 주시는 것 같았다. 의사도 “괜찮다”라고 말했다. 그때는 ‘주님이 고쳐 주셨나?’ 반신반의했다.
***[역경의 열매] 김석기 (3) “하나님 위해 살겠다” 병상에서 한 서원 지키기로 결심
간염 입원 중 하나님께 드린 서원
일상 돌아와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나를 잊지 않으신 주님 깨닫고 회심
아내에게 “신학교에 가겠다” 고백
김석기(오른쪽 세 번째) 목사와 김경숙 사모(다섯 번째)가 2000년대 초 교도소 예배 찬양을 위해 연습하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금세 잊고 돌아서는 존재다. 얼마나 교만한가. 하나님이 독생자를, 그것도 육신을 입고 보내셔야 할 만큼 우리의 마음은 완고하다. 나는 곧 절망의 밤을 잊었다. 다시 일에 매이고 술도 시작했다. 그러던 중 우리 집안이 경영하던 T그룹 10여개 회사가 군사정권에 의해 하루아침에 넘어갔다. 작은아버지는 시골 구둣방에서 직공으로 시작해 T그룹을 일으킨 분이었다. 정치와는 거리가 멀었고, 유식도 자랑하지 않으셨다. 곧은 사업 정신으로, 형님이신 아버지를 극진히 모시며 정직하게 일궈낸 그룹이었다.
어린 시절 명절 때면 부산에서 작은아버지의 지프가 올라왔다. 나는 동네 어귀까지 4㎞를 달려가 차를 기다리곤 했다. 차가 오면 죽어라 뒤를 쫓아갔고 작은아버지는 차를 세우고 태워 주셨다. 마을 사람들은 취직을 부탁하려 닭을 품고 찾아오고, 딸을 공장에 넣어 달라 줄지어 서곤 했다. 작은아버지와 아버지의 우애, 인자함이 눈에 선한데, 그 정직한 작은아버지의 회사가 남의 손으로 넘어갔다.
나는 결심했다. “다시 찾자.” 경기 김포에 ‘하성 산업’이라는 핸드메이드 카펫 공장을 차렸다. 물불 가리지 않고 전국의 몇 안 되는 카펫 공장을 찾아가 직공들을 스카우트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수출 드라이브 정책 덕에 밤낮없이 신용장을 받아 중동으로 수출했다. 어느새 병상의 그 밤도, 친구가 전해 준 예수님 이야기도, 하나님께 드린 서원도 까마득히 잊었다.
수출은 잘 됐다. 해마다 중동 왕자가 조선호텔에 묵으며 1년 치 주문을 했다. 나는 복수의 화신처럼 달렸다. 그때, 공장을 싸게 넘겨받도록 도와준 서울 강서구 공항동 은행 지점장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술 한잔하자며 나오셨나 싶었는데, 본인을 장로라고 소개하며 예수님을 믿게 된 간증을 들려주셨다. 그리고 내 건강 이야기를 듣고는 “소개할 분이 있다”라며 어느 집으로 데려가셨다.
도봉구의 골목 안, 평범해 보이는 집이었다. 한국말이 서툰 일본인 아카사카 집사님이 나오셨다. 치유의 은사가 있으신 분이라고 했다. 지점장님 부부와 함께 무릎 꿇고 안수기도를 받았다. 그런데 집사님이 “살려 주시면 주님을 위해 살겠다”는 나의 서원을 그대로 기도하는 게 아닌가. 기도 가운데 마음을 만지시는 주님의 손길을 느끼며 눈물이 났다.
아내가 결혼 후 나를 병간호해 온 이야기, 과업과 스트레스, T그룹의 몰락, 하성 산업의 중압감…. 기도 속에 다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주님이 나를 잊지 않으셨다”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주님을 잊었지만 주님은 나를 잊지 않으셨다. 이제 주님께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주님은 한 단계 한 단계 내 인생을 다루시며 간섭하고 계셨다. 강압이 아니라 사랑으로, 나를 인정해 주시며 선을 이루어 가고 계셨다. 며칠 뒤 미국 롱비치에서 열리는 PGA 골프 쇼를 다녀올 일이 있어 갔다가 가디나의 개혁신학교를 찾아가 등록할 방법을 알아봤다. 내 마음은 이미 확정되어 있었다. 아내에게 “신학교에 가겠다”고 말했다. 말을 잇지 못하던 아내는 다음 날 출석하는 교회 목사님께 상담을 청했다. 아내의 말을 듣고 한참 침묵하시던 목사님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하니, 먼저 남편을 미국에 보내 보라”고 하셨다. 아내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면 거스르는 건 불순종이라 여겼다. 결국 “가 보라”고 했다.
***[역경의 열매] 김석기 (4) 신학교 입학할 생각에 모든 일 제쳐두고 미국행
마흔에 가정과 회사, 아픈 어머니 두고
개혁신학교 등록… 큰형님 댁에 신세 져
병상에서 내게 예수 영접하게 한 친구
미국서 신학교-노회-총회 같은 길 걸어
미국 캘리포니아 오렌지 카운티 부에나 파크에 있는 오네시모선교회 본부. 건물 절반은 선교회 사무실로, 나머지 반은 갈릴리선교교회로 사용하고 있다.
나는 미국에 왔고, 병상에 있던 나를 찾아와 예수를 영접하게 해준 친구도 어찌 된 연고인지 미국에 와서 가디나개혁신학교를 같이 다녔다. 우리는 같은 신학교, 같은 노회, 같은 총회의 목사가 되었다. 그 친구가 내 인생을 두고 한 말이 있다. “김 목사는 ‘뭣도 모르는 은혜’를 받았어.” 맞다. 무모할 만큼 인생을 뒤집는 결단, ‘뭣도 모르는 은혜’. 마흔에, 가정이 있고, 일궈 놓은 회사가 있고, 병상에 계신 어머니까지 계실 때, 회사 하나 정리하지 못한 채 아내와 두 자녀, 어머니를 뒤에 두고 9월 학기 신학교에 입학하겠다며 가방 하나 들고 서울을 떠났다.
인천 형님댁에서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 어머니는 병상에서 “왜 미국에 가야 하니 나 죽거든 가거라”고 하셨다. 그러나 내 머릿속엔 ‘9월 등록’ 생각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한 달 뒤 주님 품에 안기셨다. 장례가 다 치러진 뒤에야 한국에 도착했다. 그럼에도 집안 대대로 믿어 오던 미신을 버리고 하나님을 믿고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할 때면 하나님께 드린 감사와 임종을 지키지 못한 불효의 마음 사이에 작은 위로를 얻는다.
모든 것을 버렸다. 지금도 그 무모한 결단을 떠올릴 때면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는지 내 성미대로 한 결단이었는지 자문한다. 그때마다 ‘내 삶의 전과 후’를 비교해 봄으로써 답을 구한다.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리고 또 묻는다. “내가 아직 한국에 남아 있었다면 큰일 날 뻔했다.” 안도의 한숨을 쉰다.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찾아오신 하나님께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신 뜻이 이제는 하나님 안에서 살도록 하시는 결단의 분기점임을 확신한다.
가방 하나 들고, 가족과 이별하고 김포공항을 떠났다. 그리고 미국 캘리포니아 풀러턴의 큰형님 댁으로 왔다. 형님은 장손이었지만 아들을 낳지 못하고 딸 넷을 미국으로 유학 보냈다. 평생 일군 그룹까지 넘어간 뒤 형님도 미국으로 왔다. 한국에서 내가 형님을 많이 도왔던 터라, 내 갑작스러운 변화를 믿기 어려워 했다.
한국의 둘째 형님도, 미국의 큰형님도, 내가 한국에서 돈을 빼돌려 미국에서 살려는 술수라고 오해했다. 가족 간 오해가 깊어 한국에 남아 있던 아내가 큰 고생을 했다. 내가 떠난 뒤로 아내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전철과 택시를 갈아타고 인천 본가로 가 병시중을 들고, 다시 새벽에 아이들을 깨워 학교 보내고를 반복했다. 미국 들어오는 날까지 그렇게 했다. “미국에 가면 언제 또 뵐지 몰라서라도, 그렇게라도 해야 했다”라고 아내는 말했다.
광야와 개척의 시간, 미국 생활이 시작되었다. 형님댁에서 개혁신학교에 등록하고 가디나로 통학했다. 생각지 못한 갈등도 시작됐다. 큰형님과 형수님은 내가 큰돈을 들고 왔다고 생각했다. 자동차와 세탁소, 생활비에 대한 요구가 이어졌다. 처음 겪는 갈등이자 시험이었다. 나에 대한 오해가 풀리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두 달 뒤, 아내와 아이들이 여행 비자로 입국했다. 풀러턴에 아파트를 얻고 복음장로교회에 출석했다. 가족이 온 다음 날, 우리는 이른 새벽 풀러턴의 크레이그 리저널 파크에서 예배를 드렸다. 아내와 아이들은 한 달 사이 달라진 남편과 아빠를 보며 의아해 했다. “주님, 이 시작이 주님과 함께하게 하소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하소서.” 나는 간절히 기도했다.
***[역경의 열매] 김석기 (5) ‘밤엔 청소, 낮엔 전도’ 고된 미국살이… 교도소와 첫 인연
전도사 일하며 졸업 후 목사 안수
아내는 생계 책임지고 밤 청소까지
작은 교회 개척, 한인 대상 전도
교민들 아픔 보며 목회 방향 정해
2018년 멕시코 샌 루이스 교도소에서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김석기 목사.
아내는 몹시 갈등했다. 아브라함을 따라갈 바를 알지 못하고 순종한 사래처럼 하나님과 남편을 따랐지만, 자신이 이제 가장이 되어 가정을 이끌어야 한다는 무게에 어깨가 짓눌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울며 기도하던 아내는 어느 날, 주님이 주신 위로의 말씀을 붙잡고 일어섰다. 나는 신학교에 다니며 한인교회 전도사로 훈련을 받았고, 졸업 후 목사 안수를 받았다. 아내는 가든그로브의 샌드위치 가게를 운영하며 가장이 되었다. 고된 미국살이가 이어졌고, 가게 문도 닫게 됐다. 한 푼도 건지지 못했다. 생활을 위해 밤 청소를 시작했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도시 노워크에 교실 하나를 빌려 교회를 개척했다. 새벽에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아내는 서너 시간 눈을 붙이고 어덜트 스쿨(Adult School)에서 영어를 배웠다. 나는 교회 주변에 사는 한인들 주소를 구해 한 집 한 집 문을 두드리며 전도했다. 낮에는 다들 일하러 나가 만나기 어려웠다. 딱 한 가정이 문을 열어 주었다. 집에 들어가 교회를 알리고 전도했다.
기도하는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그러나 첫 전도라는 기쁨에 힘주어 기도했다. 눈을 뜨니 부부가 내 손을 가리켰다. 왼손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밤 청소에 쓰는 강한 소독약에 손이 갈라졌는데, 기도하며 주먹을 꽉 쥐다 살이 터진 것이었다. 놀라게 해 미안하다고 사정을 설명했다. 그 부부는 한국에서 온 지 얼마 안 돼 더 놀랐다고 했다. 그 가정이 한 번 교회를 찾아왔다. 개척교회는 우리 가족 넷과 부모님이 한국에 있는 두 자매, 남학생 하나가 전부였다. 그래도 주님은 매 순간 은혜를 주셨다. 우리는 밤엔 청소, 낮엔 전도를 이어갔다.
어느 주일, 젊은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이(청소년)가 잘못을 저질러 소년원에 있습니다. 재판에 같이 가 주실 수 있나요?” 그 어머니와 함께 처음으로 청소년 재판정에 갔다. 맨 뒤 자리에 혼자 앉은 나, 앞에는 판사 검사 변호사뿐이었다. 오렌지카운티의 재판정에서 어린아이 하나가 수갑을 차고 수인복을 입고 들어왔다.
어머니는 울었다. 우리의 이민 현실을 마주했다. 가슴이 아팠다. 여자 판사가 자리에 앉으며 맨 뒷자리의 나를 가리키고 통역에게 물었다. “저분은 누구죠?” “아이 어머니가 다니는 교회 목사님입니다.” 판사가 의자를 돌려 앉으며 법복을 고쳐 입고 정중히 물었다. “하실 말씀이 있으면 하십시오.”
나는 당황했지만 입을 열었다. “오늘 이곳에서 우리 교민들의 아픔을 보았습니다. 교회의 사명이 크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이 아이를 타이르고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판사는 형량 6개월을 감해 주며 아이에게 “목사님 말씀을 잘 들으라”고 했다. 그날,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부르심을 어렴풋이 붙잡았다. 어떤 목회를 해야 하는지 마음에 새겨진 날이었다.
이상하리만치 내가 만나는 사람마다 교도소 이야기, 교도소과 관련된 교민들 이야기를 했다. 신학교 추천으로 부목사 면접도 봤지만 열리지 않았다. 나중에 알았다. 주님이 나를 교도소로 부르신 것을. 내게 ‘열린 문’은 교도소였다.
그렇게 시티 카운티 교도소 사역이 시작되었다. 롱비치 연방 교정 기관, 산페드로 이민국 구치소, 랭캐스터 이민 구치소, 엘센트로 이민 구치소까지 사역이 넓어졌다. 마약·중독자들을 위한 기독교 기반 재활센터 사역이 열렸고, 벨플라워에 중고매장인 ‘Thrifty Store’가 세워져 사역의 경제적 밑천이 되었다.
***[역경의 열매] 김석기 (6) 교정사역에 뿌린 씨앗, 믿음의 싹으로 돌려주시는 주님
가까이는 3시간 먼 곳은 12시간 거리
재소자 16만 명, 그중 한인도 수백 명
30년 동안 그들에게 말씀의 씨앗 심어
2011년 멕시코 쎄레소 교도소 창살을 앞에 두고 영어로 설교하는 김석기(왼쪽) 목사와 이를 스페인어로 통역 중인 현지 선교사.
재소자 가족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영적으로 세워 가는 갈릴리장로교회 아웃리치 사역도 시작했다. 청소년 범죄 예방을 위한 심포지엄을 매년 열어 이민 가정의 가치관을 신앙으로 세우고, 우리 자녀들이 꿈과 목적을 재정렬하도록 돕는 리디렉션 캠프(Redirection Camp)도 연방 교정기관과 협력해 진행했다. 누군가는 우리 사역을 “바위에 씨앗 뿌리기”라고 했다. 맞다. 끝이 없어 보이는 사역. 그러나 바위에도 때가 되면 싹이 난다.
캘리포니아 5번 프리웨이를 따라 35개의 주정부 교정시설이 길게 놓여 있다. 가까운 곳은 3시간, 멀리는 오리건주 경계의 레벨 4 교도소까지 12시간. 재소자 16만명 중 한인은 수백명이고 상당수는 종신형을 받고 수감 중이다.
우리의 사역은 늘 카운티에서 시작된다. 구치소에서 만나고, 재판정에서 서 있고, 정기 방문으로 상담하며 복음을 전한다. 형이 확정되면 주 정부 교도소로 따라간다. 주말이면 거의 항상 교도소를 방문한다. 공적 예배도 드리지만, 가장 중요한 건 개인 면담이다. 각자 사연이 있고, 이민자이기에 영·혼·육 모든 면에서 갈급하다.
5번 프리웨이는 우리에게 긴 사연들과 가슴 저린 만남이 뿌려진 길이다. 30년 동안 한 영혼 한 영혼에 주님의 사랑을 전했다. 말씀의 씨앗을 심었다. 결과는 우리의 것이 아니었다. 배운 것이 있다. 사랑만큼 큰 힘은 없다. 주님이 세상을 향해 하신 것처럼 끝까지 사랑하는 것. 한 영혼을 찾아가는 그 긴 길을 주님은 기뻐하셨다. 세상은 알 수 없는, 세상에 없는 은혜를 마음에 부어 주셨다. 죄와 사람을 분리해 사랑하는 법과 용서하는 법을 배우게 하셨다. 때로는 바보가 되어야 했고, 호구가 되어야 했다. 그런데 끝까지 사랑하면 그 길이 능력이 된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변치 않는 한 가지는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이었다. 산페드로 이민 구치소 사역을 할 때 연세가 있는 여자 전도사님과 사모님이 동역했다. 가끔 한국의 추방자 사역을 위해 나가면 많은 형제를 만나는데, 그들의 이야기에 은혜와 감사가 넘친다. 나는 그들의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 두 분은 형제자매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기억하세요” 묻자, 사모님이 두툼한 노트를 꺼내 보여줬다. 노트에는 우리가 만난 형제자매들의 이름이 한 명도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는 노트를 펴 놓고 아침 저녁, 새벽기도와 밤 기도마다 그 이름들을 부르며 기도해 왔다고 했다. 누군가 그들의 이름을 불러 주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그들이 은혜 아래 머물 수 있었던 이유엔 한 사람의 기도가 있었다. 주님은 주님의 마음을 가진 이를 통해 영혼들을 붙드신다. 5번 프리웨이의 긴 길을 달리며 나와 아내도 수없이 많은 이름을 불렀다. 이 길은 주님의 가슴을 만지는 시간이었다. 한 영혼을 사랑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채우는 시간이었다. 우리가 가장 자주 부른 찬송은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였다. 운전하며 수도 없이 불렀다. 찬송할 때마다 주님이 품에 안아 주시는 것 같았다. 뒤늦게 깨달았다. 긴 운전 시간은 우리 마음을 주님의 마음으로 준비시키는 시간이었음을. 한 형제, 한 자매를 사랑으로 만나게 하시려는 예비였음을.
***[역경의 열매] 김석기 (7) 한국인 재소자의 마음 흔든 복음방송 사역 간증
간증 후 만난 한국인, 정기적 방문 원해
매주 개인 성경 공부… 1년 후 정식 사역
해마다 한인 청소년 범죄 예방을 위해
리디렉션 진행, 복음 전하고 꿈 심어줘
2001년 오네시모선교회가 주최한 청소년 여름캠프 기념 사진.
우리는 3년에 한 번씩 차를 바꾸어야 했다. 1년에 6만 마일을 달렸다. 어느덧 재소자들과 한 몸이 되었고 그들의 가족과도 하나가 되었다. 토요일에 드물게 집에서 쉬는 날이면 죄책감이 들었다. “이렇게 쉬어도 되나?” 좋은 음식을 먹으면 형제들이 떠올랐다.
내가 산타아나에서 사역을 시작한 지 1년쯤 되었을 때 복음방송에서 사역 간증을 나눌 기회가 있었다. 방송에서 처음 간증을 하다 보니 긴장이 되었지만 주님의 은혜를 전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증언했다.
며칠 뒤 롱비치에 있는 터미널 아일랜드 연방 교도소에서 전화를 받았다. 그곳에서 수감자들의 신앙 지도를 맡고 있는 종교 담당 교역자 압둘이라는 분이었다.
그곳에 있는 한국인 한 분이 내 간증을 듣고 꼭 자신을 방문해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그 교도소는 사방이 태평양으로 둘러싸여 마치 영화 ‘빠삐용’의 배경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처음 만난 그 형제는 내게 정기적으로 방문해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고, 나는 기꺼이 수락했다. 나와 아내는 매주 한 번씩 그 형제를 찾아가 개인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그 형제는 다카하시라는 일본인도 내게 소개하며 함께 복음을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두 사람과의 성경공부를 이어 갔다. 1년이 흐른 뒤 교역자 압둘이 우리에게 팀을 꾸려 정식으로 사역해줄 것을 요청했다. 나는 15명의 봉사자를 모아 매주 찬양과 함께 예배하기 시작했다. 압둘은 특별히 우리가 김치를 가져가는 것을 허락했는데, 외국인 재소자들이 김치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이를 통해 많은 이들이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다.
재소자들은 큰 은혜를 받았고, 압둘은 한국인들의 열정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우리 사역팀은 교도소 안에서 재소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어느 해 크리스마스엔 교도소장의 특별 허락으로 30인조 오케스트라가 준비되고, 광장에서 큰 예배가 열렸다. 그날은 한국에서도 유명한 분이 색소폰으로 ‘대니 보이(Danny Boy)’를 연주했고 고향을 그리워하는 재소자들의 마음을 울렸다. 많은 이가 모여들었지만 관리상의 문제로 아쉽게도 그 행사는 한 번으로 끝났다.
우리 선교회는 매년 한 번씩 한인 커뮤니티의 청소년 범죄 예방을 위한 리디렉션(Redirection) 프로그램을 산속에서 7일간 진행했다.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청소년들에게 꿈을 심고 복음을 전하며 삶의 롤모델을 제시하는 사역이었다. 특히 연방교도소에서 진행한 초이스(Choice) 프로그램은 매우 인상 깊었다. 청소년들이 재소자들과 마주 앉아 그들의 간증을 듣고 “너희는 절대 우리처럼 되지 말라”는 고백을 직접 들으며 충격을 받고 삶을 돌이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프로그램은 청소년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고, 커뮤니티에도 큰 유익을 주었다. 연방 교도소는 매년 봉사자들의 수고를 격려하기 위해 감사 연회를 마련했다. 우리도 초청받아 귀한 교제를 나누었는데 그날 나는 큰 은혜를 받았다. 미국의 자원봉사 정신이 단순한 선행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역경의 열매] 김석기 (8) 영주권 문제로 뒤통수… 하나님만 바라보고 정면돌파
영주권 전문 사기꾼에 두 번이나 걸려
인간에 대한 상처와 분노 차올랐지만
물질에 의존한 잘못된 삶 바꾸기 위한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고 ‘정로’ 결단
2011년 갈릴리선교교회 성도들이 ‘틴 챌린저(Teen challenger)’ 회원들을 위해 식사를 마련하고 함께 기도하는 모습.
어느 날 지인 한 명이 찾아와서 영주권 이야기를 꺼냈다. “영주권이 없으면 길에서 잡혀간다”던 그의 말에 겁이 난 우리는 그가 소개한 젊은이를 만났다. 그 젊은이는 우리를 서명하게 하고 이민국에 데리고 가 취업허가증도 받게 해줬다. 우리는 그것이 영주권이라 믿고 안심했다. 그러나 뒤늦게 그것이 모두 사기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지인도, 그 젊은이도 자취를 감추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 신문 광고를 보고 또 다른 회사를 찾았다. 교회의 안수집사가 운영한다는 말에 신뢰가 갔다. 그런데 이번에도 속았다. 그는 목회자들만 골라 사기를 치는 사람이었다. 매주 토요일, 나는 웨스턴과 7가 교차로에 있는 맥도날드에서 그를 만났다. 영주권 진행 상황을 묻고 돈을 돌려 달라고 사정했지만, 그는 매번 새로운 거짓말만 늘어놓았다. 3개월 동안 단 한 주도 빠짐없이 만났지만 한 푼도 돌려받지 못했다. 내 마음은 인간에 대한 상처와 분노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가족을 지키지 못하고 고생만 시키고 있다는 자책은 나를 더 옥죄었다. 그날 나는 화장실에 들어가 앉은 채로 주님께 따졌다. “주님, 이것이 저를 이곳에 부르신 이유입니까?” 그러면서도 돈을 돌려받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한참 후 이상한 평안이 찾아왔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스쳤다. “그 사람이 바로 너를 변화시키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신 도구다.” 그때 마음에 떠오른 말씀이 로마서 8장 28절이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 순간, 분노가 감사로 바뀌었다. 마음에 힘이 생겼다. 나는 그에게 찾아가 말했다. “돈은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 걱정하지 말라.” 그러고는 그 자리를 나왔다. 돌아오는 길, 나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내가 살아온 방식이 늘 편법이었다는 것이다. 사람을 의지하고, 돈으로 해결하려 했던 그동안의 삶의 방식이 드러난 것이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잘못된 삶의 원리를 바꾸시기 위해 사기꾼들을 내 앞에 두셨다는 걸 알게됐다.
캘리포니아 세리토스에 집을 샀지만 1년도 되지 않아 파산했다. 한국의 재산도 모두 남의 손에 넘어갔다. 아내가 세운 샌드위치 가게도 빚만 남기고 문을 닫았다. 하나님은 내가 의지하던 세상의 모든 것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거두어 가셨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셨다.
나는 결심했다. 정로(正路)로 가겠다고. 이민국에 가서 내 사정을 솔직히 털어놓고 “불법을 행한 나를 추방하신다면 한국으로 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직원이 뜻밖의 말을 했다.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겠다. 신청해 보라.” 그날 나는 처음으로 정로의 길이 열리는 경험을 했다.
교회 담임목사님께 모든 과정을 고백하고, 교회를 통해 영주권을 신청하게 해 달라고 부탁드렸다. 목사님은 흔쾌히 허락하셨다. 유대인 변호사를 통해 신청했지만, 몇 차례 반송과 보완을 거쳐 2년이 걸렸다. 하나님은 그 시간을 통해 나를 다듬고 계셨다.
***[역경의 열매] 김석기 (9) 정로로 인도하신 하나님… 9년 4개월 만에 받은 영주권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영주권 인터뷰
허위 내용 포함된 서류 본 직원에게
지금까지 사기당했던 내용 설명하자
“그간 고생 많았습니다”며 위로 건네
미국 캘리포니아주 벨플라워 시티에 있는 오네시모선교회 사무실 모습. 1층엔 99센트 상점과 중고가게가 있고 2층을 선교회 사무실과 갈릴리 선교교회로 사용했다.
드디어 영주권 인터뷰 날이 다가왔다. 아침에 아내, 두 자녀와 함께 기도했다. “만약 오늘 떨어져서 한국으로 돌아가라는 결과가 나오면, 주님의 뜻으로 알고 기쁘게 순종하자.” 그렇게 보따리까지 싸 놓고 출발했다. 인터뷰 직전, 변호사가 귓속말로 말했다. “오늘 인터뷰 담당 중 캄보디아 직원이 있는데, 그분이 하면 무조건 떨어진다. 그 직원이 아니길 기도하라.” 우리는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바로 그 직원이 우리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녀는 두꺼운 서류를 넘기며 얼굴을 붉혔다. 화가 난 듯 “왓 이즈 잇(What is it)?”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때 처음 알았다. 맨 처음 허위로 제출된 서류에 내가 25년간 목회자 신분으로 미국에 있었다고 기록돼 있었다. 다른 잘못된 서류들도 계속 나왔다. 그녀는 서류를 덮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기세였다.
그 순간 변호사가 우리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가족은 사기를 당한 것입니다. 지금 제출된 전도사 서류가 진짜입니다.” 작은 목소리로 20분간 이어간 이야기에 여직원의 표정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리더니 갑자기 아내에게 다가와 꼭 껴안고 말했다. “그동안 얼마나 마음고생이 많으셨습니까.” 우리 가족의 서류에 도장을 쾅쾅 찍어 주었다.
그날 우리 가족은 함께 고백했다. “주님, 감사합니다. 오직 주님만이 하셨습니다. 주님만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우리는 9년 4개월만에 영주권을 받았다. 9만 달러라는 큰 대가도 치렀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 가족에게 하나님만 남게 하셨다. 영주권은 세상의 신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것을 보게 하시기 위한 도구였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어리석은 비둘기처럼 사람을 의지하며 하나님께 온전히 돌이키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 의지를 다 끊게 하시고 정로의 길로 인도하셨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9~10)
주님 앞에 나는 기도한다. 주님, 앞길에 험한 일이 있어도 두려워하지 않게 하소서. 사람을 의지하지 않게 하시고, 편법을 버리고 정직의 길을 걷게 하소서. 넘어질 때마다 온전히 주께 돌이켜 주께서 보여 주신 길, 곧 정로를 따르게 하소서. 오늘도 내 마음에 한마디로 명하소서. “정로로 가라.”
나의 사역은, 내 마음을 먼저 준비시키신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믿는다. 캘리포니아주 노워크에서 교실 하나를 빌려 집사람, 우리 딸과 아들, 그리고 성도 두 명과 함께 예배드리기 시작했다. 교도소 사역을 시작하게 된 데엔 그 이전에 내 마음을 움직인 분명한 동기가 있었다. 그 후로 나는 오렌지카운티 교도소를 찾아가 사역을 시작했다. 그곳엔 한인이 약 15명 정도 있었다. 나는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교민들이 살아가는 현실을 눈으로 보고 알게 되었다.
***[역경의 열매] 김석기 (10) 교도소 사역 갔다가 미국 목회자와 예비된 만남
산타아나 시티 교도소 사역자 빌 콕스
여기서 사역하겠냐는 제안에 7일 고민
해본적 없는 영어 설교부터 막막했지만
딸과 아들이 모세의 아론처럼 도와줘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 남쪽 끝에 있는 도노반 교도소 모습.
아침 일찍 성경책 한 권을 들고 카운티 교도소를 찾았다. 가족 면회를 기다리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두 시간을 기다려 한 형제를 만났다. 내가 처음으로 만난 그 형제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미국 교도소에 있다. 가운데 유리창 하나를 두고 전화기로 면회했다. 면회 시간은 한 시간. 파란 수의를 입고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는 면회는 늘 눈물로 범벅이 되는 처절한 시간이었다.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 기도해 주고 나오면 내 마음도 그 형제의 마음처럼 처참했다.
주차장으로 들어가는데 한 미국인이 나를 불렀다. 내 또래의 온유한 얼굴을 가진 그는 친절한 말투로 다가와 “목사님이십니까”라고 물었다. 서툰 영어로 “그렇다”라고 답하자 그는 앞의 큰 건물을 가리키며 “여기서 사역을 하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산타아나 시티 교도소에서 사역하는 침례교의 빌 콕스 목사라고 했다.
그의 눈에는 열정이 가득했다. 내가 영어를 잘 못 한다고 하자, 그는 담대하게 말했다. “김 목사님(Pastor Kim),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실 겁니다.” 그러고는 내 손을 꽉 잡았다. 내가 감사를 표현하며 “7일만 시간을 달라”고 하자 흔쾌히 “그렇게 하라”며 전화번호를 건네주었다.
가슴이 뛰었다. 두려우면서도 ‘이게 무엇인가’하는 거룩한 호기심이 앞섰다.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그날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7일 동안 하나님께 기도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지만 신학교 강의 중 들었던 말씀이 생각났다. “하나님은 준비된 자를 사용하신다.” 나는 무엇이 준비되었나. 자격이 없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왜 자격 없는 나에게 콕스 목사를 만나게 하셨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7일이 다 되어갈 무렵, 성경을 읽다가 마음에 강하게 박힌 말씀이 있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영어 성경에서 ‘desire’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갈망을 우리 마음에 주신다는 뜻으로 다가왔다. 이상한 담대함이 생겼고, 그 담대함이 곧 평안이 되어 마음을 안정시켰다.
나는 콕스 목사에게 “하겠다”고 전화했다. 먼저 설교를 준비해야 했다. 영어 설교,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한국어 설교도 어려운데, 영어 설교라니. ‘어떻게 하지?’ 겁이 났다. 요한복음 3장 16절을 영어로 외우는 것부터 시작했다. 한국어로 설교문을 쓰고 영어 기도문과 설교문을 붙들었다.
모세가 “나는 입이 둔합니다”라며 부르심을 두려워할 때, 여호와께서 “네 입을 대신할 아론이 있지 않느냐”고 하셨다. 그렇다. 내게도 아론이 있었다. 영어를 도와줄 딸과 아들. 한국어로 작성한 설교문을 아들에게 건네주니 영어로 번역해 주었다. 딸은 내가 영어 설교를 읽으면 발음과 억양, 호흡을 고쳐주고, 어디서 멈추고 어디서 힘을 줄지 코치를 했다.
***[역경의 열매] 김석기 (11) 교도소 사역 시작한 첫날,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재소자 앞에서
영어로 설교하자 한국인 여성이 나서
스페인·중국어 통역하는 광경에 깜짝
엘살바도르 출신 보리스 형제도 만나
2000년 엘살바도르 여자 교도소에서 설교하는 김석기 목사의 모습.
처음 산타아나 시티 교도소 사역을 시작하던 날, 아내와 목사님 두 분과 함께 교도소를 했다. 캘리포니아에서 시설과 환경이 가장 좋다는 교도소였다. 컨트롤타워의 조작으로 무거운 문이 열렸다.
먼저 여자 재소자 동에 들어갔다. 1·2층 수감방은 개미 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만큼 잠잠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우리를 작은 문틈 사이로 바라보는 얼굴들이 보였다. 교도관이 예배 안내 방송을 했다.
다시 무거운 문이 열리자 여자 재소자 여럿이 예배실로 들어왔다. 한 사람 한 사람 악수하며 인사하는 중 한국인 한 분을 만났다. 중년의 여성이었는데, 우리를 보고 눈물을 훔치며 인사했다. 내 가슴도 두근거렸다. 열 명 남짓 재소자들은 필리핀 베트남 흑인 중국 멕시코 등 다양한 지역 출신이었다. 영어를 잘 못하는 이들이 많아 당황스러웠다.
나는 준비한 대로 영어로 설교해야 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우리와 인사한 한국 여성이 내 영어 설교를 스페인어와 중국어로 통역하기 시작한 것이다. 찬양하고 기도할 때 재소자들은 눈물을 흘리며 “아멘, 아멘”으로 화답했다. 첫 예배가 끝나고 “다음에 다시 만나자”고 인사한 뒤 남자 재소자 동으로 이동했다. 마음은 주님 주신 은혜로 가득 찼다. 그곳에, 생각지도 못한, 영어·스페인어·중국어를 감당할 수 있는 한인 동역자가 있었다는 사실은 너무나 놀라웠다. 여호와 이레. 그렇게 사역은 시작되었다.
한 가지 깨달음이 있었다. 하나님은 빌 콕스 목사를 만나게 하시고, 7일의 기도로 마음을 준비하게 하시고, 동역자들을 준비시키셨고, 교도소 안에 4개 국어가 가능한 권사님까지 예비해 두셨다. 부족한 나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것은 단 한 가지, 순종이었다.
쫓아가는 사역, 그것이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일이었다. 미국 산타아나 시티 교도소에서 나는 다국적 이민 재소자들을 만나 섬겼다. 그중 한 명이 엘살바도르 출신 형제, 에드거 보리스였다. 그는 영어를 잘했고 매주 수요일마다 열리는 성경 공부에 빠지지 않았다. 때때로 교도소가 ‘록다운(lockdown)’ 되어 외부 활동을 제한하는 날을 제외하고는 혼자라도 꼭 성경공부 자리에 나왔다.
우리는 점점 마음을 나누게 되었다. 그는 미국에서 자동차 정비사로 일하며 큰 보디숍(자동차 수리 공장)을 운영했었으나 마약에 빠져 범죄에 연루된 과정을 들려주었다. 그는 결국 미국에서 추방돼 엘살바도르에서 재판을 받게 됐다. 나는 그를 주님께 인도하고 말씀을 가르쳤다. 그는 추방 직전에 이렇게 고백했다. “고향으로 돌아가면 저도 다른 이들의 영혼을 위해 헌신하며 주님의 일을 하고 싶습니다.”
추방된 지 6개월쯤 후 그는 미국 LA에 남아 있던 자신의 아내를 통해 “엘살바도르로 와 주셨으면 한다”는 메시지를 전해왔다. 나와 아내는 망설임 없이 그를 찾아가기로 했다. 엘살바도르는 중남미 국가 중 유일하게 미국 달러를 통화로 사용하는 곳이었다. 공항은 열악했지만, 보리스가 우리를 마중 나왔다.
***[역경의 열매] 김석기 (12) 엘살바도르 방문… 교도소 사역자로 섬기게 된 보리스
보리스 선교사 동역자 파블로와 함께
세코트 교도소 방문, 예배와 안수기도
마약 중독자 사역에 헌신하는 보리스
그의 신학 공부 돕고 교도소 사역 권유
2000년 엘살바도르를 방문한 김석기 목사 부부와 이들에게 방과 식사를 제공한 파블로 집사 부부가 함께 찍은 사진.
보리스 선교사의 동역자로 나이 지긋한 ‘파블로’라는 분이 있었다. 그는 우리를 엘살바도르에서 가장 험악하기로 유명한 세코트 교도소로 안내했다. 그곳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열악했다. 숨쉬기조차 힘들 정도로 냄새가 났다. 빽빽하게 널린 빨래들이 하늘을 가리고, 좁고 습한 공간에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옷을 제대로 걸치지 않은 몸들엔 다리부터 얼굴까지 가득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그들의 눈을 확인하기 위해 한참 들여다 봐야 할 정도였다. 이곳에 비하면 미국의 교도소는 천국 같았다. 무더위와 악취, 공포가 가득한 그 공간을 보니 ‘지옥’이라는 단어가 저절로 떠올랐다.
재소자들은 수형복이 아닌 자기 옷을 입고 있었다. 이유를 묻자, 정부에 예산이 없어 수형복을 지급하지 못해 집이나 지인에게서 받은 옷을 입는다고 했다. 교도소장은 우리를 반갑게 맞으며 의약품 지원을 부탁했다.
먼저 여자 교도소에 들어갔다. 약 200~300명의 재소자 앞에서 나는 말씀을 전했고 보리스가 통역했다. 예배를 마치고 나오려는데 교도관이 문을 열지 않았다. 이유를 묻자, 병든 재소자들을 위해 기도를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약이 없어 치료할 방법이 없기에, 말씀을 전하러 오는 사역자들에게 기도를 요청하는 것이었다. 주님의 긍휼하심을 전할 기회라 여기고 나는 담대하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안수 기도를 했다. 온몸이 땀으로 젖었지만, 주님은 성령의 충만함을 부어 주셨다.
이어서 남자 교도소로 이동했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로 길이 좁았다. 재소자들은 상의를 벗고 팬티만 입은 채 복도에 앉아 있었다. 아내에겐 큰 부담이었지만, 우리는 무사히 말씀을 전하고 기도한 뒤 나왔다. 교도소장은 돌아가는 길에 다시 약품을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그날 저녁 우리는 파블로 부부와 식탁에 둘러앉아 간증을 나누었다. 그들에겐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아들은 청소년기에 마약에 빠져 갱단과 연관되어 살해당했고, 작은아들 역시 마약 과다복용으로 죽었다고 했다. 두 아들을 다 잃은 슬픔 속에서 주님께 돌아온 그들은 선교사를 섬기고 마약 중독자들을 돕는 사역에 헌신하게 되었다. 파블로는 고백했다. “아들은 잃었지만, 더 많은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우리는 눈물을 삼켰다.
식사 후 그가 조용히 부탁했다. “오늘 밤, 함께 가 주실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와 함께 칠흑같이 어두운 산길을 두 시간이나 달려 작은 집에 도착했다. 그곳은 약 20명의 청소년이 모여 있는 마약 재활 기관이었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주님의 사랑을 전했다.
다음 날, 보리스가 사는 작은 방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신학을 공부해 졸업 후 재활 기관사를 하고 싶어했다. 나는 그의 신학 공부를 돕고 교도소 사역을 권유했다. 이후 우리는 세 차례 엘살바도르를 방문해 교도소 사역을 함께했고, 보리스는 신학 공부를 마친 후 교도소 사역자로 섬기게 되었다.
***[역경의 열매] 김석기 (13) 하나님께 화났던 형제, 10년 정성에 마음 열고 회심
모르고 마신 마약 취해 살인하고
종신형 선고 받은 안타까운 형제
“하나님 싫으니 면회 오지 마세요”
10년 만에 “죄송합니다”며 통곡
캘리포니아주 수전빌 교도소 입구에 서 있는 나무. 형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이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이 나무에 신발을 던진다. 10년 만에 회심한 형제 역시 그곳에 자신의 신발을 던졌다.
캘리포니아주 수전빌 교도소는 차로 13시간이나 걸리는 먼 곳에 있었다. 산을 여러 번 넘어야 갈 수 있는 그곳에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선고받은 한 청년이 수감돼 있었다. 그 형제의 부모님은 한국에 있어 자주 찾아올 수 없었다. 그는 원래 교회를 열심히 다니던 신앙인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친구들이 초대한 생일파티에서 마약이 탄 음료를 모르고 마신 뒤 약에 취해 친구가 건넨 총으로 사람을 쏘아 죽이게 되면서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먼 길이었지만, 우리는 그를 만나러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여러 절차를 거쳐 들어간 면회실은 넓은 홀에 30여개의 테이블이 번호와 함께 놓여 있었다. 지정된 자리에 앉아 그를 기다리며, 홀 안에 설치된 두 대의 음식 자판기를 살펴보았다. 1달러 지폐만 사용할 수 있었고 한 사람당 50달러까지만 반입이 허용됐다. 투명한 비닐 가방에 돈과 면허증만 넣어 들어갈 수 있었고, 다른 물품은 금지됐다. 늦게 가면 음식이 동나기 때문에 미리 치킨 햄버거 초콜릿 아이스크림 같은 인기 메뉴를 꺼내놓고 기다렸다. 특히 매운 치킨이 제일 인기였다.
드디어 그 형제가 면회실에 들어왔다. 반가운 마음이 앞섰지만, 그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목사님, 왜 오셨어요? 다음부터는 오시지 마세요. 하나님 말씀도 하지 마세요. 저는 하나님 싫습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왜 이런 일이 제게 일어났겠습니까? 저는 하나님 열심히 믿었는데…. 하나님은 안 계세요. 다시는 오지 마세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 버렸다. 우리는 테이블 위에 놓인 음식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옆에 있던 다른 형제들에게 나눠주고 아무 말도 못 한 채 다시 13시간의 길로 되돌아왔다. 그는 하나님께 화가 나 있었다. 그 마음도 이해되었다. 며칠 동안 “하나님, 왜 그러셨나요?”라는 기도밖에는 할 수 없었다.
몇 달이 지나도 그의 모습이 잊히지 않아 다시 찾아갔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화난 얼굴로 팔짱을 낀 채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오지 말라니까요. 왜 또 오셨어요? 오지 마세요.”
그렇게 말하고는 돌아가 버렸다.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하나님, 언제쯤 저 형제의 화난 마음이 풀리고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렵니까?”
그러나 미워지지 않았다. 몇 달이 지나면 또다시 만나러 가야만 했다. 그렇게 10년 동안 꾸준히 면회를 다녔다. 또다시 만나고 힘없이 돌아온 뒤 일주일 후 지난 어느 날 그에게서 편지가 도착했다.
“목사님, 사모님, 죄송합니다. 제가 뭐라고 그 먼 길을 오지 말라고 못되게 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10여 년 동안 끊임없이 찾아오셨잖아요. 오늘도 웃으시며 말없이 돌아가시는 뒷모습을 보고 방에 들어가 통곡했습니다. 그 모습 속에서 주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잘못했습니다.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습니다. 성경공부를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교재를 보내주세요.”
***[역경의 열매] 김석기 (14) 회심 후 하나님 자녀 된 형제, 기적처럼 32년 만에 출소
성경 공부하며 모범적 수감생활 중
정부에서 감형법 통과돼 서류 요청
변화된 삶 정리해 제출, 심사 통과
종신형에서 감형 한국서 신실한 삶
미국 교도소에서 복음을 듣고 변화된 한 형제가 추방되어 돌아간 멕시코 베라크루스 지역의 집회에서 복음을 전하는 모습.
할렐루야! 그 편지를 읽으며 우리 부부도 함께 울었다. 10년 동안 하나님은 쉬지 않고 일하고 계셨다. 돌같이 굳은 마음을 녹이시는 데 10년이 걸렸다.
일주일 전 다녀왔지만, 그의 얼굴을 보고 안아주고 싶었다. 그를 보러 가는 발걸음이 유난히 가벼웠다. 한달음에 달려간 기분이었다. 우리는 깊게 포옹했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말씀을 나누고, 함께 기도했다. 우리 아이들 이야기를 들려주자 그는 무척 기뻐했다.
그는 점점 변했다. 우리가 오는 날을 기다리며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고 교도소 안에서 청소 같은 궂은일을 맡았다. 여러 프로그램에 참여해 배우며 삶이 보람 있게 변해갔다. 그러나 한 가지 변하지 않는 것이 있었다. 다른 형제들은 우리가 사 온 음식을 잘 먹었는데, 그는 늘 콜라 한 캔 외에 다른 것은 손대지 않았다. 한참 지나 조심스레 이유를 물었다. “먹고는 싶지만, 이 먼 길 오시려면 경비도 많이 드실 텐데 넉넉하지 못한 선교회 형편에 제가 그럴 수 없어요.”
순간 마음이 아팠다. 이렇게 착하고 깊은 사람이 왜 이런 곳에서 인생을 보내야 하나 안타까웠다.
사역을 처음 시작할 때, 교도소에 있는 사람들은 험악하고 무서울 거로 생각했다. 간혹 그런 이도 있었지만 우리가 만난 이들 중엔 그런 사람은 없었다. 이 형제도 온순하고 의리 깊은 청년이었다.
그렇게 우리의 여정은 계속되었다. 25년쯤 지난 어느 날, 면회실에서 만난 그의 얼굴에 어두운 빛이 드리워져 있었다. 무슨 일이냐 묻자 성경공부 중 기도하다 자신이 죽인 형제가 떠올랐다고 했다. 그 가족의 마음이 느껴져 너무 괴로웠고, 하나님께 진심으로 회개 기도를 드렸다고 했다. 그는 꺼이꺼이 울며 눈물과 콧물을 흘렸다. 우리는 그의 등을 쓰다듬으며 함께 울었다. 그때 마음속에 ‘이제 하나님이 이 형제에게 무언가 하시겠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다.
2주 후, 선교회 사무실로 그의 전화가 왔다. “목사님, 정부에서 감형법이 통과돼 신청하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여러 서류가 필요했다. 오네시모(Onecimo) 선교회는 그가 공부한 성경 내용과 변화된 삶을 정리해 제출했다. 1년도 되지 않아 그는 심사를 통과했고 종신형을 받았던 형제가 마침내 교도소에서 나왔다.
그는 32년을 살았다. 기적이었다. 하나님은 늘 그와 함께하시며 일하고 계셨다. 그는 시민권자가 아니어서 한국으로 추방됐고, 지금은 어머니와 함께 신실하게 살아가고 있다.
이 여정은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해 보여도,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는 반드시 열매 맺는다는 믿음을 새겨 주었다. 그가 한국 땅에서 믿음 안에 뿌리내리고, 또 다른 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통로가 되길 기도한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는 또 다른 형제를 만나러 길을 나선다. 하나님께서 가라 하시는 곳으로.
***[역경의 열매] 김석기 (15) 이민 사회 무너진 가정… 눈물로 남편을 품은 아내
10년 넘게 남편 없이 두 남매 키워낸
한인 재소자 아내의 깊은 상처를 보며
이민 가정에서 가장 힘들고 큰 시련은
부부 중 한 사람이 교도소 갇히는 것
2013년 미국 오렌지카운티 여성 구치소에서 만난 여성이 한국으로 추방되는데 갈 곳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런 이들을 돕기 위해 서울 관악구에 마련한 쉼터 개원 예배 모습.
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 나는 지금도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한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사망이 이르게 되었으나,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생명에 이르렀다.” 그 ‘한 사람’이 바로 주님이셨다.
떠올릴 때마다 감사가 흘러나오는 가정이 있다. 그 집엔 이제 든든한 남편이 있고, 장성해 부모의 기쁨이 된 두 남매가 있다. 모든 변화의 중심에는 한 남편의 아내이자 두 남매의 어머니가 있었다. 그 가정은 주님의 사랑 안에서 사는 기도가 있는 집이다. 어떤 일을 만나도 주님의 뜻을 먼저 묻고, 어려운 이웃을 외면하지 않는 가족이 되었다.
그 아내는 긴 세월 눈물을 삼키며 꿋꿋이 견디고 두 남매를 키워냈다. 나는 그녀의 남편을 교도소에서 처음 만났다. LA에서 네 시간가량 떨어진 산타바바라 지역 교도소였다. 우리 사역팀은 한 달에 한 번 그곳을 방문해 말씀을 전했다. 그 안에는 열 명 남짓의 한인 재소자들이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이 그녀의 남편이었다. 그는 긴 형기를 선고받고 복역 중이었다.
몇 년이 흘러 남은 형기를 마친 그가 가정으로 돌아왔다. 그의 아내를 나는 그때 처음 만났다. 그녀의 첫인상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오랜 세월 흘린 눈물 자국이 남아 있는 그녀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 시절 우리는 아르테시아 산업단지에서 교회와 선교회를 함께 하고 있었다. 그 남편은 가끔 교회에 나왔지만 아내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나는 그 가정을 자주 심방했다. 출소 후 하루도 쉬지 않고 묵묵히 일하는 그 남편의 일터를 찾아가 격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가정을 찾을 때마다 아내의 마음속 깊은 상처가 느껴졌다. 10년 넘게 남편 없이 홀로 아이들을 키워온 세월의 응어리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민 목회를 하며 나는 수많은 가정의 무너짐을 보았다. 이민 사회의 현실은 처참하고 치열했다. 서로 울면서도 일어서지 못하는 가정들, 교회 안에서도 말 못 하고 아파하는 부모들, 자녀와의 대화 단절…. 미국에서 자란 아이들은 부모와 문화와 가치관이 달라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고, 그 차이가 문제를 더욱 깊게 만들었다.
부부 중 한 사람이 교도소에 가는 건 특히 큰 시련이었다. 함께 일해서 겨우 집값과 생활비를 맞추는 현실 속에서, 부부 중 한 명이 수감된다는 건 경제적 부담이 커지는 걸 넘어 가정이 무너질 위기에 서는 일이었다. 실제로 내가 만나고 돕고 중보했던 가정 대부분이 깨졌다. 자녀들에겐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남았다. 처음엔 버텨보지만 결국 포기하고 이혼하거나, 설령 기다려 출소를 맞이해도 그 이후 갈등이 더 크기 일쑤였다.
보상심리 때문이었다. 오랜 수감 기간 혼자 가정을 지킨 배우자가 상대에게 책임을 돌리고 경제적·정서적 보상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갈등을 넘지 못하고 다시 범죄를 저질러 재수감되는 이도 적지 않았다. 미국의 재범률은 73%에 달한다.
이민자의 현실은 더욱 회복이 어렵다. 출소 후에도 3~5년의 보호관찰이 이어지고, 그 기간 작은 실수 하나만 있어도 다시 교도소로 돌아가야 한다. 법과 제도에 익숙하지 않은 이민자들은 늘 불리한 조건 속에서 싸워야 했다.
***[역경의 열매] 김석기 (16) 가족은 하나님의 축복이자 살아가게 하는 힘
가족 없으면 출소 후에도 재기 못해
암 걸리고도 사역 이어간 한 목사님
임종 앞두고 “가장 중요한 건 가족”
바람난 남편 둔 아내도 끝내 가장 지켜
김석기 목사 부부 지원을 받아 멕시코 티후아나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고향 베라크루스로 돌아가 복음을 전하고 있는 마누엘 가족의 모습.
내가 아는 한 목사님은 90세가 넘어서까지 사명을 감당하시다가 암 진단을 받고도 수술 권유를 거절한 채 주님의 부르심을 준비하셨다. 임종을 앞두고 한 장로님이 “목사님, 하나님 다음으로 가장 소중했던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목사님은 주저없이 대답하셨다. “가족이야… 가족.”
정말 그랬다. 가족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근원이자, 세상의 죄와 마귀의 공격 속에서도 버티게 하는 힘이었다. 사역을 하며 깨달은 것은 이것이다. 가족이 없는 사람은 출소 후에도 다시 일어서기 어렵다.
또 다른 한 가족은 미국으로 이민 와 열심히 일해 두 자녀를 키워냈다. 아내는 꾸준히 교회에 나갔지만 남편은 바쁘다는 이유로 예배를 소홀히 했다. 세월이 흘러 안정된 생활을 누렸으나 남편의 마음은 점점 세상으로 향했다. 결국 젊은 여자와 바람이 나 집을 나갔고 재산과 집까지 팔아버렸다.
아내는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고 작은 아파트로 옮겨 다시 일터로 나가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파트 앞에 초라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가까이 가 보니 남편이었다. 버림받고 암에 걸린 상태였다.
아내는 그를 집으로 들여 음식을 내주었지만 억울함과 분노가 치밀었다. 결국 목사님을 찾아가 울며 말했다. “목사님, 어떻게 저 사람을 사랑하라 하십니까. 이건 말이 안 됩니다.” 목사님은 조용히 말씀하셨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아내는 그 말에 더 화가 났다. “목사님, 저건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제가 어떻게 저 인간을 사랑합니까.”
집으로 돌아온 아내는 골방에 들어가 울며 기도했다. 그런데 그 말씀이 계속 마음에 맴돌았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는 그 말씀을 붙잡고 아내는 그날 밤을 견뎠다. 잠시 후 남편이 잠든 방을 열어보니, 미움으로만 보이던 그가 갑자기 불쌍하게 느껴졌다. 눈물이 났다.
다음 날 다시 목사님을 찾아갔다. 목사님은 고린도전서 13장 말씀을 전하며 기도해 주셨다. “집사님, 사랑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그 후 아내는 남편을 데리고 주일마다 예배에 나갔다. 어느 날 남편이 말했다. “의사가 그러는데 앞으로 6개월밖에 못 산다오. 미안하오.” 그녀는 더욱 간절히 기도했다. “주님, 이 사람을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을 영접하게 하소서.”
시간이 흘러 남편은 세례를 받았고 6개월이라던 생명이 3년으로 연장되는 은혜도 허락됐다. 마지막 순간에 남편은 아내의 손을 잡고 말했다. “여보, 미안하오.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은 당신과 함께한 시간이었소. 천국에서 기다리겠소.”
그 권사님은 고백했다. “그 마지막 말은 평생의 어떤 고난보다 귀했어요. 주님이 나를 오래 참아 주셨듯, 나도 그 사람을 오래 참을 수 있었어요. 감사합니다, 주님.”
***[역경의 열매] 김석기 (17) 진정한 사랑과 긍휼을 베풀 수 있는 용기와 은혜
한 가정의 비극, 쌍둥이 사건 겪으며
우리 사역자들에게 남긴 공의의 교훈
사람의 동정은 눈물을 흘리게 하지만
하나님의 긍휼은 회개와 새 생명 낳아
2008년 콜롬비아 보고타의 모습. 오네시모선교회가 파송한 우고 안토니오 목사는 지금도 이곳에서 사역하고 있다.
아메리칸드림을 품고 미국 땅에 들어온 우리 교민들의 모습 속에서 난 신앙의 흉년과 영적 방황을 보았다. 때론 한 이민자의 마음으로, 때론 자녀를 이끌고 이국에 들어온 한 아버지의 마음으로, 또 양떼를 돌보는 목회자의 눈으로 그들의 현실을 마주했다. 그리고 흉년 속에 하나님의 임재가 떠난 모압으로 내려가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나오미의 집 같은 한 가정의 비극을 함께 겪게 되었다.
그녀는 쌍둥이 여동생 살인미수 혐의로 카운티 교도소에 수감됐다. 미국 언론은 이 사건을 ‘쌍둥이 사건(Twins Case)’이라 부르며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 사건은 이민자 가정의 실상과 정서를 보여주며 한인타운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녀는 유죄 판결을 받았다.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그녀를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국의 변호사 그룹이 그녀를 돕겠다며 한인 변호사도 파견했는데, 그 변호사의 역할은 오히려 미국 재판정에서 부정적 인상을 남겼다. 나는 그녀의 정신적·영적 상태를 살펴온 사역자로서 검사 요청에 따라 증인석에 섰다. 검사는 내가 매주 그녀를 만나 나눈 신앙적 반성과 태도에 대해 집요하게 질문했다.
그녀의 마지막 공판 날, 판사가 종신형을 선고하며 단호히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사람이 죽거나 물리적 피해가 치명적으로 큰 것도 아닌 사건이었지만, 재판부는 범행 동기와 사회적 파장을 매우 무겁게 판단했다. 한 변호사가 내게 말했던 미국 재판 기준이 떠올랐다. “미국 법정은 세 가지를 봅니다. 가정, 커뮤니티의 관심, 그리고 교회의 관심입니다.”
당시 사건은 한인 커뮤니티에서 큰 관심을 끌었다. 우리 선교회에도 구명운동 요청이 빗발쳤다. 여러 한인 단체가 연일 신문에 호소문을 게재했다. 우리는 실제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항소 전문 변호사 론 맥그래거를 선임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한인 교회와 사회를 향해 대대적인 모금 운동을 시작했다. LA 지역에서는 변호사 기금 마련을 위한 음악회도 열렸다. 하지만 타국에서 진행한 대규모 구명운동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기도와 노력을 다했지만, 예상치 못한 오해와 갈등이 뒤따랐다. 차가 없어 렌터카를 이용한 것조차 오해의 빌미가 되었다. 우리는 변호사 선임엔 성공했지만 항소는 기각되고 아무런 결실도 얻지 못했다.
그녀는 이미 30여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소했다. 세월이 흐르며 당시 사건이 우리 사역자들과 한인 커뮤니티에 남긴 교훈을 곱씹었다. 무엇보다 깊은 자성(自省)을 했다. 우리는 동정과 긍휼을 자주 혼동한다. 사람의 동정은 눈물을 흘리게 하지만, 하나님의 긍휼은 회개와 새 생명을 낳는다.
그 사건을 통해 배웠다. 진정한 사랑은 죄를 죄라 말할 수 있는 용기이며, 진정한 긍휼은 그 영혼이 다시 주님께 돌아오도록 붙드는 은혜임을. 30년의 세월 동안 변한 것은 세상뿐이었다. 하나님의 공의는 여전히 살아 있고, 그분의 긍휼은 여전히 죄인을 향해 손을 내미신다.
***[역경의 열매] 김석기 (18) 교도소 사역은 주님이 주신 특권… 기쁨과 감사로 헌신
변하지도 않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힘든 사역 왜 하느냐 핀잔도 듣지만
여건상 내 의로움 드러낼 자리 없어
2006년 멕시코 티와나에서 열린 마누엘 결혼식에서 주례하는 김석기 목사. 마누엘은 김 목사가 목사로 안수했다.
그는 마지막 절규로 소리쳤다. “목사님! 목사님!” 미국에서 형기를 마치면 길은 보통 두 갈래다. 하나는 365일 이상의 형을 산 외국인의 길이다. 영주권자까지 포함해 모두 자국으로 추방된다. 이 경우 이민세관단속국(ICE) 교도소로 이감되어 몇 달의 법적 절차를 거친 뒤 추방된다. 추방 당일엔 두 명의 교도관이 미국 정부가 제공한 항공권을 들고 추방자와 함께 비행기에 타 인천공항까지 동행하여 한국 정부에 인계한다. 다른 한 길은 시민권자의 경우로, 이들은 추방 조치 없이 가정으로 복귀한다.
미국의 재범률은 내가 알기로 73%에 이른다. 가석방되는 이들의 경우 곧장 집으로 가기보다 재활 기관이나 소버 홈(Sober Home)으로 가서 그 기간을 버티며 새로운 단계를 준비한다.
캘리포니아주 새크라멘토에 있는 폴섬(Folsom) 교도소는 오래된 교정시설로, 그곳에 한인 재소자가 다섯에서 여섯 명 있었다. 나는 아내와 2~3주에 한 번, 왕복 8시간 거리를 오가며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전도자로 세우는 일에 마음을 다했다. 어떤 이들은 우리에게 핀잔을 주기도 했다. “그렇게 힘든 사역을 왜 하느냐. 변하지도 않는 죄지은 사람들을 뭣 하러 찾아다니느냐.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하지….”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만 주시는 위로와 확신을 허락하셨다. 우리는 기쁨으로, 감사로, 피곤을 모른 채 많은 형제를 찾아다녔다.
우리가 이 사역을 주님이 주신 특권으로 받아들이게 된 데에는 주님의 영혼을 향하신 목적을 깊이 깨닫게 된 과정이 있었다. 교도소 사역에는 내 의로움을 드러낼 자리가 없다. 그럴 환경 자체가 주어지지 않는다.
첫째 교도소에서는 사진을 찍을 수 없으니 남에게 자신을 드러낼 조건이 없다. 둘째 이 사역은 시간이 오래 걸린다. 봄에 씨를 뿌리고 비가 오고 햇볕이 쬐어 싹이 나고, 여름을 지나 가을에 열매를 거두는 것처럼, 한 인간이 은혜로 거듭나 방향이 바뀌고 인생의 여러 과정을 거쳐 빚어지기까지는 긴 세월이 필요하다. 죄악 된 습관과 본성은 거듭난 이후에도 오랜 신앙생활 속에서야 비로소 약해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 길에는 주님의 마음이 필요하고, 주님은 그 마음을 채우도록 은혜를 공급하신다. 그래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만 바라보게 되는, 특별한 은혜의 사역이다.
셋째 이 사역은 결과를 바라보지 않는 사역이다. 결과를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시험에 들고 주저앉는다. 결과는 하나님의 것이며, 우리는 과정을 성실히 걸을 뿐이다. 오늘은 하나님이 주신 시간이고, 오늘 만난 사람은 하나님이 섬기라고 주신 사람임을 믿는 것이다. 결과에 매이면 우리는 이삭이 아니라 에서를 낳는다. 그래서 이 길은 때로 고독하고 외롭다.
폴섬에서 긴 형기를 마치고 한국 고향으로의 추방을 위해 내가 사역하던 산페드로 이민세관단속국(ICE) 교도소로 이감된 형제가 있었다. 나는 아내와 우리 팀과 함께 주 1회 산페드로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날도 그 형제를 만났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그의 심정을 물었다.
***[역경의 열매] 김석기 (19) 곧 돌아갈 조국, 살아갈 걱정에 결국 죽음 선택한 형제
형기 마치고 곧 한국으로 돌아갈 형제
오랜 수감생활로 사회적응에 큰 부담
기도로 격려했지만 자살로 생 마무리
“주님, 이 영혼을 당신 품에 거두소서”
갈릴리 선교교회가 CYA(California Youth Authority·청소년과 성인 교도소 중간 단계 수감시설)와 협력해 진행한 청소년 범죄예방을 위한 심포지엄(2013년) 모습.
“아메리칸 드림을 안고 미국에 왔다가 생각지도 못한 사건에 휘말려 살인자가 돼 오랜 형기를 마치고 한국으로 갑니다. 목사님, 그런데 한국 가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한국에 친척이 있습니까?” “누님 한 분이 계십니다.”
야윈 몸을 가진 그는 오랜 수감생활 탓인지 사회로 돌아가는 것에 큰 부담을 느끼는 것 같았다. 우리는 그날 함께 예배드리고, 한국에 가서 도움이 필요하면 알려 달라며 기도로 힘을 북돋아 주었다.
한 주가 지나 이민세관단속국(ICE) 교도소에 갔지만 그 형제가 보이지 않았다. 다른 형제에게 물으니 며칠 전부터 안 보였다고 했다. 예배를 마치고 1층으로 내려오는데 어둑한 뒤쪽에서 큰 목소리가 들렸다.
“목사님! 목사님!”
뒤돌아보니 독방(Segregation)에서 부르는 소리였다. 깜짝 놀라 그 앞으로 갔지만, 들여다볼 창이나 구멍도 없었다. 감방문 아래 3cm 남짓한 틈만이 유일한 대화의 통로였다. 그 틈으로 형제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목사님, 저 며칠 있으면 한국으로 갑니다. 안녕히 계세요. 그동안 너무 감사했습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가슴이 울컥했다. 나는 콘크리트 바닥에 엎드렸다. 감방문 아래 햇빛이 실오라기처럼 스며드는 틈에 입술을 갖다 대기 위해 몸을 더 낮췄다. 문 넘어 형제도 엎드렸다. 우리는 그 작은 틈으로 손가락 하나를 밀어 손을 맞잡고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주께서 이 형제를 지켜 주옵소서. 한국에 나가 주님의 자녀답게 살게 하시고 힘과 지혜를 주소서.”
그리고 여호수아의 말씀을 함께 외웠다.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수 1:9)
그날처럼 온 힘을 다해 크게 부르짖어 기도한 적은 드물었다. 그가 독방에 갇힌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아마도 두려움 때문이었을 거로 생각했다. 내 마음은 슬픔으로 무거웠지만, 동시에 기도 속에 주시는 힘이 있어 담대히 작별하고 돌아왔다.
이틀 뒤, 이민세관단속국 채플린(Chaplain)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가 죽었습니다.” 말문이 막혔다. “고향에 돌아간다”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던 그가 죽다니.
“어떻게 죽었습니까?” “자살입니다.”
눈물이 났다. 꿈을 안고 미국에 왔지만 가족을 모두 잃고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부초 같은 인생의 외로움, 돌아갈 고향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렸을 그의 마음이 전해졌다. ‘나 같은 죄인, 조국에서 어떻게 살아갈까.’
영사관 요청으로 병원에 갔다. 미약한 숨이 붙어 있었기에 교도 당국은 아직 사망으로 처리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사실상 숨진 거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나는 그의 귀에 입을 대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어 예수님을 전하며 아멘을 외쳤다. “주님, 이 영혼을 당신의 품에 거두어 주옵소서. 비록 세상은 그를 인정하지 않지만 주님은 아십니다.” 그리고 그는 주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이 세상에 쓸모없는 영혼은 없습니다. 모두 하나님께는 귀한 영혼입니다.”
***[역경의 열매] 김석기 (20) ‘재판 방청’만으로도 재소자에겐 회개와 소망으로
사역의 첫걸음으로 삼은 ‘재판 방청’
가족 친척도 없는 이국땅 법정에서
찾아준 목사 방청만으로도 큰 위로
교도소에서 바이블 칼리지(성경통신대학)를 공부한 재소자들이 김석기 목사에게 메일로 보내온 과제물들.
오렌지카운티에는 세 곳의 교도소와 지역별 법원이 있었다. 아마 나만큼 법원을 자주 드나든 사람도 드물 것이다. 재소자 한 명을 제대로 돌보기 위한 첫 사역은 그의 재판 날 방청석에 앉아 그 재판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재판정 한쪽에는 재소자들이 재판을 기다리는 구금실이 있다. 재소자들은 수인복을 입은 채 이곳에 앉아 자신의 차례를 기다린다. “목사가 내 재판을 보러 와 있다”라는 사실 하나가 한 영혼의 마음을 뒤흔들 수 있다는 사실을 한 형제의 편지를 통해 배웠다. 가족도 친척도 없는 이국땅에서 잘못을 저질러 법정에 섰을 때, 그 앞 어딘가에 자기를 위해 시간을 내어 앉아 기도하는 목사를 본 그는 큰 회개와 소망을 얻었다고 고백했다.
그 고백 이후 나는 ‘재판 방청’을 사역의 첫걸음으로 삼았다. 하도 법정을 다니다 보니 나를 알아보는 판사들도 생겼다. 한번은 일본계 판사가 한인 재소자의 재판정에서 뒤편에 앉아 있던 내게 “당신은 누구요”라고 물었다. 법정 브로커쯤으로 여긴 듯했다. “목사입니다”라고 답했더니, 판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점심시간에 법정 카페에서 샌드위치를 먹고 있는 내게 그 판사가 다가와 “Pastor Kim(김 목사님)”이라 부르며 옆에 앉아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고, 내 사역에 대해 묻는 판사에게 차분히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 판사가 헤어지며 남긴 한마디가 지금까지도 내 마음에 남아 있다. “김 목사님, 귀한 사역을 하십니다. 그런데요, 교도소 안에 있을 때는 다들 예수님을 잘 섬깁니다. 그러나 출소할 때는 예수님을 교도소에 남겨 두고 혼자 나갑니다.” 이 말은 재소자 사역을 바라보는 내 시각에 중요한 교훈이 됐다.
많은 이들이 말한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맞는 말이다. 나는 재소자들을 보며 죄와 사람을 분리해 보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그날도 나는 열여덟 살 된 한 형제의 결심 공판을 지켜보기 위해 법정 뒤편에 앉아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부모를 따라 미국에 왔던 그는 사춘기를 지나며 불행하게도 멕시칸 갱단에 가입했다. 멕시칸 갱단 중에서도 악명 높기로 유명한 ‘M13’이었다. 당시 그의 아버지는 작은 가게를 운영했고, 형이 돕고 있었다. 어느 날, 형의 친구가 가게를 찾아와 누군가를 비방하는 이야기를 했다. 동생인 그는 그 이야기를 듣고 분노를 참지 못하고 비방의 대상이 된 사람을 찾아가 총을 쐈다. 너무도 어처구니없게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죄와 의를 분별하지 못한 청소년의 충동적 영웅심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낳는지, 나는 그 재판정에서 뼈아프게 보았다.
피고석 뒤편엔 그의 부모가, 좌측에는 백발의 미국인 노부부가 자리해 있었다. 잠시 후 한 아시아계 젊은 여성이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들어와 앉았다. 그녀가 든 피켓에는 한 남성의 사진과 함께 이렇게 적혀 있었다. “아빠 사랑해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들이 피해자의 가족이라는 것을. 재판이 진행되는 도중 그 아이가 피켓을 높이 들고 울부짖듯 외쳤다.
***[역경의 열매] 김석기 (21) “내가 하는 이 사역이 정말 주님 원하시는 일인가요?”
법정에서 마주한 한국인 피해자 가족
그날 이후 한동안 깊은 회의감에 빠져
희생자 가족을 위한 사역 세미나 참석
사역의 균형과 영혼 다루는 겸손 배워
복음 사역을 위해 멕시코 베라크루스로 가는 비행기를 기다리며 공항 바닥에 누워 쉬는 김석기 목사와 그 옆에 앉은 사모의 모습.
순간 법정이 정적에 휩싸였다. 판사도, 검사도, 변호인도, 방청석의 모든 이들도 그 피켓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나는 알았다. 피해자의 아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옆에 앉은 미국인 노부부는 그 여인의 시부모였다.
아…. 이 비극을 어찌하랴. 그 아내가 한국 여자라니. 저 어린아이, 아버지를 잃은 저 아이는 어쩌란 말인가. 그 순간, 나는 피고석의 청년을 위로하러 온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한 가정을 무너뜨리고, 젊은 한국인 아내를 홀로 남기고, 아이의 가슴에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남긴 그 사건 앞에서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고 말하던 내 사역이 그때만큼은 의심스러웠다.
‘저 희생자들은 누가 위로하나. 저들은 곧 잊혀질 텐데….’ 혼란과 부끄러움, 죄스러움이 밀려왔다. 판결이 내려졌다. 50년형.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검사와 판사, 변호인 간 협의를 통해 25년형으로 감형하려 했으나, 그날 법정에서 울부짖던 아이를 본 판사가 형량을 두 배로 늘렸다고 했다.
판결이 내려지자 내 옆에 있던 피고의 어머니가 벌떡 일어나 피해자 아내를 향해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퍼붓고는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날 이후 한동안 깊은 회의감에 빠졌다. ‘내가 하고 있는 이 사역이 정말 주님이 원하시는 일인가.’
그러나 태양은 여전히 떠오르고, 시간은 멈추지 않았다. 몇 달 뒤 캘리포니아의 한 교도소에서 희생자 가족을 위한 사역 세미나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참석했다. 그곳에서 나는 미국 사회 속에서 잊혀 가는 희생자 가족들의 아픔을 끌어안고, 치유와 회복을 위해 오랜 시간 씨름해 온 이들의 헌신을 보았다. 그 자리를 통해 나는 배웠다. 사역의 균형과 영혼을 다루는 겸손을.
세월이 흐른 뒤 나는 먼 곳에 수감된 그 형제를 다시 찾아갔다. 그의 영혼은 여전히 어두웠고, 기도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몇 년 후, 또다시 그가 마음에 밟혀 찾아갔을 때 그는 정신병동으로 이감돼 있었다. 그 이후로는 다시 볼 수 없었다.
한편 지금도 종신형을 살며 30년 넘게 교도소에 있는, 이제는 50대가 된 한 형제는 크리스마스 카드에 이렇게 적어 보냈다. “날이 갈수록 하나님의 은혜는 늘어만 갑니다.” 그 고백을 읽으며 나는 깊이 생각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삶에는 소망이 없지만, 하나님을 만난 자에게는 교도소조차 은혜의 학교가 된다.
철창 안에서 회개한 자는 비로소 자유를 배우고, 십자가 앞에 무릎 꿇은 자는 다시 일어설 용기를 얻는다. 지금도 내 마음에는 두 여성의 얼굴이 남아 있다. 가해자의 어머니와 피해자의 아내, 두 여성의 눈물 속에 비친 인간의 연약함과 죄로 인해 갈라지고 상처 입은 두 가정의 모습. 눈물로 기도하던 두 여인을 기억하며 나는 다시 무릎 꿇는다. 주여, 긍휼을 베푸소서. 그들의 눈물을 닦으시고, 우리가 모두 주님의 공의와 사랑으로 다시 서게 하소서.
***[역경의 열매] 김석기 (22) 마약중독으로 고통받는 한인 자녀들, 주님의 손길 닿길
마약중독 문제로 치료 필요한 경우
정신건강 법원에서 치료·재판 병행
재판 관련 판사 검사 변호사와 접촉
신앙으로 돌보는 기관 가도록 도와
2015년 김석기 목사에게 복음을 듣고 훈련받은 재소자가 멕시코 티후아나에 세운 교회에서 입당 예배를 마친 주민들이 음식을 먹으며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법원을 찾는 일이 많았다. 오렌지카운티 교도소 관할 지역엔 5개 법원이 있었는데 그 중엔 청소년 법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내가 법원을 다니는 첫 번째 이유는 재판을 받으러 오는 재소자들과 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통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다. 특히 낯선 미국 땅에서 언어도 통하지 않고, 도와줄 사람도 없는 상황에서 목사가 자신을 위해 법원에 앉아 기도해 준다는 사실만으로도 분노로 닫힌 마음, 독기로 가득한 마음, 돌처럼 굳은 마음이 열릴 수 있다고 믿었다.
오렌지카운티에는 정신 질환으로 분류된 재소자들을 재판하는 법원이 따로 있었다. 안타깝게도 한인 자녀들 가운데 마약 중독으로 정신적 문제까지 겪는 이들이 많았다. 기소된 피의자들에 대해 법원은 정신적 치료가 필요하면 ‘멘털 코트(Mental Health Court, 정신건강 법원)’로 보내 치료와 재판을 병행했다. 나는 한인 젊은이들의 마약 사건 재판을 가능하면 빠지지 않고 찾아갔다. 그들을 신앙적 케어 기관으로 보낼 수 있도록 변호사와 상의하고, 때로는 검사에게 부탁하고, 판사에게 프로그램 배정을 청원하기도 했다. 감사하게도 판사들은 사역자들의 의견을 존중해 주는 경우가 많았다.
몇 해 전, 그 법원에서 일본인 남편이 아내를 위해 변론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었다. 아내는 이미 판결을 받은 상태였는데 남편이 두꺼운 파일철을 들고 판사 앞에 섰다. 내 눈에는 아내가 중증의 정신 질환을 앓는 듯 보였다. 여자 판사가 이어가는 질문에 남편은 젠틀하고 겸손하게 대답했다. 숙제 검사처럼 보였다. 이전 기일에 판사가 과제를 내준 모양이었다. 남편은 대학교수였고, 여러 차례 아내를 대동해 온 듯했다. 판사는 아내의 상태를 세심히 묻고 확인했다.
뒤에서 지켜보는 내게 남편의 표정과 태도는 ‘사랑’ 그 자체였다. 아내가 병증으로 인해 산만해지면 남편은 다정히 어루만지고 얼굴을 맞대며 집중을 도왔다. 그것은 가식도, 판사에게 잘 보이려는 제스처도 아니었다.
남편은 아내가 그린 그림들을 펼쳐 보이며 “이건 이렇게 그렸고, 요즘 이렇게 좋아졌습니다”라고 자랑했다. 그의 눈빛은 인자했고, 처방 약의 종류와 복용 반응까지 세세히 설명하며 약에 따라 아내가 찡그리는 표정까지 흉내 냈다. 어떻게 이렇게 성실하고 진실하게 한 사람을 돌볼 수 있을까 싶었다.
나를 가장 감동시킨 건 문제를 대하는 그의 성실함이었다. 40여분 동안 이어진 공판에서 판사도 그 남편의 사랑스러운 태도에 미소를 지었고, 가족처럼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재판이 끝난 뒤 남편이 아내의 겉옷을 입혀 주고 나가길래 나도 복도로 따라 나가 정중히 인사했다. “저는 한국 목사입니다. 오늘 아내를 돌보시는 태도에 깊이 감동했습니다.” 남편은 “오래 전부터 이렇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아내니까요”라고 담백하게 말했다. 나는 그에게 기도하겠다고 약속하고 헤어졌다. 그날 온종일 그 남편이 생각났다. 문제를 문제로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며 최선을 다하는 사람, 그 진실함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역경의 열매] 김석기 (23) 종신형 재소자의 결혼식… 조건 없는 아름다운 사랑
결혼 주례하며 그들의 신앙적 마음을
확인하고 싶어 물어보자 “Just love”
‘한 영혼’ 위해 자신 인생 드리는 헌신
김석기 목사가 2008년 멕시코 티후아나 교회의 후임으로 모세 목사를 안수하고 있다.
나는 몇몇 종신형 재소자의 ‘교정시설 내 결혼식’을 주례해 줬다. 그중에는 검사가 사형을 구형했던 젊은 한인 형제도 있었다. 판결은 가석방 없는 종신형으로 낮춰졌는데, 그의 여자친구가 찾아와 결혼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그녀는 베트남계 고등학교 수학 교사였다. 젊은 한인 남성은 갱단 범죄를 저질러 같은 한인 목회자 가정에 큰 상처를 남긴 이였다. 잠시 망설였지만, 목사로서 영혼을 위한 답을 주어야 했다.
그와 한국 식당에서 점심을 함께하며 상담을 했다. “평생 교도소에서 나올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결혼하겠습니까. 왜 결혼하려 합니까.” 그녀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저 사랑해서요.(Just love.)” 그녀는 가톨릭 신자였다. 예전에 캄보디아 여성과 재소자의 결혼을 주례했을 때도 그들의 신앙적 마음을 본 적이 있었다. 나는 다시 물었다. “성인이시지만, 부모님의 동의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녀는 이미 베트남에 가 부모님의 동의를 구하고 왔다고 했다. 나와 아내는 이들의 결혼을 놓고 다시 한번 기도하며 생각했다. 한인 사회에서는 꿈도 꾸기 어려운 선택이었다.
또 다른 여성도 기억난다. LA에서부터 4시간 거리의 교도소를 자주 방문하던 미국 여성이었는데, 내가 방문하는 날마다 희한하게 마주쳤다. 단정한 정장 차림으로 성경을 품고 온 그녀는 면회실에서 흑인 재소자를 만나곤 했다. 하루는 면회 후 나와 같은 버스를 탄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항상 성경을 들고 오시네요. 누구를 만나시나요?” 그녀는 담담히 말했다. “남편이에요.” 남편은 무기징역수였는데 교정시설 내에서 혼인 신고를 했다고 했다. 시간이 지나 알게 되었다. 미국 교도소에는 무기수와 결혼한 여성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대부분 가톨릭 문화권 출신이 많았다. 평생 교도소에서 나올 수 없는 ‘한 영혼’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드리는 헌신이었다. 이후에도 그녀는 늘 단정한 모습으로 성경을 들고 남편을 만나러 왔다.
최근 볼티모어에 사는 니콜스 부부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보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연’이라는 제목의 밀알선교회 영상이었다. 니콜스 부부는 70대의 시각장애인 부부였는데, 놀랍게도 시각장애인 아이 네 명을 입양해 키우고 결혼까지 시켰다. 모두 한국 아이들이었다. 그중 한 명은 정신질환도 있었다. 영상에서 기자가 물었다. “네 명의 시각장애인을 입양해 키우는 것이 힘들지 않으셨나요?” 니콜스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전혀요. 제가 영향을 줄 수 있는 아버지가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 기쁩니다.”
그는 42년 동안 연방 공무원으로 일해 왔다. 정신 질환을 앓는 딸은 특히 돌보기 쉽지 않았지만, 부부는 감사로 품었다. 넷 중 두 아이는 이미 결혼도 했고, 세 살배기 손자도 있었다. 추수감사절 날 니콜스 부부는 지팡이를 짚고 기차역으로 딸을 마중 나갔다. 이들의 아름다움은 어디서 오는가. 그 희생은 어디서 오는가. 밀알선교단이 연말에 초대했을 때 니콜스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사랑은 성과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조건 없는 사랑을 믿습니다.” 아멘!
***[역경의 열매] 김석기 (24) “선을 간절히 찾는 자에게는 은총을 주시거니와…”
교도소 사역은 모두 ‘베푸는 사역’
믿음 하나로 시간·재물·정력 쏟아
영혼을 주님께 인도하는 선한 일에
주님 약속의 말씀 실제로 이루어져
2007년 10월 열린 오네시모선교회 후원 음악회 모습. 음악회는 정기 후원 행사로 현재까지 매년 열리고 있다.
교도소 사역을 해 오면서 재정의 필요는 언제나 절실했다. 교도소 사역, 갇힌 이들을 위한 바이블 칼리지(Bible College), 그리고 뉴라이프(New Life) 사역까지 모두 ‘베푸는 사역’이었다. 한마디로 ‘바위에 씨앗을 뿌리는 사역’이다. 언제 싹이 날지 알 수 없었지만, “주님께서 능력의 손을 펴실 때 반드시 열매 맺게 하신다”는 믿음 하나로 시간과 재물, 정력을 기꺼이 쏟았다.
놀랍게도 하나님 약속의 말씀은 실제로 이루어졌다. 영혼을 주님께 인도하고 세우는 선한 일에 하나님은 은총을 베푸셨고, 단 한 순간도 모자람이 없게 하셨다. 아내와 헌신한 동역자들은 주님의 간섭과 손길을 보며 감사로 사역에 임했다.
나는 늘 잠언 11장 27절 말씀을 사역의 경제 원리로 붙들었다. “선을 간절히 찾는 자에게는 은총을 얻어려니와, 악을 더듬어 찾는 자에게는 재앙이 임하리라.” 앞부분을 영어로 풀면 이렇다. “He who earnestly seeks good finds favor, God will send people to him(선을 간절히 찾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사람을 붙여 주신다).” 말씀 그대로 주님은 필요한 사람들을 붙여 주셨다.
우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렌지카운티에 있는 사이프러스 칼리지 주차장에서 벼룩시장을 시작했다. 교회에서 기증받은 중고 물품을 이른 아침 시간에 펼쳐 놓고 25센트부터 1달러까지 저렴한 가격에 판매했다. 그 시간은 내게 ‘짜장면 한 그릇 값’이 얼마나 귀한지, 교회의 헌금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했다.
1년쯤 지나 장로님이 제안했다. “가까운 도시에 제 건물이 하나 있습니다. 선교를 위해 사용해 보세요.” 우리는 감사히 받았다. 임대료도 받지 않겠다는 그분의 말에 감동했다. 약 1208㎡ 면적의 2층 공간엔 선교회와 교회를, 1층 약 929㎡ 공간에는 기부 스토어를 열었다. 광고만 내면 기증 물품이 쏟아졌다. 권사님은 스텝 밴(박스형 트럭) 한 대를 선교회에 주셨다. 정말 “선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사람을 붙이신다”는 말씀대로였다.
1층에선 장로님으로부터 도매용 물품을 받아 판매했다. 교회와 개인들이 보내준 물건은 분류해 매장에 내놓았다. 입구 난간에는 “오네시모 교도소 선교회(Onesimus Prison Ministry)”라고 적은 현수막을 걸었다. 법원 커뮤니티 서비스 인력 10명 안팎이 봉사해 줬다. 건물은 대로변 중심가에 있었고, 시청과 시니어 아파트가 인접했다. 미국·스페인계 할머니들이 둘러앉아 기도해주고 인도 목사님 등 외국인 목회자들도 “돕고 싶다”며 찾아왔다.
10여년 후 시청이 재개발을 발표하며 우리 건물이 1순위 대상이 되었다. 시청은 건물 대금을 5년 분할 상환 조건으로 제시했지만, 우리는 감당할 수 없었다. 기도하던 중 부에나파크의 건물도 알아봤지만 자금이 부족했다. 그때 권사님이 시청이 제시한 채권을 현금으로 사 주셨다. 장로님과 권사님 두 분은 언제나 진지했고, 하나님을 먼저 생각했다. 그 도움으로 우리는 새 장소로 이전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 한 마디도 헛되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시고, 사랑과 지혜를 나타내신다. “선을 간절히 찾는 자에게는 은총을, 악을 더듬어 찾는 자에게는 재앙을.” 아멘.
***[역경의 열매] 김석기 (25·끝) 인생 흔적엔 모두 하나님뿐, 남은 인생 은혜와 감사로
인생 ‘황금기’에 미국으로 부르신 주님
환경은 고되었으나 마음은 은혜로 가득
막막하던 인생 또한 하나님의 예비하심
최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에서 만난 김석기 목사와 김경숙 사모가 환하게 미소짓고 있다.
나와 아내는 이제 은퇴했다. 뒤돌아보면 하나님만 보인다. 남은 인생으론 우리를 빚어 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게 된다. 인생의 ‘황금기’라 부르는 마흔에 주님은 우리를 미국으로 부르셨고, 오직 교도소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세우는 헌신의 길로 이끄셨다. 그 길에서 우리가 본 것은 은총과 감사뿐이었다.
미국에 올 때 나는 하나님에 대해 오해했다. “부르셨다면 먹고사는 문제는 책임지신다”는 걸 문자대로 믿었고 현실에서 하나님의 침묵을 자주 느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부르셨다면 왜 어려움이 계속되는가.” 수많은 실수와 갈등 속에서야 알았다. 하나님은 긴 인생을 통해 하나님 자신을 설명하신다는 것을.
미국 신학교를 다니며 때로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면 헌팅턴비치로 가 태평양 너머 고향을 바라보며 울었다. 동료들도 집 잃고 병들고 사업이 무너져 항복하고 신학교에 왔다고 했다. 훗날 깨달았다. 하나님의 목적은 사역 자체가 아닌 ‘나를 만드시는 것’이었다. 믿음이 조금씩 하나님 중심으로 옮겨갔다.
하나님은 우리 가족에게 좋은 환경을 약속하지 않으셨다. 가게는 날아가고, 한국에 남긴 것들은 사기로 잃었다. 밤 청소로 생계를 잇고, 아이들도 주말마다 함께 나갔다. 영주권 문제도 좌절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세월 끝에서 주님의 간섭이 ‘은혜로만 살게 하려는 사랑’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는 3개의 성경 구절로 설명된다.
로마서 8장 28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 말씀은 내 인생을 해석하는 교과서가 되었다. 실패와 아픔도 허락 안에서 선으로 귀결된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낳는다. 그 ‘선’은 29절에 나오는,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는 일이다.
그래서 환경은 여전히 고되었으나 마음은 은혜와 능력으로 채워졌다. 여자 교도소에서 긴 형기를 마치고 추방될 자매에게도 이 말씀으로 인생을 해석해 주었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빠뜨리지 않고 다루셔서 끝내 선을 이루신다. 그 선은 편안함이 아니라 예수님을 닮아 가는 길이였다.
인생을 뒤돌아보니 막막한 줄 알았는데 예수님이 예비하신 인생이었다. 해답이 없는 줄 알았는데 예수님이 응답하신 인생이었다. 길을 몰랐는데 인도하신 인생이었다. 부족했지만 채워 주신 인생이었고, 연약했지만 힘주신 인생이었다. 외로웠지만 동행하신 인생, 혼자인 줄 알았으나 함께하신 인생, 흔들렸으나 붙들어 주신 인생이었다. 모두 주의 은혜였다. 아멘.
고린도후서 4절 17절.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가벼운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루게 함이라.” 주님은 긴 인생에 환난을 허락하셔서 우리를 영광 앞으로 이끄신다. 여덟 번의 눈 수술과 신장암 가운데서도 원망 대신 감사를 배웠고, 아론과 훌 같은 동역으로 길이 막히지 않게 하셨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교도소와 관련된 상담이 이어졌고, 주님은 당신의 마음을 부어 ‘긴 사랑’으로 섬기게 하셨다. 어둠은 빛으로 바뀌고, 불가능해 보이는 사람도 은혜로 품을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빌립보서 2장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주님은 내 인생을 드릴 특권을 주셨고, 우리 마음엔 여호수아 4장에 나오는 열두 돌의 기념비 같은 하나님의 흔적만 남았다. 오늘도 그 은혜를 붙들고 한 걸음씩 걷는다. 아멘. 주여 도우소서! (오네시모선교회 이메일·onesimusministry94@g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