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 하린 (시인)
18. 상상 테마17 - 연극적 요소로 상상하며 시 쓰기
@ 소재나 모티브가 갖는 특징과 상상 적용 방법
연극과 시는 극적 장면을 모두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여기서 극적이라는 말은 연극의 클라이맥스처럼 팽팽한 긴장감과 감동적 요소를 품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 클라이맥스 같은 장면이 좋은 시에는 많이 있다. 또 하나 더 유사한 점이 둘 다 삶의 중요한 국면이나 정황을 품고 있다는 점이다. 연극을 흔히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고 시를 삶을 암시한 이미지의 축소판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렇게 시와 유사점이 있는 연극적 요소에 상상을 덧입힌 후 시를 쓰게 되면 삶의 국면과 삶의 정황이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시가 형성된다.
시를 쓰기 전에 이런 재미있는 상상을 해보는 것이다. ‘○○이 주인공인 무대’ ‘○○이 조연인 무대’ ‘○○이 소품인 무대’ ‘○○이 연출한 무대’ 등등. 그럴 때 ○○의 자리에 슬픔, 고독, 고양이를 사랑한 고양이, 불면, 계단, 구름, 나무, 징검돌, 바이러스, 의자 등등을 넣어보자. 고독이 주인공인 무대, 고양이를 사랑한 고양이가 조연인 무대, 불면이 조연인 무대, 바이러스가 소품인 무대 등이 형성돼서 문구 자체만으로도 재미있는 영감이 떠오르게 된다. 이런 상상 말고도 ‘A 극장’과 관련된 상상도 해봐도 좋다. A의 자리에 다양한 의미를 암시한 단어를 넣어보자. 이별 극장, 아버지 극장, 창문 극장, 힙합 극장, B급 극장, 마우스 극장 등이 형성되어 의미 있고 신선한 시가 탄생할 것 같은 예감이 찾아오게 된다.
필자의 시를 통해 그 소재가 어떻게 상상과 만나 펼쳐지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자.
엔딩극장 / 하린
그 시절 난 매일 시체였지 시체를 흉내 내지 않고 그냥 시체
시체를 사랑하는 건 관 뚜껑 관 뚜껑 바닥에 시체가 조시(弔詩)를 쓰지
12월 다음에 12월이 반복될 때 우리의 이별은 완벽해진다 죽은 감각이 부글거리고 나는 기꺼이 까마귀에게 내 급소를 들킨다
첫 행은 지극히 밋밋했고 마지막 행은 극단적으로 맥박이 없었지
시를 보존할 방부제가 필요했지 모든 창문을 밀봉할 암막 커튼이 필요한 것처럼
어떤 움직임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미열처럼 손가락만 겨우 살아있도록
골고루 외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지 시에 미친놈, 간명하게 욕이 뱉어졌지
한 명이라도 단 한 명이라도 ‘혁명을 흉내 내던 요절’이라고 하면 좋으련만
별들의 통곡은 쏟아지지 않았고 글자들을 갉아먹던 벌레들은 비웃음으로 일관했지
마침내 나는 용의주도하게 자학을 뒤집어썼지 아침마다 태양은 끝까지 파국을 확신했고… ― 『1초 동안의 긴 고백』, 문학수첩, 2019.
1단계 - 스스로 점검하기 – 메시지 분명히 하기+내 시만의 장점 찾기
주목받지 못한 시만 쓰는 화자가 있다. 스스로 자학과 자폐를 일삼다가 죽음에 당도하려 한다. 그런 화자의 비극적인 몸짓과 심리 상태를 「엔딩극장」에서 표현하고 싶었다. 자폐나 자학은 진지함이 극대화된 상태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공감대를 형성하긴 쉽다. 그런데 시적 즐거움(비유, 상징, 알레고리, 아이러니, 역설 등으로 얽어내는)은 많이 떨어지게 된다. 그래서 필자는 연극적 요소를 개입시켜 상황을 극적으로 읽어내는 즐거움을 주기로 했다. 시 속 화자의 상황이 꼭 자신만의 ‘극장’과 같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결정이었다. 따라서 이 시에 드러난 장점은 극적 요소를 활용해 자살 심리를 긴장감 있게 표출한 점이다.
2단계 - 객관적 상관물(현상)을 찾기+관찰과 조사 정밀하게 하기
이 시의 객관적 상관물과 상관 현상은 관처럼 느껴지는 방과 시 쓰는 행위다. 두 가지 요소가 자폐 의식과 죽음 의식을 강화하고 있다. 방이 관이 될 때 화자는 곧 시체가 된다. 그래서 시 쓰는 행위도 “관 뚜껑 바닥에 시체가 조시(弔詩)를 쓰”는 행위로 전환된다. “시체를 흉내 내지 않고 그냥 시체”처럼 살아가는 존재를 위해 방이 ‘죽음 극장’이라는 생각을 했고, 그 극장에서 1인이 할 수 있는 행위와 사유를 바탕으로 극단성을 연출했다. 따라서 객관적 상관물인 방은 화자의 자의식을 드러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공간이다.
3단계 - 확장하기 – 상상적 체험을 섬세하게 극적으로 하기
「엔딩극장」은 자폐 의식과 죽음 의식에 대해 극단적으로 체험한 후 쓴 시다. 그런 설정을 하기 위해서는 ‘왜? 자살을 해야만 해’라는 의문을 먼저 해결해야만 했다. 화자가 왜 그런 심리를 가질 수밖에 없었는지, 시적 논리를 형성하기 위해 “시에 미친놈”이란 간명한 이력을 제시했다. 시인 화자가 쓸 법한 “12월 다음에 12월이 반복될 때/ 우리의 이별은 완벽해진다/ 죽은 감각이 부글거리고/ 나는 기꺼이 까마귀에게 내 급소를 들킨다”란 시의 구절도 첨부했다. 극도로 피폐화된 자의식을 상상을 통해 갖게 만든 것이다. ‘혁명을 흉내 내던 요절’이라고 하며, 단 한 명이라도 화자의 시에 의미를 부여해주면 좋으련만 외부인들은 그저 단편적으로 화자가 시나 쓰는 미친 존재로 규정한다. 그래서 마침내 화자는 “용의주도하게 자학을 뒤집어” 쓰고 ‘파국’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 또 다른 예문
동화극장 / 손미
뭘 보여줄까
동화극장 앞에서 기다렸지 여기서 이름을 잃어버렸어
극장 자판기에 돈을 넣었는데 아무도 안 보는 네가 나온다
여기서 만날 줄 몰랐어 살아있는 줄 몰랐어
뭘 보고 싶어? 내가 나라는 증거
늦은 밤 극장을 찾는 사람들 왜 그런 사람들 그림자는 초록색일까
뭘 보고 싶어?
무수하게 우리가 상영되는 동안 이름이 유품 되는 동안 내가 나였다는 증거
더 가면, 멍든 의자들
좀 앉지 그래 아무도 안 봐주는 몸짓은 잠시 멈추고 먹먹한 여기에 좀 앉지 그래 - 《시와 함께》 2020년 가을호
자발적 인형극장 / 성은주
내 얼굴은 거짓말을 잘해요 어디서 웃어야 할지 언제쯤 울어야 할지 모르면 투네*의 춤추는 손에서 질서 있게 시소를 탔어요 사실은 재미없게 흔들릴 때마다 텁텁한 크레파스 깨무는 상상을 했죠 무늬 없는 천장 보며 얼마나 많은 오해 속에 갇혀 살았는지 낡은 침대에 누워, 버려진 이름들을 부르다가 이불을 끌어당겼어요
절망적으로 헝클어진 목각인형들은 빛을 담뿍 받아 비어 있는 등을 핥고 서로의 발을 밟으면서 얼굴을 비벼주면 몸에서 불쑥 제비꽃이 돋아났다
우린 종종 말을 하지 않았죠 여러 개의 가면을 준비해 두고 긴 줄에 매여진 허기로 딱 아는 만큼만 입을 열었는데 잃어버린 시간이 만져졌어요 오래된 멜로디 카드의 길고 느린 신음呻吟처럼 혼 자 였 어 요
관절에 묶인 실이 욱신거리는 날엔 내 체온으로 누구든 꼭 한 번 안아봤으면 : 살갗에 스며든 실을 풀고 아무도 없는 무대에서 (몇 번인가 발을 헛디디며) 삐걱거리는 무릎으로 악대 없이 춤췄어요 (텅 빈 아랫배를 만지며) 입안이 헐 때까지 노랠 불렀어요
손등에 빗살무늬는 나무이던 때가 그리워 잔광이 아른거리는 거예요 눈동자의 빛깔을 바꿔 그림자를 끌고 푸른 달에 기대 걸었죠 사락, 사락, 걷고 있던 발끝에 신경을 곤두세우니 혈관 속으로 무수한 꽃잎이 몰려와 온 통의 혀로 종족 냄새를 맡으려 하네요
* toone, 마리오네트 인형을 조종하는 사람 - 《현대시》 2010년 11월호)
비오는 날의 미장센 / 김나비
s#1. 아파트 앞 건널목 드림아파트 107동 앞에 푸른 비가 내린다 담장 위로 솟은 미끄럼틀이 젖고 편의점 간판이 젖고 가로수가 젖고 세상이 젖는다 신호등 아래, 노란 우산을 쓴 아이 장면 속으로 뛰어 든다 빛물 커튼 사이 아이와 내 눈이 만난다 나: (낮은 목소리로) 위험해!
s#2. 같은 시간 맞은편 건널목 초록 불이 켜지고 흑백 줄무늬 카펫이 펼쳐진다 하얀 중절모를 쓴 노인이 지팡이를 쥐고 걸어온다 택시가 빗물을 튀기며 철로변으로 핸들을 꺾는다 빨간 오토바이는 제비처럼 미끄러지고 하이바가 굴러 떨어지고 도로는 비명을 지르고 노인이 쏟아진 물처럼 아스팔트 위에 널브러진다 붉은 새들이 후드득 빗물을 털며 날아오른다 NAR(나레이션) 나는 나의 죽음을 빗속에서 목격한다
s#3. 건널목 중앙 나는 노인의 시간 쪽으로 주춤거리며 걷고 아이는 우산을 들고 나를 스치고 절름거리는 노인의 눈빛이 내 시간 쪽으로 뛰어오고 초록 조명 켜진 20초 무대 위 NAR(나레이션) 나와 노인이 된 나, 어린 내가 그렇게 잠시 오버랩된다
s#4. 건널목 끝 하늘과 땅 사이 거리가 가까워진다 횡단보도를 건너고 뒤돌아본다 거꾸로 내리는 비처럼 무수한 노인과 아이가 하늘로 올라간다 모두 간데 없고 텅 빈 무대 새 소리가 허공을 잘게 저미며 귓가에 날아든다 신호등 옆 이팝나무 속, 아무리 눈으로 뒤져도 새는 간데없고 부푼 잎들만 비에 젖어 푸르게 떨고 있다 끝내 젖지 않을, 또 다른 내 눈빛들이 섬광처럼 머리를 파고든다 순간, 새들이 주석처럼 날아간다 F.O(페이드 아웃) - 《시인광장》 2020년 10월호
- 출처 : 『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더푸른, 2021.09)
* 하린 시인 1971년 전남 영광 출생.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박사. 1998년 〈광주매일〉신춘문예 시 당선, 2008년 《시인세계》 등단. 시집 『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 『서민생존헌장』 『1초 동안의 긴 고백』. 연구서 『정진규 산문시 연구』 시 창작 안내서 『시클』 시 창작 제안서 『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이것만 알면 당신도 현대 시조를 쓸 수 있다』 청마문학상(2011), 송수권시문학상(2015), 한국해양문학상(2016),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2020) 수상. 현재 중앙대 문화예술대학원 전문가과정 시 창작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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