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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하느님께서 한 나라를 세우실 터인데 그 나라는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모든 나라를 멸망시킬 것입니다.”
<다니엘 예언서의 말씀 2,31-45>
그 무렵 다니엘이 네부카드네자르에게 말하였다.
31 “임금님, 임금님께서는 무엇인가를 보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큰 상이었습니다.
그 거대하고 더없이 번쩍이는 상이 임금님 앞에 서 있었는데, 그 모습이 무시무시하였습니다.
32 그 상의 머리는 순금이고 가슴과 팔은 은이고 배와 넓적다리는 청동이며,
33 아랫다리는 쇠이고, 발은 일부는 쇠로, 일부는 진흙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34 임금님께서 그것을 보고 계실 때,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는데 돌 하나가 떨어져 나와, 쇠와 진흙으로 된 그 상의 발을 쳐서 부수어 버렸습니다.
35 그러자 쇠, 진흙, 청동, 은, 금이 다 부서져서, 여름 타작마당의 겨처럼 되어 바람에 날려가 버리니,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상을 친 돌은 거대한 산이 되어 온 세상을 채웠습니다.
36 이것이 그 꿈입니다.
이제 그 뜻을 저희가 임금님께 아뢰겠습니다.
37 임금님, 임금님께서는 임금들의 임금이십니다.
하늘의 하느님께서 임금님께 나라와 권능과 권세와 영화를 주셨습니다.
38 또 사람과 들의 짐승과 하늘의 새를, 그들이 어디에서 살든 다 임금님 손에 넘기시어, 그들을 모두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임금님께서 바로 그 금으로 된 머리이십니다.
39 임금님 다음에는 임금님보다 못한 다른 나라가 일어나겠습니다.
그다음에는 청동으로 된 셋째 나라가 온 세상을 다스리게 됩니다.
40 그러고 나서 쇠처럼 강건한 넷째 나라가 생겨날 것입니다.
쇠가 모든 것을 부수고 깨뜨리듯이, 그렇게 으깨 버리는 쇠처럼 그 나라는 앞의 모든 나라를 부수고 깨뜨릴 것입니다.
41 그런데 일부는 옹기장이의 진흙으로, 일부는 쇠로 된 발과 발가락들을 임금님께서 보셨듯이, 그것은 둘로 갈라진 나라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쇠와 옹기 진흙이 섞여 있는 것을 보셨듯이, 쇠의 강한 면은 남아 있겠습니다.
42 그 발가락들이 일부는 쇠로, 일부는 진흙으로 된 것처럼, 그 나라도 한쪽은 강하고 다른 쪽은 깨지기가 쉬울 것입니다.
43 임금님께서 쇠와 옹기 진흙이 섞여 있는 것을 보셨듯이 그들은 혼인으로 맺어지기는 하지만, 쇠가 진흙과 섞여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처럼 서로 결합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44 이 임금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느님께서 한 나라를 세우실 터인데, 그 나라는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그 왕권이 다른 민족에게 넘어가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 나라는 앞의 모든 나라를 부수어 멸망시키고 영원히 서 있을 것입니다.
45 이는 아무도 돌을 떠내지 않았는데 돌 하나가 산에서 떨어져 나와, 쇠와 청동과 진흙과 은과 금을 부수는 것을 임금님께서 보신 것과 같습니다.
위대하신 하느님께서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임금님께 알려 주신 것입니다.
꿈은 확실하고 그 뜻은 틀림없습니다.”
✠ 복음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21,5-11>
그때에
5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6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7 그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
8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9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10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11 큰 지진이 발생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성전에서 하신 긴 담화의 한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예루살렘 성전 파괴에 대한 예언과 세상 종말이 오기 전의 표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루카 21,6)
옛 솔로몬 성전은 느부갓네살에 의해 기원전 586년에 파괴되었고,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유배에서 돌아온 이들에 의해 기원전 515년에 즈루빠벨의 치하에서 재건된 제 2성전이었습니다.
이 성전은 헤로데 왕에 의해 기원전 19년부터 확장되고 웅장하고 화려하게 꾸며지면서 그 본래의 의미를 잃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십니다.
사실 성전 파괴에 대해서는 예언자 미카, 예레미아, 에제키엘 등에 의해서 이미 예고된 바 있습니다.
이제 그 때와 표징을 묻는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말라.”
(루카 21,8)
이는 거짓 예언자, 거짓 메시아에게 속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이비 메시아는 누구일까요?
우리는 재물이라는 우상을 사이비 구세주로 따르고 속아 넘어가고 있지는 않는지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세상에는 “돈을 많이 벌게 해주겠소.” 하고 외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결국 우상을 따르고 섬기도록 부추기는 거짓 예언자, 거짓 메시아 행세를 하고 있는 꼴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입으로는 주님을 구원자라 고백하지만, 정작 무엇에 목매달고 쫓아가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또 재물뿐만이 아니라 세속 정신을 사이비 메시아로 따르고 섬기고 있을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
(로마 12,2)
또 우리에게는 아주 특별하고 고약한 거짓 예언자, 거짓 메시아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녀석입니다.
우리는 곧잘 자신의 욕망과 생각, 자신의 견해와 뜻을 섬기고 추종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을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곧 ‘자기 자신’이 거짓 예언자, 거짓 메시아 행세를 하지 않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디모테오에게 말합니다.
“그대 자신을 조심하십시오.
그리고 그대의 가르침의 내용을 잘 살피시오.
이렇게 꾸준히 일을 해 나가면, 그대 자신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그대의 말을 듣는 사람들을 모두 구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
(1티모 4,16)
그렇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있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루카 21,8)
주님!
속이지도 속지도 말게 하소서.
재물에 속지 않고, 세속에 속지 않게 하소서
또한 제 견해와 편견, 제 생각과 허영에 속지 말게 하소서.
무엇보다도 제 자신과 제 뜻에 속지 않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토 수도회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인간만이 지닌 죽음을 기억할 수 있는 능력>
오늘 복음은 심판의 ‘때’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제자들은 마지막 때의 표징을 묻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나타났다고 해도 신경 쓰지 말고 전쟁이 일어나도, 또 전염병이 돌아도 신경 쓰지 말라고 하십니다.
때가 되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하늘의 표징이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 안에는 왜 죽음의 때를 알려고 하느냐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물론 지금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마지막 때가 그리 멀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미래의 그때가 아닙니다.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입니다.
예수님은 종말이나 죽음이 미래의 무엇이 아닌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깨닫게 해주는 은총으로 여기길 바라십니다.
누구에게나 있을 죽음은 정말 잘만 사용하면 진정 동물과 구별될 수 있는 인간만이 가진 은총입니다.
세상 모든 동물 중에 죽음 때문에 지금의 삶의 태도를 결정하는 동물은 인간밖에 없습니다.
다른 동물들은 생존을 위해 살다가 죽을 때가 되었다고 느끼면 순응하고 죽습니다.
죽음을 미리 생각하며 지금의 삶을 변화시키려 하지 않습니다.
죽을 때가 되었을 때 죽기 싫어서 발버둥 치는 동물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죽음이라는 것 앞에서 수많은 삶의 태도들을 취합니다.
인간은 죽음의 결과가 다 똑같지 않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 앞에서 여러 형태의 삶의 모습을 보입니다.
저는 인간의 삶의 선택이 근본적으로 각자의 죽음에 대한 반응이라 생각됩니다.
죽음은 분명 지금 삶의 선택을 하게 만듭니다.
영화 ‘올드’(2021)는 시간이 엄청나게 빨리 흐르는 한 해변에 갇힌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혼을 결심한 프리스카는 남편 가이와 어린 자녀 둘과 함께 3일간 외딴섬 휴양지로 마지막 휴가를 떠납니다.
프리스카의 가족 말고도 많은 이들이 휴양지로 모여듭니다.
여기서는 기이한 일이 일어나는데 30분이 마치 1년처럼 시간이 빠르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들은 휴양지 리조트를 운영하는 제약회사의 초청으로 이곳에 온 이들입니다.
그런데 이들 가족 중 일부는 간질이나 암, 정신병 등을 앓고 있었습니다.
제약회사에서 희귀한 광물로 둘러싸인 시간이 빨리 흐르는 이곳에 그들을 넣어놓고 자신들의 신약을 임상시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신약의 임상시험이 시간도 꽤 오래 걸리고 비용도 많이 들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직감하고는 여러 형태의 모습을 보입니다.
탈출하고 싶어 절벽을 통과하려고도 하고 기어오르려고 하고 바다로 헤엄쳐서 나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모든 시도는 실패합니다.
그냥 있으면 며칠은 살 수 있는데 그런 시도를 하다 더 빨리 죽습니다.
또 어떤 이는 이 모든 것이 함께 있는 사람들의 탓이라고 여기고 정신발작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닥치는 대로 칼을 휘두르며 사람을 죽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을 지키려는 프리스카와 가이에 의해 그도 죽습니다.
아이들은 빨리 어른이 되어 어른들만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는 아이를 뱁니다.
아이가 아기를 배고 뭔가 자신들도 큰일을 이뤄낸 것처럼 당당해 합니다.
하지만 아기는 시간의 빠름을 견디지 못하고 먼지가 되어버립니다.
프리스카와 남편 가이와 두 성장한 아이들만 남은 상황에서 부부는 해변을 바라보며 이런 대화를 나누며 지난날을 화해하고 죽어갑니다.
프리스카가 노래합니다.
“사랑의 큐피드가 쏜….”
남편 가이가 말합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싸웠지? 다 잊어버렸네.
이유가 뭐였든 나는 당신에게 화 풀렸어.
우리 왜 이 해변을 떠나려고 했지? 이렇게 아름다운데.”
이들 부부는 자신들에게 남은 짧은 시간을 자녀들을 위해, 또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고 사랑하고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데 썼습니다.
남은 자녀들은 이렇게 수많은 사람이 죽은 것을 알고는 그곳을 탈출하여 제약회사를 신고합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란 말이 있습니다.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이 능력은 오직 인간에게만 있습니다.
미래에 있을 죽음을 ‘지금, 이 순간’으로 당겨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순히 생존을 위한 삶이 아니라 어차피 끝나는 삶, 더 가치 있는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죽음을 현재에 두지 않고는 사람은 본능적으로 생존을 위해 삽니다.
그러나 어차피 지금 죽을 수도 있다고 여기면 조금 더 가치 있는 것을 선택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런데 왜 자꾸 죽음을 미래로 여기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신안 앞바다에서 발견된 보물들이 있습니다.
난파된 오래된 배에서 떠내려온 청나라 자기들인데 그것들의 가치는 하나당 수억 원에 이릅니다.
그런데 처음 발견한 어부들은 그 가치를 모르고 개밥그릇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육체는 그릇과 같습니다.
그 안에 영혼이 있고 또 그 안에 마음도 있습니다.
마음에 담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사랑을 담으면 하느님처럼 고귀한 사람이 되고 마음에 미움을 담으면 생존만 생각하는 동물과 다름이 없습니다.
손에 물 한 번 묻혀보지 못한 상류층 유대인 부인이 나치 수용소에서 자신보다 더 힘든 이들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보고 빅터 프랭클이 물었습니다.
“고생 한 번 못해본 사람이 어디서 그런 기운이 납니까?”
“저는 평생 남의 도움만 받고 살아서 진짜 인생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하마터면 인간이 어떻게 싸우고 밥 먹고 살아가는지 모를 뻔했습니다.
이것을 알게 해 준 신에게 감사합니다.”
고통이 올 때 사람들은 수용소에서 여러 자세를 보입니다.
탈출하려고 하고 절망하고 미치기도 하고 이기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고귀한 자세를 보이는 이들도 있습니다.
자신이 먹을 것도 없는데 더 배고픈 이에게 주며 자신에게도 이런 면이 있음에 스스로 놀라기도 합니다.
어차피 죽는데 나의 가치를 생존만이 아닌 더 고귀하게 만들어 보자는 결단입니다.
이런 삶의 변화는 인간만이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도구가 ‘죽음을 기억함’입니다.
이 죽음을 미래에만 두고 살아간다면 하느님께서 주신 가장 큰 선물을 썩히게 됩니다.
그러면 마지막 때 발버둥 칠 것이 분명합니다.
미래의 죽음을 현재로 끌어와 자신의 가치를 변화시킬 수 있는 동물은 인간밖에 없다면, 하느님께서 죽음이란 것으로 인간이 더욱 가치 있는 존재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죽음을 기억할 수 있는 은총을 그냥 흘려버리지 맙시다.
날마다 마지막 날이라 생각하고 살면 저절로 자신의 존엄성을 높여가는 삶을 살게 됩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휘둘리지 않는 삶>
예루살렘 성전은 기구한 운명을 겪었습니다.
세 번에 걸쳐서 세워지고, 세 번 무너졌습니다.
첫 번째 성전은 가장 화려한 왕권을 누린 솔로몬 왕 때 건축되었습니다.
솔로몬이 죽고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갈라지게 되게 되었으며 남 유다는 기원전 587년 바빌론에 의해 멸망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고 성전은 무너졌으며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가 노예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 후 기원전 538년 바빌론을 제압한 페르시아의 키루스 황제에 의해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귀환 이후 제일 먼저 성전을 재건합니다.
그러나 이 제2의 성전 또한 기원전 170년 경 시리아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의해 점령되고 맙니다.
시리아왕은 유다인을 말살하기 위하여 정책적으로 유다교를 핍박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폐허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성전 한가운데 제우스 신의 제단을 세우고 유다인들이 가장 부정하게 생각하는 돼지고기로 제사를 지내게 하였습니다.
그 후 시리아가 멸망하고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함으로써 이스라엘은 다시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로마의 헤로데왕은 유다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예루살렘의 성을 다시 화려하게 증축합니다.
이 성전이 다시 폐허로 변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예언을 하셨는데 오늘 복음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35년경 전후이고, 기원후 70년경 성전은 또다시 로마에 의해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때 예루살렘 성만 무너진 것이 아니라 유다인들 전체가 나라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지금의 이스라엘로 정착하기까지 유다인들은 참으로 험난한 길을 걸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아직 복원되지 못하고 그 자리에는 이슬람 사원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유다교, 이슬람교, 그리스도교의 성지로써 의미 깊은 땅이 되어 있습니다.
그토록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하느님께서 함께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폐허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충만하였지만 하느님을 외면하고 은총을 담을 그릇을 마련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은총을 받고도 감사하지 못하고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언제 그런 재앙을 맞게 될지 모릅니다.
깨어 준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사실 예루살렘이 스스로 돌아보고 회개의 길을 걸었더라면 멸망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종말에 앞서 겪게 될 환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헛된 예언자가 나타나고, 자칭 ‘그리스도’라고 하는 자가 등장하며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큰 지진과 기근, 전염병이 생길 것이라 했습니다.
세상의 종말은 결국 혼란을 겪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결코 헛된 예언에 속는 일이 없도록 하고 큰 표징들에 무서워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사실 마음이 추우면 몸도 춥고 남도 추워 보이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내가 평정을 지키고 있으면 바깥바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주님을 믿고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진대 어떤 표징이 일어나면 어떻고, 종말이 오면 어떻습니까?
그저 오늘을 그분과 함께 사는 것이 소중합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작은 불은 바람 앞에서 쉽게 꺼지지만, 큰불은 바람 앞에서 활활 탑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큰 사람은 환난 앞에서 그 진가를 드러냅니다.
믿음의 사람은 이런저런 소문으로 휘둘리지 않습니다.
소문의 사실과 진실을 살핍니다.
이렇게 저렇게 쉽게 판단하고 단정 지으며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세상 종말에 앞선 외적인 혼란을 두려워 말고 오히려 마음 안에 평온이 없음을 염려해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종말이 어떻게 오느냐를 걱정하기보다 현재의 내 삶의 상태가 어떠한가를 살펴야 할 때입니다.
종말은 오늘 여기서 시작됩니다.
사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구원의 시대를 이미 살고 있고, 아직 그 완성은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약속된 미래를 희망하면서 오늘을 최선으로 살 수 있습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불멸의 성전 건립을 위해서는 속화되고 타락한 성전의 파괴는 필수입니다>
웅장하고 화려하기로 유명한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관련된 예수님 예언의 말씀은 참으로 섬뜩합니다.
그 휘황찬란하고 으리으리한 대성전이 어느 날 돌 하나 남아 있지 않고 허물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시니, 듣고 있던 사람들이 다들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예언대로 예루살렘 성전은 오래 가지 않아 이방인들의 침략 앞에 무참히 파괴되고 훼손되었습니다.
자신들 최후의 보루요 목숨 같던 성전,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었던 성전이 파괴되고 유린됨으로 인해 유다인들이 받았던 충격과 트라우마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자비하신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도 파괴된 그 자리에 새로운 성전, 아버지 하느님 마음에 꼭 드는 아름다운 성전을 재건축하시려는 큰 의도를 지니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따지고 보니 비참하고 굴욕적이지만 종종 파괴도 필요합니다.
그 위에 더 이상 무너지지 않는 불멸의 성전 건립을 위해서는 속화되고 타락한 성전의 파괴는 필수입니다.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과 피를 통해, 당신 존재 자체를 통해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참 성전을 건설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이 세상 육화강생, 그리고 수난과 죽음, 부활과 승천을 통해 난공불락의 견고한 성전을 건설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가장 아름다운 성전이십니다.
그분께서 제정하신 성찬례가 거행되는 모든 곳을 가장 아름다운 성전입니다.
뿐만 아니라 매일 그분의 몸과 피를 지극정성으로 영하는 우리 개별 그리스도인 각자가 또한 주님 마음에 꼭 드는 성전입니다.
우리를 너무나도 극진히 사랑하시는 주님께서는 그 옛날 속화되고 타락한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셨듯이, 가끔씩 배은망덕하고 불충실한 우리를 향해서도 파괴의 망치를 손에 드십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주님께서는 철저히 파괴된 그 자리에 당신 마음에 드는 새 성전을 반드시 재건하십니다.
- 살레시오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정주(定住)의 영성 - 모든 시간은 하느님 손 안에 있다>
지금은 연중 ‘끝’ 주간이고 다음 주는 교회 전례력으로 새해의 대림시기가 ‘시작’됩니다.
마지막 주간답게 다니엘서나 루카 복음의 말씀 배치도 종말에 관한 내용들입니다.
끝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희망의 시작입니다.
마침 오랜만에 거름을 주고자 판 배밭의 구덩이를 보는 순간 오래전 시가 생각났습니다.
‘살수록 힘들다/하루하루 산다
다시 시작된 배농사/가지런히 파진 흙구덩이/든든하다
끝은 시작이다/삶은 엄숙하다
묵묵히 생명의 품되어/흙으로 산다/마지막이 고와야 한다
소나무를 줄기차게 타고 오르던
하늘 향한 담쟁이/장엄한 단풍 사랑으로/소나무를 장식하며
은혜 갚고 있다/이래야 끝은 아름다운 시작일 수 있다”
끝은 희망의 시작입니다.
다니엘서나 묵시 사상의 주제는 단 하나 ‘희망’입니다.
위협이나 공포가 아닌 하느님께 희망을 두라는 것입니다.
하느님 안에 정주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불안하고 민심이 흉흉할수록 빛을 발하는 정주의 영성입니다.
정주의 중심, 정주의 평화, 정주의 기쁨, 정주의 희망, 정주의 지혜 등 정주 영성의 장점을 이야기하면 끝이 없습니다.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승들의 으뜸 서원이 바로 정주 서원입니다.
정주의 빛나는 표상이 수천년 전통의 수도원이나 성전들이고, 여기 언제나 거기 그 자리에 자리 잡고 있는 수도원 성전, 그리고 수도원 배경의 불암산입니다.
이 모든 정주의 현실이 궁극적으로 상징하는 바 하느님 안에, 교회 안에 정주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 삼종기도 후 세계 젊은이의 날에 젊은이들에게 하신 교황님 강론도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교황님은 젊은이들이 교회 안에서 집처럼 편히 머물며 주인공들이 되라고 격려하셨습니다.
고향의 가정집 같은 교회 안에서 정주하며 활력을 회복하라는 말씀은 비단 젊은이들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가정 상실의 시대, 교회가 만인의 치유와 위로, 환대의 가정집이 되어야 하는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영혼들이 편안한 고향집을 찾듯이 끊임없이 주님의 집, 수도자들이 수도가정을 이뤄 사는 정주의 요셉 수도원을 찾습니다.
모든 것이 변합니다.
모든 것이 지납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영원한 것은 하느님 한 분 뿐입니다.
모든 시간은 하느님 손 안에 있습니다.
참으로 영원하신 하느님 안에 정주할 때, 온갖 불안과 두려움, 환상은 말끔히 걷힙니다.
부화뇌동, 경거망동하지 않고 현실을 직시하며, 세상 우상들이나 사탄에 속지 않고,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 수 있습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아빌라의 데레사의 ‘아무것도 너를’ 이란 기도시입니다.
“아무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아무 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지니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다 지나가는 것
오 하느님은 불변하시니/인내함이 다 이기느니라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네 소원이 무엇이뇨/네 두려움은 무엇이뇨
네 찾는 평화는 주님께만 있으리/주님 안에 숨은 영혼이/무얼 더 원하리오
사랑하고 사랑하여/주님께 모든 사랑 드리리
주님만을 바라는 사람은/모든 것을 차지할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그대로 정주 영성을 노래한 기도시입니다.
하느님만으로 만족한, 하느님만으로 행복한 정주의 영성가입니다.
알고 보니 아빌라의 데레사 정주영성의 대가입니다.
‘아무 것도 너를’ 이란 성가를 제 장례미사 퇴장성가로 부탁하고 싶습니다.
오늘 다니엘서의 주인공 다니엘 역시 정주영성의 대가입니다.
꿈과 환시의 해몽을 청하며 불안과 두려움에 떠는 바빌론 대제국의 임금 네부카드네자르와는 너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바빌론에 유배중이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주의 예언자, 다니엘은 희망과 구원의 표징이 되고 있음을 봅니다.
오늘 꿈의 해몽에 앞서 다니엘의 하느님 찬미가를 보면 그가 얼마나 하느님 안에 깊이 정주한 정주 영성의 대가인지 담박 드러납니다.
“지혜와 힘이 하느님의 것이니
하느님의 이름은/영원에서 영원까지 찬미 받으소서
그분은 시간과 절기를 바꾸시는 분
임금들을 내치기도 하시고/임금들을 세우기도 하시며
현인들에게 지혜를 주시고/예지를 아는 이들에게 지식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심오한 것과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시고
어둠속에 있는 것을 알고 계시며/빛이 함께 머무르시는 분이시다.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
제가 당신께 감사드리며 당신을 찬양합니다.
당신께서는 저에게 힘을 주셨습니다.”
(다니 2,20-23)
정주 영성에 끊임없이 하느님께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기도가 얼마나 결정적 도움이 되는지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지혜와 힘을 고스란히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정주 영성이요 그 빛나는 모범이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의 꿈 해몽은 세상 제국들이 덧없이 무너져 내림을 보여줍니다.
마지막 해몽의 결정적 풀이입니다.
“이 임금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느님께서 한 나라를 세우실 터인데, 그 나라는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그 왕권이 다른 민족에게도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 나라는 앞의 모든 나라를 부수어 멸망시키고 영원히 서 있을 것입니다.
이는 아무도 돌을 떠내지 않았는데, 돌 하나가 산에서 떨어져 나와, 쇠와 청동과 은과 금을 부수는 것을 임금님께서 보신 것과 같습니다.”
참으로 통쾌, 상쾌, 유쾌한 삼쾌의 해몽입니다.
바로 이 영원한 하느님 나라, 예수님의 나라는 자랑스럽게도 2000년 전통의 가톨릭교회를 통해 실현되고 있지 않습니까!
모든 제국들이 수없이 명멸(明滅)했지만 가톨릭교회는 영원한 현재 진행형입니다.
제1대 베드로 사도 교황으로 시작되어 현재 제266대 프란치스코 교황이니 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입니까!
정주영성의 대가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의 깊고 풍부한 지혜와 지식, 해몽과 예언을 통해 정주 영성의 은총이 얼마나 놀랍고 풍성한지 깨닫습니다.
다니엘을 능가하는 정주영성의 대가, 바로 우리 구원자 파스카의 예수님이십니다.
어제 월요일 9시경 찬미가 1절의 고백이 참 은혜로웠습니다.
“성인들 생명이요 길이며 희망/구원의 주님이신/성자 그리스도님
당신은 정의 평화 베푸시오니/기쁨의 찬미가를 부르나이다.”
우리의 생명이요 길이며 희망이신 주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강조하시는 바 역시 정주영성입니다.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말라.”
영적 사기꾼에 속지 말고 정신 바짝 차려 오늘 지금 여기 내 삶의 자리 하느님 안에 정주하라는 것입니다.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삽니다.
경거망동, 부화뇌동 흔들리지 말고, 뿌리 없이 표류하며 방황하지 말고, 하느님 중심에 깊이 정주의 믿음의 뿌리를 내리고, 요지부동 내 삶의 제자리에서 깨어 맑은 제정신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내일 세상 종말이 오더라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는 자세로 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세상이 어둡고 어지럽고 혼란할수록 빛을 발하는 정주 영성입니다.
부단히 내 삶의 자리 초월적 거점에서 하느님의 시야를 지니고 넓고 깊게 살게 하는 정주 영성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날로 깊은 정주 영성을 살게 해 주십니다.
다시 늘 고백해도 새롭고 좋은, 정주의 중심인 파스카의 주 예수님께 대한 사랑의 고백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주 예수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은 생명과 빛, 진리와 사랑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당신의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주 예수님!
당신은 저희의 전부이옵니다.
저희 사랑, 저희 생명, 저희 기쁨, 저희 희망, 저희 평화, 저희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파스카의 새날,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아멘.
- 성 베네딕토회 성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미사의 말씀은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을 대조적으로 보여 주십니다.
"그 상의 머리는 순금이고 가슴과 팔은 은이고 배와 넓적다리는 청동이며, 아랫다리는 쇠이고, 발은 일부는 쇠로, 일부는 진흙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다니 2,31)
다니엘이 네부카드네자르 임금 앞에 불려나와 꿈을 풀이합니다.
임금의 꿈 속에 등장한 순금, 은, 청동, 쇠, 진흙으로 된 거대한 상은 앞으로 올 나라들을 상징하지요.
바빌론에 이어 세상의 패권은 페르시아, 그리스를 비롯한 헬레니즘 세계, 그리고 로마 제국으로 이어질 것이고, 이스라엘은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하느님 백성의 정체성에 극심한 도전을 받으며 식민지의 현실을 살아갈 것입니다.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는데 돌 하나가 떨어져 나와, 쇠와 진흙으로 된 그 상의 발을 쳐서 부수어 버렸습니다.
그러자 쇠, 진흙, 청동, 은, 금이 다 부서져서, ...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상을 친 돌이 거대한 산이 되어 온 세상을 채웠습니다."
(다니 2,34-35)
그런데 어디선가 돌이 날아와서 이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상을 부수어 버립니다.
거듭 출현한 악의 세력들이 잠시 세상을 뒤흔들며 한분이신 하느님과 그분 백성에게 대적하더라도 결국 그들에게 남김없는 심판이 예고됩니다.
"하늘의 하느님께서 한 나라를 세우실 터인데, 그 나라는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 영원히 서 있을 것입니다."
(다니 2,44)
인간적 감각으로는 그 돌이 어디서 왔는지 근원을 알 수 없지만, 모든 악의 세력을 부수고 거대한 산이 되어 온 세상을 채웁니다.
하늘의 하느님께서 세우시는 영원한 나라입니다.
인간의 욕망과 폭력이 세운 권력은 힘없이 무너져 사라지지만 하느님의 나라는 영원합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루카 21,6)
복음에서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아름다움과 위용에 감탄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기원후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은 침략자 로마 제국의 군대에 의해 불타고 허물어졌지요.
하느님은 변치 않는 분이시지만 그분을 모신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의 흥망성쇠에 따라 심한 부침을 겪습니다.
아무리 외형을 아름답게 꾸민들 성전을 지탱하는 백성의 신앙의 뿌리가 부실해지면 언제든 하느님 현존을 잃기 마련이지요.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루카 21,9)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 사이의 전쟁이나 반란은 사람 사이의 일입니다.
사람들이 서로 죽이고 무너뜨리고 빼앗고 짓밟으며 아이러니하게도 새로운 역사를 창출해 나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사실 간담을 더 서늘해지게 만듭니다.
그것이 끝이 아니라 더한 무엇이 온다는 뜻이니까요.
실제로 지진이나 기근, 전염병, 하늘의 무서운 일들, 큰 표징 등은 인간이 벌일 수 있는 비극의 한계치를 넘어섭니다.
일단 벌어지면 강자든 약자든 선인이든 악인이든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통제 영역 밖의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날은 영원히 서 있을 하느님의 나라로 이어지는 날이 될 것입니다.
제1독서의 예고처럼 한치 앞도 모르고 오만하게 구는 각종 악의 각축장이었던 세상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어떤 힘에 의해 새로운 역사를 맞이하는 날이지요.
그날이 누군가에게는 내내 기다려온 사람의 아들을 맞이하는 날일 수 있고, 또 누군가에게는 끝까지 두려워 피하고픈 세상 종말의 날이 될 겁니다.
세상 모든 이에게 차별없이 선물로 주어진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모습이 쌓여 그 날을 맞이하는 준비가 될 겁니다.
"너는 죽을 때까지 충실하여라."
(복음 환호송)
이는 한 치 앞도 모르면서 두려움과 근심으로 종종대는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당장 눈앞에 악이 득세하고 어둠이 장악한 듯 보여도, 우리는 그 모두를 부수시고 당신 나라를 건설하실 주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을 충실히 지켜나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 약함을 아시는 주님께서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시니 고개 들어 하늘을 바라며 영원을 희망합시다.
그때가 언제 어떻게 오더라도 우리에게는 반드시 구원의 날이 될 것이니까요.
아멘.
- 작은형제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생의 밑바닥에서도 잃지 않는 희망>
기원전 19년 헤로데 대왕에 의해 시작된 예루살렘 성전의 증개축은 서기 46년에 완공됩니다.
이 성전은 서원 이행의 표시로 혹은 다른 여러 가지 이유로 성전에 바쳐진 ‘예물’(2마카2,13)과 “아름다운 돌”(21,5)로 건축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이 경탄하자(21,5), 예수님께서는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21,6) 하시며 성전 파괴를 예고하십니다.
이 말씀은 성전 건물의 파괴뿐 아니라 유다인의 희생제사가 종말을 고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예고대로 70년 8월 29일 로마군에 의해 성전은 파괴되고 일부 벽만 남긴 채 불타버렸습니다.
그 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69-79년)는 남은 벽마저 허물어버립니다.
또한 포위 공격에 의해 110만 명이 죽었고, 9만 7천명이 포로로 끌려가서 그곳은 완전 폐허가 되었습니다(요세푸스 플라비우스).
성전은 유다인들에게는 신앙의 본거지이자 존재의 구심점이었기에 그 파멸은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런데 루카 복음사가는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인 80년경에 복음서를 집필하였기에 이 충격적인 사건은 종말의 전조가 아니라 역사적 비극으로 봅니다(21,20-24).
우리는 주님의 성전이며,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터 또한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는 주님의 거룩한 집이 되어야 합니다.
성전 파괴는 역사의 비극이요 인간과 생명이신 하느님과의 단절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성전이 파괴되듯 우리의 영혼도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 사회도 비극적인 상황으로 치닫곤 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자초하는 이런 파멸 상황에서도 다시 주님께 얼굴을 돌리고 희망을 잃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이제 어려운 시기가 올 것이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것이지만 주님께서 함께 계실 것이니 희망을 버리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당신의 거처로 삼아주십니다.
때로는 넘어지고, 거짓과 불의가 판치는 세상 그 어느 구석에도 사랑과 정의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더라도 함께 해주시는 주님께 믿음을 두고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삶의 위협과 멸망을 본다 하더라도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예루살렘의 멸망도 사실은 하느님 계획의 일부요, 죄에 넘어지고 시련을 겪고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는 순간마다 거기에는 주님의 생명과 의미가 담겨있음을 보도록 힘써야겠지요.
행복을 바라거든 살아가며 다가오고 겪게 되는 모든 것을 희망 가운데 받아들여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삶이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우며 세상에 불의와 불평등과 부조리와 부패가 넘친다 하여도, 불안과 혼란에 빠뜨리는 자연 현상이나 전쟁과 기근, 생각을 뒤흔드는 거짓 사상에 휘말려 비극을 자초하지 말아야 합니다.
의로우신 주님께서는 거짓과 부패로 얼룩진 뻔뻔스런 최고 권력자를 포함한 정치가들과 탐욕스런 자본가들의 모든 것을 다 허물고 새로운 성전을 지으실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상황에서도 세상과 물질을 따라가지 말고 깨어 기도하며, 희망을 잃지 않고 예수님의 제자다운 삶을 충실히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 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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