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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561
10월27일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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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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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UnOxY8OS-2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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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기적 같은 평화로움의 비결 >
한 지인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분의 본업은 봉사입니다. 특기도 봉사입니다. 취미 역시 봉사입니다.
여기저기 어려운 시설만 골라 다니십니다. 여러 일들 가운데 꼭 필요한 일, 굳은 일, 때깔나지 않는 일만 도맡아서 하십니다. 천사가 따로 없습니다.
힘들어하는 사람 보면 가슴 아파 어쩔 줄 몰라 하십니다. 자주 다녀가시지만 언제나 소리 소문도 없이 조용히 다녀가십니다. 차라도 한 잔 대접하려고 하면 어느새 사라지고 없습니다.
너무나 착해빠져서인지, 아니면 너무 열심히 봉사하셔서 그런지 병이 나셨답니다. 내일 아침 수술에 들어간답니다. 부디 수술이 잘 되고, 경과가 좋아서 그 좋아하시는 봉사 계속할 수 있게 되길 기도드립니다.
제가 생각할 때 꽤 심각한 병인데도, 조금도 심각한 기색이 없습니다. 저는 소식을 듣자마자 ‘하느님도 무심하시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한탄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언제나 그랬듯이 쾌활한 목소리로 남 이야기하듯이 태연하기만 합니다. 잔잔한 호수처럼 평화롭기만 합니다. 그 ‘기적 같은 평화로움’의 비결이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그분 내면에 이미 어느 정도 하느님의 나라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하느님의 풍요로운 자비가 얼마나 감미로운 것인지, 그분의 위로가 얼마나 따뜻한 것인지를 이미 맛보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하느님께서 주실 상급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하느님 나라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하는 의문은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의문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 나라의 풍성함은 바로 하느님 자비의 풍성함, 하느님 사랑의 풍성함을 의미하지 않을까요?
하느님 나라는 크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 위로가 한도 끝도 없이 흘러넘치는 곳이 아닐까요?
따뜻한 봄볕이 꽁꽁 얼어붙어있던 대지를 소리 없이 녹이듯이 그 숱한 우리의 죄악과 부족함, 실수와 과오들이 크신 하느님 자비 앞에 눈 녹듯이 사라지는 그런 곳이 아닐까요?
참혹하리만치 견디기 힘들었던 우리들의 고통이나 좌절, 분노, 끝도 없는 방황... 이 모든 괴로움들이 크신 그분의 위로 앞에 자취 없이 사라지는, 그래서 부드러운 그분의 손길만이 우리 영혼을 어루만지는 사랑으로 충만한 곳이 아닐까요?
어쩌면 그러한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이 땅에서부터 조금씩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요? 가능하다면 이승에서부터 최대한 만끽해야 되지 않을까요?
언젠가 또 다른 세상에서 맞이하게 될 하느님 나라도 중요하지만 지금 이 순간 누려야만 하는 하느님 나라 역시 중요합니다.
우리가 풍요로운 하느님의 자비 안에 살고 있다면, 어쩌면 우리는 이미 하느님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와 닿는 현실이 아무리 팍팍하다 하더라도 지금 우리가 하느님을 굳게 신뢰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미 하느님 나라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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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하느님 나라로의 진화는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믿음으로>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BRDMlzcE-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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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에 관한 비유 말씀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아서 겨자씨를 자기 정원에 뿌리면 그것이 자라나 나무가 되어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듭니다. 이는 하느님 나라가 어떤 사람 안에 자라나면 그 사람은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새들이 깃들이게 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다는 뜻입니다.
마더 데레사가 수녀원을 떠나기로 마음먹었을 때 한 노숙인의 “목마르다”라는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녀는 곧 모든 가난한 이들이 예수님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 이후로 그 수녀님은 더는 가난한 이들을 자기 품 안에 모으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신이 가난한 이들의 어머니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녀는 꿈에서 베드로를 만나 “제가 하늘 나라를 가난한 사람으로 꽉 차게 만들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그렇게 사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이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또 하느님 나라는 ‘누룩’과 같다고 합니다. 어떤 여자가 누룩을 밀가루 서 말 속에 넣었더니 온통 부풀어 올랐습니다. 누룩은 떡이 될 것을 빵이 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밀가루에 누룩이 들어갔는데 떡이 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떡을 먹다가 목이 막혀 사망한 사례를 여러 번 봅니다. 떡도 좋은 것이지만 빵은 치아가 좋지 않은 사람에게도 양식이 될 수 있는 더 좋은 것입니다. 새들이 깃들이게 하는 겨자씨는 누구에게나 ‘휴식’이 될 수밖에 없는 사람을 뜻한다면, 누룩의 비유는 ‘양식’이 될 수밖에 없는 사람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의사로 잘살아보겠다던 이태석 신부는 마음속에 ‘가장 가난한 곳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믿음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의사 생활을 접고 수도원에 들어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분은 그렇게 의술과 양식을 그들에게 베풀었습니다.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누룩이 섞인 빵처럼 그들에게 부드러운 빵을 나누어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암에 걸린 것을 알고도 그들에게로 돌아가고 싶어 했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그 사람 안에 이룩되면 이렇게 양식이 되고 휴식이 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됩니다.
어떤 사람이 바뀌는 것은 그 사람의 노력으로 가능하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기 자신이 누구냐는 ‘믿음’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기에 인간의 노력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힘으로 마더 데레사나 이태석 신부님처럼 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영화 ‘샤인’(1996)은 연주회에서 악마나 연주할 수 있다는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3번’을 연주한 뒤 혼절하여 정신병자가 되어야 했던 한 실존 인물 ‘데이빗 헬프갓’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 이야기를 하기 전에, 우선 ‘브루스 립턴’의 『당신의 주인은 DNA가 아니다』의 이야기부터 해야 하겠습니다. 브루스 립턴은 의대에서 세포에 관한 것을 가르치던 교수였습니다. 당시 그리고 지금까지 과학계에서 믿어오던 것은 인간의 유전자가 인간의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병이 걸릴 유전자를 부모로부터 물려받으면 그 병이 걸릴 수밖에 없다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완전히 잘못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유전자는 그저 지금의 유전자를 복제하여 후대에 전달하는 생식기와 같은 역할이지 두뇌처럼 인간을 지배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지배하고 인간을 만드는 것은 자신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외부로부터 받아들여진 ‘믿음’입니다.
그가 이것을 깨닫게 된 것은 시골에서 교수로 있을 때였습니다. 오토바이 사고로 힘겹게 몸을 움직여야 할 때 자신의 제자 중 카이로프랙틱을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팔을 올리게 한 다음 “나는 브루스입니다”라고 말하고 힘을 주라고 했습니다. 그 팔을 제자가 끌어내리려고 해도 잘 안 되었습니다. 그는 과학자였기 때문에 ‘이게 뭐 하는 짓인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다음 제자는 “이번엔 ‘나는 메리입니다’”라고 해 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작은 힘에도 버틸 수 없었습니다.
그는 혼절할 것처럼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과학적으로는 자신 안에 있는 유전자가 외부의 믿음에 의해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브루스인 것을 속이며 자신이 메리라고 말할 때는 DNA도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믿음이 자신 안에서 충돌할 때 세포로부터 당연히 나와야 하는 힘도 꺾일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한 것입니다. 사람은 분명 유전자로도, 노력으로도 지배되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지배됩니다. 예수님은 이 믿음을 바꿔주러 오신 분입니다. 믿음이 사람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사람은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됩니다.
다시 영화 ‘샤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데이빗 헬프갓의 아버지는 호주에 살던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던 유태인입니다. 당시 독일에서의 유태인 학살 직후였기 때문에 아버지는 데이빗이 외국으로 나가 실력을 더 쌓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오직 데이빗이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자신의 노력으로만 이루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실력으로는 데이빗을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아버지가 라흐마니노프를 칠 수 있다고 말해도 아버지에 대한 믿음 안에서는 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아버지를 넘어서야 한다는 믿음을 준 이는 ‘로젠 선생’이었습니다. 데이빗은 아버지보다 로젠을 믿고 아버지와 관계를 단절합니다. 그러나 유학 중에도 여전히 아버지에 얽매여 라흐마니노프를 쳐서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 싶어 합니다. 로젠과 아버지 모두를 만족시키고 싶었던 데이빗은 연주를 다 마치고 정신이상이 됩니다. 아버지는 자신이 아닌 로젠 선생을 더 믿은 아들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노력만으로 휴식 같은 사람, 혹은 양식 같은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본래 우리는 그렇게 될 수 없게 자신만을 믿게 하는 아버지를 두고 있습니다. ‘자아’라고 합니다. 그 아버지에게 묶여있기 때문에 우리는 남에게 이로운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도 본성적으로 또 자기만을 아는 사람으로 되돌아옵니다.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다가 그러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데이빗처럼 미쳐버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로젠 선생을 만나야 합니다. 로젠 선생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에서 벗어나 우리가 이웃을 위한 휴식 같은 사람이 될 수 있고 양식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음을 믿게 만드는 씨앗과 누룩을 넣어주시는 분이 그분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처럼 될 수 있다는 믿음만이 우리를 그럴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변화시켜줍니다.
인간은 누구나 믿음에 의해 모기이든 예수이든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됩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믿음에 지배를 받는 나라입니다. 그 믿음은 주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마음 안에 뿌려집니다. 내가 나에 대한 믿음에서 벗어나는 만큼 그 열매가 자라나 그리스도처럼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주시는 성령을 통하여 가지게 만드실 믿음, 그것은 나도 그리스도라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에 지배받으면 휴식이고 양식이신 그리스도처럼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이 됩니다. 그 사람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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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13,18-21 :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 수 있을까!
하느님의 나라가 겨자씨에 비유되는 까닭은 씨앗이 뿌려져 싹을 틔우고 자라나는 모습이 믿음이 커가는 것과 똑같기 때문이다. 그 나라는 하느님의 말씀 한 마디로 왔기 때문이다. 그 나라는 들음으로 받아들여지고 믿음으로 씨 뿌려진다. 믿음을 통하여 뿌리내리고 희망으로 자란다. 그 나라는 신앙고백으로 퍼져나가고 덕행으로 넓어진다. 그러면서 많은 가지로 뻗어 간다. 그리고 그 가지들을 하늘의 새들의 보금자리로 내어 준다.
하느님 나라가 겨자씨와 같고 믿음이 겨자씨와 같다면, 믿음이 곧 하느님 나라이며 하느님 나라가 곧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믿음을 지닌 사람에게는 하느님 나라가 있다. 그 나라와 믿음이 우리 안에 있다 주님께서는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루카 17,21)고 말씀하셨다. 신앙을 고백한 베드로는 사람들을 하느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해 주는 열쇠를 받았다(마태 16,19 참조).
겨자씨는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겨자씨처럼 아주 작고 낮게 겸손한 모습으로써 인간으로 태어나셨고, 하늘에 오르심으로써 나무처럼 커지셨다. 고난을 당하실 때는 씨앗이시고 부활하실 때는 나무이시다. 시장하실 때에는 씨앗이시고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실 때는 나무이시다. 복음에서 그분은 당신을 씨앗으로 표현하신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누룩은 조금만 넣어도 금세 반죽 전체에 퍼져 제 역할을 한다. 하느님의 말씀도 우리 안에서 이렇게 작용한다. 우리가 말씀을 받아들이면, 말씀은 우리를 거룩하고 흠 없게 만든다. 머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고루 배어들어 영적인 인간이 되게 한다. 우리는 이성적이며 거룩한 누룩을 마음에 받아들인다. 이 값지고 거룩하고 순결한 누룩 덕분에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잘 살아갈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영적인 누룩이시다. 반죽 속의 누룩이 겉모양이 아니라, 그 능력으로 반죽을 능가하듯이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으로서 모든 인간들을 능가하신다. 복음에 나오는 여인은 교회를 의미한다. 우리는 이 여인의 반죽이며, 여인은 하늘 지혜의 빛이 우리의 영을 속속들이 모두 덮을 때까지 우리 마음속 깊숙한 곳에 주님을 숨겨둔다.
우리 인간의 뜻과 욕망이 성령을 거스르지 않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이 육을 거스르지 않을 때(갈라 5,17 참조), 우리 안에 변화, 즉 발효가 일어난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에 반대되는 행위를 죽이면(로마 8,13 참조), 우리는 하느님의 숨을 통해 생명의 숨을 얻었음을 알게 되어, 주님의 뜻을, 주님의 말씀을 잘 실천하고, 하느님의 일을 선택하여 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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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1955년 12월 1일, 미국 남부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에 사는 흑인 로자 파크스가 버스 안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버스 기사의 요구를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체포되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흑인들은 버스 이용을 거부하며 항의하였고, 마틴 루서 킹을 중심으로 미국 흑인 인권 운동이 전개됩니다. 결국 법원은 로자 파크스의 벌금형을 무효로 하고 몽고메리 버스의 인종 차별을 없앨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이듬해에는 공공 운송 수단에서 인종 차별은 위헌이라는 대법원의 판결이 나왔고, 1964년에는 공공시설에서 인종 차별을 금지하는 연방 시민권법이 제정됩니다. 로자 파크스의 작은 행동이 많은 흑인에게 힘을 주었고 인종 분리법 폐지라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유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아주 조그마한 겨자씨와 같아서 처음에는 마치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것을 정원에 심으면 커다란 나무가 되어 새들이 보금자리를 꾸밀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작은 행동 하나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겨자씨와 같은 작은 실천 하나가 중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사랑이라는 겨자씨를 이 사회라는 정원, 우리 가정이라는 정원에 심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그것을 심을 때 정녕 하느님 나라는 자라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몸소 겨자씨가 되시어 골고타라는 정원에 묻히시고 당신 스스로 썩어 없어지심으로써 인류에게 구원의 십자 나무를 남기시지 않으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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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루카 13,18-19)
‘겨자씨의 비유’는 “하느님은 작은 씨앗에서도 큰 나무를 만들어내시는 분이다.”, 즉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는다.” 라는 가르침이기도 하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의 ‘시작의 작음’만 보고 실망하지 말고, ‘결과의 위대함’을 믿어라.” 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시작 부분의 작고 초라하고 보잘것없음에 실망하고, 그래서 포기할 때가 많은데, 하느님은 보잘것없는 그것으로도 위대하고 놀라운 작품을 만드실 수 있는 분입니다. (하느님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시는 분이니, 작은 것에서 큰 결과물을 만드시는 것이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항상 그렇게 작은 것으로 시작하실까?” 항상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떻든 하느님께서 인간의 생각과 판단을 초월해서 일하신다는 것은 진리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믿는 것입니다.
‘겨자씨의 비유’에서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마태 21,42) 유대인들은 마치 집 짓는 이들이 쓸모없는 돌을 내버리는 것처럼 예수님을 쓸모없는 존재로 여겨서 죽였지만,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으셨습니다. 즉 모든 사람의 주님이 되게 하셨습니다.(필리 2,10-11)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은 사형수의 모습과 인류를 구원하는 구세주의 모습은, 겉으로만 보면 하늘과 땅의 거리만큼이나 멀리 떨어져 있는 모습이지만, 그래서 믿음 없는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사실 수난 때의 예수님은 작은 겨자씨보다 더 보잘것없는 존재로 취급당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써 당신이 인류 전체가 깃들일 수 있는 큰 나무 같은 분이라는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성령 강림 이전의 초대 교회의 모습도 작은 겨자씨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공동체는 큰 나무로 자랐고, 앞으로도 계속 자랄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외적인 규모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가지고 있는 ‘구원의 힘’을 말하는 것입니다.>
‘겨자씨의 비유’에서 욥기의 다음 말도 연상됩니다. “자네의 시작은 보잘것없었지만, 자네의 앞날은 크게 번창할 것이네."(욥 8,7) 우리 각 개인도 하나의 겨자씨입니다. 겉으로는 작고 초라하고 보잘것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큰 나무로 자랄 수 있는 생명력이 들어 있습니다. 각자 ‘위대함의 씨앗’을 하나씩 품고 있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이 씨앗은 주님께서 주신 것인데, 이 씨앗을 심고, 가꾸고, 보살피고, 그래서 큰 나무로 키워서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은 우리가 할 일입니다. (물론 사람의 힘으로만 하는 일은 아니고, 주님의 도움을 받아서 하는 일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나오는 ‘좋은 땅’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맡겨진 임무입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루카 8,15)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결과의 위대함’을 판단하는 기준은 세속과 다르다는 점입니다. 세속 사람들이 생각하는 업적과 영적 기준에서 생각하는 업적은 다릅니다. 영적인 기준에서는, 어떤 거창한 ‘일’을 한 것이 없더라도 ‘거룩한 삶’ 자체가 위대한 업적이 됩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그것은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루카 13,20-21)
여기서 ‘누룩’은 ‘하느님 나라의 강한 영향력’을 상징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 강림 후에 본격적으로 사도들이 선교활동을 하던 때에, 신자들의 공동체는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고’(사도 2,47), 사도들은 ‘백성의 존경’을 받았는데(사도 5,13), 그 호감과 존경은 신자 수의 증가로 이어졌습니다.(사도 2,47) 그것은 ‘하느님 나라의 강한 영향력’이 세상 사람들 속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잘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적은 양의 누룩’이 ‘많은 양의 밀가루’를 부풀어 오르게 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나쁜 누룩’이(악한 영향력이) 많습니다.
묵시록을 보면, 사탄의 악한 영향력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낮은 사람이나 높은 사람이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이나 할 것 없이 모두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을 뜻하는 숫자로 표가 찍힌 사람 말고는 아무것도 사거나 팔지 못하게 하였습니다."(묵시 13,16-17) (사탄은 단순히 영향력만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세상의 경제 질서를 장악합니다. 그것은 실제로 대단히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를 가장 중요한 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고, 또 하느님을 섬기지 않고 재물을 섬기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그런 사람들을 지배하고 억압하면서 자기 하수인으로 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셨습니다.(마태 16,6) (이것은 세속의 악한 영향력에 물들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경고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영향력과 세속의 악한 영향력 사이의 싸움은 세상 안에서도 일어나지만, 각 개인의 내부에서도 일어납니다. (나의 ‘내적 갈등’이 바로 내 안에서 일어나는 싸움입니다. “세속 사람들처럼 살 것인가? 아니면 신앙인답게 생활하면서 세속 사람들과는 다르게 살 것인가?”) 돈 많이 벌고 물질적으로 잘 사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세속 풍조의 악한 영향력에 맞서 싸우는 것은 모든 신앙인의 임무입니다. (사실 이 싸움은 이미 승패가 결정되어 있는 싸움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님은 ‘승리자’이신 분입니다. 언젠가 승리하실 분이 아니라, 이미 승리하신 분입니다. 그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우리가 날마다 겪는 싸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도움을 받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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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꿈속에서 아버님과 어머님이 같이 계셨습니다. 아버님은 9년 전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고, 어머님은 1달 전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두 분이 만나서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내시는 것 같았습니다. 어려서부터 아버님에게 대한 어머니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어머니는 항상 아버님의 자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아버님이 안 계셔도 아버님의 자리를 소중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아버님이 밖에서 돌아오시면 추운 겨울에는 따뜻한 물을 대야에 담아서 방으로 가져오셨습니다. 저는 대야의 물을 버리곤 했습니다. 시대의 아픔 때문에 경제활동을 하지 못한 아버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어머니가 가족들을 위해서 일하셨습니다. 전세를 살다가 드디어 집을 마련한 것도 어머니의 힘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버님의 경제적인 능력보다는 아버님의 강직함과 신앙을 더 사랑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언제나 아버님의 구두를 깨끗하게 닦아 놓으셨습니다. 여의치 않으면 제가 아버님의 구두를 닦아 놓기도 했습니다.
아버님은 말이 거의 없으셨습니다. 자식들의 일에도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가정의 일은 모두 어머니에게 맡기셨습니다. 동생이 수녀원에 갈 때도, 제가 신학교에 갈 때도 아버님은 별 말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버님의 기도 시간은 더 길어졌습니다. 제가 본당 신부가 되어서 어머니와 3년을 같이 지낼 때도 아버님은 말씀이 거의 없었습니다. 밥도 잘 못하시는 분이 3년을 혼자 지내셨습니다. 아버님은 성서를 필사하였고, 저를 위해서 서품성구를 족자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본당 새벽미사에 어머니와 함께 참례하셨고, 성무일도를 같이 하였습니다. 건강이 나빠진 어머니를 위해서 늘 같이 산보를 다녔습니다. 이 세상 소풍 잘 마치고 하늘나라로 가시면서 아버님은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을 만나서 행복했습니다. 말은 많이 못했지만 사랑합니다.’ 어머니는 아버님의 마음을 충분히 알고 계셨습니다. 신앙 안에서 언제나 함께 하셨던 부모님이 천상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됩니다. 이는 큰 신비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합니다. 여러분도 저마다 자기 아내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고, 아내도 남편을 존경해야 합니다.” 부부가 되는 것은 큰 신비라고 이야기합니다. 부부가 서로 아껴주고 존경하면 가정에는 행복의 나무가 자라나기 때문에 신비입니다. 행복의 나무에는 사랑과 믿음 그리고 희망이 꽃이 피기 때문에 신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가정에 자녀들을 선물로 보내주시기에 신비입니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도 큰 신비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여러분은 가지입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지가 포도나무에서 떨어지면 말라 버리고 버려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시면서 이 신비를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과 함께한 교회는 2000년을 넘게 자라고 있으며 신앙의 열매는 세상 끝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교회에서 신앙의 신비를 충실하게 살아간다면 어떤 시련과 어려움이 와도 우리는 신앙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보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이렇듯 복을 받으리라. 주님은 시온에서 너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너는 한평생 모든 날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리라.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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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간(肝) 나눔 이야기>
루카 13,18-21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그것은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간(肝) 나눔 이야기>
내 친구와 나는 사이좋게
하나의 간을 나눠가졌어요
내 친구가 삼분의 이
내가 삼분의 일
시나브로 어느덧
나눠진 간들이 자랐어요
내 친구도 나도 모르게
하느님께서 그렇게 그렇게
삼분의 일을 하나로
삼분의 이도 하나로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도 하나인
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같은
내 친구와 나는 사이좋게
하나의 간을 나눠가졌어요
아하!
이게 바로 하느님의 나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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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성규 안드레아 신부님]
현시대를 가리켜 ‘자기 PR(Public Relations) 시대’라고 한다. 같은 맥락에서 ‘튀어야 산다’는 말도 나왔으며, 평범함을 거부하면서 독특하고 희귀한 것만을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세상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일등’만을 치켜세우고, 무엇을 하든지 그 분야에서 최고가 아니면 명함도 내밀지 못하는 세상으로 변했다.
매스컴도 이런 세태를 잘 반영한다. 공부나 대학도 일류, 기술도 일류, 운동도 일류, 심지어 도둑질이나 사기도 일류가 되어야 매스컴에 떠들썩하게 날 수 있는 세상이다. 이 판에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나라를 소개하신다.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의당, 하느님의 나라는 광대무변하니 아무래도 그렇지. 겨자씨와 같다니. 아뿔싸. 겨자씨가 땅에 뿌려진다.(마태 13, 31-32에서는)
겨자씨뿐만이 아니라 모든 씨앗이 스스로 뿌려질 곳을 택하여 뿌려지는 법이 없다. 바람에 날리든, 사람이 땅을 갈고 뿌리든, 씨앗이 뿌려지는 데는 씨앗의 의지가 작용하지 않는다. 자기는 좋은 씨니 좋은 땅에 뿌려 달라거나, 자기는 귀한 씨니 싹이 잘 트게 해 달라거나, 소출을 많이 낼 수 있도록 충분한 거름을 달라는 등의 ‘청원기도’를 올리는 법이 없다.
씨앗이 길바닥이든 돌밭이든 가시밭이든 기름진 땅이든 뿌려진 자리에서 뿌려진 대로 자랄 뿐이다.
그리고 씨앗을 뿌려놓고 언제 싹이 돋나 어떻게 자라나 아무리 살펴보아도 그 과정을 맨눈으로 볼 수 없다. 그러나 일정기간이 지나면 파란 싹이 돋아나 밭을 가득 채운다. 새싹은 농군도 모르는 사이에 자란다.(참조. 마르 4, 26-29)
하느님의 나라도 그렇게 우리 마음 안에서 자라고 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들 마음 안에서 소리없이 천천히 그러나 쉼없이 자라고 있다.
아, 지극히 평범한 말씀이시다. 아, 이제 누군들 하느님의 나라를 모를까 보냐?
“무엇을 해야 할까? 무엇을 말해야 할까? 무슨 성과를 거두어야 할까를 생각하기에 앞서, 주님과 함께 있어야 하고, 주님의 사명에 참여해야 하며, 주님의 자유를 나누어 지녀야” 한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 나라의 씨앗을 자기 몸에 안고 태어나며 그 씨앗은 점점 자란다. 하느님의 나라는 지상에서의 생명을 끝낸 다음 이미 들어가는 어떤 나라가 아니라 처음부터 아니,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모든 인생에 뿌려져 있다.
하느님 나라의 씨앗은 모든 이들 안에 뿌려져 그 안에서 자라고 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내 안에, 이 세상 안에 뿌려져 자라고 있다.
천국을 이야기한다면서 지옥에 대한 공포를 심어주고, 천국에 가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미운 사람, 악한 사람을 만들고, 나와 같지 않은 사람을 멀리하고 있다.
사랑을 부르짖으면서 미운 사람을 만들고, 정의를 부르짖으면서 불의한 자를 만들고, 선을 강조하면서 악을 만든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복음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의 그 마음으로 선과 악, 밤과 낮, 밝음과 어둠을 대하게 한다.
세상을 창조 그대로 바라보는 너그러움을 갖게 한다. 선과 악, 밀과 가라지를 가리는 마음을 하느님께 맡기도(마태 13, 30) 살게 한다. 선과 악을 가리실 분은 하느님 한 분뿐이시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그것은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누룩은 밀가루를 만나야 제 가치를 발휘한다. 그러나 누룩은 누룩일 뿐이며, 밀가루는 밀가루일 뿐이다.
누룩을 가져다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어줄 이가 있어야 한다. 사실 제 잘난 맛에 우쭐거리며 혼자서 행복하고 성공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 그분의 손길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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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처럼 작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통하여 선포됩니다.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를 거창한 업적과 노력으로 건설하려고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사소한 선행과 봉헌으로 그 나라를 커지게 하십니다.
갈릴래아 어부들과 세리들이 선포한 하느님 나라는 오늘날 온 세상에 퍼져 하느님의 영광을 전하고 있습니다. 열두 명의 사도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선포한 시작이 이렇게 큰 보편 교회로 성장한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 아니고는 설명할 수 없는 결과입니다.
그리스도의 희생 제물이 인간의 연약한 노력과 헌신을 꽃피워 수많은 구원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적은 누룩이 밀가루 반죽 전체를 부풀게 하듯, 하느님 나라는 적은 숫자의 신자 안에서 자라기 시작하여 모든 민족들 안에서 구현되고 있습니다. 그 나라는 점점 더 커져 그리스도의 재림 때 완성될 것입니다.
바리사이의 누룩은 위선과 오만으로 율법 공동체를 해치지만, 신앙인의 누룩은 진실과 겸손으로 교회 공동체를 이 세상에 뿌리내리고 퍼지게 합니다.
가정의 누룩은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내가 남편과 가족을 위하여 희생하는 정성은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섬기는 마음으로 완성됩니다. 남편이 가정을 위하여 헌신하는 원동력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옵니다.
가정 구성원들이 사랑과 순종으로 뭉치면 거룩하고 흠 없는 공동체가 됩니다. 가정 공동체는 티와 흠이 없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하느님 나라를 이 세상에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인간관계에서 희생과 사랑의 정신이 커지면 이 사회 곳곳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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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강정 시몬 신부님]
<겨자씨>
해외 성지순례를 다녀온 교우로부터 겨자씨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볼펜으로 점을 찍어놓은 것보다 더 작은 겨자씨 한 알. 그 조그만 겨자씨가 다 자라면, 4미터에 이르는 큰 나무로 성장을 한다고 하니, 실로 놀랍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그만 씨앗 속에 그토록 엄청난 힘이 숨어 있다는 사실이 신비로울 따름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첫 시작은 미미하고 보잘것없는 듯 하나 결과는 창대함을 이룹니다. 구태여 열두 명이 일궈낸 교회의 역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주변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만 봐도 믿음이 가는 말씀입니다.
물론 믿지 않는 이들에게야 허황한 소리고, 한낱 말장난에 불과할 수도 있겠지만, 신앙의 체험을 이루며 사는 우리에게는 믿음의 진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끔씩은 불가능한 일들이 신앙의 이름으로 가능해졌다는 이야기도 들려옵니다. 그렇지만, 저는 별로 놀라지 않습니다. 왜냐면, 기적은 세상의 눈으로는 놀랄 일이지만, 신앙의 눈으로는 당연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으로 인한 일이기에 능히 가능한 것입니다.
겨자씨의 기적은 놀랄 일이 아니라, 신앙 안에서 나날이 이루어지는 평범한 사건의 하나일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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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른이 되어서 커다란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아는 것이 많아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어른이 되면서 ‘아세틸콜린’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이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즉, 어린 시절에는 이 물질이 자동으로 나와서 엄청난 호기심과 집중력을 갖게 되지만, 이 뇌의 자동 메커니즘이 어른이 되면서 수동으로만 작동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노력해야 호기심이 일어납니다. 호기심은 유기체가 살아남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낯선 세상을 탐색하고 이끌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어른이 되면서 ‘아세틸콜린’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이 자동으로 작동하지 않아서 호기심이 생기지 않는다고 포기할 것이 아니라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야 창조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이와 같이 되라는 말씀도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시기 위함이 아닐까요? 호기심을 갖도록 할 수 있는 노력을 위해, 의도적으로 새로운 곳을 찾아다니고 이전에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활동을 시작하라고 합니다. 신앙생활도 이제까지 해왔던 것을 반복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합니다. 주님의 또 다른 모습을 만날 수 있으며, 그 안에서 또 다른 기쁨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겨자씨와 누룩과 같다고 주님께서는 말씀해주십니다. 평상시에 소홀하게 여겼던 겨자씨와 누룩이었을 것입니다. ‘이 작고 별 것 아닌 것이 어떻게 하느님 나라와 같다는 것이지?’라면서 커다란 의구심이 생겼을 것입니다.
호기심이 일어날 수 있도록 했던 것이지요. 뻔한 이야기로, 또 어렵고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로는 그들이 하느님을 생각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겨자씨나 누룩이 일상 삶 안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던 이유는 일상의 삶 안에 이미 하느님 나라가 와 있음을 알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의 이런 마음을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생각 자체를 바꿔야 합니다. 일상의 삶 안에서도 하느님 나라를 발견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며, 그 일상 삶에서 발견할 수 있도록 해주신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여기에는 주님이 안 계셔.’가 아니라, ‘여기에도 주님이 계셔.’라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런 마음가짐이 계속된 호기심을 일으켜서 주님과 같은 창조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만듭니다. 일상 안에서 느끼는 하느님 나라의 체험이 늘 기쁨과 행복의 시간으로 이끌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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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 하트>
성지에 있으면서 사람들에게 사진 촬영 요청을 많이 받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저인지를 몰랐다면서 같이 사진을 찍자는 분도 있고, 갑곶성지에 왔다는 표시를 위해 같이 찍자는 분도 계십니다.
그런데 옛날과 달리 사진 찍을 때의 사람들 손가락 모양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몇 년 전만 해도 대부분 가만히 있거나, 아니면 승리의 ‘V’ 표시를 많이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승리의 ‘V’ 대신에 엄지와 검지로 하트 모양을 만드는 포즈를 취하십니다. 우연히 엄지와 검지로 만드는 하트를 영어로 무엇이라고 하느냐는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영어로 ‘Korea Heart’라고 한답니다. 한국인이 만든 하트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나라뿐이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이 이 하트를 표시합니다. 놀라운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좋은 것은 널리 펼칠 수 있도록 더 노력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특히 손가락 하트로 사랑을 생각하게 하는 것처럼, 내 몸 자체가 사랑을 전하는 도구가 되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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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나라의 삶>
-신망애와 진선미의 겨자씨처럼, 누룩처럼-
밝고 따뜻한 미소가, 부드럽고 친절한 말 한마디가, 생명과 빛의 진리 말씀이 큰 나무로 성장한 겨자씨처럼 큰 기쁨의 하느님 나라를 선물할 수 있고, 기쁨의 누룩으로 크게 부푼 하느님 나라를 선물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제 졸저 제목입니다. 바로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떠오른 물음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느님의 나라를 살 수 있습니까?’ 물음이 되겠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답을 줍니다. 겨자씨처럼, 누룩처럼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들을 무엇에 비길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었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그것은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말 속에 집어 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누구나의 궁극적 꿈이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그대로 예수님의 영적 체험을 반영합니다. 그대로 예수님의 자화상이자 우리의, 우리 공동체의 간절한 꿈과 소망을 반영하는 두 비유입니다. 몸소 하느님의 나라를 사셨던 예수님이십니다. 겨자씨처럼, 누룩처럼 예수님의 삶자체가 그대로 하느님 나라의 실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신망애, 진선미의 언행이 그대로 겨자씨와 누룩이 되어 주변을 하느님의 나라로 변화시켰듯이 우리 또한 그러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중심한 제자들을 통해 실현된 하느님의 나라였습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나라는 ‘장소’가 아닌 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해 성령의 힘으로 실현된 ‘관계의 그물망’을 뜻합니다. 가끔 신자분들과 주고 받은 말이 생각납니다.
“여기가 하느님의 나라 천국입니다.”
아름다운 경관의 수도원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장소가 좋아 하느님의 나라가 아니라 관계가 좋아야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아무리 장소의 환경이 좋아도 주님과의 관계, 서로의 관계가 나쁘면 거기가 지옥입니다. 그러나 사실 여기 수도원은 장소뿐 아니라 관계도 좋으니 하느님의 나라 천국임은 맞습니다.”
죽어서 가는 하느님의 나라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주님을 중심으로 활발한 사랑의 관계 속에 살아가는 이들을 통해서 도처에서 실현되고 있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여 함께 살아가는 개인이나 공동체가 바로 겨자씨같은, 누룩같은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살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경우도 참 많습니다. 다음 고백 그대로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느님의 나라 천국이옵니다.”
더불어 즐겨 부르는 옛 노래중 한 대목입니다.
“낙원이 어디냐고 묻지 말게나
심으며 웃는 얼굴 어화 낙원이로구나
내가슴엔 비가 개어 하늘 푸르고
내가슴엔 언제나 봄바람 분다”-
주님을 모신 이런 분위기라면 바로 거기가 하느님의 나라, 낙원입니다.
어제 수시간에 걸쳐 총고백면담성사를 본 자매를 통해서도 파란만장한 고통과 시련중에도 하느님의 나라를 살아왔음에 감동했고 십자가 예수님과 함께 성호경을 그은후 기념촬영후 전송하며 드린 격려 메시지입니다. 성호경의 강복후 '십자가의 예수님’과 함께 찍은 사진은 성화聖畫처럼 거룩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정말 기적처럼, 하느님의 보호아래 살아 오셨습니다. 연옥같은 세상 속에서 끝까지 책임을 다하면서 반듯하게 하느님의 나라를 사시면서 남편도 자식도 지켰으니 하느님도 기뻐하십니다. 이제부터도 사진처럼 밝고 멋지게, 씩씩하게 믿음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사세요. 사랑하는 자매님!”
듣고 보니 영적 성장의 겨자씨처럼, 주변을 성화시키는 누룩처럼 하느님의 나라를 사셨던 분입니다. 겨자씨 비유가, 누룩의 비유가 상징하는바 개인은 물론 공동체의 영적 성장과 성숙을 뜻합니다. 참으로 어떤 환경중에도 신망애의 겨자씨와 누룩이 되어, 또 진선미의 겨자씨와 누룩이 되어 끊임없이 성장 성숙하여 왔다면 바로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그 구체적 본보기가 바로 요셉 수도원 공동체입니다. 수도 형제 하나하나가, 또 공동체 자체가 그대로 성장중인 겨자씨 같은 하느님 나라를 상징합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의 깃들 수 있는 아름드리 나무들의 숲으로 변한 수도공동체인지요! 또 세상의 중심에서 세상에 속화俗化되지 않고 세상을 성화聖化한 하느님 나라 누룩 수도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밖으로 나가 찾을 하느님의 나라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야 할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저는 성지순례를 안한지 참 오래됩니다. 굳이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어디나 하느님 계신 거룩한 오늘 지금 여기 정주의 자리가 성지聖地인데 굳이 성지를 찾아 나갈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여 매일 성지순례를 하듯 수도원 경내를 산책하니 하느님의 나라의 경우와 똑같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가 성지이듯 하느님의 나라인데 굳이 하느님을, 하느님의 나라를 찾아 어디 나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면 어디서도 못만납니다.
겨자씨가 영적 성장의 하느님의 나라를 상징한다면, 끊임없이 내외적 변화를 이뤄 성숙케 하는 누룩의 효소 역시 하느님 나라의 영적 변화를 상징합니다. 신망애의, 진선미의 누룩이란 효소가 끊임없이 부패인생이 아닌 발효인생의 하느님의 나라를 살게 하고 이어 하느님 나라 공동체를 실현시켜 줍니다. 세상에 변질되어 속화됨이 없이 부단히 개인은 물론 공동체를 정화하고 성화하는 누룩의 효소같은 존재가 바로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해 하시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 하나하나가, 또 우리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가 바로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이상적인 부부 가정 공동체 역시 영적 성장의 겨자씨 같은, 영적 성숙의 누룩 같은 하느님 나라 공동체입니다. 끊임없이 영적성장과 성숙이 펼쳐지는 하느님 나라 부부 공동체입니다.
바로 제1독서의 바오로 사도가 꿈꾸는 하느님 나라 부부공동체입니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처럼 남편과 아내의 관계도 그러합니다, 상호 사랑과 순종을 통해 끈임없이 성장하고 성숙하는 겨자씨같은, 누룩같은 하느님 나라 부부공동체입니다.
남녀가 한 몸이 되는 것은 큰 신비입니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처럼 부부관계의 신비도 그러합니다. 그러니 남편도 아내도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끊임없는 상호 사랑과 순종의 누룩이 영적 성장과 성숙의 하느님 나라 부부 공동체를 실현시켜 줍니다. 이 모두를 가능케 하는 성령의 은총입니다.
과연 우리 하나하나가, 또 우리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가 겨자씨처럼, 누룩처럼 끊임없이 성장 성숙중인 신망애, 진선미의 하느님 나라 공동체인지요. 예수님을 중심한 제자들 공동체가 그대로 성장하는 겨자씨처럼 세상 사람들이 머문 하느님 나라 공동체였고,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켜주는 누룩과 같은 하느님 나라 공동체였습니다. 우리 또한 그러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신망애와 진선미의 하느님 나라 공동체의 꿈을 실현하며 살게 하십니다. 이를 위해 말씀의 겨자씨로, 성체의 누룩으로 우리 안에 오시는 성체성사의 주님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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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소리 없는 변화>
“하느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고, 누룩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겨자씨와 누룩과 같다고 하셨을까? 겨자씨는 씨 중에서 가장 작은 씨입니다.
오늘 그 씨를 보여드립니다. 얼마나 작은지 보십시오. 그런데 겨자씨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되고 새가 깃들만큼 우거집니다. 누룩 역시 밀가루 반죽 속에서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할 뿐입니다.
누룩도 밀가루 양에 비해서 아주 보잘 것 없을 만큼 적은 양이지만 밀가루 반죽에 들어가서 밀가루 전체의 성질을 변화시킵니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한 사람이 내 삶의 자리와 머무는 곳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믿음을 가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겨자씨와 누룩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내가 바로 서면 지금은 미약하지만 분명 큰 변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1한 사람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한 사람이 큰 나무 역할을 하게 될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그늘의 고마움을 느끼게 될런지요.
콩나물을 키울 때 콩나물에 물을 부으면 물이 다 빠져나갑니다. 하지만 콩나물은 크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성장과 변화는 드러나지 않게 이루어집니다. 실망과 좌절 안에서도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예기치 않은 역경과 시련도 믿음의 사람에게는 은총의 기회요, 희망입니다. 따라서 순간순간을 감사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활동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었는데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이미 왔는데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천만다행입니다. 왜냐하면, 완성을 향한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은 시작과 완성 사이의 긴장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속을 스쳐 가는 순간순간의 생각, 꿈같이 왔다갔다 하는 우리의 상상, 마음속 깊이 숨은 티끌 같은 비밀 하나까지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신 눈앞에 숨겨져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성 아우구스티노)
그러므로 내 생활의 동작 하나하나가 천상으로 치닫는 하나의 몸짓이고 자세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바짝 차려 깨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도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행실대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로마2,6) 이 말씀은 믿는 이들에게는 두려움보다는 기대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겨자씨의 비유를 통해서 성장을, 그리고 누룩의 비유를 통해서 자연스러운 변화를 말해줍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주님의 가르침이 마음 안에 새겨져서 자연스러운 삶의 변화를 통해 증거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나라가 언제 오겠느냐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질문을 받으시고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다. 또 ‘보아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라고 말할 수도 없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루카17,21)고 하셨습니다.
결국, 지금 내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고 있다면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내 안에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하든지 따지지 마십시오. 자동차 운전을 하든지, 부엌일을 하든지, 짐을 나르든지 상관없이 마치 사제가 성체를 모시고 가듯이 하십시오.
매 순간마다 이렇게 ‘천국을 위하여 일하십시오.”(알베리오네) 내 몫을 충실히 하는 가운데 삶의 자리를 하느님의 나라로 만들기를 희망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유다교 랍비와 신부님이 만났습니다. 신부님이 말했습니다.
“어제 밤 꿈에 유다교의 천국을 보았는데 너무 지저분해서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없고 유다인들만 우글거리고 있더군요.”
그러자 랍비가 말했습니다.
“그래요? 나도 간밤 꿈에 천주교인들의 천국을 보았지요. 밝고 화사하고 꽃이 만발한 너무도 아름다운 곳이더군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아무리 찾아보아도 사람이 눈에 띄지 않더라구요”. @@@
알아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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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 나라 이야기입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루카 13,19)
"그것은 누룩과 같다."(루카 13,20)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비유로 든 사물들은 참 작고 미소합니다. 흔하기도 하고요. 혼자서는 무엇도 될 수 없는 미약한 존재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혼자만의 위용을 자랑하는 거대 제국이 아닌, 함께함이 만들어 내는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정원에 심었다."(루카 13,19)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루카 13,21)
겨자씨는 정원 안의 흙 속에 심겨야 제 생명을 튀우고, 누룩은 밀가루 속에 합쳐져야 비로소 먹거리를 위해 제 구실을 합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나라는 알맞은 환경 안에 스며들어 본 모습을 형성하며 확장됩니다.
작고 미소한 존재의 특징은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하느님 나라도 그렇습니다. 조심조심, 소중히 다루어야 하지요. 게다가 힘과 능력이 중시되는 세상에서는 쉽게 간과되거나 무시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는 믿고 희망하는 이에게는 자신을 드러내지만, 작은 씨앗이나 누룩처럼 아무나에게 굳이 자신을 뽐내고 강요하지 않는 신비지요.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 곧 남편과 아내의 관계와 교차해 설명합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십시오."(에페 5,21)
성령의 영감으로 쓰인 성경 말씀이지만 시대와 문화 안에서 쓰였기에 집필 당시의 "지금 여기"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남편과 아내 관계를 서술한 성경의 대목들이 종종 논란거리가 되는 이유는 지금보다 훨씬 더 철저한 가부장적 부족사회의 정황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위의 이 말씀이 부부 간의 사랑 관계의 대전제임을 인식한다면 이어지는 내용들을 이해하기가 한결 수월할 것입니다.
"여러분도 저마다 자기 아내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고, 아내도 남편을 존중해야 합니다."(에페 5,33)
남편과 아내 서로에게는 사랑과 존중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오가는 사랑과 존중처럼 말입니다. 사실 아내와 남편, 두 존재 모두는 겨자씨나 누룩처럼 약하디 약한 존재들일 겁니다. 각자는 존재적으로 하느님 나라를 이룰 가능성을 품고 있지만, 아직 그 힘이 드러나지 않은 미약한 볼모지입니다.
겨자씨인 남편에게는 품어주는 정원의 흙 같은 아내가 필요하고, 누룩인 아내에게는 섞여서 한 몸이 되고 함께 확장될 밀가루가 필요합니다. 서로 만나 하나가 될 때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지지요. 혼자서는 그저 개별의 물질이지만, 함께할 때 새들이 깃들고 타인을 배불리는 새로운 지평이 열립니다. 이것이 하느님 나라의 신비이고, 남편과 아내, 또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입니다.
혼인 생활을 하시는 분들은 각자에게 와준 인격의 신비를, 독신 생활을 하시는 분들은 그리스도의 신비를 관상하는 오늘 되시길 바랍니다. 바로 그들이 함께 하느님 나라를 이루어가고 있는 소중한 파트너지요. 우리에게 온 하느님 나라는 아주 작고 미소하고 약하기에 소중히 대하고 정성껏 품어야 합니다. 그래야 너와 나의 신비가 합쳐져 모두가 깃드는 하느님 나라, 모두를 흡족히 배불리는 하느님 나라를 이룰 수 있습니다.
"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주님과 그 권능을 구하여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입당송)
이 말씀은 남편과 아내, 그리스도와 교회가 하느님 나라를 이룰 수 있는 팁을 제시합니다. 언제나 상대에게서 그분의 얼굴을 찾는 것! 흠 많고 부족하며 죄인인 실수투성이 파트너, 공동체, 교회 안에서 "어떤 사람보다 수려하신"(시편 45,2 참조) 주님의 얼굴을 찾으라고 오늘의 말씀은 초대합니다. 아름다우신 주님의 얼굴을 담고, 하느님 나라의 충만함으로 피어나는 벗님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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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욕구는 하위 단계로부터 제대로 채워져야 내적 성장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서 욕구의 업그레이드가 잘되기도, 잘 안되기도 합니다. 그것은 어린 시절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어린 시절에 지나치게 가난하고 힘들게 살았거나, 부모로부터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살아온 사람들은 욕구의 단계를 뛰어넘는 것을 너무도 어려워합니다. 채워지지 않은 마음의 깊은 구덩이에서 나를 붙들어 매려는 힘이 강하게 뻗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린 시절이 지나치게 불우했던 사람들은 수도 생활이든, 결혼 생활이든, 직장 생활이든 간에 다 어렵습니다. 베네딕토 성인은 지나치게 궁핍하게 산 사람들은 수도자로 받지 말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가난이 진저리나게 지겨운 사람들은 절대로 가난의 영성은 실천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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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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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한 쌍의 비유를 전해줍니다. 곧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루카 13,19)
‘겨자씨’는 유다문학에서 ‘작은 것’의 전형적인 상징으로 사용되어 왔다고 합니다. ‘겨자씨’는 비록 작은 씨앗이지만, 자라나서 큰 나무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 그것은 ‘정원’에 심었을 때를 말합니다. 아무 데나가 아니라 ‘정원’에, 그것도 “자기 정원”에 심었을 때를 말합니다. 그러면 하늘의 새들이 깃들이게 됩니다.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라는 말에서, “깃들다”(κατασκηνω)는 단어의 뜻은 “밑에 거주하다” 곧 “장막에 들어가다”, “장막을 치다”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곧 새들이 단순히 가지 위에 잠시 내렸다가 다시 날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안전하고 영속적인 거처를 마련하고 지속해서 거주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교회’라는 혹은 ‘가정’이라는 생명의 말씀나무에 한 둥지를 틀고 사는 새 떼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이미 한 그루의 생명나무입니다. 당신께서 뿌려진 생명의 씨앗이 자라나 사랑으로 피어난 나무입니다.
한편, ‘겨자씨의 비유’가 하늘나라의 외적인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면, ‘누룩의 비유’는 내적인 변화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곧 누룩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위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누룩”은 밀가루에 들어가 자기의 능력을 전체에 돌려줍니다. 그러나 먼저 반죽되어야 하고, 섞여야 됩니다. 누룩은 밀가루에 묻혀 보이지 않지만, 결코 죽지 않습니다. 오히려 밀가루 속으로 들어가 섞일 뿐입니다. 그리고 변화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룩을 밀가루 “속에” 집어넣었다고 하십니다. 우리도 이 누룩을 우리 ‘속에’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적은 양의 누룩이 자루 서 말을 모조리 부풀리듯이, 갈라진 우리의 내부를 통합할 것입니다. 그렇게 성장시키고 변화시킬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누룩이 되어 세상 속으로, 형제들 속으로 들어가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통하여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시작된 것처럼 보이는 하늘나라의 복음은 세상을 해방하는 변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적은 양의 누룩이 가루 서 말을 모조리 부풀리듯이 말입니다.
또한 “집어넣다”(εγκρυπτω)는 동사는 “숨기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밀가루 서 말 속에 숨긴 누룩이 온통 부풀어 오르듯이, 하늘나라도 현재 숨겨져 있는데 미래에 엄청나게 확장되리라는 전망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누룩”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위력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겨자씨가 이미 ‘우리’라는 밭에 뿌려졌고, 누룩이 이미 ‘우리 가정, 우리 공동체’라는 밀가루 안에 넣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맘껏 자라나고, 맘껏 부풀어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 안에 넣은 누룩이 제 속을 파고들게 하소서!
섞여들지 못한 까닭에 부풀어 오르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제 안에 뿌려진 씨를 묻어두고만 있지 않게 하소서!
죽지 못한 까닭에 싹을 피우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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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루카 13,19)
주님!
당신은 겨자씨처럼 작은 자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사랑하는 이 위에 군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낮추어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낮아지는 것이 사랑하는 방법이고 사랑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형제들 앞에 작아지게 하소서! 사랑하는 까닭에 작아지게 하소서!
이것이 제가 형제들 앞에 작아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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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루카13,18-19)
이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그것은 누룩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겨자씨와 누룩은 매우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 비유는 '하느님의 나라는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에서 시작되고 완성된다'는 의미의 말씀입니다. 이 비유는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의 눈에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살리시는 구세주'라는 의미의 말씀입니다. 이 비유는 '기적과 큰 결실은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것에서부터 시작되고, 그것에 충실할 때 이루어진다'는 의미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얼마나 작은 것, 작은 곳,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것에 민감하고 충실한가?
오늘 독서는 사도 바오로가 전하는 '에페소서 5장 21절에서 33절의 말씀'인데, 남자와 여자가 혼인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는 큰 신비'를 전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가 전하는 이 신비의 핵심은 '사랑과 순종', '순종과 사랑'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그리고 아내와 남편이 사랑 안에서 서로 순종하고, 순종 안에서 서로 사랑할 때 둘이 하나가 되는 신비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 신비는 처음은 쉬워보여도 시간이 지날수록 참으로 어렵고 힘든 신비입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아내와 남편이 쉽게 놓쳐버리는 아주 작은 것에 민감하고 이것에 충실한다면 결코 어렵지 않은 신비입니다.
"여러분도 저마다 자기 아내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고, 아내도 남편을 존경해야 합니다."(에페5,33)
첫 마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해 봅시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오늘도
따뜻한 미소와 웃음, 따뜻한 말 한 마디, 작은 나눔과 희생에 민감하고, 그것에 충실함을 더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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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BietLklvAYI&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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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루카 13, 19)
기다림과
가능성 사이에
우리의
성장이 있다.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처럼
자라난다.
성장의 기쁨이
참된 기쁨이다.
아름다운
성장의 기쁨은
하느님의
가능성을 믿는
은총이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으신다.
사랑이
사람을
변화시키듯
겨자씨는
마침내
겨자나무가
된다.
사랑은
기다림의 여정을
함께한다.
사랑하기에
소중하고
사랑하기에
기다려주신다.
참으로
소중하고
소중한 것이
사랑하고
사랑받는
기쁨임을
알게된다.
사랑또한
하느님을 통해
배우고 성장하는
사랑이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또한
자라나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은 겨자씨가
겨자나무로 자라듯
하느님 안에서
사는 기쁨이다.
기쁨은
기다림속에서
사랑은
인내속에서
이미 와 계신
하느님과 함께
사랑을 배우는
나라이다.
가능성과
성장사이에
기다림이 있고
기도가 있고
사랑이 있고
마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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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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