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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 16일 연중 제19주간 금요일
제1독서 : 여호 24,1-13
복 음 : 마태 19,3-12
그때에
3 바리사이들이 다가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4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읽어 보지 않았느냐? 창조주께서 처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나서,
5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고 이르셨다.
6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7 그들이 다시 예수님께,
“그렇다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려라.’ 하고 명령하였습니까?” 하자,
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는 자는 간음하는 것이다.”
10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아내에 대한 남편의 처지가 그러하다면 혼인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모든 사람이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허락된 이들만 받아들일 수 있다.
12 사실 모태에서부터 고자로 태어난 이들도 있고,
사람들 손에 고자가 된 이들도 있으며,
하늘 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도 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
함께 잘 살기
-삶의 렉시오 디비나, 혼인, 이혼, 독신-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어제는 뜻 깊은 광복절이었습니다.
광복절에 성모 승천 대축일까지 겹치니 참 행복한 느낌까지 들었습니다.
어제는 꽃 인사 대신 축일을 맞이하는 분과 여러 지인들에게
“겸손하신 성모님의 아침 축하인사 받으세요.” 인사 말마디와 더불어
수도원 성당의 성모상 사진을 전송하니 참 기분도 좋았습니다.
한 형제의 진솔한 답신도 즐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성모님의 인사를 받다니 저 같은 죄인도 축복을 받는 군요. 감사합니다.”
우리 성모님은 이렇게 겸손하신 분입니다.
수도원 성모상은 무명의 조각가가 수도원 창고 개축 시 베어낸
수십 년 된 오동나무를 깎아 만든 것이기에 참 각별 한 느낌입니다.
또 어제는 서울 분도 수녀원의 호세아 수녀의 종신서원식도 있어
저를 포함해 다섯 수도형제가 종신서원 축제에 참석했습니다.
어제는 74주년 광복절이었습니다.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도 참 풍부했습니다.
포인트 9로 무려 A4용지 9쪽에 이르는 장문의 연설문이었습니다.
대안 없는 비판보다는 다양한 비전 제시가 참신했습니다.
강조점은 국내외적으로 ‘함께 평화롭게 번영을 누리며 잘 살자는 것’이었습니다.
참 힘든 것이 함께 잘 사는 것입니다.
피정자들에게 함께 사는 것이 쉬운가 힘든가 물으면 이구동성, 한 결 같이 힘들다 합니다.
저 역시 답이 없다고, 늘 새로이 시작하는 노력뿐이 없다고 대답합니다.
정말 지옥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고립단절 되어 완전히 혼자 사는 것이 지옥이라 말하곤 합니다.
얼마 전 ‘은둔형 외톨이’라는 주제로 다뤄진 기사도 이색적이었습니다.
함께 살지 못해 홀로 은둔적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함께의 삶으로 끌어내기 위한 내용들을 다루고 있었습니다.
역시 함께 사는 것이 쉽지 않음을 밝혀 줍니다. 수도원을 방문하는 분들과 가끔 나누는 대화입니다.
-“여기가 천국입니다.”-
-“환경이 좋아서 천국인가요? 관계가 좋아야 천국입니다.
주님과의 관계, 너와 나의 관계가 좋으면 천국이고 나쁘면 지옥입니다.
함께 살아도 고립단절 되어 서로 무관한 삶을 자초하면 바로 거기가 지옥입니다.
우리 수도자들은 서로 좋아서, 마음이 맞아서 함께 사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하느님 중심의 방향이 같아서 함께 삽니다.
수도공동체의 중심은 주님이시고 모두 한 결 같이 주님을 바라보기에 함께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산티아고 순례시도 함께 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이지 깨달았습니다.
사실 함께 장시간 기차여행을 한다거나 함께 식사할 때 불편한 관계라면 참 힘들 것입니다.
일정기간의 순례여정이 이처럼 힘들다면 평생 함께 사는 부부관계는 얼마나 힘들겠나,
하여 이혼도 많을 수 있을 뿐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졸혼(卒婚;결혼을 졸업함)이란 현상까지 도래한 세상입니다.
오늘 복음도 혼인, 이혼, 독신에 대한 내용입니다.
함께 사는 일이 쉽지 않음을 말해 줍니다. 혼인에 대한 주님의 원칙적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창조주께서 처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나서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한 몸이 될 것이다.’하고 이르셨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된다.”
그러니 혼인하면 함께 살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혼인이 이상이라면 이혼은 현실입니다.
혼인 이상으로 이혼에 고뇌했을 것을 생각하면 이혼자라 하여 무조건 비판은 금물입니다.
주님의 위 말씀은 율법조항이 아니라 함께 살기를 바라는 주님의 간절한 원의가 담겨 있을 뿐,
참으로 불행하고 힘든 혼인관계라면 주님은 이혼도 묵인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함은 다음 재미있으며 의미심장한 예화가 말해 줍니다.
“십대 부부는 신나게 살고, 이십대 부부는 꿈속에 살고, 삼십대 부부는 사랑하며 살고,
사십대 부부는 싸우면서 살고, 오십대 부부는 미워하면서 살고, 육십대 부부는 불쌍해서 살고,
칠십대 부부는 고마워서 산다.”
참 많이 인용했던 예화입니다.
연정戀情으로 시작하여 우정友情의 사랑으로 성숙成熟되기까지 과정을 재미있게 요약한 것입니다.
비단 부부공동체에만 해당된 것이 아니라 모든 공동체내의 관계의 성장과 성숙을 암시하는 예화입니다.
끝까지 인내하고 견뎌, 성장 성숙되어가야 하는 삶의 과정이요,
끝까지 인내하며 견디는 자가 궁극의 인생 승리자임을 깨닫습니다.
사람마다 살아가는 형태는 참 다양합니다.
혼인하여 잘 살아가는 이들도 있고, 함께 살아도 남남으로 살아가는 이들도 있고,
이혼하여 혼자 살아가는 이들도 많고, 아예 혼인도 이혼도 아닌 독신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도 많습니다.
독신 중에는 오늘 복음에서처럼 자발적으로 하늘 나라를 위해 봉헌된 수도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피해야 할 것은 완전고립의 혼자의 자폐적 삶입니다.
어떤 형태든 함께의 삶 안에 주님을 중심에 두고 서로 사랑하고 섬기고 존중하며
개방적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이는 도반과 더불어 보이지 않는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을 삶의 중심에 두고
부단히 회개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삶의 중심인 주님과의 우정과 더불어 보이는 형제들과의 우정입니다.
상식에 기초한 인간으로서의 형제들에 대한 존중과 배려는 필수입니다.
깊고 넓게 보면 모든 형태의 삶이 교회가정공동체에 속해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이젠 나라가 큰 가정 역할을 하는 복지국가가 되고 있는 추세지만,
애초부터 교회는 인류가정공동체를 지향했습니다.
여기서 제가 제안하는 바는 성서 렉시오 디비나를 생활화 하자는 것입니다.
특히 믿는 이들은 혼인자든, 이혼자든, 독신자등 생각 없이, 영혼 없이 살 것이 아니라,
성서 렉시오 디비나와 더불어 하느님 중심의 공동체와 개인 삶의 역사에 대한
렉시오 디비나를 생활화하여 살자는 것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깊이하면서 자기를 비워가는 것입니다.
신구약성서와 더불어 내 삶의 역사를 렉시오 디비나 묵상을 깊이하면
삶의 문장의 주어는 하느님이심을 깨달을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스켐집회에서 여호수아의 연설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 앞에서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한 렉시오 디비나입니다.
보십시오. 온통 문장의 주어는 하느님입니다. 모두 하느님께서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똑같습니다. 바로 우리 믿는 이들 삶의 문장의 주어는 하느님이십니다.
이런 렉시오 디비나의 생활화를 통해 하느님 중심의 삶이 깊어지면서
그분을 닮게 되고 비로소 무지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참으로 힘들고 어려울 때 내 공동체 삶의 역사를, 내 개인적 삶의 역사를
주님을 중심에 두고 부단히 묵상하는 렉시오 디비나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렉시오 디비나의 생활화로 주님을 중심으로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과의 관계를,
그리고 함께 하는 형제들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며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를 날로 새롭게 하시고
우리 모두 날마다 각자 삶의 성경책 한쪽을 잘 써나가게 하십니다.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질문을 합니다.
저도 질문을 받곤 합니다. 오늘은 질문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 싶습니다.
질문에는 3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첫째, 질문은 몰라서 묻는 것이 있습니다. 길을 묻기도 하고 문제의 해결 방법을 묻기도 합니다.
둘째, 질문은 상대방의 실력을 묻는 것이 있습니다.
영어는 어디까지 했는지, 철학은 어디까지 배웠는지, 수학의 방정식을 묻는 것이 있습니다.
면접이나 시험이 여기에 속합니다.
셋째, 질문은 깨우침을 주는 물음이 있습니다. 선불교에서 고승이 묻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냐?”
산행에서 계속 질문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저의 대답을 듣고 종교를 갖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분이 시험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질문을 제게 하였습니다.
“볼트만은 구약은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였다고 하는데 신부님의 의견은 무엇입니까?”
저는 구약은 보물이 묻혀있는 밭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구약이라는 밭에서 많은 보물을 이야기하셨습니다.
모세오경, 예언서, 시편, 잠언, 지혜서에는 인류의 지혜가 가득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좋은 밭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목욕물을 버리면서 아이까지 버리는 어리석음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번 산행에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유물론자라고 하였던 형제님이 저와의 대화를 좋아하였던 것입니다.
산행을 마치면서 종교를 가지면 가톨릭을 갖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게 질문하시는 것 같습니다.
“가브리엘 이번 산행에서 무엇을 보았느냐?”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아름다운 산을 보았습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헌신하고, 희생하는 따뜻한 마음을 보았습니다.
안식년을 지내면서 아름다운 산을 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을 이야기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과 자비를 베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잘 돌보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과 맺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다른 신들을 섬기곤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오도록
기다려 주시고 용서를 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혼인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혼인은 하느님 앞에서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하겠다고 약속을 하는 것입니다.
서로에게 책임을 다하겠다고 약속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혼인의 약속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그 근거를 두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입니까!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면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첫째, 혈연관계보다 예수님을 더 따라야 한다고 합니다.
가정을 이루는 것도, 사제나 수도자의 삶은 사는 것도
주님의 뜻과 가르침을 먼저 생각하고 따라야 한다고 이야기하십니다.
둘째,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마음의 준비가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지배하고 소유하려고 한다면 가정을 이루는 것도, 독신으로 사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남을 탓하고 원망하는 삶의 자세를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셋째,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버릴 수 있는 무소유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주위를 돌아보면 버리지 못하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필요하지 않은 것들도 포기하지 못하는데 주님을 위해서 정말 필요한 것을 버릴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그리스도와 일치하고,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혼인하여 가정을 이루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느 남편이 아내에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나무로 만들면 나막신이라고 하지. 고무로 만들면 고무신, 털로 만들면 털신이라고 해.
그렇다면 사랑으로 만든 신은 무엇일까?”
아내가 답을 말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남편은 아내를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로... 당신이야.”
맞습니다. 나의 배우자인 ‘당신’은 사랑으로 만든 신입니다.
사랑을 통해서만 진정한 ‘당신’이 되는 것이지,
세상의 기준으로 내세우는 것들을 통해서는 절대로 ‘당신’이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자매님의 고백이 생각납니다.
이분께서는 자신이 하는 일을 너무나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한 남자를 만나면서 고민에 빠졌지요.
내 배우자를 사랑하느라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포기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일을 내 삶의 50%로, 나머지 50%로 사랑을 하기로 다짐했습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구분하면서 일과 남자 친구를 사랑했습니다.
얼마 뒤에 “어리석은 생각이었어요.”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더군요.
“사랑은 언제나 100%로 하는 것이었어요.
그러면 일에 대한 사랑 50%까지 합해져서 내 삶의 지평이 150%로 늘어나는 것이었어요.”
한 남자를 사랑하면서 표정이 밝아졌고 일을 더욱더 기쁘게 할 수 있었답니다.
자연스럽게 직장 안에서의 평가도 더 좋아졌습니다. 사랑을 통해 삶의 지평이 늘어난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런데 다른 것이 더 중요한 것처럼 착각하지 않나요?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라고 묻습니다.
사랑을 늘 강조하셨던 예수님이기에
“안 된다.”라고 말하면 율법을 부정하는 것이냐면서 따질 것이고,
“율법에 있으니 된다.”라고 말하면
“그러면 이제까지 당신이 말한 사랑에 어긋나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따질 생각이었던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할 수 있는 문제가 있습니다.
아내를 버리려고 하는 남편은 아내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내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남자라면 혼인을 해소하는 법 같은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으며,
그런 법은 필요하지 않다고 여길 것입니다.
즉, 바리사이의 질문 안에는 사랑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성실한 관계를 맺고 계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토록 많은 배신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기회를 주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우리 역시 간직해야 합니다.
이 사랑을 간직하고 실천하십시오. 내 삶의 지평이 훨씬 더 커집니다.
헤어진다는 것
반영억 라파엘 신부
남성은 결혼을 통해 정신적 안정을, 여성은 경제적 안정을 얻으려 한다고 합니다.
한 결혼정보업체가 미혼 남녀 56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결혼을 통해 보완하고 싶은 것으로 남성의 54.6%가‘정신적 안정 및 풍요’를 꼽았고,
12.1%는‘가사에 도움’이라고 답했습니다.
반면에 여성들은 47.2%가‘경제적 안정’을 꼽았고, 정신적 안정 및 풍요가 25%,
사회적 지위가8.3%로 나타났습니다.
남성의 지향과 여성의 지향이 다르다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점을 인정하고 살겠다며 결혼을 합니다.
그러나 초호화 결혼식을 올린 부부도, 잉꼬부부로 알려진 부부도 쉽게 헤어지는 모습을 봅니다.
많은 경우‘성격 차’'경제적 이유' 때문에 도저히 같이 살 수 없다며 각자의 길을 갑니다.
성격이야 서로 다른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닐까요?
상대의 성장 과정이나 환경이 다를진대 어찌 성격이 똑같겠습니까?
쌍둥이로 태어난 사람도 같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서로를 인정하고 부족함을 채워주는 가운데 더 깊은 사랑을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너무도 쉽게 너와 내가 다른 것을 ‘네가 틀렸어'로 몰아 부치고 맙니다.
그래서 마침내 ‘참는 것도 한계가 있다’고 등을 돌립니다.
'너 아니면 안 된다.'고 하던 마음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태19,6).
혼인을 하느님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헤어질 수 없지만
단순히 사람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혼을 쉽게 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하거나 병들거나 일생 사랑하고 존경할 것”을
하느님과 일가친척 앞에서 서약을 하였습니다.
남녀는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존재이지, 욕심을 채우는 수단이 아닙니다.
서로는 동반자이면서 서로 사랑 받고 존경 받아야 할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이러한 관계는 단순히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만 국한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과 우리 자신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영원에서부터 인간의 신랑이시고 인간은 하느님의 신부입니다(예레31,3).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하느님을 향한 믿음의 관계를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철학자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지혜롭고 의롭고 착한 사람을 소크라테스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불행하게도 결혼만은 잘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의 아내 크산디페는 세기의 악처로 이름이 나 있습니다.
물론 집안 살림에는 관심도 없는 남편을 좋아할 아내가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남편에게 바가지는 예사이고 심지어는 때리기까지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태산 같은 인내심으로 이겨 나갔습니다.
하루는 아내가 마구 욕을 해 대다가 아무 대꾸를 하지 않는 소크라테스로 인해
화가 풀리지 아니하자 걸레를 빤 물을 남편의 머리에 끼얹었습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태연하게 “뇌성벽력이 대단하더니 종래는 비가 오고야 마는군”하였답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문제가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부부간에 크고 작은 고민거리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러나 참고 견디면 성공하는 것이요, 인내하지 못하면 좋은 결과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남편 된 사람은 자기 아내를 자기 몸 같이 사랑하고, 아내 된 사람은 자기 남편을 존경해야 합니다”(에페5,33).
“결혼한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이것은 내 말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인데 아내는 남편과 헤어져서는 안됩니다.
만일 헤어졌거든 결혼하지 말고 혼자 지내든지 그렇지 않으면 자기 남편과 다시 화해해야 합니다.
또 남편은 자기 아내를 버리면 안됩니다”(1고린7,10-11).
서로간의 관계 안에서도 신의를 지키고 부족함을 가슴에 담을 수 있는 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무던히 참아주고 변화를 기다려주는 넉넉함이 우리를 풍요케 할 것입니다.
헤어지자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전쟁터에 나갈 때는 한 번 기도하고, 바다로 항해를 나갈 때는 두 번 기도하며,
결혼할 때에는 세 번 기도한다”(러시아 속담).고 했습니다.
결혼해서 일생을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나 풍랑이 몰아치는 험한 바다보다도 더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매 순간 기도하며 애쓰지 않으면 서로의 다른 점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내 인생을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인생을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삶으로 엮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시다.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태 19, 6)
한상우 바오로 신부
세상의 모든 관계는
약속으로
더욱 영글어갑니다.
약속과 약속 사이에
우리가 있습니다.
지켜야 할
소중한 약속입니다.
우리 마음대로
잘라낼 수 없는
혼인의 관계입니다.
약속을
저버릴 수 없는 것은
약속이 하느님을
향하기 때문입니다.
약속은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약속이
사람을 만들어갑니다.
서로를 받아들이는
자기희생이 필요합니다.
서로를 살리는
혼인서약이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혼인은
하느님께서 맺어주시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혼인은
하느님을 향해야 합니다.
겸손과 교만이 주는 시각 차이
전삼용 요셉 신부
한 본당의 청년회장이 본당의 청소년 분과장님과 술자리에서 결혼에 대해 대화하고 있었습니다.
분과장이 말했습니다.
“청년회장아, 이제 장가갈 나이가 됐는데, 내가 소개시켜 줄 테니까 이상형인 어떤지 말해봐.”
“예, 뭐 얼굴은 귀여우면 좋고요, 몸매도 괜찮았으면 좋겠어요.
요리도 좀 잘 했으면 좋겠고요, 착하지만 애교도 있었으면 좋겠어요.”
분과장이 잠시 침묵하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럼 넌 평생 결혼 못 하겠다. 그런 여자가 딱 한 명 있었는데 이미 결혼해버렸거든.”
“그게 누군데요?”
“내 아내지!”
“근데 분과장님 사모님은 뭐 그렇게 ... 아!!!”
그 청년은 그 순간 결혼관이 바뀌었습니다.
내가 교만해지면 상대가 아무리 완벽해도 그 사람에게서
나의 배우자가 되기에 합당하지 못한 것들을 찾아냅니다.
그러나 내가 겸손하면 나와 결혼해 준 것에 감사해서 배우자의 모든 단점들도 아름다워 보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부부관계의 잘못되어가는 원인을 나 자신에게서 찾아야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내가 아니라 상대에게서 찾으려고 하다 보니 상대에게 원망하고,
결국엔 ‘안 되면 바꾸지 뭐’라는 식이 되어버립니다.
이런 시각을 지닌 바리사이들이 오늘 예수님을 찾아와 결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들은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안 된다고 선을 그으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다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려라.’ 하고 명령하였습니까?”라고 되묻습니다.
모세가 준 율법이 곧 하느님께서 정해주신 선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는 자는 간음하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모세가 이렇게 그들의 수준에 맞게 법을 맞춰서 준 이유는
더 높은 수준의 법을 줘봐야 반발심만 생기고 실천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기가 젖을 너무 먹고 싶지만 더 먹으면 안 될 때 부모는 공갈젖꼭지를 물려줍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젖도 안 나오는 그것을 빨면서 어느 정도의 만족을 얻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법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수준이었을 때 모세가 준 법이 그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불륜을 저지르는 것 외에는 절대 이혼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처음부터 남자와 여자로 만드신 이유는
둘이 결합하여 하나가 되는 사랑의 신비를 체험하게 하시려는 의도였습니다.
부부는 성부와 성자께서 성령을 통하여 한 몸이 되는 신비를 보여줍니다.
부부의 결합은 그만큼 신성합니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상대에 대한 원망이 쌓여갑니다.
아담과 하와도 그랬습니다. 서로의 탓을 했습니다. 그 이유는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상대 때문이 아니라 죄를 지었기 때문에 눈이 멀어버린 것입니다.
부부사이가 안 좋아지는 이유는 상대 때문이 아니라
죄를 지어 교만한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교만으로 잃은 눈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기 위함이셨습니다.
그래서 태생 소경에게 눈을 다시 만들어주시고 실로암에서 씻고 새롭게 보게 해 주셨습니다.
실로암으로 가는 동안 태생소경이 버린 것은 자존심입니다. 자기 자신의 교만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마음 안의 교만을 없애주시고 당시의 눈으로 보게 하시면
모든 사람이 사랑스럽게 보입니다.
사랑하는 척이 아니라 사랑스런 눈으로 보기 때문에
자신의 아내가 세상에서 정말로 제일 사랑스러워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예쁜 연예인은 여러 명의 정말 대단한 남성들과 결혼하고 헤어진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연세가 드신 이후 “나와 함께 산 사람 중에 대단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참으로 대단한 사람들과 살았는데도 그분의 눈에는 차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자신의 눈을 먼저 바꾸려해야지
‘내가 왜 저런 사람과 결혼했을까?’라고만 생각하면 바리사이일 수 있습니다.
나의 배우자가 사랑스럽게 보이지 않는다면 더 나은 사람을 찾기 보다는
자신의 마음부터 바꾸려는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갖는다면 그렇게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보면
주님께서 맺어주신 배우자만큼 완벽한 사람을 볼 수 없을 것 입니다.
내어맡김
이종훈 마카리오 신부
구약에서 하느님을 만군의 주님이라고 부르곤 한다.
하느님은 막강한 전사이시고, 싸움에 능하신 분이라는 고백이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싸우시니 우리들은 그러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이를 일깨워줬다.
“그렇게 한 것은 너희의 칼도 너희의 화살도 아니다.”(여호 24,12)
만군의 주님이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라는 권고를 늘 받는다.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면 나는 아무 것도 안 하나?
내가 아무 것도 안 하고 움직이지 않아도 모든 일이 저절로 이루어지고
모든 문제가 그냥 풀린다는 말인가? 그럴 리가 없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하느님도 아무런 도움을 주실 수 없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도와주실 수 없는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김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마음과 관련된 것일 거다.
해야 할 일을 내가 알고 배운 대로 그냥 하는 것이고 일을 다 마쳤으면 기다리는 것이다.
조바심과 걱정들이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마음을 뒤흔들어도 그것들에 전혀 관심을 주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들은 힘을 쓰지 못하고 이내 사그라진다.
세상에서 가장 의미 있고 거룩한 일은 생명을 낳고 키움이다.
이는 결혼을 해야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도(마태 19,12)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일이다.
그들은 하늘나라를 위해서 그것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혼인을 하든, 수도생활을 하든 혹은 어쩔 수 없이 독신으로 살든
모두가 세상에서 모든 이에게 좋은 부모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하느님처럼 거룩해진다.
예수님,
스스로 고자가 되면 성적욕망에서 자유로워지는 줄 알았나봅니다.
그런데 예쁜 여자를 보면 마음이 흔들리지만,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웃을 온 몸에서 지진이 일어납니다.
그 지진은 주님이 제 안에 심어 놓으신 사랑이 딱딱한 마음과 굳어진 몸을 움직이는 소리입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어머니를 닮아 언제나 이웃을 도우며 살게 이끌어 주소서. 아멘.
수도자매일복음묵상
하늘 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도 있다.
콘실리아 수녀
수도자에게 정결의 덕은
깨끗한 몸과 마음을 이루는 인격적 완성과
그리스도에 대한 온전한 헌신을 내포한다.
남녀의 관계를 거슬러 하늘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이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온전한 헌신을 바치기 위해
정결이 꼭 필요한가? 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대답은 "그렇다."이다.
깨끗한 몸과 마음은 마음이 갈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깨끗한 몸과 마음에서 나오는 힘이 있다.
갈라지지 않는 마음에서 나오는 힘!
쉬운 것을 선택하지 않는 것에서 나오는 힘!
투명하게 살아가게 될 때 나오는 힘!
그리고
그 정결이 우리를 속박하지 않고 자유롭게 한다.
‘한모금’ / (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 수녀원)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