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연의 이치가 곧 비결(秘訣)이다.
서산대사는
한낮에 닭 울음소리를 듣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나는 개 때문에 득도(?) 비슷한 것을 했다.
언젠가 오래 전에, 개밥을 주고 보니
이 녀석이 밥을 먹기 전에 물을 먹고,
또 밥을 먹다가도 물을 먹고 있었다.
흔히 식사직전이나 식사 중에 물을 마시면
소화액이 희석되어 소화가 잘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고,
나도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다.
이치적으로도 그럴듯하고 유명한 아무개 박사의 주장이니
감히 누가 토를 달 수도 없는 화두였었다.
“자연은 인간의 스승이라는데....” 하면서
스승의 시범(?)을 숙제로 삼아
소화의 메커니즘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해 보았다.
소화액은
주사액의 용량처럼 몇 CC의 정량(定量)으로
한번 분비되고 끝이 아니라 위(胃)에 음식물이 남아 있는 한
그 소화의 공정이 끝날 때까지 적정비율을 유지하며
필요할 경우엔 더 분비한다.
소화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비로서 위저부(胃底部)에 있는
유문(幽門: pylorus)을 열어서
음식물을 십이지장으로 보내게 된다.
고기를 먹었을 때 오래 든든한 기분이 되는 것은
탄수화물보다 유문이 훨씬 늦게 열리는 탓에
만복감(滿腹感)이 오래가기 때문이다.
식사 중에 물을 마시고 싶은 욕구는
위(胃)에서 음식물을 반죽(?) 하는데
물이 필요하다고 보내는 신호인데 그걸 참는 것은
그 명령을 거부하는 것이 된다.
필요할 때는 음료수를 곁들이면서 식사를 즐기는 게
자연에 순응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어렸을 때, 고양이를 키우자고 말했더니
할머니께서 “고양이를 키우면
쥐가 꼬여서 안 된다”고 하셨다.
그 때 나는 ‘쥐 잡는 게 고양이인데 할머니는
그것도 모르신다’고 생각 했었다.
그런데 미국에 와서 그것도 중년이 된 나이에
우연히 읽은 책에서 고양이 똥에는 쥐가 좋아하는
중독성의 물질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진리는
연구소의 실험실에서 찾아지는 게 아니라
관찰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에디슨은
"발명이란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것을 찾아내는 것이며,
그 때 그가 찾은 것이 그의 발명이다."라고 말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끼고,
느끼는 만큼 즐길 수 있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세상사는 학문처럼
단순하거나 명료하지 않다.
어떤 선입관(先入觀: preconception)이 있으면
보이는 것이 다르니 느끼는 것도 다르게 된다.
어렸을 때,
여름날 잔디밭에 누워서 뭉게구름을 한참 바라보면
그 모습이 말이나 염소 등등의 나름대로의
모습으로 연상된다.
한번 그렇게 이미징(imaging)된 것은
한참 뒤에 다시봐도 금방 그 모습으로 보인다.
선입관이란 그런 것이다.
세상에는
건강의 비결,
성공의 비결,
행복의 비결 등등의 비결(秘訣)들이 많다.
비결이란
세상에 알려져 있지 않은 비법(秘法)을 말한다.
그러나 그 비결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마다 그 타고난 체질이 다르고,
자질과 형편이 다르기 때문이다.
“인생은 단 한 번뿐이다.
남의 인생을 살지 마라.
네 목마름을 추구하라.
바보 같아도 좋다.”
애플 창업자이며 최고 경영자인
스티브 잡스(steve jobs)가 한 말이다.
그는 대학 입학 후,
한 학기 만에 자퇴를 하고 다시 두 학기 동안에
본인의 관심분야만 청강하는 것으로
학업을 마쳤다.
최근에 그가 발표한
아이패드(iPad) 열풍으로 인하여 경쟁사인 LG전자와
노키아의 CEO들이 사표를 써야 할 정도로
그는 천재이다.
그 성공한 천재의 조언대로 대학 1년생이
학업을 포기 한다면 어떻게 될까?
스티브는 물리학전공이었으나
철학과 고전문학에 더 심취하였다.
개발에 대한 영감은
그가 탐독한 고전에서 얻었다고 한다.
그는 제록스(Xerox)에서 개발하였으나
시장분석을 잘못하여 포기한 기술을 사들여서
애플 매킨토시를 만들었다.
폐광(廢鑛)을 사서 노다지를 캐낸 격이다.
이와 비슷한 케이스로는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있다.
그리스 신화 ‘퓌라모스와 티스베’의
플롯을 차용하여 쓴 소설이지만
불후의 명작이 되었다.
스티브는
자신의 신념에 대한 확신과 취직이 아니라
사업을 하겠다는 계획이었으니
학위에 연연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걸 평범한 학생이 따라서 한다면
거의 100% 실패라고 생각한다.
견문(見聞)을 넓힌다는 것은 어려운 공부를
많이 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체험적으로 많이 보고
들어서 그것을 몸소 내 것으로 만든다는 말이다.
학문이나 지식이 설령 그것이 진리라 할지라도 나와 직접적인
연결고리를 만들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재물을 잃은 것은 조금 잃은 것이요,
명예를 잃은 것은 많이 잃은 것이요,
건강을 잃은 것은 다 잃은 것이다.
어디선가 읽은 글이다.
사업에 실패하여 자살하는 사람도 있고,
돈에 명예를 파는 사람도 있으니 꼭 맞는 말은 아니지만
대부분은 건강에 우선을 둔다.
가끔 현대의학이 포기한 환자가 기적적으로 회복한
신문기사나 투병기를 읽게 된다.
투병기를 보면
그 환자는 (말기라고 병원에서 포기하니) '
이대로는 죽을 수 없다'는 결심으로 퇴원하여 산으로
들어가서 심신(心身)을 처절할 정도로
자연에 귀의(歸依)를 하였다.
환경과 생각과 몸을 전과는 전혀 다른 조건에 적응시킨
결과에서 얻은 것이 병의 치유(治癒)이었다.
면역체(免疫體)는
조물주(造物主)가 준 만병통치(萬病通治)약이다.
어느 병이든 손상된 그 면역체를 다시 복구하여
활성화 시키면 치유된다.
면역체의 복구는 약으로 되는 게 아니라
원시적(原始的) 자연속으로 들어가서 잠재되어 있던
마음의 상처까지도 들어내서 씻어내야 한다.
마음의 치료는
우선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재확인하고
자기 스스로에 대한 사랑으로 시작된다.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가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 때문이 아니라
철저히 나 자신에서 찾아야 한다.
위에서 스티브 잡스가 말한 “인생은 단 한 번뿐이다.
남의 인생을 살지 마라.”를 인용해보면
여러 가지의 답이 나올 수 있다.
종교가 있다면 그 종교에 의지하는 것도
도움이 될 수는 있으나 막연한 초능력(超能力)이나
극기(克己)로 병을 이기려고 하면 실패한다.
종교이념이나 성현(聖賢)의 논리에 의한
타의적인 용서나 이해는
치유가 아니라 덮어버리는 것이다.
본인의 입장과 수준에서의 이해나 용서로
마음의 매듭을 풀어야 그게 마음의 치유가 된다.
<이웃 집 잔디는 항상 (우리 것보다) 더 푸르다 /
미국의 속담이다.
어쩌면
이웃은 우리 잔디를 부러워할지도 모른다.
위의 그림에서 오렌지계통의 띠는
중앙의 하트표시의 색과 동일하지만
주변의 색에 의하여 다르게 보인다.
행복이란 그런 것이다.
사람은 종종
손에 쥐고있는 것의 소중함을 모른다.
반대로 떠난 것은 실제보다 더 크게 생각된다.
내가 준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크다는 생각 때문에
늘 손해를 본다고 결론하기도 한다.
세상이 불공평한 것 같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한 예로,
떠난 애인을 탓하나 내 잘못이
그를 떠나 보낸 경우도 있을 수 있고,
상대가 받은 것 그 이상으로 보답하려 해도
표현이 미숙(未熟)하거나 형편이 안 되는 경우도 있다.
나를 한 차원 높여서
상대를 용서나 이해를 하게 되면 상대에 대한
경멸의 우월감은 생길지 모르나
마음의 치유는 되지 않는다.
자연은 평(平) 속에서만
유대를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내 헛된 날에 이 모든 일을 본즉
자기의 의로운 중에서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 중에서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케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 말며 우매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느냐
(전도서 7:15)
성경의
지혜서(智慧書) 중의 하나인 전도서에서
솔로몬이 한 말이다.
내가 과문(寡聞)한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마음의 치유에는 이 보다
더 유용한 말이 없다고 생각한다.
건강의 비결은
자연속에 오픈 소스(open source)로
예시(例示)되어 있다.
만물의 영장(靈長)이라는 허울을 벗고
야생의 짐승이 되어 관찰을 하다보면
그 길이 보일 것이다.
by/소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