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위 있는 예수님(1월 28일 주일 오전 예배 설교)
마가복음 1:21-34(신약 54)
요즘 젊은 세대들이 사용한 표현 중에 라떼와 꼰대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라떼는 흔히 연세 드신 분들이 젊은 세대에게 우리가 너희 나이 때에는 그렇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나 때에는 말이야” 라고 말하는 것을 빗대어서는 하는 표현입니다.
꼰대라는 말은 우리가 학교 다닐 때도 사용했는데 선생님이나 어른들을 표현하는 비속어였습니다. 아이들끼리 있을 때는 저기 선생님 오신다. 이렇게 말하지 않고 야 저기 꼰대 온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즘 MZ세대들이 꼰대라고 하는 것은 권위적이며 오로지 자신의 생각과 행동만이 맞다고 생각하며 "꼰대질"을 하는 직장상사와 나이 많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변형되었다고 합니다.
젊은 세대가 꼰대 라고 표현하는 분들도 젊었을 때에는 어른들을 향해서 비슷한 마음을 가졌던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그렇더라도 어른이나 상사들의 말이 맘에 안 들어도 토를 달거나 거부하지 않고 맘에 안 들어도 말을 들었다면 지금은 어른이나 상사라고 해도 옳지 않다고 생각하거나 부당하다고 생각되면 거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동안은 권위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졌다는 말을 하고 했습니다. 권위주의적이란 말과 권위가 있다는 말은 다른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권위주의적 이란 말은 ‘어떤 일을 권위에 맹목적으로 의지하여 해결하려고 하는 행동 양식이나 사상, 자신보다 상위의 권위에는 강압적으로 따르는 반면, 하위의 것에 대해서는 오만, 거만하게 행동하려는 심리적 태도나 사상이라고도 한다.’ 이것이 사전적 의미입니다.
권위주의적이란 말은 실제로 권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힘으로 상대를 억압하려는 교만한 태도를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권위란 ‘사회 구성원들에게 널리 인정되는 영향력을 말합니다.’ 권위가 있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볼 때 특별한 힘이 있고,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친다고 느껴지는 것이 권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기록하면서 예수님의 사역은 권위 있는 새 교훈이라고 사람들이 말하고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같지 않고 권위 있는 새 교훈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표현으로 한다면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권위주의적이라면 젊은 세대들의 비속어 꼰대라는 표현이 어울릴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권위가 있으시다는 것을 모두가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에게는 권위가 있습니다. 그런데 권위라는 말의 의미에는 보이지 않는 뒤에 있는 어떤 힘이란 의미가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지만 예수님 안에는 사람들이 볼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과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권위를 가진 분이십니다.
오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권위 있는 예수님” 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 안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1. 가르치신 예수님
마가는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다음에 제자들을 부르시고 본격적인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셨다고 기록했습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의 공생애는 가르치시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회당에 들어가셔서 시작되었습니다. 21절을 보면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회당의 기원은 바벨론 포로 생활 중 성전을 상실한 유대인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율법을 연구하던 결과로 생겨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신약 시대에는 회당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수의 유대인이 살던 곳이면 헬라 세계 어디서든지 이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 이전에는 성전 중심의 신앙생활을 했다면 바벨론 포로 이후로 마을마다 세워진 회당에서 안식일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물론 절기 때에는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축제를 겸한 제사를 드렸지만 회당은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신앙생활을 유지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서 가르치셨고, 바울 사도도 선교 여행을 하면서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선교를 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지역 사람들이 모여서 안식일 예배를 드리는 회당에 들어가셔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셨는데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르쳤는지는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가버나움 회당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교훈에 놀랐습니다. 22절을 보면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교훈에 놀랐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놀라움과 경이에 가득차서 ‘정신이 멍하다’, ‘넋을 잃을 만큼 감동을 받다’ 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은 사람들은 순간적으로 놀라고 그친 것이 아니라 한동안 놀라움에 휩싸여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가버나움 회당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지금까지 들어왔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듣는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사람들이 놀란 것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22절을 다시 보면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서기관들의 가르침과 같지 않았다는 것은
(1) 예수님은 진리를 말씀하셨다면 서기관들의 설교는 대부분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사변적인 것들이었습니다.
(2) 예수님은 생명과 사망 그리고 영원에 관한 문제들을 제시하셨지만 서기관들은 하찮은 문제들을 강조했습니다.
(3) 예수님은 가르치시는 내용에는 체계가 있었지만 서기관들은 자주 중언부언했습니다.
(4) 예수님은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실례들을 사용하심으로써 듣는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웠지만 서기관들의 설교는 고루하고 형식적인데만 얽매여 있었으므로 메마른 심령들의 갈급함을 채워줄 수 없었습니다.
(5) 예수님은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분으로 사람들의 영원한 축복에 대한 말씀을 하셨고,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사람에 대해 가르치셨지만 서기관들은 가장 중요한 사랑이 결핍되어 있었습니다.
(6)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예수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말씀하셨지만 서기관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대부분 그들의 스승들의 유전에서 온 것으로서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것을 강조할 뿐이었습니다.
율법과 율법을 가지고 사람들이 만들어낸 많은 규례만을 이야기하는 서기관들에 비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과 영생과 천국과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누리를 축복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의 가르침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2.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당시의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가르침의 가장 큰 차이는 예수님은 가르치는 말씀이 차원이 다른 것일 뿐만 아니라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귀신을 쫓아냄으로 인해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권위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상황에 대해서
회당에 귀신 들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23절을 보면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귀신들린 사람이 소리를 질렀다는 것은 귀신 들린 사람들의 일반적인 현상 가운데 하나입니다.
현대에는 귀신 들림과 정신병은 같은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귀신들린 것과 정신병이 유사한 것 같지만 다릅니다. 귀신들린 현상은 영적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의학적으로는 정신병과 같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내면에 귀신이 사람을 지배함으로 생기는 것이기에 정신질환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귀신들린 사람들의 특징 중에는 예수님을 보거나 사도들을 볼 때 소리를 지르는 경우가 많이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귀신 들린 사람도 회당이 와서 안식일을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시자 귀신이 소리를 지르면서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했습니다. 귀신은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이 사역을 못하게 막으려고 합니다. 오늘날도 귀신들은 예배를 방해하고 교회의 사역을 방해합니다.
귀신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라고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하려고 했습니다. 24절을 보면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귀신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도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귀신은 예수님에게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라는 말은 우리를 괴롭히지 말아 달라는 의미입니다. 귀신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거룩한 자 즉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그리스도이신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심으로 인해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귀신은 예수님께서 하실 일을 알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면서 자신을 사람들에게서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마귀의 일을 멸하고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마귀의 일은 우리를 지옥으로 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요일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귀신은 예수님께서 마귀의 일을 멸하러 오신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를 멸하러 왔습니까? 라고 말한 것이고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간청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귀신을 향해서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25-27절 까지를 보면
1:25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1:26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1:27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귀신이 예수님에게 당신은 거룩한 분이십니다. 라고 말하면서 그 사람에게서 자신을 쫓아내지 않게 되기를 간구했지만 예수님은 귀신을 향해서 조용히 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자 귀신들렸던 사람이 경련을 일으켰고 귀신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그 사람에게서 나왔습니다. 당시 회당에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명령하시매 귀신이 나가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도 놀라운 것이었는데 명령하시매 귀신이 나오고 그사람이 정상이 되는 것을 보고 더 놀란 것입니다.
3. 권위 있는 새 교훈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새로운 것에 놀랐습니다. 이전까지와는 다른 희망과 축복의 말씀으로 인해서 사람들을 감동 시키신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심으로 예수님의 말씀에는 특별한 힘과 권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권위 있는 새 교훈이라고 한 것은 희망과 영생과 천국에 대한 가르침과 함께 귀신을 쫓아낸 것이고 이어서 예수님은 권위를 가지고 질병을 고치셨는데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있었습니다. 28-30절까지를 보면
1:28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1:29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1:30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
안식일에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신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소문이 갈릴리 지역에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나오셔서 야고보와 요한 형제와 함께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있었습니다. 마가는 단지 시몬의 장모가 병들어 누워있는 사실만을 언급하지만 의사 출신이었던 누가는 그녀가 ‘중한 열병’(눅 4:38)으로 고통받고 있었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녀의 병명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습한 기후의 갈릴리 호수를 끼고 있는 그 지방에서 흔히 발병하던 풍토병과 같은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누웠는지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테케이토’이 과거 미완료형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아 그 병이 장기적으로 오래 지속된 만성적 질병이었음을 암시해 줍니다. 몸살 감기 정도가 아니라 중한 열병으로 여러 날 누워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시는 것을 보고 온 상황이었기 때문에 시몬의 장모에 대해서 예수님에게 이야기 했습니다. 여짜온대는 이야기 하다. 또는 구하다는 의미입니다. 즉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고생하는 것에서 예수님의 도움을 구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갔습니다. 31절을 보면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누가는 이 장면을 ‘열병을 꾸짖으신대’라고 기록하고 있는데(눅 4:39) 의사인 누가는 예수님께서 시몬의 장모를 고치실 때 열병을 향해서 꾸짖으셨다고 기록했습니다.
마가는 예수님께서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하셨을 것입니다. 열병을 향해서 꾸짖으시면서 손을 잡아 일으키시매 시몬의 장모가 벌떡 일어난 것입니다.
모든 질병의 원인이 귀신으로 인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지만 성경은 모든 질병의 원이 귀신으로 인한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어떤 질병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주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이 좋으면 질병에 절대로 안 걸리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도 눈 질병을 가지고 고생을 했고 디모데도 위장병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믿음이 좋은 성도에게 질병을 주신 것은 겸손하게 기도하라는 사인입니다.
믿음이 없을 때 질병을 주어서 예수님을 영접하게 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시몬의 장모는 아직 예수님을 모르고 있을 열병으로 고생을 했고 예수님께서 열병을 고쳐주시매 수종들었습니다. 수종들었다는 말은 섬기다라는 의미입니다.
열병으로 고생했던 시몬의 장모는 고침을 받은 즉시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기는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고침을 받으면 주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해 섬겨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몰려왔고 예수님은 각종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32-34절까지를 보면
1:32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1:33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
1:34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아직 가버나움 베드로의 집에 머무셨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귀신을 쫓아내셨고 시몬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셨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병든 자와 귀신 들린 사람들을 데리고 왔고 예수님은 병자들의 질병을 고쳐주셨고,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고쳐주십니다. 또한 정신적인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치료하셔서 마음의 평안을 주십니다.
귀신으로 인해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치료하셔서 영적 자유를 주십니다. 사탄의 저주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사탄의 저주에서 풀어주셔서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복을 누리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 종교인들의 가르침과는 다른 천국 복음을 전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종교적인 삶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형식적이고 종교적인 삶이 아닌 삶이 예배가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권위를 가지고 말씀을 가르치셨고, 병자를 고쳐주셨고,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사망 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로 모든 질병에서 고침을 받고, 어둠의 영을 물리침으로 사탄의 저주해서 해방되고,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의 평안을 누리는 참빛교회 모든 성도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https://online.fliphtml5.com/yuhpd/boab/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