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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여성시대* 차분한 20대들의 알흠다운 공간 원문보기 글쓴이: 흥미돋는글
출처: https://www.fmkorea.com/6807940225
오늘 다루어볼 내용은, 자료가 그리 많지 않은 발해사에서도 정황상 그 상세한 내용을 알기가 힘들며,
현재까지 제일 크나큰 떡밥이자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882년 정변설'에 대해서입니다.
현재 베일에 숨겨진 발해의 역사 가운데 제일 커다란 사건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이 정변이 확실한 사실이라면,
발해사는 882년 이전과 882년 이후로 다시 나누어 써야 할 정도로 큰 사건입니다.
882년 이전과 882년 이후의 국가 통치 시스템과 통치 기관, 구성이 전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보통 발해사는 818년에 대조영계에서 대야발계로 왕계가 넘어간 사건을 계기로 발해사의
구분을 상과 하로 나누는 시선이 많지만, 저는 여기서 이 882년을 더해서 발해사의 구분을,
698~818까지 120년을 대조영계, 그리고 818~882까지 64년을 대야발계, 그리고 882~926까지 44년을
대위해계(대위해가 정황상 대조영계라고 완전히 확실하게 나온 증거가 없기 때문에 이리 칭했습니다.)
우선 이 정변설이 무엇인가, 그리고 이 정변이 있었다면 과연 무슨 정변인가? 하는 분들을 위해,
이 정변이 어떤 정변인지 우선 간단히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818년에 간왕의 사망 이후 왕위를 차지한 대야발의 4세손 선왕(818~830)의 가계는 대이진(830~857), 대건황
(857~871), 대현석(871~882 or 894)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이어지는 대위해(882 or 894~905? 906?)
는 사실상 대현석과 같은 계열이 아닌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에 학자들에 따라 과거에 선왕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대조영계가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대현석 시기에 이르러 발해가 개판이 되자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탈취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고 있지만 100퍼센트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의 대략적인 추정과 연구에 의하면, 어디에서 온 것은 둘째 치고, 대위해는 우선 그 이전까지 왕을 하던
선왕계와 다른 계통일 것이다 라는 것은 현재 확실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몇 가지의 쟁점을 통해 보았을 때, 대위해-대인선은 대조영계와 국정운영과 제도면에서 흡사한 모습을 꽤 보이기 때문에 대조영계 방계 출신이 아닐까 하고 예측을 하고 있지만,
아시다시피 발해사가 후반의 자료가 너무 없기 때문에 완전히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우선 대이진의 재위가 끝난 다음, 발해의 왕위는 이상하게도 대이진의 아들들이 아닌, 대이진의 동생인
나이 많은 권신 대건황이 가져갑니다. 이 대건황은 대이진의 동생이자, 선왕이 재위하기 이전에도 살아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적어도 790년대생으로 추정되는 대이진의 동생인만큼, 871년까지 재위한 것으로 보아 상당히 장수하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건황이 죽은 이후, 발해의 왕 자리는 대건황의 손자로 추정되는 대현석에게 돌아갑니다.
이 대현석은 이유는 모르지만, 재위 시작부터 뭔가 이상한 낌새가 느껴집니다.
사신을 보내자마자 일본인들이 발해사신들에게 이국의, 그들의 독기가 느껴진다고 피했던 사실도 있던만큼, 분명히 대현석의 치세는 좋지 않게 시작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점점 발해의 그동안의 내부불만, 외부압력 등의 문제들이 떠오르기 시작했으며, 일본과의 외교관계 역시 뭔가 조금씩 뒤틀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882년. 현재까지 딱히 사서에는 882년에 뭔 일이 있었다고 하는 기록은 일절 없습니다.
이 시기에는 발해도, 일본도, 당나라도 혼란스러움의 와중이었기 때문에 그런지, 상세한 이 시기 역사에 대한 이야기가 존재하지 않고, 그 정황으로만 추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존재하는 사료들의 단편적인 기록들과 단서들로 882년에 발해에서 무슨 일이 났다는 것 자체, 그리고 882년 이후의 발해가 그 이전의 발해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확실하게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 설을 지지하는 연구자들은 882년에 발해에서 역사에 남을 커다란 정변이나 쿠데타, 반란이 일어나 기존에 발해를 지배하던 대야발계(선왕계)의 왕통이 끊어지고 대위해 계열의 왕계가 등장했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발해의 기존 정치체제였던, 정당성을 최고 통치기관으로 두고 중대성과 선조성이 보좌하는 3성6부제가 이 시기에 완전히 무너지고, 정변에 참여한 선조성,문적원 세력이 나라의 최고 통치기관이 되었으며, 정당성과 중대성은 선조성, 문적원의 꼭두각시 혹은 그냥 유명무실한 기관이 되어버렸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발해의 그 이전까지의 선왕계의 정당성, 중대성 위주의 권신정치가 완전히 종식되고, 국왕과 그 친위세력인
선조성,문적원 중심의 이전보다 강도높은 왕권강화를 바탕으로 한 친위독재체제가 이어졌을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으며, 이는 발해가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 44년간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의 발해는 그 이전의 발해와 비교하면 발해라는 껍데기 빼고 완전히 돌변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부터의 글은, 882년 이후와 882년 이전을 비교하면서, 발해가 그 이전과 어떻게 달라졌는지에 대해 사서에서 찾을 수 있는 항목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882년 정변설의 합리성과 당위성을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결국 발해사에서 정치상황이 멀쩡했던 구간은 고왕~선왕 시기뿐이라는게 됩니다.
선왕계 시기도 대이진 이후부터 권신이 날뛰는 환경이 사실상 인증되고 있으며, 대위해-대인선은 이 정변이 사실이라는 가정하에
존재부터가 친위독재체제이기 때문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1. 이전까지 발해의 사서에서 나오던 수많은 신하들의 성씨가 싹 사라지고 882년 이후에는 일부의 성씨들만 계속 등장한다.
-그 이전까지 수많은 성씨들의 수많은 관료들이 사서에 사신으로 기록되고 있고, 활발한 활동을 펼친 것과 다르게, 882년 이후에 사서에서 보이는 발해 관료들은 보이는 성씨와 보이는 인물들만 보입니다. 그 이전까지 국정을 주도했던 , 송막기문에서도 언급이 되었던 발해의 세력가 성씨들 (고, 장, 양, 두, 오, 이) 6집안은, 대위해 세력에 붙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오씨와 고씨 이외에는 발해가 멸망할 때까지 아예 사서에 나오지 않습니다. 특히 이 중에서 882년 직전까지 지겹게 나오던 양씨, 그래도 좀 나오던 이씨는 발해가 멸망할 때까지 거의 사서에 나오지 않습니다. 특히 배씨부자 이전까지 일본에 자주 입근사로 가던 양씨는 아예 이후 발해의 사서에 등장하지 않게 됩니다.
『송막기문』 中
-그 나라는 예부터 대씨를 성으로 삼았다. 왕의 옛 성이 대씨이고 세력과 명망있는 가문들로는 고씨, 장씨, 양씨, 두씨, 오씨, 이씨 등 불과 몇가지 성밖에 안된다.
그리고 뜬금없이 이때부터 그 이전에 거의 보이지 않던 배씨와 최씨가 기존에 살아남은 오씨와 함께 등장합니다. 동시에 882년 이전까지 지겹게 보이던 양씨들이 이 882년 이후로 싹 사라져 멸망까지 보이지 않습니다.
『일본삼대실록』 42권 中
-이달 14일 발해국 입근사 배정 등 105명이 해안에 도착하였습니다.
『책부원구』 976권 中
-후량 태조 2년 정월에 발해국 조공사 전중소령 최예광..(후략)
외교 사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대씨 왕자들이 중국에 사신으로 많이 갔지만, 이 882년 이후부터는 아예 몇몇 신하를 제외하면 중국에 가는 사신은 죄다 대씨 왕자들입니다. 중간에 보이는 최예광, 오소도, 배구는 죄다 방금 언급한 근왕세력, 한마디로 국왕의 친위세력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882년 이후의 발해가 그 이전에 보이던 모습과 다르게 대외적으로 막나가는 경향, 강경한 경향을 보인 것도 정권이 바뀌어서 그랬을 가능성이 상당히 보입니다.
심지어 대인선 시기인 909년에는 재상자리까지 대씨 왕족으로 추정되는 대성악이 앉아 있는 것이 확인됩니다.
그 이전 시기, 선왕계 시기와 선왕 이전의 대조영계 시기만 해도 이런 일은 없었습니다. 대건황이 아무리 권신이었어도 혼자 주변인들하고 다해먹지는 않았던 걸로 보입니다. 그런데 대위해-대인선의 시기는 그것이 극에 달하고 있습니다.
『책부원구』 972권 中
-3년(909년) 3월에 발해왕 대인선이 재상 대성악을 보내 조공하고 남녀노비 및 담비가죽, 곰가죽 등을 바쳤다.
이만큼 발해 말기의 정치상황은 대씨들, 그리고 정황상 대위해-대인선의 친위독재정치에 협조한 것으로 보이는 일부의 인물들만 열심히 줄기차게 나오고 있습니다.
2.882년을 기점으로 발해가 사실상 측근독재통치 체제로 바뀌어, 등장하는 인물만 사서에 등장한다.
-1과 연결됩니다. 이 추측은 상당히 신뢰성이 있는 추측이라고 개인적으로 여깁니다. 우선 위에서 말했듯이 882년 이전에는 다양한 신하들과 다양한 인물들이 구당서, 신당서, 책부원구, 일본일사, 부상악기 등등에서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882년 이후에는 이 다양한 인물들이 모두 사라지고, 특정한 인물들만 계속 등장하는 것이 보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중국에 사신으로 드나드는 많은 대씨 왕자들과 44년간 일본으로 가는 입근사를 독점한 배정-배구 부자, 그리고 발해의 재상이었던 당나라 유학파 오소도와 그 아들 오광찬, 배정과 함께 일본 입근사로 계속 따라간 정 5품 사비은어대 관직의 고주봉 등등 882년 이전에 보이던 인물들의 다양함, 인원수와는 많은 차이가 납니다. 한마디로 보이는 인물만 계속 보이고, 다양한 인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실상 그 이전까지 발해의 최고통치기관이었던 정당성 소속 인물들이 882년 이후 단 한명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이 모든 인물들은 정당성 인물이 아니라는 뜻도 됩니다. 위에서 제기한 선조성/문적원(특히 배정,배구,왕구모,이승영 등, 문적원은 일개 하부조직 주제에 그 덩치에 비해 이상하게 주요인물이 많이 등장합니다.) 인원들이 주로 기용된, 대위해/대인선과 그 측근들로 이루어진 통치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882년 이후의 사서에 등장하는 발해 인물들은 그 이전과 비교하면 그 머릿수가 현저하게 적은 편입니다. 이 역시 발해가 882년 이후에 친위독재체제로 바뀌었다는 것을 예측 가능하게 합니다. 친위독재체제를 유지하고 있느 나라들은, 지금도 그렇지만 독재자들이 자신의 친위세력을 싸고 돌면서 그들만의 정치를 펼칩니다. 러시아도 그렇고, 벨라루스, 북한, 미얀마 같은 독재국가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입니다. 그리고 당장 멀리 갈 것도 없이 백제의 의자왕 역시 왕권강화의 목적을 위해서였겠지만 자신과 자신 주변의 친위세력들로 정치를 이끌어 나간 모습이 보입니다. 북한 역시 현재 수령인 김정은을 중심으로 그 측근들과 부하들로 나라를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이 매우 흡사합니다.
3.발해의 3성6부제의 각 명칭이 문왕-강왕기와 선왕계 시절은 서로 다른데, 문왕-강왕기의 대조영 직계 왕조 시대와
대위해-대인선 시기와는 일치함
-이 파트가 사실상 이 글의 핵심부분입니다.
발해는 문왕 시절부터 당의 3성 6부제를 받아들였습니다. 이는 『신당서』와 『문헌통고』에 언급이 되어 있습니다.
『신당서』 발해전 中
-대개 중국의 제도를 본받았다.
문왕 때에 처음 받아들일 때는 당의 이/호/예/병/형/공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으로 추정이 되지만, 문왕 말기에서 강왕기에 이르러서 발해가 독자적으로 충/인/의/지/예/신으로 함께 병행해서 부른 것으로 보입니다. 확실히 신당서 발해전에는 충인의지예신으로 나옵니다.
그러나 문왕 말기에 다시 당나라식으로 이호예병형공으로 바뀐것이 일본에 강왕이 직접 써서 보낸 글에 나옵니다.
『일본일사』 5권 中. 강왕이 환무천황에게 왕위계승을 알린 글
-삼가 정간대부 공부낭중 여정림 등을 보내 바다를 건너가 기거하게 하고, 아울러 옛 우호관계를 맺고자 합니다.(후략)
그런데....이 이호예병형공은 강왕 이후 그 아들들이 모두 죽고 선왕계에 왕위를 찬탈당하면서 사실상 다시 바뀐 것이 확실해 보입니다. 이번에 바뀐 형식은, 당나라 형식이 아니라, 당나라가 그 당시에 주나라 제도로 한번 롤백한 적이 있었는데, 발해 역시 그걸 본따서 천지춘하추동 제도로 따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게 무엇인고 하니....대이진 때인 841년에 발해에서 일본으로 보낸 중대성첩과 불정존승다라니경 발문(862년)에 나옵니다.
『함화11년 중대성첩 사본』 中
吳秩大夫, 政堂省 春部卿, 上中郞將, 上柱將, 聞理縣擬開國男 賀守謙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오질대부 정당성 춘부경 상중랑장 상주장 문리현의개국남 하수겸
이는 발해의 당시 인물인 '하수겸'의 작위입니다. 바로 뒤에 나오는 대건황의 작위가
中臺親公, 大內相, 兼殿中令, 安豊縣開國公 大虔晃.
이렇게 길듯이, 하수겸은 당시 대건황과 함께 정부를 이끌던 권신집단의 무리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이 하수겸의 작위 중 중간에 정당성 춘부경이 들어가 있습니다. 정당성이라는 글자가 없었으면 그냥 다른 부서인가 할법도 한데, 하필 정당성이라서, 정당성 아래에 있는 6부의 직책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경과 소경이 있는 부서는 이 6부 뿐입니다.
그리고 862년, 대건황의 재위중이었던 이시기에 춘부경 직책은 한번 더 기록에 나옵니다. 862년에 일본에 사신으로 간 이거정이 가져온 불정존승다라니경 발문(佛頂尊勝陀羅尼經 跋文)에말입니다.
『불정존승다라니경 발문』 中
-일본 貞觀 3년(861) 4월 14일에 발해 사신 吳秩大夫, 政堂省 春部卿, 正三位, 上中郎將, 均谷枉縣 開國男 李居正이 가지고 왔다.
여기 보면 이거정의 작위가 오질대부 정당성 춘부경 상중랑장 균곡왕현 개국남 이거정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참고로 20년전에 나온 함화 11년 중대성첩에 나오는 하수겸의 작위와 거의 비슷한 것을 보면, 무언가 이 둘은 대건황의 수족이거나(?) 작위를 이어받았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여튼 갑자기 발해의 역사에서 충인의지예신을 몰아낸 이것들이 다 어디서 나오냐 하면..
바로 주나라 왕실의 관직제도와 전국시대 각국의 제도를 기록한 사료인 『주례』 에 나옵니다.
이 책의 체재는 천지춘하추동(天地春夏秋冬)의 육상(六象)에 따라 직제를 크게 천관(天官)·지관(地官)·춘관(春官)·하관(夏官)·추관(秋官)·동관(冬官)의 여섯으로 나누고 그 아래에 각 관직과 직무를 서술하는 형태로 되어 있다. 이에 따라 전체가 천관총재(天官冢宰)·지관사도(地官司徒)·춘관종백(春官宗伯)·하관사마(夏官司馬)·추관사구(秋官司寇)·동관고공기(冬官考工記)의 여섯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례≫의 이러한 관직 체계는 후대의 국가 조직과 관직 제도에 큰 영향을 미쳤으니, 한대에 이미 관부(官府)를 육조(六曹)로 나누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수당(隋唐) 이후로는 중앙 정부로부터 지방에 이르기까지 모든 행정 조직이 이(吏)·호(戶)·예(禮)·병(兵)·형(刑)·공(工)의 육부(六府) 혹은 육조의 형태로 정비되었다.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그런데... 여기서 잘 써먹던 천지춘하추동은 이후에 또 사라지고 대인선 시기에 오면 귀신같이 과거 문왕~강왕 시절과 같이 이호예병형공/충인의지예신이 부활되어 있는 것이 보입니다.
『소전뢰보』 발해교통사 中(919년)
-발해국사 신부소경 종3위 배구에 칙한다.(후략)
『오대회요』 30권 中(925년)
-화부소경 사자금어대 배구를 우찬선대부로 삼았다.
위의 신부소경은 상술했던 충인의지예신의 하나로서, 발해가 선왕계가 왕을 하기 이전 시기인 대조영 직계 왕조 시기의, 정부조직명칭을 천지춘하추동으로 쓰기 전의 명칭입니다. 그리고 화부소경 역시 선왕계가 제도를 수정하기 전인 문왕~강왕 시기에도 보이던 직책이며, 정왕 시기에도 등장합니다. '화부'소경에 대해서는, 현재 학계에서는 이는 사실상 이호예병형공의 6부중 하나를 별칭으로 부르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일본후기』 20권 中(810)
-다시금 화부소경 겸 화간원사 개국자 고남용 등을 보내 국서를 받들어..(후략)
810년은 강왕의 아들인 정왕 시대입니다. 아직 선왕계에게 왕위가 넘어가기 전인 시기이며, 배구에게 붙어 있던
화부소경 직이 그대로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충인의지예신과 병행되었던 이호예병형공 역시 발해 말기인
대인선 시기인 925년에 나옵니다. 위의 배구가 화부소경이라고 일컬어지던 때도 마침 925년인것 봐서, 이때의 발해는
과거처럼 이호예병형공과 충인의지예신을 병행하고 있었다고 보아도 무관할 듯 합니다.
『고려사』 1권 中(925년)
-발해(渤海) 예부경(禮部卿) 대화균(大和鈞)과 대균로(大均老), 사정(司政) 대원균(大元均), 공부경(工部卿) 대복모(大福暮), 좌우위장군(左右衛將軍) 대심리(大審理) 등이 백성 100호를 거느리고 귀부(歸附)해왔다.
위와 동일
-10년(927년) 3월 갑인일에 발해 공부경 오흥 등 50명과 승려 재웅 등 60명이 귀부했다.
두번이나 이호예병형공의 공부경이 나옵니다. 저는 이것을, 선왕계가 찬탈하기 이전에 대조영계가(사실상 문왕이)
이호예병형공/충인의지예신 병행으로 세워 놓았던 체제를, 선왕계가 찬탈하면서 천지춘하추동으로 바꾸고, 훗날 선왕계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대위해가 과거로 롤백시켰다고 하면 개연성이 들어맞습니다.
그리고 굳이 과거의 왕계가 사용했던 제도로 롤백을 했단 것을 감안하면, 대위해는 대조영계의 방계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지 않을까 하고 생각을 합니다.(아시다시피 대조영 직계는 강왕의 아들 셋을 마지막으로 끊어졌습니다. 나머지 대조영 후손이라 자칭하는 자들은 다 방계입니다.)
4.발해에서 일본으로 보내는 중대성첩이 877년 이후로 끊어졌다가 891년에 단 한번 보내졌는데, 이 때의 중대성첩은 과거의 중대성첩과 상당히 다르다.
-이게 좀 큰 사건인데, 이 891년에 일본으로 간 사신은 일본에 자주 드나들던 배정이 아니라, 문적원의 소감을
지내고 있던 '왕구모'였습니다. 이 왕구모는 동행자 105명을 거느리고 국서와 중대성첩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일본의 반응은 싸늘했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면, 12년에 한번씩 사신을 보내기로 약속해 놓고,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왜 아직 12년이 지나지 않았는데 사신을 보냈는가. 이것이었습니다.
어쨌든 891년 당시 발해의 중대성에서 일본 태정관에 보내는 첩의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참고로 일본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상태에서 보낸 글이라 이 전후상황을 이해하고 읽어야 이해가 가는 글입니다.
그리고 이 891년 중대성첩은 그 이전의 문안을 하고 나라의 일을 알린 다음 서로 덕담을 하고 끝내던 그 이전의 중대성첩/태정관첩과 다르게 아예 처음부터 소식도 없고 문안도 없고 대놓고 본론부터 들어가서 자신들의 사신이 이러이러한 연유로 가니까 잘 받아달라. 라는, 부탁 내지 징징에 가까운 내용으로 볼 여지가 존재합니다.
『일본본조문수』 12권 中
-와서 가지 않을 것 같으면 어그러지며, 예에는 천하에 외롭지 않으며 이웃의 약속을 어기지 않는다 했습니다. 어찌 그 풍속을 지켜 정성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달이 모두 차게 되면 해를 미루고, 별의 운행이 은하를 한 바퀴 돌면 이미 옛 제도의 제한에 가까워져 (굳이 기다리지 않아도) 12년을 채우는 기약이 될 것입니다. (중략)
생각은 만 번 이나 연모하여 오랫동안 중조에 마음을 치닫습니다. 옛 규례를 우러러 사모하여 높은 덕을 받들어 바라봅니다. 큰 바다로 막혀도 멀고도 넓은 것을 근심하지 않고 육로와 수로로 부지런히 지나오겠습니다. 배알할 인연을 얻지 못해 먼 하늘을 응시하며 바라보았습니다. 삼가 문적원소감 왕구모를 보내 귀국에 들어 입근하게 하여 이전의 종적을 찾아보게 합니다.
이 글을 짧게 요약하면,
우리는 12년을 기다리지 못합니다. 12년은 너무 깁니다. 우리는 일본과 더 자주 보고 싶습니다. 육로던 수로던 가리지 않고 찾아올 수 있습니다. 어쨌거나 왕구모를 보냈으니 귀국에 들어가게 해 주십쇼.
라는 이전 약속은 어디로 까먹은지 모를 청을 하고 있습니다.
이에 일본 조정에서는 기한도 까먹고 모르고 온 발해사신을 대놓고 문전박대 했으며 국서와 중대성첩은 받았지만, 발해 사신이 일본 국내로 들어오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일본 태정관에서는 그 이전에 발해에 보냈던 어떤 답장보다 더, 상당히 가시돋친 말로 답장을 보냅니다.
『일본본조문수』 12권 中
-저 중대성의 첩문에서 운운하길, 나라의 전고는 내려왔던 유래에 따르는 것이 도리에 맞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 기한에 오지도 않고 무슨 일을 기대합니까? 책망을 피할 곳이 없습니다. 어찌 때가 되지 않았는데 의례를
갖추겠습니까? 논의한 결과 국경으로부터 돌려보내기로 했습니다. (중략)
일이란 반드시 해당 연도에 장대를 세우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12년을 채운 뒤에 우호를 찾아와야 합니다. 그것은 '지금의 당신'들의 '새 제도'가 아니라 옛 규범에 있습니다. 오로지 이후의 종적을 찾아 옛 제도를 어기지 말아야 합니다. 잘못이 있는데 또 다시 잘못한다면 예를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오늘 정서로 첩합니다. 첩이 도착하면 서장에 따르십시오.
이 일본 태정관 첩을 보면, 그 이전에 발해와 보내었던 많은 첩들과 다르게 엄청나게 화를 내고 있습니다.
아예 화를 내는 것을 넘어서 사신을 국내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고 반품해 버립니다. 일본 입장에서는 지금까지 12년에 한번 사신을 보내기로 약속하였는데, 갑작스레 12년이 차지도 않았는데, (지금껏 한번도 부리지 않던)지들이 대책없이 예고도 없이보내놓고 사신 받아달라고 생때를 부리는 발해를 보고 상당히 언짢게 생각했을 겁니다. 외교 문서에 저렇게까지 쓰여 있다는 것은, 일본 조정이 이 예의를 잃은 행동에 상당히 언짢았다는 것을 확연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은 아무 잡음이나 이러한 화를 낸 적이 없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882년 이후의 발해 정권은 일본에 정기적인 사신을 보내는 년도를 축소시키고자 했거나, 전례를 무시했다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참고로 저 12년이라는 기한은 선왕계 왕통 시기(대야발계 왕조)에 정해서 유지했던 기한입니다. 그런 만큼 882년에 왕통이 뒤집혀 버렸기 때문에 이후로 정권을 잡은 대위해 계열은 이 선왕계가 만들어 놓은 12년 제도를 없애버리고 바꾸고 싶어했을 가능성도 보입니다. 어쨌든, 몰랐던 고의였던 간에 이 사건은 일본을 화나게 만들어 버렸으며, 이 냉랭한 분위기는 2년 뒤에 배정이 직접 일본으로 가서야 풀리게 됩니다.
5.882년 이전에 일본에 가던 사신과 그 이후에 일본으로 가던 사신의 품계, 소속이 다르다.
-882년 이전에는 정당성의 공목관, 좌윤 등등 정당성의 여러 중앙인사들이 주로 입근사로서 일본에 갔습니다.
하지만 882년 이후에는 배정, 배구 부자와 소수의 인원을 제외하면 아예 다른 인원 자체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882년 이전에는 입근사의 소속이 전부 정당성이었지만, 그 이후에는 입근사라고는 문적원의 배정, 배구 부자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정당성 좌윤, 정당성 공목관 등등 정당성 인사들이 이 하던 입근사가, 정 4품 사자금어대 배정과 그 아들인 문적원 소감이자 화부소경인 배구 뿐입니다. 이 역시 발해가 친위독재체제로 들어섰다는 증거 중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일본방면 외교를 무려 44년동안이나 배씨부자가 독점하면서 다른 인물들은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부자가 무려 44년동안이나 특정국가로 보내는 외교사절을 독점했다는 것이 정상적인 국가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6.대위해의 유일한 기록인 당회요 기록 부분을 보면, 통설대로 대위해가 895년에 왕위를 이어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기 때문에, 기존에 알려진 대현석의 재위기간인 871~894년은 뒤집히게 된다
https://cafe.naver.com/booheong/211319
-이 6번의 내용은 제가 다른 곳에 써 놓은 글로 대체를 하려 합니다. 따라서 이 6번항목을 이해햐시려면, 이 링크글을 읽어야 합니다.
링크가 안될때, 읽기 귀찮은 분을 위해서 부가설명을 조금 하자면, 대위해 이전의 발해왕 대현석의 재위기간은 871~894년으로 세간에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882년 정변설을 따르자면 대현석은 894년까지 왕위에 앉아있지 못하게 됩니다. 이 895년의 당회요 기사는 대위해가 895년 당시에, 이전에 무언가의 장한 일을 하여 당에게 895년에 관합을 하나 더하여 받는다는 것을 인증하고 있는 기사이기 때문에, 대위해가 894년에 왕위에 오른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증해 줌으로서, 동시에 대현석의 재위기간이 894년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함께 인증하여 882년 정변설에 힘이 되고 있습니다.
7.882년 11월에 일본으로 간 사절단을 대한 일본측의 태도
-그 이전까지 일본에서는 발해에서 온 사신들을 맞이할 때, 문을 열어준 다음 물자를 먼저 보급해 주고,
수도로 들어오게 하는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간단히 천황에게 인사를 올리고 첩을 전달하고 연회를 베푸는 식의 패턴이 100년 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882년 11월에 일본에 도착한 사신의 경우에는 좀 달랐습니다.
『일본유취국사』 74권 中
-6년(882년) 11월 27일 을미일 (중략) 이달 14일에 발해국 입근사 배정 등 105명이 해안에 도착했습니다. 라고 했다.
28일 병신일에 가하국에 명을 내려 발해객을 편한 곳에 안치하고 규례에 따라 공급하여 우대하도록 했다. 또, 개인적으로 가지고 온 물품을 교역금지 시켰다.
여기를 보면, 그동안 발해사신들이 오면 환영해주고 물자보급을 해준 뒤 바로 수도로 떠나게 해주었던 그 전의 발해사신들과 다르게, 우선 일본정보는 발해의 사신을 '안치'시키라고 명합니다. 그리고 발해객들이 가지고온 물품들을 교역하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이전까지는 발해 사신이 오면 물건을 교류하거나 교환, 판매 한 일도 잦았으며, 발해 사신들이 일본에 선물을 주기도 했는데, 지금 882년의 경우에는 완전히 그것을 막아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대로 발해에서 온 사신들은 자신들이 도착한 일본 '가하국' 지역에서 883년 정월까지 움직이지도 못하고 머물러 있다가 883년 정월 초에 존문발해객사와 통사가 정해지고, 26일에 명을 내려 길을 수리하고 정리한 이후에야 발해 사신들이 수도로 와도 된다는 허가를 내립니다. 그동안은 오면 바로 보급을 주고 바로 수도로 보냈던 것과는 꽤 대조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위와 동일(일본유취국사 74권)
-883년 정월 무진일 초하루...(중략) 26일 계사에 산성국, 근강국, 월전국, 가하국 등에 영을 내려 관사와 길, 다리를 수리하고 길가의 주검을 묻어 발해국 사신들이 서울에 들어올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후략)
그리고 뜬금없이 발해사신이 온다니까 길, 다리를 수리하고 재해로 인해 생긴 주검들을 허겁지겁 묻어준 다음에야 발해사신들을 수도로 부릅니다. 여기까지는 일본이 그동안의 태도가 무색하게, 발해사신들을 이상하게 경계하는 모습이 좀 보입니다. 그러나 수도로 들어온 발해사신들과 커뮤니케이션이 좋게 끝났는지, 2월 25일에는 발해사신들에게 겨울옷을 내리고, 3월 8일에는 어의와 바지를 하사하고, 4월 21일에는 발해 사신들이 일본의 수도에서 금했던 물건들을(위에서 언급한 사신들이 갖고온 물건들) 을 이제서야 허락합니다.
그리고 발해대사 배정을 대접하기 위해 종 5위의 신하 둘을 지정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4월 28일 갑자일에야 발해 사신들을 위로하기 시작했고, 5월이 되면 5월 2일에 들어서서야 대사 배정이 궁에 들어가서 발해왕의 국서와 선물을 전달하는데, 이전까지는 천황과 그 휘하의 신하들이 이를 맞이하였는데, 이번에는 갑자기 '친왕 이하 5위 이상 및 백료 초위 이상인 자들이 모두 모였다' 라고 써 있습니다. 한마디로 일본 조정의 굵직한 이들 모두가 발해 사신을 맞이한 겁니다. 그리고 3일에는 천황이 친왕과 참의 이상의 대신들을 거느리고 발해 사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여기에서 대사 문적원소감 정 4품 사자금어대 배정에게 종 3위를, 부사 정 5품 사비은어대 고주봉에게 정 4위를, 그 이하는 각기 등급이 있게 작위를 내린 내용이 나옵니다. 이렇게 모든 사신단에게 전원 작위를 내린 것은 이번이 발해와 일본간의 교류에서 처음이며, 배정은 일본에서 선물을 여기저기 드리고, 많은 일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천황이 직접 칙서까지 내려 대사 배정에게 어의를 내리고 그를 칭찬하며 상까지 줍니다. 그리고 심지어 이후로도 배정은 일본에 가면 엄청난 환대를 받으며, 훗날 908년에는 일본에 사신으로 간 아들 배구를 통해서 법황(상황)에게 감사편지와 안부편지까지 받습니다. 이 때 일본의 '관원순무' 라는 대신이 배구를 만나 이르기를,
『속본조통감』 3권 中
-배문적의 후손인 그대를 들은 지 오래지만, 관 예부의 고아인 나를 보는 것은 새로울 것입니다. 나는 원경 연간(877~884)에 왔던 그(배정)와의 일을 추억합니다.
라고까지 개인적으로 얘기를 하는 것을 보면, 분명히 배정은 그 당시와 이후에 일본에서 많은 활약을 하였으며,
일본 대신들의 기억에까지 남는 무언가의 활동을 한 것으로 강하게 추정됩니다.
『본조문수』 7권 中
-배공 족하. 지난날 재차 입조하여 빛나던 그 모습은 아직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습니다. (후략)
이것이 법황(출가한 상황)이 배정에게 직접 써서 보낸 글의 도입부입니다. 이 법황은 참고로 882년 당시
배정의 일본 방문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간표(우다) 법황입니다.
882년~883년 당시의 방문이 생각보다 지체가 꽤 되었다는 것, 배정 일행이 수도에 들어가 직접 수도에서 일본 정부의 수뇌부를 알현할 때까지 분위기가 진중하고 생각보다 이상했던 점, 배구가 그들을 만나고 나자 분위기가 완전히 풀어져 연회를 즐기고 사상 처음으로 모든 수행원에게 벼슬과 선물을 내리고 크게 치하한 것을 보면, 일본 정부는 발해의 정권이 뒤집혀 바뀌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발해의 새 정권이 자신들과의 관계를 어찌할 지 알아보고 싶었을 가능성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신들을 조심스레 대하고 진중하게 맞이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사 배정이 천황과 대신들에게 발해는 앞으로도 계속 일본과 변함없이 친선을 유지하는 것을 원한다고 했을 가능성이 크며, 그 이후로도 수십년간 배정이 일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많은 칭찬과 찬양을 듣는 것을 보면, 발해와 일본의 882~883년 당시의 관계는 사실상 배정이 캐리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같은 태도와 대사 개인의 찬양은 일본과 발해의 관계 중에 배정과 배구만이 유이합니다. (배정 이전에 왔었던 정당성 좌윤 양중원 역시 일본과 어느정도 친목을 유지하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정도 찬양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참고로, 이 법황이 보낸 편지에서 배정을 족하라고 불렀다는 것은, 배정이 그만큼 우다 법황의 기억에 많이 남았고, 친근하게 느껴진다는 것 역시 의미하지 않을까 합니다.
따라서, 882년 당시에 발해에서 발생한 정변에 대해 일본은 어느정도 알고 있었으며, 정변이 터진 발해에서 사신이 오자 과연 발해가 어떻게 변했고, 자신들과의 관계를 이제 앞으로 어찌할 것인지 몰라 긴장을 타고 있었으며, 그래서 발해 사신을 과거와 달리 필요외로 진중하게 조심스럽게 대했으며, 배정이 천황을 알현하고 발해 정부의 입장을 밝히고 일본과의 친선을 이어나갈 뜻을 명확하게 밝혔기 때문에, 일본 정부 역시 태도가 완전히 풀어져 역대급으로 발해의 사신들을 후하게 대접하고 잘 먹여 보낸게 아닐까 합니다. 또한 그가 그 당시 너무나 인상깊었기 때문에 일본의 고관들, 법황까지도 그를 기억하는게 아닌가 합니다.
참고로 그 아들인 배정도 비슷한 글을 받았습니다.
『소전뢰보(沼田賴輔)』 中 『발해교통사』 中
-발해국사 신부소경 종 3위 배구에 칙한다. 충절이 가문에 전하고 영화가 세세대대로 이어졌다. 요사이 임금의 명을 받아 또다시 조정에 왔다. 큰 바다를 마치 집 뜰에 고인 물인 양 건너왔으며 마음으로 맹세하고 편지를 받들었다. 그 충정과 신임이 아름다워 표창할 만 하다. 이어 작위의 반열로 뽑히고 애써서 왕을 위해 충성을 다했으니 이전의 일에 따라 맡은 관리가 시행하라.
참고로 여기서는 배구의 직책이 신부소경으로 나오는데, 배구의 진짜 직책은 문적원의 소감 겸 화부소경입니다.
그 이전에는 신부소경이었기도 했는데, 바로 이때의 일이었던 듯 합니다. 배구는 문적원 소감을 맡으면서 동시에
화부소경(919년 이전)->신부소경(919년경)->화부소경(925년경)으로 직책이 자꾸 바뀌는데, 배구를 사서에서 기록할 때는 이 화부소경과 신부소경이 제멋대로 나오지만, 항상 문적원 소감은 공적 문서에서는 이 x부소경들보다 먼저 나옵니다.
원래대로 생각하면, 화부소경과 신부소경은 정당성 아래의 한 부의 차관급 관직이기 때문에 문적원의 소감보다 더 권위있는 자리지만, 이상하게 배구의 지위를 나타낼때 이 두 직위보다 낮은 문적원소감이 꽤 자주 먼저 언급되는 것을 보면(일본삼대실록,부상악기), 대위해-대인선 시기에 정당성이 유명무실화 되었고 선조성-문적원이 권력의 핵심이었던 것은 사실로 보입니다. 그리고 권세가 있었어도 일개 신하였던 배구가 몇년 사이에 화부-신부를 로테이션으로 왔다갔다 하는 것을 보면 국가의 인사가 권력자의 마음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가 되므로, 발해가 친위독재국가라는 방증 중 하나가 되고 있습니다. 물론 배구를 마음대로 자리에 앉히고 승진시킨 사람이 누군지는 말 안해도 아시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현재 발해의 3성6부제는 이호예병형공의 중국 원래 칭호와 충의인예지신을 사실상 혼합해서 부른 것이 거의 정설으로 여겨지는데, 이 '화부'는 나머지 6부의 부 중 한 부의 별칭이 아닐까 합니다. 혹은 일본에서 발해의 부 중 하나는 화부라고 부르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일본은 그 이전에도 중국과 교역할 때 중국의 부서를 지들 멋대로 자기들식으로 고쳐부른 전적이 있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하다 봅니다.
우선 이러한 추측들과 일련의 증거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발해사는 모두가 아시다시피 그 자료의 수가 매우 적어서,
지금 확실한 팩트는 없는 상태이고, 이러이러한 정황을 봐서 정황상 882년에 정변 혹은 쿠데타가 일어난 것 같다. 라고 추측하고 있는 정도입니다. 하지만 단순 추측이라고만 하기에는 무언가 정황으로 볼 수 있는 징조들, 맞아 떨어지는 것들이 있기에 그저 설로만 치부할 정도의 무게는 아닌 듯 싶습니다. 앞으로 발해사의 자료가 언제 어디서 얼마나 나올지는 확실히 모르지만, 이 882년 정변설 역시 언젠가는 그 진위여부가 밝혀지고, 일부라도 밝혀져서 발해사의 비밀을 풀 수 있는 단서로 사용할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저도 연구를 계속 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지 얘기해보는 것도 좋은 나눔이 될 수 있을 거 같네요.
※혹시나 빼먹은 게 있으면 추가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용 사료는 모두 출처 표시 본문에 했음.
참고 논문 및 연구서
방학봉, 1996, 『발해의 강역과 행정제도에 대한 연구』, 연변대 출판사
鈴木靖民, 1990, 『발해의 수령제-발해의 사회와 지방지배』
고광의 외, 동북아역사재단, 2007, 『발해의 역사와 문화』, 동북아역사재단
김진광, 2012, 『발해 문왕대의 지배체제 연구』, 박문사
한규철, 2000, 『발해사의 종합적 고찰』, 고대민족문화연구원
한규철, 1994, 『발해의 대외관계사』, 신서원
임상선, 1999, 『발해의 지배세력연구』, 신서원
송기호, 2020, 『발해 사학사 연구』, 서울대출판문화원
김종복, 2009, 『발해정치외교사』, 일지사
방학봉, 2012, 『발해의 강역과 지리』, 정토출판
등등등
첫댓글 오.. 흥미롭다
이전이랑 완전 다른 발해네…!
어떻게 저만큼 바뀌어버려..와우
더 나왓우면 좋겟더
진짜 신기하다…
와 완전흥미로워
넘 흥미롭다
뭐지...
진짜 너무 재밌다....
오 진짜 재밌다..! 발해사 연구 넘 적은 거 아쉬워ㅠㅠㅠㅠ
흥미롭다 역사 얘기 너무 재밌어
와 진짜 너무 재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