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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를 쓴 자들은 모두 나를 속였으니 나경언이 없었더라면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
- 영조실록 영조 38년 5월 22일자 기록에서 영조의 발언 -
<고변>
5월 22일. 결국 폭탄이 터졌다. 나경언이 환시가 불궤한 모의를 꾸미고 있다고 고변한 것이다. 환시란 내시등을 일컫는 말. 즉 이 고변 내용대로 하면 궁 내에서 역모가 꾸며지고 있다고 나경언이 고변했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이 고변을 접수한 형조참의 이해중은 영의정 홍봉한과 의논하였고 홍봉한은 즉각 영조에게 아뢰었다.
- 역모 혐의를 접수한 홍봉한은 급하고 중대한 사안이라 판단하여 바로 영조에게 알리도록 지시한다. -
경기감사 홍계희가 호위를 권해 궁궐 문을 모조리 닫은 후 영조는 직접 나경언을 친국하였다. 이 때 나경언은 옷 소매에서 다른 종이를 바쳤다. 이를 본 영조는 다 읽지 못하고 “이런 변이 있을 줄 염려하였었다.” 고 말하였다. 그러자 홍봉한, 윤동도 등이 그 글을 볼 수 있게 할 것을 청해 글을 보게 했는데 두 사람 역시 크게 놀랐다. 세자의 비행이 낱낱이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영조는 윤동도가 글을 다 본 후 신하들에게 “오늘날 조정에서 사모(紗帽)를 쓰고, 띠를 맨 자는 모두 죄인 중에 죄인이다. 나경언이 이런 글을 올려서 나로 하여금 원량(元良)의 과실을 알게 하였는데, 여러 신하 가운데는 이런 일을 나에게 고한 자가 한 사람도 없었으니, 나경언에 비해 부끄럼이 없겠는가?” 라고 하였다. 사실상 자기 모르게 세자의 여러 비행들을 숨겨온 신하들에게 내리는 엄중한 질책이요. 동시에 경고였다.
신하들은 서둘러 그 문서를 태울 것을 주청하였고 영조는 수락했다. 한편 홍봉한은 돌아가는 상황을 세자에게 말하여 세자가 영조에게 가도록 조치하였다.
상황을 파악하고 기겁한 사도세자는 서둘러 영조에게 달려가 대죄하였다. 한참 동안 대죄하고 있던 세자를 영조는 엄하게 꾸짖는다. 당시 영조의 말은 다음과 같다.
엄중한 꾸짖음을 들은 사도세자는 나경언과의 대질을 청하였다. 하지만 영조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차라리 발광을 하는게 어찌 낫지 않겠느냐는 말을 하기까지 하였다.
- 사도세자는 대질을 청하였으나 영조는 불허한다. 사도세자로서는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
당시 국문장에 있던 신하들은 모두 세자를 비호하면서 나경언을 처형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에 영조는 되레 분노하였다. 세자를 옹호하는 홍봉한을 잠시 파직시키는 한편 계속적으로 나경언의 처벌을 주장하는 신하들을 파직하거나 체차하였다. 당시 실록에서는 영조가 나경언을 살리고자 하였다고 공공연히 적을 정도로 영조는 나경언을 비호하고 보호하고자 했다. 자기가 몰랐던 사실들을 알게 해준 나경언을 죽이고 싶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계속되는 신하들의 압박으로 결국 영조는 나경언을 사형시켰다.
<고변장의 내용>
나경언의 고변장은 소각되었기에 10개조라는 것만 알려졌을 뿐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실려있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나경언의 고변 당일에 있던 영조의 발언 등을 통해 1. 왕손의 어미(빙애)를 죽인 것. 2. 여승을 궁에 들인 것. 3. 서로에 행역한 것.(1) 4. 북성으로 나가 유람한 것. 총 4가지가 나경언의 고변장 내용에 있던 것은 확실하다. 거기에 더해 이틀 후 영조의 발언에서 사도세자가 시전상인들에게 돈을 빌리고 갚지 않았으니 그 빚을 대신 갚으라고 명한 것을 볼 때 이 부분까지 들어가있던 것은 확실하다.(2)
이외에는 소각된 까닭에 어떤 말들이 들어갔는지 알 수 없다. 사도세자에게 간언한 김시찬, 이보관의 이름이 들어간 것이나 서명응, 김유성의 이름이 들어간 것만이 확인될 뿐이다. 하지만 정황상 이들은 중요하게 언급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몇몇 사람들의 추측에 의하면 사도세자의 역모 혐의에 대한 부분도 조금은 있었을 것이라고는 하는데 아마 양도 적은데다가 그닥 중요하지 않고 누가 봐도 헛소리로 치부될만한 수준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나경언의 배후?>
사실 나경언의 고변에는 배후가 있는게 아니냐는 추측이 나경언이 고변할 때부터 있었습니다다. 그럴만도 한게 나경언이 고발한 것은 어찌되었든 세자입니다. 세자를 고변했다는 점 때문에 나경언의 고변의 배후에 대한 추측이 있었습니다. 당장 실록만 봐도 의금부 판사 한익모가 나경원의 배후를 캘 것을 주청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영조의 답은 한익모의 파직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나경언을 죽일 것을 청하는 신하들은 모조리 파직, 혹은 체차의 영을 내렸습니다. 결국 신하들로써는 나경언의 배후를 캘 수 없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배후를 적극적으로 캔 건 아무래도 당사자였던 세자밖에 없었습니다. 사도세자는 나경언의 처자들을 심문했고 그 과정에서 안성의 경주인(3)이 나경언의 배후라는 진술을 받아냈습니다. 바로 안성의 경주인이 국문을 받았고 그는 우의정 윤동도의 아들 윤광유를 배후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사도세자는 이것을 거짓 진술로 보고 되려 윤광유를 위로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혜경궁은 나경언이 윤급의 겸종(4)이고 윤급이 김한구계 사람이라는 점을 들어 이 고변의 배후를 김한구 등 정순왕후계열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덕일은 이해중이 혜경궁의 외사촌으로 홍봉한의 친척이란 점을 들어 홍봉한 등의 노론 세력이 배후라고 보았고요. 그리고 정병설 교수는 배후를 특정하지는 않았으나 감히 세자를 고변했다는 점에서 배후가 있었을 것이라는 식의 주장을 피고 있습니다. 덤으로 다른 사이트에서 사도세자에 대한 글을 연재했던 눈시님은 나경언의 배후가 영조일수도 있다는 추측을 했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진짜로 배후가 있기는 했던 걸까요? 그러기에는 뭔가 무리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배후가 있었다기에는 나경언이 영조에게 바친 문서가 세자를 죽일만한 것은 못 된다는 점에서 더더욱요. 이런 점 등을 고려해볼 때 개인적으로 생각해본 가설이 하나 있습니다. 추측일 뿐이므로 확실하지는 않고 정확성은 장담할 수 없습니다만.
일단 여러 자료에 의하면 나경언은 한때 궁궐에서 별감의 일을 맡았고 그의 동생이 당시 별감 일을 맡아보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궁궐 내에서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 정통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영조와 사도세자의 불화는 물론 사도세자의 비행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겠지요. 더군다나 마침 나경언은 가산을 모두 탕진한 상태였습니다. 물론 가산을 탕진했다는 것은 배후 세력의 개입 가능성도 시사하지만 동시에 나경언 자신이 한탕 노려보고 큰 건을 계획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뜻이 됩니다.
나경언은 영조가 사도세자를 미워하지만 사도세자의 비행을 자세히 알지는 못하는 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더군다나 이전에 사도세자의 비행을 아뢴 관료가 상을 받았다는 것도 알았을 것입니다.(5) 나경언은 사도세자의 비행을 일러바치기로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이를 정상적은 방법으로 진달하려고 한다면 십중팔구 승지와 대신들이 중간에 막을 것이 뻔했습니다.
결국 나경언은 역모가 있다고 거짓말을 하여 영조를 만나고 그 자리에서 사도세자의 비행을 고발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역모에 대한 부분도 조금은 섞여있었겠지만요. 이를 본 영조는 일단 나경언에게 장을 치게 하기는 했지만 비행 사실을 알려준 나경언을 살려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신하들은 이를 묵과할 수 없었고 결국 나경언은 로또 당첨 대신 강림도령과 함께하는 저승행 열차표를 받게 되었습니다.
물론 세자를 고발한다는 결심을 한다는 게 쉬운 건 아닙니다. 하지만 이미 조선시대에는 비슷한 전례들이 존재했었습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정막개의 고변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1513년 의정부 소속 관노 정막개가 역모 고변을 하면서 시작됬는데 이 때 그가 고발한 건 중종반정 1등 공신이었던 신윤무와 박영문이었습니다. 물론 중종반정 당시 공신들은 너무나도 많습니다만 신윤무와 박영문은 반정 핵심 인물들로써 상당한 권세를 쥔 무신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관노 정막개의 치밀한 주장으로 말미암아 이들은 역모 혐의로 처형되어버립니다. 정막개는 엄청난 부와 벼슬까지 거머쥐고요.(6)
다만 이 사건은 실제 신윤무 등이 역모를 꾸몄는지에 대해 당시부터도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품고 있었습니다. 고변 당시만 해도 중종이 신윤무가 역모를 했을지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며 되레 정막개를 국문하는 안을 고려했었고 이후 정막개가 성희안의 종을 구타하는 사건이 터질 당시 사관의 평이나 세간에서 정막개를 대우한 여러 기록 등을 볼 때 진짜로 신윤무 등이 반역을 계획했다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여러 정황을 볼 때 당시 사람들의 추측이 일리가 있다고 보는 편입니다.
관노가 반정 1등 공신을 날려버린 적도 있는데 평민이 세자를 고발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봅니다. 그리고 어찌되었든 나경언의 담도 상당히 크지 않았을까 합니다. 배후가 있든 없든 세자를 고변하는 용기가 상당히 있어야 될 일을 한 것은 사실이니까요.
<증폭되는 불안>
나경언의 고변은 사도세자에게 불안감을 심겨주기에는 충분했다. 이제 아버지는 아들의 비행을 소상히 알게되었으니까. 사도세자는 바로 시민당 월랑에서 석고대죄에 들어갔다. 물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석고대죄만 한 것은 아니다. 나경언의 처자를 국문하기도 했고 윤광유를 위로하기도 했다. 또한 죽기 며칠 전에는 중국소설회모본(7)의 서문을 쓴 것으로 알려져있는데 이를 볼 때 자신의 거처와 석고대죄 장소를 왕복하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영조가 줄곧 반응이 없었다. 영조는 석고대죄 한 지 1주일이 지나서야 홍봉한 등의 말을 듣고 세자가 석고대죄하고 있는 줄 몰랐다는 말을 한다던지 하는 수준의 반응만을 보였을 뿐 구체적으로 뉘우친 듯 하니 그만 물러가라든지 하는 식의 말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한달 가까이 석고대죄를 하고 있던 사도세자는 그 이전부터 어느 정도 느끼기는 했지만 본능적으로 목숨의 위협이 지척에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엄청난 불안감을 느낀 것이다.
- 영조한테서 반응이 없자 사도세자의 불안감은 증폭되고 결국은 극도의 히스테리 증상을 보이게 된다. -
여담으로 윤 5월 3일 무뢰배인 박지성(축구선수 박지성이 아니다.), 김인단 등이 처형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들은 무례하게 날뛰며 동궁을 사칭하며 밤에 다니면서 사람들의 통행을 통제하고 나중에는 부녀자를 강간했다가 강간한 부녀자의 고발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고 한다. 사실 세자랑 크게 관련이 없기는 했지만 그들이 세자를 사칭했다는 점에서 사도세자가 암행을 자주 다닌다던지 최소한 한양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도세자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
(1) 서로 행역은 관서 유람을 의미한다. 물론 관서유람은 이미 영조가 알았던 것이지만 정황상 나경언의 고변장 내용에는 관서유람 당시의 행적이 상세하게 기록되어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2) 영조와 정조의 나라에서는 동궁 화재 사건의 원인을 종에게 뒤집어씌운 것도 있지 않았나 추측하고 있다.
(3) 지방 관아의 서울 출장 사무소 같은 걸로 생각하면 좋다.
(4) 단 겸종은 집사 비슷한 것으로 천민보다는 양인이 주로 맡았다. 이를 통해 볼 때 나경언은 양인 혹은 중인이었던 걸로 보인다.
(5) 단 상을 받았다는 사실을 부러워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6) 지평 권벌의 상소로 말미암아 얼마 안 되서 상과 벼슬은 몰수. 정막개는 나중에 굶어죽었다고 한다.
(7) 중국 소설의 삽화들을 베껴서 그린 그림책
첫댓글 역시 나경원... (어?!)
저도 순간 깜짝 놀랐다는;; ㅋㅋㅋ
올것이 왔도다 두둥
아주 좋은 글에는 감사드리는데, 연재가 너무 감질나게 ㅠ.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