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 하린 (시인)
13. 상상 테마12 - 스포츠 관련 용어로 상상하며 시 쓰기
@ 소재나 모티브가 갖는 특징과 상상 적용 방법
삶은 언제나 실전이다. 어쩌다 연습이 주어지긴 하지만 연습조차 실전의 한 양상이니 삶은 팽팽한 긴장과 휴식과 경쟁의 연속이다. 그런 점에서 스포츠와 삶은 많이 닮아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자신만의 경기에서 이기는 자와 지는 자, 관망하는 자, 판정하는 자를 모두 만난다. 포지션을 만드는 자, 포지션을 바꾸는 자, 포지션을 고집하는 자들도 만난다. 모두 현실 속에서 만나는 또 하나의 ‘스포츠’다. 그렇기 때문에 비유적 상상력이 동원돼서 스포츠와 관련된 시가 종종 창작된다.
나이 제한에 걸려 마지막 대기업 면접을 보는 취준생의 상황은 9회 말 2아웃에 등판한 투수나 타자의 상황과 비슷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싸워야 하는 상황에 놓인 사람은 혼자서 모든 연기를 보여줘야 하는 체조 선수의 상황과 유사하다. 주목받는 삶을 살지 못한 채 현역에서 물러나야 하는 늙은 아버지는 어떤가. 2군 코치만 오래 하다가 은퇴하게 된 사람과 비슷하지 않은가. 대리운전기사는 야구 경기에서 가끔 나오는 대타와 비슷하고, 자신 때문에 불행해진 상황에 놓인 가족을 봐야만 하는 가장은 승부차기에서 골을 먹은 골키퍼의 심리적 맥락과 비슷하다. 이렇게 스포츠는 우리네 삶의 국면을 대변한다.
스포츠 이미지로 비유적 상상력을 펼칠 때 주의할 게 있다. 스포츠 상황 전체를 한발 물러나 전지적 입장에서 바라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경기의 양상만 보게 되고 극적인 순간에 자리한 본질적인 존재성이나 심리 상태를 놓치게 된다. 예컨대 축구 경기를 관중의 입장에서만 바라보게 되면 단순히 이기는 자와 지는 자만 보이게 된다. 그런데 순간순간에 서린 심리 상태나 존재론적인 몸짓을 당사자가 되어 체험하게 되면(밀착하게 되면) 개별화된 존재성이나 개별화된 근원성을 발견할 수 있다.
필자의 시를 통해 그 소재가 어떻게 상상과 만나 펼쳐지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자.
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 / 하린
직구 ― 아버지 소속팀을 또 옮겼다 군내 버스가 하루에 두 번만 들어오는 동네에서 우루과이라운드라는 새로운 규칙이 발효되자 방어율이 형편없었던 아버지가 마지막 생산의 밭을 자르고 도시 변두리로 이적료도 없이 옮겨갔다. 주물공장으로 빨려 들어간 건조한 어깨가 은퇴를 예감하게 했다. 뜨거운 쇳물에 발등이 데인 후 공의 구질이 너무 단순한 게 문제였다고 실토했다. 직구만을 던지는 습성은 시즌 내내 흥행 없이 끝나고 말았다 아버지의 낡은 감독은 재래식 화장실에서 똥닦이로 사라져 간 윤리교과서였다.
슬라이더 ― 어머니 원래 직구를 가장 잘 구사하는 사람은 어머니다 술 취한 아버지에게 얻어맞고도 끈질기게 땅만 팠다 논과 밭에 구사하는 느리고 정직한 구질은 진딧물 탄저병 태풍에게 쉽게 홈런을 허용했다 어머니도 변두리 식당으로 소속팀을 옮겼다 뻔한 직구 대신 반찬에 미원을 쓰며 변화구를 구사했다 손님들의 혓바닥은 방망이 한번 휘둘러보지 못하고 어머니의 구질에 속아 넘어갔다 어머니는 한동안 집안에서 에이스로 인정받았다
포크볼 ― 형 왼손잡이였다 형이 마운드에 들어서면 출루하는 놈들이 많았다 1군들만 모인다는 S대학교 도서관에서 철학책이나 들추다가 약삭빠른 놈에게 안타를 맞고 도루까지 허용했다 졸업도 하지 못한 채 강판당했다 형은 소속팀을 떠나 지리산과 인도에서 전지훈련을 했다 6년 동안 형이 사라진 후 ‘제3의 물결’이 밀려와 새로운 구질을 가진 젊은이들이 주목받았다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광속의 구질을 형은 구사하지 못했고 2군으로 밀려나더니 결국 면사무소 말단 직원으로 떨어졌다
커브 ― 누나 누나는 일찌감치 포수로 들어섰다 인가기 많은 투수를 거부한 채 마을금고의 포수가 되었다 마을금고의 감독은 자꾸 변화구를 받아 내라고 주문했다 VIP 고객들은 누나의 미끈한 다리 사이에 입금하길 원했고 누나는 승률을 위해 적당한 편법을 동원했다 야간 경기도 서슴지 않았다 누나의 실적은 높아졌고 승진하여 곧 코치가 될 거라고 했다
마구 ― 나 나는 실업팀 무명 선수가 되었다 임시직을 반복하다 30대 중반을 넘겼다 아무리 기다려도 스카우트 제의는 없었다 정식 선수가 되는 걸 보지 못한 채 아버지가 죽던 날 승리의 기쁨인지 패배의 억울함인지 어머니만이 눈물을 흘렸다 형과 누나는 벌건 육개장 국물에 지루한 감정을 휘휘 저어 먹었다 박찬호가 던진 강속구에 맞은 BMW 차량의 수리비는 얼마나 나오는지 알아? …… 워낙 튼튼해서 하나도 안 나온대 …… 난 마구를 던질 거야 꼭 BMW 차를 무너뜨릴 거야 …… 형은 말이 없었다 누나는 죽음만이 은퇴를 허용한다고 주절거렸다 관중들은 건넛방 초록색 그라운드에서 야유하듯 화투장을 날렸다 ― 『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 문학세계사, 2010.
1단계 - 스스로 점검하기 – 메시지 분명히 하기+내 시만의 장점 찾기
「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은 필자의 첫 시집에 수록된 표제작이다. 보통 시인들은 첫 시집에서 자신이 가진 과거사, 가족사, 트라우마를 전부 다 토해낸다. 그것처럼 필자도 첫 시집에서 필자만의 과거사, 가족사, 트라우마를 시적 장치를 통해 다 드러냈다. 이 시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시적 메시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날 수 있는 암울한 가족사의 국면이었다. 그런데 가난한 가족들의 이야기는 그 당시에 너무나 흔했다. 그래서 필자는 가족 구성원이 가진 각각의 삶의 특성을 투수가 구사하는 구질과 빗대어서 재미있게 형상화하려고 노력했다. 시에 동원된 비유적 상상력으로 인해 내용은 익숙한데 신선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2단계 - 객관적 상관물(현상)을 찾기+관찰과 조사 정밀하게 하기
이 시에서 객관적 상관 현상은 다양한 구질이다. 그 구질들이 각각 아버지, 어머니, 형, 누나, 나를 대변하게 만들었다. 잘 던지는 투수들은 다양한 구질을 구사할 줄 안다. 그래서 각 구질에 해당하는 정보를 정밀하게 조사했다. ‘직구’ ‘커브’ ‘슬라이드’ ‘포크볼’ ‘마구’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고 가족 구성원들의 상황과 자연스럽게 맞물리게 했다.
3단계 - 확장하기 – 상상적 체험을 섬세하게 극적으로 하기
비유적 발상을 적용하면서 각 가족 구성원들의 상황을 극단적으로 몰고 가는 상상적 체험을 했다. 시 속 아버지는 눈에 다 보이는 뻔한 ‘직구’만 구사하다가 흥행 없이 물러난 퇴역 선수처럼 만들었고, 어머니는 아버지가 부여한 가난과 폭행에서 벗어나기 위해 변화구를 구사해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노련한 ‘에이스’로 만들었다. 그리고 좋은 대학을 다니고도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면사무소 말단 직원이 된 형은 타자 바로 앞에서 큰 각도로 지면을 향해 뚝 떨어지는 포크볼과 비유했고, 좋은 상황이든 안 좋은 상황이든 전부 다 수용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낸 누나는 공의 성격을 주도하는 포수의 상황에 비유했다. 마지막으로 ‘나’는 “임시직을 반복하다 30대 중반을” 넘긴 ‘루저’로서 ‘마구’만을 꿈꾸는 비현실적인 존재로 설정했다. 이러한 설정은 ‘필자의 가족 상황 20% + 상상적 체험 80%’로 이루어진 극적 정황에 해당한다.
* 또 다른 예문
최초의 충돌 / 김민식 나는 화면 너머의 테니스 경기를 본다 테니스 라켓이 공을 치는 순간 무수한 공중이 한꺼번에 태어난다
고래의 힘줄 산양의 창자 얇게 저며진 살점으로 직공은 라켓을 짠다 종선과 횡선이 지나간 사이에 태어나는 눈 공중에 이름을 붙이는 최초의 노동이었다
천사를 체로 걸러낼 수 있다고 믿은 프랑스인이 있었다 축과 축의 직교 속에서 성령은 좌표를 얻었다
의심 속에서 의심도 없이
체의 촘촘한 눈을 세는 귀신의 눈은 비어 있다
눈알만 파먹힌 생선들이 부둣가에 쌓여 있다
백경白鯨의 투명한 수정체 멸종된 거대 수각류의 담석 전체를 상상하면 그것들은 차라리 허공이었다
한국의 산에는 호랑이 모양 구멍이 반드시 하나씩 있으며
돌탑 위에 둥근 돌을 하나 올려도 산이 무거워지는 것은 아니었고
무수한 왕의 안구가 뽑혀나가도 지구가 가벼워지지는 않았다
믿음 속에서 믿음도 없이
삶의 질량을 변화시킬 혁명이 필요했다
어느 비 오는 날이었다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 이렇게 말하면 믿는 사람이 없었고 하늘에 빛나는 돌이 불과 물과 함께 떨어졌다 이렇게 말하면 믿음과 의심이 동시에 생겼다
외계에서 날아온 돌은 지구를 확실히 무겁게 만든다 그것은 종종 과학의 영역이었다
“마음 속에 천 개의 방이 있고, 그 안에서 천 개의 멜로디가 흘러나옵니다. 나는 어떤 계열의 천사인 것만 같습니다”*
처음으로 운석을 발견한 아이가 남긴 말이었다 그가 발견한 검은 돌은 검은 신전의 기둥이 되었다
운석이 떨어진 자리엔, 빛과 유리와 불과 물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하는데요
정말 그것을 보았다고 말하는 자의 이글거리는 눈빛과
다만 우주의 조각을 만져보고자 하는 순례자들의
계획 속에서 계획도 없이
푸른 언덕에 모여 유성우를 구경하는 사람들 얼굴들이 깊게 파인 구멍 같다 나뭇가지에 걸린 셔틀콕을 올려다보는 아이의 표정만 같다
너, 라고 부르면 뒤돌아보는 사람이 여럿 있었는데 그중 아무도 귀엽거나 밉지 않았고
아나운서의 어깨 너머로 카메라가 풍경을 화소로 만들기 직전
나는 주머니에서 빛나는 하얀 공을 꺼냈다 아직 세상에 없는 구기종목의 공인구였다
*“머릿속에 만 개의 방이 있어서 좋은 멜로디가 나와요.” : 4세 어린이 백강현의 말. (‘영재 발굴단’ 108회)
― 202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파울의 방식 / 하시안
당신은 오늘 내게 세 번째 파울을 선언했다 배경으로 깔리던 정오의 희망곡 안에서 나는 폭삭 주저앉고 9회 말 투아웃, 투스트라이크에 내몰린 타자처럼 당신이 만든 소문까지 받아쳐야 한다
당신이 매번 던진 돌직구에 방망이조차 들지 못한 내가 홈을 밟을 것인지, 장외까지 날아갈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볼넷까지 허용하고 싶지 않은데 타인들은 온갖 변화구로 병살로 유도한다
은퇴경기처럼 집중하다가 현관문으로 튕겨나간 자존심 심판처럼 빗줄기가 쏟아진다 젖은 눈 속으로 빨려드는 강속구들 가슴속 스트라이크 존에 정확히 꽂힌다
이별에 대한 방어율은 낮아지고 선언을 향한 타율은 높아진다 그래도 교체할 감정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기에 연장전 같은 표정으로 지루한 일인칭이 되어간다
지금까지 내게 어떤 사인도 주지 않고 배신한 이유가 뭐니? 뱉기만 하고 도무지 삼킬 줄 모르는 말이 터져나온 어둠이 내게 보낸 수많은 기척만이 정확했다 그러니 오늘의 승률을 숨겨야 한다 신파가 되기 싫은 나는 지금까지 비상구를 원했을까 패배자들이 모이는 드라마를 원했을까
내가 날 자꾸 경기장 밖으로 밀어내고 있다
그것이 완벽한 파울이 될 거라는 자명한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우리는 오늘밤 서로를 아웃시키고 있다 - 2020년 《현대시학》 신인상 당선작
네트의 뉘앙스 / 최영랑
불편해, 그래서 너와 함께 복식을 구성할 수 없어 패배와 승리의 기분 또한 내 것이 아니잖아 셔틀콕을 쫓아가는 본능 때문에 그저 우리가 되었을 뿐이야
그러니까 내 옆을 서성이는 것 말고 스텝 바이 스텝, 나에게 멀어질 방법을 궁리해봐 손의 감각으로 아슬아슬한 높이를 사랑하는 건 위험해 내가 움츠리는 건 반칙이니까 후회는 선을 넘지 못한 아주 미미한 수치로 판가름 날 거야
날렵함에 집중하며 점프를 끌어 올려봐 내 키는 늘 고만고만하니까 오래 다진 순발력은 오늘에 대한 진지한 태도겠지
바닥에 널브러진 발자국들의 환영을, 훅 치고 들어오는 스매싱 같은 타인의 시선을 열심히 연기할 필요는 없어 우리의 태도는 딱 거기까지야 관계 말고 관심 말고 관성만을 떠올려 너는 처음부터 저쪽에 더 마음을 두고 있었으니까 - 《시와 소금》 2020년 가을호
- 출처 : 『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더푸른, 2021.09)
* 저자(하린 시인) 약력 1971년 전남 영광 출생.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 박사 학위. 1998년 〈광주매일〉신춘문예 시 당선, 2008년 《시인세계》 등단. 시집 『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 『서민생존헌장』 『1초 동안의 긴 고백』. 연구서 『정진규 산문시 연구』 시 창작 안내서 『시클』 시 창작 제안서 『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이것만 알면 당신도 현대 시조를 쓸 수 있다』 청마문학상(2011), 송수권시문학상(2015), 한국해양문학상(2016),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2020) 수상. 현재 중앙대 문화예술대학원 전문가과정에서 시 창작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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