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자칭 타칭 <나는 신이다>라고 칭하며 사람들을 현혹했던 사람들 때문에 말이 많다. 교주가 문제인가? 아니면 따르는 신도들이 문제인가는 알 수 없지만, 여기저기 말이 많다.
20여 넌 전일 것이다. 인사동에서 역사학자 이덕일 선생과 강호동양학 연구소의 조용헌 선생과 만나 저녁을 먹던 중 조용헌 선생이 나에게 말했다. ”형님 우리 셋이서 종교 하나 만듭시다“ ”왜?“ ”우리 세 사람이 종교를 만든다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교리敎理를 만들어 종교를 만들면 세상에 이바지할 것 같은데요. 그리고 함께 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 같고요“
그냥 웃으면서 했던 그 말대로 우리 세 사람이 그때 신흥종교를 만들었다면 성공했을까? 아니면 흐지부지됐을까?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때 종교를 만들지 않았던 것은 잘한 일 중 한 가지 같다. 수많은 종교들이 있는데, 내가 지금까지도 어떤 종교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공부하면서 깨달은 몇 가지 말을 지금도 따르기 때문이다. 주자학을 창시한 주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작게 의심하며 작게 진보하고, 크게 이심하며 크게 진보한다.“ 의심이 많기때문에 나는 부처도, 예수도, 수운이나 증산도 사랑하지만 믿지는 않는다. 내가 종교에 회의적인 사람이 된 것은 내 나이 열일곱 살에 읽었던 니체와 도스토예프스키 때문일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중 대 신문관을 읽으며 신의 유무에 관해 고민하다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부 ‘나눠주는 덕에 관하여’를 읽고서 어설픈 무신론자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나의 제자들이여. 나는 이제부터 혼자 가려 한다. 그대들도 또한 혼자 가기를 원한다. 진실로 나는 그대들에게 권한다. 나에게서 떠나라. 차라투스트라에게서 그대들을 방어하라. 그리고 차라투스트라를 부끄럽게 하라. 내가 그대들을 속였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인식의 인간은 그의 적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그의 벗까지도 미워할 줄 알아야 한다. 끝끝내 학생으로만 머물러 있는 것은 스승에게 보답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대들은 나의 월계관을 벗겨 버리려고 하지 않는가? 그대들은 나를 숭배한다. 그러나 그대들의 숭배가 뒤집힐 때는 어떻게 하려는가! 명심하라. 나가 자빠진 신상에 의해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그대들은 차라투스트라를 믿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도대체 차라투스트라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대들은 나의 신도이다. 그러나 대체 일체의 신도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대들은 그대 자신을 만나기 전에 나를 만났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믿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믿음이 어느 날 뒤집혀지면 어떻게 할 것인가? . 이 때문에 일체의 신앙은 그처럼 흉한 것이다. 이제 나는 그대들에 명령한다. 나를 버리고 그대 자신들을 발견하라, 그리하여 그대를 모두가 나를 부정할 때 나는 그대들에게 돌아가리라.”
이 얼마나 명쾌한 가르침인가? 이런 가르침을 받지 않고, 현명한 사람들도 아닌 어설픈 사람들에게 ‘의심하지 말고 믿어라‘라는 맹목적인 믿음만을 배우다가 보니, 자기 자신을 상실해서 온갖 것 다 바치고 패가망신 하는 사람들이 비 온 뒤에 죽순이 돋아나듯 자꾸 나타나는 것이다. 허버트 스펜서는 “삶이 두려워 사회를 만들었고, 죽음이 두려워 종교를 만들었다.” 고 말했지만 인류가 시작되면서부터 만들어진 것이 종교였다. 나약하고 나약한 것이 인간이다. 그러므로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어떤 절대적인 무엇인가에 의지할 수 밖애 없었던 인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철학이 물음표에서부터 시작되듯 진정한 신앙이나 지혜도 묻고 또 묻는 의심에서 시작될 것이다. 자, 크게 의심하고 진보하자, 중요한 것은 의심을 통해서 참다운 나를 발견하는 것, 그것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