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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대가 이용수님의 업적
작성자:성인봉 (지보)
작성시간:2025.08.31 조회수:140
댓글1
국민은행 1966년 입행동기
.....이용수님의 글
한국과 국민은행과
세계인들에게 보내는 나의 고마움이여! !
이게 우연의 일치일까?
우연의 일치라도 좋고, 아니라도 정말 좋고, 너무나 반가운 일이다!!
어제 8월 29일 금요일! 조선일보 전면광고에 KB(Koeea Best)광고가 나왔다. 국민은행(KB) 문화예술관련 사상 첫 광고이다!
그게 바로
내가 바랐던 일이었고,
내가 3주 전에 국민은행지주회사 회장님과 은행장님께 모든 나의 과거 국민은행 문화활동자료와 함께 건의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과거 세계의 모든 석학들과 한국의 탄허스님까지 예언한 한류문화의 시대가 바로 지금 온 것이다.
그들이 말하고 예언한 21세기는 문화적으로 한국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그 시기와 지금이 정확하게 맞는 때이다.
지금이 세계가 한글과 판소리와, 또 세계를 흥분시키며, 충격을 주고있는 소위 '케이데몬헌터스' 등 세계가 한류문화에 푹 빠져 흥분과 열기를 내품은 지금이 딱 좋은 싯점이다.
이런 분위기를 일찌기 예상했던 나는 그래서 3주 전에 다시 한번 강력하게 KB기업문화를 홍보하고, 국민은행 초창기에 활동했던 각종 자료를 아카이브로 축적하여 국내와 세계에 알리자고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국민은행의 발전과 기업문화의 발전사가 바로 한국경제의 발전사이고, 한국문화예술의 발전사이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세계속의 K문화의 초석이 되었기 때문이기도하다.
그리고 그 한 가운데에는 그간 내가 주인공으로, 또 목격자 증인으로 있어왔기 때문이다!
나는 국민은행 창립초창기인 1966년1월 초급행원 입행 3기로 국민은행에 들어가, 그때부터 지점장으로 퇴직하고, 또 지금까지 합쳐 거의 60년간을 국민은행의 모든 문화예술분야 행사에 거의 직접 참여하였으며, 지금까지도 판소리공연 때나 책을 저술할 때마다 자칭 국민은행 홍보대사라고 소개하고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국민은행은
당시 미약한 무진회사로부터 출발하여 지금은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 가장 능력있는 기업체 중의 하나인 지주회사로 발전한 모체가 된 은행이다. 짧은 역사임에도 그 어려웠던 IMF때도 거뜬히 견뎠고, 이렇게
건실하게 성장해온 밑발판에는 초기부터 지켜 온 국민은행만의 기업문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컴퓨터나 계산기도 없던 그 시절 은행이 처음 생기고, 직원들은 똘똘 뭉쳐 서민금융으로 한푼한푼 모아온 서민들의 돈을 키워주는 상호부금제도 하며, 카드가입, 또 ㅈ중동지역의 건설현장 노무자들의 급여이체를 모집하는 등 경제발전의 기틀을 마련하며 그간 착실히 이렇게 키워왔다. 또
중소기업에게는 인쇄기계와 건설업체의 굴착기 등을 차관자금 으로 도입하는 대출을 해주면서 발전했다. 그때 본인도 직접 기업체에 나가서 신용조사를 했던 기억이 새롭게 떠오른 날이었다!
그때마다 직원들은 다같이 서로를 도와가며 주산으로 당일 입출금을 맞추느라 퇴근도 못하고 밤샘을하며 일을했고, 모두가
서로의 가정사에도 빠지지않고 참여하여 서로 기쁘고 슬픈 일에 동참하는 협동정신도 발휘했다. 그야말로 국민은행만이 가지는 값진 기업문화가 있었다.
특히 나의 고향은 판소리고장인 남원, 운봉인 관계로 어려서부터 판소리에 관심을 갖다가 은행대리 때부터는 주말과 시간이 날때마다 틈틈이 판소리를 고인이 된 인간문화재들에게 열심히 공부하였고, 행내외 각종 금융기관행사와 문화예술행사, 또 문학적인 여러 국제행사에도 거의 빠지지않고 참여하게 되었다.
우선 금융단 사무경기대회 때는 주산선수로 2년간 은행대표로 출전했다. 당시 국민은행은 타행처럼 주산선수를 별도로 특채하지 않고 학과시험으로 들어온 행원중에서 선수를 선발하여 연습한 다음 대회에 나가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기도했다. 그때 나는 운이 좋게도 수석입행하여 본점근무하면서 주산대표로도 2년간 출전했고, 군대는 카튜사로 가서 상병달고 장교대접을 받았다. 대대장이 나를 능력있다하여 임시 병장 달아주고, 장교대접을 해주었다. 나는 미군과 한국군 20명을 거느리고 장교막사, 장교식당, 장교와 여자들만 사용하는 수영장출입 혜택도 받았다. 물론 그때도 나는 국내외 병사들에게 한민족음악인 판소리와 국민은행 홍보역할을 했다.
전역할 때는 다시 상병을 달았고, 그 후 56년만인 2023년도에는 국방부에서 살아있는 상병들에게 일률적으로 병장으로 승진통보가 왔다. 이미 군에서 장교활동을 한 나에게 병장진급이라니 웃음도 났지만, 그래도 의미가 크다고 여겼다.
제대 후에도 국민은행 대표로 금융단합창대회(세종문화회관)에 나가 시벨리우스가 작곡한 '핀란디아'를 불렀고, 당일 두번째의 민요합창때는 장구반주도 해주었다. 그야말로 북치고 장구치고를 다했다.
제대 후의 행원 때는 오산 미공군부대 장교클럽에 년말 토요일의 위문공연을 갔다.
이태원 호텔의 전속 연예인들과 같이 가서 나는 혼자 영어 코메디를 해주었다. 소위 토크쇼를 해주고 올라와서 월요일에는 창구에서 창구에 온 손님들에게
"어서 오십시요!'하고 친절하게 인사하는 모범행원 노릇도 해보았다. 어디서 그런 용기와 열정이 나왔는지 나도 모른다. 당시 우리나라의 코미디는 서로 때리고, 억지웃음을 자아낸다고 방송국을 찾아가서 피디들에게 앞으로 코미디가 나가야할 길을 제시해주기도 했다.
우리문화가 앞으로 나가야할 길을 알려주기도 했다.
은행대리 때부터는 판소리 관련해서 신문에 소개가 자주 나가더니, 은행초임지점장을 광주광역시 송정지점장을 하게되었고, 그 다음 해인 1994년 호남지역본부 부본부장으로 도와달라는 부탁으로 1년 더 광주에 머물면서는 무등산470m 고지 너덜겅약수터에서 시민들에게 새벽에 매주 두번씩 판소리를 지도하며 봉사하였다.
새벽 4시30분 숙소를 출발하여 산을 오른 사람들이 6시에 너덜겅약수터에서 약수를 마시고 광주시내를 내려다보면 불빛이 반짝이는 빛고을(光州) 이 너무나 정겨웠다.여기서 시민들이 약수 한사발을 쭉 마시고 광주를 내려보며 판소리를 하면 얼마나 좋을까!
이게 바로 나의 꿈이었다. 그게 바로 은행에서 보내준 영국연수 중에 들린 핀란드의 헬싱키 공원에있는 시벨리우스의 흉상 앞에서 내가 한 약속을 실현하는 길이었다.
필란드의 민족음악가 인 시벨리우스가 그랬듯이, 나도 우리 한민족의 판소리를 세계에 알리겠다는 굳은 약속을 시 <시벨리우스의 흉상 앞에서>로 지은 것이 바로 무등산에서의 결심을 하게된 동기가 된 것이다.
그리고 바로 3월 초부터 무등산에서 새벽에 1년간 판소리를 가르쳤다. 매스컴마다 "국민은행지점장이 무등산에서 판소리를 가르친다"고 전국이 씨끌버끌했다. 생방송,
뉴스시간, 6시내고향, 만화가가 따라간다 등 각종 프로그램으로 현장을 소개했다. 그해가 마침 '국악의 해'였기에 광주시장 추천으로 문체부장관
표창장도 내려왔다. 그게 바로 내가 오늘이 있기까지의 첫단추가 된 것이다.
다음해인 1995년
서울 대치남지점장 때는 강남대모산악수터에서 같은방식으로 1년,
또 그다음 정읍지점은행 때는 내장산국악교실을 주2회 1년, 퇴직후에는 청계산에서 5년. 그리고 지금은 남한산성에서 5년째이다.
앞으론 아차산도 있고, 스위스의 융프라우 판소리교실도 남아있다.
대리 때는 금융계 잡지인 '은행계'와 '금융'지에 <완벽한 은행창구를 위한 품질관리(QC)> 를 제시했다.
또 대리 때 <별소리 다하네>라는 첫 수필집을 내어 책방과 금융기관 소비조합에서 판매하며, 구입자의 급여에서 공제하는 판매망을 갖추기도 했다.
당시 코리아헤렐드신문사 주최 영어웅변대회때는 내가 매번 영어원고를 써서 3년간 출전하여 결선에 올랐다.
그후
판소리 5바탕을 몇 차례식 되풀이 공부하고는 지금까지 한민족에 대한
17곡의 대작 판소리와 단가를 직접 창작하여 서울 대극장에서 공연했다.
대장금,블락홀에서 온 사나이, 뉴욕9.11 비행기테러!, 4700 년전 치우천황의 탁록대첩, 명성황후의 혼불 등 2시간 내외 공연의 대작이었다. 소재는 주로 한민족의 역사와 영웅들, 애국자, 항일운동가, 또 종교성인으로 예수님과 성모님의 판소리를 창작하여 세계에다 판소리로 알리겠다는 의도였다.
차장때는 작가(시인)으로서도 등단하여 11권의 책을 저술하여 지금도 최근작품 3종이 교보문고에서 판매 중이다.
또 차장때부터는 대만의 한중작가회의에 참석하고, 그후 지점장때는 중국본토 심양에서 개최한 한중작가회의 때도 참석하여 한민족의 중국자가들에게 판소리를 들려주었다.
퇴직 후 강남문화원 강의 26년을비롯, 9백만명의 회원인 사) 대한노인회와 MOU를 맺어 공연과 특강을 했다. 그외 각종 문화예술활동으로 바쁘고, 지금도 한문화 홍보에 바쁘다. 지난 5.31에는 한일문화교류행사로 일본인과 한국인 각 30명씩에게 흥보가 중 '제비노정기' 판소리와 흥보제비가 필리핀에서 겨울을 보내고 호주까지 갔다가 다음 해 봄에 다시 흥보네 집을 찾아온다는 과학적인 실험결과를 소개해서 한일문화인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경북 밀양의 한 고교에서 5년간 제비 다리에 칩을 달아 실험하여 얻어낸 결과를 소개했다.
이러한 문화예술, 특히 나의 판소리에 대하여 정부에서 알아주었기에 내가 2001년 판소리 이수자로 선정된 후 2024년에는 전국 수백명의 이수자 중에서 '2024 2025년의 판소리우수이수자'로 선정되어 약간의 지원을 받고 있는 중이다. 이는 하나의 준문화재격이라고 하는 대우라고 볼 수가 있다.
지난해에도 나의 여러 창작판소리를 발표했지만 무엇보다도 인상적이고, 감동적인것은 10.26일 남한산성에서 공연했던 <오 뉴욕,9.11>이었다. 2001년 뉴욕 쌍둥이 빌딩을 비행기로 테러했던 사건을 당시 판소리로 창작하여 당시 조선일보 등에 소개되었던 작품을 초연으로 공연한것이다. 병자호란의 현장에서 세계 평화의 현장으로 탈바꿈하고 관광명소로 전환하여 한류를 한곳에서 맛보자는 나의 구상에서 이루진것이다. 경기도문화재단의 응모에 선정되어 공연한것인데 나는 이 속에서 엄청난 사건을 발견했다 . 비행기 폭파 사건 날 뉴욕 소방대원들이 희생자들을 장례지내는 식장에서 장송곡으로 불렀던 '어메징 그레이스' 곡이 미국 체로키 인디언들의 구가였다. 그런데 그 체로키 인디언들이 바로 우리 한민족임을 이번에 알아냈다. 우리민족이 캄차카반도를 림ㅇ니 알래스카로 건너가 미국 동남부 조지아주예도 정착하고 일부는 멕시코로 내려가서 지금도 우리문화가 곳곳에 산재해있다. 미국 조지아주에 살았던 체로키족은 그곳에 금이 발견되었다고 한겨울에 서부 오클라호마주로 쫓겨갔다. 가다가 얼어서 죽고,굶어서 죽은 사람이 무려 4천명이라고 했다.
그 슬픈노래를 들으면 그게 바로 우리 말 그대로였다.
나나 슬픈 조선이세. 너희 감당할수있나?
이러한 대우 외에 정부와 주요단체에서 공로 표창을 상신하라는 요청을 받은 판소리 관련 단체에서 나의 공적조서를 꾸미다 보니 이게 바로 내가 그간 근무했던 국민은행의 역사요, 발전사였다. 사진속 판소리교육 현장에 걸린 현수막에는 그때마다 국민은행의 다른 은행로고가 걸려있었다. 은행 발전과정에서
몇년마다 바뀌는 로고가 또 은행의 역사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때마다 많은 은행직원들이 판소리교실 운영을 도와주었고, 그때마다 많은 은행 고객과 시민들이 협조하였으며, 그때의 일들을 그들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있다.
그리고 그 자료와 매스컴보도 사진들은 오늘도 그날의 추억을 기억하고 있기에 언젠가는 그들에게 한번 감사하다는 판소리 무료 공연이라도 하면서 그 사랑에 보답하는 인사를 해야된다고 은행측에도 건의를 했다.
세계속의 한류는 어느날 어디서 그저 하늘에서 뚝 떨어진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이러한 문화 싹들이 트였고, 이를 따르고 지켜주며 사랑해주었던 은행직원들과 고객과 시민들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오늘 다시 한번 느끼면서 지난 일을 잠시 회상해 보았다!
나를 키워준 우리 나라에 고맙고, 나의 꿈을 키워준 은행에 고맙고,
우리의 이런 문화를 알아준 세계인들에게 뜨거운 고마움을 보내고싶다!
2025.8.30 아침 '남한산성을 사랑하는모임'으로 세계유산센테에서 발송함!
이용수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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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봉 (지보)작성자
2025.08.31댓글 메뉴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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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사람은 잘 안바뀝니다 ..옮긴글
인생을 바꾸는 작은습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