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식 무덤' 신덕 고분… 망명한 왜인 귀족? 마한 견제 위한 왜인?
[배기동의 고고학 기행]
2024. 7. 15. 04:31
편집자주
우리 역사를 바꾸고 문화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한 발견들을 유적여행과 시간여행을 통하여 다시 한번 음미한다. 고고학 유적과 유물에 담겨진 흥분과 아쉬움 그리고 새로운 깨달음을 함께 즐겨보자.
<45> 전남 함평군 신덕 고분
우리나라에 고대 일본식 무덤이 있다고? 신덕 고분(전남 함평군 월야면 예덕리)은 한지륙 호남 지역에서만 발견되는 소위 ‘장고분’(長鼓墳)이다. 한쪽은 네모지고 다른 쪽은 원형으로 된 봉분이 잘록한 허리로 연결되어 우리 전통악기 ‘장고’처럼 생겼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이런 고분은 고대 일본에서 흔히 발견되는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다. 이 장고분이 한지륙에서 발견된 이후 무덤의 주인공에 대해 여러 학설이 분분하다. 우리 학계에서는 과거 식민사관의 망령을 건드릴까 뜨거운 감자처럼 생각하였고, 일본학자들도 지극히 조심스럽게 다루었다. 도대체 이 무덤의 주인공은 일본, 당시 마한, 그리고 백제와 어떤 인연을 가진 사람이었을까?
도굴, 그리고 장고분 발굴
발굴 당시(1991년 국립광주박물관)에 소주 한 병이라도 사 들고 방문하면 좋았겠지만, 시간에 쫓겼던 데다 길이 멀다는 핑계로 기회를 놓쳐 버렸다. 나주박물관에 근무하는 제자를 앞세워 마치 비단이 펼쳐진 듯 치렁치렁한 나주와 함평 들판을 이리저리 가로질러 나지막한 능선 끝자락에 있는 신덕 고분에 도착하였다. 낮은 골짜기의 용암저수지와 고분 옆 몇 그루의 높다란 소나무가 일대 풍광을 한 폭의 남종산수화로 만들고 있다.
이 고분은 국립광주박물관이 1991년에 분구(墳丘)를 확인하기 위해 측량 조사를 나왔다가 우연히 발견한 도굴 흔적 때문에 더욱 유명해졌다. 도굴 구덩이가 발견되었는데도 다행히 고분 내부에는 중요한 유물들이 남아 있었고, 도굴 행위가 재차 이어질 것을 우려하여 긴급 발굴에 돌입하였다. 그동안 무덤의 주인공을 놓고 설이 분분하였던 장고분, 즉 전방후원분 사상 최초로 '아이스 브레이킹' 발굴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당시 도굴꾼들은 값나가는 소위 ‘명품 유물’들은 훔쳐 팔았고, 철기 등 상업적 가치가 없어 처리하기 어려운 유물은 서울 중앙박물관(당시 서울 경복궁 중앙청 건물) 수위실 앞에 던져 놓고 갔는데 결국 잡혀서 구속되었다. 어리석은 도둑의 어처구니없는 결말이다.
장고분, 그 기원은?
지역 사람들이 부르는 ‘장고형(形)’이라는 용어나 일본학계에서 오랫동안 사용하여 오는 ‘전방후원’이라는 명칭은 모두 허리가 잘록한 형태를 묘사하는 것인데 요즈음 한국학계에서는 ‘전방후원’이라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학자들이 많다. 서양에서는 ‘열쇠구멍형(Key hole shaped) 고분’이라고도 한다. 일본 규슈(九州)와 간사이(関西) 지방을 중심으로 초대형 왕릉인 인덕릉(仁德陵ㆍにんとくりょう)을 비롯하여 약 2,500기가 발견되었다. 3세기에서 불교가 전래되는 6세기 말 사이 유행한 고분이다.
전방후원분의 형태는 ‘원형 분구 앞에 방형 제단을 붙인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또 초기 고분에서 적석(積石)이 발견된 사례가 있어서 고구려의 적석 고분이 그 기원일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전방후원분의 경우, 매장 부위가 지상의 봉분 속에 만들어진다. 또 봉분 주위로 도랑이 둘러쳐 있는데 이와 유사한 구조를 가진 장방형의 주구묘(周溝墓)가 한지륙 서부 지역에서 이보다 앞선 시기에 대유행을 하였다.
무덤 규모는 다르지만, 그 기본적인 구조가 유사하다. 그래서 일본 고분 시대(3세기 말~7세기) 이전인 야요이 시대(B.C 3세기~A.D 3세기)에 한지륙 고분 문화가 도래인(渡來人ㆍ중국, 혹은 한지륙에서 일본 열도로 건너간 사람들)에 의하여 전래되고, 그 후 다시 횡혈식석실묘(판 모양의 돌을 이용해 안치실을 만들고, 널길로 사람이 드나들도록 한 무덤)가 전파되어 이를 토대로 독자적인 발전을 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기원은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영산강식’ 돌방 장고형 고분, 어디서 왔을까?
‘신덕 1호분’은 남북 방향의 길이가 50m 정도고 높이가 5m 규모의 봉분으로, 호남지역에 분포하는 총 14기의 장고분 중 중간 정도의 크기다. 묘실은 원형 봉분 속에 서쪽으로 치우쳐진 채 동서 방향으로 조성되었고, 입구가 서쪽에 붙어 있다. 주변에는 도랑 몇 개가 둘러쳐져 있는데 이 도랑들이 서로 이어지진 않는다. 그리고 방형부와 원형부가 이어지는 부분은 깨진 돌로 봉분을 덮었는데, 아마도 보호하기 위한 장치로 추정된다. 돌방 길이는 3m 정도인데, 폭이 245㎝에 달하는 곳도 있다.
묘실은 뒷부분이 넓어 평면으로 보면 사다리꼴이다. 또, 벽체는 위로 올라가면서 좁혀 쌓았고, 천장은 큰 돌 2개를 덮어 마무리하였다. 내부에 설치된 관대(棺臺ㆍ관을 얹어 놓던 평상)는 길이 252㎝에 폭 90㎝ 내외다. 서쪽 벽에 나 있는 입구는 돌로 문틀을 만들고 큰 돌로 입구를 막아 두었는데, 밖으로 벌어지도록 통로의 벽을 쌓았다. 이러한 구조가 바로 영산강식 돌방무덤이다. 일본 기타큐슈(北九州) 지방의 굴식돌방묘의 영향을 받아 영산강 일대에서 현지화된 것으로 보고 있다.
쏟아지는 고급 부장품들
구슬로 장식한 광대이산식(廣帶二山式) 금동관, 금동신발, 연리문 유리옥을 비롯한 희귀한 옥장식 등 매우 높은 신분을 상징하는 부장품이 이 고분에서 발굴되었다. 또 은으로 장식한 왜계(倭界) 조본공철도(鎺本孔鐵刀)나 엄청난 수공 기술이 필요한 철제 갑옷과 투구, 그리고 마구 등도 무덤 주인이 높은 지위에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이 밖에도 피장자가 저승에서도 영화로운 삶을 이어가기를 바라는 장례 의식이 무덤 곳곳에서 발견된다. 무덤 속을 붉게 칠한 것은 바로 ‘재생’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또 철제 농기구와 공구도 같이 묻었는데, 내세의 삶이 풍성하기를 바랐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묘실문 아래에는 토기들이 무덤의 내부에서 외부로 이어지도록 깔려 있으며 돌문 바깥에는 아마도 제사상 위에 차려졌던 것으로 보이는 수많은 개배(蓋杯)들이 노출되었다. 무덤 입구 항아리 속 참돔 뼈가 보여주듯이 이 그릇들에는 제사음식들이 가득했을 것이다. 특히 봉분 꼭대기에 깨진 그릇받침을 묻은 것은 이 무덤과 하늘이 서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염원의 표현이리라. 고대 시대에 사자를 저승길로 보내는 애틋한 마음은 동서고금 어느 문화를 막론하고 비슷하다. 다만 부장품의 모양이 문화에 따라 다를 뿐이다.
어디서 온 누구의 무덤일까?
이들 장고분의 피장자들에 대해 학설이 분분하다. 왜냐하면 규모가 대단히 큰 고분이고, 출토된 유물(현재 조사된 고분은 총 14기 중 10기)의 수준으로 미뤄 상당한 실력자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두 14기밖에 되지 않은 데다, 고분의 위치도 당시 토착 세력의 핵심 영역을 벗어나 각기 독립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고분의 구조나 양식뿐 아니라 하니와(埴輪·원통형 토기)와 유사한 토기, 칼, 갑옷 등 고급 왜계(倭界) 유물이 상당수 보여 왜와 관계된 인사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왜 여기에?’라는 질문에는 답을 망설이게 된다. 이 고분들이 5세기 말~6세기 초에 해당하는 점을 토대로 ‘당시 왜의 야마토(大和)정권이 변동하는 과정에서 백제 지역으로 망명한 귀족’이라고 보기도 한다. 또 이 시기의 웅진 백제가 당시 확실하게 제압하지 못한 마한 지역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배치한 왜계 인사들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와는 반대로 마한계의 토착 수장들이 규슈(九州) 지역의 왜 세력과 연계하여 조성한 것이라는 설명도 있다.
피장자들이 ‘백제계 왜인’이라는 주장은 오늘날 일본 지역에 백제계 문화 흔적이 많이 있다는 점에서 일리가 있을 것이다. 교역이던 군사 목적이던, 지역 정치 집단의 의도적인 수용하에 일정 역할을 담당한 왜로부터 이주한 주민일 가능성이 높다. 여하간에 양 지역이 활발하게 문화 교류를 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새로운 시각으로 보는 한ㆍ일 고대사
일제강점기인 1938년에 고고학자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ㆍ1907~2011)가 나주 신촌리 6호분과 덕산리 2호분이 전방후원분일 가능성을 언급한 적이 있다. 그 이전에 야쓰이 세이이치(谷井濟一ㆍ1880~1959)도 이 지역 고분들이 ‘왜인 무덤’일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이러한 견해가 ‘임나일본부설’을 암시했겠지만, 더 이상 진전이 없었던 것은 연대가 불명한 당시로서는 문화의 일반적 흐름이 한지륙에서 일본열도로 간다는 점에서 후일 제기된 김석형(1915~1996)의 일본섬 내 ‘삼한 분국설’ 같은 역설적 결과를 두려워했을지도 모른다.
그 후 1980년대에 해남 방산리의 장고봉 고분을 시작으로 여러 지점에서 전방후원분이 확인되었고, 90년대 이후에 신덕 고분을 필두로 본격적으로 조사가 이루어졌다. 다양한 형식을 갖춘 한국 고대의 고분들이 수백수천 기에 이르지만, 이 중 전방후원분의 수는 적다. 또 고분 안에 백제나 가야계 유물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일본 학자들의 허망한 욕망을 전혀 입증하지 않는다. 반면, 구석기시대 이후, 특히 일본 야요이시대 이후 일본 섬에 ‘도래인(渡來人)’에 의한 한지륙 기원의 고고학 유적과 유물은 수없이 보인다. 물론, 한지륙 남쪽 지역은 일본 문화 영향이 보이기도 한다.
문화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또 새로운 모습으로 진화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의 발견과 조사과정에서 보았듯이 과거 불순한 역사왜곡의 상흔이 현대 탈식민시대에도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호남 지역의 왜계 전방후원분 현상과 그 해석이 오늘날 한지륙-일본열도 간 고대 문화교류에 대한 시각을 올바르게 정립할 수 있도록 할지 기대하는 마음이다.
배기동 전 국립중앙박물관장·한양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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