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은 한 도시의 탯줄과 같았다. 도시가 커질수록 미로처럼 얽힌 골목이 끊임없이 영양분을 공급했다. 진주 마산 같은 전통도시가 더욱 그렇다. 그런 골목이 마산의 오동동에 있었다.
오동동의 전통 골목이 지금 하나 둘 사라지고 있다. 유명한 아구찜 골목은 주차와 화재에 대비한다는 이유로 이미 소방도로로 바뀌었다. 옛 골목을 볼 수 없는 건 오동동 파출소 옆길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미로처럼 형성된 오동동 골목길 대부분을 소방도로로 만들 계획이 계속 추진된다는 것이다.
마창진 르포모임 회원 6명이 마산·창원·진해의 전통 골목과 거리를 찾아 나섰다. 곧 흔적조차 사라질 골목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글을 쓰고 사진을 찍었다. 그 길에서 사람과 만나고 기구한 삶에 부대꼈다. 골목의 역사는 곧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저무는 골목에서 삶을 만나다’라는 르포모음으로 발간됐다.
△ 골목이 사라진다
소설가 김하경(60)씨는 이 책 서문에서 “이제 그 얼굴을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 사진 한 장이라도 찍어둘걸. 목소리라도 녹음해둘걸. 삶의 한 자락이라도 더 기록해둘걸”이라고 전했다. 이 일을 벌인 동기가 담겨 있다.
골목을 기록하는 일은 골목이 사라지고 있다는 인식에서 시작됐다. 골목에서 기인한 문화와 도시, 사람이 이 땅에서 없어진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는 마산의 오동동과 부림동 취재과정에서 드러났다.
오동동은 없는 술집이 없는 유흥가로도 알려져 있지만, 얽히고설킨 미로의 골목은 또 다른 이야깃거리였다. 오죽했으면 오동동의 명물은 ‘아구찜골목’이니 ‘통술골목’처럼 하나같이 ‘○○골목’ 이다.
그런 오동동 골목이 하나 둘 흔적조차 사라져가고 있다. 앞으로 2~3년 내에 골목을 소방도로로 확장한다는 계획이 줄을 서 있다. 대표적인 곳이 아구찜골목과 연결되는 옛 요정골목. 일제 때부터 요릿집(요정)이 즐비해 심야에도 가로등이 필요 없었다는 이 골목을 2007년까지 6m 폭의 소방도로로 바꾼다는 계획을 동사무소 관계자로부터 들었다. 나오는 길을 찾기 어려워 미로로 알려진 옛 영남주차장 옆 골목도 마찬가지. 골목 끝인 북마산가구거리까지 확장할 계획이다.
△ 흔적조차 사라질 한일합섬
‘○○골목’ 기억조차 가물가물
지금 당장 골목을 기록해야 할 이유는 마산 부림시장 안 목공골목이 더욱 뚜렷하다. 연흥극장 옆에서 서성동 3·15의거탑 쪽 길로 향하는 이 골목이 한때 마산 최대의 ‘중고품 시장’이었다는 점도 낯설다. 그래서 ‘도둑놈골목’으로, 또 ‘장물골목’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골목은 성격을 바꾸어 남아있으니 옛 모습을 추정할 근거는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 골목 뒤에 마산-삼랑진 군용철도 ‘마산선’이 있었다는 사실은 이제 추정할 근거가 없다. 또 6·25전쟁 직후 유가족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의 ‘모자원’ 건물이 1974년까지 20년간이나 존재했다는 점도 지금은 잊혀졌다. 글을 쓴 김규석(39·목수)씨는 시청이나 도청 등 관공서 어디에도 관련 기록을 찾을 수 없었다고 했다.
현 한일합섬 주변 골목에 대한 기록은 이 공장이 2006년이면 모조리 아파트건축 지역으로 바뀔 예정이기 때문에 의미가 더 컸다. 시인 오도엽(39)씨는 옛 ‘바냇들’이 공업용지로 수용됐던 1960년대 말 광경을 이제 여든 가까운 주민의 눈으로 되돌아봤다. 또 3만명이 넘던 80년대의 공장을 거대한 노동자의 대열에 끼어 당시 한일여실 기숙사 생활을 했던 열여섯 충청도 소녀의 이야기로 담았다. 특히 양덕동 골목 이야기는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둔 한일여실 기숙사의 세세한 일상을 투영해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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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해 경화시장 안 골목. |
| △ 시장골목의 사람 이야기
창원과 진해에서 마산의 골목에 대비되는 기능을 가진 곳으로 전통 재래시장과 가구거리, 목공거리 같은 동일업종 집중지역을 들 수 있다. 골목과 골목이 모여 하나의 상권을 형성한 마산처럼 시장과 특정한 업종거리가 발전의 핵이 됐다.
특히 사라져가는 지역의 흔적을 기록하는데 초점을 맞춘 이 책에서는 발전 도상에 있거나 변화의 기틀을 마련하려는 두 도시의 흐름에 배제된 옛 도시의 거점에 현미경을 들이댔다. 쇠락한 그곳에 힘겨워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박미영(33·시민단체 간사)씨는 창원 가구거리와 공구거리의 관리인과 용달업자, 자영업자와 이주노동자 등의 일상을 그림 그리듯 좇았다. 질박한 그들의 일상은 삶에 끈질기게 적응하는 힘을 주었던 모양이다.
도심상권 좌우했던 시절도 40대의 자영업자 김모씨는 “포기란 말은 배추 셀 때나 쓰는 것 아니겠어요”하며 자리를 툴툴 털고 일어나더란다.
창원의 발전 축에서 배제된 소답동에는 전통 창원장의 자존심이 남아있지 않았다. 번듯한 건물에 싼 가격, 널찍한 주차장을 갖춘 대형 할인점의 틈바구니에서 옛 번영을 읽기 어려웠던 듯 하다. 상인들은 단결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당장 힘든 걸 어쩔 수 없다. 글을 쓴 정윤(41·자영업자)씨는 그들의 적나라한 대화를 전했다.
“○○아지매는 오늘도 안 보이네” “해외여행 갔다 아이가. 언 년은 팔자좋아 여행댕기고, 언 년은 빼꼴이 빠지고…” 장래 계획도 힘이 없다. “희망이 없다 아이가. 안 돼서 문 닫는데 천지고. 차라리 아들 하나 가 있는 캐나다로 빠질라꼬” 말끝에 창원장의 옛 번영이 담기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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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르포모임 회원들. 왼쪽부터 오도엽, 이일균, 김규석, 박미영, 신미란, 정윤씨. |
| 옛 영화 이젠 책속으로
진해 경화시장을 그린 신미란(35·노동자)씨는 기록의 어려움을 체득했다. 동시에 그 방법도 얻었다. 생활에 바쁜 시장 상인들에게 “기록 하겠다”며 접근하는 일이 얼마만큼 사치로 느껴지는지 몇몇 박대를 통해 알았다. “일 없소. 그래봤자 나아질 것 없고, 그냥 가소. 마!” 그러나 그는 거주지인 창원에서도 멀기만 한 진해에서 장보기를 대신하며 사람들의 이야기를 끌어냈다.
그 과정에서 경화장 만의 난제가 드러났다. 얼마 많지 않은 상주 상인과 5일장마다 찾아오는 더 많은 수의 외지 상인 간 이해의 격차가 그것이다. 특히 시장현대화의 필요성을 느끼는 정도에 큰 차이가 있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