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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났다.”
<다니엘 예언서의 말씀 7,2ㄴ-14>
나 다니엘이
2 밤의 환시 속에서 앞을 보고 있었는데, 하늘에서 불어오는 네 바람이 큰 바다를 휘저었다.
3 그러자 서로 모양이 다른 거대한 짐승 네 마리가 바다에서 올라왔다.
4 첫 번째 것은 사자 같은데 독수리의 날개를 달고 있었다.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그것은 날개가 뽑히더니 땅에서 들어 올려져 사람처럼 두 발로 일으켜 세워진 다음, 그것에게 사람의 마음이 주어졌다.
5 그리고 다른 두 번째 짐승은 곰처럼 생겼다.
한쪽으로만 일으켜져 있던 이 짐승은 입속 이빨 사이에 갈비 세 개를 물고 있었는데, 그것에게 누군가 이렇게 말하였다.
“일어나 고기를 많이 먹어라.”
6 그 뒤에 내가 다시 보니 표범처럼 생긴 또 다른 짐승이 나왔다.
그 짐승은 등에 새의 날개가 네 개 달려 있고 머리도 네 개였는데, 그것에게 통치권이 주어졌다.
7 그 뒤에 내가 계속 밤의 환시 속에서 앞을 보고 있었는데, 끔찍하고 무시무시하고 아주 튼튼한 네 번째 짐승이 나왔다.
커다란 쇠 이빨을 가진 그 짐승은 먹이를 먹고 으스러뜨리며 남은 것은 발로 짓밟았다.
그것은 또 앞의 모든 짐승과 다르게 생겼으며 뿔을 열 개나 달고 있었다.
8 내가 그 뿔들을 살펴보고 있는데, 그것들 사이에서 또 다른 자그마한 뿔이 올라왔다.
그리고 먼저 나온 뿔 가운데에서 세 개가 그것 앞에서 뽑혀 나갔다.
그 자그마한 뿔은 사람의 눈 같은 눈을 가지고 있었고, 입도 있어서 거만하게 떠들어 대고 있었다.
9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옥좌들이 놓이고 연로하신 분께서 자리에 앉으셨다.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고 머리카락은 깨끗한 양털 같았다.
그분의 옥좌는 불꽃 같고 옥좌의 바퀴들은 타오르는 불 같았다.
10 불길이 강물처럼 뿜어 나왔다.
그분 앞에서 터져 나왔다.
그분을 시중드는 이가 백만이요 그분을 모시고 선 이가 억만이었다.
법정이 열리고 책들이 펴졌다.
11 그 뒤에 그 뿔이 떠들어 대는 거만한 말소리 때문에 나는 그쪽을 보았다.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그 짐승이 살해되고 몸은 부서져 타는 불에 던져졌다.
12 그리고 나머지 짐승들은 통치권을 빼앗겼으나 생명은 얼마 동안 연장되었다.
13 내가 이렇게 밤의 환시 속에서 앞을 보고 있는데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
14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
✠ 복음
“너희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21,29-33>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29 비유 하나를 말씀하셨다.
“무화과나무와 다른 모든 나무를 보아라.
30 잎이 돋자마자, 너희는 그것을 보고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
31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3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33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앞을 볼 수 있는 눈>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서 새로운 싹이 트면 계절의 변화를 느끼듯 세상의 여러 혼돈과 징표를 보면 그것의 의미를 알아들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하나의 혼돈은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데 꼭 거쳐야 할 과정입니다.
하나의 풍파가 몰아치면 그것을 계기로 새로운 틀이 만들어집니다.
그러므로 “혼돈과 어둠 속에서 움터 오르는 새 하늘, 새 땅의 창조와 광명을 내다보는 눈”, 혜안을 가진 이는 행복합니다. (이현주 목사)
주님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혼돈은 사라지고 하느님의 나라가 우뚝 선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큰 기쁨입니다.
또한 구원받을 때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 마음 설레게 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마음 한구석엔 두려움이 있습니다.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느님께서 ‘각자가 행한 대로 갚아 주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성직자를 떠받쳐 위하고 거룩하게 보지만 그 속을 알면 누구보다도 부끄러움이 많고 자비를 간구해야 할 사람입니다.
맑고 깨끗한 마음의 소유자로 부끄러움이 없기를 희망합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하신 약속의 말씀들은 언제나 살아있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는 영적인 삶과 육적인 삶의 대조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담고 살아야 합니다.
말씀을 들었으면 그에 걸맞은 삶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모든 것이 사라질지라도 가슴에 남는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세상 것은 사라지지만 주님의 말씀을 차지한 사람은 영원합니다.
나자렛 예수는 사라질지라도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영원한 것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1요한 2,17)
나 자신의 한계 속에 내 옆에 계시는 예수그리스도를 얼마나 의식하고 있는가를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일상 안에서 내 마음 내키는 대로 하면 뻔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면서도 걸려 넘어지고 나서야 후회를 하고 새로운 다짐과 시작을 합니다.
마지막 날이 언제 올 것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명한 것은 “그날이 오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아니 그날이 오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마지막 때에 주님을 떳떳이 만날 수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앞을 내다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말씀 안에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청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내 마음 안에서 주님의 말씀이 살아 있기를 희망합니다.
“당신 말씀은 제 발의 등불, 저의 길에 빛”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119,105)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야고 1,22)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아야”>
오늘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 세상의 종말과 하느님께서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깨우쳐주십니다.
곧 무화과나무에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을 알 수 있듯이(루카 21,30), 세상의 사건들을 통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아야”(루카 21,31) 한다고 깨우쳐 주십니다.
시대의 징표를 깨닫는다는 것은 단순히 비가 올지 혹은 안 올지 추울지 혹은 더울지를 감지해내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징표를 통해 ‘하느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시대의 징표를 진정 깨닫는다면 세상을 달리 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마음’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곧 ‘하느님의 마음’으로 사람을 만나고, ‘하느님의 마음’으로 모든 사건을 바라보고, 모든 사건들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이 세상에 당신의 나라를 펼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는 먼 미래에나 혹은 이 세상 밖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언젠가 먼 미래에 오시는 분이 아니라 ‘이미’ 오셨고 ‘지금 여기’에 와 계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지금 이곳에, 내일이 아니라 오늘, 내년이 아니라 올해, 우리의 비참함이 다 지나가고 난 뒤가 아니라 지금 이 비참함 한가운데에,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서 있는 이곳에 와 계십니다.
만약, 우리가 ‘이미’ 오신 주님을 모르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아니한 까닭일 것입니다.
우리가 완고한 까닭일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을 이미 받았음을 보는 것이야말로 정말 위대한 발견이 될 것입니다.
사실 그 발견은 우리가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그것이 우리를 발견하는 것에 해당합니다.
그것은 ‘베풀어진 하느님의 선물’이 먼저 우리를 발견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느님께 무엇을 청한다는 것은 그것을 주시도록 하느님을 설득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주신 그분의 선물을 알아차리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미 맛보기 시작한 그 무엇을 청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처럼 당신의 사랑이 먼저 우리에게 베풀어졌기 때문에 모든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오늘 이토록 하느님께서는 먼저 베풀어진 당신의 사랑으로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깨우쳐주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루카 21,33)
주님!
당신의 말씀이 제게서 사라지지지 않게 하소서.
제게 뿌리신 말씀이 자라나 열매를 맺게 하소서.
당신께 승복하게 하시고 말씀으로 활기차게 하소서.
제 영혼이 당신의 자리이오니, 말씀을 이루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토 수도회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마지막 시대에 해답은 유대인이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때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때는 갑작스럽게 오지 않고 ‘순차적’으로 올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나무에 새순이 돋아나고 전체적으로 잎이 생기기 시작하면 “곧 겨울이 오겠다.”라고 말할 사람은 없습니다.
봄이 왔고 여름이 오리라는 것을 누구나 다 압니다.
따라서 마지막 때도 눈만 감고 있지 않으면 다 알 수 있으리라는 뜻입니다.
성경에 예언된 마지막 때의 가장 확실한 표는 이스라엘의 재건입니다.
2천 년 이상 나라가 없이 떠돌다가 다시 나라가 재건되는 경우는 역사에 없습니다.
인원이 많지도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인구가 현재 1,300만 정도 됩니다.
우리나라 인구의 1/3 수준입니다.
그런데 이 나라는 1948년 독립국으로 되었고 전쟁을 통하여 이전 땅을 회복했습니다.
10억이 넘는 주위 아랍 나라들도 전쟁을 하면 천만 명의 이스라엘에 집니다.
성경에 예언된 순차적인 진행은 이렇습니다.
일단 이스라엘이 그리스도를 배척하여 이방인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고, 나중엔 이방인이 그리스도를 배척하여 이스라엘의 시대가 다시 도래할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
(루카 21,24)
이는 예수님만 그렇게 예언하신 것이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도 똑같이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이 신비를 알아 스스로 슬기롭다고 여기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 신비는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의 일부가 마음이 완고해진 상태는 다른 민족들의 수가 다 찰 때까지 이어지고 그다음에는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로마 11, 25-26)
하느님께서 당신을 배척할 이스라엘을 정화하기 위해 2천 년의 시간을 이용하신 다음 그 정화가 끝난 이스라엘을 다시 구원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실제로 외국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은 거의 대다수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있는 상태라고 합니다.
이런저런 상황을 볼 때 이제 종말이 멀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처럼 이방 나라들이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을 유지하는 이스라엘은 덜 고통을 당할 것은 뻔합니다.
우리도 지혜가 있다면 이스라엘과 닮아가야 합니다.
마지막 때는 어쨌건 유대인이 답입니다.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모세와 예수님과 프로이트, 그리고 마르크스와 아인슈타인이 하늘에서 토론하고 있었습니다.
토론 주제는 ‘인간 사회를 움직이는 핵심적인 원리가 무엇인가?’였습니다.
먼저 모세가 십계명을 손에 들고 말했습니다.
“법이 전부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당신 손의 못 자국을 보여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아니, 사랑이 전부죠.”
셋째로 프로이트가 자신이 쓴 『꿈의 해석』을 들어 보이며 말하였습니다.
“무의식과 섹스가 전부에요.”
마르크스가 밥을 먹다 숟가락을 놓으며 목소리를 높입니다.
“밥이 전부죠. 돈이 전부에요. 이게 세상을 움직인다고요.”
그러자 아인슈타인이 조용히 칠판에 ‘E=MC²’이라 휘갈겨 쓴 다음 말했습니다.
“모든 것은 상대적입니다.”
여기의 모든 등장인물이 모두 유대인입니다.
유대인이 이 세상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보여주는 유대인식 조크입니다.
유대인들이 세상에서 보여주는 역량에 대해 말하자면 입만 아플 뿐입니다.
발명가 에디슨, 20세기 최고 부자였던 록펠러, 퓰리처상을 만든 조지프 퓰리처, 투자의 귀재 조지 소로스, 전설의 앵커 래리 킹,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컴퓨터의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 구글의 래리 페이지, 아마존의 제프 베저스, 스타벅스의 하월드 슐츠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어마어마한 인재들이 유대인일 뿐 아니라, 재산 10억 달러 이상인 미국인 가운데 1/3이 유대인이고 미국 유명 대학 교수 중 1/5이 유대인이며, 노벨상 수상자의 30%가 유대인입니다.
전 세계 인구의 0.2%가 이런 역량을 발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머리가 좋아서일까요?
핀란드 헬싱키 대학의 연구 결과 유대인의 평균 IQ는 95이고 한국인은 106입니다.
그들이 이런 성과를 올리는 이유는 머리가 좋아서가 아닙니다.
그들이 이런 역량을 발휘하는 근본적인 이유 하나를 말하라면 ‘자존감’입니다.
피카소도 유대인인데 유대인은 어머니만 유대인이면 유대인이 됩니다.
피카소의 말을 들어봅시다.
“ 내 어머니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네가 군인이 된다면 장군이 될 것이고 네가 성직자가 된다면 너는 교황이 되겠지.’
대신에 나는 그림을 그렸고 피카소가 되었다.”
유대인들은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자존감 때문에 이런 삶을 사는 것입니다.
누구든 될 수 있다고 믿으면 할 수 있습니다.
될 수 있다고 믿으면 실패해도 좌절하지 않고 모든 에너지를 한 곳에 집중하기 때문에 큰 성과를 거두는 것입니다.
피카소는 말합니다.
“모든 사람은 잠재적으로 같은 양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평범한 사람들은 그 에너지를 여러 가지 사소한 일로 낭비한다.
나는 내 에너지를 단 한 가지, 그림에만 집중한다.
그림을 위해 나머지 모든 것은 포기한다.”
이런 자존감은 어디서 올까요?
바로 ‘종교교육’에서 옵니다.
부모가 아무리 자녀에게 자존감을 주려고 하더라도 ‘넌 내 자식이야!’라고 하면 ‘인간’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대신 “넌 하느님 백성이야!”라는 자존감을 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게 됩니다.
그래서 무엇이든 다 해냅니다.
그들은 바다를 가른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부모가 하는 것은 자녀를 하느님께 끊임없이 봉헌하는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도 성전에 봉헌되셨고 예수님도 봉헌되셨습니다.
12살 성인식 때는 아들이 사라져도 부모는 사라진 줄도 몰랐습니다.
이미 자신의 자녀가 아니라 하느님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12살 때 대학 등록금 정도를 유산으로 물려줍니다.
그리고 믿어줍니다.
자존감을 깎아내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유’를 빼앗는 것입니다.
부모가 '이거 해라, 저거 해라'라고 시키면 아이들은 ‘아, 나는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혼자 할 수 없는 존재구나!’라고 느끼게 되고 자존감이 바닥인 어른으로 성장합니다.
그의 머리에는 부모가 도와주지 않으면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믿음이 박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이 멋진 자녀들을 키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어서 자녀를 많이 낳습니다.
이것도 자존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유럽이 출산율이 높다고 해도 이스라엘의 절반입니다.
우리나라는 세계 꼴찌입니다.
아이를 키울 자신감이 없는 것입니다.
자녀를 낳아 번성하라는 하느님의 뜻을 결국 잘 지키고 있는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요?
이스라엘입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가는 것은 명약관화합니다.
이때 성경에 예언된 대로 믿으면 마지막 때에 우리가 본받아야 하는 나라는 이스라엘입니다.
특별히 이스라엘의 종교교육을 통한 자존감 높이는 가정교육을 본받아야 합니다.
결국 미래는 우리 자녀들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돈만 많이 벌면 뭐하겠습니까?
집값도 오르고 물가도 오르고 교육비도 오릅니다.
그래서 결혼을 안 하고 아이를 안 낳아도 사는 것이 힘든 것은 똑같습니다.
마지막 때가 가까워져 올수록 유대인들이 비록 예수님을 죽인 민족이기는 하나 결국 예수님도 유대인이고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기에 유대인들을 연구하고 본받아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버린 벌로 받았던 고통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바라봄의 관상 -하느님 나라의 표징을 읽고 삽시다>
어제에 이어 시편 화답송 후렴이 똑같습니다.
“영원히 찬송하고 찬양하여라.”
참으로 관상적 삶을 위해 어느 때보다 하느님 찬송과 찬양이 절박한 시절입니다.
영성체송 시편도 은혜롭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주님 사랑 우리 위에 꿋꿋하셔라
주님의 진실하심 영원하셔라.”
(시편 117.1-2)
코로나와 기후 위기의 시대, 영적 관상의 깊이의 삶이 날로 절실해지는 시대입니다.
20세기 베네딕도회 영성을 대표하는 세 분의 관상가를 연대기순으로 소개하고 싶습니다.
장 레크레르끄(1911-2000), 토마스 머튼(1915-1968), 그리고 드 브궤(1926-2011) 신부입니다.
아마도 베네딕도 규칙에 대한 연구에서 고 이형우 시몬 베드로 아빠스의 논문 지도 교수였던 드 브궤 신부님을 능가할 분은 아무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이 토마스 머튼이 1968년 선종하기까지 장 레크레르끄와 토마스 머튼이 1950년부터 무려 18년간 나눈 서신들입니다.
양극단의 관상가가 얼마나 서로 잘 보완하고 이해하고 있는지 놀랍습니다.
장 레크레르끄 신부는 707이라는 여객기 번호 별명이 붙을 정도로 세상 곳곳 수도원을 방문했던 외향적인 분이었고, 토마스 머튼은 세상 곳곳의 사람들이 그분이 머문 게세마니 트라피스트 수도원을 찾았던 큰산같은 아주 내향적인 분이었습니다.
세 관상 영성 대가의 공통점은 하느님께 대한 갈망과 배움에 대한 사랑, 그리고 수도승 삶에 대한 열렬한 사랑입니다.
오늘 ‘바라봄의 관상’이란 강론 주제에 문득 떠오른 일화의 소개였습니다.
이기락 신부의 ‘아남네시스(기억, 추억, 회고라는 뜻의 그리스말로 성체성사를 뜻함)’라는 서품 25주년을 맞이하여 출간한 책(82-83쪽)에 나오는 저에 관한 내용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세례를 축하하며 이수철 신부의 ‘바라봄(觀)’이라는 시를 선물로 드립니다.
“전체를 보는 것이다/삶은 흐른다.
애정 어린 시선으로 보는 것이다/기다리는 것이다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는 것이다
가을의 황홀함과 겨울의 적요/빛과 어둠
아름다움과 추함/강함과 약함
함께 받아들이는 것이다/사랑하는 것이다”
이수철 신부의 시에서처럼 우리의 바라봄도 예수님처럼 전체를 보고, 애정 어린 눈길로 바라보고,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며 기다릴 줄 알게 되었으면 합니다.”(2001.2.11. 청담동성당 연중 제6주일 강론중)
바로 이런 바라봄의 관상적 시선으로 제1독서 다니엘서를 묵상합니다.
모든 것은 지납니다.
모든 것은 강물 흐르듯이 흐릅니다.
그 영원할 것 같던 대제국 바빌론, 메디아, 페르시아, 그리스, 마침내는 로마제국이 무너져 사라졌습니다.
바로 첫 번째 사자같은 짐승은 바빌론을, 두 번째 곰같은 짐승은 메디아를, 세 번째 표범같은 짐승은 페르시아를, 네 번째 커다란 쇠이빨을 가진 짐승은 그리스 제국을 상징합니다.
이 네 제국이 명멸한 후 주님의 영원한 나라를 환시중에 바라보는 관상가 다니엘입니다.
바로 다니엘은 우리가 이 거룩한 미사중에 모시게 될 사람의 아들, 파스카의 예수님을 미리 보여줍니다.
다니엘서 마지막 부분이 고무적이라 그대로 인용합니다.
“내가 이렇게 밤의 환시 속에서 앞을 내다보고 있는데, 사람의 아들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
그대로 오늘 복음을 통해, 또 2000년 유구한 역사의 가톨릭교회를 통해 서서히 실현되고 있는 다니엘의 예언입니다.
다니엘처럼 오늘 복음의 예수님 역시 바라봄의 관상의 대가임이 분명합니다.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통해 오늘 지금 여기 곳곳에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알리는 하느님 나라의 표징을 알아채라 하십니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흐르는 세상 속에서도 하느님 나라의 표징을 통해 영원한 말씀이신 그분을 깨달아 알아 모시고 살라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정주영성도 우리 모두 관상가가 되어 이런 영원하신 주님을 바라보고 사는 데 궁극의 목적이 있음을 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시공을 초월하여 대림을 앞둔 연중 마지막 34주간, 오늘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깨어 바라봄의 관상가가 되어 오늘 지금 여기 도래하는 하느님 나라의 표징을 알아채어 읽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코로나와 기후 위기로 혼돈의 어둠 중에 있는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시의적절한 주님의 복음 말씀입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행복기도시 한 연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하느님 나라의 표징들이옵니다.
당신의 선물들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지상천국, 하느님 나라이옵니다.”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했습니다.
코로나의 기승으로 인해 참으로 예측불가능한 어둡고 무겁고 암울한 세상일수록 하느님 사랑 안에 깊이 머물러 사는 관상가의 삶이 참으로 절실한 시절입니다.
어제 수도원에서 피정하고 떠나면서 이런 딱한 현실에 보름 동안 미사를 청한 어느 자매의 지향을 소개합니다.
“1. 코로나로 고통받고 있는 모든 분을 위하여
2. 모든 의료진들과 봉사자들 관련된 모든 분들 위하여
3. 육체적 정신적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모든 분들 위하여
신부님, 하루에 100명 이상이 자살을 한다고 하네요.
그중 청소년들이 많대요.
4. 청소년들과 젊은이들을 위하여
5.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들을 위하여”
세상을 향한 연민의 사랑이 넘치는 자매입니다.
자살자, 사고사, 병사로 소리없이 죽어가는 불쌍한 이들이 참 많은 흡사 내전 상태를 방불케 하는 현실입니다.
정치가들의 각성과 회개를 촉구합니다.
참으로 깨어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주님 안에서 힘껏 하루하루 관상적 깊이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오늘 복음 환호송의 권고가 적절합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루카 21,36)
아멘,
- 성 베네딕토회 성 요셉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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