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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 나눔과 착취 사이에서>
피터 브뤼헐 2세, 십일조 납부
아래 사진: 피터 브뤼헐 2세, '십일조 납부'(또는 변호사 사무실), 1615-1622년경, 목판에 유채.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공용
- 우연한 발견
2023년 봄, 프랑스 북부의 한 가정집에서 깜짝 놀랄 일이 일어났습니다. 오랫동안 TV가 놓인 작은 방 문 뒤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방치되어 있던 그림 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 가족은 수십 년간 이 그림을 농담 삼아 '브뤼헐이 우리 집에 그려 준 그림'이라 불렀지만, 정작 가짜라고 믿어 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경매사 말로 드 뤼삭(Malo de Lussac)이 이 집에 방문했다가 문에 가려진 이 그림을 발견했습니다. 문을 닫고 전체를 살펴본 순간, 경매사는 예사롭지 않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가족들에게 진품일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가족들은 반신반의하며 이 그림을 독일의 브뤼헐 전문가에게 보냈습니다. 그해 12월, 감정 결과가 도착했습니다. 진품이었습니다. 전문가들은 이 작품이 1615~1617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2023년 3월, 파리의 드루오(Drouot) 경매장에서 이 그림은 78만 유로, 약 84만 5000달러(한화 약 11억 원)에 낙찰되었습니다. '십일조 납부', 또는 '변호사 사무실', 아니면 '세금 징수원'이라는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이 작품이 400년 동안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가 빛을 보는 순간이었습니다.
플랑드르 화가 피터 브뤼헐 2세(Pieter Brueghel the Younger)의 이 작품은 단순히 당시 풍경을 담아 놓은 작품이 아닙니다. 그 안에는 16세기 유럽을 뒤흔든 종교개혁, 스페인의 압제, 소빙하기의 참혹함, 그리고 그 모든 시대적 무게를 짊어진 농민들의 고단한 삶의 이야기가 응축되어 있습니다.
- 달걀과 닭을 든 사람들
그림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혼란스러울 정도로 빽빽한 인물들입니다. 좁은 사무실 안에 농민들이 줄지어 서 있고, 책상 위에는 서류 더미가 산처럼 쌓여 있습니다. 천장에서 매달린 자루들, 벽에 걸린 문서 뭉치들이 공간 전체를 압도합니다. 이 그림의 제목이 '십일조 납부'이든 '세금 징수원의 사무실'이든 '동네 변호사'이든 다양하게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17세기 당시에도 이 장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해석이 분분했기 때문입니다.
오른쪽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검토하는 인물을 주목해 볼까요. 그는 검정 변호사 모자를 쓰고 차분하게 기록을 살피는 중입니다. 책상 위에 놓인 모래시계는 시간의 흐름, 혹은 시간당 비용을 청구하는 관행을 암시합니다. 권력자의 시간은 돈이지만, 농민의 시간은 기다림입니다.
농민들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들고 이 비좁은 공간으로 들어섭니다. 어떤 여인은 달걀 바구니를 들고 허리를 숙이고, 어떤 이는 팔뚝에 닭을 거꾸로 매단 채 순서를 기다리고 서 있습니다. 포도송이, 채소 다발, 곡물 자루 같은 것들이 보입니다. 이것들은 현금이 없는 사람들이 세금이나 수수료 대신 바치는 현물입니다. 당시 십일조라면 현금 아니면 곡물로 냈어야 하겠지만, 이들이 가져온 것은 거래의 수단으로 환치되지 않은, 생존에 필요한 날것 그대로입니다. 변호사의 법률 서비스든, 세무 관리의 처리든, 또는 교회의 십일조든, 결과는 같습니다. 가난한 자의 식탁에서 한 접시씩 걷어 가는 모습이 여기 적나라하게 보입니다.
그림 왼쪽을 볼까요. 문가에 빨간 외투를 입은 남자가 서 있습니다. 지팡이에 기대어 순서를 기다리는 그의 표정에는 두려움이 가득하고, 문을 살짝 열고 반쯤 들어와 상황을 살피는 사람의 모습에선 들어가야 할지 돌아서야 할지 망설이는 눈빛이 읽힙니다. 그의 눈앞에는 이미 사무실 안에서 벌어지는 광경이 펼쳐집니다. 서류에 파묻혀 무엇인가를 받아 적는 서기, 몸을 숙여 물건을 건네는 농민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온기 하나 없이 서류를 살피는 검은 옷의 관리의 모습입니다.
브뤼헐은 이 장면을 극적으로 연출하기 위해 공간을 좁게 설정했습니다. 천장은 낮고, 벽은 문서와 자루로 뒤덮여 있으며,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조차 제한적입니다. 농민들은 문자 그대로 숨 막히는 공간에 갇혀 있습니다. 갈색, 황토색, 회색이 지배하는 색조는 땅과 노동의 색이고, 눈에 띄는 검정색은 관리자나 권력에 가까운 인물들에게 배분되어 있습니다.
특히 바닥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종이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자루와 바구니가 어지럽게 놓여 있습니다. 이 혼란은 단순한 배경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관료제가 만들어 내는 끝없는 서류, 농민들이 감당해야 하는 복잡한 절차, 권력이 문서를 통해 행사되는 방식을 시각적으로 보여 줍니다. 이 그림을 보면서 숨 막혔던 이유가 바로 이 장면입니다. 독일에서 유학할 때, 일상적이지 않은 독일어 공문 서류나 보험사에서 날아오는 서류 꾸러미들이 편지함에 놓인 것만 봐도 가슴이 턱턱 막히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림에서 글을 읽지 못하는 농민에게 이 종이 더미는 두려움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 수탈의 시대
이 그림이 제작된 1615년에서 1622년 사이, 네덜란드와 플랑드르 지역은 80년 전쟁의 한복판에 있었습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스페인이 저지대 국가들을 지배하면서 가혹한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특히 1567년 네덜란드에 부임한 알바 공작은 악명 높은 '열 번째 페니(Tenth Penny)'를 도입했습니다. 모든 거래에서 소득의 10%를 징수하는 이 세금은 상업으로 번성하던 플랑드르 경제를 질식시켰습니다. 농민과 상인 모두에게 이 세금은 사실상 또 하나의 '십일조'나 다름없었습니다. 교회에 십일조를 바치고, 영주에게 지대를 내고, 거기에 스페인 왕실에 '열 번째 페니'까지, 삼중의 수탈이 농민들의 삶을 짓눌렀습니다. 이 가혹한 과세는 결국 민중의 분노를 일으켜 네덜란드 독립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동시에 소빙하기(Little Ice Age)가 유럽을 얼어붙게 했습니다. 1560년대부터 기온이 급격히 내려가기 시작해 1590년대에는 알프스 빙하가 마을을 집어삼킬 정도로 확장되었습니다. 강이 얼고, 항구가 막히고, 곡물이 자라지 못했습니다. 브뤼헐 2세의 그림에 등장하는 농민들의 얼굴이 유독 야위고 초라해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아버지 브뤼헐 1세의 농민들이 풍요로운 축제와 결혼식에서 흥겹게 춤추던 것과 비교하면, 아들의 그림 속 인물들은 생존의 경계선에 서 있습니다.
피터 브뤼헐 2세는 '농민 브뤼헐'이라 불린 피터 브뤼헐 1세의 장남입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겨우 다섯 살이었고, 어머니마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외할머니 마이켄 페르훌스트 밑에서 자랐습니다. 마이켄은 당대의 저명한 세밀화가였고, 어린 피터와 동생 얀에게 그림의 기초를 가르쳤습니다.
동생 얀 브뤼헐은 화려한 정물화와 풍경화로 명성을 떨쳤지만, 형 피터는 아버지의 작품을 복제하는 화가로 알려지며 오랫동안 '창조적 모방가'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습니다. 실제로 그의 공방에서는 아버지의 명작들을 수없이 복제해 판매했고, 이것이 그의 주된 수입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 '십일조 납부'는 전혀 다른 평가를 받습니다. 이 작품은 아버지의 어떤 원작에서도 유래하지 않은, 피터 2세 자신의 고유한 창작입니다. 아버지의 화풍을 충실히 계승하면서도 당시 유행하던 네덜란드 판화에서 영감을 받아 독자적인 구도와 주제를 발전시켰습니다. 미술사학자 클라우스 에르츠에 따르면 이 구도로 서명이 있는 작품만 19점이 확인되고, 공방 제작품과 복제품까지 합하면 60여 점에 달합니다. 당대에 이 주제가 얼마나 인기 있었는지를 보여 주는 증거입니다. 아버지의 그늘에 가려 있던 화가가 자신만의 목소리로 시대의 고통을 화폭에 담아낸 '십일조 납부'는 피터 브뤼헐 2세의 가장 독창적이고 성공적인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 십일조의 변질
브뤼헐의 이 그림은 성경의 어떤 구절을 직접 묘사하지 않지만, 성경적 주제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십일조는 본래 구약성경에 뿌리를 둔 제도로, 레위기와 민수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수확물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도록 명령받은 데서 유래합니다. 이 헌납은 레위인과 성전의 유지를 위한 것이었고, 가난한 이웃을 돌보는 사회적 기능도 담당했습니다.
그러나 중세를 거치면서 십일조는 변질되었습니다. 585년 마콩 공의회는 십일조를 의무화했고, 779년 카롤루스 대제는 이를 강제적 세금으로 전환했습니다. 교회는 부유해졌지만, 농민들의 부담은 가중되었습니다. 고위 성직자들은 귀족과 다름없는 삶을 살았고, 하급 성직자들은 농민 출신으로 여전히 가난에 허덕였습니다. 십일조가 원래 의도했던 공동체적 돌봄의 정신은 점차 사라졌습니다.
1517년 마르틴 루터가 사면증에 관한 95개 조항을 내걸고 종교개혁의 역사를 주도했지만, 그는 면죄부의 폐해를 비판하면서도 십일조 자체를 폐지하자는 주장은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농민들이 십일조를 회피하는 것을 말라기서 3장을 인용해 비난했습니다. 물론, 루터가 십일조를 고수했던 이유는 십일조에 담긴 가난한 자를 위한 나눔의 정신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루터의 눈에 십일조는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농민들에게 이런 해석은 무의미했습니다. 교회에 바치든, 영주에게 바치든, 세무관에게 바치든, 그들의 식탁은 똑같이 비어 갔습니다.
그렇다면 이 그림은 종교를 비판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사회를 비판하는 것일까요? 브뤼헐은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의 그림에는 정치적 구호도, 도덕적 교훈도 직접 새겨져 있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일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 줍니다. 달걀 바구니를 든 여인의 굽은 허리, 닭을 들고 기다리는 남자의 무표정한 얼굴, 서류 더미 사이에서 펜을 움직이는 서기의 기계적인 손놀림을 보여 줍니다. 이것이 바로 삶이라고, 이것이 바로 현실이라고 말합니다.
플랑드르 회화의 전통에서는 일상의 풍속을 그리는 것 자체가 급진적 행위였습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신화와 종교, 권력자의 초상에 집중하던 시절, 브뤼헐 가문은 농민들의 결혼식과 수확 축제, 아이들의 놀이를 캔버스에 담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보이게 만드는 것, 역사에서 기록되지 않는 이들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 이것이 브뤼헐 가문 예술의 핵심이었습니다.
이 그림이 오늘 우리에게 묻습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400년 전 플랑드르 농민들과 무엇이 다를까요. 종이 서류는 전자 문서가 되었고, 모래시계는 디지털이 되었지만, 복잡한 절차 앞에서 당혹해하는 시민의 모습은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세금을 내고, 증명서를 발급받고, 서류를 제출하는 일상의 관료제가 여전히 우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브뤼헐의 농민들은 자신이 왜 이 돈을 내야 하는지, 이 절차가 왜 필요한지 설명을 듣지 못한 채 줄을 섭니다. 그들에게 권력은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쓰인 문서 속에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 언어를 읽을 수 있습니까? 우리의 세금이 어디로 가는지, 우리의 권리가 무엇인지, 우리는 정말 알고 있습니까?
그림 속 농민들의 손에 들린 것들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달걀, 닭, 포도, 야채. 이것들은 땅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스스로 키우고 가꾼 것들입니다. 땀과 시간의 결정체이며,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을 자신의 식탁 위에 올리기 전에 먼저 누군가에게 건네야 합니다. 성경의 십일조가 본래 의도했던 것은 공동체의 취약한 구성원을 돌보기 위한 나눔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나눔이 아니라 추출이고 쥐어 짬입니다.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빨려 올라갑니다.
예수께서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그림 속 농민들에게 그 구분은 무엇을 의미했을까요? 그들이 가진 것이 너무 적어서, 가이사에게 바치고, 또 하나님께도 드린 후에 자신에게 남는 것이 없다면 어땠을까요?
이 그림 앞에서 몇 글자 질문을 적어 봅니다. 나는 오늘 무엇을 바치며 살아갑니까? 내가 바치는 것은 자발적인 헌신입니까, 아니면 피할 수 없는 의무입니까? 내가 받는 것들은 누군가의 수고와 헌신 위에 세워진 것은 아닙니까?
브뤼헐은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는 다만 보여 줄 뿐입니다. 그리고 보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아래 사진: 최주훈 / 중앙루터교회 목사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