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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문지화(右文之化)
글을 숭상함으로써 생기는 교화
右 : 숭상할 우(口/2)
文 : 글월 문(文/0)
之 : 의조사 지(丿/3)
化 : 교화 화(匕/2)
오늘날 인류가 이렇게 문명이 발달한 세상에서 사는 것은, 글의 도움이 크다. 누가 발명을 해도 그것을 보존하여 전달할 도구가 없다면, 발명한 새로운 아이디어가 다음 세대로 전달이 되어 축적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은 세계 여러 민족 중에서 가장 글을 숭상해 온 민족이다. 산골 두서너 집 있는 마을에서도 글 읽는 소리가 끊어지지 않았고, 부모는 글을 몰라도 자식에게는 글을 알게 하려고 가난 속에서도 공부시켜 왔다.
우리나라가 1961년 개인 소득 70불 정도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40년 만에 세계 10대 경제대국이 된 것에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글을 숭상하는 부모들이 자식들을 열심히 공부하게 뒷바라지 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한다. 과학기술만 국가를 부강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인문학도 국가 발전에 크게 영향력을 미친다.
조선시대에는 너무 글만 숭상하고 산업과 국방을 등한시하여 나라가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가 없었다. 결국 1910년에 일본에게 멸망 당하고 말았다. 일본 아니라도, 다른 나라가 멸망시켰을 것이다.
조선이 너무 글만 숭상하다가 망한 것 때문에, 오늘날은 과학기술만 중시하고, 글을 너무 천시하는 경향이 있다. 나라가 올바로 되려면, 글을 위주로 하는 인문학과 과학기술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인문학을 일으켜 인성(人性)을 바로잡고, 전통문화 가운데서 좋은 것을 잘 계승해 나가면, 세계적인 경제대국에 맞게 삶의 질이 높은 이상적인 나라가 될 수 있다.
인성이 바르게 되면, 자기의 임무를 다하고 남을 배려하고 인류의 발전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져, 저절로 사람이 살만한 세상이 될 것이다. 도서관을 짓고 박물관을 짓고, 문화원 등을 짓는 것이 다 인성을 바로잡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다.
지난 3월 14일 함안군에서 복합문학관 건립 기공식을 하였다. 복합문학관은 무엇인가? 현대문학과 한문학을 함께 일컬어 복합문학관이라 했는데, 현대문학과 한문학의 자료를 많이 모아 연구자에게 제공하고, 그 안에서 강의, 학술발표회, 세미나 등을 늘 할 수 있는 우리나라 문학의 핵심 기지로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이런 복합문학관이 들어서게 된 것은, 조근제(趙根濟) 함안군수의 특출한 발상에 기인하였고, 군의회 의원들의 적극적인 협조에 힘입었다.
1년 정도 지나면, 9백 평 규모의 복합문학관이 들어설 것이다. 자료의 대부분은 한문학 관계 자료일 것인데, 필자가 갖고 있는 자료도 기증하겠지만, 앞으로 전국 각 대학의 한문학, 중문학, 국사학, 동양철학과 교수들의 귀중한 장서도 다 받아들일 것이다.
한문학 분야에서는 국립도서관이나 서울 유명 대학의 도서관보다 더 알찬 학문 기지가 될 수 있을 것이고, 중국 일본에서도 열람하기 위해서 찾아오는 명소가 될 수 있다.
함안에서는 복합문학관의 기공식을 가졌는데, 남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의령군에서는 성수현(成守鉉)문화원장 등이 주도하여 국어사전박물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어, 조화를 이룬다. 문화를 통한 심성의 교화에 관심을 둔 고을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우리나라가 문화국가가 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규장각(奎章閣)
비운(悲運)의 외규장각(外奎章閣) 도서를 보면서
1776년은 나라 안 밖으로 큰 획을 끄은 해이다. 조선왕조(朝鮮王朝) 27대왕 중에서 왕의 자리를 가장 오랜 51년 7개월을 지킨 영조(英祖(, 694 ~ 1776)가 죽고 그의 손자인 정조(正祖, 1752 ~ 1800)가 왕위에 오른 해이다.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는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는 해이며, 프랑스는 루이 16세의 말기엔 루이 14세부터 베르사유(Versailles) 궁전 신축과 미국독립군의 전비 지원으로 재정의 파탄나고, 여러 가지 명목으로 일반 백성으로부터 과다한 세징수를 하였다.
정부는 7세 이상이면 일년에 일정량의 소금을 의무적으로 사도록 강요하였다. 그 소금값이 시중 가격 10배에 달해, 백성의 분노(憤怒)가 부글부글 끓고 있던 시기이다. 신대륙의 미국과 프랑스는 새로운 나폴레옹(Napoleon)이 유럽을 정복하려는 일반 시민 계급의 힘이 새로운 시대를 여는 전환기를 맞았다.
명조(英祖)는 출생부터 파란만장한 기구한 운명을 타고 났다. 그의 아버지인 숙종은 세분의 왕후로부터 아들을 얻지 못하여 경종(회반장씨; 장회빈 아들)의 배다른 동생으로 태어났다.
영조는 경종이 일찍 죽자 어렵게 왕위에 올랐으나 두 가지 열등 의식에서 신음하였다. 하나는 그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는 무수리(同伊; 나인들에게 세숫물을 떠다 받치는 종) 출신이라는 신분상의 천한 자식인 것이고, 또 하나는 그의 아들, 후에 사도세자라는 칭호를 주었으나 날이 갈수록 아들을 죽인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영조는 그의 아들 몫까지 왕의 자리를 지켜 52년에간 장기집권을 한 왕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가 뒤주에 같혀 죽음읃 당한 것을 기억(당시11세)하는 왕세손은 왕을 둘러싼 집권세력으로 부터 모진 고통을 받았지만 영조가 죽자 조선왕조 22대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정조(正祖)는 왕위에 오르자 그의 아바지인 사도세자를 죽이게 한 세력들을 제거하여야 한다는 그의 지지세력의 요구에 다 응할 수는 없어 일부만 숙청하고 사도세자의 죽음을 반대하다가 숙청되고 귀양간 사람들을 명예회복을 실시하였다.
정조의 고민은 요직에 포진한 영조시대를 주름잡던 세력들을 정리 할려니 고민에 부닥치게 된 것은 이들을 숙청한다는 것은 왕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다시 말하면 조부인 영조의 정책을 부정하는 결과라는 사실에 이를 거두고 영조때 실시하던 탕평책을 재정비 실시하게 된다.
왕권을 잡은 정조는 영조가 오랫동안 집권으로 다진 세력들의 포진으로 자기가 들어설 자리를 찾지 못하는 그러한 분위기에 직면했다. 이런 것을 다목적적으로 해결하려는 욕망에서 설치한 것이 바로 규장각(奎章閣)이었다.
정조가 즉위한 같은 해 음역 9월 25일에 창덕궁 금원(禁苑; 후원)의 북쪽에 규장각을 세웠는데, 규장각은 단순한 왕실의 도서관을 얻고져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규장각을 통해 인재를 모아 외척과 환관들의 역모와 횡포를 누르고 새로운 정치를 펄칠 기구로 삼았다.
다시 말하면 근위세력 양성소로 지정하고 도서관, 정책연구실, 비서실, 그리고 감찰 업무를 담당하는 암행어사의 기능도 함께 부여 하였다. 권한은 많이 주되 직급은 낮게 만들었다. 당시 능력있고 학식이 높은 사람이라도 서얼이라는 신분관계로 벼슬자리에 오르지 못한 사람들을 추천하여 규장각에 배치하여 시험을 처 벼슬을 주는 등 새 바람을 일으켰다.
정조의 모토인 '우문지치(右文之治)'와 '작인지화(作人之化)'는 문화국가를 추구하는 정책으로 많은 책을 출판하였고,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의지 표명으로 규장각에 유생들을 모아, 그 중에서 젊은 문신들을 뽑고, 뽑힌 신하들을 자신이 직접 가르치고 시험을 치르게 하여 평가하였다.
이런 방대한 자료를 분산 보관하려고 강화도 1782년에 세운 것이 바로 외규장각(外奎章閣)이다. 규장각(奎章閣)의 실적은 여러가지 있지만, 우리의 관심을 갖게 하는 특별한 출판물이 '충무공이순신전서(忠武公李舜臣全書)'이다. 충무공 이순신이 전사한지 200년이 지난 후이다.
누구 하나 왕실이나 어느 누구도 충무공 이순신이라는 말을 할 수 없는 세상에 드디어 정조시대에 규장각의 신하들에게 이순신을 재조명하고 그 때까지 있는 자료를 집대성하여 편찬한 것이다.
전적으로 이순신 제독의 일기(日記)를 '난중일기(亂中日記)'라고 기록하고 그 기록을 바탕으로 왕의 교서, 유서(諭書), 후대 여러 왕들의 사제문(賜祭文), 이순신의 장계(狀啓)등으로 구성된 것이다. 외규장각의 비운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조선시대에 최초로 천주교 신부(神父)가 땅을 밟은 것은 임진왜란 때 일본에 선교사로 와 있던 스페인 신부인 그레고리우 드 세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이다.
조선 침략의 선봉장이 된 소서행장(小西行長; 고니시 유키나가)이 천주교 세례교인이며 그의 부하 장군들이 천주교 교도들로 구성되어 있어 자연스럽게 그의 부름을 받고, 1592년 크리스마스를 소서행장(小西行長)의 딸인 마리아가 대마도 도주의 며느리가 된 연유로 그 곳에서 보내고 이듬해 조선의 웅천(현진해 근방)에 온 것이다.
그러나 소서행장과 경쟁관계에 있던 불교도 장군인 가등청정(加藤淸正; 가토 기요마사)의 방해로 일본으로 되돌아 갔으나 전쟁 말기에 다시 조선에서 종군신부로 활동한 것이 기록상으로는 최초로 되어 있다.
18세기 후반에 조선에는 중국으로 부터 서양 선교사들이 전한 서양의 과학에 관한 서적과 천주교 사상을 간추려 '천주실의(天主實義)', '칠극(七克)'등의 서적이 들어와 실학자들이 천주교리에 공감하여 자생적인 천주교 교인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중국에 와 있는 천주교 선교본부에 선교사 파송을 요청하여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1794년에 조선 땅에 와서 선교활동을 통해 4천여명의 교인 수(數)가 1만명으로 배가(倍加) 되었으나 신부는 다음해에 처형 당하였다.
1866년 (고종3년)대원군이 천주교 금압령(禁壓令)을 내려 몇 개월 사이에 프랑스 신부 13명 중 9명을 비롯한 천주교도 8천여명이 학살되었다. 이때 리델(Ridel: 李福明)신부는 조선을 탈출하여 중국 천진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 인도차이나 함대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조선에서의 학살사건을 알렸다.
보고를 받은 베이징 주재 프랑스 대리공사는 청국 정부에 공문을 보내 조선반도에 진격할 결심을 천명하고 이후 어떠한 사태가 발생하든 청국정부는 이에 간섭하지 말라는 통보를 하였다.
청국 총리어문사무(總理衙問事務)의 공한을 통해 프랑스 동태를 알게된 대원군은 천주교 교도들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강화하는 한편 변경의 수비를 굳게 하였다.
같은 해 9월18일 리델신부와 한국인 신도 3명의 안내로 로즈제독이 인솔한 프랑스 군함 3척은 인천 앞바다를 거쳐 양화진(楊花津)을 통과하여 서울 근교 서양(西洋)에 까지 와서 강유연안만 측량하고 중국으로 되돌아 갔다.
그러나 10월4일 로즈제독은 순양전함(巡洋戰艦) 게리에르를 비롯한 함대 7척과 600명의 해병대를 끌고 작약도에 나타났다. 이중 4척의 함정과 해병대가 강화부(江華府) 갑곶진 진해문 부근의 고지를 점거하고 무기, 서적, 식량등을 약탈했다.
11월 11일 프랑스군은 한달 가량 점거한 강화도를 철수하면서 장년전등 모든 관아를 불태우고 은금괴(당시시가 약4만달라)와 대량서적, 보물등을 가지고 중국으로 떠난 사건이다.
외규장각도서의 보관장소를 발건한 사람은 박병선(朴炳善, 1926~ )이다. 박병선박사는 1955년 휴전 이후 프랑스에 간 첫 여성 유학생 출신이다. 그녀의 은사인 이병도박사는 유학 길에 오르는 제자에게 병인양요때 약탈당한 서적을 찾는 길이 유학의 큰 뜻이라는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1977년 프랑스국립도서관에서 찾아낸 것을 서지(書誌)로 완성했다. 10년에 걸처 병인양요 때 약탈당한 296권을 발견하여 서지를 만든 것이 약탈된지 145년만에 고국으로 돌아 온 것이다.
1799년 Napoleon이 애급을 정복할 때 학자 200여명을 대동하여 현 콩코르트 광장에 우뚝선 오베리스크 돌 기둥이라든지 루불박물관을 장식하고 있는 많은 애급문화재와 피라밋을 옮겨 놓지 못한 사정을 그 모양으로 루불박물관에 세워둔 것을 보면 그들의 문화재에 대한 집념을 알 수가 있다.
그 많은 외규장각에 소장한 도서중 식별 할수 있는 학자가 없었는지 단지 의궤(儀軌)만을 약탈해 가고 다른 도서들은 다 불태워 버린것이 한 없이 안타깝기만 하다. 그러나 그나마 살아 돌아온 297권중 한국에 필사본이 없는 63권의 유일본이 포함되어 있다니 더욱 반가운 일이다.
총 340권이 약탈된 것인데 그 중 296권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었고, 한 권은 대영박물관에 있다. 또 한 권은 1993년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이 방한시 한국에 전달 되었으며 나머지 42권은 행방불명 상태다.
만약 대원군이 프랑스 신부 9명을 학살하지 아니 했다면 병인양요로 인한 이러한 약탈은 없지 않았을까? 다시 생각케 한다. 개방을 무서워한 왕조의 비극을 떠 올려 본다.
나라도, 어느 누구도 지키지 못했던 고귀한 외규장각(外奎章閣) 도서들을 여성(女性)인 박병선(朴炳善) 박사께서 프랑스에서 결혼도 하지 않고서 평생을 바쳐 찾아 준 것에 삼가 깊은 경의(敬意)를 보낸다!
최만리는 왜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하였나?
1. 자료 해설
최만리 등의 정음 반대 상소는 세종 26년(갑자, 1444) 2월 20일에 있었던 일이고, 여기에 참여한 사람은 집현전 부제학(集賢殿 副提學) 최만리(崔萬理) 외에 직제학(直提學) 신석조(辛碩祖), 직전(直殿) 김문(金汶), 응교(應敎) 정창손(鄭昌孫), 부교리(副校理) 하위지(河緯之), 부수찬(副修撰) 송처검(宋處儉), 저작랑(著作郞) 조근(趙瑾) 등이다.
상소문에는 세종의 언문(諺文; 正音) 창제와 그에 관련되는 사업들이 부당하며 그에 반대한다는 주장이 담겨져 있다. 정음(訓民正音의 줄임) 창제에 반대하는 상소문의 주장(논리와 근거)은, 현대의 관점에서 볼 때 찬성하기 어려운 것이 대부분이지만, 그 당시에는 대다수 사대부 지식인의 여론을 대변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상소 사건과 관련하여 눈여겨 봐야 할 것은 상소의 시점과 최만리의 당시 직책이다. 즉 정음 창제를 둘러싼 논란은 정음이 이미 완성된 후에 벌어졌고, 반대에 앞장선 최만리의 당시 직책은 집현전의 책임자격인 부제학이었다. 이런 사실들은 집현전이 정음 창제의 산실이 아니었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해석된다.
2. 상소문 국역문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 최만리(崔萬理) 등이 상소하기를, "신 등이 엎디어 보옵건대, 언문(諺文)을 제작하신 것이 지극히 신묘하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혜를 운전하심이 천고에 뛰어나시오나, 신 등의 구구한 좁은 소견으로는 오히려 의심되는 것이 있사와 감히 간곡한 정성을 펴서 삼가 뒤에 열거하오니 엎디어 성재(聖栽)하시옵기를 바랍니다.
一. 우리 조선은 조종 때부터 내려오면서 지성스럽게 대국(大國)을 섬기어 한결같이 중화(中華)의 제도를 준행(遵行)하였는데, 이제 글을 같이하고 법도를 같이하는 때를 당하여 언문을 창작하신 것은 보고 듣기에 놀라움이 있습니다. 설혹 말하기를, ‘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본뜬 것이고 새로 된 글자가 아니라.’ 하지만, 글자의 형상은 비록 옛날의 전문(篆文)을 모방하였을지라도 음을 쓰고 글자를 합하는 것은 모두 옛 것에 반대되니 실로 의거할 데가 없사옵니다. 만일 중국에라도 흘러 들어가서 혹시라도 비난하여 말하는 자가 있사오면, 어찌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사오리까.
一. 옛부터 구주(九州)의 안에 풍토는 비록 다르오나 지방의 말에 따라 따로 문자를 만든 것이 없사옵고, 오직 몽고(蒙古), 서하(西夏), 여진(女眞), 일본(日本)과 서번(西蕃)의 종류가 각기 그 글자가 있으되, 이는 모두 이적(夷狄)의 일이므로 족히 말할 것이 없사옵니다. 옛글에 말하기를, '화하(華夏)를 써서 이적(夷狄)을 변화시킨다' 하였고, 화하가 이적으로 변한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역대로 중국에서 모두 우리 나라는 기자(箕子)의 남긴 풍속이 있다 하고, 문물과 예악을 중화에 견주어 말하기도 하는데, 이제 따로 언문을 만드는 것은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이적과 같아지려는 것으로서, 이른바 소합향(蘇合香)을 버리고 당랑환(당螂丸)을 취함이오니, 어찌 문명의 큰 흠절이 아니오리까.
一. 신라 설총(薛聰)의 이두(吏讀)는 비록 야비한 이언(俚言)이오나, 모두 중국에서 통행하는 글자를 빌어서 어조(語助)에 사용하였기에, 문자가 원래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므로, 비록 서리(胥吏) 나 복예(僕隸)의 무리에 이르기까지라도 반드시 익히려 하면, 먼저 몇 가지 글을 읽어서 대강 문자를 알게 된 연후라야 이두를 쓰게 되옵는데, 이두를 쓰는 자는 모름지기 문자에 의거하여야 능히 의사를 통하게 되는 때문에, 이두로 인하여 문자를 알게 되는 자가 자못 많사오니, 또한 학문을 흥기시키는 데에 한 도움이 되었습니다. 만약 우리 나라가 원래부터 문자를 알지 못하여 결승(結繩)하는 세대라면 우선 언문을 빌어서 한때의 사용에 이바지하는 것은 오히려 가할 것입니다. 그래도 바른 의논을 고집하는 자는 반드시 말하기를, '언문을 시행하여 임시 방편을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더디고 느릴지라도 중국에서 통용하는 문자를 습득하여 길고 오랜 계책을 삼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할 것입니다. 하물며 이두는 시행한 지 수천 년이나 되어 부서(簿書)나 기회(期會) 등의 일에 방애(防碍)됨이 없사온데, 어찌 예로부터 시행하던 폐단 없는 글을 고쳐서 따로 야비하고 상스러운 무익한 글자를 창조하시나이까. 만약에 언문을 시행하오면 관리된 자가 오로지 언문만을 습득하고 학문하는 문자를 돌보지 않아서 이원(吏員)이 둘로 나뉘어질 것이옵니다. 진실로 관리 된 자가 언문을 베워 통달한다면, 후진(後進)이 모두 이러한 것을 보고 생각하기를, 27자의 언문으로도 족히 세상에 입신(立身)할 수 있다고 할 것이오니, 무엇 때문에 고심 노사(苦心勞思)하여 성리(性理) 의 학문을 궁리하려 하겠습니까. 이렇게 되오면 수십 년 후에는 문자를 아는 자가 반드시 적어져서, 비록 언문으로써 능히 이사(吏事)를 집행한다 할지라도, 성현의 문자를 알지 못하고 배우지 않아서 담을 대하는 것처럼 사리의 옳고 그름에 어두울 것이오니, 언문에만 능숙한들 장차 무엇에 쓸 것이옵니까. 우리 나라에서 오래 쌓아 내려온 우문(右文)의 교화가 점차로 땅을 쓸어버린 듯이 없어질까 두렵습니다. 전에는 이두가 비록 문자 밖의 것이 아닐지라도 유식한 사람은 오히려 야비하게 여겨 이문(吏文)으로써 바꾸려고 생각하였는데, 하물며 언문은 문자와 조금도 관련됨이 없고 오로지 시골의 상말을 쓴 것이겠습니까. 가령 언문이 전조(前朝) 때부터 있었다 하여도 오늘의 문명한 정치에 변로지도(變魯至道)하려는 뜻으로서 오히려 그대로 물려받을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고쳐 새롭게 하자고 의논하는 자가 있을 것으로서 이는 환하게 알 수 있는 이치이옵니다. 옛 것을 싫어하고 새 것을 좋아하는 것은 고금에 통한 우환이온데, 이번의 언문은 새롭고 기이한 한 가지 기예(技藝)에 지나지 못한 것으로서, 학문에 방해됨이 있고 정치에 유익함이 없으므로, 아무리 되풀이하여 생각하여도 그 옳은 것을 볼 수 없사옵니다.
一. 만일에 말하기를, '형살(刑殺)에 대한 옥사(獄辭)같은 것을 이두 문자로 쓴다면, 문리(文理)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이 한 글자의 착오로 혹 원통함을 당할 수도 있겠으나, 이제 언문으로 그 말을 직접 써서 읽어 듣게 하면, 비록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일지라도 모두 다 쉽게 알아들어서 억울함을 품을 자가 없을 것이라' 하오나, 예로부터 중국은 말과 글이 같아도 옥송(獄訟) 사이에 원왕(寃枉)한 것이 심히 많습니다. 가령 우리 나라로 말하더라도 옥에 갇혀 있는 죄수로서 이두를 해득하는 자가 친히 초사(招辭)를 읽고서 허위인 줄을 알면서도 매를 견디지 못하여 그릇 항복하는 자가 많사오니, 이는 초사의 글 뜻을 알지 못하여 원통함을 당하는 것이 아님이 명백합니다. 만일 그러하오면 비록 언문을 쓴다 할지라도 무엇이 이보다 다르오리까. 이것은 형옥(刑獄)의 공평하고 공평하지 못함이 옥리(獄吏)의 어떠하냐에 있고, 말과 문자의 같고 같지 않음에 있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으니, 언문으로써 옥사를 공평하게 한다는 것은 신 등은 그 옳은 줄을 알 수 없사옵니다.
一. 무릇 사공(事功)을 세움에는 가깝고 빠른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사온데, 국가가 근래에 조치하는 것이 모두 빨리 이루는 것을 힘쓰니, 두렵건대, 정치하는 체제가 아닌가 하옵니다. 만일에 언문은 할 수 없어서 만드는 것이라 한다면, 이것은 풍속을 변하여 바꾸는 큰 일이므로, 마땅히 재상으로부터 아래로는 백료(百僚)에 이르기까지 함께 의논하되, 나라 사람이 모두 옳다 하여도 오히려 선갑(先甲) 후경(後庚)하여 다시 세 번을 더 생각하고, 제왕(帝王)에 질정하여 어그러지지 않고 중국에 상고하여 부끄러움이 없으며, 백세(百世)라도 성인(聖人)을 기다려 의혹됨이 없은 연후라야 이에 시행할 수 있는 것이옵니다. 이제 넓게 여러 사람의 의논을 채택하지도 않고 갑자기 이배(吏輩) 10여 인으로 하여금 가르쳐 익히게 하며, 또 가볍게 옛사람이 이미 이룩한 운서(韻書)를 고치고 근거 없는 언문을 부회(附會)하여 공장(工匠) 수십 인을 모아 각본(刻本)하여서 급하게 널리 반포하려 하시니, 천하 후세의 공의(公議)에 어떠하겠습니까. 또한 이번 청주 초수리(椒水里)에 거동하시는 데도 특히 연사가 흉년인 것을 염려하시어 호종하는 모든 일을 힘써 간략하게 하셨으므로, 전일에 비교하오면 10에 8, 9는 줄어들었고, 계달하는 공무(公務)에 이르러도 또한 의정부(議政府)에 맡기시어, 언문 같은 것은 국가의 급하고 부득이하게 기한에 미쳐야 할 일도 아니온데, 어찌 이것만은 행재(行在)에서 급급하게 하시어 성궁(聖躬)을 조섭하시는 때에 번거롭게 하시나이까. 신 등은 더욱 그 옳음을 알지 못하겠나이다.
一. 선유(先儒)가 이르기를, '여러가지 완호(玩好)는 대개 지기(志氣)를 빼앗는다' 하였고, '서찰(書札)에 이르러서는 선비의 하는 일에 가장 가까운 것이나, 외곬으로 그것만 좋아하면 또한 자연히 지기가 상실된다' 하였습니다. 이제 동궁(東宮)이 비록 덕성이 성취되셨다 할지라도 아직은 성학(聖學)에 잠심(潛心)하시어 더욱 그 이르지 못한 것을 궁구해야 할 것입니다. 언문이 비록 유익하다 이를지라도 특히 문사(文士)의 육예(六藝)의 한 가지일 뿐이옵니다. 하물며 만에 하나도 정치하는 도리에 유익됨이 없사온데, 정신을 연마하고 사려를 허비하며 날을 마치고 때를 옮기시오니, 실로 시민(時敏)의 학업에 손실되옵니다. 신 등이 모두 문묵(文墨)의 보잘것없는 재주로 시종(侍從)에 대죄(待罪)하고 있으므로, 마음에 품은 바가 있으면 감히 함묵(含默)할 수 없어서 삼가 폐부(肺腑)를 다하와 우러러 성총을 번독하나이다." 하니,
임금이 소(疏)를 보고, 만리(萬理) 등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이 이르기를, '음(音)을 사용하고 글자를 합한 것이 모두 옛 글에 위반된다' 하였는데, 설총(薛聰)의 이두(吏讀)도 역시 음이 다르지 않으냐. 또 이두를 제작한 본뜻이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함이 아니하겠느냐. 만일 그것이 백성을 편리하게 한 것이라면 이제의 언문은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한 것이다. 너희들이 설총은 옳다 하면서 군상(君上)의 하는 일은 그르다 하는 것은 무엇이냐. 또 네가 운서(韻書)를 아느냐. 사성 칠음(四聲七音)에 자모(字母)가 몇이나 있느냐. 만일 내가 그 운서를 바로잡지 아니하면 누가 이를 바로잡을 것이냐. 또 소(疏)에 이르기를, ‘새롭고 기이한 하나의 기예(技藝)라.’ 하였으니, 내 늙그막에 날[日]을 보내기 어려워서 서적으로 벗을 삼을 뿐인데, 어찌 옛 것을 싫어하고 새 것을 좋아하여 하는 것이겠느냐. 또는 전렵(田獵)으로 매사냥을 하는 예도 아닌데 너희들의 말은 너무 지나침이 있다. 그리고 내가 나이 늙어서 국가의 서무(庶務)를 세자에게 오로지 맡겼으니, 비록 세미(細微)한 일일지라도 참예하여 결정함이 마땅하거든, 하물며 언문이겠느냐. 만약 세자로 하여금 항상 동궁(東宮)에만 있게 한다면 환관(宦官)에게 일을 맡길 것이냐. 너희들이 시종(侍從)하는 신하로서 내 뜻을 밝게 알면서도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니,
만리(萬理) 등이 대답하기를, "설총의 이두는 비록 음이 다르다 하나, 음에 따르고 해석에 따라 어조(語助)와 문자가 원래 서로 떨어지지 않사온데, 이제 언문은 여러 글자를 합하여 함께 써서 그 음과 해석을 변한 것이고 글자의 형상이 아닙니다. 또 새롭고 기이한 한 가지의 기예(技藝)라 하온 것은 특히 문세(文勢)에 인하여 이 말을 한 것이옵고 의미가 있어서 그러한 것은 아니옵니다. 동궁은 공사(公事)라면 비록 세미한 일일지라도 참결(參決)하시지 않을 수 없사오나, 급하지 않은 일을 무엇 때문에 시간을 허비하며 심려하시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전번에 김문(金汶)이 아뢰기를, '언문을 제작함에 불가할 것은 없습니다' 하였는데, 지금은 도리어 불가하다 하고, 또 정창손(鄭昌孫)은 말하기를,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반포한 후에 충신, 효자, 열녀의 무리가 나옴을 볼 수 없는 것은, 사람이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자질(資質) 여하(如何)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꼭 언문으로 번역한 후에야 사람이 모두 본받을 것입니까' 하였으니, 이따위 말이 어찌 선비의 이치를 아는 말이겠느냐. 아무짝에도 쓸데 없는 용속(庸俗)한 선비이다." 하였다.
먼젓번에 임금이 정창손에게 하교하기를, "내가 만일 언문으로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 효자, 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다" 하였는데, 창손이 이 말로 계달한 때문에 이제 이러한 하교가 있은 것이었다.
임금이 또 하교하기를, "내가 너희들을 부른 것은 처음부터 죄주려 한 것이 아니고, 다만 소(疏) 안에 한두 가지 말을 물으려 하였던 것인데, 너희들이 사리를 돌아보지 않고 말을 변하여 대답하니, 너희들의 죄는 벗기 어렵다" 하고,
드디어 부제학(副提學) 최만리(崔萬理), 직제학(直提學) 신석조(辛碩祖), 직전(直殿) 김문(金汶), 응교(應敎) 정창손(鄭昌孫), 부교리(副校理) 하위지(河緯之), 부수찬(副修撰) 송처검(宋處儉), 저작랑(著作郞) 조근(趙瑾)을 의금부에 내렸다가 이튿날 석방하라 명하였는데, 오직 정창손만은 파직(罷職)시키고, 인하여 의금부에 전지하기를, "김문이 앞뒤에 말을 변하여 계달한 사유를 국문(鞫問)하여 아뢰라" 하였다.
3. 상소문 원문(조선실록)
庚子. 集賢殿副提學崔萬理等 上疏曰. 臣等伏覩諺文制作. 至爲神妙創物運智. 형出千古. 然以臣等區區管見. 尙有可疑者. 敢布危懇. 謹疏于後. 伏惟聖裁.
一. 我朝自祖宗以來. 至誠事大. 一遵華制. 今當同文同軌之時. 創作諺文有駭觀聽. 黨曰. 諺文皆本古字. 非新字也. 則字形雖倣古之篆文. 用音合字. 盡反於古. 實無所據. 若流中國. 或有非議之者. 豈不有愧於事大慕華.
一. 自古九州之內. 風土雖異. 未有因方言而別爲文字者. 唯蒙古西夏女眞日本西蕃之類. 各有其字是皆夷狄事耳. 無足道者. 傳曰. 用夏變夷未聞於夷者也. 歷代中國. 皆以我國. 有箕子遺風. 文物禮樂. 比擬中華. 今別作諺文. 捨中國而自同於夷狄. 是所謂棄蘇合之香. 而取당螂之丸也. 豈非文明之大累哉.
一. 新羅薛聰吏讀. 雖爲鄙俚. 然皆借中國通行之字. 施於語助. 與文字元不相離. 故雖至胥吏僕隷之徒. 必欲習之. 先讀數書. 粗知文字. 然後乃用吏讀. 用吏讀者. 須憑文字. 乃能達意. 故因吏讀而知文字者頗多. 亦興學之一助也. 若我國元不知文字. 如結繩之世. 則姑借諺文. 以資一時之用猶可. 而執正議者. 必曰與其行諺文以姑息 不若寧遲緩而習中國通行之文字. 以爲久長之計也. 而況吏讀行之數千年. 而簿書期會等事. 無有防礎者. 何用改舊行無弊之文. 別創鄙諺無益之字乎. 若行諺文則爲吏者. 專習諺文. 不顧學問. 文字吏員岐而爲二. 苟爲吏者以諺文而宦達. 則後進皆見其如此也. 以爲二十七字諺文. 足以立身於世. 何須苦心勞思. 窮性理之學哉. 如此則數十年之後. 知文字者必少. 雖能以諺文而施於吏事. 不知聖賢之文字. 則不學墻面. 昧於事理之是非. 徒工於諺文 將何用哉. 我國積累右文之化. 恐漸至掃地矣. 前此吏讀. 雖不外於文字. 有識者尙且鄙之. 思欲以吏文易之而況諺文與文字. 暫不干涉. 專用委巷俚語者乎. 借使諺文. 自前朝有之. 以今日文明之治. 變魯至道之意. 尙肯因循而襲之乎. 必有更張之議者. 此灼然可知之理也. 厭舊喜新. 古今通患. 今此諺文. 不過新奇一藝耳. 於學有損. 於洽無益. 反覆籌之. 未見其可也.
一. 若曰如刑殺獄辭. 以吏讀文字書之. 則不知文理之愚民. 一字之差. 容或致寃. 今以諺文. 直書其言. 讀使聽之. 則雖至愚之人. 悉皆易曉. 而無抱屈者. 然. 自古中國. 言與文同. 獄訟之間. 寃枉甚多. 借以我國言之. 獄囚之解吏讀者. 親讀招辭. 知其誣而不勝 楚. 多有枉服者. 是非不知招辭之文意而被寃也. 明矣. 若然則雖用諺文. 何異於此. 是知刑獄之平不平. 在於獄吏之如何. 而不在於言與文之同不同也. 欲以諺文而平獄辭. 臣等未見其可也.
一. 凡立事功. 不貴近速. 國家比來措置. 皆務速成. 恐非爲治之體. 曰諺文不得已而爲之. 此變易風俗之大者. 當謀及宰相下至百僚. 國人皆曰可. 猶先甲先庚. 更加三思. 質諸帝王而不悖. 考諸中國而無愧. 百世以 俟聖人而不惑. 然後乃可行也. 今不博採群議. 驟令吏輩十餘人訓習. 又輕改古人已成之韻書. 附會無稽之諺文. 聚匠數十人刻之. 劇欲廣布 其於天下. 後世公議何如. 且今淸州椒水之幸. 特慮年겸. 扈從諸事. 務從簡約. 比之前日. 十 八九. 至於啓達公務. 亦委政府. 若夫諺文. 非國家緩急不得已及期之事. 何獨於行在. 而汲汲爲之. 以煩聖躬調燮之時乎. 臣等. 尤未見其可也.
一. 先儒云. 凡百琓好. 皆奪志. 至於書札. 於儒者事最近. 然一向好著. 亦自喪志. 今東宮. 雖德性成就. 猶當潛心聖學. 益求其未至也. 諺文縱曰有益. 特文士六藝之一耳. 況萬萬無一利於治道. 而乃硏精費思. 竟日移時. 實有損於時敏之學也. 臣等. 俱以文墨末技. 待罪侍從. 心有所懷. 不敢含默. 謹경肺腑. 仰瀆聖聰.
上覽疏. 謂萬理等曰. 汝等云. 用音合字. 盡反於古. 薛聰吏讀. 亦非異音乎. 且吏讀制作之本意. 無乃爲其便民乎. 如其便民也. 則今之諺文. 亦不爲便民乎. 汝等. 以薛聰爲是. 而非其君上之事. 何哉. 且汝知韻書乎. 四聲七音. 字母有幾乎. 若非予正其韻書. 則伊誰正之乎. 且疏云. 新奇一藝. 予老來難以消日. 以書籍爲友耳. 豈厭舊好新而爲之. 且非田獵放鷹之例也. 汝等之言. 頗有過越. 且予年老. 國家庶務. 世子專掌. 雖細事. 固當參決. 諺文乎. 若使世子. 常在東宮. 則宦官任事乎. 汝等以侍從之臣. 灼知予意. 而有是言可乎.
萬理等對曰. 薛聰吏讀. 雖曰異音. 然依音依釋. 語助文字元不相離. 今此諺文. 合諸字而 書. 變其音釋. 而非字形也. 且新奇一藝云者. 特因文勢而爲此辭耳. 非有意而然也. 東宮於公事. 則雖細事. 不可不參決. 若於不急之事. 何竟日致慮乎.
上曰. 前此金汶啓曰. 制作諺文. 未爲不可. 今反以爲不可. 又鄭昌孫曰. 頒布三綱行實之後. 未見有忠臣孝子烈女輩出. 人之行不行. 只在人之資質如何耳. 何必以諺文譯之而後. 人皆效之. 此等之言豈儒者識理之言乎. 甚無用之俗儒也. 前此. 上敎昌孫曰. 予若以諺文. 譯三綱行實. 頒諸民間. 則愚夫愚婦. 皆得易曉. 忠臣孝子烈女. 必輩出矣. 昌孫乃以此啓達. 故今有是敎.
上又敎曰. 予召汝等. 初非罪之也. 但問疏內一二語耳. 汝等不顧事理. 變辭以對. 汝等之罪. 難以脫矣. 遂下副提學崔萬理. 直提學辛碩祖. 直殿金汶. 應敎鄭昌孫. 副校理河緯地. 副修撰宋處儉. 著作郎趙瑾于義禁府. 翌日命釋之. 唯罷昌孫職. 仍傳旨義禁府. 金汶前後變辭啓達事由. 其鞫以聞. (辛丑. 義禁府劾啓. 金汶律該對制上書. 詐不以實. 杖一百徒三年. 只贖杖一百)
(添)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 몇 개가 있다.
그 하나는 여기 주제와는 상관없는 객설이지만 세종께서 우리 한글을 만드실 때 신하 몇한테 적당히 명을 내려서 만든 것이 아니고 청주온천으로 휴양을 가셔서도 만사 다 잊고 푹 쉬시는 것이 아니라 몸소 고심하여 한글을 만드셨다는 것에 감격의 눈물이 나고 얼마나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이 깊었던가에 눈물이 나며, 급제하여 들어온 일류 학자들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시고 훈계하시니 얼마나 유식하셨던가에 한 번 더 존경이 간다.
다음 우리가 우리의 독립된 우리의 글자를 만드는 것이 당시 얼마나 중국에 큰 실례가 되므로 세종은 자꾸 새 글자가 아니라고 하고 최만리 등은 새 글자이니 위험하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우리의 가림토가 없어진 원인이 짐작이 간다.
만약 한자가 아닌 우리 조상이 만든 글자로 된 책이라도 가지고 있다가 들키면 반역의 죄로 다스려 질 수도 있기 때문에 가림토로 쓰인 문서는 스스로 불태워졌으리라고 추정된다.
▶️ 右(오른쪽 우/도울 우)는 ❶회의문자로 佑(우)와 동자(同字)이다. 식사할 때 밥을 먹는(口) 손(又)이라는 뜻을 합(合)한 글자로 오른쪽을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右자는 '오른쪽'이나 '오른손'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右자는 금문에서야 등장한 글자이다. 갑골문에서는 又(또 우)자가 '손'을 통칭하는 뜻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에 又자가 '다시'나 '또'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면서 금문에서는 손과 관련된 다양한 글자가 파생되기 시작했다. 右자는 '손'을 뜻했던 又자에 口자를 더해 '오른손'으로 구분한 글자이다. 오른손으로 밥을 먹기 때문에 右자는 口(입 구)자가 쓰인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유래가 명확히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기억에는 도움이 될듯하다. 참고로 又자에 工(장인 공)자를 더하게 되면 '왼손'이라는 뜻의 左(왼 좌)자가 된다. 그래서 右(우)는 '오른쪽'의 뜻으로 ①오른쪽 ②오른손 ③우익(右翼) ④서쪽 ⑤높다 ⑥귀하다 ⑦숭상(崇尙)하다 ⑧돕다(=佑) ⑨강(強)하다 ⑩굽다 ⑪권(勸)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오를 승(陞), 오를 척(陟), 오를 양(敭), 오를 승(昇), 오를 등(登), 오를 등(騰),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왼 좌(左)이다. 용례로는 오른쪽 날개를 우익(右翼), 오른손을 우수(右手), 오른쪽의 옆으로 오른쪽을 우측(右側), 오른편을 우편(右便), 오른쪽을 우면(右面), 오른쪽으로 돎을 우선(右旋), 글을 쓸 때 그 오른쪽에 기록된 것을 가리키는 말을 우기(右記), 오른쪽에 적혀 있는 사람 또는 오른쪽에 적혀 있는 내용을 우자(右者), 우익으로 기울어짐 또는 그러한 경향을 우경(右傾), 높은 직위로 승진됨을 우천(右遷), 세력 있고 훌륭한 가문을 우성(右姓), 오른쪽에 있는 발을 우족(右足), 오른편으로 오른쪽 가장자리를 우변(右邊), 한쪽의 편을 듦을 우단(右袒),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어 봄을 우면(右眄), 극단적인 우익 사상을 극우(極右), 오른쪽에 쓰인 내용과 같음을 여우(如右), 좌석의 오른쪽을 좌우(座右), 합장할 때에 아내를 남편의 오른편에 묻는 일을 부우(祔右), 왼쪽을 둘러보고 오른쪽을 짝눈으로 자세히 살핀다는 뜻으로 무슨 일에 얼른 결정을 짓지 못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좌고우면(左顧右眄), 제사의 제물을 진설할 때 육포는 왼쪽에 식해는 오른쪽에 차리는 격식을 이르는 말을 좌포우해(左脯右醢), 왼쪽으로 돌렸다 오른쪽으로 돌렸다 한다는 뜻으로 사람이 어떤 일이나 대상을 제 마음대로 처리하거나 다루는 것을 이르는 말을 좌지우지(左之右之), 왼쪽으로 끌고 오른쪽으로 이끈다는 뜻으로 서로 의지하고 도움을 이르는 말을 좌제우설(左提右挈), 사람이 재덕을 두루 갖춤을 이르는 말을 좌의우유(左宜右有), 음양설에 왼쪽이 양이고 오른쪽은 음이라 하여 남자는 왼쪽이 중하고 여자는 오른쪽이 중하다를 이르는 말을 남좌여우(男左女右), 오른쪽으로 갔다 왼쪽으로 갔다하며 종잡지 못한다를 이르는 말을 우왕좌왕(右往左往) 등에 쓰인다.
▶️ 文(글월 문)은 ❶상형문자로 攵(문)의 본자(本字)이다. 사람 몸에 ×모양이나 心(심)자 꼴의 문신(文身)을 한 모양이다. 살갗에 바늘로 찔러 먹물이나 물감 등으로 글씨나 그림이나 무늬를 들이는 것을 문신이라 하고, 형벌로서 하는 수도 있지만 축하(祝賀)하는 표로도 하였다. 나중에 '무늬', '글자', '학문', '문화' 따위의 뜻에 쓰였다. ❷상형문자로 文자는 '글'이나 '문장'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文자는 양팔을 크게 벌린 사람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文자의 갑골문을 보면 팔을 벌리고 있는 사람의 가슴에 어떠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몸에 새긴 '문신'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文자의 본래 의미는 '몸에 새기다'였다. 그러나 文자는 시간이 지나면서 '문서'나 '서적'과 같이 글을 새겨 넣은 것과 관련된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文자가 이렇게 글자나 서적과 관계된 뜻으로 쓰이게 되면서 지금은 여기에 糸(실 사)자를 더한 紋(무늬 문)자가 '무늬'라는 뜻을 대신하게 되었다. 文자는 부수로 지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상용한자에서는 관련된 글자가 없다. 그래서 文(문)은 (1)문장(文章) (2)무(武)에 대하여 학문, 학예, 문학, 예술 등을 이르는 말 (3)어떤 명사 아래에 쓰이어 문서, 문장(글)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말 (4)신발의 치수의 단위 (5)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글월, 문장(文章) ②어구(語句; 말의 마디나 구절), 글 ③글자 ④문서(文書) ⑤서적(書籍), 책 ⑥문체(文體)의 한 가지 ⑦채색(彩色), 빛깔 ⑧무늬 ⑨학문(學問)이나 예술(藝術) ⑩법도(法道), 예의(禮義) ⑪조리(條理) ⑫현상(現狀) ⑬산문(散文) ⑭결, 나뭇결 ⑮얼룩, 반점(半點) ⑯돈의 한 가지, 그 돈의 개수를 나타내는 말 ⑰신발의 치수의 단위 ⑱아름다운 외관(外觀) ⑲주문왕의 약칭(略稱) ⑳빛나다, 화려하다 ㉑아름답다, 선미(鮮美)하다 ㉒몸에 새기다 ㉓꾸미다 ㉔입묵(入墨)하다, 자자(刺字)하다 ㉕어지러워지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책 책(冊), 글 서(書), 글 장(章), 문서 적(籍),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호반 무(武), 말씀 언(言)이다. 용례로는 생각이나 느낌이나 사상 등을 글로 표현한 것을 문장(文章), 글자나 숫자 따위로 일정한 뜻을 나타낸 것을 문서(文書), 공적인 성격을 띤 문서나 서류를 문건(文件), 좋은 글을 가려서 뽑음을 문선(文選), 옛날의 제도나 문물을 아는 데에 증거로 되는 기록이나 서적을 문헌(文獻), 글의 성분들이 서로 맺고 있는 관계를 문맥(文脈), 글의 구절을 문구(文句), 글을 짜고 꾸미는 법칙을 문법(文法), 글을 볼 줄도 쓸 줄도 모름을 문맹(文盲), 살갗을 바늘로 찔러 먹물이나 다른 물색을 넣음 또는 그렇게 만든 몸을 문신(文身), 한 사람의 시문을 모아서 엮은 책을 문집(文集), 서재에 꼭 있어야 할 네 벗 즉 종이와 붓과 벼루와 먹을 일컫는 말을 문방사우(文房四友), 전문식과 무략을 다 갖추고 있음을 이르는 말을 문무겸전(文武兼全), 문화의 모든 산물이 서로 오고 감을 일컫는 말을 문물교류(文物交流), 남의 글이나 저술을 베껴 마치 제가 지은 것처럼 써먹는 사람을 일컫는 말을 문필도적(文筆盜賊), 허물도 꾸미고 잘못도 꾸민다는 뜻으로 잘못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뉘우침도 없이 숨길 뿐 아니라 도리어 외면하고 도리어 잘난 체함을 일컫는 말을 문과식비(文過飾非), 까막눈인 사람들을 가르쳐 글 모르는 이가 없도록 하는 일을 일컫는 말을 문맹퇴치(文盲退治), 문장이 썩 잘 되어서 한 점도 가필할 필요가 없을 만큼 아름다움을 이르는 말을 문불가점(文不加點), 문도 번거롭고 예도 번거롭다는 뜻으로 규칙이나 예절이나 절차 따위가 번거롭고 까다로움을 일컫는 말을 번문욕례(繁文縟禮), 가난한 사람은 농사 짓느라고 여가가 없어 다만 삼동에 학문을 닦는다는 뜻으로 자기를 겸손히 이르는 말을 삼동문사(三冬文史), 유교를 어지럽히는 도적이라는 뜻으로 교리에 어긋나는 언동으로 유교를 어지럽히는 사람을 이르는 말을 사문난적(斯文亂賊), 어떤 일을 시작하기는 쉬우나 이룬 것을 지키기는 어렵다는 뜻을 이르는 말을 창업수문(創業守文), 용과 같이 위엄 있는 모양을 하고 있으나 실은 물고기라는 뜻으로 옳은 듯하나 실제는 그름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어질용문(魚質龍文) 등에 쓰인다.
▶️ 之(갈 지/어조사 지)는 ❶상형문자로 㞢(지)는 고자(古字)이다. 대지에서 풀이 자라는 모양으로 전(轉)하여 간다는 뜻이 되었다. 음(音)을 빌어 대명사(代名詞)나 어조사(語助辭)로 차용(借用)한다. ❷상형문자로 之자는 '가다'나 '~의', '~에'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글자이다. 之자는 사람의 발을 그린 것이다. 之자의 갑골문을 보면 발을 뜻하는 止(발 지)자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발아래에는 획이 하나 그어져 있었는데, 이것은 발이 움직이는 지점을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之자의 본래 의미는 '가다'나 '도착하다'였다. 다만 지금은 止자나 去(갈 거)자가 '가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之자는 주로 문장을 연결하는 어조사 역할만을 하고 있다. 그래서 之(지)는 ①가다 ②영향을 끼치다 ③쓰다, 사용하다 ④이르다(어떤 장소나 시간에 닿다), 도달하다 ⑤어조사 ⑥가, 이(是) ⑦~의 ⑧에, ~에 있어서 ⑨와, ~과 ⑩이에, 이곳에⑪을 ⑫그리고 ⑬만일, 만약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이 아이라는 지자(之子), 之자 모양으로 꼬불꼬불한 치받잇 길을 지자로(之字路), 다음이나 버금을 지차(之次), 풍수 지리에서 내룡이 입수하려는 데서 꾸불거리는 현상을 지현(之玄), 딸이 시집가는 일을 일컫는 말을 지자우귀(之子于歸), 남쪽으로도 가고 북쪽으로도 간다는 뜻으로 어떤 일에 주견이 없이 갈팡질팡 함을 이르는 말을 지남지북(之南之北), 주머니 속에 있는 송곳이란 뜻으로 재능이 아주 빼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저절로 남의 눈에 드러난다는 비유적 의미의 말을 낭중지추(囊中之錐), 나라를 기울일 만한 여자라는 뜻으로 첫눈에 반할 만큼 매우 아름다운 여자 또는 나라를 위태롭게 한다는 말을 경국지색(傾國之色), 일을 맺은 사람이 풀어야 한다는 뜻으로 일을 저지른 사람이 그 일을 해결해야 한다는 말을 결자해지(結者解之), 알을 쌓아 놓은 듯한 위태로움이라는 뜻으로 매우 위태로운 형세를 이르는 말을 누란지위(累卵之危), 어부의 이익이라는 뜻으로 둘이 다투는 틈을 타서 엉뚱한 제3자가 이익을 가로챔을 이르는 말을 어부지리(漁夫之利), 반딧불과 눈빛으로 이룬 공이라는 뜻으로 가난을 이겨내며 반딧불과 눈빛으로 글을 읽어가며 고생 속에서 공부하여 이룬 공을 일컫는 말을 형설지공(螢雪之功), 처지를 서로 바꾸어 생각함이란 뜻으로 상대방의 처지에서 생각해 봄을 이르는 말을 역지사지(易地思之), 한단에서 꾼 꿈이라는 뜻으로 인생의 부귀영화는 일장춘몽과 같이 허무함을 이르는 말을 한단지몽(邯鄲之夢), 도요새가 조개와 다투다가 다 같이 어부에게 잡히고 말았다는 뜻으로 제3자만 이롭게 하는 다툼을 이르는 말을 방휼지쟁(蚌鷸之爭),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려고 생각할 때에는 이미 돌아가셔서 그 뜻을 이룰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을 풍수지탄(風樹之歎), 아주 바뀐 다른 세상이 된 것 같은 느낌 또는 딴 세대와 같이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비유하는 말을 격세지감(隔世之感), 쇠라도 자를 수 있는 굳고 단단한 사귐이란 뜻으로 친구의 정의가 매우 두터움을 이르는 말을 단금지교(斷金之交), 때늦은 한탄이라는 뜻으로 시기가 늦어 기회를 놓친 것이 원통해서 탄식함을 이르는 말을 만시지탄(晩時之歎), 위정자가 나무 옮기기로 백성을 믿게 한다는 뜻으로 신용을 지킴을 이르는 말을 이목지신(移木之信), 검단 노새의 재주라는 뜻으로 겉치례 뿐이고 실속이 보잘것없는 솜씨를 이르는 말을 검려지기(黔驢之技), 푸른 바다가 뽕밭이 되듯이 시절의 변화가 무상함을 이르는 말을 창상지변(滄桑之變), 호랑이를 타고 달리는 기세라는 뜻으로 범을 타고 달리는 사람이 도중에서 내릴 수 없는 것처럼 도중에서 그만두거나 물러설 수 없는 형세를 이르는 말을 기호지세(騎虎之勢), 어머니가 아들이 돌아오기를 문에 의지하고서 기다린다는 뜻으로 자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어머니의 마음을 이르는 말을 의문지망(倚門之望), 앞의 수레가 뒤집히는 것을 보고 뒤의 수레는 미리 경계한다는 뜻으로 앞사람의 실패를 본보기로 하여 뒷사람이 똑같은 실패를 하지 않도록 조심함을 이르는 말을 복거지계(覆車之戒) 등에 쓰인다.
▶️ 化(될 화, 잘못 와)는 ❶회의문자로 訛(와), 譌(와)의 고자(古字)이고, 僞(와)는 동자(同字)이다. 사람(人)이 모양을 바꿔 다른 사람(匕)이 된다는 뜻을 합(合)한 글자로 되다를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化자는 '되다'나 '변천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化자는 人(사람 인)자와 匕(비수 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化자의 갑골문을 보면 두 사람이 서로 엇갈려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산사람과 죽은 사람을 함께 그린 것이다. 化자는 본래 윤회(輪廻)를 표현한 것으로 人자는 '산 사람'을 匕자는 '죽은 사람'을 뜻한다. 化자에 '죽다'나 '태어나다'의 뜻이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化자는 '변천하다'나 '바뀌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化(화, 와)는 (1)천지(天地) 자연(自然)이 만물(萬物)을 생육(生育)하는 작용. 천지(天地)의 운용(運用), 변화(變化)의 법칙(法則) (2)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되다, 화(化)하다 ②교화(敎化)하다, 감화(感化)시키다 ③가르치다 ④따르다, 본받다 ⑤변천(變遷)하다, 달라지다 ⑥죽다, 망(亡)하다 ⑦없애다, 제거(除去)하다 ⑧교역(交易)하다, 바꾸다 ⑨태어나다 ⑩가르침, 교육(敎育) ⑪교화(敎化) ⑫습속(習俗), 풍속(風俗) ⑬요술(妖術), 마술(魔術) ⑭변화(變化), 조화(造化) ⑮죽음 ⑯다름 그리고 ⓐ잘못(와)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고칠 개(改), 바꿀 역(易),고칠 경(更), 변할 변(變), 가죽 혁(革)이다. 용례로는 다른 것으로 변하여 간다는 뜻으로 죽음을 이르는 화거(化去), 죽은 사람을 화자(化者),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화상(化像), 둘 이상의 물질이 결합하여 본디의 성질을 잃어버리고 새로 특유한 성질을 가진 물질이 되는 일을 화합(化合), 성질을 변하게 함을 화성(化性), 마음을 변하게 함을 화심(化心), 얼굴을 곱게 꾸밈을 화장(化粧), 지질시대에 살았던 동식물의 유해 또는 그 흔적이 퇴적암 같은 바위 속에 남아 있는 화석(化石), 모양이나 성질이 바뀌어 달라짐을 변화(變化), 약하여짐 또는 약하게 함을 약화(弱化), 강하게 함을 강화(强化), 나쁘게 됨을 악화(惡化), 깊게 함 또는 깊어짐을 심화(深化), 깨끗하게 함을 정화(淨化), 둔하여 짐을 둔화(鈍化), 격렬하게 됨을 격화(激化), 물건이 사라져 없어져서 변화함을 소화(消化), 진보하여 차차 더 나은 것이 됨을 진화(進化), 다른 사물의 영향을 받아 마음이 변함을 감화(感化), 가르쳐 착한 길로 인도함을 교화(敎化), 동물의 알이 깨는 것을 부화(孵化), 백성을 교화하여 아름다운 풍속을 이룸을 이르는 말을 화민성속(化民成俗), 교화가 미치치 못하는 곳의 백성을 일컫는 말을 화외지민(化外之民), 덕화가 사람이나 짐승 뿐만 아니라 초목에까지도 미침을 이르는 말을 화피초목(化被草木), 나라의 풍속을 순수하고 온화하게 함을 이르는 말을 국풍순화(國風醇化), 좋은 친구와 사귀면 자연히 그 아름다운 덕에 감화됨을 이르는 말을 지란지화(芝蘭之化), 끊임없이 달라져서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음을 이르는 말을 변화불측(變化不側), 변화가 심해 종잡을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을 변화무상(變化無常), 애써 하지 않아도 잘 된다는 뜻으로 힘들이지 않아도 저절로 변하여 잘 이루어짐을 이르는 말을 무위이화(無爲而化), 강남의 귤을 강북에 심으면 탱자가 된다는 뜻으로 사람도 환경에 따라 기질이 변한다는 말을 귤화위지(橘化爲枳)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