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보(聾巖 李賢輔:1467-1555)
자字는 비중(□仲), 호(號)는 농암(聾巖), 본관은 영천(永川)으로,
안동시 도산면 분천리에서 태어났다.
20세 때 홍귀달洪貴達 선생께 수학하고,
32세에 문과 급제.
36세에 사관으로 사초史草를 바르 게 쓸 수 있도록 직언하여 연산군의 미움을 얻었고,
38세 때는 서연관의 비행을 논하였다가 안동으로 유배되었다.
연산군의 어처구니 없는 실수로 기적적으로 죽음을 모면하니,
친구들은 선생의 이런 강직함을 보고 ‘소주도병(燒酒陶甁)’이라 했다.
사관(史官)으로서 유일하게 사지(死地)를 벗어난 경우이다.
중종반정으로 복직되어
형조참판, 호조참판, 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했으나,
그때마다 외직을 자청하여
영천, 안동, 경주, 대구, 경상도관찰사 등의 8개 고을살이도 했다.
경직京職을 절대적으로 선호한
당시의 정치 풍토로 볼 때,
외직의 자청은
남다른 효심孝心 때문이기도 하지만
민생에 보다 가깝게 가고자 하는 일관된 신념이었다.
동료들의 신망과 존경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안동부사 시절 ‘화산양로연(花山養老宴)’에는
80세 이상의 남녀귀천을 한자리에 함께 초청하는 파격적인 면모를 보인다.
주민이 전출의 길을 가로막는 사건들에서,
선생이 당대에 계층을 초월하고 누렸던 인기 는 결코 우연일 수 없다.
선생은 휴머니즘이 가득한 목민관으로,
대시인大詩人이며 대효자大孝子였다.
'화산양로연'은
고향에서 마련한 ‘애일당구로회愛日堂九老會’로 이어졌고,
여기서도 선생은
70세 노구의 몸으로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어
90세 부모와 노인들을 즐겁게 했다.
선생의 효도와 경로는
98세 아버지가 돌아시는 순간까지 전 생애 걸쳐 계속되었다.
이런 경로 모습에 동료 친구들이 일제히 축하시를 보냈고,
지금 그 친필시 40편이 그대로 종택에 보존되어 있으니
『애일당구경첩愛日堂具慶帖』(보물 1202호)이 바로 그 책이다.
‘애일당구로회’는 아들, 손자들에게 그대로 이어졌고,
이후 400여 년을 이어오는 농암가문의 아름다운 전통이 되었다.
부모가 돌아가시자
선생은 국왕과 동료의 만류를 뿌리치고 표연히 귀거래했다.
김중청金中淸은 이 은퇴에 대해
“회재晦齋(李彦迪), 충재沖齋(權□)께서 전송대열에 서고,
모재慕齋(金安國), 퇴계退溪(李滉)께서 시를 지어 전별했으니,
중국의 소광疏廣, 소수疏受의 은퇴에 어찌 비교되겠는가.
이는 우리나라 수천 년 역사 이래 없었던 일로,
우리 농암선생이야말로 천백만 명 가운데 단 한 분뿐이다”라고 찬양했다.
『실록』은 이를 ‘염퇴恬退’라 규정했다.
선생은 ‘돌아오는 배 안’에서 노래 한곡 지었다.
‘효빈가效嚬歌’라 했다.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말 뿐이오 간사람 없어
전원이 황폐해지니 아니 가고 어찌할꼬.
초당에 청풍명월이 나며 들며 기다리나니
고향으로 돌아온 선생은 바위 ‘농암聾巖’에 올라 다시 노래 한수를 읊었다.
그 노래가 ‘농암가’다.
농암에 올라보니 노안이 더욱 밝아지는구나
인간사 변한들 산천이야 변할까
바위 앞 저 산 저 언덕 어제 본 듯하여라
은퇴 후 선생은 농부로 자임自任하고
일게 서생書生과 다름없는 담백하고 물욕없는 생활을 하여 ‘유선儒仙’으로 추앙받았다.
그리고 천성적인 시인으로,
분강의 강가를 두건을 비스듬히 쓰고 거닐면서
‘강과 달과 배와 술과 시가 있는 낭만적 풍경’을 연출했다.
이 감흥과 미의식이 그대로 문학과 예술이 되었다.
이런 강호생활은
분강, 애일당을 예방한 동료, 후배들에 의해
‘영남가단嶺南歌壇’이 형성되는 모태가 되었다.
특히 퇴계는 동향의 후배로써
인간적, 문학적으로 남다른 교류를 했으며,
‘어부가’의 발문에서,
“바라보면 그 아름다움은 신선과 같았으니,
아! 선생은 이미 강호의 그 진락眞樂을 얻었다”라고 찬양했다.
관료적 문학이 성행할 때,
‘강호지락(江湖之樂)’과 ‘강호지미(江湖之美)’라는 새로운 문학세계의 지평을 열며,
‘어부장가’, ‘어부단가’를 비롯하여
이미 소개한 ‘효빈가’, ‘농암가’와 ‘생일가’ 등의 시가작품을 남겨,
한국문학사에 큰 영향을 미쳐 ‘강호문학의 창도자’로 평가받았다.
‘어부단가’ 5장 가운데 그 2장’은 이러하다.
굽어보면 천 길 강물 돌아보니 만 겹 청산,
열 길 티끌 세상에 얼마나 가렸는가.
강호에 달 밝아 오니 더욱 무심하여라.
‘어부가’는 이후
퇴계의 ‘도산12곡’에 영향을 주었고,
이한진李漢鎭의 ‘속어부사’, 이형상 李衡祥의 ‘창보사’ 등에 이어지고,
드디어 윤선도(尹善道)의 ‘어부사시사’로 이어졌다.
윤선도는 ‘어부사시사’의 서문에서
“어부사를 읊으면
갑자기 강에 바람이 일고 바다에는 비가 와서
사람으로 하여금 표표하여 유세독립의 정서가 일어나게 했다.
이런 까닭으로 농암 선생께서 좋아하셨으며
퇴계 선생께서도 탄상해 마지 않으셨다”고 했다.
안동지역에서는
17세기 김응조(金應祖),
18세기 권두경(權斗經),
19세기 이휘영(李彙寧) 등의 문집 기록에
“분강에서 농암의 ‘어부가’를 다 함께 불렀다”고 하여,
학술적 계승이 아닌 현장 연출로서 수백 년의 집단적 전승이 있었음을 밝혀놓았다.
그래서 국문학사에
송순宋純-정철鄭澈로 이어지는
‘호남가단湖南歌壇’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었다고 했다.
만년에 기로소(耆老所)에 입소되는 영예를 얻었으며,
(* 기로소 : 정식 명칭은 치사기로소(致仕耆老所)이며 왕과 조정 원로의 친목, 연회 등을 주관.
기로소의 유래는 1394년 태조가 60세를 넘자
기사(耆社)라는 명예관청을 설치하여
문신(文臣)과 무신(武臣)을 가리지 않고 70세 내외의 2품관 이상의 관료를 선발하여
기사(耆社)의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임금 스스로도 이름을 올려 전토(田土)와 염전(鹽田), 어전(漁箭), 노비를 하사하고
군신(君臣)이 함께 어울려 연회를 베풀며 즐기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태종 즉위 초에 이것을 본격적으로 제도화하여 전함재추소(前銜宰樞所)라 하다가
세종 10년인 1428년에 명칭을 치사기로소(致仕耆老所)로 개칭하였다.- 지식검색)
명종으로부터
“경은 진실로 천하대로天下大老요 당세원구當世元龜라.
염퇴이양恬退□養이 이미 명철보신明哲保身을 넘었으며 정관선기靜觀先幾했다”라는 최고의 찬사를 받았다.
은퇴 후 거듭되는 상경上京 명령에도 불구하고 올라가지 않으니,
나라에서 1품인 숭정대부崇政大夫의 품계品階를 내려 예우禮遇했다.
그래서 조선전기에 보기 드문 ‘재야정승在野政丞’이 되었고,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이 직책을 띠고 있었다.
89세에 몰沒하니
나라에서는 ‘孝’와 ‘절개’의 정신을 기려 ‘효절孝節’이란 시호를 내렸다.
조선 500년, ‘대로大老’라 고 불려진 인물은 흔하지 않으며,
‘효절’이란 시호 역시 선생이 유일하다.
선생은 전 생애에 걸쳐 명예를 포기하여 더 큰 명예 를 얻은 삶을 몸소 보여주어
우리에게 행복한 삶이 어떤 것인지 말해주고 있다.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고,
‘분강서원’에 재향되었다.
문화관광부의 ‘2001년도 문화인물’로 선정되어 국가적 차원의 추모행사 가 있었으며,
2007년 11월부터 2008년 1월 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때때옷의 선비 농암 이현보'라는 주제로 '농암선생특별 전'이 개최된 바 있다.
농암영정은
1537년 경상감사 집무모습을
대구 동화사 승려 옥준玉峻이 그렸다.
특징으로는 손을 표현한 점이다.
조선시대 사대부의 어느 영정에도 없는 독특한 표현양식이다.
아마 스님이 그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농암종택에는
이 영정 외에 1872년 추사 김정희가 추천한
소당小塘 이재관李在寬(경상북도 유형문화재 63호)이 그린 별본 영정이 있고,
그 제작 과정이 적힌 『영정개모일 기影幀改摹日記』(보물 1202호)가 있다.
선생의 모습에 대해 연산군은
“검열檢閱은 얼굴이 검붉고 볼에 털이 난 자였다”고 했고,
사관은 “강직하고 공명정대한 공무수행 에 모두들 ‘소주도병燒酒陶甁’이라 했으니,
이는 외모는 검으나 심성心性이 냉엄冷嚴하다는 뜻”이라 했다.
1997년, 삼성갤러리 의 ‘몽유도원도와 조선전기국보전’에 전시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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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보는 평생 동안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소신대로 행하는 관직 생활을 하였다.
특히 처음으로 관직을 맡았던 사관 시절에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정확히 기록하여 사관으로서의 임무를 다하고자
대간(臺諫)들보다 더 가까이에서 임금의 말을 직접 듣고 기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인사 담당 관리들이 궁중에서 직무를 보던 곳에 사관도 참석하게 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새내기 사관인 이현보가 직언을 했던 임금은
불과 4년 전에 사초(史草)를 빌미로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킨 폭군 연산군이었다.
당돌한 이현보의 요청에
연산군은 내심 그를 괘씸히 여기고 있다가
2년이나 지나서 새삼 이현보의 검은 얼굴을 기억하여 그를 불러 장형(杖刑)에 처하기도 하였다.
임금이 경연에 납시었다. 기사관(記事官) 이현보가 아뢰기를,
“신이 사관이 되어서
모든 일을 자세히 듣고 갖추어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고자 하지마는,
다만 전하께서 경연에 납실 적에
신 등의 자리가 가장 멀기 때문에
대간(臺諫)이 아뢴 말을 혹시 미처 자세히 다 들을 수 없다면
밖으로 나가 대간에게 물어서 쓰게 되니
사체(事體)가 온당하지 못합니다.
하물며 전하께서 전교하실 때 미처 듣지 못하는 일이 있으니,
신의 생각으로는 사관이 대간 앞으로 나가서 들으면
비록 미처 다 쓰지 못하는 일이 있더라고
밖으로 나가서도 잊어버리는 일이 없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또 전일에 사관이 정청(政廳)에 참여할 것을 계청(啓請)했으나,
하교하기를.
‘승지가 춘추관(春秋館)을 겸해 있고
전조(銓曹 ; 관리의 인사를 담당하는 이조. 병조)의 낭관이 또한 이를 겸하고 있으므로 좇을 수 없다.’ 하셨지마는.
그러나 겸춘추(兼春秋)는 한 달에 한 가지 일만 기록하니 어찌 모두 쓸 수 있겠습니까?
그런 까닭으로 비록 긴요한 일이라도
신 등은 혹 전해 듣고 그것을 기록하게 되니,
만세(萬世)에 남겨 전할 역사를
어찌 전해 듣는 것을 가지고 믿음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정청에)참여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나의 말소리가 분명하지 못하니 비록 자세히 말하더라도 다 듣지 못할 것이다.
정청에 사관들을 참여시키는 일은 조종(祖宗)의 고사(古事)가 아니니 좇을 수 없다.” 하였다.
-[연산군일기] 권46, 8년(1502) 10월 28일(정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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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관직을 두루 거치면서 출세가도를 달리던 이현보는
시골에 계신 양친을 더 잘 모시기 위해 스스로 지방근무를 자청하였다.
당대의 관료로는 생각하기도 어려운
8개 고을 수령의 직분과 경상도 관찰사로 일하는 동안
이현보는 유능한 청백리로서 명성을 얻었고
여러 차례의 표창과 더불어 청백리에 추천 되었다.
유교의 나라 조선에서
백성을 근본으로 여기는 이른바 민본주의(民本主義)는
사대부들의 상식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현실 속에서 이현보처럼 오랜 세월 지방관으로 근무했음에도
한결같이 공정하고 청렴하게 백성들이 원하는 정치를 펼치기는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한 이현보였기에
고을의 백성들은 그가 다른 고을로 임지를 옮기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다.
어떤 고을에서는 그가 다른 고을로 임지를 옮길 때
이현보를 붙잡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고,
좀 더 오래 있게 해달라고
관찰사나 임금에게 직접 탄원하기도 하였다.

<술을 나누며 이별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 / 한강음전도(漢江飮錢圖)>
제천정(濟川亭) : 현 서울 한남대교 북단 한남동과 보광동 사이 언덕에 위치.
애일당구경첩(愛日堂具慶帖 : 보물 제 1202호) 수록, 작자 미상, 조선전기(朝鮮前期), 27.5 × 43cm>
이현보가 1508년(중종 3)에 외직을 자청하여
영천 군수로 내려갈 때,
한강 기슭 제천정(濟川亭)에서
배웅 나온 지인(知人)들과 술을 나누며 이별하는 광경이다.
이 자리에는
김안국(金安國), 소세량(蘇世良), 최숙생(崔淑生), 유운(柳雲),
유인귀(柳仁貴), 서후(徐厚), 황효헌(黃孝獻), 심의(沈義), 이희보(李希輔)를 비롯한
당대의 쟁쟁한 인사들이 다수 참석하였다.
<애일당 구경첩(愛日堂具慶帖-보물 제 1202호)>에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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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9년 9월 9일 중구일.
농암은 이날 안동부사의 신분으로,
남녀귀천을 막론하고 안동 부내 80세 이상의 노인을 한자리에 초청하여 경로잔치를 했다.
이들 '화산양로연(花山養老燕)'이라 했다.
그런데 이 잔치에서 주목되는 것은 여자와 천민을 함께 초청했다는 점이다.
당시의 엄격한 신분사회였음을 생각할 때
실로 파격적인 일로, 경로와 박애정신에 대한 농암의 인식을 잘 보여준다.
농암은 화산양로연에 앞서
1512년, 분강의 기슭 농암바위 위에 부모를 위해 정자를 짓고 애일당(愛日堂)이라 했다.
많은 정자가 있지만 효를 실천하고자 지은 집은 드물다.
또 그 이름이 하루하루를 사랑한다는 ‘애일’ 이니 얼마나 멋진가!
애일당은 곧 '부모님이 살아 계신 나날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농암은 여기서 아버지를 포함한 아홉 노인들을 모시고 어린아이처럼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었다.
농암 자신이 이미 70세가 넘은 노인으로,
중국의 전설적인 효자 노래자의 효도를 그대로 실행했다.
이를 ‘애일당구로회(愛日堂九老會)’ 라 했다.
농암의 이러한 경로 효행은 조정으로 알려져 당대 명현 47명이 축하시를 보냈으며,
이후 선조 임금이 농암가문에 ‘적선(積善)’ 이라는 대자 글씨를 하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애일당구로회는 1902년까지 400여년 전승되었고 [애일당구경첩],
[애일당구경 별록], [애일당구로회첩]. [분양구로회첩] 등 관련 문헌들이 남아있다.
이들 책을 살펴보면,
1567년 봄, 퇴계는 나이 (70세). 회원 정족수(9명). 형(李澄)의 참여 관계로 사양했으나
회원들의 권유로 가을부터 참여했다.
그때 퇴계는 “내 나이 70 미만이고 회원도 아홉뿐이니 어찌 참석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권하시니 끝자리로 하겠습니다.
또 형님이 계시니 당연히 그리해야 합니다.” 했다.
1602년 기록에는
“이때 오천의 한 상민이 왔는데 나이가 101세” 라는 흥미로운 사실도 보이며,
1705년 이원필의 기록에는
‘속로회’, ‘백발회’ 등으로 명칭을 변경한 것이 “회원이 점점 많아진 까닭에 ‘구로’라는 명칭을 쓸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1902년의 모임에는 회원 수가 37명, 나이가 합계 2,651세라 했다.
이들 모임에서는 때마다 시문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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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가 돌아가시고 난 후,
1542년, 농암은 국왕의 만류를 뿌리치고 정계를 은퇴했다.
중종은 친히 농암을 접견하고
‘금서대(金犀帶)’ 와 ‘금포(錦袍)’를 하사했다.
이 시기는 첨예한 사화의 시대였지만
사림과 훈구의 실력자들이 일제히 은퇴식장에 참가하였다.
이 날의 전별연은
궁궐에서 한강까지 전별인사들의 행차가 이어졌고,
이를 구경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담장처럼 둘러서서
“이런 일은 고금에 없는 성사”라고 찬탄하였다.
회재는 장문의 전별시를 지었으며,
모재와 충재는 한강까지 나왔고,
신재는 죽령에서 농암을 맞이했다.
퇴계는 이날 배를 타고 따라오면서 거듭해서 시를 바쳤고,
훗날 자신도 은퇴를 감행했다.
훗날 퇴계의 은퇴에 대해
고봉 기대승은 한때 ‘선생님의 사퇴는 매우 잘못 되었습니다’라고 날카롭게 공격한 바 있는데,
퇴계는 이 공격에 대하여 최후로 농암의 은퇴를 인증 하면서,
“지금 사람들은 이러한 은퇴기 있는지 알지도 못합니다.”고 개탄했다.
또한, 김중청(苟全 金中淸) 선생은
농암의 정계은퇴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 아아! 선생의 선생다운 바는 학문과 현달이 아니오, 벼슬과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니다.
선생이 선생다운 바는 오직 정계를 자진해서 은퇴한 것이라 하겠다.
대개 유사 이래 벼슬한 사람이 용퇴한 경우로는
한나라의 소광(疏廣), 소수(疏受)와
당나라의 양거원(楊巨源) 외에는 다시 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떠나는 이현보에게 임금이 하사한 관복 띠 / 금서대(金犀帶)> 조선(朝鮮) 중종 37년(1542), 띠폭 3.5cm, 시도유형문화제 63호(안동시), 농암종택 Belt for the official uniform, bestowed from the king
낙향하는 이현보에게 중종(中宗) 임금이 하사한 것으로 전해지는 관복 띠이다.
띳돈(띠의 납작한 장식)을 물소 뿔로 만든 이 띠는
당시 금포(錦袍 : 비단 도포)와 함께 하사되었으나 금포는 남아 있지 않다.
본래 서대(犀帶), 즉 물소 뿔 장식을 쓴 띠는 1품관이 사용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낙향 당시 2품이었던 이현보에게는 임금이 특별한 은사(恩賜)를 내려준 것 같다.
다만 복식 규정이 엄격히 지켜진 것이라면
명종 4년(1549)에 명종 임금이 이현보의 품계를 숭정대부(崇政大夫, 종 1품)로 올려줄 때 하사 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우리나라는 신라,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아무도 그런 사람이 없이 수 천년을 내려왔는데,
육독 우리 농암 선생께서
쇠퇴한 세시풍속 가운데서 분연히 일어나
소과, 소수, 양거원의 자취를 이어 용퇴한 것이다.
회재(晦齎), 충재(沖齎)께서 전송대열에 서고,
모재(慕齎), 퇴계(退溪)께서 시를 지어 작별했으니,
소광, 소수가 떠날 때의 1백량의 수레가 줄을 이은 영광에 비유하겠는가…
우리 농암 선생이야 말로 천백만 명 가운데 한 분 뿐임을 진정 흠모하게 되었다.
- 『구전집』 ‘농암선생퇴휴병발문(聾巖先生退休屛跋文)’ 김중청(金中淸1587-1629)
귀거래의 꿈을 이루고 낙향한 이현보에게
이후의 임금들은 여러번 벼슬과 선물을 내리며 다시 올라올 것을 종용하였다.
이때마다 이현보는 벼슬을 사양하고 선물은 되돌려 보내거나 친지에게 나누어 주었고,
임금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다시 중용함에도 꾸준히 벼슬과 품계를 거둬 줄 것을 간곡히 요청하였다.
만년의 그에게는 한양의 벼슬생활이 주는 명예나 권력보다
고향 분강촌(汾江村)에서
이황(李滉), 이언적(李彦迪) 등의 훌륭한 선비들과 함께 하는 모임이 훨씬 행복 하였던 것이다.
이현보는 이러한 강호지락(江湖之樂)을 고향 후배 이황에게 정식으로 물려준다고 하였고,
이황 역시 존경하던 선배 이현보를 계승하여 강호 생활을 즐기는 것을 매우 당연하고도 자랑스러운 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자유로움 속에서 고향 산천을 즐기던 이현보도
나라의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 사대부임을 분명하였다.
인종 임금에게 올린 그의 상소에는
새로 즉위한 인종에게 정치의 올바른 길을 알려주려는 간곡한 마음이 잘 녹아있었다.

<낙향한 이현보에게 벼슬을 내리는 문서 / 교지(敎旨)> 조선(朝鮮) 중종 38년(1543), 48.0 × 84.5cm, 보물 제 1202호, 농암종택.
Document of bestowing a government post to retired Lee Treasure NO. 1202.
이현보가 낙향한 이듬해(중종 38년, 1543)에
그를 가선대부(嘉善大夫 : 종 2품 하) 지중추 부사(知中樞府使)에 임명한다는 내용의 교지이다.
이에 대해 이현보는 노환을 이유로 극구 사양하였지만 중종 임금도 끝내 양보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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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보와 이황의 강호지락(江湖之樂)
천혜의 절경과 기암괴석이 아름다운 분강촌 앞을 지나는 분강(汾江),
일명 汾川[부내])에는 귀먹바위[농암聾巖]를 비롯하여,
사자바위[사자석(獅子石], 코끼리바위[상암巖], 자리바위[?石]등이 유명하다.
이들 바위와 강각(江閣) 및 주변의 산사(山寺) 등지에서 이현보는
김안국(金安國), 이언적(李彦迪), 주세붕(周世鵬), 이황(李滉), 조사수(趙士秀), 임내신(任?臣), 황준량(黃俊良) 등
당대의 인물들과 함께 시와 술과 달과 강물이 어우러진 모임을 즐기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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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가(漁父歌) 목판(木板) 조선(朝鮮), 32 × 58cm, 31 × 59cm, 29.6 × 58cm,
농암종택. Wood blocks of the [Song of the Fisherman].
이현보의 어부가(漁父歌)와 그 서문,
그리고 퇴계 이황의 발문이 서어부가후(敍漁父歌後)를 새긴 목판들이다.
이현보는 고향의 자연을 즐기던 중 자손들이 구해 온 전래의 어부가에 심취하였다.
기존의 한문 시가들보다 우리의 정서를 훨씬 더 잘 표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이현보는 그 노랫말의 순서가 뒤섞이고 내용이 중복된 부분이 있음을 알고,
고향 후배 이황과 의견을 나누면서 이를 고치고 다듬어 새 어부가를 완성하였다.
그의 나이 83세 되던 명종 4년(1549)의 일이었다.
이 목판은 현재 전하는 몇 안 되는 이황의 한글 글씨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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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각자(聾巖刻字)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43호)
위 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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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 분천동 |
각자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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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말(韓末) |
글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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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강호(李康鎬) |

분강의 기슭에는
예로부터 ‘귀먹바위(耳塞巖)’라고 불리는 무명의 바위가 있었다.
농암은 이를 인취(引取)하여 자호로 삼고,
이 바위 옆 자연암석 위에 ‘날 사랑의 집’이란 뜻의
‘애일당(愛日堂)’을 지었다.
이 각자는 자연암석에 두 자씩
‘농암 선생 정대 구장(聾巖 先生 亭臺 舊庄)’이라고
따로따로 조화롭게 음각되어 있었다.
글씨는 해서체로
한 글자의 크기가 무려 75㎠나 되는데
이와 같은 큰 글씨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가 어렵다.
옛 애일당 사진 하단에 당시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인다.
안동댐으로 수몰 위기에 처하자
글자 부분만을 절단하여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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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훌륭한 선생의 업적이 만고에 길이 빛날 것으로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