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시빈목 西施矉目
중국 월(越)나라의 미인 서시(西施)가 가슴앓이로 눈살을 찌푸렸던 바, 어떤 추녀가 그 모습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면 아름다운 줄 알고 자기도 눈살 찌푸리기를 일삼아 마을 사람들이 모두 도망쳐버렸다는 고사에서 비롯되었다.
옳고 그름과 착하고 악함을 생각하지 않고 함부로 남의 흉내를 내는 것을 비유하여 '효빈'이라고 말한다.
서시효빈·서시빈목(西施嚬目)·서시봉심(西施捧心)과도 같은 말이다.
이 고사는 《장자(莊子)》〈천운편(天運篇)〉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월나라의 절세미녀인 서시는 가슴앓이병이 있어 언제나 미간을 찌푸리고 다녔다.
그랬더니 그 마을의 추녀가 이것을 보고 그 어여쁜 데 감탄하여 자기도 가슴에 손을 대고 미간을찡그리며 마을을 돌아다녔다.
그러자 그 마을의 부자는 이것을 보고 굳게 대문을 잠그고 나오지 않았고, 가난한 사람은 이것을 보고 처자를 이끌고 마을에서 도망쳤다.
이 추녀는 미간을 찡그린 모습이 아름답다는 것만 염두에 두었을 뿐, 찡그림이 아름다운 까닭을 알지 못했다.
즉, 서시는 본래 아름다우므로 자기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이 고사는 원래 공자의 제자인 안연(顔淵)에게 노(魯)나라의 악사장(樂師長)인 사금(師金)이 한 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이 장은 사금의 말을 빌려서 장자(莊子)가 공자의 상고주의(尙古主義)를 '외형에 사로잡혀 본질을 망각한 것'이라고 신랄하게 비난한 것이다.
장자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 제도나 도덕도 변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춘추시대 말엽의 난세에 태어난 공자가 그 옛날 주왕조(周王朝)의 이상정치(理想政治)를 그대로 노(魯)나라와 위(衛)나라에 재현하려 하는 것은 마치 추녀가 서시를 무작정 흉내내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빈정대어 말한 것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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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시대 越(월) 나라와 吳(오) 나라가 있었다.
삼국지에 이 두 나라 중 오나라에는 闔閭(합려)가 왕으로 있었다.
기원전 496년 句踐(구천)이 월왕이 돼자 오왕 합려는 군사를 이끌고 월나라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합려는 대패하고 오히려 발가락에 독화살을 맞고 죽게 된다.
오나라에는 합려의 아들 夫差(부차)가 왕위를 계승했다.
부차는 3년 상을 치르면서 아버지의 복수를 하겠노라 다짐했다. 수년 뒤 부차는 월나라를 침략했다.
철저히 준비한 오나라 부차의 군대에 월나라 군대는 적수가 되지 못했다.
월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처하자 구천은 미인과 뇌물을 오나라 군대의
대장 伯嚭(백비)에게 보내 화평을 청했다.
오왕 부차는 결국 백비의 말을 들어 미인과 뇌물을 받기로 하고 화평을 맺고, 월왕 구천은 포로가 되어 오나라로 끌려갔고 월나라는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게 되었다.
구천은 포로로 잡혀 있는 동안 온갖 모욕을 받으며 지냈다.
구천의 책사 范蠡(범려)는 부차를 무너뜨리기 위해 자진해서 미인을 찾아 나섰다.
범려는 6개월의 노력 끝에 西施(서시)와 鄭旦(정단)을 선발했다.
그는 두 여인에게 거문고, 바둑, 서예, 그림 그리기와 가무, 방중술 등을 3년간 가르쳤다.
이렇게 길러진 서시와 정단은 오왕 부차에게 진상되었다.
부차는 특히 절세의 미녀 서시를 보고 반해 흠뻑 빠져들었다.
두 여 인이 함께 궁에 들어왔는데 서시만 오왕의 총애를 독차지하자 정단은 울화병이 생겨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할 정도이다.
부차는 서시를 위해 姑蘇臺(고소대)라는 누각을 짓고 금은으로 장식한
館蛾宮(관아궁)을 지었다.
그리고 響屧廊(향섭랑)이라는 복도를 만들기도 했다.
이 복도 아래에는 널빤지를 깔아 서 서시가 지나가면 소리가 울려 퍼지게 했다.
부차는 정사를 돌보다가도 향섭랑에서 서시 오는 소리가 나면 그녀를 품에 안았다.
또 관아궁 주변에는 翫花池(완화지)와 翫月池(완월지)라는 연못을 만들고 吳王井(오왕정)이라는 우물을 팠으며 서시의 이름을 따 西施洞(서시 동)이라는 동굴까지 만들었다.
또 香山(향산)이라고 하여 향나무를 가득 심은 假山(가산)을 인공으로 만들었다.
靑龍舟(청룡주)라는 배를 호수에 띄워 날마다 서시와 타고 즐기며 정사를 소홀히 했다.
서시에 빠져 정사를 소홀히 한 부차의 행락은 결국 오나라의 멸망을 불러 오게 되었다.
월왕 구천은 잘 정비된 군대를 이끌고 오나라를 침략했다.
부차는 참패했고 구천은 서시를 데리고 월나라로 돌아왔다.
그런데 구천의 부인은 남편이 서시를 데려온다는 소식을 듣자 불안해졌다.
서시가 부차의 넋을 빼놓고 나라를 망하게 한 일을 잘 알기에 남편까지 홀릴까 봐 서시를 돌에 매달아 강물에 던져 죽여 버렸다고 한다.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