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은 결혼기념일이다.
몇 주년이지? 이십 얼마인데. 그것이 중요하지는 않다.
25주년이라 할지라도 25주년이기 때문에 내가 오늘은 집에 들어가지 않으려는 것은 아니다.
결혼기념일이기 때문에 들어가지 않으려는 것이다.
아내에게 너무 가혹한 것이겠지. 하지만, 내 상태를 확실하게 알게 하고 싶다.
보통의 날에 집엘 들어가지 않으면, 아내는 그저 오늘도 동료들이랑 어울리느라 그런가보다 라며 약간의 짜증은 나겠지만, 대수롭지 않은 일탈로 여기고 말 것이다.
그래서 바로 오늘 집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저녁 외식 약속을 기대하고 있었겠지만, 아무 연락이 없었으니, 나름대로 집에서 저녁 식사를 열심히 준비하겠지. 어쩌면 와인 한 병과 함께.
그렇지만 오늘은 싫다. 모든 것이 싫다.
언제부터, 무엇이 잘못 된 것일까? 내가 왜 이럴까?
아내는 좋은 여자이다. 내게 그리고 아이들에게 언제나 최선을 다하고, 친지, 가족,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아내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일까?
그것도 중요하지 않다. 누구에게 문제가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문제가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무슨 문제지?
딱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아내가 정말 싫은 것은 아니지만,
굳이 비유를 들자면, 재미있게 본 어떤 영화를 매일 밤마다 계속 보는 것 같다.
다들 그렇게 살고 있다. 결혼한 지 이십여 년이 지났고, 나이도 사십대이고, 아이들도 장성한 그런 가정의 부부인데, 십 대때의 풋사랑의 그 설렘과 자극이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군, 정말 어떤 설렘도 자극도 없다. 어제 같은 오늘이고, 오늘 같은 내일이 올 것이다.
그러다, 세월이 더 가면 어제가 오늘인지, 오늘이 어제인지, 요일의 개념이 전혀 필요 없는 나이의 때가 오겠지. 그리고 밤낮조차 구분할 수 없는 그 날도 맞이하겠지.
그것을 아니까, 내가 힘들어하는 것이다.
아내에게 변화를 바랄 수는 없지 않은가?
헤어스타일을 바꾸고, 화장을 좀 더 야하게 하고, 옷을 좀 더 멋있게 입고..
반찬 냄새 풍기며 퇴근하는 나를 반기지 말고, 부스스한 얼굴로 대면하지 말고,
속옷을 내 눈에 보이는 곳에 벗어두지 말고, 화장실 내가 알게 가지 말고..
이런 것들을 하고, 이런 것들을 하지 말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면 ‘갑자기 왜 그래?’라면서도 약간의 노력은 하겠지만, 그렇다고, 오늘 밤에는 다른 영화가 상영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딱히 아내에게 이런 저런 것들을 요구할 입장도 아니다. 그녀는 나와 일상의 삶을 살고 있고 나도 그녀와 같은 일상을 살고 있는데, 그 일상에서의 변화로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그럼, 어떻게 할 것인데? 오늘 하루 집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내가 지루해하고, 힘들어한다는 것을 알렸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는데? 그 다음에는 어쩔 건데? 부부싸움만 하고, 며칠간 지루한 냉전만 하다가 다시 그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 뻔 한 일인 줄 알면서 뭘 어쩌자는 것인데? 바람난 것도 아니고, 새 여자가 생긴 것도 아니고, 더 더욱 이혼 할 것도 아니면서, 도대체 왜 이러는데?
십대 소년의 가출처럼, 아무 대책도, 목적도, 분명한 이유도 없는 하루의 가출인가?
사람의 평생이 팔구십년이다. 그럼 이제 반을 넘어섰다.
남은 반평생을 정상에서 하산하는 그 느낌,
이제 이 산을 내려가면, 다시는 산에 올라갈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그 어떤 절망감 같은 기분으로, 생각으로 살고 싶지는 않다.
아직도 오를 산이 있고, 기대되는 것이 있고, 나를 긴장시키고, 감동시킬 일들이 있는,
지난 반 평생 같은 삶을 살고 싶다.
그래서 지금 나는 일상의 편안함과 평범함에서 벗어나는 첫발을 오늘 내 딛는다.
2. 오늘은 결혼기념일이다.
몇 주년이지? 이십 오주 년인가?.
그것이 중요하지는 않다. 25주년이기 때문에 내가 오늘은 집에 들어가지 않으려는 것은 아니다.
결혼기념일이기 때문에 들어가지 않으려는 것이다.
다행히 오늘은 저녁 외식하자는 전화도 없다.
좋은 레스토랑에서 남편을 비참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다.
장미 꽃다발과 선물을 들고 근사한 저녁을 기대하며 들어오겠지..
그리고는 내가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고, 외출한 것을 알고는, 결혼기념일을 잊어버린 줄 알고, 화를 내고, 심통을 내겠지. 그러다 전화를 하겠지. 전화기가 꺼져 있음 알고는 선물을 집어던질지도 모르지.
좀 더 기다려봐도 아무 연락이 없으면, 슬그머니 걱정을 하겠지.
그러다 혼자 술을 마시고 아무렇게나 엎드려 자겠지.
내가 왜 이러지? 언제부터, 무엇이 문제지?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은 내 스스로 잘 알고 있잖아?
남편에게도, 아이들에게도, 시집식구들에게도,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근데, 굳이 비유를 들자면, 정말 즐거운 시간을 가졌던 그 레스토랑에 매일 저녁마다 가는 느낌이다.
늘 같은 옷을 입고, 지난번의 그 웨이터에게, 똑같은 음식을 준비하고, 같은 종류의 와인을 신청하고, 늘 같은 주제의 대화를 하고, 똑같은 디저트를 먹고, 같은 표정의 행복한 미소를 나누는 그 시간과 같은 것이 우리의 부부생활이다.
행복에 겨워서 하는 말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손가락질 할 것이다.
하지만, 주위의 그들이 무엇이라 비난을 하던, 나는 싫다.
아, 내가 왜 이러지?
남편에게 솔직히 이야기를 먼저 해 볼 걸 그랬나?
내가 이야기 할 때 좀 관심을 가지고 들어주고, 대꾸를 해 주세요.
친정 식구들에게도 가끔 전화도 하고 하세요.
내 작은 변화에도 칭찬을 해 주고, 늘 하는 일에도 격려를 해 주세요.
부부관계에 대해서도 이야길 할까? 자존심 상해할까?
너무 형식적으로, 의무적으로 관계를 하는 느낌이 들어요.
아냐. 그렇지 않을지도 몰라. 마음을 그렇지 않지만, 몸이 피곤하니까. 또 내가 피곤한 줄 아니까. 날 배려해서 그럴 수도 있잖아?
양말 아무데나 좀 벗어두지 마세요. 면도하고, 세수하고 세면대 아무렇게나 두지 마세요.
식사할 때, 텔레비젼이나 신문 좀 보지 마세요.
이런 것 하지 말고, 이렇게 저렇게 좀 하세요. 라고 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당장은 겸연쩍어 하면서 조금의 변화는 있겠지.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가며, 설사 그 변화가 오래 간 다해도 무엇이 달라지는가?
남편에게 아무 느낌이 없다. 남자로써, 사내로써, 이성으로써의 그 느낌이 없다.
그냥 오빠 같고, 어떤 때에는 남동생 혹은 아들 같고, 어떤 때에는 아버지 같기도 하다.
정말 가족이다. 나는 여자인데, 그래서 여자로 살고 싶은데, 여자임을 느끼며 살고 싶은데..
싫다. 내 일상이 싫다. 이대로, 그냥 이대로 편안하게 늙어갈 것이라는 것도 싫다.
내 가슴이 뜨거워지고, 내 눈에 눈물이 고여지고, 호흡이 가빠지고, 얼굴이 붉어지는
그 순간이 더 이상 오지 않을 내 일상의 모든 대상들이 싫다.
그래서 남편도 싫다.
이제 나는 나를 찾을 것이다.
방법도 없다.
대책도 없다.
갈 곳도 없다.
그래도, 오늘은 정말 집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3. 오늘은 결혼기념일이다.
남편이 밤 11시에 귀가했다. 장미 한 다발과 선물을 들고..
아내도 밤 11시 10분에 들어왔다. 빨간 리본이 매여진 붉은 와인 한 병을 들고..
4. 오늘은 결혼기념일이다.
부부는 그 밤에 더 열심히, 더 행복한 것처럼,
결혼기념일답게 부부로써의 관계를 가졌다.
왜냐하면, 오늘은 결혼기념일이기 때문이다.
첫댓글 실화도 아니고, 허구도 아닌, 그냥 꽁트입니다.
헉~~ 콩트였군요..휴우... 허긴 ...남자 친구 없는 여자 없고 , 여자친구 없는 남자가 없다고 말하던데...요즘세상...
첨엔 깜짝 놀랐네요.ㅎㅎㅎ 만약에 이런일이 생긴다면 서로 피할게 아니라 대화로 풀어가야겠지요? 20년이상 함께한 부부...앞으로도 평생을 동반자로 살아가야하는데 얽힌 실타레는 하나씩 풀어가며 사는게 현명하다고 생각해봅니다.행복하세요~~
저두 놀랐습니다 ㅎㅎㅎ
25주기면 은혼식이라 하던가요? 서로에게 익숙해 편해지는 관계라고들 하는데, 저는 이세상에서 가장 가깝고도 먼사이라 느껴지는, 내아이의 부친이란 엄연함만이 소중하고, 그런 동반자임에도 제게있어 가정 편한 사람이 아닌게 아쉬움이 되기도 하지만.....이 생에 부부연을 잘 풀어야 다음에 또 안 만난다하니,또 되풀이 안하려 현명히 살아야 함이 우리 삶의 과제이기도 한거 같네요.....ㅎㅎㅎㅎ
'이 생에 부부연을 잘 풀어야 다음에 또 안 만난다'..진짜 새겨들어야 할 말이네요. 그럼, 다음 생에도 부부로 만나길 원하는 부부가 '혹시' 있다면? 농담입니다.
내 남편의 마음은 어떠할가? 생각해 보게 합니다.
물어보셔도 속내를 다 털어놓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상처 받을까봐-말해도 별 소용없을것 같으니-괜히 말했다가 두고두고 바가지 끍힐까봐-되로 주고 말로 받을까봐-니나 잘해라..할 것 같아서-등등의 이유로 '왜 그래? 나 자기 사랑하는 것 몰라?'라면서 구렁이 담 넘어가듯 두리 뭉실 넘어갈 확률이 많습니다. 그럼, 대개는 속아넘어가든지, 정말 속던지...제가 너무 시니컬한가요? 진솔되고, 진실된 부부가 더 많은데..그렇죠?
재미있게본 영화를 매일 보는 느낌요??? 표현이 정말 ㅎㅎㅎ 그래도 늘 내편이 되어주고 늘 내 가까이에 있어 가장 편하면서도 가장 단점가 장점을 많이 알고있는 사람... 다음생에는.... 또 만나는건 글쎄요????
표현이 좀 심했나요? 나름대로 고심을 한 대목입니다.
-_-.....결혼기념일 저희 부부도 잊고 살아요. 딸이 챙기더군요~!!!////결혼기념일도 여러가지 있군요.....하긴 작가의 펜끝에 따라 달라지니....
멜번지기님의 글 물흐르듯이 매끄럽습니다. 우리네가 뛰어봐야 부처님 손바닥안 아니겠어요? 님의 결혼 기념일 이었나요? ㅎ
제 결혼 기념일은 아니구요. 그냥 '꽁트'로 지어낸 글입니다. 남편이 힘들면, 아내도 똑같이 힘들다...뭐..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상당이 메세지가 담아 있는 글 이군요. 요즘에 변화하는 내자신을 생각하면서 읽엇습니다. 참 의미있는 글 감사 합니다.
변하지 않는 것이 없더군요. 근데, 나만 변하는 것이 아니더군요. 그것이 위로인지, 혹은 더 큰 아픔인지는 몰라도..
결혼기념일이라...음 매일 결혼기념일처럼 살면 어떠할꼬?
ㅎㅎ 일상의 탈출? 그거 쉽지 않지요..태백 산맥을 보니까..그 전쟁의 와중에도..일상 생활을 계속되더라고요,,5일 장도 서고...그거 관성이라거..쉽게 버려지지 못하는가 봅니다...
ㅎㅎ 일상의 탈출? 그거 쉽지 않지요..태백 산맥을 보니까..그 전쟁의 와중에도..일상 생활을 계속되더라고요,,5일 장도 서고...그거 관성이라거..쉽게 버려지지 못하는가 봅니다...
고향으로의 회귀인가요? 친숙함에 대한 아쉬움인가요? 아님, 떨쳐버릴 수 없는 질긴 '인연'인가요? 그래서 얼키고 설켜 계속 살고 계시는 분들도 많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