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의 도자기 그림 |
피카소(1881-1973)가 생전에 남긴 작품 수는 5만 점 정도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유화가 1885점이고, 복제가 가능한 판화, 조각, 도자기의 작품 수가 많습니다. 그중 도자기 그림(도자 그림)은 약 2280점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한 도자기에 에디션이 50점 부터 500 점 짜리 까지 있으니 대략 400 점 정도의 원판 도자기 그림을 남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Pablo Picasso 1881-1973 높이 250 mm 에디션 85/200 1958
피카소의 도자기 그림은 우리나라에서도 전시회를 한적이 있습니다. 2003년 9월부터 10월말까지 60일간 열린 제2회 경기도 여주 세계도자비엔날레에서 '피카소 도자 특별전'을 열어 70여점의 작품이 소개됐습니다.
그때 많은 관람객들은 피카소가 도자기 위에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나타냈고, 도자기 위에 그려진 수준 높은 그림에 감탄했습니다.
30 by 22.5cm 에디션 495/500 1968
높이 21.5cm 에디션 12/300 1952 서양의 화가 중에서 도자기에 그림을 그린 화가는 피카소뿐이 아닙니다. 샤갈과 호안 미로 등 여러 화가들이 도자기 그림을 남겼습니다.
도자기라는 또 하나의 예술형태에다 그림을 그림으로써 보다 넓은 예술세계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따지고 보면 고대시대부터 동서양에서는 도자기를 만들고, 시대의 변천에 따라 그 위에 무늬나 문양을 새겼습니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그후 오랫동안 도자기에 대해 소홀했고, 동양에서는 도자기를 생활화 시키면서 그 위에 그림도 그리고 도자기 색도 변형시켰습니다.
그런데 유럽과 동양 사이에 해상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중국과 일본의 도자기가 대량으로 건너갔고, 유럽 귀족사회에서는 동양 도자기 수집 열풍이 불었습니다.
아울러 도자기 제작에 대한 관심도 늘어나 공장들이 활발하게 가동되기 시작했고, 훗날 일부 근현대화가들이 자국에서 생산되는 도자기 위에 그림을 그렸는데 피카소도 그중의 한명입니다.
지름 385 mm 에디션 127/200 1947 피카소가 도자기에 그림을 시작한 것은 1947년 여름이고, 위의 작품이 첫번째 작품입니다.
그가 도자기 그림 작업을 한곳은 프랑스의 도자기 도시인 발로리(vallauris)인데, 당시 그는 '평화 운동(peace movement)'에 참가하면서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발로리 성당에 <전쟁과 평화>라는 대형 벽화를 그렸습니다.
피카소는 자신의 조국 스페인에서 발생한 내전때문에 조국을 등질 정도로 평화에 대한 신념이 투철했기에, 한국전쟁에서 벌어지는 살상에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 "한국의 평화를 특별히 염원한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전쟁과 평화> 벽화 중 평화 부분에 한국을 상징하는 태극문양을 그렸고, 그 당시 <한국에서의 학살>을 유화로 그렸습니다.
지름 18.5cm 에디션 500 1956 피카소는 발로리로 온 이후 25년동안 도자기 그림에 열중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말년의 예술혼을 도자기 그림에 쏟아 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그래서 그의 도자기 그림에는 좋은 작품이 많습니다.
그가 이렇게 성공적으로 그리고 오랫동안 도자기 그림 작업에 열중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마지막 연인이자 '생의 마지막 동반자'인 쟈클린 로끄(위의 그림)의 헌신적인 뒷바라지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쟈클린 로끄는 피카소 보다 40년 연하인데, 발로리에 있는 도자기 공장 관리인의 조카로서 공장의 뒷일을 돌보는 젊은 이혼녀였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피카소에게는 자신과 같은 여인의 헌신적인 뒷바라지가 필요하다며 적극적으로 매달렸고, 피카소가 80살이 되던 1961년에 결혼신고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가 좋은 작품을 남길 수 있도록 내조를 했고, 피카소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위의 작품을 비롯해 여러 점을 그렸습니다.
지름 42cm 에디션 25/50 1959 피카소는 '투우의 나라'인 스페인의 말라가라는 도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미술교사였으니 그의 그림 재주는 '내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피카소가 어린 아이때 부터 소질을 보이자 그의 아버지는 그가 14살 때, 문화의 도시인 바르셀로나의 론잔 미술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듯 스페인의 거의 모든 미술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스페인은 그가 태어나고 자란 조국일 뿐 아니라, 19살 때인 1900년에 바르셀로나에서 화가로서의 첫 전시회를 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번듯한 화랑에서 전시회를 연것이 아니라 바르셀로나 뒷골목에 있는 선술집에서 150점의 스케치를 전시한 것이지만, 그는 그렇게 전시회를 하고 정식으로 데뷔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천재적 재능을 가진 그에게 바르셀로나는 너무 좁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전시회를 끝낸 후 유럽화단을 좌지우지하는 화가들이 모여있는 프랑스의 몽마르트로 가서, 그곳 빈민촌에서 폴 고갱, 고흐, 드가 등과 어울리며 그의 청년기를 시작했습니다.
지름 253 mm 에디션 455/500 1963 파리에 도착한 피카소는 프랑스어도 못해 고생을 많이 하면서 방황을 했지만, 몇년이 지나 화가로서 이름을 얻은 그는 왕성한 창작력과 함께 '화려한 여성 편력'의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는 수많은 여자들이 등장하고, '여자가 바뀔 때 마다 그림의 화풍이 달라진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여자와 그림에 열정을 쏟아부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그의 예술적 영감은 그 여인들과의 열정에서 얻어진 것인지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높이 22cm 에디션 261/300! 1959 피카소는 생전에 7명의 여인과 결혼을 하거나 동거를 했습니다. 물론 중간중간에 잠시 사귀었던 여자들의 수는 셀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의 첫번째 연인은 페르낭드 올리비에라는 여인으로 피카소와 같은 나이였습니다.
스무살 때 만나 사랑을 했는데 그녀는 '야성형 여인'으로, 피카소는 이 시기에 그 유명한 <아비뇽의 처녀들>을 그렸습니다.
< 아비뇽의 처녀들>은 현대미술에서 입체파의 출현을 알리는 작품으로, 그때까지의 그림이 평면적 관점에서 그린 작품이라면 이 작품은 기하학적인 입체감을 표현한 새로운 표현방식이라, 당시의 많은 화가들과 평론가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줬습니다.
그는 첫번째 연인인 페르낭드를 위해 1908년에 <부채를 든 여인>을 그렸습니다.
높이 31.5cm 에디션 500 1955 피카소의 두번째 연인은 에바 구엘이라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청순가련형' 여인으로 피카소가 매우 정열적으로 사랑을 했습니다.
1912년 피카소는 에바를 위하여 <옷을 벗은 에바>를 그렸는데, 그녀가 병이 나자 그는 잠시 다른 여인을 사귀어, '여자가 곁에 없으면 못 산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심하게 여자에게 집착을 했습니다.
높이 735 mm 에디션 29/75 1951피카소의 세번째 연인은 발레를 하는 올가 코홀로바라는 여인이었습니다. 러시아 출신으로 당시 25살이었던 그녀는 귀족적 풍류를 즐겼고, 피카소는 그녀를 따라 파리의 상류사회에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당시 그와 그의 친구들과 함께 추구하던 입체파 풍의 그림을 버리고 '상류사회 사실주의' 풍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친구들에게 '배반자'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피카소는 1917년 다른 연인들에게도 그랬듯이 그녀를 모델로 해서 <안락의자에 앉은 올가>를 그렸습니다. 그리고는 그녀를 떠났습니다.
SERVICE VISAGE NOIR> 지름 24.5cm 에디션 100 1948네번째 연인 마리 테레즈는 '천진난만형' 여자로, 피카소가 초현실주의에 영향을 받을 때 만났고 당시 그녀의 나이는 열입곱이었습니다.
피카소는 그의 연인들 중 그녀를 가장 많이 그렸는데, 1930년에 그린 <꿈>과 1939년의 <팔꿈치를 기댄 마리 테레즈>가 대표적 작품입니다.
피카소는 그녀와의 사이에서 딸을 한명 낳았지만, 그녀가 너무 천진난만해 품위가 없다는 이유로 훌쩍 떠났습니다.
36.5 by 18.5cm 에디션 66/100 1955다섯번째 연인 도라 마르는 '지성형' 여인으로, 피카소가 파시즘과 투쟁할 때 만난 여인입니다. 그녀는 1937년, 피카소의 대표작으로 불리는 <게르니카>를 그리는데 많은 영감을 준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 게르니카>는 히틀러가 스페인의 프랑코 총통을 돕기 위해 바스크라는 작은 마을을 융단폭격해 7천명의 주민 중 1천명을 무자비하게 죽인 사건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독재와 전쟁의 참혹함을 알리는 대표작입니다.
피카소는 이 작품을 당시 연인이던 도라의 도움을 받으며 한달만에 완성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얼마후 또 다른 여인을 만나 그녀에게서 떠났고, 그녀는 그 충격으로 정신착란에 이르렀습니다.
375 by 310 mm 에디션 400 1953위의 그림은 피카소의 여섯번째 연인 프랑스와 질로인데, 그녀는 '피카소의 연인'들 중 유일하게 피카소를 버린 여인입니다.
그녀는 스물 한살 때인 1941년 피카소를 만났는데, 법학대학을 나왔지만 당시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당했을 때라 법학을 포기하고 미술 석사 과정을 받고 있었습니다.
집안이 부유했고 그녀의 부모는 딸에 대한 기대가 컸기에 피카소와의 연애를 심하게 반대했지만, 그녀는 1944년 집을 나와 63세의 피카소와 동거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피카소가 그녀의 친구와 바람을 피자, 그녀는 피카소에게 결별을 선언했습니다.
피카소는 자신을 버리고 떠나는 여인이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당황하여 '네가 떠나면 나는 자살을 하겠다'고 '협박'을 하지만, 그녀는 '그것이 바로 당신을 행복하게 하는 방법'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그리고 피카소와의 사이에서 난 자식들을 피카소 호적에 입적시켜, 그가 사망한 후 많은 유산을 상속받게 했습니다.
그렇게 그를 떠났는데도 피카소는 그녀를 잊지 못하고 훗날까지 그녀의 모습을 그렸으니, 이것이 피카소의 인간적인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지름 35.5cm 에디션 72/100 1962위 그림의 여인은 피카소의 마지막 연인이자 부인인 쟈클린 로끄로, 그의 남은 여생을 행복하고 편하게 해준 헌신적인 여인입니다.
그리고 피카소로부터 버림도 받지 않았으니 그가 만난 여인 중 가장 행복한 여인이었습니다.
피카소가 80세 때인 1961년에 40년 년하의 젊디젊은 쟈클린과 결혼신고를 하자 세상 사람들은 다시 한번 그의 화려한 여성편력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세계 각국의 언론에서는 앞을 다퉈 보도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런 세상의 눈길을 아랑곳 하지 않고, 도자기 공장에서 일했던 경험을 잘 살려서 피카소가 도자기 그림에 심취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줬습니다.
그래서 피카소는 말년에 예술적 완성도가 높은 도자기 그림을 많이 남길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피카소의 말년을 함께한 쟈클린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자신에게 남겨져있던 상당수의 도자기 그림들을 피카소가 첫 전시회를 열었던 바르셀로나에 있는 '피카소 박물관'에 기증해서 헌신적인 남편 사랑을 다시 한번 세상에 보여줬습니다.
지름 45 cm. 에디션 16/200 1957피카소는 이렇게 자신의 예술혼을 활짝 펼치며 세상을 품었습니다.뎃 상에서 시작해서 유화, 조각, 판화, 도자기 그림 등 모든 미술의 영역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원없이 예술혼을 불태웠습니다.
그리고 1973년 4월 8일, 92세의 나이에 하늘을 향해 날았습니다.
|
피카소 미술사가들은 모든 현대예술의 시발점으로 평가한다. 이 그림에서 최초로 한 화가가 사실적인 모습과 단절하고 새로운 회화세계를 창조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나타난 여인은 두 유형으로 나뉜다. 왼쪽의 세 여인은 가장자리에 주름이 잡힌 커다란 눈을 가지고 가운데에 위치한 여인은 귀가 8자처럼 그려져 있고 얼굴은 정면인데 코는 옆으로 뉘여 있다. 피카소의 설명은 이렇다. "옆으로 그린 코요? 그건 의도적이었습니다.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반드시 코라고밖에 볼 수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지요." 오른쪽의 각진 형태를 한 두 여인은 줄무늬 섞인 색으로 표현되어 있다. 더욱이 그녀들의 얼굴은 대칭의 법칙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위쪽 여인의 커다랗고 검은 눈은 정면을 향해 있지만 다른 눈은 3/4 각도로 옆을 보고 있다. 또한 아래쪽 여인은 등을 돌리고 앉은 자세에서도 얼굴은 정면을 향하고 있다.
우선 이글을 보고 감상하는데 보탬이돼엇길 바라고 Tip으로 피카소에 대해도 알려드리겟습니다.
피카소란?
Pablo Puiz Picasso (파블로 루이스 피카소) 1881~1973
스페인 말라가의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화가로서의 경력이 확고해진 이후 어머니의 성만을 따서 서명했다. 1895년 바르셀로나로 이주한 후 활동을 시작했으며 그의 탁월한 예술적 재능은 1897년 <과학과 자비>란 작품으로 입상하게 되었다.
1906년 청색및 장미빛 시기의 기간을 그는 파리와 바르셀로나를 왕래하며 보냈으며, 이 기간의 드로잉과 회화 작품에서의 인물들은 청색 또는 장미빛 색조의 배경과 함께 드러나고 있다. 이시기의 피카소의 작품은 카탈로니아 화가 이지드로 노넬의 영향이 분명하게 나타나 인간 존재의 가장 고독하고 슬픈 국면을 즐겨 우의적으로 다루어 졌다.
그는 입체주의의 진정한 출발점인 <아비뇽의 처녀들>을 제작한다. 1908년 호르타 데에브에서 완성된 작품들에서 기하학적 면들로 나뉘어져 캔버스 표면 위에 흩어져 묘사됨으로써 새로운 움직임의 결정적인 도화선이 되어 1909년에서 1914년 사이에 발전하게 된다. 1912년경에는 꼴라주와 파피에 콜레의 창안에 기초가 되어 새로운 기법의 출현은 현대회화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회화와 지각된 리얼리티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게 된다. 피카소는 회화, 꼴라주, 조각 등의 방법으로 입체주의의 가능성을 계속 개척하였고, 스페인 민란은 피카소의 생애와 예술에 하나의 이정표가 되어 공화정을 신봉한 피카소는 프라도미술관의 관장으로 일하게 되고, 1차대전중 게르니카 마을의 폭격으로 대량학살하는 야만적인 행위는 공포와 상처를 주어 피카소는 게르니카 작품으로 번역된다. 게르니카의 영향은 1930년대 피카소의 모든 작품에 일종의 표현주의적 느낌을 감돌게 하여 입체주의 방식에 새로운영역을 추가한 결과가 된다.
1920년 프랑스 남쪽으로 거처를 옮겨 그는 자신의 예술생애 동안 지속적으로 다루어 오던 도자기와 조각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예술가의 한사람으로 간주되었다.
여기부터는 피카소의 연보입니다
1881년 10월25일 스페인의 말라가에서 출생. 1889년 첫 작품 [투우사]를 그림. 1895년 바르셀로나의 라 론하 미술학교에 입학. 1897년 마드리드의 산 페르난도 왕립 미술학교에 입학. 마드리드의 미술전에서 '과학과 은총' 수상. 1900년 친구 카를로스 카사혜마스와 함께 파리로 감. 잡지 '호벤투트'에 첫 소묘집 발표. 1901년 마드리드에서 잡지 '아르테 호벤'의 펴집과 삽화 담당. 볼라르의 화랑에서 첫 개인전. 이때부터 'Picasso'라 싸인함. 1904년 파리의 라비냥가 아뜨리에 [라보아르]에서 제작.아폴리네르를 만남. 1905년 페르낭드 올리비에를 만나서 고졸에서 생활. 1907년 브락크, 드랭을 만남. 화상 칸와일러를 만남. 세잔의 회고전에 감명. 흑인 조각의 여향.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제작. 1910년 큐비즘의 전성기. 1912년 '블라우에 라이터 전'에 참가. 1914년 조각제작 시작. 브락크, 드랭과 아비뇽에 머뭄. 1915년 파리에 머뭄. 1918년 올가와 결혼. 라 보에티가 23번지 아파트에 옮김. 1919년 러시아 발레단과 런던에 감. 미로를 만남. 1920년 파리, 로마에서 개인전. 1923년 앙드레 브르통을 만남. 1924년 발레 [멜퀴르]의 무대장치. 1925년 제1회 '슐리얼리스 전'에 출품. 1926년 파리 로장베르 화랑에서 개인전. 1927년 뉴욕, 베르린, 파리에서 개인전. 1928년 시카고, 뉴욕, 파리에서 개인전. 1929년 조각가 곤잘레즈와 추상조각 시도. 1930년 [피카소 부인]이 피츠버그의 카네기 화랑에서 1등상 수상. 1931년 발자크의 [알려지지 않은 걸작], 오비디우스의 '메타모르포즈'를 위한 삽화 제작. 6월, 런던에서 '"피카소 30년 전"을 개최. 1932년 샤토 드 보와즈르에 아뜨리에를 세움. 1933년 슐리얼리스트 잡지 '미노토르마쉬'의 표지그림. 1934년 스페인에 머뭄. 투우 시리즈 제작. 1936년 프라도 미술관장에 임명. 도라 마르를 만남. 1937년 '프랑코의 꿈과 거짓'을 출판. [게르니카] 제작. 1938년 보스턴, 런던, 뉴욕에서 작품전. 1939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피카소 예술 40년전] 개최. 1940년 독일군 침공 이후 파리로 돌아옴. 1941년 '꼬리 밟힌 욕망'을 집필. 1942년 뷔퐁의 '박물지'를 위한 엣칭 삽화31점을 제작. 1943년 뉴욕에서 개인전. 1944년 살롱 도톤에 피카소 작품(79점)을 특별 전시. 1945년 석판화 제작. 1946년 프랑소아즈 질로를 만남. 발로리스에서 도기 제작. 1947년 라미에 부처와 함께 발로리스에서 도기 제작. 1948년 '죽은 자의 노래'에 석판화 6점을 실음. 파리서 도기 개인전. 런던에서 석판화전. 1949년 메리메의 '칼멘'을 위한 엣칭 42점을 제작. 레네의 영화 [케르니카]를 완성. 1950년 베니스 비엔날레 특별출품. 바르샤바 제2회 평화옹호 국제회의를 위한 포스터 제작. 1951년 파리에서 조각전. 살롱 드 메에 [한국의 학살]을 전시. 1952년 발로리스의 교회당에 벽화 [전쟁과 평화]를 제작. 1953년 프랑소아즈 질로와 이별. 1954년 실베트의 초상화 시리즈 제작. 1956년 칸느의 라 칼리포르니 별장에 옮김. 1957년 클루소의 영화 [피카소, 천재의 비밀]이 완성. 런던에서 "피카소 판화 50년전" 개최. 1958년 쟈클린 로크와 동거. 1959년 파리의 유네스코회관에 벽화 [떨어지는 천사]를 제작. 리놀륨 판화 시작. 1960년 [라스 메니나스와 생활] 시리즈 발표. 1961년 마네의 [풀밭에서의 식사] 개작 시리즈. 1962년 쟈클린 로크와 결혼. 59년 이후의 보르나르그 시리즈를 발표. 1963년 다비드 [사비느의 약탈] 개작 시리즈. 1964년 [화가와 모델] 시리즈 제작. 바르셀로나의 건축가 회관에 벽화 제작. 1965년 캐나다, 동경에서 "파카소 전" 개최. 1966년 시카고의 시빅 센터를 위한 모뉴먼트 원형을 완성. 1967년 시카고의 시빅 센터에 모뉴먼트 건립. 1968년 [347점의 엣칭] 순회전. 1969년 칸느의 마두라 화랑에서 [도기전]개최. 1970년 바르셀로나의 미술관에 약9백점의 유화, 뎃상, 판화를 기증. 12월 18일 [피카소 미술관] 개관. 1971년 파리 국립 현대미술관에서 [파카소 90세 기념 대회고전] 개최. 1972년 동경에서 [근작전] 개최. 1973년 남부 프랑스의 무쟁에서 사망(92세)
이상 즐거운 시간돼셧기를 바랍니다 ^ㅡ^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