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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사람 손가락이 나타나더니,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다니엘 예언서의 말씀 5,1-6,13-14.16-17.23-28>
그 무렵
1 벨사차르 임금이 천 명에 이르는 자기 대신들을 위하여 큰 잔치를 벌이고, 그 천 명 앞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2 술기운이 퍼지자 벨사차르는 자기 아버지 네부카드네자르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온 금은 기물들을 내오라고 분부하였다.
임금은 대신들과 왕비와 후궁들과 함께 그것으로 술을 마시려는 것이었다.
3 예루살렘에 있던 성전 곧 하느님의 집에서 가져온 금 기물들을 내오자, 임금은 대신들과 왕비와 후궁들과 함께 그것으로 술을 마셨다.
4 그렇게 술을 마시면서 금과 은, 청동과 쇠, 나무와 돌로 된 신들을 찬양하였다.
5 그런데 갑자기 사람 손가락이 나타나더니, 촛대 앞 왕궁 석고 벽에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임금은 글자를 쓰는 손을 보고 있었다.
6 그러다가 임금은 얼굴빛이 달라졌다.
떠오르는 생각들이 그를 놀라게 한 것이다.
허리의 뼈마디들이 풀리고 무릎이 서로 부딪쳤다.
13 다니엘이 임금 앞으로 불려 왔다.
임금이 다니엘에게 물었다.
“그대가 바로 나의 부왕께서 유다에서 데려온 유배자들 가운데 하나인 다니엘인가?
14 나는 그대가 신들의 영을 지녔을뿐더러, 형안과 통찰력과 빼어난 지혜를 지닌 사람으로 드러났다는 말을 들었다.
16 또 나는 그대가 뜻풀이를 잘하고 어려운 문제들을 풀어낼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제 그대가 저 글자를 읽고 그 뜻을 나에게 설명해 줄 수 있다면, 그대에게 자주색 옷을 입히고 금 목걸이를 목에 걸어 주고 이 나라에서 셋째 가는 통치자로 삼겠다.”
17 그러자 다니엘이 임금에게 대답하였다.
“임금님의 선물을 거두시고 임금님의 상도 다른 이에게나 내리십시오.
그래도 저는 저 글자를 임금님께 읽어 드리고 그 뜻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임금님께서는
23 하늘의 주님을 거슬러 자신을 들어 높이셨습니다.
주님의 집에 있던 기물들을 임금님 앞으로 가져오게 하시어, 대신들과 왕비와 후궁들과 함께 그것으로 술을 드셨습니다.
그리고 은과 금, 청동과 쇠, 나무와 돌로 된 신들,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는 신들을 찬양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임금님의 목숨을 손에 잡고 계시며 임금님의 모든 길을 쥐고 계신 하느님을 찬송하지 않으셨습니다.
24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손을 보내셔서 저 글자를 쓰게 하신 것입니다.
25 그렇게 쓰인 글자는 ‘므네 므네 트켈’, 그리고 ‘파르신’입니다.
26 그 뜻은 이렇습니다.
‘므네’는 하느님께서 임금님 나라의 날수를 헤아리시어 이 나라를 끝내셨다는 뜻입니다.
27 ‘트켈’은 임금님을 저울에 달아 보니 무게가 모자랐다는 뜻입니다.
28 ‘프레스’는 임금님의 나라가 둘로 갈라져서, 메디아인들과 페르시아인들에게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 복음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21,12-19>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2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기고,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고 갈 것이다.
13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14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15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16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넘겨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17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18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19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신 담화, 곧 종말에 대한 말씀으로 우리에게 경각심을 일으켜줍니다.
먼저 박해와 박해 가운데에 있을 증언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그러나 언변과 지혜를 내가 주겠다.”
(루카 21,12-15)
박해가 오히려 당신을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라고 깨우치십니다.
곧 박해를 당하게 되면 오히려 하느님의 능력과 현존을 체험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지혜를 주시고 보호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눌변인 모세의 입과 함께 계셨듯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탈출 4,11-12.15-16).
그러니 박해를 통하여 오히려 우리는 신앙이 굳세어지고 새로워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위기의 순간은 가장 좋은 기회의 순간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루카 21,17-18)
이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미움이나 배척에서 벗어나게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미움과 배척을 통하여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곧 미움과 박해를 벗어나게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보호해주고 지켜주실 것이니, 인내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는 미움 받거나 배척받게 되면 힘들어 합니다.
고난과 시련, 어려움이나 귀에 거슬리는 말이나 힘든 것은 피하고, 편하고 좋고 즐거운 것, 듣기 좋은 말에 더 맞들이고 쉽게 기울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려움과 인내를 통하여, 구세주와 협력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신기하게도 어려움과 인내에는 고통을 변화시켜 하느님과의 만남이 되게 하는 묘한 이법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고난을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라고 말합니다.
곧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라고 말합니다.(필리 1,19)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루카 21,19)
성 베네딕도 역시 ‘인내’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통로요,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는 한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의 수난에 인내로써 한몫 끼어 그분 나라의 동거인이 되도록 하자.”라고 말합니다.(수도규칙 머리말 50)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고 있으니 영광도 그와 함께 받을 것입니다.”
(필립 3,10;로마 8,17).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루카 21,17)
주님!
고난과 시련이 당신을 증언할 기회가 되게 하소서.
그 속에서 당신의 능력과 현존을 체험하게 하소서.
오히려 굳세어지고 새로워지게 하소서.
바로 그 순간이 위기의 순간이 아니라 기회의 순간이 되게 하소서.
그 어떤 미움도 배척도 당신과 함께 받고 당신의 영광도 함께 누리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토 수도회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죽음과 가까울 때 성령께서 충만히 오시는 이유: 명의는 작은 병에 움직이지 않는다>
어제 복음은 세상 종말이 언제 올 것이냐는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그것을 알려고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직 죽음을 현재화하여 자신을 좀 더 가치 있는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존재는 인간밖에 없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죽음을 바로 눈앞에 두고 사는 것이 나에게 매우 유익합니다.
그러면 어차피 죽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 세상 것을 추구하기보다는 조금 더 ‘가치와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으로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자신 안에 생존을 위한 세속적인 것들이 아니라 ‘사랑’을 채우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죽음을 현재화하여(Memento mori) 살다 보면 당연히 두려움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 두려움을 가지면 하느님은 성령을 주십니다.
죽음을 이기게 하는 힘은 성령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원한다면 죽음을 목전에 두고 사는 것이 좋고 그렇게 성령님께서 오시면 내가 주님을 증언하는 사람이 됩니다.
자주 말씀드리는 김용태 신부님의 서품 준비 피정 중에 있었던 체험을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마지막 이전에 항상 당신 제자들이 박해를 당하게 될 텐데 그때 성령의 힘으로 주님을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란 말씀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김용태 신부가 부제가 되기 위한 한 달 피정을 하던 중에 “순교를 할 수 있느냐?”라는 주제가 떨어졌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마지막 후손으로서 이 주제는 어렸을 때부터의 평생 화두였습니다.
이냐시오 묵상이기 때문에 상상으로 순교 장면을 떠올렸습니다.
이슬람 테러범들이 등장하였고 지독한 고문 기구들이 있었으며 배교하지 않으면 드릴로 머리를 뚫어서 죽이겠다고 협박하였습니다.
참아보려 했지만 순교 직전에 매번 기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신학생들은 다 이 과정을 통과하였지만, 김용태 신부만은 사흘이 지나도 머리로 뚫고 들어오는 그 드릴의 칼날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피정과 서품을 포기할까 생각도 하였습니다.
이젠 마지막이란 마음으로 밤에 혼자 성체조배를 하러 올라갔습니다.
다시 같은 묵상을 하였습니다.
또 드릴이 머리로 오고 또 포기하려고 할 때 즈음, 온 방 안이 사랑으로 가득 차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마치 바닷물을 담아보겠다고 그렇게 애썼던 잔이 바다에 빠진 느낌과 같았습니다.
그분의 사랑으로 자신이 온통 채워지는 느낌이었고 주님께서 뒤에서 꼭 안아주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며 예수님께서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고 하늘에서는 아름다운 빛이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순교 다음의 세상이었습니다.
이 은총을 체험한 후에 순교를 받아들일 힘이 생겼습니다.
이 체험은 사제로 살아가는 내내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만약 김용태 신부가 며칠 동안 계속 죽음을 현재화하는 두려운 상황을 묵상하지 않았다면 이런 은총이 주어졌을까요?
그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온전히 주님을 증언하는 사제도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를 성장시키는 것은 죽음의 현재화이고 그런 노력을 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죽음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힘인 성령님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매순간 당신을 증언하는 힘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매 순간 주님을 증거할 수 있을 때, 그 사람은 이미 죽음 이후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는 수도자나 성직자와 같은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며칠 전 제게 1년 전에 남편을 뇌종양으로 여읜 아내와 20살 먹은 딸이 찾아왔습니다.
남편이 외국을 돌아다니며 살아야 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지만, 갑자기 암이 찾아왔고 1년 10개월의 투병 끝에 사망하였습니다.
연년생 고3 여동생과 중학생 남동생을 둔 맏딸은 외국에서 생활하다 갑자기 아버지의 병환으로 한국에 들어올 수밖에 없어서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습니다.
어머니의 권유대로 일단 대안학교에 입학하기로 하였는데 시간도 없고 어찌하다 보니 개신교 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여동생과 자신, 단 둘만이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어느 날 수련회에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개신교 학교이기 때문에 기도회가 열렸습니다.
맏딸은 사진 찍는 일을 하며 약간 그런 기도회를 바라보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무슨 말이라도 하며 기도를 해보려 했습니다.
당시에 장녀라는 부담과 아버지가 아프시지만, 어머니가 아버지로 인해 고생하는 것을 보며 이럴 바에 아버지가 빨리 돌아가시는 게 나을 거 같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동생은 미술이라는 특기가 있지만 자신은 앞으로의 삶이 조금은 막막한 상태였습니다.
이때 김용태 신부님과 같은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그 친구 말로는 성령께서 쑥 안으로 들어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성령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과 위로에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선생님이 와서 귀에 대고 계속 기도를 해 주셨고 그 기도 말이 꼭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하는 소리로 들렸습니다.
그렇게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담대해질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죽음을 목전에 둔 이에게 성령의 은혜를 주십니다.
성령께서 제일 좋아하시는 것은 우리를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하시는 것입니다.
죽음만큼 강한 적도 없다면 하느님은 그 강한 적을 이기게 하실 때 가장 보람을 느끼실 것입니다.
그렇게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그때의 감정은 점점 식어만 갔습니다.
무언가 모를 불안과 죄책감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을 이길 힘을 얻었지만 죽음 이후를 극복할 힘은 남아있지 않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미사를 가서 성체를 영하고 기도를 바치려 하는데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도저히 기도가 안 되어 그냥 눈을 뜨려는데 환시와 같은 것을 봅니다.
빛과 같으시고 엄청나게 크셔서 감히 바라볼 수 없는 예수님께서 서 계시고 그 앞에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고 있는 아버지를 본 것입니다.
마치 어머니 품에 안겨있는 아기처럼 행복한 모습의 아버지셨습니다.
하염없이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버지의 죽음과 맏딸로서의 부담, 그리고 아버지가 빨리 죽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던 죄책감, 또 외국에서 생활하다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느껴야 하는 청년으로서의 막막함 등을 주님께서는 성령으로서 극복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운 이유를 말하며 엄마까지 위로합니다.
앞으로도 절대 주님을 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지금은 동생과 함께 싱가포르에 있는 대학을 가려고 준비 중입니다.
황창연 신부님의 강의 중에도 성당에서 봉사를 열심히 하던 형제가 갑자기 봉사를 마치고 집에 가던 중 교통사고로 죽었는데, 어머니가 아이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를 때 아버지가 아이 꿈에 나타나서 천국 앞까지 같이 걸어갔던 이야기를 오히려 해 주어서 어머니가 놀랐다는 이야기도 같습니다.
죽음 앞에 선 사람에게 주님은 힘을 주십니다.
죽음을 이길 힘은 성령뿐입니다.
하느님은 생명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죽음을 극복하려고 하는 이에게 오십니다.
모든 병을 고칠 수 있는 명의가 굳이 약국에서 사 먹어도 낫는 병을 고치겠다고 그 집에 방문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당신만이 하실 수 있는 가장 큰 일, 곧 죽음을 이기는 일을 하고자 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죽음을 현재화하고 그 고칠 수 없는 병을 극복하려 한다면 주님은 분명 성령을 주시어 이 세상에서 끈기 있게 당신을 증언하는 사람으로 만들 것입니다.
이것이 죽음을 현재화하여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은총이고 우리가 나아가야 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의 사람>
사람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진면목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야말로 그 사람의 크기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처리하는 과정 안에서 진실한 모습을 보게 되고 하느님의 사람인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사람에게는 선을 이룰 수 있게 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 선을 지향하는 사람은 곧 하느님의 사람이요,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의 눈에 드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신부인 저도 일상생활 안에서 하느님의 사람이 아닌 상태로 지낼 때가 종종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아마 누군가 제 속을 알면 큰 실망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 때문에 박해와 비난을 받게 됩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도 주님을 따라야 하지만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미리 당신의 제자들에게 위로와 힘을 주십니다.
'박해를 당하고 감옥에 갇히게 되고… 그때야말로 너희가 나의 복음을 증언할 기회이다…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12-15)
박해는 그리스도를 증언할 기회라고 했지만 어디 그것이 말같이 쉬운 일입니까?
일상 안에서도 변명과 합리화시키려고 하는 마음이 얼마나 많은데….
감옥에 갇혀서 소신을 지킨다는 것은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믿는 사람은 걱정하지 않습니다.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주실 것이다.”
(루카 12,12)
이제 믿음을 지닌 제자들은 인간적인 말재주와 인간적인 지혜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과 지혜로 말하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4장 13절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최고 의회에서 증언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의회 의원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또 이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놀라워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6장 10절에도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이는데 “그의 말에서 드러나는 지혜와 성령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최고 의회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모두 스테파노를 유심히 바라보았는데,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처럼 보였다.”고 했습니다.(사도행전 6,15)
그야말로 믿음을 간직하고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로움인지를 체험하려면 주님의 말씀대로 실천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사람으로 서 있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됩니다.
혹 지금 힘들더라도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루카 21,16)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위안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어려움 속에서 진정한 나의 모습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
(야고 1,12)
우리가 지닌 삶의 십자가가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 안에서 삶의 고통을 이겨내려는 모든 수고와 땀을 그분은 아십니다.
그러니 삶의 여정에서 오는 시련과 고통을 은총의 기회로 삼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그를 대신해서 진심 어린 사과 한 마디만 해주기 바랍니다>
우리나라의 현대사에 치유 불가능한 깊은 상처와 좌절과 수모를 안겼던 학살자요 군부 독재자가 세상을 떴습니다.
끝끝내 잘못했다, 내 탓이다, 용서를 빈다는 말 한마디 없이, 그렇게 오욕의 세월 뒤안길로 사라져버렸습니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그에게 인간이기를 바랐던 우리의 기대가 허황된 것이었던가 봅니다.
그 오랜 세월, 그 숱한 기회를 족족 발로 차버리고, 끝끝내 인간이기를 포기한 그의 죽음이 참으로 불쌍하고 안타깝습니다.
그는 어찌 그리도 90 평생 초지일관, 일편단심 동물처럼 살아왔는지 놀랍습니다.
죽기 일보 직전까지도 자기만의 그릇된 신념과 정신세계에 빠져 끝끝내 사과를 거부한 그의 뇌는 참으로 연구 대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국과수에 감정을 의뢰해 봐야 되지 않나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입니다.
그도 밉지만 그의 주변에서 얼쩡거리며 집단적 광기를 지속해온 측근들, 가족들, 배우자, 자녀들의 금수만도 못한 모습 앞에 분노를 넘어 깊은 슬픔이 다가오는 하루였습니다.
측근들과 배우자, 자녀들,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지금의 전국민적 분노를 외면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또 다른 망언으로 안 그래도 쓰라린 깊은 상처에 굵은 소금을 끼얹지 말기 바랍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그를 대신해서 진심 어린 사과 한 마디만 해주기 바랍니다.
평생토록 걷지 말아야 할 악인의 길을 걷다가 끝끝내 회개하지 않고 세상을 떠난 자의 죽음은 남아있는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정말 큰 것 같습니다.
마치 이 땅 위에서 영원히 살 것 같았던 그였지만, 어느 날 갑자기, 소리소문없이 죽음의 천사가 그에게 다가갔습니다.
주님께서는 떠날 준비가 조금도 되지 않은 그를 데려가셨습니다.
결국 그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는 우리나라 역사 속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
민주화의 시계를 거꾸로 돌려버린 군부독재자, 국민의 생명을 수호하는 본분을 망각하고 국민에게 발포한 정치군인, 희대의 살인마, 상습 고액체납자, 단돈 29만원, 왜 나만 갖고 그래, 끝끝내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거나 회개하지 않은 금수(禽獸)만도 못한 인간...
그러나 밥 먹듯이 수시로 가슴치고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마지막 날 주어질 은총과 축복은 엄청날 것입니다.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루카 복음 21장 19절)
- 살레시오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순교영성과 참된 품위의 삶 - 기도, 인내, 지혜, 겸손>
어제의 정주영성에 이어 오늘 강론 주제는 ‘순교영성과 참된 품위의 삶’입니다.
우리 베네딕도 수도회의 정주영성과 순교영성은 일맥상통합니다.
성규의 머리말 마지막 구절이 참 장엄합니다.
순교자적 삶은 그대로 평생 주님의 전사와 같은 수행자의 삶임을 깨닫게 됩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향한 지칠줄 모르는 열정과 순수의 삶을 살게 하는 순교영성입니다.
“주의 가르침에서 떠나지 말고, 죽을 때까지 수도원에서 그분의 교훈을 항구히 지킴으로서 그리스도의 수난에 인내로써 한몫 끼어 그분 나라의 동거인이 되도록 하자. 아멘.”
사고사, 객사, 병사가 아닌 싸우다 죽는 전사(戰死)야 주님의 전사(戰士)인 수도승이라 말한 기억이 새롭습니다.
순교영성의 참된 삶에 줄줄이 따라 오는 기도, 인내, 지혜, 겸손의 덕목입니다.
참으로 2000년 유구한 전통의 자랑스러운 가톨릭 교회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순교영성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우리 안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순교영성의 영적 ‘디엔에이DNA’요, 하느님 중심의 순교적 참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순교자들의 후예인 가톨릭 교회의 수도자들이요 신자들입니다.
우리 한국의 요셉수도원 형제들은 물론 왜관수도원의 형제들이 매일 끝기도후 바치는 ‘신 보니파시오와 김베네딕도와 동료 순교자 38위 시복 시성 기도문’ 일부를 그대로 인용합니다.
“인자하신 주님,
북녘 땅에서 굳은 신앙으로 당신 영광을 드러낸 하느님의 종 신상원 보니파시오 김치호 베네딕도와 동료 순교자들에게 시복 시성의 영예를 허락하시어 하느님 나라를 위한 그들의 헌신이 널리 현양되게 하소서.
저희도 죽음으로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을 본받아 고난과 역경을 견디어 냄으로써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를 증거하고 마침내 하늘나라의 영광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소서.”
순교영성의 진수가 고스란히 함축된 주옥같은 기도문입니다.
수도생활 초창기 거의 40여년 전 정하권 몬시뇰 신부님의 왜관수도원 연피정 강의 때 들은 “수도원에 죽으로 온 수도자들이 살려고 하니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한 대목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기념하고 기억하라고만 있는 순교성인들이 아니라 순교적 삶을 살라고 끊임없이 분발 자극하는 우리 가톨릭 교회의 살아 있는 보물들인 순교 성인들입니다.
오늘은 베트남의 성 안드레아 등락 사제를 비롯한 116명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입니다.
참 강인하기가 우리 한반도의 한민족 사람들과 흡사한 베트남 사람들입니다.
중국, 불란서를 물리쳤고, 미국을 패퇴시킨 유일한 나라가 베트남입니다.
중국의 모택동처럼 베트남의 국부로 추앙받는 호지명입니다.
이들 베트남 순교자들의 순교역사도 우리와 흡사합니다.
아니 우리 이상으로 치열하고 처절했습니다.
베트남 교회는 1700년대 중반부터 시작해 1800년대 말까지 무려 150년 동안 53차례의 박해 동안 약 13만명의 순교자들이 하느님과 복음을 위해 자신들의 소중한 목숨을 바쳤고, 이분들 중에서 117분이 1988년 6월19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됩니다.
성 안드레아 등락 사제와 36분의 베트남 사제들, 다양한 신분의 59분의 베트남 평신도들, 8분의 스페인과 프랑스 주교들, 그리고 13분의 유럽 출신 사제들입니다. 당시 감동적인 순교 일화도 소개합니다.
‘1862년 1월 7일, 당시 베트남 왕의 박해 정책에 따라 붕따우 바리야의 한 감옥에 298명의 신자가 갇힌다.
그리고 “배교를 하면 살려주고 그렇지 않으면 감옥에 불을 지르겠다”는 유혹을 받는다.
하지만 298명 중 단 한명도 배교하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298명은 모두 산화(散華)했다.
순교자들은 뜨거운 불길속에서도 신음소리, 비명소리 하나 내지 않고 묵주기도를 하며 죽어갔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새삼 순교자들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란 말이, 또 묵주는 천국에 들어가는 패스포드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집니다.
주님은 ‘어떤 박해 상황중에도 의연하고 침착하게 증언할 기회를 놓치지 말라’ 하십니다.
또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 준비하지 말것이니, 주님은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주시겠다’ 합니다.
그리고 결론처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순교영성의 핵심은 주님을 위해, 복음을 위해 끝까지 버텨내고 견뎌내는 인내의 믿음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이런 ‘사랑의 인내, 희망의 인내, 믿음의 인내, 겸손의 인내’의 영혼은 하느님 안에 있어 그 누구도 다치지 못한다는 주님의 확약 말씀입니다.
정주영성의 핵심 또한 인내의 믿음입니다.
성규 72장 “육체나 품행상의 약점들을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며”란 대목도 기억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참된 정주의 수도자들은 ‘인내의 대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규 6장 겸손에 대한 장 첫 구절도 인내를 강조합니다.
“겸손의 넷째 단계는, 순종에 있어 어렵고 비위에 거슬리는 일 또한 당한 모욕까지도 의식적으로 묵묵히 인내로써 받아들이며, 이를 견디어 내면서 싫증을 내거나 물러가지 않는 것이다.”
말 그대로 주님께서 주시는 순교적 인내요 영웅적 인내의 은총입니다.
이런 살아있는 순교영성의 모범이 제1독서 다니엘서의 주인공 다니엘입니다.
순교영성에 항구할 때 이런 인내와 지혜, 겸손의 덕목임을 깨닫습니다.
정말 정신적, 영적 임금은 바빌론의 벨사차르가 아닌 다니엘임을 깨닫습니다.
왕궁 석고 벽에 글자를 풀이하는 다니엘의 추호의 두려움이 없는, 침착하고 용기있고 지혜로운 겸손한 모습이 참 실감나게 전달됩니다.
말 그대로 유배중 절망 상태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의 별’같은 다니엘의 위상입니다.
이처럼 순교 성인들 역시, 약함과 한계, 두려움을 지니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무한한 용기와 힘을, 백절불굴의 믿음을, 샘솟는 희망을 선물합니다.
“임금님의 선물을 거두시고 임금님의 상도 다른 이에게나 내리십시오.
임금님께서는 하늘의 주님을 거슬러 자신을 들어 높이셨습니다.
그리고 보지도 듣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는 신들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리면서 임금님의 목숨을 손에 잡고 계시며 임금님의 모든 길을 쥐고 계신 하느님을 찬송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손을 보내셔서 저 글자를 쓰게 하신 것입니다.”
“므네 므네 트켈 파르신” 말마디 중 특히 “트켈”이란 말마디 뜻이 이채롭고 흥미롭습니다.
‘임금님을 저울에 달아 보니 무게가 모자랐다’.
과연 하느님께서 우리를 저울에 달아 볼 때 무게는 모자라지는 않을지 생각하게 합니다.
과연 무게가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깊은 묵상감입니다.
바로 이런 다니엘의 인내, 겸손, 침착함, 용기, 지혜는 어디서 유래하는 것일까요!
오늘 화답송 찬양 시편은 바로 다니엘서 3장 불가마 속에서 네 청년이 열렬히 바쳤던 하느님 찬양과 감사의 기도 중 일부입니다.
무려 다니엘서 3장 24절부터 90절까지 지속되는 하느님 찬양과 찬미, 감사기도입니다.
우리가 매주일과 대축일이나 축일 때마다 부르는 이스라엘 다니엘과 세 청년의 기도입니다.
참으로 이렇게 우리 수도자들이 평생 날마다 끊임없이 바치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기도가 순교 영성의 배경이자 기반임을 깨닫습니다.
여기서 줄줄이 주어지는 인내, 지혜, 겸손, 용기, 침착함이란 성령의 선물들입니다.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항구히 ‘순교 영성과 참된 품위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토회 성 요셉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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