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꽃 농장을 지나다가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는 구월 하순 월요일이다. 엊그제 내린 비로 여름부터 뜨겁기만 하던 폭염 기세가 극적으로 꺾였다. 상하이로 다가간 태풍 플라산이 내륙으로 진출해 소멸할 예상 진로를 급선회해 우리나라 남녘 해안을 스쳐 일본 열도로 나아갔다. 그 덕에 예상 못한 강한 강수대가 폭우를 쏟아부어 더위를 한 방에 날려버렸다. 흡족하게 내린 비는 대지의 열기를 식혀주었다.
다섯 시 지나 자연학교 등굣길에 나서니 해가 점차 짧아져 감을 실감한다. 아침 공기가 서늘해서 긴팔 옷을 입고 나서기는 잘한 일이었다. 아파트단지를 벗어나 월영동으로 가는 102번 버스를 타서 원이대로 도계동 간선 급행버스 정류장에서 동읍과 대산 강가로 가는 31번 버스로 갈아탔다. 용강고개를 넘어간 용잠삼거리에서 동읍 행정복지센터 앞을 지나 주남저수지를 비켜 갔다.
봉강과 산남을 거친 버스는 메타스퀘이아 가로수가 줄지은 죽동에서 윗대방으로 건너가 일반산업단지를 지났다. 시내에서부터 타고 간 승객은 몇 되지 않았는데 내 말고 한 사내는 북모산에서 내렸는데 행색으로 미루어봐 둑 너머 파크골프를 치러 가는 듯했다. 나는 제1 수산교를 앞둔 요양원에서 내렸다. 강변으로 낮게 드러난 산봉우리에 비친 햇살 사이 구름이 두둥실 떠다녔다.
강변에 분재처럼 생긴 노송을 정원수로 둔 요양원이 있다. 그 요양원은 40여 년 전에는 풍광 좋은 자리 장어를 구워 파는 식당이었는데 그때도 소나무가 멋졌고 다른 조경수도 아름다웠다. 일본식 집이어서 일제 강점기 지주가 살다 떠난 적산가옥으로 여겼는데 최근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인근에 본가를 두고 어린 시절을 보낸 파출소 소장이 해방 이전 대산면 사무소였다고 했다.
요양원과 한 블록으로 거리를 둔 반듯한 농로를 따라 들판을 걸었다. 누렇게 익은 벼들은 곧 추수를 앞두어 고개를 숙여갔다. 이즈음 아침이면 벼 이삭에 이슬방울이 맺힐 법도 한데 그렇지 않았다. 기온은 이슬점까지 내렸는데 간밤 바람이 약간 불었던 날씨였다. 가을날 아침 자연이 빚어낸 풀잎에 맺는 이슬은 구름이 끼지 않고 바람이 불지 않고 잔잔해야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벼농사 단지 사이 사계절 비닐하우스에는 풋고추가 자라고 드물게 토마토나 파프리카를 키워 겨울 이후 봄까지 수확하기도 했다. 지금 벼 논도 추수를 끝내자마자 곧장 트랙터가 땅을 갈아 비닐하우스에 당근 씨앗을 파종했다. 보온재에 덮혀 싹을 틔워 파릇하게 자란 당근은 봄에 폭풍 성장해 일꾼들이 나타나 캐고 나면 무논을 다려 모를 심었다. 수박 농사는 힘이 들어 줄어졌다.
들녘 한복판 학교 운동장만큼 넓은 비닐하우스에 다다기 오이를 키웠다. 두 달 전 지난여름 한 차례 수확을 끝내고 배양토를 갈아 새로 심은 오이가 자라 열매를 맺었다. 넝쿨을 수직으로 공중 부양시킨 신농법 스마트 팜 농장에는 베트남 여성들이 밝은 모습으로 일했다. 상자에 채워 경매장으로 보낼 상품에 끼지 못한 처진 오이를 보조 가방에 챙겨 담아 가술 편의점에 맡겨 두었다.
마을 도서관 문을 열기는 아직 시간이 일렀다. 월요일 오전은 문해반 강좌에 참여하는 할머니들과 같은 열람실에서 책을 펼쳤는데 이번에는 국도 건너편 우암리 들녘을 더 걸을 참이다. 무덥던 날씨가 서늘해져 낮에도 걷기에 좋은 날씨였다. 제동리에서 덕현마을까지 갔다가 벼가 누렇게 익는 들녘을 가로질러 중포마을로 가니 비닐하우스 화훼단지가 나왔다. 어린 모종이 잘 자랐다.
농장에 중년의 한 농부가 보여 무슨 꽃인지 여쭈니 안개꽃이라고 했다. 가술로 향해 걸으면서 ‘안개꽃 농장에서’를 한 수 남겼다. “계절과 상관없이 화사한 꽃송이로 / 생화를 잘라 꾸민 꽃다발 묶음 보게 / 주연을 돋보이게 한 안개꽃을 섞었다 // 장미나 카네이션 누군들 싫다하랴 / 바탕을 깔지 않고 그렇게 돋보이랴 / 무채색 그대 돌보는 농부 손길 새롭다” 점심 밥값이 되려나. 24.09.23
첫댓글 도심 속에 살면서 재수 없는 날 넘어져 왼손 새끼손가락에 금이 가서 한 달 반을 반기브스로 은둔 시간을 보낸다.
겨우 산책 길에서 여름과 가을의 변화를 느끼며 어느새 매미들이 귀향하고 그들의 요란한 여름살이가 사라진 고요한 숲풍경을 알았다.
모처럼 주 시인의 자연학교에 들어와 신비롭고 다양한 자연 풍광과 풍요를 즐기며 농민들의 수고를 실감한다.
항상 고밉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