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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다해 삼위일체 대축일
<나와 은총과 진리>
복음: 요한 16,12-15
한 엄마가 1 살배기 아기를 폐가에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우연히 폐가에서 아기의 울음소리를 들은 주민들은 당장 경찰에 신고를 했습니다. 잠시 후, 경찰이 도착했을 때 더럽고 차가운 바닥에는 1살짜리 여자아이가 버려져 있었습니다. 경찰은 아기가 최소한 며칠 동안 이곳에 홀로 버려져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했습니다. 경찰은 추가 조사 후, 아이의 이름이 ‘리자’라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행방불명 상태였습니다. 리자는 몹시 쇠약해진 상태였기에 즉시 병원으로 이송되었습니다.
리자는 병원에서 생각지도 못한 한 여성을 만납니다. ‘이나’라는 여성은 리자의 옆 병실에서 아픈 아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이나는 무슨 일인지 확인하기 위해 밖으로 뛰쳐나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처음 리자를 만나게 됩니다. 보호자 없이 혼자 울고 있는 아이를 보자, 이나는 금세 연민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날부터 아들을 찾아갈 때마다 리자의 선물과 옷들을 함께 준비해갔습니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리자를 찾아간 이나는 빈 침대밖에 볼 수 없었습니다. 이나는 병원 직원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고 직원은 리자가 퇴원할 정도로 건강해져 고아원으로 보내졌다고 말했습니다.
이나는 리자가 건강을 찾아 기뻤지만 동시에 깊은 상실감도 느꼈습니다. 그녀는 고아원으로 찾아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리자를 자신의 딸로 입양합니다. 이나는 리자의 엄마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막 2살이 된 리자는 여전히 극도의 공포감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어릴 적 트라우마로 음식을 잘 씹지도, 야외에서 걷지도 못했습니다.
그녀는 아픈 아들을 돌보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리자 또한 지극 정성으로 돌보았습니다. 이나는 리자가 자신을 표현하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무용학원에 보내주었습니다. 엄마의 사랑과 지원 덕분에 리자는 조금씩 자신감을 찾아갔습니다. 리자는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지만 굳세게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리자는 미인 경연대회와 장기자랑에서 우승을 휩쓸면서 모델로서 첫 발걸음을 떼었습니다. 리자의 모델 커리어와 인생 이야기는 그녀를 러시아 유명 연예인으로 만들어주었습니다.
10살이 되었을 때 그녀의 친엄마가 이 소식을 듣고 딸과 연락을 하고 싶다고 전해왔습니다. 그러나 리자는 거절했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나의 진정한 어머니는 이나입니다. 그녀는 제가 힘든 순간 곁에 있어주었고 저를 절대 포기하지 않으신 분입니다.”
[출처: ‘폐가에 1살 아기 버렸다가 수십 년 뒤 믿기 힘든 사실 마주한 엄마’, 포크포크, 유튜브]
‘함께 있어줌’과 ‘절대 포기하지 않음’, 이 둘은 함께여야 합니다. 함께 있어주지만 교육을 포기한다던가, 교육은 하지만 함께 있어주지 않으려 한다면 그런 부모 밑에서 아이는 올바로 자라날 수 없습니다. 함께 있어줌을 ‘은총’이라 할 수 있고, 절대 포기하지 않는 것을 ‘진리’라 할 수 있습니다. 함께 있어줌을 사랑이라 할 수 있고, 포기하지 않는 마음을 가르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둘은 항상 부모로부터 함께 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 오실 때 이 두 가지를 충만히 지니고 오셨습니다. 은총과 진리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 1,14)
예수 그리스도는 은총과 진리와 하나이십니다. 이렇게 은총과 진리는 그것을 주는 이와 함께 삼위일체를 이룹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과 함께 삼위일체이신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성령을, 진리로 성자와 함께 하셔서 삼위일체 하느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엄마의 영광을 누리려면 은총과 진리와 항상 함께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은총은 함께 있어주는 것’이고 ‘진리는 가르침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리자가 “나의 진정한 어머니는 이나입니다. 그녀는 제가 힘든 순간 곁에 있어주었고 저를 절대 포기하지 않으신 분입니다.”라고 할 때, 리자에게 이나는 은총과 진리를 지닌 어머니의 영광을 받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은총과 진리를 갖춰 삼위일체 하느님을 닮은 인간이 될 때 그 태어나는 자녀들에 의해 영광을 받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진리’이시고 그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주시는 ‘은총’이 성령이십니다. 은총과 진리가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고 그 창조자로서의 영광을 받게 만드는 것입니다.
은총은 함께 있어주는 것에서 드러나고 진리는 가르침을 포기하지 않는 것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3년 동안 가르치셨고 승천하시면서도 세상 끝날까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은총과 진리의 충만함입니다.
그렇다면 은총과 진리를 어떻게 지니게 될까요? 받는 수밖에 없습니다. 은총과 진리를 받았다는 것은 새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은총과 진리를 가진 이는 어머니가 되기 때문에 그 은총과 진리를 받은 이는 그 어머니로부터 반드시 태어났어야 합니다. 태어난 이들이 지니는 것은 부모로부터 받은 은총과 진리입니다. 우리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한 그리스도로부터 새로 태어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은총과 진리를 내보내며 살아갑니다. 이렇게 그 사람은 창조자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창원 씨가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돈을 안 가져온 것에 대해 심하게 나무랐을 때 자신 안에 악마가 들어왔다고 말합니다. 부모와 선생님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알려주었지만 그들에겐 은총이 없었습니다. 진리는 있지만 은총이 없을 때 아이는 올바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가르침을 따르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어떤 늑대들은 인간의 아이들을 키워주었습니다. 젖도 주고 보호해 주었습니다. 그것들은 은총은 있었지만 진리는 주지 못했습니다. 은총도 늑대 수준의 사랑이고, 진리도 늑대 수준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아이들을 인간으로 성장시킬 진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 늑대들은 늑대 수준의 영광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려면 하느님이 되어야 합니다. 올바른 은총과 진리를 주기 위해서는 그 은총과 진리로 하느님처럼 완전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자녀들로부터 영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는 인간에게 받는 영광과 차원이 다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영광을 받으시는 이유는 하느님의 사랑과 가르침을 내려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으로 사랑합시다. 하느님으로 가르칩시다. 이것이 삼위일체 하느님의 완전함을 닮는 길입니다.(전삼용신부)
사물을 인식하는 2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유추하고, 생각하는 인식입니다. 문학, 철학은 이런 방법으로 인식합니다. 다른 하나는 경험하고, 체험하는 인식입니다. 예술, 과학은 이런 방법으로 인식합니다. 아이는 어떤 방법으로 인식할까요? 아이는 경험과 체험으로 세상을 인식합니다. 어머니가 누군지 모르지만, 어머니의 사랑을 체험하면서 어머니를 알게 됩니다.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지만, 아버지의 손, 아버지의 가슴을 체험하면서 아버지를 알게 됩니다. 형제, 자매가 누군지 모르지만, 함께 뒹굴면서 형과 동생을 알게 됩니다.
1991년 12월에 운전면허를 땄습니다. 28년 동안 운전을 하지만 자동차의 구조나, 자동차의 기능은 잘 모릅니다. 운전은 좀 큰 신발과 같다고 생각했고, 가능하면 안전하게 운전하려 합니다. 운전의 목적은 원하는 곳으로 안전하게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차의 구조와 기능은 몰라도 운전할 수 있습니다. 차의 기능과 구조를 알면 좋겠지만, 올바른 운전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교통신호와 교통법규를 준수해야 합니다. 운전자, 자동차, 교통법규는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야 안전 운전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교회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어떻게 인식하였을까요? 철학적인 사유와 생각으로 인식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알려주는 교회의 전승이 있습니다. 위대한 교부인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삼위일체의 신비를 신학적으로 풀어보려고 하였습니다. 생각해도, 생각해도 어려웠습니다. 그런 어느 날입니다. 성인이 바닷가를 거닐고 있는데 한 아이가 작은 웅덩이에 바닷물을 손으로 퍼 담았습니다. 성인이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지금 무슨 일을 하니? 아이가 대답하였습니다. 저 바닷물을 이 웅덩이에 모두 담으려고요. 성인은 아이에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란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아이도 성인에게 ‘지금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신비를 인간의 머리에 담아내는 것 역시 불가능한 일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뒤로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신비를 인간의 생각으로 해결하지 않았고, 신비로 남겨두었다고 합니다.
구약의 백성들은 한 분이신 '하느님'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고 믿었지만, 그 "한 분이신 하느님 안에 성부 성자 성령이 계시다."는 것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한 14, 9)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다.”(요한 14, 10)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요한 10, 30)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성령의 역할에 대해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다.”(요한 16, 13) 하셨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어라.”(마태 28, 19)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에 대해서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예수님의 공생활을 통해 계시가 된 하느님의 신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교리는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교리는“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는 질문에 대한 해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역사 안에서 드러난 삼위의 역할을 통해 본다면, 세상을 창조하신 일은 성부께서 이루셨고, 죄로 인해 하느님과 멀어진 인간을, 자신을 완전히 내놓는 십자가의 사랑으로 인간을 구원하신 일은 성자께서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하느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도록 우리에게 깨달음과 능력을 주시며 성화의 길을 가도록 해 주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이는 마치 촛불이 정전(停電)되었을 때는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역할을 하고, 어떤 것을 태우거나 녹일 때는 '열(熱)'로서 역할을 하고, 어떤 장식 할 때는 갖가지 '색(色)'으로 예쁜 모습을 드러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촛불은 항상 빛과 열과 색을 같이 지니고 있듯이 세상 창조와 구속사업과 성화에 항상 성부 성자 성령은 함께 계십니다.
초대교회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체험하였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신앙으로 고백하였습니다. 우리가 말을 배울 때 문법과 이론을 먼저 배우지 않고 체험과 반복을 통해서 배우듯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도 이론과 신학이 먼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과 초대교회 공동체는 삼위이신 하느님에 대한 체험이 먼저 있었습니다. 그 체험이 교회 역사를 통해서 신학이 되고 교리가 된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체험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친교, 나눔, 사랑’의 하느님이셨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권한을 예수님께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권한을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용하셨습니다. 성령은 이제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를 따뜻하게 감싸 주시고, 용기와 힘을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초대교회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고, 삼위이신 하느님은 교회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가정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친교, 나눔, 사랑이 드러나는 가장 이상적인 공동체입니다. 아빠의 권위는 가족들의 건강과 행복을 위하여 행사되어야 합니다. 엄마의 사랑은 가족들을 위한 배려와 희생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아빠의 보살핌과 엄마의 사랑을 받은 자녀들은 가정의 미래가 될 것입니다.
본당 공동체에도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친교, 나눔, 사랑이 드러나야 합니다. 불화와 대립을 극복하고 화해와 일치의 삶을 사는 것,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누리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 이것이 신앙생활의 이상입니다. 성호경을 할 때마다, 영광송을 바칠 때마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살도록 다짐하고 그 은총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조재형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