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국가민속문화재(현, 국가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함안 일대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공을 세운 의병장 주재성(周宰成)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것이다.
그는 초모한 의병은 물론이려니와 관군에게도 사재로 넉넉히 음식을 제공하고 공급하니 칭송이 자자하였다.
이인좌의 난이 평정되자 관군들은 원대 복귀하는 길에 주씨(周氏) 향리에 모여 마을 어귀에 창의사적비를 세우고 서당 앞 넓은 마당에 연당을 파고 당주(塘洲)를 만들었다.
이에 연당을 이름하여 국담(菊潭)이라 이르고 석가산(石假山)을 쌓은 당주를 양심대(養心臺)라 하였다.
또, 담장을 쌓고 일각문을 내니 그 문을 영귀문(詠歸門)이라 하였다.
고마움을 보답하려는 병사들의 정성이었다.
이 후로 주재성은 국담이라 자호(自號)하고 서당에서 학구에 전념하면서 유유자적하였다.
연당은 주재성의 생가 일곽에 조성되어서 고래의 정침(正寢) 한 채가 연당 서북쪽에 지금까지 남아 있다.
一자형 평면이고 칸반통(間半通)의 전퇴(前退) 있는 홑집인데, 정면이 5칸이다.
지붕은 맞배이며 기와를 얹었는데 사는 사람들이 편리하게 많은 부분을 개수하여 학술적 가치를 상실하고 말았다.
방형(方形)에 가까운 국담의 연당은 산석(山石)으로 호안(護岸)을 쌓되 이급(二級)으로 하여 석축의 높이를 완화시켰고 중앙에 당주 하나를 모았는데, 산석을 써서 봉래산(蓬萊山)을 형상하는 석가산을 쌓았다.
연당의 연못가에 하환정(何換亭)과 풍욕루(風浴摟)를 세웠고 충효사(忠孝祠)를 건립하였다.
하환정은 동쪽가에 있는데, 정면 2칸, 측면 2칸의 규모이고 연당 쪽으로 난간을 설치하였다.
마루가 고설되지 않은 것이어서 그저 사기(四起)하였을 정도이다.
홑처마의 팔작기와지붕이다.
풍욕루는 댓돌을 높이 쌓고 앞뒤퇴가 있는 3칸을 구조하였다.
역시 홑처마의 팔작지붕인데 이들은 후대에 세운 건물들이다.
이 연당은 비교적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는 조선 후기 연못의 실례로서, 정원문화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