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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기 전에 먼저 구름이 낀다. 구름은 비의 가시적인 조짐이다. 광주사태도 어느 날 갑자기 터진 것이 아니라, 먼저 민중봉기의
조짐들이 이처럼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1980년 4월 10일 김대중이 신민당 입당 대신 국민연합에 복귀하겠다고 기자 인터뷰를 한 그 날 오후 8시 경에
북악파크호텔(북악스카이파크 호텔) 501호실에서는 문익환, 예춘호, 이문영, 고은태, 김종환, 한완상, 심재권 등 국민연합 10 여명의 간부들이
대권경쟁에서 김대중이 김영삼을 이기는 방법을 논의했다. 광주운동권 윤상원이 사무국장에 내정된데 이어 그날 국민연합은 신속하게 김대중의
홍위병들을, 즉 복학생 이현배를 총무국장, 복학생 장기표를 조직국장, 복학생 심재권을 홍보국장, 복학생 조성우를 중앙위원에 각각 임명했다.
국민연합이 5월 3일에 청년학생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한데 이어 7일에 '민주화촉진국민선언'을 발표하였다.
그런데 그 선언문에서 "노동자, 청년, 학생들의 민주-민권 운동은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의" "각계각층의 민주 애국시민은 모든 민주역량을
총집결하여" 등의 문구는 김대중의 말이 아니라, 광주운동권 윤한봉의 전용어구들이었다. 폭력시위하면 남북통일이 되는가?
그리고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 모든 민주역량을 총집결하는 것인가? 국민연합 중앙위원 조성우는 전남민주청년협의회 회장 윤한봉의 지시를 받고 있었다. 그 선언문은 국민연합 중앙상임위
명의로 발표되었으나, 그 실무자 조성우의 손을 거쳐 작성된 선언문에는 윤한봉 특유의 표현들이 박혀있다.
국민연합과 윤한봉의 관계는 훗날 1993년 그가 미국으로부터 귀국하였을 때 국민연합이 서울에서 성대하게 베풀어준 환영식만 보아도
분명해진다 (윤한봉, 『운동화와 똥가방』, p. 25 참조). 정용화는 그의 증언록 '윤한봉의 밀항을 돕다'에서 자신이 광주사태 당시 자신이
갑자기 현대문화연구소장직과 전남민주청년협의회장직을 겸직하여 맡게 되었던 경위를 이렇게 서술한다: "당시 청년층의 맥을 이루는 한봉이 형을 각계의
민주인사 단체들과 지방의 반체제 인사들을 지역별로 규합한 지방조직을 아울러 갖춘 전국적인 규모의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결성관계로 바빴다. 그래서 내가 현대문화연구소장과 전남민주청년협의회장을 맡게 되었다." 당시 중앙위상임위원장 문익환 목사와 윤한봉은 운동권
동지의 관계였다. 그리고, 국민연합을 전국적인 규모로 키울 수 있는 조직망을 갖춘 인물은 윤한봉 뿐이었다. 표면상으로는 김대중이 윤보선 및
함석헌과 더불어 공동의장이었으나, 실제로 손발이 되어 일을 하는 인물은 윤한봉이었다.
그러나 윤한봉이 김대중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국민연합을 키우려 한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1982년 12월 미국에 온 김대중을 이듬해 여름에 만난 후의 그의 일성이 "김대중은 과대망상증 환자다"였다. 그는 한마당에서 1996년 발행한 그의 회고록 『운동화와 똥가방』 138~139 쪽에서 그 사실을 이렇게 회고한다:
82년 12월 DJ가 미국으로 나왔다. 동포들의 환영은 대단했다. 몇 군데의 강연회를 마친 DJ는 83년 여름에 LA에서도 강연을 하게 되었다. 나는 박정희 피살에서 5.18까지의 기간에 보여준 DJ의 처신에 대해 불만이 많았었지만 5.18이후 겪은 고난을 통해 많이 변화되었으리라는 기대 속에서 강연회 준비를 열심히 도왔다.
강연회 직전에 열린 동포 사회 축제 때 강연회 홍보 전단을 동포들에게 배포하고 다니고, “민족학교” 청년들과 함께 강연회장에 걸 플래카드를 만들고, 강연 당일에는 신변 경호를 위한 강연장 주변의 경계 활동에 참여하는 등의 협조를 열심히 했다.
그러나 DJ가 연설중에 “5.18은 내가 잡혀가자 분노한 광주 시민들이 일으켰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분개한 우리들은 자리를 차고 일어나 강연장에서 나와 버렸다.
“변하지 않았구나. 과대망상증이 심하구나. 5월 영령들이 자신을 위해, 자신의 석방을 위해 그렇게 싸우다 가셨다는 말인가. 5.18의 의의와 정신을 왜곡하고 모독해도 정도가 있어야지…”
윤한봉의 회고록은 광주사태의 내막에 대한 회고록이었다. 그러나 책머리에 그가 쓴 글은 김대중에 대한 충성심에 대한 표현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 그는 회고록 집필의 이유를 "DJ의 중상모략에 영향을 받아 지금도 나를 경계하고 있는 분들에게 진상을 밝히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그 이후에도 그는 늘 김대중과 앙숙 관계였다. 그는 김대중에게 몰표를 던지는 광주는 "민주화의 성지가 아니라, 망자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곤 했다. 1980년 봄 김대중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투사로 알려졌던 그는 김대중 정부 시절에 소외받는 인물이었다.
윤한봉뿐 아니라, 박효선 등 다른 광주운동권들도 김대중은 광주사태에 대해 모르면서 광주사태 강연을 했다고 증언한다. 이처럼 김대중과 그의
광주 동지들 사이에는 광주사태에 대한 분명한 시각차가 있다. 김대중과 윤한봉의 경우 처음부터 동상이몽이 있었다. 그래서 1993년 미국에서
만나자마자 갈라졌고 앙숙이 되었다. 그럼에도 1980년 5월 초에 김대중과 광주운동권 사이에 폭력시위 동맹이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김대중과 광주운동권간의 가장 크 연결고리는 국민연합 중앙위였다. 중앙위 상임위원장 문익환 목사의 결정이 바로 김대중의 결정이었다.
그리고 문익환 목사의 손발이 조성우 중앙위원이었다. 조성우는 1980년 5월 민주청년협의회 회장을 겸직하고 있었다. 엄밀히 말해서
민주청년협의회는 유령단체이고, 그 실제 명칭은 ‘전남민주청년협의회’였다. 우리가 이 사실을 보아야 어째서 1980년 5월 17일 오후
10시부로 실행된 치안본부의 예비검속 대상에 김상윤 등의 광주운동권이 포함되어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우리가 이 글에서 '김대중과
광주운동권의 폭력시위 동맹'이라고 부르는 사건은 광주사태 당시에는 '학원소요 배후조종'이란 명칭으로 일컬어졌었다. 즉, 국민연합과
민주청년협의회가 그 배후조종 세력이었으며, 그 핵심인사들이 예비검속 대상이었다. 그리고 광주운동권은 민주청년협의회 핵심인사 예비검속을
'전두환의 쿠데타'라 부르며 광주사태를 일으켰던 것이다. 광주사태를 광주항쟁이라고 부르는 쪽에서는 민주청년협의회 간부 예비검속을 쿠데타와
동일시한다.
따라서 우리는 도대체 민주청년협의회가 어떤 단체였는지를 알아야 광주사태의 내막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난제이다.
민주청년협의회는 유령단체였다. 그 시대 사람들 중 그런 단체 이름을 들었거나 기억하는 이는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운동권에서조차 그런 단체가
언제 생겼으며 언제 사라졌는지 알지 못한다. '민주청년협의회'란 이름은 미국 카터 대통령의 방한일이 가까울 무렵인 1979년 5월 11일의
운동권 성명서「카터의 방한을 반대한다」에서 처음 등장하였다. 그후 '11.24 YWCA 위장결혼식 사건' 때 재등장하였으며, 이어 12월 9일
조성우가 민주청년협의회 위원장 명의로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발표한다 (1970年代
民主化運動 IV. p.1711-1715).
유령단체답게 조성우는 어떤 때는 회장, 어떤 때는
위원장 명의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문익환 목사가 그 고문이었다. 그런데 서울에서는 민주청년협의회 결성이 시도되었다가 흐지부지되었으며, 실제로
존속한 단체는 아니었다. 그 거창한 명칭과는 달리 속빈 강정이요, 유명무실한 단체였다.
그런데 이 유령단체가 1980년 5월 8일 다시 등장하여 김대중과 광주운동권 사이에 폭력시위 동맹을 맺게 하였다. 여기서 그 내막이
중요한 것이다. 윤한봉의 여성동지였던 고정희는 월간중앙 1988년 5월호에 기고한 '광주민중항쟁과 여성의 역할/광주여성들, 이렇게 싸웠다'에서
민주청년협의회는 윤한봉의 현대문화연구소 산하 부서였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또한 현대문화연구소는 사회운동권의 결집을 모색하면서 비교회운동과
현장운동에 대한 접근을 꾀하였고 산하 부서 안에 양서조합, 민주청년협의회, 여성들의 송백회, 그리고 근로여성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들불야학」
과 문화패「광대」(당시 대표 김정희)를 두고 있었다." 김성 광주일보사회부기자도 월간지 예향 1988년 11월호에 "광주ㆍ전남‘의식권’탄생주역
윤한봉"이란 제목으로 기고한 글에서 1978년 출옥한 윤한봉이 "공개적으로 민주청년협의회를 구성하였다"고 기록한다.
그런데 1980년 봄에 민주청년협의회의 실체는‘전남민주청년협의회’였다. ‘전남민주청년협의회’라는 거대 지하조직이 실제로 있었기 때문에
5월 8일 민주청년협의회라는 명칭이 재등장할 근거가 있었다. 민주청년협의회 회장은 조성우였으나 그 윗선의 실제 지도자는 윤한봉이었다.
1993년 윤한봉이 귀국하였을 때 국민연합에서 성대한 환영식을 개최한 것은 그의 옛 동지 조성우 등이 주선한 것이었는데, 민주청년협의회 회장
직함을 사용하던 조성우가 국민연합 중앙위원이었다. 그리고 민주청년협의회 간부들이 조성우 외에는 광주운동권뿐이었으므로 광주사태 당시의 예비검속
대상에 광주운동권이 포함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런 전후관계에서 윤한봉의 동지 조성우가 5월 8일 국민연합 중앙상임위원장인 문익환 목사의 지시를 받고, 민주청년협의회
확대간부회의를 열어 폭력시위 행동지침을 결의한 사실을 들여다 보아야 한다. 여기서 확대회의란 서경원 카톨릭농민회 회장과 노금노 총무도 참석하는
회의를 말한다. 당시 전남 운동권으로 구성된 농민회 명칭이 카톨릭농민회였으며 그 약칭이 카농 혹은 가농이었다. 그리고 전남민주청년협의회 회원
대부분이 카톨릭농민회 회원들이었다. 서경원 카농회장이 누구인가? 9년후 밀입북하여 김일성에게 공작금을 받았던 간첩 서경원이었다. 서경원은
함평 사람이면서도 광주 운동권 거물이었다. 광주 운동권 중에는 해남의 남민전 간부 이강도 있었기에 광주운동권을 전남민주청년협의회 혹은 약칭으로
전남민청협이라 불렀던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왜 서울에서 하려는 시위 행동지침을 전남민청협, 즉 광주운동권이 마련하였는지 실로 이상한 일
아닌가! 그리고 "조속한 시일 내에 대규모 가두시위를 전개한다, 각 대학은 학교별로 출발하여 광화문 네 거리를 점령하고 중앙청을 비롯하여 정부
중요관서를 점령한다. 데모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하여 각 대학별로 각목, 돌멩이, 화염병을 준비한다"는 이 지침은 데모 저지선을 폭력시위로
돌파하여 정부 중요관서를 점령하라는 지침이었다.
5월 8일의 민주청년협의회 확대간부회의에는 조성우뿐만 아니라, 장기표 등 여러 명의 김대중의 홍위병도 참석하였는데, 그 회의에서
결의한 폭력시위 지침은 5월 15일 그대로 적용되었다. "최규하 물러나라!" "신현확 물러나라!" "최규하 하야!" "신현확 퇴진!"
"신현확내각 퇴진!" 등의 시위 구호를 외치던 십만 명의 시위대가 경찰차량 3대를 방화했고, 시민버스 등 민간차량 4대를 탈취하여 한 줄로 선
경찰 저지선을 향에 돌진하여 여러 경찰관이 사상케 하였다. 아직 전경 수가 적었던 때라 수적 열세에 몰린 경찰은 오직 청와대 하나만을 지키기
위해 청와대로 배치됐고, 정말로 광화문 네거리를 시위대가 점령하였다. 석유위기로 최규하 대통령은 중동 순방 중이었는데, 날이 저물 무렵
시위대는 금방이라도 청와대로 쳐들어갈 기세였고, 실로 국가가 언제 전복될지 모르는 위기의 순간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운동권이 그 시위를
"1980년5월15일 서울역회군"이라 명명하였는가? 국가를 전복시킬 절호의 기회를 변절자 심재철 때문에 아깝게 놓쳤다는 뜻으로 그들은 그렇게
부른다.
운동권의 해설에 따르면 그 날 5월 15일의 시위 지도부는 대학생 지도부였던 매파 유시민과 비둘기파 심재철의 주장으로 갈라진다.
유시민은 그날 청와대를 점령하자는 주장을 지지하였으나, 심재철은 그 와중에 김종환 내무장관과 통화하고 이미 사방이 어두워졌으므로 일단 시위대를
귀가시키기로 결정한다. 그는 지휘차량인 마이크로 버스 위로 올라가 마이크를 잡고 큰소리로 외쳤다: "솔직히 처음 예상보다 너무나 많은 수의
인원이 군집했다. 이 많은 인원 수를 통제할 방법은 사실상 전무하다. 이대로 계속 청와대까지 진군하다간 혼란이 올 수 있다. 밤이 깊어가고
내일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학생회장단 연석회의가 있으니 오늘은 여기서 해산하자." 그날 김대중은 경호원들까지 한 명도 안 남기고 동교동 사람들을
총동원하여 시위를 선동하였으나, 심재철의 이 한마디가 청와대 진군론에서 해산론으로 기울어지게 하여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돌이켜보건대, 심재철은
그날의 시위 주동자였으나, 배후세력의 과격한 주장에 떠밀려 가지않고 순발적인 기지를 발하여 우리나라가 위기를 모면하게 하였다. 그러나 운동권의
시각에서는 심재철은 변절자로 보이므로 지금껏 그렇게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광주사태는 갑자기 돌발적으로 일어났던 사건이 아니라, 5월 15일 사건이 전개된 사건이었다. 서울의 5월 15일 사건 배후에
광주운동권이 있었다. 5월 15일 청와대를 접수하려 했던 운동권의 계획과 5월 21일 광주운동권이 전남도청을 접수한 사건은 동일선상에 놓여있던
사건이었다. 시민군 지도부는 5월 15일 서울에서 있었던 사건이 곧 광주에서처럼 무장봉기로 격상될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도청 점령
후에 "5일만 버티면 우리가 이긴다"라는 말을 종종했었던 것이다.
남한에서는 잊혀져가고 있는 5월 15일 사건의 중요성을 북한은 인식하고 있기에 1982년도의 5.18도서 "주체의 기치따라 나아가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 567쪽에서 그 날의 시위를 이렇게 서술한다:
<<시위에서는 과감한 육박에 의한 경찰저지선의 정면돌파와 경찰의 포위를 역포위로 전환시켜 앞을 열어나가는 돌파, 분산과 집합, 큰 대렬과
작은 대렬의 겹합, 속도행진에 의한 빠른 기동과 바리게이트에 의한 완강한 방어등으로 주도권을 틀어쥐고 적을 파동에 몰아넣었다.>>
우리의 생각은 기껏해야 "누가 시민버스 탈취하여 몰고가 순경들을 깔아죽였을까?" 하는 질문에서 맴돌았는데, 북한의 분석은 정확하다.
남대문 저지선이 그런 방법으로 뚫린 후 겁에 질린 경찰은 여기저기서 역포위당한채 무력해졌으며, 김종환 내무장관은 만약 시위대가 청와대로 진군하면
청와대를 사수할 여력이 없었다. 오죽하면 그가 신현확 총리를 찾아가 군의 개입을 호소하였겠는가. 그러면 김대중과 광주운동권이 폭력시위 동맹을
맺은 것이 민주화운동이었다는 주장이 가능할 수 있었는지 살펴보자.
민주청년협의회 회의에 조성우와 장기표와 심재권 등 세 명 이상의 국민연합 임원들이 참석하였다는 것은 실로 비민주적이고도 이상한 일이
아닌가? 정치권인 국민연합 간부가 청년 운동권 단체 간부를 겸직하였다는 것은 민주적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도 편법이었다. 중앙위원과
총무국장과 조직국장, 홍보국장 등 실무 간부직이 조성우와 이현배와 장기표와 심재권 등 당시로서는 거액의 월급을 김대중으로부터 받고 있던 김대중의
홍위병들로만 채워져 있었다. 김대중이 개인적으로 고용한 운동권 대학생들만으로 국민연합 실무임원직을 채워놓으면, 그 단체는 처음부터 편견에서
출발하는 단체요, 그런 단체는 치우친 주장을 강요하는 단체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문익환 목사 등 중앙상임위원 전원이 머리 속에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 생각만 가득찬 자들이요, 실무 간부들 전원이 김대중의 홍위병들이었을 때 그 단체는 이미 김대중 일당에 지나지 않는다. 더구나
시국을 올바로 판단하기에는 아직 미숙했던 대학생들을 김대중이 홍위병으로 고용했던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었는가? 과연 그런 단체가 객관성 있고
공정하게 시국을 볼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국민연합 실무직 간부 전원이 전라도 운동권 지하조직 전남민청련 간부직을 겸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납득할 수 있는가?
그 속 내용은 전남민청련이었던 민주청년협의회 확대간부회의가 끝난 후 장기표 국민연합 조직국장과 심재권 국민연합 홍보국장은 보고서를 작성하여 12일에 제출했다: "5월8일, 민주청년협의회 확대간부회의의 결정에 따라 각 대학은 일정한 날을 정하여 전국적으로 동시에 폭력시위를 벌여 정부 중요관서를 점거할 계획이며 이렇게 되면 4.19와 같은 무정부상태가 되어 차기정권까지 장악할 수 있다." 그때 장기표는 이렇게 말했다:
각 대학은 일정한 날을 정하여 동시에 각목과 화염병을 사용한 폭력시위를 과격하게 벌여 저지하는 과정에서의 희생을 각오하면서 민중의 호응을 얻어 정부중요부서를 점령하게 되면 4.19와 같은 무정부상태가 되는 데 이를 계기로 민주세력의 구심인물인 김대중 선생을 사태수습인물로 내세워 학생과 민중을 설득하면 정권장악이 가능하고 사후 수습으로서 민주제도연구소를 주축으로 과도정부를 이끌면 차기 정권까지 잡을 수 있습니다. 저는 심재권과 함께 각 대학 학생회장단에 영향력이 있는 복학생들을 규합, 학생폭력시위를 주도하겠으니, 선생께서는 이문영에게 과도정부구상을 미리 해 두시기 바랍니다.
홍위병 장기표의 이런 보고를 들은 김대중은 "알았다"고 대답하였다. 장기표가 보고한 폭력시위 방법을 보충 설명하면 이러하다. "각목과
화염병을 사용한 폭력시위를 과격하게 벌여 저지하는 과정에서의 희생을 각오하면서" 이 말은 학생들을 교문밖으로 유도하여 폭력시위를 벌이면 경찰
저지선도 뚫고 폭력시위를 민중봉기로 격상시킬 수 있다는 말이다. "4.19와 같은 무정부상태가 되는 데" 이 말은 경찰 저지선을 뚫고
정부중요부서를 점령하면 국가를 전복시킬 수 있다는 말이다. "사후 수습으로서 민주제도연구소를 주축으로 과도정부를 이끌면 차기 정권까지 잡을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최규하 대통령 정부를 민중봉기로 전복시킨 다음 사후 수습 명분으로 김대중이 과도정부를 이끌면 김영삼씨와 대권 경쟁할 필요
없이 5공화국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4.19 20주년에 즈음하여 제2의 4.19 상황을 만들자는 이 전국적 민중봉기 거사 논리는 폭력시위로 도저히 군경이 발포하지 않을 수 없는
함정을 파놓자는 전략을 깔아놓고 있었다. 어느 지역에서든 군경이 발포하도록 유도하는데 성공하면 전국적으로 폭동이 일어나 관공서를 점령하고
국가를 전복시킬 수 있다는 논리이다. 여기서 21일 시민군이 시민군 차량과 시민군 장갑차로 여러 명의 경찰과 군인들을 압사시킨 사건이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주동자들의 고의의 사건이었음을 살펴볼 수 있다. 그날 오전 11시경, 광주시 일원에 전남민주학생총연맹 명의로 "4·19 의거로
연결하자"라는 제목의 전단이 살포되었다. 그 유인물이 뿌려진 직후 시민군 장갑차가 군인들을 깔아죽이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즉, 군경이 살기
위해 공포를 쏘지 않을 수 없는 함정을 파놓으려는 고의성 범행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폭력시위로 제2의 4.19 상황을 연출하자던 김대중과 그의 홍위병들의 도시 게릴라 방법이 남한에서 전민봉기가 일어나길 학수고대하던 북한이 노리고 있던 것과 놀랍게도 일치한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직후 남파되어 6개월간 광주사태 일으킬 공작을 하였던 북한군 특수부대 안창식 대위와 내연의 부부관계였던 탈북여성은 광주사태를 배후조정했던 북한이 노렸던 두가지 목적을 이렇게 서술한다:
특히 1980년 5월초에 들어서면서부터 서울을 중심으로 광주를 비롯해서 전국적인 규모에서 시작된 청년학생들의 반정부시위는 북한정권의 대남작전에 활력을 주고 기지개를 펼 수 있게 하는 큰 선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당사자들한테서 직접들은 이야기지만 북한은 5·18사건을 배후에서 계획하면서 철저하게 두 가지 목적을 노렸다고 한다. 하나는 남조선사회를 북한체제가 합법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국가전복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전라도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믿음직하고 충실한 친북정권 수립이었다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p.73).
민주청년협의회(약칭, 민청협) 회의에서 결의한 그대로 따르기로 12일에 결정한 국민연합은 16일에 최규하 대통령께 최후통첩을 보냈다.
비상계엄의 즉각해제, 신현확 국무총리의 퇴진, 정부개헌심의위원회의 즉각해체 등에 대해 5월19일 오전 10시까지 정부의 명확한 입장을 밝힐 것을
요구하고 이것이 관철되지 않으면 국민연합은 5월22일부터 이 요구를 관철하는 민주화투쟁을 전개할 것이며 이 경우에 발생되는 모든 책임은
정부당국에 있다는 것이었다. 요컨대, 5월 22일부터 전국적 민중봉기를 일으키겠다는 것이었다. 20일부터 일으키겠다던 민중봉기가 이날 이틀
연기되었다. 국민연합 편에서 너무 시간이 촉박하였기 때문에 김대중이 이틀 늦추었다. 따라서, 22일부터의 전국적 민중봉기는 공개적으로
예고되어 있었다. 그러나 광주운동권 윤상원과 전라도 운동권 서경원이 비밀리에 추진하였으며 19일로 예정되어 있던 무장봉기 거사계획이 있었다.
그 무장봉기 거사계획이 5.18 비밀문건 "자유노트" 13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농촌 파급효과를 위해 공용 터미널 바로 앞인 북동성당으로 장소를 정하고 14시부터 18시 사이에 [카농]조직을 이용하여 죽창 [밧데리]등을 준비해서 폭동을 일으킨 후 방송국과 공공건물 및 예비군 무기고를 접수한다." 여기서 [카농]이란 서경원이 당시 회장이던 카톨릭농민회의 약칭이다. 함평에서 농민운동하던 서경원이 1988년 김대중의 평민당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의 동지들이 남민전 간부들이었는데, 그해 12월 그의 동지들이 출옥하고 광주청문회가 김일성 입맛대로 진행되자 김일성이 문익환 목사를 평양으로 불러들였다. 문익환이 누구였던가? 1980년 5월 8일 조성우에게 폭력시위 방법을 마련하도록 지시하였던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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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 글은 아래 목록 중 II. A. 김대중과 광주운동권의 폭력시위 동맹 입니댜.
윤한봉이 회고록에 남긴 5·18 비밀열쇠
I. 1980년 봄 광주운동의 두 주체
A. 윤한봉과 탈북자 회고록의 일치점
B. 서울대 대자보에 박힌 북한말
구호
C. 광주사태 주동세력 광주운동권
D. 광주사태 선동한 황석영의 극단
광대
E. 광주사태 배후세력 남민전
1.
한명숙의
용공서클과 간첩 서경원
F. 광주사태 지원세력 북한군
II. 김대중의 내란으로서의 광주사태
A. 김대중과
광주운동권의 폭력시위 동맹
B. 김대중의 홍위병과 유언비어 대자보
C. 무장봉기 기획한 5.18 비밀문서
D. 김대중의 예비내각 명단
E.
무기탈취 특공대 중의 김대중의 사조직
III. 도시 게릴라 전으로서의 광주사태
A. 19일로 예정되어 있었던 무장봉기
B.
무기탈취 이전의 도시 게릴라전 무기들
C. 경찰저지선 돌파를 위한 도시 게릴라 전술
D. 폭동강령 유인물과 북한군의 교란작전
E. 20일 등장한 정체불명의 무장단체
IV. 통일운동으로서의 광주사태
A. 5·18 광주의 영웅과 만난 문익환
목사
B. 북한에 먼저 알려진 무장봉기 음모
C. 주객이 전도된 광주방송과
평양방송
D. 시민군 도청 점거의 상징적 의미
E. 민족해방운동으로서의 광주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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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사태
주동자들의 친미
유언비어와 반미 행동
MBC 방송국
전소시킨후
TV 본 5.18 치매증
광주사태 연구사료
북한군은 잠수함 타고 광주에 침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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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못살겠다 간첩잡자
합성사진도 아닌것 같은데 맘대로못하는게 민주주의??
많은 공부를 하고 갑니다~
어렴풋이 알고 있던 정보에 새 옷을 입히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