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民學校 다닐 때 아이들이 어찌나 많은 지 한 반에 보통 70명이 넘었다. 10반을 넘었으니 쉬는 시간에 운동장(運動場)을 내려다보면 거짓말 안 보태고 새카맣게 보였다.
몇 학년 때인가 기억이 안 나는데 내 짝은 몹시 마르고 까무잡잡한 여자 아이였다. 짝은 도시락을 한 번도 가져오지 않았고 옥수수 빵을 받아먹었다.
그런데 그 빵도 다 먹지 않고 남겨서 가방에 넣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연필(鉛筆)이니 공책도 없을 때가 많았고 그림 도구는 아예 준비(準備)를 해오지 않았다. 그래서 내 것을 많이 썼는데 정말 아껴서 잘 쓰려고 하는 것이 보여 반 쯤 쓴 크레용 세트와 도화지를 나누어 주기도 했다. 어느 날인가 그 애가 빵을 받아서 자리에 앉는데 그 냄새가 너무 좋아서 내 도시락과 바꾸어 먹자고 했다. 그래도 되느냐고 하면서 짝은 너무나 맛있게 도시락을 비웠고 나는 옥수수 빵을 잘 먹었다.
내가 짝에게 앞으로 종종 바꾸어 먹자고 했더니 그 애는 그렇게 좋아했다. 나는 그 시절만 해도 빵순이었고 옥수수 빵은 밥보다 훨씬 맛있었다.
아버지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더니 그저 미소(微笑)를 지으며 밥을 많이 담아 가라고 할 뿐이었다.
다음 날도 바꾸어 먹었는데 그 애는 반 정도 먹고 남겨서 새까만 빈 도시락에 모두 담는 것이었다.
나는 왜 그러느냐고 묻지도 않고 집에 와서 아버지에게 또 미주알고주알 다 말했다.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 이며 짝이 어디 사느냐고 물었으나 나는 몰랐다. 그런 일이 되풀이되고 어느 날 아버지가 하굣길에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짝과 함께 나오던 길 이었는데 아버지는 그 애 집에 가자고 했다. 짝은 무서워하면서 무조건 잘못했다고 말하며 울음을 터트렸다. 쌀밥과 빵을 바꾸어 먹은 일을 들켜 혼을 내는 것으로 생각하고 울음이 터졌다고 후일 그 애가 내게 말했다.
아버지는 무릎을 구부리고 앉으며 그 아이를 안아 주었고 우리는 함께 짝의 집 까지 걸어갔다.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산다는 고갈산 밑의 동네는 온통 루핑지붕 집이었고 생전 처음 가보는 이상한 세계였다. 나는 못 들어가고 아버지만 들어갔는데 한참 있다 나온 아버지의 손을 잡고 동네를 벗어날 때 까지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먼저 입을 연 아버지는 짝에게 잘해주라고 했다.
"니 나이 때의 아이라 한참 먹을 때인데 도시락을 반 남겨서 집에 가져간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지. 아버지의 그 이유가 궁금했었어. 밥을 가져가서 저녁으로 먹는다면 그렇게 굶기는 부모(父母)는 못 쓰는 사람들인 것 이야.
그런데 네 짝은 그 밥을 가져가서 물을 넣고 끓여 아픈 아버지께 죽을 끓여 드린 거야. 아버지가 많이 아파서 어머니가 장사해서 겨우 먹고 사는데 아버지 끓여 줄 쌀 한 줌이 없는 것이야. 새까만 보리밥만 해 먹으니 아픈 사람이 먹지를 못하는데 쌀밥 죽을 먹고 많이 원기(元氣)를 차렸다고 하는구나. 심청이 못지않은 아이야."
아버지가 짝의 집에 무엇을 해주었는지 나는 다 모른다. 짝의 어머니가 시장의 안전 한 곳에서 고정적인 장사를 하게 되었고, 쌀가마니가 왔다고 그 애가 내게 울면서 말해서 알았다.
아버지는 그 애가 심청이 같은 효녀(孝女)이기에 작은 도움을 주었다고만 했고, 나도 그렇게만 알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엄마가 알면 시끄러워지고 싸움이 나기 때문에 그런 일은 말하지 않는 것이 옳았다.
언제나 말하지만 우리 집은 부자(富者)가 아니었고 때론 아버지의 자선(慈善)은 지나칠 때가 있다는 것을 나도 알았다. 장사해서 남 다 퍼 준다고 엄마가 대들면 아버지는 허허 웃으며 항상(恒常) 하는 말이 있었다. "두 개 다 가지면 행복(幸福) 하니? 곳간에 많이 쌓아 두면 더 행복(幸福) 하냐? 쪼끔만 나누어 주면 신간이 편한데 그것이 더 좋지 않니?"
쪼끔만 나누어주면 신간이 편하다... 신간이 편하다는 그 말의 뜻을 나는 요즘 알아가는 듯하다.
두 개 가지고 있어서 幸福이 두 배가 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어 그 幸福감이 주는 느낌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두 개를 나누어 나는 한 개만 있게 되었는데 그 충만(充滿)한 느낌은 두 배, 세 배가 되니 아버지가 왜 그랬는지 이제야 알게 된다.
이북에 있는 조부모님 은 집에 찾아오는 사람 그 누구도 빈 손으로 보내지 않았는데 한 번도 재산(財産)이 준 적이 없노라고 아버지는 늘 내게 말했다. 나누어서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쳐준 유산(遺産)이 내게는 무엇보다 귀한 유산(遺産)이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그저 습관(習慣)이 되어 나눈 시간이 조금도 아깝지 않다.
두 개 다 가져서 행복(幸福) 하니? 껄껄 웃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이렇게도 선명(鮮明)하다.
권영심(변호사)여자가 쓴 글입니다.
'남을 행복(幸福)하게 하는 것은 향수(香水)를 뿌리는 것 같다. 뿌릴 때는 자기에게도 몇 방울 정도는 묻기 때문이다'
첫댓글 부산 영도 청학동에 고갈산이 있는데 6.25전쟁후 피난민이 많이 살았고 그중에 우리 가족이 살았습니다
그 당시 처참한 생활이 기억에 생생 합니다
다시는 이땅에 전쟁이 없기를 간절히 기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