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 본명: 金炳淵(김병연) - ♬
♬♣떠나가는 김삿갓♬♣
죽장에 삿갓쓰고 방랑 삼천리
흰구름 뜬 고개 너머 가는 객이 누구냐
열 두 대문 문간방에 걸식을 하며
술 한잔에 시 한수로 떠나가는 김삿갓
세상이 싫던가요 벼슬도 버리고
기다리는 사람없는 이 거리 저 마을로
손을 젓는 집집마다 소문을 놓고
푸대접에 껄껄대며 떠나가는 김삿갓
방랑에 지치었나 사랑에 지치었나
괴나리 봇짐지고 가는 곳이 어데냐
팔도강산 타향살이 몇몇 해던가
석양지는 산마루에 잠을 자는 김삿갓
O.출생과 사망
1807년 경기도 양주군 (추정)~ 1863년 (57세)전라도 화순군 동북
매장지: 강원도 영월군 와석리
별칭: 자(字)는 이명(怡溟), 성심(性深)
아호(雅號)는 지상(芝祥), 난고(蘭皐)
별칭(別稱)은 방랑 시인(放浪 詩人)
속칭(俗稱)은 김삿갓, 김입(金笠, 김립)
직업: 시인 배우자: 장수 황씨
동거인: 29세 때 기생 가련과 동거했던 것으로 추정
O.가족관계
자녀: 장남 김학균(金學均, 형 김병하에게 양자로 출계)
차남 김익균(金翼均)
3남 김영규(金英奎)
부모: 아버지 김안근(金安根)
친척: 할아버지 김익순(金益淳)
형 김병하(金炳河)
아우 김병호(金炳浩)
O. 왜 삿갓을 써야 했을까?
김병연[1][2](金炳淵, 1807년(순조 7년) ~ 1863년(철종 14년))은 조선 후기의
풍자·방랑 시인이다. 속칭 김삿갓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삿갓 립(笠)자를
써서 김립(金笠)이라고도 한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성심(性深),
호는 난고(蘭皐)이다. 선대의 조상을 살펴보면 9대조부는 병자호란때 척화대신
으로 유명한 청음 김상헌의 사촌형인 형조참판을 지낸 김상준이며 5대조부는
황해도병마절도사 김시태,고조부는 전의현감 김관행,증조부는 경원부사 김이환
그의 조부 김익순이 홍경래의 난 때 선천 부사로 있다가 항복한 것을 두고 비난
하는 시로 장원 급제한 것을 수치로 여겨, 일생을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단장
을 벗을 삼아 각지로 방랑을 했다. 도처에서 독특한 풍자와 해학 등으로 퇴폐
하여 가는 세상을 개탄했다. 그의 수많은 한문시가 구전되고 있다.
O.생애
1807년 경기도 양주에서 양반가문인 김안근의 3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5살
때인 1811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을때 그의 조부(祖父)이자 선천부사(선천방어사)
였던 김익순이 반란군 수괴 홍경래에게 항복---원래 咸興 中軍(함흥군관)으로
전관되어 온지 불과 서너달 되었다. 신임지에 와서 몇 달 동안 어수선한 일을
대충 정돈하고 겨우 한가한 틈을 얻어 숨을 돌리고 그 시골의 저명한 선비들을
모아 글도 짓고 술도 마시며 수일 동안 즐겁게 지내고 있었는데 새벽에 돌연히
반란군이 쳐들어와서 술에 취해 있는 防禦使(방어사) 김익순을 결박해놓고
안비막개(眼鼻莫開)로 항복하라 다그치니 갑자기 이런 지경을 당해서 얼떨결에
항복을 했던 것이다.(참고문헌:안동김씨문헌록)---하는 바람에 가문이 몰락하게
되었다. 김익순은 그로 인해 조정으로부터 참수를 당하였으나 그 가족은 살려
주기로 함에 따라 목숨만은 건지게 되었다. 그 후 황해도 곡산에서 가문에서
종노릇을 하던 사람의 집으로 가족이 피신하였으나 아버지는 도중에 사망하였고
어머니만이 살아남아 3형제를 키워냈었다. 그 중 차남인 병연은 어렸을 때부터
문장 솜씨가 뛰어나다는 정평을 받아 신동(神童)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이후 강원도 영월에서 열린 백일장에서 20세의 나이로 급제를 받게 되었는데
과거에 응시했을 때 시제가 공교롭게도 자신의 조부인 김익순의 역적행위를
비판하는 내용을 쓰라는 시제가 나오자 그는 서슴지 않고 김익순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답글형식의 내용을 쓴 것이었다. 그러다가 어머니로부터 김익순이
자신의 조부이자 자신이 그 손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충격을 받아 삿갓을
쓰고 전국 유랑을 떠나게 되었고 이 때부터 이름도 '병연' 이라는 본명 대신
"삿갓" 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였다. 한때 유랑 도중 집 안에 잠시 들렀다가
그 후로는 돌아오지 않았다는 일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