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 하린 (시인)
15. 상상 테마14 - ‘○○의 방식’으로 상상하며 시 쓰기
@ 소재나 모티브가 갖는 특징과 상상 적용 방법
방식은 일정한 방법이나 형식을 의미한다. 이 방식 안엔 과정과 결과가 있고 원인이 내재되어 있다. 당연히 삶의 모든 순간순간도 방식에 의해 이루어진다. 완전한 무(無)가 되기 전까지 사람을 포함한 우주의 모든 대상이나 현상은 방식에 의해 생로병사를 겪다가 소멸한다. 그렇기에 방식을 섬세하게 관찰하고 사유하면 거기에서 비롯된 존재론적인 의미나 심리적 맥락을 캐치할 수 있다. 그러니 생의 순간순간을 담당하고 있는 방식을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방식을 활용해 상상을 펼칠 때에는 우리가 이미 알고 실천하고 있는 방식을 떠올려서는 안 된다. 예상치 못한 것들의 특별한 방식을 떠올려야 한다. 예컨대 놀이의 방식이나 화분을 키우는 방식, 꽃을 피우는 방식은 익숙한 방식이지만 기억으로 달아나는 방식이나 태양을 저주하는 방식, 종이와 이별하는 방식, 파랑을 사랑하는 방식, 유리에게 고백하는 방식, 봄의 심장을 만나는 방식, 검은 새가 흰 새를 추모하는 방식, 낙타를 사랑한 선인장의 방식 등은 흔하지 않은 방식이다. 그렇게 흔하지 않은 것들의 방식을 상상력을 동원해 떠올려 보고, 그것들이 가진 근원성이나 본질성을 나만의 시선을 통해 잡아낸다면 의미 있는 시 한 편을 쓸 수 있다.
필자의 시를 통해 그 소재가 어떻게 상상과 만나 펼쳐지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자.
꽃의 사적인 연애 방식 / 하린 ― ‘올드보이’
앞집 누나가 교복을 찢고 도시로 날아간다 날아간 자리에 나팔꽃은 피지 않고 온종일 촉촉한 웃음이 비릿한 생각을 타고 올라간다 꽃의 심장이 태양 아래서 팔딱거리듯 목구멍에서 욕이 팔딱거린다 꽃의 맨살을 찢고 싶은 밤은 결코 시들지 않는다 아침마다 눈깔이 뒤집히도록 태양에게 용서를 구한다 죄를 말리는 데는 도덕적인 태양이 최고
더듬이가 길어진 그림자가 자꾸 누나의 여백을 훔친다 심장이 만삭으로 부풀어 오르고 어제의 비굴이 오늘의 비굴을 복제한다 꽃이 내뱉는 기침 소리가 자꾸 들린다 누나의 몸 안으로 스며들어 간 곪아 터진 상상들을 쭉쭉 빨아 삼키고 싶다 누나와 내가 나눠 가진 울음과 웃음이 죽지 않고 나비로 환생한다면 꽃을 껴안는 불순한 밤은 고독한 전설로 기록이나 될까 구질구질한 혀가 누설한 꽃의 말들은 이번 생이 다하기 전에 삭제될 것이다 시적인 물음만 던지다 하릴없이 썩어 들어갈 벌겋게 독이 오는 맨살*들의 사적인 연애 방식
* 오규원의 「사내와 사과」에서 인용 ― 『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 문학세계사, 2010.
1단계 - 스스로 점검하기 – 메시지 분명히 하기+내 시만의 장점 찾기
필자가 택한 방식은 꽃의 방식이다. ‘꽃도 연애를 할 수 있다’라는 나만의 상상력을 동원해서 꽃으로 대변되는 앞집 누나와 ‘나’의 사적인 연애 방식을 다루고 싶어서 이 시를 썼다. 이 시를 창작하게 된 계기는 순전히 영화 ‘올드보이’를 감상하고 난 후부터인데, 극 중 누나를 사랑한 유지태가 맡은 역할이 시 속 화자인 ‘나’에게 자연스럽게 반영됐다. ‘나’와 웃음과 울음을 나누었던 누나는 지극히 ‘사적인’ 것이 허용되지 않는 현실을 부정하면서 떠나고, 그런 관계성의 부정으로 인한 ‘나’는 마음의 상처를 받는다. 그렇게 지극히 사적인 것들이 갖게 되는 상처적 국면을 꽃의 사적인 연애 방식이라는 상상을 동원해 표현하고자 했다. 따라서 이 시에서 쓰인 나만의 장점은 꽃의 속성과 사람의 속성이 교묘하게 맞물리게 상상을 펼친 것이다.
2단계 - 객관적 상관물(현상)을 찾기+관찰과 조사 정밀하게 하기
이 시에서 객관적 상관물은 꽃이다. 그런데 꽃은 누나의 이미지를 뒤집어쓴 기표에 불과하다. 꽃이 하는 행위는 식물적인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동물적인 행위에 가깝다. “온종일 축축한 웃음이 비릿한 생각을 타고 올라”라는 모습이나 기침을 하는 모습도 그렇고, 꽃을 껴안는 것을 불순하다거나 비도덕적인 행위로 보는 것 자체가 그렇다. 거기에 꽃이 한 말이 삭제된 정황과 맨살이 썩어 들어가는 이미지 또한 동물성을 띤 꽃의 속성을 포현한 것이다. 그렇게 이 시를 쓰기 위해 메모된 것은 꽃의 속성보다는 연애적 상황에서 드러날 수 있는 심리적인 성향이나 동물적 요소들이다.
3단계 - 확장하기 – 상상적 체험을 섬세하게 극적으로 하기
이 시에서 극대화시킨 상상적 체험은 앞집 누나와 ‘나’가 속물적인 듯, 속물적이지 않은 듯한 연애의 감정을 거리낌 없이 나누게 만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암시적으로만 표현했다. 적극적인 연애의 감정을 갖는 것이 아니라 암시성을 띤 채 둘만의 사적인 행위와 마음을 만나게 했다. “누나의 몸 안으로 스며들어 간 곪아 터진 상상들을 쭉쭉 빨아 삼키고 싶다”라는 구절이 바로 그러한 심리를 반영한 표현이다. 거기에 “하릴없이 썩어 들어갈 벌겋게 독이 오른 맨살”과 “꽃을 껴안는 불순한 밤”을 ‘나’가 안고 살아가게 만들었다. ‘나’만의 사적인 상처를 극명하게 부각하기 위해 그런 표현들을 쓴 것이다.
상상을 할 때 뻔한 지점과 뻔하지 않은 지점의 구분을 나름대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자연스러운 상상’의 범주 안에 들어갈 수 있도록 사실성과 비사실성이 교묘하게 교차하게 만드는 연습을 꾸준히 해야 한다.
* 또 다른 예문
노을의 방식 / 이병철
노을을 펼치기 위해 구름 뒤편에선 투전판이 벌어진다 그 거룩한 링에는 미움이 없다 핏방울은 사랑스럽게 튀어오르고 꽃 같은 싸움, 물감으로 흉내 낼 수 없는 붉음 태양을 찢은 건 구름이 숨긴 이빨이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역광을 날아가는 새들이 실은 하늘의 상처를 꿰맨 자국이라니 싸움개의 전생은 수상좌대에 낚시를 펴고 물고기나 낚아 올리던 한량인지 모른다 철창 세운 겨울나무들에 갇혀 피 흘리는 건 전생에 대한 형벌, 송곳니 박힌 곳에서 노을은 태어나고 한 생애가 맹랑하게 덤벼들었다가 피 쏟고 축 늘어질 때, 울지 마라 싸움에서 진 개들이 시커먼 어둠으로 우러나더라도 그대와 나는 철창 안에 마주 선 두 마리 개였을까 내 더러움 속에 깃든 한때의 촛불에 그대 언 손 따뜻했었나 나는 그대 어깨에 날개 문신 새겨준 것 후회하지 않는다 그대가 낯선 몸을 열어 둥근 이마를 빛내고 검붉은 얼룩으로 앞강 적실 때. 그대가 서 있는 곳의 노을을 나에게 방류해주길 나는 투견처럼 상처입고 단단하므로 노을은 내 세계를 에워싸는 어제의 명암이므로 - 《시와 표현》 2018년 1월호
섬을 마주하는 어떤 방식 / 김밝은
신들도 떠나지 못하고 있을 것 같은 무성한 팽나무 아래 술동이를 가득 품고 있는, 접신한 무녀들의 춤으로 흠씬 달아오르는
그곳에 가면 슬프지 않을 거라는 착각 돌아서는 순간 어쩌면 아름다울 거라는 오해는 모래가 파도의 몸에 어떻게 스며드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뜨거운 웃음들이 아득하게 느껴질 때 온통 맨몸인 개펄을 만나보려면
입 밖으로 내보내고 싶은 말들은 데려가지 말 것
이른 아침, 새들의 발자국을 따라 바다로 가려거든 검은머리물떼새의 몸집이 왜 그렇게 불어나 있는지도 묻지 말 것
그런 후에야 밤새 술잔을 앞에 놓고도 기어이 취하지 않은 채 가부좌하고 앉은 얼굴과 마주해볼 일이다 - 《시인광장》 2016년 3월호
- 출처 : 『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더푸른, 2021.09)
* 하린 시인 1971년 전남 영광 출생.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박사. 1998년 〈광주매일〉신춘문예 시 당선, 2008년 《시인세계》 등단. 시집 『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 『서민생존헌장』 『1초 동안의 긴 고백』. 연구서 『정진규 산문시 연구』 시 창작 안내서 『시클』 시 창작 제안서 『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이것만 알면 당신도 현대 시조를 쓸 수 있다』 청마문학상(2011), 송수권시문학상(2015), 한국해양문학상(2016),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2020) 수상. 현재 중앙대 문화예술대학원 전문가과정 시 창작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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