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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시경종(愼始敬終)
처음을 삼가고 마지막을 경건히 하라는 뜻으로, 항상 어떤 일을 시작할 땐 신중하게 하고 끝맺음을 잘하라는 의미의 말이다.
愼 : 삼갈 신(忄/10)
始 : 처음 시(女/5)
敬 : 공경할 경(攵/9)
終 : 마칠 종(糸/5)
개인이나 단체나 국가나 간에 같은 사람이 같은 일을 하는데, 처음에는 잘 되는데 끝에 가서는 잘 안 돼 망하는 경우가 많다. 왜 그럴까?
처음에는 희망을 갖고서 정신을 바짝 차려 부지런히 성실하게 일을 한다. 얼마 지나면 자만하다가 좀 더 지나면 나태해지고, 그것이 습성이 되면 고칠 수 없게 돼 결국 망한다. 역대 여러 왕조가 그렇고 기업이 그렇고 개인이 그렇다.
국가의 착취에 반기를 들고 일어났던 명(明)나라 말기의 이자성(李自成)이나 청(淸)나라 말기 태평천국(太平天國)의 홍수전(洪秀全) 등 역대 농민 봉기의 지도자들도 권력의 맛을 어느 정도 보면, 타도 대상으로 삼았던 통치집단의 타락한 행위를 그대로 닮아갔다가 망했다.
작금의 정권과 그 집단들도 군사정권에 저항했던 사람들인데, 군사정권보다 훨씬 더 부패했고, 원칙도 없고, 거짓말을 마음대로 했다.
오늘날 초대 대통령부터 지금 대통령까지의 취임사를 다 볼 수 있다. 모두가 국가를 위해 최선을 다해서 일하겠다는 희망과 열정으로 가득 차 있다. 그 가운데서도 지금의 취임사가 가장 아름다운 문장으로 돼 있다. 취임사대로 다 실천한 대통령은 없지만, 실천율이 가장 낮은 대통령이 지금의 대통령이다.
지금 윤석열 당선자가 대통령에 당선된 데는 지금 대통령의 거짓말이 큰 역할을 했다. 그를 검찰총장으로 특별 발탁하면서 '살아 있는 권력에도 칼을 들어대라'고 했다.
그 말은 거짓말인데, 윤당선자가 참말인 줄 알고 칼을 겨누니까, 대통령은 그를 쫓아내려고 온갖 부당한 방법으로 괴롭혔다. 그런 과정에서 국민들의 지지를 크게 받은 윤 당선자가 1년 만에 반대당의 후보가 돼 마침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지금 당선자 곁에는 많은 사람들이 한 자리 하겠다고 몰려들 것이다. 대통령이 되면 5000여 자리에 사람을 임명한다고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을 잘 쓰는 것이다.
사람을 잘 쓰려면 사람을 잘 알아보아야 한다. 또 처음 먹은 마음을 끝까지 밀고 가야 한다. 마음이 풀어지거나 게을러지면 곧 바로 문제가 생긴다.
지금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문제가 많다. 국론은 분열돼 있고 야당이 될 민주당은 국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국민의 힘은 110석 남짓한 의석뿐인데도 시장 도지사로 나가겠다는 의원이 한둘이 아니다.
북한은 자주 핵무기를 발사하고 있다. 미국 중국 일본 등과의 외교관계는 망가져 있다. 국제적으로 원유 값 폭등, 원자재값 상승, 환율 상승 등등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많다. 또 코로나는 극성을 부리고 있다. 아무튼 무능한 정권이 무너뜨린 헌정질서와 도덕성을 회복하고 경제도 일으켜야 하니 그 책임이 막중하다.
처음도 잘 해야 하겠지만 마지막까지 잘 해서 성공한 대통령이 되길 바란다. 대통령이 모든 것을 다 알아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공정한 기준으로 판단해서 최선을 다해서 처리해 나가면 된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처음을 삼가고 마지막을 경건히 하면, 끝내 곤란하지 않을 것이다(愼始而敬終, 終以不困)"는 구절이 있다.
■ 신시경종(愼始敬終)
신시경종(愼始敬終)은 이미 '춘추좌씨전'에서부터 등장한다. 임금의 마음가짐은 시작함을 신중하게 하고 끝마침을 삼가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야 마침내 곤경을 겪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다.
당나라 명신 위징(魏徵)이 당 태종에게 올린 글에서도 "처음에 시작을 잘하는 사람은 많지만 능히 끝을 잘 마치는 자는 거의 없습니다"라며 "나태하고 게을러질까 두려울 때는 반드시 일의 시작을 신중히 하고 일의 끝을 잘 삼가야 한다는 것을 떠올려야 합니다"라고 했다.
우리 역사에서는 한명회가 세상을 떠나며 전 사위이기도 했던 성종에게 유언처럼 당부한 말이 바로 '신시경종(愼始敬終)'이다. 이때 조심하라는 것은 다름 아닌 간신배들의 아첨이다. 군주가 조금만 마음을 게을리하면 곧바로 이런 아첨에 넘어가기 때문이다.
얼마전 윤석열 당선인이 집무실에 처음 출근했을 때 일이다. 여러 사람들이 인사말을 하는 가운데 원희룡 기획위원장이 "당선인의 뜻을 저희들이 잘 담아서 운운(云云)"이라고 하자 곧바로 윤 당선인은 "당선인의 뜻이 아니라 우리가 국민의 뜻을 잘 받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했다. 이것이 바로 신시(愼始)의 한 사례다.
문제는 이 마음을 끝까지 가져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이승만, 박정희 전(前) 대통령도 바로 경종(敬終)하지 않아 위대한 업적에 스스로 오점을 남겼다.
신시경종(愼始敬終)의 성패(成敗)는 고스란히 인사(人事)에 달려 있다. 수천년 전 은나라를 세운 탕왕이 한 말이 '논어' 말미에 실려 있다. "죄지은 자를 감히 내 마음대로 용서하지 못하며 상제의 신하(帝臣)를 제가 감히 숨길 수 없으니 인물을 간택하는 것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상제의 마음(帝心)에 있는 것입니다. (...)"
조선의 태종은 즉위 첫해인 1401년 윤3월 11일 정전(正殿)을 고쳐 짓고서 더불어 궁궐의 북쪽에 정자 하나를 지은 다음 총애하는 신하이자 학식이 뛰어난 하륜(河崙)과 권근(權近)에게 궁궐과 이름을 짓게 했다. 이에 두 사람은 청화(淸和), 요산(樂山), 무일(無逸) 세 가지를 후보로 올렸다.
청화(淸和)는 맑고 온화한 정치를 해달라는 기대를 담은 것이다.
요산(樂山)은 논어(論語)에 나오는 말로 인자(仁者)는 산을 좋아하고 지자(知者)는 물을 좋아한다고 한 데서 온 것으로 태종에게 어진 정치를 펼쳐달라는 소망을 드러낸 것이다.
무일(無逸)은 서경(書經)에서 따온 것으로 안일함이나 게으름에 젖어서는 안 된다는 경계의 의미를 담고 있다. 여기서 게으름이란 몸의 게으름뿐만 아니라 마음의 게으름도 함께 포함한다.
태종은 그 중에서 무일(無逸)을 골라 정전의 이름으로 삼았다. 정전이란 경복궁으로 치면 근정전(勤政殿)에 해당하는 가장 중요한 건물이다. 이어 청화(淸和)를 골라 정자의 이름으로 삼았다. 그래서 태종은 무일전(無逸殿)에서 주요 정사를 다루었다.
원래 무일(無逸)은 주나라 때 주공(周公)이 섭정을 하다가 마치고 나서 조카인 성왕(成王)에게 전권을 넘겨주면서 경계해야 할 딱 한 마디로 "게을러서는 안 된다"는 뜻을 담아 쓴 글의 제목이다.
그런데 군주가 게으르다는 것은 과연 무슨 뜻일까? 백성들의 삶이 얼마나 힘든지를 진실로 안다면 군주는 게으를 수가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주공은 "군주는 늘 무일(無逸)을 마음 한 가운데 오랫동안 두어야 합니다"고 했던 것이다.
여기서 무일(無逸) 못지않게 중요한 말이 '오랫동안'이다. 잠깐 하다가 말면 무일(無逸)한다고 할 수가 없다. 그런 마음으로 시종일관할 때라야 제대로 된 군주가 될 수 있다.
바로 이런 점에서 당나라 때 명신(名臣) 위징(魏徵)이 당 태종에게 올린 '간태종십사소(諫太宗十思疏)'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태종에게 열 가지 반드시 명심해야 할 내용을 간언하는 상소라는 뜻이다.
그 중에 무일(無逸)과 관련된 부분이 흥미롭고 상세하다. "처음에 시작을 잘하는 사람은 많지만 능히 끝을 잘 마치는 자는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나태하고 게을러질까 두려울 때는 반드시 일의 시작을 신중히 하고 일의 끝을 잘 삼가야 한다(愼始而敬終)는 것을 떠올려야 합니다."
사람이 하는 일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시경종(愼始敬終)은 작은 조직이건 큰 조직이건 사람을 부리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되는 경구라 할 수 있다.
다시 조선 초로 돌아가자. 적어도 정치력만 놓고 보면 태종이 세종보다 몇 수 위다. 태종은 신시경종(愼始敬終)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는 군주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양녕을 세자에서 내쫓고 충녕대군을 세자로 삼은 다음 자신은 상왕으로 물러나 어린 세종이 임금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4년 동안 돌보아 준 일이다. 세종의 경우에 이 ‘인턴 임금 4년’이 없었더라면 그 후 그렇게 많은 업적을 남길 수 있었을지 미지수다.
반면 세종은 신시(愼始)했는지는 몰라도 경종(敬終)했다고는 할 수 없다. 후계구도를 제대로 정리하지 않고 수양과 안평 두 대군으로 하여금 어려서부터 정치에 관련된 심부름을 하도록 해 정치 관여의 길을 열어주었다.
양녕이 세자이던 시절 효령이나 충녕이 정치와 관련된 책을 보면 그 자리에서 빼앗았던 태종과는 확연한 대조를 이룬다. 결국 세종 사후에 친형제들 간에 살육전이 벌어진 것도 실은 세종 탓이라 할 수 있다.
신시(愼始)했는지도 의심스럽지만 명확하게 경종(敬終)에 실패한 대통령을 보아야 했던 우리 국민으로서는 이제 신시경종(愼始敬終)하는 대통령을 꼭 좀 보았으면 한다.
매사에 항상 어떤 일을 시작할 땐 신중하게 하고 끝맺음을 잘하라는 뜻이다. 항상 되 뇌이고 다짐도 하지만 실행은 잘 못하고 있다. 우리는 다른 끝맺음도 중요하지만 인생의 최종 마무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사전연명 의료 의향서 제도는 2018년 2월부터 시행되었다. 누구나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가 되었을 때를 대비하여 자신의 연명의료 및 호스피스에 관한 의사를 직접 문서로 밝혀두는 제도다. 삶의 마무리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의식과 능력이 있을 때 명확히 해두기 위해서다.
사람은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우리는 예나 지금이나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을 꺼려왔다.
공자(孔子)의 말씀중에 '미지생언지사(未知生焉知死)'의 영향인 것 같다. 공자는 제자 자로가 죽음에 대해 묻자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에 대해 알 수 있겠느냐(未知生焉知死)"라고 외쳤다. 죽음보다 삶이 중요한 것이니 죽음 후의 세계, 특히 제사 등으로 대표되는 미신에 집착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산 사람도 제대로 섬기지 못하면서 귀신 섬길 생각을 하지 말라는 공자의 준엄한 꾸짖음이었다.
하지만 우리 선조들이 가장 누리고 싶어 한 오복 중의 한자리를 차지할 만큼 죽음을 중요시했다. 죽을 때 인간의 존엄을 지키며 가족들에게 크게 폐 끼치지 않고 편안하게 죽기를 바란다.
이제는 죽음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준비해야 한다. 준비되지 않은 죽음은 개인적으로 불행이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부담을 준다.
요즘은 많이 바뀌었지만 죽음이 임박했는데도 의사나 가족들이 당사자에게 애써 숨겨왔다. 정작 제일 먼저 알고 준비해야 할 당사자만 모르고 있었다.
소생 가능성이 전혀 없는데 의료기기에 의해 무의미한 연명치료는 의료기관의 돈벌이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당사자나 가족 모두에게 고통만 안겨 줄 뿐이다. 삶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참 걱정이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단순히 생명의 소멸만은 아니다. 그간 살아오면서 맺은 인간관계와 정신적 물질적 유산까지 깔끔하게 정리하는 것이다.
어떤 친구는 필요 없는 물건은 미리미리 스스로 정리하고 유산은 유서를 남겨 분명하게 해 놓은 것이 좋을 것 같다는 말을 하지만 정답은 없다.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이라면 유서가 필요하겠지만 미리 죽음을 준비하고 저승사자가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은 유서가 필요 없다. 죽음을 앞둔 나이가 되면 그간 못 이룬 꿈이 있어도 접고 살아야 한다.
돈이나 재산 명예에 대한 욕심을 버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 남지 않은 여생 욕심을 버리고 맑고 밝은 마음으로 베풀면서 살면 아름다운 죽음으로 인생이 마무리될 게 아닌가
정관정요(貞觀政要)
제4편 논구간(論求諫)
(간언을 구하는 것을 논하다)
貞觀十五年에 太宗問魏徵曰
정관(貞觀) 15년(641)에 태종(太宗)이 위징(魏徵)에게 물었다.
比來에 朝臣都不論事하니 何也오
근래 조정 신하들이 도무지 정사에 대해 논하지 않으니 무엇 때문이오?
徵對曰
위징이 대답했다.
陛下虛心採納하시면 誠宜有言者리이다
폐하께서 마음을 비우고 받아 들이신다면 진실로 말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然古人云 未信而諫이면 則以爲謗己요 信而不諫이면 則謂之尸祿이니이다
하지만 옛사람이 말하기를, '믿음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 간언하면 자신을 비방한다고 여기고, 믿음을 얻고서도 간언하지 않으면 시록(尸祿)이라 한다'고 하였습니다.
但人之才器가 各有不同하여 懦弱之人은 懷忠直而不能言하고 疎遠之人은 恐不信而不得言하고 懷祿之人은 慮不便身而不敢言이라
그런데 사람의 재능과 기국(器局)이 각기 달라, 나약한 사람은 가슴에 충직한 생각을 갖고 있어도 말로 드러내지 못하고, 소원한 사람은 믿어주지 않을까 우려하여 말을 하지 못하며, 녹봉만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불편함이 생길까 염려하여 감히 말하지 못합니다.
所以相與緘黙하여 俛仰過日이니이다
그러므로 서로가 침묵하며 적당히 날짜만 보내는 것입니다.
太宗曰
태종이 말하였다.
誠如卿言이로다
정말 경의 말대로요.
朕每思之하니 人臣欲諫할새 輒懼死亡之禍가 與夫赴鼎鑊冒白刃으로 亦何異哉리오
짐이 매번 생각해보니, 신하가 간언하려 할 때 이내 죽음의 재앙을 두려워하는 것이 끓는 솥으로 들어가고 서릿발 칼날을 무릅쓰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소.
故忠貞之臣은 非不欲竭誠이나 竭誠者乃是極難이니 所以禹拜昌言이 豈不爲此也리오
그래서 충직하고 올곧은 신하가 정성을 다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정성을 다하기가 바로 매우 어려운 것이니, 禹임금이 훌륭한 말에 절을 한 것이 어찌 이러한 이유 때문이 아니겠소.
朕이 今開懷抱納諫諍하리니 卿等은 無勞怖懼하여 遂不極言하라
짐이 이제부터 마음을 열고 간언을 받아들일 터이니 경들은 두려움에 떨어 할 말을 다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集論)
朱氏黼曰
주보(朱黼)가 말하였다.
言路通塞은 關君德之盛衰니 人主가 因言者之多寡하여 固可自察其身之得失也라
언로가 소통하느냐 막히느냐는 임금이 지닌 덕의 성쇠와 관계되니, 임금은 참으로 간언하는 자가 많으냐 적으냐에 따라 스스로 자신의 잘잘못을 살필 수 있다.
諫者多는 必吾之能聽이요 諫者直은 必吾之能容이요 犯顔而不憚은 必吾無拒人之色이요 苦口而無隱은 必吾無好佞之心이라
간언하는 자가 많은 것은 반드시 내가 잘 듣기 때문이고, 간언하는 자가 올곧은 것은 반드시 내가 잘 수용하기 때문이며, 면전에서 대들어 거리낌 없는 것은 반드시 내가 남을 거부하는 안색이 없기 때문이고, 숨김없이 쓴소리를 하는 것은 반드시 내가 말재주 부리는 자를 좋아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一或反是면 則是吾德之不進이요 吾心之不大며 吾之好佞而惡直이요 樂諛而畏忠也라
조금이라도 이와 상반된다면 이는 나의 덕이 발전하지 못하고 나의 마음이 크지 못하며, 내가 말재주 부리는 자를 좋아하고 올곧은 자를 싫어하며, 아첨하는 자를 좋아하고 충성하는 자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太宗即位之初에 虛心訪納이라 故論諫者가 步隨袂接하여 表疏之進이 笥溢几盈하여 一日萬機라
太宗이 즉위한 초기에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였으므로 간언하는 자들이 발걸음이 따라오고 소매가 연이어져서 表와 疏가 올라와 상자에 넘치고 책상에 가득하여 하루에도 수많은 일을 검토했다.
在今猶昔이로되 而論事之誠이 頓爾銷減하니 帝而內省하면 當必有以致此者라
지금도 이전과 다름없는데, 일을 논하는 정성이 갑자기 줄어들었으니, 태종이 마음으로 성찰한다면 반드시 이를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始導諫하고 中悅從하고 終勉强을 徵屢論矣라
처음에는 간언을 유도하고 중간에는 이를 기쁘게 따르고 마지막에는 힘써 노력할 것을 魏徵이 누차 논했다.
今猶此問에 徵以愛身畏罪爲告는 蓋欲使帝自悟耳어늘 帝以赴鼎冒刃으로 爲開說之比하고 終不能深自克責하여 復爲敷求也라
지금 이러한 물음에 대해 위징이 자신을 아끼고 죄를 두려워한다고 고한 것은 태종이 스스로 깨우치기를 바란 것인데, 태종은 끓는 솥으로 들어가고 칼날을 무릅쓰는 것으로 설명의 비유만 들었을 뿐 끝내 깊이 자신을 꾸짖어 더 널리 구하지 못하였다.
愚按 貞觀十五年에 魏徵謂陛下欲善之志가 不及於昔時하고 聞過必改가 少虧於曩日이라 하고
내가 살펴보건대, 정관(貞觀) 15년에 위징(魏徵)이 "폐하께서 잘하고 싶은 의지가 지난날에 미치지 못하고, 잘못을 들으면 반드시 고치는 것이 지난날보다 조금 부족합니다"라 하였고,
十三年에 又謂陛下志業이 比貞觀初하여 漸不克終者가 凡十事라하니 則君德亦少貶矣나
정관 13년(639)에 또 "폐하의 의지와 사업이 정관 초기에 견주어 점차 마무리를 잘하지 못한 것이 모두 열 가지입니다" 라고 하였으니, 임금의 덕이 조금은 손상된 것이다.
尙幸勉强欲善之意하여 猶能自克이라 故能開導聽納이라
그래도 다행히 잘하고 싶은 생각을 힘써 발휘하여 스스로 극복했으므로 신하들이 간언하도록 유도하고 자신은 그들의 간언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至謂群臣近來都不論事하니 則又在魏徵이 儆戒不克終之後에 得無或如徵之言乎아
그런데 "뭇 신하들이 근래 도무지 일을 논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데 이르렀으니, 위징이 마무리를 잘하지 못한다고 경계한 뒤에 혹여 위징의 말처럼 된 것이 아니겠는가.
後之人君은 所宜愼始而敬終也라
후대의 임금은 의당 처음을 신중히 하고 마무리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魯襄公 四 二十五年, 癸丑 B.C. 548
(...)
君子之行은 思其終也오 思其復也니라
군자의 행동은 그 결과를 생각하고 그 일을 다시 행할 수 있기를 생각한다.
書曰 愼始而敬終이면 終以不困이라 하고 詩曰 夙夜匪解하야 以事一人이라 하야늘 今寗子視君不如奕棋하니 其何以免乎리오
서경(書經)에 "시작할 때 신중을 기하고 종결(終結)할 때 공경(恭敬)해 처리한다면 그 일의 결말이 곤란해지지 않는다"고 하였고, 시경(詩經)에 "조석(朝夕; 숙야/夙夜)으로 게을리 하지 않고 한 사람(임금)을 섬긴다"고 하였는데, 지금 영자(寗子)는 임금 보기를 바둑 두는 것만치도 여기지 않았으니 그가 어찌 화난(禍難)을 면할 수 있겠는가?
奕者도 擧棋不定이면 不勝其耦어늘 而況置君而弗定乎아
바둑을 두는 사람도 바둑돌을 놓기 전에 놓을 곳을 미리 정(定)하지 않으면 상대를 이길 수 없는데, 하물며 임금을 세우면서 미리 결정하지 못한 데이겠는가?
必不免矣리라
반드시 화난(禍難)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九世之卿族이 一擧而滅之하니 可哀也哉注저
9대(九代)를 이어 온 경족(卿族)이 일거(一擧)에 멸망하게 되었으니 슬프도다고 하였다.
▶️ 愼(삼갈 신, 땅 이름 진)은 ❶형성문자로 慎(신)의 본자(本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심방변(忄=心; 마음, 심장)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同時)에 세밀하다는 뜻을 가진 眞(진)으로 이루어졌다. 마음을 세밀히 쓴다는 뜻이다. ❷회의문자로 愼자는 '삼가다'나 '근신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愼자는 心(마음 심)자와 眞(참 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眞자는 신에게 바칠 음식을 정성스럽게 준비했다는 의미에서 '참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렇게 참됨을 뜻하는 眞자에 心자가 결합한 愼자는 조심스럽게 신에게 제물을 바친다는 의미에서 '삼가다'나 '근신하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愼(신, 진)은 ①삼가다(몸가짐이나 언행을 조심하다) ②근신(謹愼)하다 ③두려워하다 ④근심하다(속을 태우거나 우울해하다) ⑤따르다 ⑥삼감(몸가짐이나 언행을 조심함) ⑦성(姓)의 하나 ⑧진실로, 참으로 ⑨부디, 제발, 그리고 ⓐ땅의 이름(진)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삼갈 각(恪), 원할 원(愿), 삼갈 비(毖), 삼갈 근(謹), 삼갈 욱(頊)이다. 용례로는 매우 조심스러움을 신중(愼重), 홀로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그러짐이 없도록 삼감을 신독(愼獨), 신중하게 사려함을 신려(愼慮), 신중히 생각함을 신사(愼思), 상사를 당하여 예절을 중시함을 신종(愼終), 삼가고 조심함을 신계(愼戒), 신중하게 가려 뽑음을 신간(愼簡), 말을 삼감을 신구(愼口), 신중하고 면밀함을 신밀(愼密), 여색을 삼감을 신색(愼色), 신중히 다룸을 신석(愼惜), 조심하여 고름 또는 선택을 신중히 함을 신선(愼選), 조심하여 지킴을 신수(愼守), 말을 삼감을 신언(愼言), 기회를 소홀히 하지 않음을 신기(愼機), 삼가서 침묵을 지킴을 묵신(愼默), 근신하여 경거망동을 삼가는 날이란 뜻으로 설날을 일컫는 말을 신일(愼日), 언행을 삼가고 조심함으로 과오나 잘못에 대하여 반성하고 들어앉아 행동을 삼감을 근신(謹愼), 힘써 삼감을 근신(勤愼), 삼가지 아니함이나 신중하게 여기지 아니함을 불신(不愼), 겸손하게 삼감을 겸신(謙愼), 경계하여 삼감을 계신(戒愼), 공경하고 삼감을 경신(敬愼), 혼자서 스스로 근신하는 일을 독신(獨愼), 온화하고 신중함을 온신(溫愼), 두려워하고 삼감을 공신(恐愼), 성품이 질박하고 신중함을 질신(質愼), 어렵게 여기고 조심함을 난신(難愼), 몹시 두려워하고 언행을 삼감을 외신(畏愼), 양친의 상사에는 슬픔을 다하고 제사에는 공경을 다한다는 말을 신종추원(愼終追遠), 일이 마지막에도 처음과 같이 신중을 기한다는 말을 신종여시(愼終如始), 처음 뿐만 아니라 끝맺음도 좋아야 한다는 말을 신종의령(愼終宜令), 마음을 조심스럽게 가지어 언행을 삼감을 이르는 말을 소심근신(小心謹愼) 등에 쓰인다.
▶️ 始(비로소 시)는 ❶형성문자로 乨(시)는 고자(古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계집 녀(女; 여자)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台(태, 이, 시)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음(音)을 나타내는 台(태, 이, 시)와 여자(女)의 뱃속에 아기가 생기는 일이 시초라는 데서 '비로소', '처음'을 뜻한다. 始(시)는 어머니 뱃속에 아이가 생기는 일, 또 한 집안의 시초, 시조(始祖), 나중에 '사물의 시작'이란 뜻으로도 쓴다. ❷회의문자로 始자는 '비로서'나 '일찍이', '옛날에'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始자는 女(여자 여)자와 台(별 태)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台자는 匕(비수 비)자와 口(입 구)자가 결합한 것으로 수저를 입에 가져다 대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여기에 女자가 더해진 始자는 마치 엄마가 아이에게 음식을 먹이는 듯한 모습으로 그려졌다. 아이는 엄마가 주는 양분을 통해 삶을 시작하게 된다. 始자는 바로 이러한 의미를 담아 만든 글자이다. 그래서 始(시)는 ①비로소 ②바야흐로 ③먼저, 앞서서 ④일찍, 일찍부터 ⑤옛날에, 당초에 ⑥처음, 시초(始初) ⑦근본(根本), 근원(根源) ⑧시작(始作)하다 ⑨일으키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처음 초(初), 근본 본(本), 비롯할 창(創), 비롯할 조(肇),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끝 말(末), 마칠 종(終)이다. 용례로는 처음으로 함을 시작(始作), 한 족속의 맨 우두머리 조상을 시조(始祖), 시작한 처음 무렵을 시초(始初), 시작되는 처음을 시원(始原), 어떤 일을 맡아보기 시작함을 시무(始務), 일의 처음과 끝을 시말(始末), 직업 또는 학업 따위의 일을 시작함을 시업(始業), 처음으로 움직이기 시작함을 시동(始動), 일련의 동작 운동이 시작되는 점을 시점(始點), 어떤 일이 시작되는 때를 시기(始期), 맨 처음 출발 또는 발차함을 시발(始發), 처음으로 자연 그대로 사람의 손이 가해지지 않음을 원시(原始), 처음으로 시작함을 개시(開始), 천지가 비롯된 무렵이나 만물이 시작된 때를 태시(太始), 어떤 사상이나 학설 등을 처음 내세움을 창시(創始), 맨 처음을 본시(本始), 마지막과 처음을 종시(終始), 아무리 돌아도 처음 비롯한 곳이 없음을 무시(無始),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관철한다는 말을 시종일관(始終一貫), 처음이나 나중이 한결 같아서 변함없다는 말을 시종여일(始終如一), 처음에는 부지런히 하나 나중에는 게으름을 이르는 말을 시근종태(始勤終怠),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 같다는 말을 종시일관(終始一貫), 한 해의 마지막 때와 새해의 첫머리를 아울러 이르는 말을 연말연시(年末年始), 시작도 끝도 없다는 뜻으로 불변의 진리나 윤회의 무한성을 이르는 말을 무시무종(無始無終), 살고 죽는 윤회의 굴레를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을 일컫는 말을 무시범부(無始凡夫), 근본에 보답하고 처음으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천지와 선조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말을 보본반시(報本反始), 이제야 비로소 처음으로 들음을 일컫는 말을 금시초문(今始初聞), 시작할 때부터 끝을 맺을 때까지 변함이 없다는 말을 유시유종(有始有終) 등에 쓰인다.
▶️ 敬(공경 경)은 ❶회의문자로 등글월문(攵=攴; 일을 하다, 회초리로 치다)部와 苟(구)의 합자(合字)이다. 등글월문(攵)部는 급박하여 다가온다는 뜻이다. 혁은 엄격하게 격려한다는 뜻으로 말을 삼가는 뜻이 있는데 다시 등글월문(攵)部를 더하여 敬(경)은 한층 더 게을리하지 않음을 뜻으로 삼가다, 조심하다의 뜻이 있다. ❷회의문자로 敬자는 '공경하다'나 '정중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敬자는 苟(진실로 구)자와 攵(칠 복)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苟자는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개를 그린 것으로 '진실로'나 '참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렇게 '진실되다'라는 뜻을 가진 苟자에 攵자가 결합한 敬자는 '진실하도록 하다'라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니까 敬자에 쓰인 攵자는 예의를 갖추도록 만든다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강제성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고대에는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글자가 많다. 그래서 敬(경)은 성(姓)의 하나로 ①공경(恭敬) ②예(禮), 감사(感謝)하는 예(禮) ③공경(恭敬)하다 ④삼가다(몸가짐이나 언행을 조심하다), 마음을 절제(節制)하다 ⑤정중(鄭重)하다, 예의가 바르다 ⑥훈계(訓戒)하다, 잡도리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공손할 공(恭), 공경할 흠(欽), 공경할 지(祗), 공경할 건(虔)이다. 용례로는 노인을 공경함을 경로(敬老), 공경하는 마음을 경의(敬意), 존경하고 사모함을 경모(敬慕), 남의 말을 공경하는 태도로 듣는 것을 경청(敬聽), 공경의 뜻을 나타내는 인사를 경례(敬禮), 존경하여 일컬음을 경칭(敬稱), 초월적이거나 위대한 대상 앞에서 우러르고 받드는 마음으로 삼가고 조심하는 상태에 있음을 경건(敬虔), 공경하고 중하게 여김을 경중(敬重), 공경하고 사랑함을 경애(敬愛), 존경하여 높이어 부르는 말을 경어(敬語), 속마음과는 달리 겉으로는 존경하는 체하면서 속으로는 멀리함을 경원(敬遠), 공경하여 삼가 답장한다는 경복(敬復), 존중히 여겨 공경함을 존경(尊敬), 삼가서 공손히 섬김을 공경(恭敬), 존경하는 마음이나 예의가 없음을 불경(不敬), 숭배하고 존경함을 숭경(崇敬), 공경하고 두려워함을 외경(畏敬), 더욱 공경함을 가경(加敬), 항상 마음을 바르게 가져 덕성을 닦음을 거경(居敬), 부모를 잘 섬기고 공경함을 효경(孝敬), 씩씩하고 공경스러움을 장경(莊敬), 공경하되 가까이하지는 아니함 또는 겉으로는 공경하는 체하면서 속으로는 꺼리어 멀리함을 이르는 말을 경이원지(敬而遠之),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함을 이르는 말을 경천애인(敬天愛人), 하느님을 받들고 백성을 통치하기를 게을리 하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을 경천근민(敬天勤民), 신을 공경하고 조상을 숭배함을 일컫는 말을 경신숭조(敬神崇祖), 노인을 공경하는 생각을 일컫는 말을 경로사상(敬老思想),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일컫는 말을 경외지심(敬畏之心) 등에 쓰인다.
▶️ 終(마칠 종)은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실 사(糸; 실타래)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冬(동, 종)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冬(동, 종)과 바느질을 다 하고 나서 실(실사(糸; 실타래)部)을 매듭짓는다는 뜻이 합(合)하여 마치다를 뜻한다. 冬(동; 겨울)은 네 계절(季節)의 끝이므로 실 사(糸; 실타래)部를 덧붙여 감긴 실의 끝이 되고 널리 끝의 뜻으로 되었다. ❷회의문자로 終자는 ‘끝나다’나 ‘마치다’, ‘죽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終자는 糸(가는 실 사)자와 冬(겨울 동)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冬자는 새끼줄 양 끝에 매듭을 묶어 줄이 풀리지 않게 일을 마무리했다는 의미에서 ‘끝내다’나 ‘마치다’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그러나 후에 冬자가 ‘겨울’이라는 뜻으로 가차(假借)되면서 지금은 여기에 糸자를 더한 終자가 ‘끝내다’라는 뜻을 대신하고 있다. 그래서 終(종)은 끝, 마지막이라는 뜻으로, ①마치다 ②끝내다 ③사람이 죽다 ④다하다 ⑤이루어지다, 완성되다 ⑥채우다, 상당하다 ⑦끝, 마지막 ⑧사방 백 리의 땅 ⑨열두 해 ⑩윤(閏)달 ⑪항상(恒常), 늘 ⑫마침내, 결국(結局) ⑬비록,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마칠 료(了), 마칠 졸(卒), 마칠 필(畢), 마칠 준(竣), 마칠 파(罷), 그칠 지(止), 끝 말(末), 끝 단(端),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처음 초(初), 비로소 시(始)이다. 용례로는 일을 마침을 종료(終了), 끝이나 끝판을 종말(終末), 끝을 냄을 종결(終結), 그 날의 업무를 마침을 종업(終業), 맡아보던 일을 끝냄을 종무(終務), 죽을 때까지를 종신(終身), 필경에 또는 마침내를 종내(終乃), 마지막과 처음을 종시(終始), 전쟁이 끝남을 종전(終戰), 한 때 매우 성하던 것이 주저앉아서 그침을 종식(終熄), 간행을 끝냄 또는 끝낸 그것을 종간(終刊), 마지막에 다다른 판국을 종국(終局), 아침부터 저녁까지의 사이를 종일(終日), 최종으로 도착함을 종착(終着), 끝을 냄이나 끝이 남을 종지(終止), 죽거나 없어져서 존재가 끝남을 종언(終焉), 결정이 내려짐을 종결(終決), 맨 끝이 되는 곳을 종점(終點), 사람의 목숨이 끊어지려 할 때를 임종(臨終), 단계나 차례에 있어서 맨 나중을 최종(最終), 오복의 하나로 제명대로 살다가 편안히 죽는 것을 고종(考終), 한 해의 마지막 때를 연종(年終), 끝을 완전히 맺음을 유종(有終), 나중으로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를 내종(乃終), 사람의 목숨이 끊어져 죽는 때 또는 일의 마지막을 망종(亡終), 끝이 없음을 무종(無終), 좋지 않은 최후를 악종(惡終), 유종의 미를 거둠을 선종(善終), 처음과 끝 또는 처음부터 끝까지를 시종(始終),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 같음을 종시일관(終始一貫), 끝내 소식이 없음을 종무소식(終無消息), 이 세상 끝날 때까지 계속되는 사모의 정을 종천지모(終天之慕), 그 사람을 한평생 인간다운 대접을 해 주지 않는 일을 종신불치(終身不齒), 죽을 때까지 고칠 수 없는 질병을 종신지질(終身之疾), 빚돈을 갚지 않음을 종불출급(終不出給), 끝내 방문하지 않음을 종불투족(終不投足), 어떤 일을 한번 끝내어 마쳤다가 다시 시작함을 종이부시(終而復始), 끝내 회개하지 않음을 종불회개(終不悔改), 식사를 하는 짧은 시간이라는 뜻으로 얼마 되지 않는 동안을 종식지간(終食之間), 하루낮 동안 들이는 수고를 종일지역(終日之役), 영원히 계속되는 슬픔을 종천지통(終天之痛), 처음부터 끝까지 이르는 동안 또는 그 사실을 자초지종(自初至終),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관철함을 시종일관(始終一貫), 처음이나 나중이 한결같아서 변함 없음을 시종여일(始終如一), 처음에는 부지런히 하나 나중에는 게으름을 이르는 말을 시근종태(始勤終怠), 끝까지 굳게 참고 견딤을 견인지종(堅忍至終), 부모가 돌아가시는 날까지 봉양하기를 원하다는 뜻으로 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성을 이르는 말을 원걸종양(願乞終養), 우정을 끝까지 잘 지켜 나가지 못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흉종극말(凶終隙末)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