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따지기를 좋아하는 우리나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성씨 중에 광산 김씨가 있다. 이들은 스스로를 ‘광김’이라고 줄여 부를 정도로 성씨에 자부심이 높다. 이들 ‘광김’ 자부심의 중심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1548∼1631)이 있다. 김장생은 율곡 이이 선생의 사상과 학문을 바탕으로 조선 예학을 정비한 한국 예학의 대표적 학자다. 13세 때 귀봉(龜峰) 송익필(宋翼弼)에게 사서(四書)와 근사록(近思錄)을 배웠고, 20세 때부터 율곡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1578년 6품직에 오르면서 벼슬생활을 시작해 종친부전부(宗親府典簿), 철원(鐵原)부사, 공조참의(工曹參議), 형조참판 등을 지내고 낙향했다. 김장생의 종가는 충남 논산에 있다. 군사훈련소로 유명한 도시라 의정부나 평택처럼 군사도시 같은 느낌을 주지만, 논산 지방은 조선 중기부터 경북 안동지방의 영남학파에 맞선 기호학파의 중심지였다. 논산 연산면 고정산 자락에 자리한 종택은 김장생과 그의 뜻을 받들어 예학을 집대성한 아들 김집(金集·1574∼1656)을 배출한 집인데, 믿기지 않을 정도로 소박하다. 김장생이 현실 정치에 참여하느라 주거에 큰 신경을 쓰지 않은 서인(西人)이던 탓도 있겠으나, 그가 청백리(淸白吏)에 오를 만큼 청빈하게 살았던 영향도 있을 것이다. 효자문과 사당 주변의 묘역, 그리고 종가 한가운데 버티고 있는 ‘염수재(念修齋)’만이 예학의 종주 김장생 종가임을 짐작케 한다. 효자문을 들어서면 먼저 열십자로 난 돌길이 눈에 들어온다. 이것은 제사 때 제관들이 다니는 길을 표시한 것으로, 첫눈에 이 집이 예학의 본거지임을 느끼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