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필성문(下筆成文)
붓을 들어 쓰기만 하면 문장이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뛰어난 글재주를 비유하는 말이다.
下 : 아래 하(一/2)
筆 : 붓 필(竹/6)
成 : 이룰 성(戈/3)
文 : 글월 문(文/0)
(동의어)
하필성장(下筆成章)
하필성편(下筆成篇)
출전 :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진사왕식전(陳思王植傳)
단번에 막힘없이 시원하게 쓴 글씨를 일필휘지(一筆揮之)라 한다. 대체로 붓을 떼지 않고 쓴 글씨를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단시간에 완성한 그림도 포함한다.
감상하는 일반 사람들이야 순간적으로 쓴 글씨나 그려낸 명화를 보며 작가의 타고난 재주라고 탄복한다. 하지만 정작 작가의 갈고 닦은 노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마천철연(磨穿鐵硯)은 쇠로 된 벼루가 닳아서 구멍이 나고, 여필퇴산(如筆堆山)은 닳아진 몽당붓이 언덕과 같이 쌓였다는 말이다. 추사체(秋史體)의 명필 김정희(金正喜)도 독진천호(禿盡千毫), 천 자루의 붓을 닳게 한 노력의 결과였다.
막힘없는 글씨와 그림에 비해 단숨에 지은 문장에 대한 성어도 있다. 붓을 드리워 쓰기만 하면(下筆) 문장이 이루어진다(成文)는 기막힌 글재주다. 주인공은 중국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에 나오는 조조(曹操)의 셋째 아들 조식(曹植)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10세가 되면서 시론과 시부 수십만 구절을 통독하고 시와 문장에도 뛰어났다. 어느 때 조조가 조식의 문장을 보고 그 뛰어남에 놀라 남에게 대필시킨 것이 아니냐고 캐물었다.
조식은 무릎을 꿇고 답한다. "제가 말을 하면 경론이고, 붓을 드리우면 문장이 됩니다(言出爲論 下筆成章)." 이런 재주를 가졌는데 누구한테 대신 써 달라고 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자신만만했다.
조식의 이런 자부심은 조조가 동작대(銅雀臺)를 지었을 때 면전에서 부(賦)를 지었고, 형 조비(曹丕)의 트집으로 일곱 걸음을 디딜 동안 완성한 칠보시(七步詩)에서 자두연기(煮豆燃萁)라는 멋진 비유를 남겨 입증됐다. 조식은 자신만이 아닌 다른 사람의 재주를 평가한 데서도 이런 표현을 썼다.
당대의 석학 채옹(蔡邕)이 재능을 인정했던 왕찬(王粲)에 대해 "문장은 봄꽃과 같고, 생각은 샘처럼 솟아오른다. 하는 말마다 읊조릴 만하고, 붓을 놀리면 작품이 된다(文若春華 思若湧泉 發言可詠 下筆成篇)"고 높이 칭송했다. 하필성장(下筆成章), 하필성편(下筆成篇) 모두 같은 말이다.
후세의 문인들은 더욱 조식의 재주를 높이 평가했다. 남북조(南北朝)시대의 이름난 산수시인 사령운(謝靈運)은 천하의 글재주가 모두 한 섬이라면 조식이 팔두지재(八斗之才), 여덟 말을 차지한다고 했고,
청(淸)나라 시인 왕세정(王士禎)은 조식과 이백(李白), 소식(蘇軾)을 신선의 재능을 지닌 단 세 사람이라 극찬했다. 하지만 조식의 이런 재주가 타고난 재주만으로 된 것은 아니란 것은 모두 안다.
베스트셀러를 뚝딱 내놓는 천재 작가들도 단숨에 썼다는 일필휘지라는 말을 멀리 한다고 한다. 좋은 글을 위해서는 많이 읽고 많이 쓰는 노력이 뒷받침돼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조식(曹植, 192년 ~ 232년)
1. 개요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황족이자 문인으로, 자는 자건(子建), 시호는 사왕(思王), 조조와 무선황후의 아들, 조비, 조창의 친동생이자 조웅의 친형이다.[2] 아내는 최염의 조카딸인 최씨로 현재의 산둥성 출신이다.
2. 생애
(1) 조조 치세
재기발랄한 성품으로 특히 문재가 유독 뛰어나 아버지 조조의 총애를 받았다. 그의 뛰어난 재주를 아낀 조조가 장자인 조비를 제쳐놓고 그를 후계자로 삼을 것을 고민하였을 정도였다.
조식의 주위에는 양수 같이 뛰어난 인물들이 있었고, 순욱의 아들인 순운이나, 정의, 정이 형제들도 조식의 파벌이었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조비는 가후의 조언을 받아들여 재능이 아니라 효심을 보여 조조의 마음을 얻으려 했고, 조식은 자유분방한 성품에 술에 취해 있는 모습을 자주 보여 구설수에 오르는 등 처신에 문제가 있었다.
특히 조식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 양수가 너무 뛰어난 모습을 보이면서 조조에게 미움을 받기 시작했는데, 후계자 문제에도 깊숙이 관여해 조조의 마음을 더 거스르게 된다.
연의에서는 조조가 후계자 문제에 대해 가후에게 질문했는데, 가후는 한참 뜸을 들이다 "아, 원소와 유표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라고 대답해 조조가 결정적으로 조비를 태자로 삼은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가후뿐만 아니라 모개도 원소의 예를 들어 조비를 후계자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고, 조카딸을 조식에게 시집보냈던 최염도 장자 계승을 이유로 조비를 후계자로 삼아야 한다는 뜻을 내비쳤다.
즉, 여러 인물들이 장자 계승 원칙을 주장해야 했을 만큼 조조는 재능 있는 조식에게 마음이 가 있었던 것이었다. 모개나 최염 등이 장자계승 원칙을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조식의 행실 문제가 지적되면서 조조는 결국 조비를 태자로 삼았다.
조비가 태자가 된 이후에도 조식은 제법 지지세력이 남아 있었고 조조도 조비를 태자로 삼음과 동시에 조식에게는 식읍 5천 호를 더하여 총 1만 호의 식읍을 주는 등 총애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술에 취해 천자가 가는 길을 통해 궁문을 열고 나간 사건이 이슈화되면서 대노한 조조에게 문책받는 것을 계기로 점차 조조 총애를 잃었고, 이 무렵 조조가 조식의 세력이 너무 큰 것을 견제해 양수를 죽였기에 조식은 항상 불안한 마음을 품었다고 한다.
결정적으로 219년, 조인이 관우에게 포위당했을 때 조조는 조식을 남중랑장, 정로장군 대행으로 임명해 구원군을 지원하라고 불렀으나, 이때 조식이 술에 취해 조조의 명령을 받들 수 없었기 때문에 조조의 진노를 사 완전히 총애를 잃고 모든 관직을 박탈당한다.
배송지가 주석으로 인용한 '위씨춘추'에서는 이때 조비가 조식에게 억지로 술을 먹여 조조의 왕명을 받지 못하게 한 것으로 나온다. '위씨춘추'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조식은 조비의 음해공작에 희생된 것인데, 조조가 앞뒤 사정도 안 살펴 보고 그대로 관직에서 내쫓았던 것이나 이미 이전 태자 책봉 무렵 때부터 조식의 음주벽에 대한 비판이 여러 차례 나왔던 것을 봤을 때 그동안 술 문제로 조조의 속을 썩인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듯하다.
이렇게 조조가 조비와 조식 중 누구를 후계자로 선택하느냐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결단을 늦춘 것은 조식의 재능을 이용하여 '문학'의 지위를 확립함으로서 명사(특히 순욱을 위시로 한 예주 영천군 출신들이나 한나라의 부흥을 바라는 명사들)에 대항한다는 선택지가 눈에 아른거렸기 때문일 것이다. '문학'에 기초하여 인사를 담당했던 정의는 조식의 고굉이었다.
그러나 적벽대전의 패퇴, 그 결과로 촉한, 손오정권이 출현함으로서 조조는 명사들의 협력을 단절하면서까지 군주권의 확립을 도모할 여력이 없었다. 결국 조조가 조비를 후계자로 지명한 것도 이런 사정이 어느 정도 작용했다. 진군의 헌책으로 명사에게 유리한 구품관인법을 조비가 제정한 것도 이 사정의 결과였다.
(2) 조비 치세
한편 조조는 죽기 직전 장안에 주둔하고 있던 차남 조창을 급하게 부르는데, 조창이 도착하기 전에 죽고 만다. 조창을 견제한 조비가 절차를 생략하고 황급히 왕위에 오르는데, 뒤늦게 도착한 조창은 "왕께서 나를 부르신 것은 너를 후계자로 삼기 위함이다"라는 말로 조식을 부추기지만 조식은 원씨 형제의 말로를 직접 지켜보지 않았냐는 말로 조창의 제안을 거부한다.
위왕에 오른 조비는 조식의 측근이었던 정의, 정이 형제를 죽이고 왕의 사자를 대하는 태도가 무례하다는 이유로 조식까지 죽이려 하지만 조식이 이른바 칠보시(七步詩)를 지어 위기를 모면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다만 이 칠보시 자체는 후세 창작일 가능성이 높다.
'세설신어'에서는 이 칠보시를 완성한 조식에 대해 세간에서 그를 수놓은 호랑이라고 품평했다고 한다. 한가지 특기 사항으로는 소칙전의 기록에 후한 헌제가 조비에게 선양하려 하자 이를 슬퍼하여 소칙과 함께 상복을 입고 곡을 했다는 기록이다.
주석 위략에는 소칙은 헌제가 죽임을 당했을 거라 생각하여 곡을 했는데, 조식의 경우 조비가 제위에 오르자 조조의 총애를 잃은 것을 한탄하면서 곡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 이럴 거면 굳이 상복까지 입고 곡을 할 이유가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건 한의 신하로서 그랬건 진의가 어찌되었던 건에 조비는 이를 매우 불쾌하게 여겼고, 이후 조식은 조비의 집요한 견제를 받으며 봉지를 임성에서 옹구로 옮기며 불우하게 사는데, 조비에게 자신을 등용해 줄 것을 요청한 글이 남아 있다.
그러나 조비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조식은 이 글에서 자신의 재능을 펼치지 못하고 무력하게 늙어가는 자신을 한탄했는데, 내용이 매우 불쌍하다.
(3) 조예 치세
조예가 제위에 오르고 나서 조식과 계속해서 서신을 주고받으며 그를 위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견제는 오히려 조비때보다 더 심해져, 227년에 준의로, 228년에는 다시 옹구로, 229년에는 동아로 봉지가 바뀌었다가, 232년에 진으로 바뀐다.
조식은 항상 자신의 재능을 펼치지 못함을 분개해 했으므로 228년 표를 올려 자신을 임용해 줄 것을 청한다. 병졸로 싸우며 죽을 각오도 보였지만 조예는 조식을 임용하지 않았다. 231년 조식은 다시 상소를 올려 친척의 안부를 묻고 그 자신의 생각을 서술했다.
친척들과도 교류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해진 조씨들에 대한 압박을 풀어줄 것을 부탁하고 황제가 질문하는 것을 보충해 주는 역할을 맡겨준다면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꿈에서도 떨어지지 않는 생각이라며 자신을 임용해 줄 것을 청한다.
조예는 이를 보고 제후국간의 교류를 금지하는 법은 원래 없었으며 이를 시정하겠다고 답장하였지만 역시 임용해주지는 않았다. 조식은 다시 상소하여 관리를 선발하는 일에 대해 말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의견을 대신들 앞에서 시험해줄 것을 청하지만 조예는 좋은 문장으로 화답할 뿐이었다.
232년 조예는 조식을 진왕으로 봉하고 식읍을 하사했다. 조식은 항상 조예를 혼자서 만나 당시의 정치적 득실을 말하고 임용받고 싶어했지만 끝내 허락받지 못했다. 결국 근심에 젖어 살다가 그 해 41세의 나이로 죽는다.
상술했듯이 봉지 이동이 모두 조식에 대한 견제 의도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며, 오히려 조식을 배려하여 옮겨준 경우도 있다. 그리고 계속해서 서신을 주고 받으며 조예에게 의견을 피력할 수 있었다는 점을 보면 조예는 아버지에게 박대받는 삼촌을 인간적으로는 나쁘지 않게 생각했던 것 같지만 직계혈족의 정치참여를 차단한 선대의 방침을 거스르면서 조식을 중용할 생각은 없었다. 본인의 황권에 위협이 되는 인물이기도 했고.
조예 시절 사마의가 오군을 내륙으로 유인하여 섬멸한다는 전략을 수립하자 사마의에게 편지를 보내 이 전략을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사마의 본인이 직접 당하지는 않았지만 이후 조휴가 석정에서 참패한 것을 봤을 때 일리 있는 지적이었다.
결과적으로 조휴가 패하면서 조식의 선견지명이 드러나게 되었고, 이런 과정을 보면 조식은 실세에서 밀려난 후에도 나름대로 여러 루트를 통해 정치, 군사상의 주요 동향을 열심히 파악하며 정세를 분석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분은 천재적인 문장력에 가려서 그렇지 조식의 군재도 뛰어난 편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조예도 끝내 조식을 기용하지 않았기에 조식은 그의 재능을 펼칠 수 없었다.
경초 연간, 조예는 조서를 내려 황초 연간에 조식의 죄상을 탄핵하려던 문건을 회수하여 모두 폐기하도록 하고 조식이 지은 부, 송, 시, 명, 잡론 모두 백여 편을 초록하여 궁궐 안팎에 간수하도록 하였다. 비록 조예가 끝내 조식을 기용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의 명문장들이 현존하는 데에는 조예의 공이 크다고 할 수 있다.
3. 평가
213년 조식은 조조의 고향인 초현 주민들의 궁핍해진 생활과 황폐한 도시의 모습을 안타까워하는 내용의 부(=귀사부)를 지어 발표한 적이 있는데 고고학적 발굴의 결과 당시 조조는 초현을 대규모 군사기지화한 상태였고, 그 규모상 1, 2년의 수탈로 완성될 정도의 수준이 아니기 때문에 조식이 묘사했던 것처럼 초현의 지역 사회는 박살나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조식이 이 귀사부를 발표한 것과 같은 해에 조비는 초현의 아름다운 경치를 찬미하는 임와부라는 부를 지어 발표했다는 것이다. 시적인 영감을 어디서 얻느냐는 예술적 관점의 차이도 있겠지만, 한없이 막장스러운 인간성의 조비가 비판을 받는 21세기의 추세에 더해 조식은 백성들을 착취하는 것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 자체부터 조비와 극명히 달랐다는 점에서 재조명되고 있다.
다만 이 문제가 잘 부각되지 않은 이유는 초현의 군사기지는 무슨 동탁마냥 개인의 사치와 향락을 위해 만들어진 요새가 아니라 1240년 홍수로 매몰되기 이전까지 군사용으로 계속 유용하게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조조 생전에 이 일대는 거대한 군사요새였던 셈인데, 지배자 개인의 안락함을 위해 축조한 동탁의 미오성과 달리 어디까지나 군사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시절에 요새를 건설한 것으로 국가 안보를 위한 행위에 수 많은 백성들이 희생되었다고 해도 대놓고 비판하기엔 무리가 있었다는 것이다.
거기에 후대에까지 거의 천 년이 넘게 군사기지로서 효용을 발휘하고 있었다면 이는 이 지역의 군사기지를 세워 천 년 동안이나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한 조조의 치적이기도 한 셈이다. 그렇기에 조식의 이 문학 작품은 조식의 인격을 보여주는 용도로 볼 수 있긴 해도 그 이상으로 해석하는 건 또 곤란했다는 것이다.
조조가 조식을 총애한 것이 단순히 재능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 사례가 몇가지 있다.
조조 사후 한 일만 봐도 그렇다. 군사기지는 뭐 그렇다 쳐도 조비가 황제에 오른 후에 초 땅이 자신이 고향이라면서 백성들을 척박한 초로 강제로 이주시켜 둔전을 시행해 고향을 번영시키려고 하자 노육은 그 곳에서의 백성들의 빈곤한 생활을 보고 표를 올려 그들을 비옥한 양 땅으로 옮길 것을 건의하는데, 조비는 그의 말에는 따랐으나 크게 실망하고 마음속으로는 노육을 원망한다. 그리고 조비답게 그를 좌천시켜 이주한 백성들을 관리하게 하고 수양전농교위에 임명한다.
또 조비의 뒤를 이었던 조예는 초기는 잘하나 싶더니 후기로 가면 지나친 사치를 부렸다. 여러 이유가 겹쳐서 위 3대 동안 백성들은 상당히 고생했을 것이다. 조식은 시골을 전전하며 백성들의 곁에서 그걸 직접 보고 겪었으니 제법 공감이 갔을 것이다.
반면 조식은 조비 시절 자신의 봉국 내 영지를 지역 농민들에게 나눠 주고 같이 농사를 지으면서 백성들의 토지가 부족해 필요한 만큼 수확을 하지 못하고 있다며 표를 올려 농부들에게 땅을 하사해 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고, 조예가 봉국의 장정들을 마구잡이로 차출해가자 이를 반대하는 표를 짓기도 했다.
이 모두가 가뜩이나 위태로운 입지가 더욱 좁아질 것을 감수하고 벌인 일이라, 기본적으로 아랫사람을 같은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으며 매사 안하무인으로 방자하고 치졸했던 조비와는 인격 자체부터가 달랐다는 것이다.
조조 사후 조창의 부추김을 단칼에 거절한 것도 조식이 이토록 상식적인 인물이었기에 가능했다는 주장이다. 딱 봐도 매우 영민하고 백성을 생각하는 어진 군주상이 아닌가.
조조가 원가의 몰락을 보고도,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문학의 천재, 제왕의 인품, 그리고 의외로 대국적인 안목과 수준급 군재까지 겸비한 조식을 장자이지만 문제점이 많았던 조비를 제끼고 후계자로 세우려고 한 것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술만 좋아하지 않았더라도, 혹은 술을 마시더라도 절제하면서 이런 인품과 덕망을 아버지의 눈에 더 자주 보였다면 조위의 역사는 다른쪽으로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실 일부는 형 조비의 음모로 술에 취해서 나타날 수 밖에 없었던 사정도 있고.
밀려난 이후에도 네임밸류 자체는 워낙 거물급이었기에 행보를 쉽게 예상하기 어렵지만, 하안을 필두로 조비, 조예 시대에 핍박받던 인물들이 7년 뒤인 239년, 조예 사후의 격변을 틈타 정권을 잡고 사마의와 대립각을 세웠던 것을 봤을 때 41세라는 이른 나이의 죽음은 너무 빠른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조예 사후에도 살아 있었으면 근왕 세력의 거두로써 사마씨의 찬탈을 막을 수 있는 만약의 가능성을 짙게 남겨주기도 한다.
그러나 조예는 조비처럼 대놓고 조식을 비롯한 다른 황족들을 갈구지 않았다 해도 의심병은 아버지 못지않게 심했다. 뭔가 제대로 홀렸는지 이해가 하기 어려울 정도로 조예는 조방의 약한 정통성에도 불구하고 그를 후계로 밀려는 아집을 감안하면 더욱더 그렇다.
숙부이자 조씨 황실을 대표할 수 있는 조우와 어릴적부터 매우 친밀한 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막판에 조우가 정통성이 약한 후계자에게 위협 인물이라고 단정지어서 숙청하고 차라리 방계인 조상과 권신인 사마의에게 뒤를 맡길 정도였다.
조식은 조우의 형이자 한 때 조비를 앞질렀던 후계 유망주였는데 절대로 그런 실력자를 조예가 차라리 숙청하지 뒤를 맡을 가능성은 매우 적다.
4. 문학적 재능
앞서 말한 대로 시문에 굉장히 빼어났기 때문에 그의 시는 후세의 문인들에게 매우 큰 영향을 주었는데, 삼국시대의 건안칠자와 더불어 삼조(三曹, 조조, 조비, 조식)로서 문학의 귀재로 불렸을 정도이다.
남북조시대 종영이란 사람은 전대의 문장가들의 시를 집대성해 평가한 책인 시품에서 조식의 문학적 재능을 인간에서는 주공 공자, 동물에서는 용 봉황, 음악에서는 거문고와 생황, 재봉에서는 천자의 예복 자수에 비교했고, 역시 남북조시대의 빼어난 문인인 사령운은 조식을 문장에 대한 천하의 재능이 1말이라면 그 중 8두를 조식이 차지한다고까지 높게 평가했다.
이렇듯 후에 두보가 등장하기 전까지 중국의 시성으로 불렸다. 이런 그의 재능은 삼국지연의를 읽은 독자라면 한번쯤은 보게되는 칠보시로 잘 알려져 있다. 그가 남긴 문장들은 그의 문집인 조자건집에 전한다.
연의에 나오는 동작대의 건립을 기념하여 지은 '동작대부'는 엉뚱하게도 제갈량에 의해 주유를 열받게 하는 데 이용되기도 했다. 실제의 동작대는 적벽대전 이후에 건립되었다.
제갈량이 조식과 키배를 뜬 적이 있기는 하다. 조식이 광무제의 사적을 예로 들며 광무제의 운태 28장은 한고조 유방의 한신, 팽월, 영포, 소하, 장량 같은 인물에 미치지 못한다는 논설을 폈는데, 제갈량이 거기에 반박하여 주장하기를, "한고조는 재능에 부족함이 있어 신하들이 스스로 활약할 여지가 있었으나, 광무제는 너무 뛰어나서 운태 28장이 드러나지 않은 것뿐이다."라고 한 것이다.
이건 답이 없는 문제이기에 누구의 말이 맞는지는 생각하기 나름. 그래도 이 설전이 그래도 당대의 기재인 제갈량 측에서부터 태클을 걸며 시작되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조식의 수준이 짐작갈 것이다.
위왕의 잘 나가던 왕자였던 시절 시는 부어라 마셔라 술 마시고 노래하고 내가 세상 평정하리 식의 호방한 시가 많지만 떨거지가 된 이후에는 처량한 기색이 묻어 나온다. 황도에서 벗어나 촌구석을 전전하다 보니 백성들의 비참한 실상을 알게 되고 그를 슬퍼하며 읊은 노래도 제법된다.
그가 자신에게 형수가 되는 조비의 아내인 문소황후를 남몰래 연모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그의 걸작 낙신부는 낙수의 여신 복비와 조우하여 그녀의 미모를 읊은 시인데, 혹자들이 평하길, 이 시의 복비가 바로 문소황후라고 한다. 다만 사료 상의 근거는 불분명하고, 그저 후세인들의 찌라시일지도. 다만 만화 창천항로에서는 해당 내용이 묘사되어 있다.
조식은 조비와 조예에게 핍박 받던 시기에 지은 야전황작행(野田黃雀行)이 유명하다. 야전황작행이란 '들판의 참새'라는 뜻으로 자신을 의미하는 것이다.
高樹多悲風(고수다비풍) : 높은 나무에 슬픈 바람 자주 일고
海水揚其波(해수양기파) : 바닷물은 그 물결 드높아라
利劍不在掌(이검부재장) : 날카로운 칼 내 손에 없으니
結友何須多(결우하수다) : 친구인들 어찌 반드시 많으리오
不見籬間雀(불견리간작) : 보지 못했는가, 울타리의 참새들
見鷂自投羅(견요자투라) : 새매 보고 스스로 그물에 걸리는 것을
羅家得雀喜(라가득작희) : 그물 친 사람 새 얻고 좋아하나
少年見雀悲(소년견작비) : 소년은 새보고 슬퍼하나니
拔劍捎羅網(발검소라망) : 칼을 뽑아 그물을 끊어주니
黃雀得飛飛(황작득비비) : 참새는 자유로이 훨훨 날아간다
飛飛摩蒼天(비비마창천) : 훨훨 푸른 하늘에 닿아
來下謝少年(내하사소년) : 내려와 소년에게 감사하는구나
하지만 어마어마한 명성에 비해 작품의 인지도는 이백이나 두보에 비해 별로 없다. 일반인들에게 조식의 작품을 물으면 기껏해야 원작자도 확실치 않은 칠보시나 언급되는 수준이며 좀 안다는 삼덕이나 역덕 레벨에서도 대부분 낙신부, 백마편이나 들어봤을 정도이다.
조식의 재능과 명성에 거품이 있어서는 아니고 시문이라는 것이 시대를 거치면서 변화하는 것이라 서기 3세기 위나라 사람인 조식의 작품은 짧게 몇마디로 끝나는 당나라 시인 이백, 두보의 작품보다 접근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5. 기타
조선시대 이익의 성호사설에는 조식이 유객환이라는 퍼즐을 만들어서 아내에게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식이 타고 다니는 말의 이름이 경범(驚帆)이라고 한다. 조식의 아들은 조지, 딸은 조금호와 조행녀가 기록에 남아있다.
▶️ 下(아래 하)는 ❶지사문자로 丅(하)는 고자(古字)이다. 밑의 것이 위의 것에 덮여 있는 모양이며, 上(상)에 대한 아래, 아래쪽, 낮은 쪽, 나중에 글자 모양을 꾸며 지금 글자체가 되었다. ❷지사문자로 下자는 '아래'나 '밑', '끝'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下자는 아래를 뜻하기 위해 만든 지사문자(指事文字)이다. 下자의 갑골문을 보면 윗부분은 오목하게 아랫부분은 짧은 획으로 그려져 있었다. 윗부분의 오목한 형태는 넓은 대지를 표현한 것이다. 아래의 짧은 획은 땅 아래를 가리키고 있다. 그래서 下자는 아래를 가리키고 있다 하여 '아래'나 '밑'이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금문에서 숫자 二(두 이)자와 자주 혼동되었기 때문에 소전에서는 아래의 획을 세운 형태로 바꾸게 되면서 지금의 下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下(하)는 (1)아래. 밑 (2)품질(品質)이나 등급(等級)을 상(上)과 하(下), 또는 上, 中, 下로 나눌 때의 가장 아랫길(끝째). (3)일부 한자로 된 명사(名詞) 다음에 붙이어 ~밑에서, ~아래서의 뜻으로, 그 명사가 조건이나 환경 따위로 됨. 나타냄. ~하에, ~하에서, ~하의 형으로 쓰임 등의 뜻으로 ①아래 ②밑(물체의 아래나 아래쪽) ③뒤, 끝 ④임금 ⑤귀인(貴人)의 거처(居處) ⑥아랫사람 ⑦천한 사람 ⑧하급(下級), 열등(劣等) ⑨조건(條件), 환경(環境) 등을 나타내는 말 ⑩내리다, 낮아지다 ⑪자기를 낮추다 ⑫못하다 ⑬없애다, 제거하다 ⑭물리치다 ⑮손대다, 착수하다 ⑯떨어지다 ⑰항복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낮을 저(低), 낮을 비(卑), 내릴 강(降), 항복할 항(降), 낮출 폄(貶),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윗 상(上), 높을 존(尊), 높을 고(高)이다. 용례로는 공중에서 아래쪽으로 내림을 하강(下降), 값이나 등급 따위가 떨어짐을 하락(下落), 어떤 사람의 도급 맡은 일을 다시 다른 사람이 도거리로 맡거나 맡기는 일을 하청(下請), 아래쪽 부분을 하부(下部), 강이나 내의 흘러가는 물의 아래편을 하류(下流), 산에서 내려옴을 하산(下山), 낮은 자리를 하위(下位), 공부를 끝내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옴을 하교(下校), 한 달 가운데서 스무 하룻날부터 그믐날까지의 동안을 하순(下旬), 정오로부터 밤 열두 시까지의 동안을 하오(下午), 차에서 내림을 하차(下車), 위에서 아래로 향함을 하향(下向), 보호를 받는 어떤 세력의 그늘을 산하(傘下), 일정한 한도의 아래를 이하(以下), 치적이 나쁜 원을 아래 등급으로 깎아 내림을 폄하(貶下), 상대방을 높여 부르는 말을 귀하(貴下), 끌어 내림이나 떨어뜨림을 인하(引下), 원서나 소송 따위를 받지 않고 물리치는 것을 각하(却下), 낮아짐이나 내려감 또는 품질 따위가 떨어짐을 저하(低下), 아랫돌 빼서 윗돌 괴고 윗돌 빼서 아랫돌 괴라는 뜻으로 임기응변으로 어려운 일을 처리함을 일컫는 말을 하석상대(下石上臺), 붓만 대면 문장이 된다는 뜻으로 글을 짓는 것이 빠름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하필성장(下筆成章), 아랫사람의 사정이나 뜻 등이 막히지 않고 위에 잘 통함을 일컫는 말을 하정상통(下情上通), 어리석고 못난 사람의 버릇은 고치지 못함을 이르는 말을 하우불이(下愚不移), 아래로 아내와 자식을 기름을 일컫는 말을 하육처자(下育妻子), 아래를 배워서 위에 이른다는 말로 낮고 쉬운 것부터 배워 깊고 어려운 것을 깨달음을 이르는 말을 하학상달(下學上達), 아랫사람의 뜻을 윗사람에게 전달함을 일컫는 말을 하의상달(下意上達), 아랫사람에게 후하고 윗사람에게 박함을 일컫는 말을 하후상박(下厚上薄),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능가하여 윗사람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다는 뜻으로 세상이 어지러움을 이르는 말을 하릉상체(下陵上替),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이 수치가 아니라는 뜻으로 누구에게든지 물어서 식견을 넓히라는 말을 하문불치(下問不恥) 등에 쓰인다.
▶️ 筆(붓 필)은 ❶회의문자로 손에 붓을 쥔 모양의 聿(율)과 자루가 대나무인 것을 분명히 나타내기 위해 竹(죽)을 붙여서 쓴다. 즉 대나무로 만든 붓을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筆자는 '붓'이나 '글씨', '필기구'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筆자는 竹(대나무 죽)자와 聿(붓 율)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聿자는 손에 붓을 쥐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래서 '붓'이라는 뜻은 聿자가 먼저 쓰였었다. 하지만 소전에서는 붓의 재질을 뜻하기 위해 竹자를 더해지면서 지금의 筆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筆(필)은 논, 밭, 임야(林野), 대지(垈地) 따위의 구획(區劃)된 전부를 하나치로 하여 세는 단위이다. 필지(筆地)의 뜻으로 ①붓 ②글씨 ③필기구(筆記具) ④필법(筆法) ⑤가필(加筆) ⑥획수(劃數) ⑦필획(筆劃) ⑧글자를 쓰다 ⑨글을 짓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붓을 꽂아 주는 통을 필통(筆筒), 손수 쓴 글씨의 형적이나 그 솜씨를 필적(筆跡), 글씨를 씀을 필기(筆記), 붓의 끝을 필두(筆頭), 글씨 쓰는 법을 필법(筆法), 글씨의 획에 드러난 힘을 필력(筆力), 글씨의 획에 드러난 기세를 필세(筆勢), 말이 통하지 아니할 때에 글을 써서 서로 묻고 대답하는 일을 필담(筆談), 글로 써서 대답함을 필답(筆答), 붓과 혀로 곧 글로 씀과 말로 말함을 이르는 말을 필설(筆舌), 붓과 먹을 필묵(筆墨), 글씨 특히 한자를 쓸 때에 붓을 놀리는 순서를 필순(筆順), 생각하는 바를 글로 나타냄을 필술(筆述), 옛 사람의 필적을 모아서 엮은 책을 필첩(筆帖), 글 또는 글씨를 쓴 사람을 필자(筆者), 베끼어 씀을 필사(筆寫), 어떤 양식에도 해당되지 아니하는 산문 문학의 한 부문을 수필(隨筆), 붓을 잡고 시가나 작품 등의 글을 씀을 집필(執筆), 뛰어나게 잘 쓴 글씨를 명필(名筆), 손수 쓴 글씨를 친필(親筆), 임금의 글씨를 어필(御筆), 자기가 직접 씀 또는 그 글씨를 자필(自筆),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림을 윤필(潤筆), 옛 사람의 필적을 고필(古筆), 남을 대신하여 글을 씀 또는 그 글씨를 대필(代筆), 붓을 휴대하는 것을 잠필(簪筆), 붓을 대어 글씨를 고침을 가필(加筆), 두드러진 일을 특별히 크게 적음 또는 그 글을 특필(特筆), 벼루를 밭으로 삼고 붓으로 간다는 뜻으로 문필로써 생활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필경연전(筆耕硯田), 붓과 먹으로 징벌한다는 뜻으로 남의 죄과를 신문이나 잡지 따위를 통해 글로써 공격함을 이르는 말을 필주묵벌(筆誅墨伐), 붓이 흐르는 물과 같다는 뜻으로 문장을 거침없이 써 내려가는 모양을 일컫는 말을 필한여류(筆翰如流), 시문을 짓는 붓끝이 비바람이 지나가듯이 빠름을 일컫는 말을 필단풍우(筆端風雨), 확인하거나 또는 잊어버리지 아니하기 위하여 글로 써 둠을 일컫는 말을 필지어서(筆之於書), 문장을 자유자재로 잘 지음을 이르는 말을 필력종횡(筆力縱橫), 동호의 붓이란 뜻으로 역사를 기록함에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써서 남기는 일을 이르는 말을 동호지필(董狐之筆), 뚜렷이 드러나게 큰 글씨로 쓰다라는 뜻으로 누구나 알게 크게 여론화 함을 이르는 말을 대서특필(大書特筆), 한숨에 글씨나 그림을 줄기차게 쓰거나 그림을 일컫는 말을 일필휘지(一筆揮之), 남의 글이나 저술을 베껴 마치 제가 지은 것처럼 써먹는 사람을 일컫는 말을 문필도적(文筆盜賊), 붓만 대면 문장이 된다는 뜻으로 글을 짓는 것이 빠름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하필성장(下筆成章) 등에 쓰인다.
▶️ 成(이룰 성)은 ❶형성문자이나 회의문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뜻을 나타내는 창과(戈; 창, 무기)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丁(정,성)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음(音)을 나타내는 丁(정,성)은 나중에 변한 모양이며, 十(십; 모이다), 午(오; 다지다), 甲(갑; 덮다)이라 썼다. 戊(무)는 무기, 도구의 뜻을 나타낸다. 따라서 도구를 써서 사물을 만들다, 완성되다, 이루어지다의 뜻으로 되었다. ❷회의문자로 成자는 '이루다'나 '갖추어지다', '완성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成자는 戊(창 모)자와 丁(못 정)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戊자는 반달 모양의 날이 달린 창을 그린 것으로 '창'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렇게 창을 그린 戊자에 丁자가 더해진 成자는 본래는 '평정하다'라는 뜻으로 만들어졌었다. 여기서 말하는 '평정하다'라는 것은 적을 굴복시킨다는 의미이다. 成자는 후에 적을 굴복시켜 일을 마무리 지었다는 의미가 확대되면서 지금은 '이루다'나 '완성되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成자에 쓰인 丁자는 유래가 명확하지는 않지만 '정, 성'으로의 발음역할일 수도 있고 아니면 어떠한 일을 마무리하는 것을 못을 박는 행위로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成(성)은 (1)황금(黃金)의 순도(純度)를 나타내는 말. 십성(十成)이 순금(純金)임 (2)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이루다 ②이루어지다 ③갖추어지다, 정리되다, 구비되다 ④살찌다, 비대해지다 ⑤우거지다, 무성해지다 ⑥익다, 성숙하다 ⑦일어나다, 흥기하다(세력이 왕성해지다) ⑧다스리다, 평정하다 ⑨나아가다, 진보하다 ⑩가지런하다 ⑪고르게 하다, 균평(均平)하게 하다 ⑫끝나다 ⑬정하여지다 ⑭기대하다 ⑮완성하다 ⑯어른이 되다, 성인(成人)이 되다 ⑰크다 ⑱층계지다 ⑲화해하다 ⑳정성(精誠) ㉑재판(裁判), 심판(審判) ㉒권형(權衡), 균형(均衡) ㉓총계(總計), 셈한 계산(計算) ㉔북두칠성(北斗七星)이 술의 방위(方位)를 가리키는 날 ㉕길제(吉祭: 죽은 지 27개월 만에 지내는 제사) ㉖사방 10리의 땅 ㉗층 ㉘참으로 ㉙큰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통할 통(通), 통달할 달(達)이 있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망할 망(亡), 패할 패(敗), 질 부(負)가 있다. 용례로는 사업이나 일을 한 결과로 얻은 실적 또는 학생들의 학업과 시험의 결과로 얻은 실적을 성적(成績), 초목의 열매가 충분히 여묾 또는 어떤 현상이 충분히 발전하여 무르익은 시기에 달함을 성숙(成熟), 뜻한 것이 이루어짐 또는 사회적 지위를 얻음을 성공(成功), 생물이 자라서 점점 커짐 또는 사물의 규모가 커짐을 성장(成長), 일의 이루어진 결과를 성과(成果), 목적대로 일을 이룸을 성취(成就), 화합물을 조성하는 각 원소 또는 하나의 문장을 구성하는 요소를 성분(成分), 성년이 됨 또는 성년이 된 사람을 성인(成人), 일을 이룸이나 일이 이루어짐을 성사(成事), 성공과 실패를 일컫는 말을 성패(成敗), 사물이 이루어짐을 성립(成立), 자랄 대로 다 자란 나이를 성년(成年), 외과적 수단으로 형체를 고치거나 만드는 것을 성형(成形), 다 자라서 생식 능력이 있는 곤충을 성충(成蟲), 다 발육하여서 생식 능력이 있는 성숙한 동물 또는 그 동물의 몸뚱이를 성체(成體), 말을 이룸이나 이루어진 말 또는 고인들이 만든 말을 성어(成語), 어떤 내용이나 계획이나 방침 등에 관한 초안이나 방안을 작성함을 성안(成案), 어떤 단체를 이루는 사람 또는 회의를 성립시키는 데 필요한 어원을 성원(成員), 샛길이 생긴다는 뜻으로 덕이 높은 사람은 자기 선전을 하지 않아도 자연히 흠모하는 이들이 모임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성혜(成蹊), 여러 부분이나 요소들을 모아서 일정한 전체를 짜 이룸을 구성(構成), 옳다고 동의함을 찬성(贊成), 단지나 삼림이나 택지나 녹지 따위를 인공적 인위적으로 이루어 만드는 것 또는 분위기나 상황 따위를 생겨나게 만드는 것을 조성(造成), 엮어서 만드는 일 또는 조직하고 형성하는 일을 편성(編成), 뜻한 바 목적한 바를 이룸을 달성(達成), 어떠한 꼴을 이룸 또는 어떠한 꼴로 이루어짐을 형성(形成), 가르쳐서 유능한 사람을 길러 냄 또는 실력이나 역량 따위를 길러서 발전시킴을 양성(養成), 사람을 가르쳐서 기르는 것 또는 동물이나 식물을 길러 자라게 하는 것을 육성(育成), 어떤 사물을 완전히 이룸을 완성(完成), 두 가지 이상이 합하여 한 가지 상태를 이룸을 합성(合成), 단체를 조직하여 이룸을 결성(結成), 충분하게 이루어짐을 숙성(熟成), 나이는 어리지만 정신적이나 육체적 발육이 빨라 어른스러움을 숙성(夙成), 도와서 이루게 함 또는 힘이 되어 성공 시킴을 조성(助成), 사물이 생겨남이나 자라남 또는 사물이 일정한 상태에서 다른 것으로 변화함을 생성(生成), 크게 이룸이나 이루어짐 또는 큰 인물이 됨을 대성(大成), 사물이 이미 이루어짐 또는 어느 부문에서 이미 이름이 남을 기성(旣成), 다 이루지 못함 또는 아직 혼인한 어른이 되지 못함을 미성(未成), 늦게야 이루어짐을 만성(晩成), 빨리 이루어지거나 이룸을 속성(速成), 섞여서 이루어짐 또는 섞어서 만듦을 혼성(混成), 성공한 사람은 물러날 때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이르는 말을 성공자퇴(成功者退), 성공과 실패가 판가름 나는 순간을 일컫는 말을 성패지기(成敗之機), 다른 사람의 훌륭하고 아름다운 점을 도와주어 더욱 빛나게 해 줌을 일컫는 말을 성인지미(成人之美), 여러 사람이 모여 패를 지어 무리를 이룸 또는 그 무리를 일컫는 말을 성군작당(成群作黨), 성공의 열매는 부지런함 속에 있다는 뜻을 일컫는 말을 성실재근(成實在勤), 일이 되고 안 됨은 오로지 천운에 달렸다는 말을 성사재천(成事在天), 옛날 있었던 일에서 만들어진 어구를 일컫는 말을 고사성어(故事成語), 아직 성년이 되지 못한 사람을 일컫는 말을 미성년자(未成年者), 발전의 규모나 속도가 높은 수준으로 성장함을 일컫는 말을 고도성장(高度成長), 대문 앞이 저자를 이룬다는 뜻으로 세도가나 부잣집 문 앞이 방문객으로 저자를 이루다시피 함을 이르는 말을 문전성시(門前成市), 자신의 몸을 죽여 인을 이룬다는 뜻으로 자기의 몸을 희생하여 옳은 도리를 행한다는 말을 살신성인(殺身成仁),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크게 될 인물은 오랜 공적을 쌓아 늦게 이루어짐 또는 만년이 되어 성공하는 일을 이룬다는 말을 대기만성(大器晩成), 세 사람이면 없던 호랑이도 만든다는 뜻으로 거짓말이라도 여러 사람이 말하면 남이 참말로 믿기 쉽다는 말을 삼인성호(三人成虎), 물려받은 재산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일가를 이룸으로 스스로의 힘으로 사업을 이룩하거나 큰 일을 이룸을 이르는 말을 자수성가(自手成家), 농담이나 실없이 한일이 나중에 진실로 한 것처럼 됨을 일컫는 말을 가롱성진(假弄成眞), 말이 하나의 일관된 논의로 되지 못함으로 말이 이치에 맞지 않음을 뜻하는 말을 어불성설(語不成說), 흙이 쌓여 산을 이룬다는 뜻으로 작은 것이 쌓여 큰 것이 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토적성산(土積成山), 여러 사람의 마음이 성을 이룬다는 뜻으로 뭇사람의 뜻이 일치하면 성과 같이 굳어짐을 이르는 말을 중심성성(衆心成城), 새의 깃이 덜 자라서 아직 날지 못한다는 뜻으로 사람이 성숙되지 못하고 아직 어림을 이르는 말을 모우미성(毛羽未成), 공을 이루었으면 몸은 후퇴한다는 뜻으로 성공을 이루고 그 공을 자랑하지 않음을 일컫는 말을 공성신퇴(功成身退) 등에 쓰인다.
▶️ 文(글월 문)은 ❶상형문자로 攵(문)의 본자(本字)이다. 사람 몸에 ×모양이나 心(심)자 꼴의 문신(文身)을 한 모양이다. 살갗에 바늘로 찔러 먹물이나 물감 등으로 글씨나 그림이나 무늬를 들이는 것을 문신이라 하고, 형벌로서 하는 수도 있지만 축하(祝賀)하는 표로도 하였다. 나중에 '무늬', '글자', '학문', '문화' 따위의 뜻에 쓰였다. ❷상형문자로 文자는 '글'이나 '문장'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文자는 양팔을 크게 벌린 사람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文자의 갑골문을 보면 팔을 벌리고 있는 사람의 가슴에 어떠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몸에 새긴 '문신'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文자의 본래 의미는 '몸에 새기다'였다. 그러나 文자는 시간이 지나면서 '문서'나 '서적'과 같이 글을 새겨 넣은 것과 관련된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文자가 이렇게 글자나 서적과 관계된 뜻으로 쓰이게 되면서 지금은 여기에 糸(실 사)자를 더한 紋(무늬 문)자가 '무늬'라는 뜻을 대신하게 되었다. 文자는 부수로 지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상용한자에서는 관련된 글자가 없다. 그래서 文(문)은 (1)문장(文章) (2)무(武)에 대하여 학문, 학예, 문학, 예술 등을 이르는 말 (3)어떤 명사 아래에 쓰이어 문서, 문장(글)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말 (4)신발의 치수의 단위 (5)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글월, 문장(文章) ②어구(語句; 말의 마디나 구절), 글 ③글자 ④문서(文書) ⑤서적(書籍), 책 ⑥문체(文體)의 한 가지 ⑦채색(彩色), 빛깔 ⑧무늬 ⑨학문(學問)이나 예술(藝術) ⑩법도(法道), 예의(禮義) ⑪조리(條理) ⑫현상(現狀) ⑬산문(散文) ⑭결, 나뭇결 ⑮얼룩, 반점(半點) ⑯돈의 한 가지, 그 돈의 개수를 나타내는 말 ⑰신발의 치수의 단위 ⑱아름다운 외관(外觀) ⑲주문왕의 약칭(略稱) ⑳빛나다, 화려하다 ㉑아름답다, 선미(鮮美)하다 ㉒몸에 새기다 ㉓꾸미다 ㉔입묵(入墨)하다, 자자(刺字)하다 ㉕어지러워지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책 책(冊), 글 서(書), 글 장(章), 문서 적(籍),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호반 무(武), 말씀 언(言)이다. 용례로는 생각이나 느낌이나 사상 등을 글로 표현한 것을 문장(文章), 글자나 숫자 따위로 일정한 뜻을 나타낸 것을 문서(文書), 공적인 성격을 띤 문서나 서류를 문건(文件), 좋은 글을 가려서 뽑음을 문선(文選), 옛날의 제도나 문물을 아는 데에 증거로 되는 기록이나 서적을 문헌(文獻), 글의 성분들이 서로 맺고 있는 관계를 문맥(文脈), 글의 구절을 문구(文句), 글을 짜고 꾸미는 법칙을 문법(文法), 글을 볼 줄도 쓸 줄도 모름을 문맹(文盲), 살갗을 바늘로 찔러 먹물이나 다른 물색을 넣음 또는 그렇게 만든 몸을 문신(文身), 한 사람의 시문을 모아서 엮은 책을 문집(文集), 서재에 꼭 있어야 할 네 벗 즉 종이와 붓과 벼루와 먹을 일컫는 말을 문방사우(文房四友), 전문식과 무략을 다 갖추고 있음을 이르는 말을 문무겸전(文武兼全), 문화의 모든 산물이 서로 오고 감을 일컫는 말을 문물교류(文物交流), 남의 글이나 저술을 베껴 마치 제가 지은 것처럼 써먹는 사람을 일컫는 말을 문필도적(文筆盜賊), 허물도 꾸미고 잘못도 꾸민다는 뜻으로 잘못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뉘우침도 없이 숨길 뿐 아니라 도리어 외면하고 도리어 잘난 체함을 일컫는 말을 문과식비(文過飾非), 까막눈인 사람들을 가르쳐 글 모르는 이가 없도록 하는 일을 일컫는 말을 문맹퇴치(文盲退治), 문장이 썩 잘 되어서 한 점도 가필할 필요가 없을 만큼 아름다움을 이르는 말을 문불가점(文不加點), 문도 번거롭고 예도 번거롭다는 뜻으로 규칙이나 예절이나 절차 따위가 번거롭고 까다로움을 일컫는 말을 번문욕례(繁文縟禮), 가난한 사람은 농사 짓느라고 여가가 없어 다만 삼동에 학문을 닦는다는 뜻으로 자기를 겸손히 이르는 말을 삼동문사(三冬文史), 유교를 어지럽히는 도적이라는 뜻으로 교리에 어긋나는 언동으로 유교를 어지럽히는 사람을 이르는 말을 사문난적(斯文亂賊), 어떤 일을 시작하기는 쉬우나 이룬 것을 지키기는 어렵다는 뜻을 이르는 말을 창업수문(創業守文), 용과 같이 위엄 있는 모양을 하고 있으나 실은 물고기라는 뜻으로 옳은 듯하나 실제는 그름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어질용문(魚質龍文)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