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분의 갈채 (외 3편)
조 정
우듬지로 물 올리기 바쁜 근무시간이라 신갈나무 오리나무도 한눈팔지 않을 때
벌레의 군대, 나뭇잎의 결사대를 조직한다 너도밤나무 충영들아 참나무 충영들아 죽은 소나무의 말굽버섯들아 마법사의 제자들아 껍질을 깨고 나오라 마른 가지마다 새의 혀처럼 켜지는 연둣빛 불꽃들아 오라
숲이 되려고 태어나는 풀 나무 새 꽃의 넘쳐흐르는 힘 북돋우며 정오가 박수를 쳤다 녹색의 장수가 나가신다 으다다다다다 황도(黃道) 0도의 깍듯한 무릎이 지축을 찍는 순간
봄아, 죽기로 이 산을 살려보자!
허물
골프장 쪽 둔덕을 내려온 초록색 뱀은 내 오른손 검지를 스쳐 오엽딸기나무 사이로 사라졌다 산길에 떨어진 골프공을 줍던 나도 놀라고 비탈을 흐르던 저도 놀라고 야생이 스쳐간 손에 뱀 비린내가 돋아 슬픔이 독처럼 몸에 퍼졌다 직립의 슬픔과 배로 기는 슬픔이 서로 감염되어 산에 슬픔이 가득했다 슬픔을 끌고 산을 나왔다 뱀은 느티나무 아래 나를 벗어두고 갔다 허물 한 채에 적힌 결승문자를 받아 읽었다 숲이 커야 사람도 슬픔을 벗을 수 있다고
울게 하소서 —산황산
산170-1 님, 품에 안은 나무 이백 그루가 불난 외양간의 소처럼 탔어요 날뛰지도 못하고 충직하게 타던 나무들 어루만진 손이 화들짝 뜨거운 송진에 물렸어요
불길에 어깨를 덴 차돌바위는 어금니 꾹 물고 빗산 너머 백마역 앞 아파트를 바라봐요 산이 무슨 잘못이 있나요
산불지킴이 사내는 홀로 남은 직박구리처럼 시끄러워요 키가 170쯤 되고 육십 중반인 남자였어요 여기서 올라와 저 위로 가고 난 뒤에 불길이 타올랐어요 내가 소방 헬리콥터에 연락해 한 시간 만에 껐어요 못 껐으면 저쪽 유치원도 다 탔다고요
산 170-1 님, 새들이 비 오시는 소리로 깃을 치던 숲이 탔어요 새들이 돌아와 울게 하소서 그을린 가지에 새순 돋아 불티가 된 곤충들을 울게 하소서 농수로에 알 슬고 와 쉬던 두꺼비들 땅 속에서 여름을 꿈꾸다 불 맞은 쟁기발 개구리들의 칠월 저녁 풀섶을 울게 하소서 불딱지 새카만 나무들의 화상 쓰다듬으며 오늘 밤에는 비와 바람을 불러 울게 하소서 이 산에 불 지른 자가 생의 재앙에 불 맞아 울게 하소서
우러라 우러라 새여
탄가루 묻은 입의 외마디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퇴근하면 하얀 이를 보이며 웃던 네가 피마저 석탄범벅이 되었다 트레킹화를 신고 걸어도 미끄러운 석탄 통로에서 튀어 올라 컨베이어 벨트에 감겼다 붙잡을 것 없이 걷던 하청사 비정규직 이름으로
6개월만 기다리면 정규직 되는 희망이 컨베이어 벨트의 속도를 견딘 거니? 엄마, 너무 힘들어 말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엄마가 석탄덩이처럼 무거웠니? 태안화력발전소처럼 큰 회사가 돈 벌어 어디에 쓰기에 작업장을 지옥으로 방치했을까? 세상의 큰 강과 산들은 작은 새와 꽃들에게 제 몸을 나누어 주는데 힘세고 돈 많은 사람들은 작은 사람들 찢어 양식을 삼는구나
견딜 수 없어서 운다 태안화력발전소 지옥에 너를 밀어 넣은 어미 정규직 만들어 주마던 대통령의 허사에 박수치며 네 지옥을 못 본 어미 날마다 두려움에 떨며 일한 월급으로 사준 고기를 내가 먹었던가 질기게 흐르던 너의 하루하루를 엄마 이거 드세요 건네주던 과자 한 조각처럼 내가 먹었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고 너 홀로 뒷걸음치던 찰나들을 몰랐다
오늘 아침에 어치 두 마리가 빈 감나무 가지를 오가더라 새들을 위해 대문 기둥에 홍시 두 개 얹어둔 사람은 누구였을까 자고 니러 우는 저 새들처럼 날마다 날아다닐 거야 비명도 길게 못 지르고 간 너 대신 울고 또 울고 다닐 거야 내 울음소리는 알아듣기 쉽단다 지옥 같은 노동 현장 개선해 주세요 우리 아이들 좀 죽이지 마세요 돈보다 사람이 중하잖아요
—시집 『마법사의 제자들아 껍질을 깨고 나오라』 2023.12 ---------------------- 조정 / 1956년 전남 영암 출생. 200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이발소 그림처럼』 『그라시재라』 『마법사의 제자들아 껍질을 깨고 나오라』. 제주 강정마을 주제 장편동화 『너랑 나랑 평화랑』 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