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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희작가 의 <혼불> 줄거리
최명희, 『혼불』
모든 인간의 삶의 가치가 물질에 의해서 재단되는 현대의 풍조에 비추어 볼 때
『혼불』은 어쩌면 반동적인 주제를 담고 있는 책인지도 모른다.
시대가 요구하는 물질적이고 가시적인 가치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의 가치를 숭고하게 여기고
소중히 하라고 나즈막 하지만 존재의 깊숙한 곳을 울리는 魂의 목소리를 품어 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의미에서『혼불』은 나의 타는 듯한 목마름을 깨끗이 해소시키기에 충분한 책이었다.
『혼불』은 하나의 爲人學이자 人間學 텍스트인 것이다.
『혼불』이 밝히는 길을 따라 가면 우리는 혼불의 마을에서 여장을 풀고 며칠을 묵게 된다.
단아한 초가집, 이끼 끼고 내려앉은 흙벽들, 우우우 소리내는 대숲의 바람 사이로
간간이 양반집이 보이고
어느 양반집 마당에서 펼쳐지는 왁자지껄한 혼례식 풍경이 정겹고도 흥겹다.
이 혼례식의 주인공인 까까머리 새신랑을 싣고
훗날 떠날 남만주 봉천행의 기차도 우리 곁을 지난다.
새색시 효원의 한숨도 이 혼례부터 시작된다.
이 반촌에서 멀리 떨어진 미천한 거멍굴 사람들의 한숨소리도 새어나오는데,
성냥간에서 연신 풀무질을 하는 금생이와 백정 택주의 솜씨 좋게 소 잡는 모습도 보이고
당골네 백단이의 귀신 부르는 신들린 노랫가락도 한 구절 듣게된다.
숟가락 밥그릇도 공출로 빼앗기는 암울한 시대, 모든 게 꿈 같이 허망하지만
그래도 사람 사는 세상이 있으니 그것이 혼불의 마을이다.
"내 홀로 내 뼈를 일으키리라."
아직도 죽지 않고 어디선가 매안 이씨 종가 주변을 서릿발 같은 기상어린 눈으로
주시하고 있을 것만 같은 청암부인. 그녀를 여자라고 칭할 수 있을까.
그녀는 여자이고 사람이기 이전에 종부였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태어날 때부터 그 만큼의 운명과 그 만큼의 그릇을 타고난 종부.
격동의 시대를 살았고 가장 모진 운명의 한 가운데에 서 있었지만 목숨보다 질긴
의무감으로 종가를 일으킨 여장부였다.
매안 이씨의 종손 준의의 안사람이 되었으나 신랑은 혼례를 올린 직후 병을 얻어 유명을 달리하고,
단 하루의 인연으로 부부가 된 청암부인은 남편 없는 시집에 하얀 가마를 타고 온다.
꺼져 가는 가문의 중심에 선 그녀에게는, 살아있으나 살아있다 할 수 없는 시부와 모진 운명 속에서도
초탈적 삶을 살아가는 김씨 부인이 유일한 어른이었다.
청암부인은 더 이상 새색시 일 수 없었고 여자일 수 없었다. 종부가 되던 후로,
아니 젊은 신랑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로 청암부인은 어리되 어리게 행동 할 수 없었다.
열녀로써 수절하고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는 삶.
그런 삶에 대해 지금의 우리는 합리적인 비판을 늘어놓기 일쑤지만 청암부인의 삶을 접하고 나면
말없이 고개를 숙이게 된다.
그러할 수밖에 없었고 충실히 그렇게 살았던 그 초연하고 올곧은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혼불은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청상과부인 청암부인의 곡절많은 삶과 그 자손,
식솔, 주변인들이 겪게 되는 생활사를 민족사적으로 승화시킨 대하소설이다.
그 속에는 일제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들의 고뇌와 투쟁도 있고, 한 가문의 종손으로서 느끼는
책임감과 압박감, 사랑해서는 안될 이를 사랑하는 죄의식으로 파탄에 이르는 삶,
여자된 사람이 지녀야만 했던 풀리지 않는 한, 아랫신분들이 가졌던 원한과 회의가 그대로 담겨져 있다.
나는 책을 읽으며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나의 조상들을 만났으며 다 알지 못했던 우리의 역사를
다시 배웠다.
그리고 한 많은 사람들의 고뇌 속에서 아찔함을 느꼈다.
세상 살면서 이렇게 살아야만 한다면 그것이 진정 산다고 할 수 있을까?
청암부인보다도 더 가슴에 멍을 지고 사는 강실이를 보며 느꼈던 점들이다.
"아아, 강실아. 무지개같이 둥글고 이쁜 사람아.
네가 없다면... 네가 없다면...
나의 심정이 연두로 물들은들 어디에 쓰겠느냐.”
소설의 첫 장면이 생각난다.
청암부인의 애지중지 귀한 종손 강모가 효원과 혼례를 치루던 화려한 그 순간의 묘사.
그러나 그 화려함보다 더 크게 느껴졌던 불길함과 무미건조함의 중심에 강실이가 있었다.
강실과 강모는 사촌지간으로 함께 자랐고 오누이지간과도 같았다.
그러나 운명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일까. 너무나 소중하고 절실하게 원하지만 그 꽃을 딸 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애써 외면하고 거부해야만 했던 강실의 존재는, 강모에게 단 하나의 바램과도 같았다.
그래서였을까?
있어서는 안될 일이 있던 그 날 이후로 강실의 존재는 예전과 같은 절실한 바램이 아닌,
강모의 목을 옥죄는 사슬이 되어 버렸다.
다시는 매안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결심하게 되는 이유는 종손으로서의 압박감보다도
강실이가 있다는 것이 더 컸다.
발걸음소리만 들어도 여한이 없으리라는 강실의 기다림과 가슴에 맺혀 풀리지 않는 죄의식,
그 보다 더 큰 상처는 나를 안타깝게 했다.
효원과 강실에게 풀리지 않는 한을 남기고, 다만 홀로 떠나는 강모는 그 시대의 보편적인 남자였을까?
청암부인이 매안으로 왔을 때, 유일한 소망은 유복자라도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종부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없음은 바로 자식이 없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녀는 시동생의 첫 자식인 기채를 아들로 맞아 키운다.
기채와 율촌부인 사이에서 난 귀한 자식이 바로 종손인 강모인 것이다.
그런 강모는 청암부인 뿐만 아니라 가문에서 귀한 존재였지만 누구의 기대도 총족시키지 못했고
오히려 자신의 운명에 끌려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친 인물이다.
이에 비해 사촌지간인 강태나 강호는 나름대로의 소신을 가지고 지식인으로서의
사명감을 지닌 강인한 삶을 살아간다.
순탄한 삶을 누리지도 못하고 의지적이고 大我的인 삶을 건설할 줄도 모르는 강모에 비해
주변 친척들은 가문과 전통에서 벗어나 새 시대를 열기 위해 최전선에 선 적극적 인물로,
강모를 더욱 위축시킨다.
그리고 청암부인을 중심으로 恨 많은 삶을 살아가는 여인들이 등장한다.
시부의 안사람 역할을 하며 살아가는 김씨부인과 베틀을 짜며 평생 죽은 삶을 살아온 과부인 인월댁,
강모의 첩이 되었으나 고통과 허망감은 커져만 가는 오유끼, 살아있는 자식을 가슴에 묻어야만 하는
오류골댁과 그 여식 강실이, 청암부인이 이루어 놓은 그 가문속에서 모든 것을 짊어져야 하고
다른 여인을 사랑해서 처음부터 자신에게는 관심조차 없었던 남자를 남편으로 맞아야 했으며
결국 그의 빈자리만을 지키며 청암부인이 없는 매안 이씨 종가를 다시 일으켜야하는
종부인 효원. 특히 청암부인과 효원은 시대적 사명감을 가지고서 역사 속에 뛰어들지는 않지만
나약한 남자는 물론, 활약하는 남자들보다도 더 강인하게 자신의 운명에 맞서 싸우는 인물들이다.
후덕한 여장부였던 청암부인의 밑에서 나름의 삶을 꾸려나가는 종과 상민들의 삶 역시
혼불을 이루는 하나의 축이다.
오히려 가문의 식솔들이 겪는 온갖 일에 등장하여 더 큰 이야기 거리가 되는 이들의 존재는,
혼불이 한 시대를 담을 수 있는 데 큰 기여를 한 셈이다. 농사짓고 사는 것 즉 신분이라는 것 자체에
회의를 품고 살아가는 춘복과 옹구네, 말은 하지 않지만 똑같은 불만을 품고 있는 공배는 이씨 가문의
가장 가까이에서 소설 내내 중심이 되는 인물이다.
노비로써 기채의 아들을 낳아 키우며 가슴속에 야망을 키우는 우례,
청암부인의 묘에 아비의 뼈를 투장한 만동이와 백단이(무당)를 통해 하위 신분의 한과
노비제도의 부조리함에 대해서도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특히 강실의 삶을 돌이킬수 없을 만큼 처참하게 만든 원인이 된 춘복이와 옹구네의 내연의 관계는
소설 全般에 나타나고 있고 옹구네가 강실의 삶을 파탄에 이르게 하는 과정은 섬뜩할 정도로
계산적이며 교묘하다. 끓는 피 때문에 자신의 아이를 강실에게 가지게 했던 춘복이가 단순 무지한
사나이라면 뒤에서 이를 조종하는 옹구네는 강실이 절대 빠져나가지 못할 덫을 치는 인물로,
그 잔인함이 보는 이를 분개하게 할 정도이다.
'벗어날 수 없는 올가미와 이보다 더 할 수 없는 고통'이 강실이가 독자에게 각인시키는 이미지이다.
내가 비록 남자지만 강실이가 강모에 대한 사랑으로 원망보다는 죄의식을 느낀다는 점은
심히 마음에 걸리었다.
그리고 한 여인을 사무치도록 사랑했던 남자인 강모의 무책임하고 나약한 행동의 결과는 도피였고,
고통으로 내몰린 강실은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또다시 비극을 감수해야 하는 것은 더욱 그러했다.
이것은 독립적으로 살았던 청암부인과 당당하게 살 수 있는 효원에 비할 수 없는 처참한 상황인 것이다.
강모는 다섯 여자를 불행하게 했다. 청암부인, 어머니인 율촌부인, 조강지처인 효원,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했던 단 한 명의 여자인 강실, 그리고 단지 자기만 바라보는 여인 오유끼.
혼불의 서정성과 향토성은 묘사에서 최고조에 달한다.
사실 혼불 읽기에 있어서 가장 매력이 되는 점이 이 묘사이고 또 가장 힘들고 어려운 점도 바로 묘사이다.
한 장면을 다 읽고 나면 저절로 한 숨을 토해내게 되는데 문체의 정교함과 아름다움,
작가의 박식함은 물론 한 문장 한 문장의 엄청난 길이와 분량 때문이다. 5부에 등장했던
강호와 도환의 대화는 정말 길고 잊을 수 없는 장면이며 불교에 대한 작가의 해박한 지식이 새삼 놀라웠고,
역사선생으로 등장한 심진학 선생의 역사강의도 상당한 분량을 차지한다.
특히 혼불에서는 역사를 논하는 부분이 많았는데
남원에서 일어난 찬규의 난에 대한 묘사와 설명을 통해 춘복이의 행동을 암시하기도 했고,
전주의 역사 즉 백제의 역사가 다루어지기도 했다.
또 일제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민족의식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발해가 비중 있게 설명되었고
일제의 약탈행위와 가난한 민중의 삶이 묘사되기도 했다.
솔직히 대부분의 묘사가 내게는 버겁게 느껴졌고 그 내용을 모두 소화하기도 힘들었다.
내용이 어렵다기보다는,
온갖 부분에 있어서 방대한 묘사를 하고 관심 분야가 아닌 부분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혼불이 문학사적으로 가지는 의의에 대해 후한 점수를 주게 되는지도 모른다.
혼불은 단순한 여인들의 생활사나 애정이야기가 아닌 한 국민이 한 시대를 살며 겪었던 모든 일이
방대하게 펼쳐지기 때문이다.
특히 이야기의 중, 후반부에 등장하는 만주 봉천에서 일어나는 강모와 강태의 생활상은
일제시대에 뜻하지 않게 타향살이를 해야했던 우리 민족의 암담한 삶을 그대로 보여준다.
일종의 도피처로 봉천을 선택했던 강모와 달리 강태는 한국에서 다 할 수 없는 활동들을 펼치기 위해
떠나게 된다.
봉천의 물가를 비롯해서 이주한 이후로 더욱 처참하게 살아가는
한민족의 이야기를 접하면 일제 시대에 겪었던 우리 민족의 울분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매안에서 봉천으로 옮겨온 부서방 일가가 겪는 고통 역시 잊을 수 없는 대목이다.
이 모든 묘사와 서사는 한 가지 주제 의식으로 수렴해 들어간다.
그것은 바로 인간은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한 새로운 인식이다.
이러한 새로운 삶의 인식은 창조의 길로 우리를 이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혼불을 위대한 고전으로 만드는 요인인 것이다.
혼불 속에는 인간의 삶이 살아있다.
나약한 강모, 현실에 기민하게 계산하고 타협하는 이기표,
신분의 벽을 넘고 싶어하는 춘복, 팔자에 순응하는 공배...
최명희는 이들을 저울질하지 않는다.
그냥 보여준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가. 문벌 높고 사철 먹을 것 넘치는,
원뜸 이씨 종가에 시름 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땡볕에 하루 종일 허리 한 번 펼 여유 없어도, 가난한 저녁 상 물리고
고만고만한 이웃과 정담 나누는 공배 가족의 삶이 모자란다고 말할 수 있을까.
최명희는『혼불』에서 여러 인간계층의 군상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도 이야기이지만은
그 너른 품안에서 그들 내면의 다채로운 무늬를 심도 있게 그려낸다.
종갓집 며느리로써 대범하고 강단 있는 효원이, 조선의 대장부 여성상이라고 표현 될 청암부인,
혹은 분수에 맞게 살아가는 충직한 안서방,
신분 상승을 꿈꾸며 세상이 뒤집어지기만을 바라는 상것 춘복이와 그를 꼬드기는 옹구네,
그 모두가 우리 기억 저편 삶의 기록들이다.
덕석말이를 시키는 원뜸의 양반네나 그걸 당해야 하는 거멍굴의 상것에서나
그것은 싫다 좋다 할 수 없는 조선사람의 운명이고 풍속이고 삶이었다.
피가 터지고 살이 갈라져도 이미 거기엔 선악의 개념이 없다.
최명희는 여기서 누가 옳고 그른가에 대한 정답을 묻고 있지는 않는 듯하다.
다만 그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조심스럽지만 강렬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현 시대를 살아가는 너와 내가, 그리고 우리가 단순히 개별적이고
독자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태양이 떴다고 달이 사라진 것은 아니듯이 내 안에 네가 있고 네 안에 내가 존재하는 것이다.
어쩌면 시대를 초월해서 우리는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내 존재는 내 앞에 수많은 조상들의 수고와 노력에 빚을 지고 있는 것이고,
내가 쌓은 德은 혼의 형태로 남아 후손들에게 한 줄기 불[火]로 가슴 깊숙이 전달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우리네 인생은 정말로 소중한 것이 된다. 나와 너의 존재는,
그 뿌리가 지표면의 끝에 굳게 이어져 있는 것이며,
그 가지는 하늘을 향해 무성하고 곧게 팔을 벌리고 서 있는 것이다.
이에 우리의 뿌리가 맞닿아 있는 흙 한줌도, 우리의 가지 위에 앉아 있는
벌레 한 마리도 이제는 하찮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것들은 나의 존재를 규정하고 나에게 이름을 부여해주는 소중한 이웃인 것이다.
이제, 하루하루 무심코 만나던 사람들이,
그들의 이름이, 내게 다른 의미와 다른 느낌을 지니고 다가온다.
그 느낌은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까?
情, 연민, 사랑, 이어짐 등의 단어가 떠오르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情일 것이다.
정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금방 표시가 난다.
마음을 볼 수는 없어도 그 마음이 표현되는 행위나 동작을 보면 그것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정이 없이 하는 일은 항상 무언가가 부족하지만 정이 담겨 있는 일은
그 기쁨이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하물며 감정을 머금고 사는 사람의 관계에서는 어떠하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지금까지의 내 삶을 반성해 본다.
나와 타인의 관계가 유리된 채, 오직 물질적인 이해관계로만 맺어진 나와 타인들이 보인다.
아니 그 보다 앞서 내 자신에게 마저 無情함을 보이는 無感한 내 자신이 내 앞에 비추어 진다.
내가 요새 내 존재에 대해서 갈증을 느꼈던 것은 내 無情의 소치였던 것이다.
나는 인간으로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가치인 情을 어느새 잊고 살고 있었던 것이다.
책을 한 권, 한 권 읽을 때마다 표지 안쪽에 있는 저자 최명희를 나도 모르게 보게 된다.
책상위에서 펜을 들고 글을 구상하고 있는 모습이다. 펜을 들고 있는 그녀의 손은 이 땅에 대한,
그리고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연민, 사랑으로 빛나고 있다.
단순히 내 개인적 착각일까. 아닐 것이다.
책을 읽어 본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끼게 되는 온화함과 따뜻함일 것이고
그것은 그녀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다.
현존하는 보살의 손일 것이다.
우리 삶과 인간에 대한 정을 깨닫고 동시에 인간다움을 생각하게 해 준
故 최명희 선생에게, 그리고『혼불』에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 최명희 작가 혼불 문학관 全北南原 - 서도역 - 사 옆
자료 발췌하여 편집-보리뱅이-
첫댓글
꼭 한번 읽어봐야 겠습니다. ~~ 바로 주문 하였네요!~~ 좋은 책 소개 감사드립니다. ^^
네
가을 독서의 계절..
지금은 책을읽는 사랑이 줄었어요
잘하셨습니다
저도 제대로 읽지못했는데
한번 종이책 사서 읽을려고 합니다
감사 합니다
작가의 집필 원고지
쓰다가 구기고..
보리뱅이님
혼불
이책을 읽은지가 15년쯤 되어 줄거리조차 등장인물조차
잊었으나 그때의 가슴후벼파던 기억은 생생합니다
하찮은 인물하나하나에 생명력을....
사물에 대한 섬세함과 해박한 긴긴 시같은 언어들은
영혼의 울림이였어요...마치 하느님의 파장과 하나되어
토해낸것 같은...
장편소설이라 차분할때 도서관에서
빌려볼까 합니다
감사합니다
네 공감님
도서관에 있을지 모르겠네요
전5권으로 되었지요 아마
네 ~~ 저두 꼭 가슴을 후벼파는 느낌을 갖을수있도록 집중해서 읽어보겠습니다.
네 가을에 읽으면 좋을것같네요
독서의 계절
좋은날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