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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 19일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제1독서 : 판관 2,11-19
복 음 : 마태 19,16-22
그때에
16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18 그가 “어떤 것들입니까?” 하고 또 묻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19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20 그 젊은이가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하고 다시 묻자,
21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2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원한 생명의 구원
-끊임없는 회개-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우리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호감을 드러낼 때는 흔히 ‘우리’라는 수식어가 들어갑니다.
“회개하면 성인이 될 수 있어도 부패하면 성인이 될 수 없다.
회개한 다윗은 성인이 되었지만, 부패한 솔로몬은 성인이 되지 못했다.”,
참 재미있는, 의미심장한 통찰입니다.
살아있을 때 회개이지 죽으면 회개도 끝입니다. 회개하라 주어진 하루하루 인생입니다.
회개할 때 비로소 살아있다 할 수 있습니다.
과일도 살아있을 때 익어가지만 죽으면 썩어가기 시작합니다.
살아있어도 병들어 있는 과일을 보면 익어가면서 동시에 썩어갑니다.
그대로 놔두면 나중엔 온통 썩어서 먹을 수 없습니다. 인생의 이치도 이와 똑같습니다.
어제 저녁식사 후 복숭아를 먹으며 수도형제들과 이야기 나누며 새삼스럽게 확인한 진리입니다.
옆의 형제가 겉은 곱고 먹음직스러워 복숭아 껍질을 벗기니 썩어서 거의 통째로 버렸습니다.
‘아, 사람도 겉은 멀쩡해도 속의 영혼은 이렇게 부패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즉시 나눈 대화입니다.
“회개도 때가 있습니다. 너무 늦어서 썩으면 회개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조금 썩었을 때 얼른 도려내고 먹을 수 있듯이 조금 썩었을 때, 부패했을 때 즉각적인 회개가 필수입니다.
아니 ‘썩어가는’ 부패腐敗인생이 되지 않고 ‘익어가는’ 발효醱酵인생이 되기 위해서 끊임없는 회개가 필수입니다.”
요지의 대화를 나눴습니다. 과연 우리는 ‘썩어가는’ 인생입니까? 혹은 ‘익어가는’ 인생입니까?
썩어갈 때 악취惡臭요 익어갈 때 향기香氣입니다.
봄의 꽃향기도 좋지만 가을의 익어가는 열매의 향기는 더 좋습니다.
사람 영혼 역시 냄새가 향기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제 가을이 되면 과일도 익어가기 시작합니다.
역시 인생 가을도 믿음, 희망, 사랑 즉 신망애信望愛의 열매들 익어가는 시절입니다.
참으로 ‘썩어가는’ 인생이 아니라 ‘익어가는’ 향기로운 인생이 되기 위해
죽을 때까지 끊임없는 회개는 필수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도 참 귀한 깨달음을 줍니다.
유의할 바 오늘 복음의 배치가 예수님께서 어린이들을 축복하신 예화 다음에 나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 나라는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며,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의 어떤 부자의 질문은 사막의 스승을 찾았던 구도자들의 공통적 물음입니다.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부자의 영적 목마름을 반영합니다. 겉은 멀쩡하지만 내면은 행복하지 않음을 반영합니다.
기쁨과 감사도 없습니다. 역시 부자는 무지에 눈이 멀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을 눈앞에 두고도 몰라보고 영원한 생명을 물으니 말입니다.
부자의 내면을 통찰하신 주님의 지혜로운 접근입니다.
예수님은 지켜야 할 구체적 계명들을 나열하시자 부자는 말합니다.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켰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분명 부자는 착한, 좋은 신자임이 분명합니다.
그래도 결정적인 것이 하나 빠졌습니다. 삶의 중심에 주님이 아닌 재물이 있었습니다.
겉은 멀쩡하지만 속의 영혼은 부패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래서 회개입니다.
끊임없는 회개란 살기위한, 무너지지 않기 위한, 썩지 않기 위한, 영혼의 몸부림이요 발버둥입니다.
이래서 ‘회개의 시스템’ 같은 일과표에 따라 매일, 평생, 규칙적으로,
끊임없이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기도인 성무일도와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부자의 내적 증상이 중증임을 알아 챈 주님의 즉각적인 극약 같은 처방입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바로 이 말씀은 사막의 성자 안토니오는 물론 아씨시의 프란치스코를 회심시킨 복음입니다.
부자의 무지를 일깨우는 처방 말씀입니다.
탐욕의 무지에 눈먼 부자는 여전히 예수님이 영원한 생명이심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삶의 중심에 재산이 요지부동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에게 이런 처방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오늘 복음의 부자에게만 하셨습니다.
재물이 문제가 아니라 재물에 집착하는 영혼이 문제입니다.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은 소유가 아니라 존재입니다.
재물을 소유하되 이탈의 정신으로 나누면서 존재를 사는 것이 진짜 지혜로운 삶입니다.
하여 날마다 회개를 통해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 하신 것입니다.
젊은 부자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났으니 그가 많은 재물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외적으로 계명을 잘 지킨 좋은 신자였지만 삶의 중심에는 하느님이 아닌 재물이 자리 잡고 있었기에
그처럼 허전하고 목말랐던 것인데 절호의 좋은 기회를 놓쳤습니다.
하느님이 아닌 재물이 삶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공허한 삶이라면
결코 참 기쁨, 참 평화, 참 감사, 참 행복도 기대할 수 없으니
실상 역설적으로 불행하고 가난한 부자입니다.
참으로 시공을 초월하여 복음 말씀을 듣는 청자聽者들인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영원한 깨우침을 주는 예화입니다.
결론하여, 계명을 지켜서 영원한 생명의 구원이 아니라 끊임없는 회개로 자기를 버리고
주님을 따라 섬겨야 구원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섬길 때 예수님을 닮아 자연스럽게 저절로 따라 오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의 실천들입니다.
예수님이란 참 보물을 삶의 중심에 모실 때 저절로 재물욕으로부터의 이탈로 참으로 자유로운 삶입니다.
‘주님 맛’을 알아갈 때 비로소 ‘돈맛’은 사라져 가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판관기의 시작입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인간 죄의 현실을, 구제불능의 인간 현실을 봅니다.
주님을 섬기다가 그리도 빨리 유혹의 탈선으로 주님의 구원은혜를 잊고
세상 우상들을 섬기며 부패해가는 배은망덕背恩忘德의 영혼들입니다.
이들 이스라엘 백성들은 판관들의 말을 듣지 않을뿐더러
다른 신들을 따라가 섬기고 경배하며 불륜을 저지르곤 합니다.
예나 이제나 여전히 반복되는 인간 현실입니다.
주님을 따르지 않고 이방 잡신들이나 우상을 섬기는 것을 ‘불륜’이라 칭합니다.
불륜으로 파괴되는 가정처럼 이런 영혼의 불륜인 세상 잡신이나 우상들을 섬김으로
내적으로 분열되고 파괴되는 영혼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사실 둘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영혼의 불륜에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육신의 불륜입니다.
하늘 아래 새 것은 없습니다. 문제는 잊혀지는 것이 아니라 묻혀지는 것입니다.
깊이 묻혀진 좋은 것을 기억해 내어 새롭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이래서 믿는 이들의 삶은 영적 전쟁의 삶이요 우리는 주님의 영원한 전사가 됩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기에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주님을 따르며 섬김으로
주님을 닮아가는 주님의 전사들인 우리들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회개한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사하시며,
썩어가는 부패인생이 아닌 익어가는 발효인생을 살아가게 하십니다.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매일 아침 산책하는 것이 취미이며 운동입니다.
성당, 현대시장, 성현동 성당, 봉천 고개, 상도 중학교, 중앙시장, 성당입니다.
1시간 30분 정도 걷습니다. 중간에 운동기구가 있어서 허리, 다리 운동을 합니다.
요즘은 방학이라 학생들을 보지 못하지만, 학생들의 생기있는 모습을 보는 기쁨은 덤입니다.
며칠 전입니다. 한 학생이 빨간불인데 건널목을 건너려고 했습니다.
저는 급히 학생을 불렀습니다. 학생은 스마트폰을 보면서 무심결에 건너려고 했습니다.
스마트폰이 좋고, 중요하겠지만 건널목을 건널 때는 신호를 꼭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는 옷을 입고 삽니다. 옷은 간편하고, 실용적이면 좋습니다.
사제는 사제의 복장을 하면 좋습니다. 스님은 승복을 입으면 좋습니다.
옷이 날개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의 품위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옷을 입습니다.
체면이라는 옷, 가식이라는 옷, 직책이라는 옷, 욕심이라는 옷, 시기와 질투라는 옷,
책임이라는 옷, 도덕과 규율이라는 옷입니다. 재물, 명예, 권력이라는 옷도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옷이지만 말과 행동으로 그 사람이 입고 있는 마음의 옷은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칼릴 지브란은 ‘옷’이라는 이야기를 남겨주었습니다.
“그대의 옷은 그대의 아름다움은 많이 가리면서도 아름답지 못한 것은 가리지 못하는 것.
그대는 옷으로 개인의 자유를 얻으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갑옷이 되고 사슬이 됨을 깨닫게 되리라.
그대가 옷을 좀 덜 입고 살을 좀 더 내놓아 태양과 바람을 더 많이 만날 수 있기를.
생명의 숨결은 태양 속에 있고, 생명의 손길은 바람 속에 있으므로.
잊지 말라. 부끄러움은 순수하지 못한 이의 눈을 가리는 방패일 뿐.
순수하지 못한 것이 거기 더는 있지 않을 때,
부끄러움은 오히려 마음의 족쇄, 마음의 얼룩이 아니고 무엇인가.
또한, 잊지 말라. 대지는 그대 맨발의 감촉을 기뻐하고,
바람은 그대의 머리카락과 장난치기를 갈망하고 있음을”
오늘 복음에서 한 젊은이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젊은이에게 길을 알려 주었습니다.
“살인해서는 안 됩니다. 간음해서는 안 됩니다. 도둑질해서는 안 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해야 합니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젊은이는 규율과 율법이라는 옷을 잡 입고 있었습니다.
젊은이는 예수님께 무엇을 더 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옷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재물, 명예, 권력이라는 옷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체면, 가식, 율법이라는 옷까지 벗으라고 하십니다.
욕심, 시기, 질투라는 옷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진정한 자아를 보라고 하십니다.
진정한 자아를 보면 누군가에게 묻지 않아도 하느님께로 가는 길이 보입니다.
모범생들은 열심히 살았다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공부도 잘했고, 법도 잘 지켰고, 성실하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신학생 중에도 이런 모범생들이 있습니다. 모든 면에서 잘하는 학생들입니다.
그런 모범생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더 큰 사명을 주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컴퓨터도, 내비게이션도 업그레이드를 시켜 주어야 합니다.
아무리 모범생이라 해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보다 큰 노력이 필요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죄를 짓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언제 이 죄를 짓게 될까요? 이에 대한 답으로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 것에 대한 욕심이 커졌을 때, 이기심이 극대화되었을 때,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사라졌을 때…….
이에 대한 답을 명쾌하게 내려주신 성인이 한 분 계십니다.
바로 아오스딩 성인이시지요. 성인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순서가 바뀌면 죄를 짓게 된다.”
이웃 사랑과 돈 사랑이 있습니다. 여기서 분명히 사랑의 순서는 이웃이 먼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웃이 아닌 돈 사랑이 먼저가 될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돈이 먼저이기 때문에 이웃을 속여서라도 돈을 벌려고 한다면 이것이 죄가 됩니다.
또한 돈 사랑으로 인해서 어려워하는 이웃을 외면한다면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도 생각해보십시오.
친구가 내게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러면서 이 고민에 대한 비밀을 지켜달라고 합니다.
어느 날 친구들 모임이 있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자신의 인기를 올리기 위해서 그 비밀을 다른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말했습니다.
이 역시 인기에 대한 사랑이 우정에 대한 사랑보다 더 위에 놓았기 때문에 ‘죄’를 짓게 됩니다.
내 사랑의 순서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사랑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는지,
아니면 낮은 곳에 있는 사랑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이에 따라 죄 중에 있을 수도 있고, 반대로 은총 속에서 행복한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한 젊은이가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우리의 최종 목표라고도 할 수 있는 질문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의 삶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은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떠한 일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십계명을 지켜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계명들을 충실히 다 지켜왔다는 젊은이는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라고 묻지요.
주님께서는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라고 하십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준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사랑의 우선순위를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재산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의 우선순위가 바뀌었을 때,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의 뜻을 제일 윗자리에 두고서 주님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합당한 모습으로 따르고 있을까요?
사랑하는 순서를 잘 따져보면 주님을 제대로 따르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나를 옭아매는 것
반영억 라파엘 신부
주머니에 돈을 넣고 다니면 흐뭇합니다. 언제든지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쓰지 않아도 든든합니다. 그러나 돈이 없으면 불안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생깁니다. 저는 주머니에 돈을 넣고 다닙니다.
평상시에는 아무 생각이 없다가도 간혹 주머니에 돈이 없는 것을 알게 되면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주머니를 비워놓던 사람은 그런 것에 자유롭습니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답을 알려 주셨습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19, 21).
그러나 젊은이는 답을 얻었으면서도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그는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해답을 얻었으면 그대로 해야 합니다.
답을 얻었으면서도 그대로 하지 않아 하늘의 보화를 차지하지 못하는 것은 본인의 책임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영생에로 인도하면서 길을 알려 주시고 동행하여 주시지만
본인이 거부하는 데는 어쩔 수 없습니다. 사실, 부자에게는 돈이 전부입니다.
그의 재산은 곧 목숨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말씀은
단순히 자선을 베풀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완전히 죽이라는 말씀입니다.
재산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거기에 목숨을 걸고 사는 사람이 있으니 문제입니다.
사람 나고 돈 났다는 것을 알지만 돈에 매이는 것이 사람입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아프리카의 가난한 어린이들을 돕는 젊은이도 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돈 때문에 형제부모도 없는 사람처럼 싸우는 재벌들의 추한 모습을!
주목할 것은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이라는 말씀입니다.
선한 일을 하는 공로를 뛰어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단순한 공로로 구원을 얻지 않고 주 하느님의 자비로운 은총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재물로부터의 자유를 갖는 것이기도 하지만
주님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라는 요구입니다.
학식도 명예도 권력도 재물에 속합니다. 그러한 것을 지니면 지닐수록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마음을 빼앗길 수 있는 것은 다 재물로 볼 수 있습니다.
훌훌 털어버리고 먼저 따름으로써 주님께서 주시는 더 큰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그리고 항상 주님”을 앞세울 수 있는 은총이 함께 하길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5).
버림으로써 얻는 신비에 눈뜨는 하루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가진 재물이라는 것은 또 다른 무엇으로부터의 옭아 매여 있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만을 갈망하여 세상 것에 자유로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는 아가에 대한 강론에서
“사랑은 그 자체로 만족을 줍니다. 사랑은 다른 것 때문이 아닌 그 자체로 마음에 드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 자체로 공로도 되고 상급도 됩니다.
사랑은 그 자체 말고는 다른 이유나 열매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열매는 사랑하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합니다.
사랑은 보배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참된 사랑이라면 자신의 시초로 되돌아가고
자신의 기원으로 돌아서며 자신의 원천으로 되 흘러가야 합니다.
거기에서 항상 자신의 물줄기를 받아야 합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주님에게서 모든 것이 솟아납니다.
주님을 오롯이 사랑한다면 무엇이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포기할 수 있고
그리하면 하늘의 보화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태 19, 21)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가난함과 영원함 사이에
우리가 있습니다.
생명의 소유권은
언제나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하느님 안에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삶인
나눔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나눔의 삶은
하느님을 향하는 삶입니다.
그냥 생명의 하루를
사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생명의 하루이길
바라십니다.
영원한 오늘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욕심과 집착으로부터
우리를 살리십니다.
끊임없이
내려놓는 여정을
우리는 걸어가야 합니다.
하느님 아닌 것에
매달려 살고 있는
우리를 반성합니다.
지나가고 사라지는
허망한 욕심이 아닌
쏟아지는 은총
영원한 생명이 있을 뿐입니다.
나눔이라는
영원한 생명을 향합시다.
하느님 나라를 향한 달음질
전삼용 요셉 신부
자수성가한 사람들은 항상 “당신도 할 수 있어요. 내가 했는데 당신이 왜 못해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한 일은 결코 평범한 사람들이 따라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영화 터미네이터로 유명한 아놀드 슈워제네거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그는 보디빌딩에서 전설로 남은 인물입니다.
미국에 이민 온 오스트리아계 유학생이었지만 20살 때에 세계 최연소로 미스터 유니버스 대회에서 우승합니다.
그의 목표는 세계 최고의 보디빌더가 되는 것이었고 그것을 통해 영화배우가 되어 많은 돈을 버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보디빌딩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잘 먹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돈이 없으니 영양을 보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대학에 다니며 건축현장에서 막노동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루 5시간씩 대학교 체육관에서 운동을 하였습니다.
이것만도 시간이 부족할 텐데 저녁 8시부터 12시까지는 연기연습을 했습니다.
그는 하루의 단 1분도 허비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아놀드 슈워제네거는 수많은 영화에 출현해 성공작을 만들어냈고 나중엔 캘리포니아 주지사까지 하게 됩니다.
지금은 은퇴하고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강사로 활약 중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그래, 나도 하면 할 수 있다. 근데 왜 그렇게 고생하며 살아야 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냥 평범하게 살다 천국 가면 되는데 왜 그 고생을 하면서 살아야할까요?
예수님이라면 그런 자수성가한 동기부여 강사의 말에 어떤 대답을 해 주실까요?
예수님은 그렇게 성공을 목표로 하루하루를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나무라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그것이 만약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장려하실 것입니다.
대부분의 자수성가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주위의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 부자가 찾아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계명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그는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 와서 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완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냥 하느님 나라에만 들어가도 좋기는 하지만 더 큰 상을 추구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만약 하느님 나라에 들어갔는데 어떤 사람은 상을 받고 어떤 사람은 상을 받지 않는다면
하늘나라에서도 조금은 마음이 상할 것입니다.
‘내가 왜 조금 더 열심히 하지 않았을까?’라는 후회를 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도 이 세상에서 노력한 것만큼 큰 사람이 있고 작은 사람이 있습니다.
영어 격언 중 매우 짧으면서도 유명한 격언이 있습니다.
“No Pain, No Gain”
고통 없이는 얻는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공허하다고 말하며 그냥 하루하루 연명하듯이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요?
우리는 분명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시간을 허비하라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시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목표가 있어야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세상에 존재하게 만드신 이유를 찾아야합니다.
그리고 목표를 찾았다면 열심히 달려야합니다. 노를 저어야합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달리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늘로 부르시어 주시는 상을 얻으려고,
그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필리 3,12-13)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는 지금 가진 돈을 가지고 불편하게 살아가는 삶을 두려워했습니다.
고통을 받기를 원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편하게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상을 타고 싶다면 고통을 즐겨야합니다. 무료함과 지루함을 사랑해야합니다.
그것 없이는 어떠한 성취도 이루어내지 못합니다.
무하마드 알리에겐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한 번은 기자가 그를 찾아갔습니다. 그때 알리는 윗몸일으키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기자가 물었습니다.
“윗몸일으키기를 몇 개나 하시죠?”
알리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아픔이 느껴지기 전까지는 세지 않습니다.”
그럼 언제부터 세기 시작한다는 것일까요? 고통이 와서 그만하고 싶을 때부터 세는 것입니다.
힘이 들 때부터 진짜 운동이 되기 때문에 더 많이 하고 싶어서 그런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 나라에서 상을 받고 싶다면 내가 견딜 수 있는 시간보다
10분 더 성체 앞에 앉아 있으려고 노력합시다.
내가 할 수 있는 묵주기도보다 1단만 더 하도록 해 봅시다.
내가 읽은 성경보다 1절만 더 읽으려고 해 봅시다.
이런 ‘조금 더’들이 쌓이면 하느님 나라에서 받을 상급도 그만큼 더 쌓이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계명
이종훈 마카리오 신부
하느님은 당신을 사랑해라는 계명을 주셨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웃사랑도 마찬가지다.
선한 일은 애써 지켜야하는 계명으로 주어지는데 악한 일은 아무런 계명이 없어도 그냥 저질러진다.
원죄에 물들어 있음이 분명하다.
이곳저곳에서 다른 내용으로 설교하고 듣지만 내용은 늘 한 가지이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라는 요구이다.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해서 지루할 법 한데 새롭게 들리는 게 신비롭다.
수백 번은 읽어서 다 아는 복음서 내용인데도 마치 처음 읽는 것처럼 읽는다.
아니 듣는다. 주님이 오늘 나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듣는다.
뉘우치고 결심하지만 또 다시 실패한다.
내 마음과 머리에 나쁜 프로그램이 무한반복 실행되는 것 같다.
그것은 자동실행 되니까 깨어있지 않으면 그냥 그렇게 되어버리고 만다.
이런 나에게 누군가 하느님과 그분의 계명을 계속 말해주지 않는다면
언젠가 틀림없이 하느님도 그분의 계명도 다 잊어버릴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을 이끌어갈 지도자들을 계속 세워주셨고 끝내는 당신의 아드님까지 내어주셨다.
하느님의 수난과 죽음이라는 엄청난 사건,
묵상하고 연구해도 여전히 다 이해되지 않는 신비로운 사건, 십자가의 죽음을 남겨 놓으셨다.
하늘 아래 뭐 새로울 게 있겠나.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것을 누군가 늘 말해줘야 하고, 듣기 싫어도 들어야 한다.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고 해도 계속 선포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내가 듣고 내가 흔들리지 않으려고 선포한다.
주님,
당신을 주인님이라고 부르면서도 당신의 말씀을 잘 따르지 못합니다.
선함은 노력해야 하는데, 악행은 저절로 저질러집니다.
이 가련한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어 자비를 베풀어주시고 주님의 무한한 사랑을 믿게 도와주소서.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어머니의 사랑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또 믿게 이끌어주소서. 아멘.
수도자매일복음묵상
가장 소중한 것을 주님께
김 조안 수녀
오늘의 제1독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끊임없는 돌아섬에 대해 나온다.
죄를 짓고, 하느님께서 심판이 내리고, 회개하고, 또 죄를 짓고...
사실 이 모든 일들은 현재를 사는 지금까지도 반복되고 있다.
예수님께서 만난,
영원한 생명을 갈망한 청년은 십계명을 잘 지킨,
굳이 탓할 것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하지만 그 젊은이는 슬퍼하며 떠나갔다.
바로 재물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실 때 제일 먼저,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의 하느님이다.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탈출 20,2-3)라고 하셨다.
그 청년의 다른 신은 바로 재물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각 사람의 우선순위를 너무나 잘 알고 계신다.
하느님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그것이 바로 내가 우상으로 섬기는 것이다.
때로 하느님을 섬긴다고 온갖 좋은 일을 다 하지만,
내 마음 깊숙이 자리 잡은 그 무엇,
내가 버릴 수 없는 다른 무엇이 있음을 본다.
주님께서는 내 안에 있는 그것을 버리라고 하신다.
‘한모금’ / (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 수녀원)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