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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 21일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제1독서 : 판관 9,6-15
복 음 : 마태 20,1-1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2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
3 그가 또 아홉 시쯤에 나가 보니 다른 이들이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었다.
4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자,
5 그들이 갔다. 그는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6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에도 나가 보니 또 다른 이들이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 하고 물으니,
7 그들이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하고 말하였다.
8 저녁때가 되자 포도밭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말하였다.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이들에게까지 품삯을 내주시오.’
9 그리하여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10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11 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12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
13 그러자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14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15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16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참 좋은 함께의 여정
-겸손과 지혜, 감사와 기쁨, 자비와 자유-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오늘 우리는 자랑스런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 미사를 봉헌합니다.
이미 살아서 성인으로 존경받은 교황님으로 만79세 비교적 장수를 누렸으며
교황님으로서의 업적도 오늘 본기도에 나온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에페1,10)라는 그의 모토대로 참 많았습니다.
성인은 참으로 가난하고 겸손하고 부지런하셨습니다.
“나는 가난하게 태어났고, 가난하게 살았으며, 가난하게 죽고 싶다.”고 늘 말씀하셨고
교황님의 유지대로 장례식도 최대한 간소하게 치러졌습니다.
1차 대전이 발발한 후 22일 후 1914.8.20.일 선종하셨는데
전쟁으로 인한 무수한 사람들이 살상되는 것을 한없이 비통해 하셨습니다.
어제의 몇 가지 일화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한 부제에 대한 일화입니다.
서품이 보류됐다가 2년 후 내년 2월에는 사제서품을 받게 되었다는데
1년6개월 동안 봉사터에서 참으로 소같이 묵묵히 일하고 살았다 합니다.
많은 분들의 절대적 신뢰와 사랑을 받았는데 바로 그 형제의 축일이 바로 오늘이라 합니다.
소같이 일하고 살았다는 비오 부제의 일화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또 하나의 일화 역시 감동적입니다.
엊그제에 이어 두 번째 수도원을 방문했다 갑자기 고백상담실을 찾았습니다.
알고 보니 죽음까지 생각하고 온 장년의 형제인데 씩씩하고 쾌활해 보여 전혀 상상을 못했습니다.
상담 때도 이런 내용을 비치지 않았는데 기도문 셋을 읽은 후,
보속 말씀 처방전을 읽을 때 비로소 울음을 터뜨리며 죽음까지 생각했음을 고백했습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 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
위 말씀에 “괜찮아 힘내!”라는 붉은 색 스탬프를 찍어 드렸습니다.
새삼 말씀의 위력을 깨달았습니다.
형제의 닫혔던 마음이 살아있는 말씀에 닿았을 때 저절로 열리며 쏟아지는 눈물이었습니다.
이어 기도와 미사봉헌을 약속하며 격려하고 위로했습니다.
하루 만났던 분들의 이름과 사정을 고스란히 기억했다가
다음날 미사를 봉헌하는 것이 저의 얼마 전의 결심입니다.
다시 방금 완성한 ‘함께의 여정-달맞이꽃 영성-’이란 자작시를 소리 내어 읽도록 했습니다.
‘달맞이꽃을 아느냐?’ 물었더니, “아, 밤에 피는 꽃이요.”란 대답에 기뻤습니다.
밤에 피는 달맞이꽃들, 하느님을 찾는 함께의 여정중인 도반이자 구도자인 우리 수도형제들을 닮았습니다.
참 신기하게도 올해 수도자들 숙소 앞 뜨락에 여름 한 철 내내 끊임없이 폈다 지는 달맞이꽃들입니다.
제가 유난히 달맞이꽃을 좋아하여 카톡 사진 찍는 것을 본 수도형제들이 베어 버리지 않고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달맞이 꽃밭입니다.
-“보라!
하느님/친히 가꾸시고 돌보시는
날마다/무수히 피어나는
수도원 가난한 뜨락/달맞이꽃들
함께의 여정이다
하느님만 찾는 구도자의 모범이다
참/놀랍다/반갑다/고맙다/새롭다
애오라지 일편단심/한결같은/하늘 향한 샛노란 사랑이다
꽃대와 뿌리는/참 질기고 억세고 단단하다
벌써 3개월째/한낮의 불볕더위 견뎌내며
여름 한 철 내내/끊임없이 폈다지며/하늘 향해 오르는 달맞이꽃대!
지칠 줄 모르는 열정
파스카의 꽃/달맞이꽃들/낮에는 죽은 듯 보이지 않다가
밤새 활짝 깨어 피어나
어둔 밤/환히 밝히는/님 맞이 달맞이꽃들
갈수록 더해지는 청초한 아름다움에 그윽한 향기다
늘 날마다
아침까지 계속되는
황홀한 축제의 여름밤이다.”-
앞서 소개한 성 교황 비오 10세, 소 같인 일하는 부제, 또 성사를 봤던 장년의 형제,
모두 달맞이꽃 영성에 적절한 분들입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도 함께의 여정에 주님을 닮은 달맞이꽃 영성을 지닌
‘님맞이 꽃’ 참 사람들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첫째, 겸손과 지혜의 사람들입니다.
겸손과 함께 가는 지혜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이들이 겸손하고 지혜로운 소통의 사람입니다.
주님을 모르고 자기를 모를 때 교만이요 무지의 불통의 사람들입니다.
바로 판관기 ‘요탐의 우화’에 나오는 올리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가 상징하는 사람들입니다.
“신들과 사람들을 영광스럽게 하는 이 풍성한 기름을 포기하고
다른 나무들 위로 가서 흔들거리란 말인가?”-올리브나무
“이 달콤한 것, 이 맛있는 과일을 포기하고 다른 나무들 위로 가서 흔들거리란 말인가?”-무화과나무
“신들과 사람들을 흥겹게 해 주는 이 포도주를 포기하고
다른 나무들 위로 가서 흔들거리란 말인가?”-포도나무
세 나무는 바로 자기를 아는 겸손하고 지혜로운 자들을 상징합니다.
깨어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제몫의 일에 충실한 사람들이야 말로
참된 구도자들이요 달맞이꽃 영성의 소유자들입니다.
이들의 방은 ‘지족암(知足庵;족함을 아는 자의 집)’이라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둘째, 감사와 기쁨의 사람들입니다.
감사와 함께 하는 기쁨입니다. 살 줄 몰라 불평이요 슬픔이지 살 줄 알면 감사와 기쁨입니다.
새삼 감사와 기쁨도 발견임을 깨닫습니다.
무지의 탐욕에 눈멀어 불평이요 슬픔이지 마음의 눈 열리며 감사와 기쁨입니다.
오늘 복음의 불평하는 일꾼들이 그러합니다.
정말 이들이 하느님 무상의 은총의 선물임을 깨달았더라면
비교를 통한 불평은커녕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했을 것입니다.
아침 일찍 고용된 자나, 아홉시, 열두 시, 오후 세 시, 오후 다섯 시에 온 이들
자기를 채용해 주신 주님을 상징하는 포도밭 주인에게 감사해야 했을 것입니다.
똑같은 급료를 받자 맨 처음 온 이들의 불평입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 군요.”
주님을 모르고 자기도 모르기에 이런 불평입니다.
무상의 주님의 은총을 깨달았더라면 감사와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꼭 루카 복음 15장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큰 아들의 불평을 닮았습니다.
아마 맨 처음뿐 아니라 오후 세 시까지 사이에 와서 일했던 이들의 심정도 모두 이와 같았을 것입니다.
참으로 이들을 불러 주신 주님의 은혜를 알았다면 모두가 불평은커녕 감사와 기쁨으로 응답했을 것입니다.
모두가 ‘함께의 여정Jouring Together’중에 있는 도반들이요 형제들이기 때문입니다.
공존공생이 상생이 답입니다. 함께 행복해야지 나 혼자 행복은 없습니다.
공동구원이지 개인구원도 없습니다. 혼자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갑니다.
베네딕도 규칙 72장 마지막 절도 생각납니다.
“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 것이니,
그분은 우리를 다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할 것이다.”
‘우리를 다 함께’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새삼 달맞이꽃 영성을 지닌 참 구도자의 두 번째 자질은 감사와 기쁨임을 깨닫게 됩니다.
셋째, 자비와 자유의 사람들입니다.
자비와 함께 가는 자유입니다. 참으로 자비롭고 너그러운 사람이 자유롭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닮은 구도자의 필수적 자질입니다.
바로 주님을 상징하는 오늘 하늘 나라 비유의 포도밭 주인이 그러합니다.
얼마나 너그럽고 자비롭습니까?
반면 이런 착한 목자와 판관기 요탐의 우화에 나오는 가시나무가 상징하는바
폭군 아비멜렉은 얼마나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지요!
일 시간에 관계없이 모두의 살림살이를 통찰하신 주인의 자비로운 처사입니다.
주인의 다음 말씀 역시 복음의 일찍 온 불평하는 일꾼들은 물론
옹졸하고 편협하고 이기적인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 바로 이게 예수님의 마음,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주님을 닮아 이런 너그럽고 자비로운 마음을 지닐 때
비로소 달맞이꽃 영성의 참 사람의 구도자라 할 수 있겠습니다.
세상 공평과 정의의 이기적 잣대로 하느님의 무상의 은총을, 자비를 재단하려는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오히려 모두를 깊이 배려하고 돌보는 주인의 자비를 깨닫고 배웠어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오후 다섯 시에 온 자에게도 똑같은 급료를 주신 주인께 감사했을 것입니다.
일자리가 없어 헤매던 많은 식솔을 거느린 가장이라 생각해 보면 답은 너무 자명합니다.
오늘 복음의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는 하늘 나라 비유입니다.
죽어서 가는 하늘 나라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살아야 하는 하늘나라입니다.
고립단절의 ‘썩어가는’ 혼자의 인생 여정이 아니라, 함께 관계의 여정 중에 ‘익어가는’ 인생입니다.
참으로 겸손과 지혜, 감사와 기쁨, 자비와 자유의 영성을, 달맞이꽃 영성을 살 때
자비하신 주님을 닮아 참 나의 실현에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늘 나라를 살게 됩니다.
하느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이런 참 좋은 자질을 선물하시어 날로 당신을 닮게 하십니다. 아멘.
류해욱 요셉 신부
교구의 인사이동으로 ‘가톨릭 평화신문 미주 지사’로 가게 되었습니다.
신문을 배달한 적은 있지만, 신문 제작을 한 적이 없습니다.
신문의 홍보, 유통, 판매는 알지 못합니다. 전임 신부님들이 닦아 놓은 길을 따라가려고 합니다.
28년 사제 생활을 돌아보면 본당이 아닌 곳에서 생활한 적이 있습니다.
사목국, 캐나다 연수, 용문 청소년 수련원, 성소국은 처음으로 맡았던 소임이었습니다.
이번에 맡겨진 소임도 잘 마칠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일의 성격과 규모는 달라도 일을 추진하는 과정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기다림입니다.
6개월 정도는 지켜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금의 과정과 지금의 결과는 누군가의 고민과 성찰의 결과입니다.
지금 나의 눈으로 보기에는 부족하고, 틀린 것 같지만 그런 것에도 다 이유가 있기 마련입니다.
성급하게 고치고, 바꾸고, 없애기 때문에 갈등과 오해가 생기곤 합니다.
둘째는 받아들임입니다.
씨를 뿌리는 분의 수고와 헌신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잡초를 뽑고 비료를 주는 분의 땀과 눈물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지금 내 앞에 보이는 건물, 내 앞에 보이는 성과는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먼저 이 길을 지나간 사람들의 기도와 땀방울이 모인 것입니다.
작은 허물에 대한 비난은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 것입니다.
셋째는 사람입니다.
제도와 조직을 운영하는 것은 사람입니다.
법과 제도를 집행하는 것은 사람입니다.
핀란드, 스웨덴, 노르웨이는 정치인들에 대한 신뢰가 아주 높습니다.
공무원들에 대한 신뢰가 아주 높습니다. 부정과 불의를 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이 가진 사람은 많이 내고, 적게 가진 사람은 적게 냅니다.
모든 사람이 국가로부터 정당한 대우를 받습니다.
‘천길 물길은 알아도 한길이 안 되는 사람의 마음은 모른다.’라고 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외모와 재물로 평가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선입견과 고정관념이라는 안경을 쓰고 사람들을 평가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신앙은 길이로 평가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앙은 하느님께 대한 충실한 마음으로 평가받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될 수도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하느님을 알았는지도 중요하겠지만
어떻게 하느님을 사랑하느냐가 더욱 중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이웃을 평가하고, 비난하기 전에 나에게 맡겨진 역할과 사명을
먼저 충실하게 이행하여야 합니다.
평가와 비난은 하느님의 몫으로 남겨 두어도 괜찮습니다.
하나하나 배우면서 기다리면 새로운 것을 보게 되겠지요.
길도 알게 되고, 사회의 흐름도 파악하게 되고, 궁금한 것이 풀리겠지요.
지금 내 앞에 놓인 꽃과 열매는 먼저 씨를 뿌리고 가꾼 분들의 땀과 열정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누려고 합니다.
일의 능력과 업적, 재능과 성과도 중요하겠지만 좋은 만남을 기대하면서 일을 시작하려 합니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믿습니다. 부족한 제가 맡겨진 일을 잘할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여러분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에 충분하십니까? 지금 가지고 있는 돈이면 충분하십니까?
지금 사는 집에 충분히 만족하십니까? 지금 내 위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많은 이가 지금보다 ‘조금 더 많이’ 가졌으면 하는 마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지금의 상황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과연 무엇 때문일까요? 다음의 두 가지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첫째,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때문입니다.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미래이기 때문에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보다 더 많이 갖고, 더 높은 곳에 올라야 충분하리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둘째, 남과 비교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자신보다 잘난 사람은 왜 이렇게 많은지, 그들과 비교하면서 지금의 상황이 결코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충분한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것이지요.
이 두 가지 이유를 제거하지 않는 한 충분하다는 생각을 절대로 가질 수가 없게 됩니다.
어느 심리학자의 이런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도무지 만족할 줄 모르는 어린아이가 한 명 살고 있다.’
언젠가 마트에 갔다가 마트 바닥에 누워서 마구 울고 있는 아이를 본 적이 있습니다.
아이는 장난감을 사달라고 떼를 쓰고 있었고, 엄마는 집에 똑같은 것이 있다면서 혼을 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너, 계속 철부지처럼 굴래?”
아이가 철부지인 것은 그러려니 하겠지만, 어른이 계속해서 철부지 모습을 보이면 어떨까요?
그런데 만족하지 못하면서 남들과 끝없는 비교를 하면서 살아간다면 이것이 바로 ‘철부지’ 모습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밭 임자가 일꾼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고용합니다.
이른 아침부터 일한 사람이 있었고, 9시에 계약을 맺어 일한 사람이 있었고,
또 12시, 3시에 계약을 맺고 일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5시에 계약을 맺고 일한 사람이 있었지요.
이제 저녁때가 되어서 품삯을 주는데, 이른 아침부터 일한 사람이나
오후 늦게 나와 잠깐 일한 사람이나 똑같이 주지요. 불공평해 보입니다.
이 불공평함을 느끼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똑같이 품삯 받는 것을 억울하게 생각하는 아침 일찍부터 일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받는 품삯에 만족하지 못하고, 또한 다른 이들과 비교를 해서
품삯이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판단은 세상의 기준을 떠나 똑같이 주어지는 사랑입니다.
이 하느님 판단에 불공평하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철부지’의 모습일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것에 만족하는 삶, 그래서 늘 감사하며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것을 세상 것처럼 생각하지 마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하느님께서 주신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애정이나 남을 동정하는 마음을 인정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고 또한 나누며 살아갑니다.
그 안에서 어떤 사람은 따뜻한 마음을 지녀서 인정미 넘치는 사람으로 부르고
어떤 사람은 야박하여 인정머리가 없다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자기도 모르게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바로 몰인정한 사람입니다.
몰인정한 사람은 세상에는 좋은 것이 많은데 좋지 않은 것을 더 많이 얘기하고
그것으로 마음에 화를 담기도 합니다.
물론 더 좋은 것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자꾸만 부정적으로 생각하여 봐야 될 것을 올바로 보지 못하게 됩니다.
자기는 잘하고 있다고 확신을 하고 있는데 남들이 보면 전혀 아닌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잘한다고 하는 것이 자기모순에 빠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인정 있는 사람이 되어야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포도원 일꾼과 품삯에 대한 비유입니다.
9시, 그리고 12시와 오후 3시, 그리고 오후 5시쯤에 일꾼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일꾼들의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하였습니다.
주인이 품삯을 계산하는데 5시에 온 사람을 먼저 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일찍 와서 일하던 사람들은 약속과 다른 더 많은 기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대가 무너지자 실망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 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주인이 약속을 어긴 것도 아닌데 상대적인 박탈감, 시기심으로 힘들어 하는 모습입니다.
그는 정의를 강조하는 모습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다른 이가 좋은 것을 얻는 모양새를 두고 내 안에서 악을 꺼내는 감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상대의 좋은 것을 파괴하고 싶어 하는 못된 욕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생각을 바꿔보면 어떨까요?
어렵고 힘든 사람이 그 시간에 일해서 당당하게 그 만큼을 벌었다고 한다면
그는 남에게 손을 벌려 동정을 받지 않았기에 자존심을 지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절박함에 처한 사람이 그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겠습니까?
내가 그들의 부족함을 채워주지 못하였는데 누군가 챙겨주었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정의보다는 사랑이 먼저입니다.
사랑은 정의를 포용하지만 정의는 결코 사랑을 포용할 수 없습니다.
사실 불평불만도 습관이 됩니다.
그러니 자기에게 주어진 것에서 만족하고 더 나은 내일을 위해서 노력할 것이지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불평을 할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 후하다고 해서 시기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비에 감사하고 나도 크게 베풀 줄 아는 인정을 지녀야 하는 것입니다.
주인이신 하느님의 것을 세상의 것처럼 생각하는 우리가 잘못 아닐까요?
인력시장에 가보신 적 있으시나요? 많은 사람들이 이른 새벽부터 일을 하기 위해서 기다립니다.
그러나 그야말로 매일 팔려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날은 누구도 자기를 사가지 않습니다.
종일 기다리다 허한 마음으로 쓰디쓴 하루를 마감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재수가 좋아서 일찍 팔려 나갑니다.
그들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기쁨이고 감사입니다.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 고역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찍 일을 나간 사람이 뒤늦게 일을 한 사람과 똑같은 임금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찍부터 일을 한 것이 재수가 좋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마음이 한 순간에 사라졌습니다.
주인에게 실망해서 불평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주인이 잘못한 것인가요?
실망과 좌절로 기다림에 지쳐있다 뒤 늦게 일을 한 사람은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주인의 자비가 얼마나 크고 사랑이 많은지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그것이 기쁜 소식이고 복음입니다.
만일 우리의 업적에 따라 보상이 결정된다면 우리는 더 이상 희망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부족함에도 후하게 주시기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초심을 잃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일을 많이 하고 적게 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어떤 정성을 쏟았느냐가 중요합니다.
‘얼마나’가 아니라 ‘어떻게’가 먼저입니다.
그러므로 매사를 긍정으로 생각하고 정성을 쏟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늘나라의 관점은 정말, 일의 성과가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을 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잘 가꾸어야겠습니다.
아무리 많은 일을 하였어도 사랑이 담기지 않으면 적게 일한 것이고,
적게 일한 것처럼 보여도 사랑이 담기면 많은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 무슨 일을 하던지 사랑을 담아서 하기 바랍니다.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마태6,23)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마태 20, 15)
한상우 바오로 신부
우리 삶은
어디만큼
가고 있습니까?
이른 아침입니까.
아홉 시입니까.
열두 시입니까.
오후 다섯 시입니까.
구원의 계획은
오직 주님께 있습니다.
무능한 우리를
나약한 우리를
가장 알맞은 때에
당신 포도밭 일꾼으로
초대하시는
넉넉하고 후하신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삶이란
약속한
한 데나리온처럼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저마다의 상황과
처지가 다른 삶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사람 입장이
되어보지 않고서는
그 사람을 알 수 없습니다.
주님 안에 있는
행복이
가장 큰 행복입니다.
시기와 질투
비교와 불평은
주님께 있는
행복을 놓치게 합니다.
주님을 향해
가고 있는 삶입니다.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묻습니다.
감사와 고마움이
빠져버린 삶은
언제나
삶의 원천이신
주님을 벗어나게 합니다.
우리
삶의 자리에서
감사와 행복을
우리를 살아가게 하시는
주님을 만납시다.
첫째가 꼴찌 되는 이유
전삼용 요셉 신부
입으로 그림을 그리는 김준호씨의 자서전에 있는 내용입니다.
그는 대학 2학년 때 기술병으로 군대 입대했습니다.
그런데 커다란 불행이 그에게 덮쳐오게 되었습니다.
탱크 위에서 작업을 하다가 그만 미끄러져서 거꾸로 땅에 떨어져 목을 다치게 된 것입니다.
그 때문에 그는 전신마비가 되었습니다.
손발을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그는 식사는 물론 일거수일투족을 남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는 부산 육군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다시 육군통합병원에 가서 치료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희망이라고는 조금도 찾아 볼 수 없게 되자 결국 원호병원으로 이송되었습니다.
한참 활동할 20대의 젊은 나이에 그는 몸밖에 움직일 수 없는 처절한 상황 속에서
매일을 절망과 슬픔으로 지내야 했습니다.
또한 너무 오래 누워 있어야 했기에 엉덩이와 어깨 죽지 부분이 썩어 들어가는 욕창으로
피부 이식 수술까지 받아야했습니다.
목 아래부터 발가락 끝까지 전혀 감각이 없었기 때문에 마취하지 않아도
아무런 아픔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아침부터 캄캄한 저녁을 맞기까지 오직 천장만 쳐다보면서 자신을 저주하고 자살할 생각만 했습니다.
그러나 손 발 하나 움직일 수 없는 그였기에 자살도 불가능했습니다.
자살조차 할 수 없는 신세, 그는 늘 이런 자학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휠체어를 탄 여 전도사 두 분이 찾아와 예수님을 믿기를 권했습니다.
그들의 눈물어린 기도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모셔 들였습니다.
그리고 입에 젓가락을 물고 책장을 넘기며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러자 칠흑처럼 어두운 그의 마음속에 형언할 수 없는 평안의 빛 생명의 빛이 비춰오기 시작했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희열이 솟아올랐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부정적인 마음이 긍정적인 마음으로 바뀌고
탄식과 눈물이 기쁨과 웃음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행복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곧 그는 원호병원에서 아리따운 간호 실습생 아가씨를 만나 사랑하게 되었고 부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입에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입에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리자니 입술이 부르터서 몇 번이나 좌절하고 포기하려 했지만
아내의 격려와 설득으로 그는 다시 붓을 물게 되었고
조금씩 남들이 감탄할 수밖에 없는 예술의 경지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그린 동양화와 서예 수십 점을 모아 그는 세종문화회관에서 전시회를 열어서
모든 사람들에게 충격적인 감동을 안겨 주었습니다.
[참조: ‘구필화가 김준호씨’, 꿈을 짜는 세례, 다음 블로그]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혜는 같은 성령님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은혜에 감사하고 또 어떤 사람은 불평합니다.
이 감사의 정도가 하늘나라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게 만드는지를 결정합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에서 꼴찌가 아니라 첫째가 되도록 감사의 마음을 최고조로 끌어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주인이 일꾼들에게 일자리를 주는 포도밭이 아니라
그 포도밭으로 일꾼들을 불러드리는 ‘포도밭 주인’입니다.
포도밭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이 곧 하늘나라인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행복입니다. 행복은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입니다.
비가 새는 집에 새우잠을 자도 사랑하는 임과 함께 있으면 그 곳이 천국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늘나라는 하느님과의 관계입니다.
아무리 최고급 호텔에서 식사를 한다고 해도
같이 먹는 사람이 미운 사람이거나 두려운 사람이면 그 자리는 행복한 곳이 못 됩니다.
천국은 하느님과 함께 있는 것이 행복한 이들이 사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과의 친밀도는 어떻게 측정이 될까요? ‘감사의 정도’로 측정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일찍 와서 일한 사람들은 감사의 마음이 없습니다.
한 시간 일 한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었으니
아홉 시간 일한 자신들에겐 더 주겠거니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한 데나리온 받기로 약속했지만 다른 이들에 비해 주인에게 더 해 주었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 교만함이 감사한 마음이 생기지 않게 하고 결국 하늘나라에 들어가더라도 꼴찌가 되게 합니다.
반면 한 시간 일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보다 한 것이 없는데
아홉 시간 일한 사람만큼의 돈을 받으니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포도밭 주인과의 관계가 좋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며
첫째와 꼴찌는 주님의 은혜에 얼마나 감사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어떤 사람은 같은 성체를 영하면서도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고 다만 감사한 마음뿐인가 하면,
어떤 사람은 성체를 영하면서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듯 다른 무언가를 청합니다.
자신은 그것 이상으로 이 세상 것도 더 받아야하는 사람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그 사람은 하늘나라와 멀리 있게 됩니다.
포도밭 주인이 주는 한 데나리온은 그 포도밭 주인만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만으로 무한 감사를 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예수님의 살과 피입니다.
하느님은 아드님을 내어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힘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일을 시키십니다.
이런 은총으로 불러주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다 잃어도 감사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첫째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것에 대해 너무 감사해서 아무 것도 청할 수 없는 상태,
다만 찬미만 올릴 수 있는 마음, 그 마음으로 나아가야겠습니다.
하느님의 의로움
이종훈 마카리오 신부
우리 하느님은 참 부자시다. 우주만물이 당신의 것이어서가 아니라 마음이 후해서이다.
너무 후해서 우리는 그분이 셈이 흐리거나 공정하지 못하다고 오해하고 불평한다.(마태 20,8-12)
우리가 아는 정의(正義)와 하느님의 그것은 다르다.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과 맺으신 계약을 끝까지, 우리가 잘 지키지 못해도 지키신다.
아드님까지 속죄의 제물로 내어주시기까지 하면서 그 약속을 지키셨다.(로마 3,25)
이것이 하느님의 정의요 그분의 의로움이다.
그러니 당신의 백성이요 자녀인 우리도 그렇게 하라고 요구하신다,
그를 있는 힘을 다해 끝까지 이해하고 용서하고 인내하라고.
심판은 하느님의 몫이다. 우리는 심판하지 말아야 한다.
자기가 일군 밭에 가라지가 왜 생겼는지, 게다가 밀과 가라지도 구별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웃을 함부로 심판할 수 있겠나. 사실 이웃을 심판하는 것은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니다.
그럴 때마다 마음은 무거워지고 그 무게에 눌려 쪼그라든다. 그러니 하지 말라고 하셨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춘기 자녀는 자신이 부모에게 못되게 굴어도 그에 대한 부모의 벌과 보복은 상상도 하지 않는다.
부모를 마치 그의 종처럼 여기니 그럴 것이다. 사실 그렇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 하느님은 그 이상이다.
당신이 아니라 사랑하는 아들을 죄인들을 위한 속죄의 제물로 내어 놓으셨으니 말이다.
그렇게 하느님의 사랑이, 하느님의 충실하심이, 하느님의 의로움이 온 세상에 선포되었다.
그분은 그렇게 나를 사랑하신다. 그리고 그도 똑같이 그렇게 사랑하신다.
믿고 싶지 않아도 믿어야 한다.
내가 하느님의 그런 사랑을 받을만하지 못함을 잘 아는데
유독 나만 그렇게 사랑하신다는 주장은 헛된 상상이 될 것이다.
주님, 저는 하느님처럼 사랑할 수 없습니다.
뒤에서 비난하지 않는 것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만 탈렌트나 되는 빚을 탕감 받았음을 기억하고
백 데나리온의 빚을 갚지 않는 이의 멱살을 잡지 않겠습니다.
저는 그러고 싶지 않지만 주님께서 바라시니 있는 힘을 다해 이해하고 용서하고 인내하겠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아드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워 익히게 도와주소서. 아멘.
수도자매일복음묵상
가난한 일꾼이 받은 위로
권 루카스
뜨거운 한 낮이 저물고
해는 이제 저물 듯 하는데
오늘도 나를 써 주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서 있어야 하는 것은
가족 때문입니다.
“부디 저를 써 주세요.!”
이제 목소리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냥 서 있습니다.
저 멀리 낮익은 얼굴이 다가옵니다.
오늘 여러 번 보았는데
이번엔 나를 보며 걸어옵니다.
‘부디 저를 써 주세요.’
애절한 눈빛으로 바라본 그의 눈은
참 깊고도 따뜻합니다.
“당신도 내 포도밭으로 가시오.”
그때 나는 이미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한모금’ / (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 수녀원)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