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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뮤즈" "베토벤" "이태백" 어워드 공모전]
(수필부문)
베토벤에게서 성공을 배운다 / 최재원
요즈음 우리들 주위의 공기는 다양한 이유로 인해서 무겁다. 숭고하지 못한 물질주의가 사고를 억누르고, 뭇 개인들의 행동을 속박하기도 한다. 지금의 세계는 조심스럽고 비루한 이기주의에 허덕이며 질식하고 있다. 세계는 숨이 막힌다. 다시금 창을 열어젖히자. 자유로운 대기가 흘러가게 하자. 영웅들의 숨결을 들이마시자. 나는 어떤 사상가나 힘으로 승리한 사람을 영웅이라 부르지 않는다. 내가 영웅이라고 부르는 것은 오직 마음으로써 위대하였던 사람뿐이다. 그들 가운데서도 위대한 사람의 하나, 나는 선(善) 이외에는 아무것도 탁월의 종착점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인격이 위대하지 못한 곳에 위대한 사람은 결코 없다. 위대한 예술가도 위대한 작가도 행동가도 없다. 다만 비루한 대중이 만드는 공허한 우상의 텅빈 마음 공간만이 있을 따름이다. 그것조차도 시간이 그들을 모조리 없애 버린다. 내가 이야기하려는 영웅의 생애는 거의 언제나 기나긴 수난의 역사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비극적인 운명이 그들의 넋을 육체적 고통위에다가 단련시키고자 하였거나, 고난과 굴욕의 광경을 봄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심정이 갈가리 찢어지고 그로 인해 그들의 생활이 여지없이 거칠어졌거나, 하여튼 그들은 나날의 시련 빵을 먹은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강철같은 의지력으로써 위대하였다면, 그것은 그들이 또한 불행을 통해 위대해졌기 때문이다. 간혹 불행한 사람들이여, 그러므로 서러워 하지 마라. 인류의 우월한 승리의 사람들이 우리들과 함께 더불어 있는 것이다. 그들의 용기로써 우리 자신을 북돋우자. 그리고 우리가 너무나 연약한 상황에 처했을때는 그들의 무릎 위에 잠시 머리를 눕히고 쉬자. 그들은 분명 차별없이 우리를 위로해 줄 것이다. 그들 생애의 역사 속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인생이란 고뇌 속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풍요하고 가장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영웅적 대열의 선두에 맨 먼저 자랑스러운 인생 승리를 이룩한 베토벤을 앞으로 세우고 싶다. 그 자신이 고난 속에 있으면서 바라던 바는, 그 자신의 실례가 불행한 사람들에게 한낱 자기와 같은 불행한 사람들에게 의지가 되며, 또 모든 불행한 사람이 자연의 갖은 장애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란 이름에 값닿는 사람이 되고자 전력을 다했다는 것을 알고 위로를 얻으라는 것이었다. 오랜 세월의 초인적 분투와 노력으로 마침내 고난을 극복하고, 천직을, 그 천직이란 그 자신의 말에 의하면 가련한 인류에게 조금이라도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것이었다. 그럼 자, 이제 천재 음악가 베토벤의 삶 속으로 저와 함께 여행을 떠나보실까요?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어두웠던 어린 시절을 보낸 베토벤은 진정 음악 신동이었습니다. 베토벤이 태어난 18세기만 해도 음악가는 왕실이나 명문 귀족 가문 또는 교회에 종속된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베토벤은 빈에서 음악가로 데뷔한 이래 평생을 독립된 예술가로 살았습니다. 후원을 받기 위해 교회 성직자나 귀족에게 굽신거리지 않았고, 때로는 무례한 태도로 대하기까지 했죠. 귀족들은 그런 베토벤을 흠모했고 기꺼이 관대한 후원자가 되길 자초했습니다. 베토벤은 귀족들과의 관계에서 소위 '밀당' 명수였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귀족들과 함께 어울려 섞이는 것은 좋다. 하지만 예술가라면 그들을 어떻게 감동시킬지 알아야 한다.' 는 의견을 주장한 이런 유형의 음악가는 베토벤이 사실상 처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학창 시절에 베토벤의 연인관계를 다룬 영화 "불멸의 연인"을 본 적이 있는데 그 당시엔 별로 큰 관심 있게 보지 않았다. 그 후 오랜 시간이 지나 영화 "불멸의 연인" 마지막 장면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영화 속에서 발견한 심쿵한 장면의 내용인즉 베토벤이 이미 늙어서 죽음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워 작곡을 하고 있다. 나는 당연히 후기 현악사중주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흥미를 가지고 지켜보았다. 이때 한 여인이 찾아온다. 베토벤에게 아들을 빼앗긴 제수 요한나다. 베토벤은 듣지 못하는 것은 물론 말할 기력도 없는 상태다. 베토벤은 "카를 베토벤의 양육권을 생모에게 돌려준다." 라고 서류에 사인한다. 그리고 그녀에게 무언가 말을 하려고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메모할 곳을 찾다가 들고 있는 악보 위에 무엇인가를 적기 시작한다. "꼭 그래야겠지?" 하고 말이다. 나는 눈이 휘둥그래져서 그 장면을 보고 있었다. 그 이후의 장면은 더 놀랍다. 그 메모를 읽은 나는 펜 끝에서 전해오는 전율을 느끼면서 재빨리 적는다. "꼭 그래야 합니다." 라는 문구였다. 영화 "불멸의 연인"은 베토벤의 유명한 '질문과 대답'에 대해서 매우 감동적이면서도 충격적인 해석을 내놓는다. 즉 "Must it be"라는 메모 글자이다. 영화에서는 현악사중주 16번의 이야기나 별다른 부연설명이 전혀 나오지 않기 때문에 관객들은 그냥 지나갈 수 있는 장면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제대로 알고 보면 엄청난 감동을 받는다. 물론 이 이야기는 영화에서 만들어낸 가설이다. 하지만 정말 멋진 감동의 추측이 아닌가? 우리의 호기심을 끊임없이 자극하는 문구가 바로 마지막 사중주에 담겨 있는 것이다. 나는 영화를 통해 던지는 철학적 질문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그걸 대놓고 말로 표현하거나 날것으로 표면에 드러내고 싶지는 않다. 시(詩)적, 문학적 감각을 통해 전달하면서 철학적인 질문을 은근히 던지고 싶다. 가장 근본적이고 철학적인 이성의 질문을 인간 본연의 원초적 감각에 실어서, 육체에서 느껴지도록 전달하고 싶은 거다. 그리고 나는 평소에 글을 쓸 때나 산책할 때 음악을 자주 듣는다. 중간중간 음악을 들으면서 최대한 단순하게 글 쓰는 걸 생활의 최우선으로 삼고 거기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평소에 일상을 단순하게 하지 않으면 글을 원하는 만큼 써낼 수가 없다. 글쓰기에 얼마나 집중력이 필요한지 사람들은 잊기 쉬운데, 다양한 모임에 나가거나 많은 사람들을 모두 만나면서 집필을 할 수는 없다. 음악을 감상하는 것은 멜로디를 듣는 것 이상의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음악을 통해 소리가 전하는 이야기를 듣고, 이해하며, 그 희열과 감각을 느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음악은 국경을 초월한다. 라고 말합니다. 위대한 베토벤이 우리에게 음악의 자유를 부여하자 그 다음 시대가 도래하게 됩니다. 얽매이지 않는 리듬과 화음으로 한없이 아름다운 선율이 등장했고, 그런 음악은 누구나 쉽고 빨리 이해했으며, 그것을 즐기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해도 무리한 해석은 아닙니다. 이른바 낭만파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전 시대들에서 남겨준 형식이라는 유산을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해서는 많은 의견 차이를 보였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서로 다른 장르의 음악들이 모두 발전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지금 우리 문학인들이 글의 구성요소 및 형식과 운율에 관해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될 중요한 사항인 점은 틀림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내외적인 모든 요소가 균형을 잘 갖춘 조화를 이루었을 때만이 아름다운 향기가 나는 멋진 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음악은 시나 문학과 손을 잡고, 예술작품으로 가곡을 만들었다. 즐거울 때, 지루할 때, 잠이 오지 않을 때도 우리는 음악을 찾습니다만, 특히 이럴 때 음악이 절실한 것 같습니다. 바로 힘들고 지칠 때, 외로울 때, 마음의 평화를 얻고 싶을 때, 이럴 때 일수록 음악을 찾습니다. 혼자서 완벽한 인간은 없습니다. 그래서 신은 서로서로 의지할 수 있도록 인간에게 언어를 주었습니다. 그것도 매우 다양한 언어를요. 그런데 음악이라는 황홀한 언어는 철자를 배우지 않아도, 문법을 알지 못해도 귀로 듣고 마음으로 느끼고 손과 호흡으로 연주하며 모두를 하나로 통하게 해줍니다. 정말이지 신이 주신 최고의 선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 그러면 또 이쯤에서 음악의 세계로 우리 모두다 마지막 여행을 떠나볼까요? 음악에 있어서 곡의 주제 선율을 외워 첫 소절을 듣고 누구의 무슨 곡인지 알아 맞힌다거나 클래식 음악 전반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졌다고 해서 음악을 제대로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동안 나 자신의 음악 체험을 통해 얻은 생각은 이렇습니다. 음악을 잘 듣기 위한 간단하고 분명한 방법은 많이 듣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바쁜 현대인들이 음악을 듣는 일에 여가시간을 다 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가장 쉽게 음악을 이해하는 방법은 음악 듣기를 일종의 소통으로 생각하고 자신에게 익숙한 분야를 통해 접근하는 겁니다. 경험이 계속 반복되면서 서서히 음악이 전하는 이야기가 들리고 잔잔한 감성의 깊이가 더해지면서 음악에 대한 통찰력이 한층 성장하게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설레고 신비로운 베토벤의 클래식 소통을 함께 시작해보시죠. 클래식 음악이 재미없다고 생각했거나, 다른 어떤 장르의 예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면 당신은 그 분야의 참 맛의 멋진 경험을 아직 못해본 것이라고 확신한다. 편식을 하는 사람이 손해 보는 것은 건강만이 아니다. 다양한 음식을 즐길 수 있는 행복의 기회 또한 얻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클래식 음악은 더 이상 사치가 아닌,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한 생활필수품이다. 클래식 음악이라고 하면은 콧잔등에 안경을 걸고 귀족처럼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나 아는 체하기 좋아하는 사람의 전유물이 클래식인 줄 알았다. 클래식 애호가들은 비싼 와인을 마시면서 혀도 좀 굴리는 부류인 것만 같다. 연주자들은 또 어떤가? 어릴 때부터 인정받고 자란 것 같으며, 무대에서는 검정 옷을 입고 잘 웃지도 않는 얼굴로 기교를 뽐낸다. 우리와는 영 다른 세계의 사람들 같다. 게다가 그들이 연주하는 음악은 제목도 외우기 힘들다. 길이는 또 왜 그리 긴지 10분 동안 듣고 있다가 이제 끝났다 싶으면 2악장이 또 있단다. 졸립다, 어렵다, 고리타분하다, 그러나 틀렸다. 나는 생각한다. 클래식은 그런 사람들만 즐기는 것이 아니다. 너무나 열정적이고 감격해서 보통 강심장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주의가 필요할 정도다. 나도 처음에는 이런 사실을 몰랐다. 그만큼 전혀 모르는 클래식 문외한이었다. 많은 대다수의 사람들은 클래식을 막연하게 좋아한다. 우리는 음악을 듣는 것은 좋아한다. 하지만 음악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는 맹점이 있다. 누구의 음악이고 왜 이런 음악이 나타나게 되었으며, 이 음악이 나올 당시 시대는 어떠했는지에 대해 관심이 없다. 단언컨대, 음악이 탄생하게된 배경이나 음악가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공부하고 알게 된다면 음악이 클래식이 새롭게 들리게 된다. 마치 음악에 대해서 눈이 떠지듯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게 된다. 서양 속담에 "흐르는 시냇물에서 돌들을 치워 버리면 그 냇물은 노래를 잃어버린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의 인생에 역경과 고난의 돌을 치워 버리면 아름다운 노래를 들을 수 없게 됩니다. 우리들도 인생 살아가면서 어떠한 고통과 역경이 닥쳐와도 실망하고 좌절하고 쓰러지는자가 아니라 오뚜기처럼 그 역경을 딛고 일어나 베토벤처럼 제2의 인생을 창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베토벤은 자신이 써 내려간 작품이 실제 연주에서 단순히 멜로디와 화성만 떠올리는 정도가 아닌, 셈여림이나 표현법 표기에 따른 섬세한 뉘앙스의 변화까지도 내적으로 소리를 들으며 곡을 써 내려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베토벤의 작품에서 단순히 아름다움을 넘어 운명에 맞서는 한 인간의 분투에서 느껴지는 숭고함과 경외감이 느껴집니다. 우리는 아무에게나 위대하다는 표현을 쓰지는 않는다. 그러나 베토벤이라면, 위대한 작곡가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그는 음악의 완성을 이루어낸 아름답고 숭고한 '악성(樂聖)'이다. 베토벤처럼 시인이나 작가는 글 언어를 통해 사람을 위로하고 희망을 주는 존재라는 자기 신념을 갖고서 작품을 짓고, 써 내려가는 그런 가슴이 따뜻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2024.05.07에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