볍씨 채종단지
올해가 퇴직 이후 3년째 드는 해인데 봄부터 한 가지 변화라면 시니어 봉사활동으로 하루에 두세 시간 아동안전지킴이 역을 수행함이다. 도심에 산재한 초등학교 주변을 순찰하는 대상자가 많겠으나 나는 그곳으로 원하지 않고 일부러 근교 농촌으로 희망해 의창구 대산 파출소 관내 구역이다. 같은 처지 동료 셋과 더불어 2인씩 2개 조로 나눠 각자 맡은 초등학교 주변을 살핀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하루 24시간인데, 나는 하루에 3가지 일을 시차를 두고 어느 하나 소홀히 하지 않는다. 이른 아침 자연학교로 등교하면 강변이나 들녘을 산책함이 우선순위다. 이는 폭염이 지속되던 지난여름 내내도 변함없었다. 이후 아침나절은 관내 마을도서관에서 독서삼매에 들었다. 점심때면 밖으로 나와 끼니를 때우고 오후에 안전지킴이 임무를 다하고 온다.
이른 아침 강둑이나 들녘을 걸으면 저절로 운동도 되겠지만 사색과 명상으로도 좋은 시간이다. 때로는 비닐하우스에서 농사 부산물로 나오는 처진 오이나 토마토를 챙겨 식탁에 올리거나 이웃에 보내기도 했다. 무엇보다 산책에서 본 풍광이나 농부와 대면에서 얻는 정보는 하루를 정리하는 기록으로 남기는 글감을 삼음은 습관이 되었다. 현장성을 살린 르포문학이라 해도 될 듯하다.
내가 나다니는 동선은 단순하면서도 경로는 아주 다양하고 복잡하다. 교통편은 시내버스나 마을버스를 주로 이용해 어디쯤을 산책 기점으로 삼으나 그 번호는 매번 다르다. 때로는 김해 외동 터미널로 오가는 시외 구간으로 다니는 버스를 타고 진영 근처에 내리기도 했다. 어제는 드물게 경전선 열차를 이용했는데 진영역을 지난 한림정역에서 내려 들녘과 강둑을 걸어 가술로 갔다.
봄부터 내가 다닌 강변과 들판에서 가장 흔하게 본 장면이 비닐하우스 농사나 벼가 자라는 들판이다. 올여름에 유래가 없던 폭염이 지속되긴 해도 지난 주말 남녘 해안을 스친 태풍이 쏟아부은 폭우로 더위 기세는 꺾였다. 아직 가을 분위기를 얘기하기는 일러도 벼들이 익는 들판은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동판저수지 일찍 핀 코스모스 꽃길은 비에 모두 넘어져 끝물이 되기도 했다.
구월 끝자락 주말을 앞둔 금요일 아침은 주남저수지 물길이 닿아 벼농사를 짓는 들녘을 걸을 참이다. 이른 아침 소답동으로 나가 창원역에서 출발해 오는 1번 마을버스를 타고 용강고개를 넘었다. 용잠삼거리에서 동읍 행정복지센터를 지나 주남저수지를 비켜 간 주남마을에서 내렸다. 주천강을 기준으로 다리를 건너면 대산면으로 벼들이 고개 숙여 익어가는 드넓은 들판이 펼쳐졌다.
농가와 멀리 감치 떨어진 들판으로 가는 농로를 따라 걸었다. 남포 마을 가는 농수로 언저리 길섶에 한 아주머니가 밭을 일구어 농사를 짓는데 그 시간에 보이지 않았다. 참깨를 수확한 자리에 심은 배추는 더위로 생육이 부진했는데 벌레까지 꾀어 갉아먹어 잎사귀마다 구멍이 숭숭 생겨났다. 헛간으로 쓰는 지붕 위에는 호박 넝쿨이 타고 올라 달덩이 같은 열매를 여럿 맺었다.
주남 들녘은 벼농사만 짓는 일모작 지대였는데 추수 이후 뒷그루를 심지 않고 빈 논으로 두었는데 철새가 날아와 잘 놀다 봄이면 떠났다. 그 들판이 추수를 앞둔 때다. 구역마다 경작자가 다른 논이겠지만 규격이 같은 이름표를 단 벼농사를 지었다. 국립종자원과 계약재배로 짓는 벼농사로 추수로 탈곡한 벼들은 전량 그곳에서 모아 이듬해 각 농가에 심을 볍씨로 보급되는 듯했다.
남포에서 상포를 둘러 가술에 닿아 마을도서관에서 오전을 보내다 나와 추어탕으로 점심을 때웠다. 이후 공원 쉼터에서 ‘볍씨 채종단지’를 남겼다. “철새가 놀다 떠난 주남지 인근 들녘 / 늦은 봄 무논 다려 일모작 모내기로 / 보급용 볍씨 삼으려 정성 들여 가꾼다 // 피사리 제때하고 시비도 알맞게 해 / 고물 차 고개 숙여 누렇게 익은 나락 / 콤바인 굴려 탈곡해 종자원에 보낸다” 24.0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