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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주님께서 영원한 평화의 하느님 나라로 모든 민족들을 모아들이신다.”
<이사야서의 말씀 2,1-5>
1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환시로 받은 말씀.
2 세월이 흐른 뒤에 이러한 일이 이루어지리라.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은 모든 산들 위에 굳게 세워지고 언덕들보다 높이 솟아오르리라.
모든 민족들이 그리로 밀려들고
3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 오면서 말하리라.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이는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
4 그분께서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시리라.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5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 복음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하늘 나라로 모여 올 것이다.”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8,5-11>
5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 들어가셨을 때에 한 백인대장이 다가와 도움을 청하였다.
6 그가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7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 하시자,
8 백인대장이 대답하였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9 사실 저는 상관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10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감탄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11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의 산 등산가>
오늘 복음은 백부장의 종이 치유되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치유받은 종이 주인공일 것 같지만 아시다시피 오늘 얘기의 주인공은 백부장이고, 백부장의 믿음, 백부장의 사랑 등등이겠지요.
그렇지만 오늘 우리는 왜 이 얘기를 대림절 첫날 듣게 되는지, 우리 교회는 왜 백부장 얘기를 대림절 첫날 복음으로 선택했는지 이런 관점에서 보게 되고, 그랬을 때 백부장이 대림절을 잘 지내는 우리의 본보기이기 때문에 이 복음을 선택했음을 알 수 있게 되지요.
그렇습니다.
백부장은 대림절에 우리의 본보기입니다.
제가 처음에는 자캐오가 더 좋은 본보기가 아닐까 생각했었습니다.
왜냐면 그는 자기 마을에 오신 주님을 보고 싶어서 나무에 오르는 열망도 보이고 그래서 자기 집에 주님을 모시기까지 하였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백부장이 더 좋은 본보기인 이유는 자기 집에 가시겠다는 주님을 모실 자격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얘기할 정도로 자캐오보다 더 큰 믿음과 겸손을 보인 거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방인으로서 주님을 찾아와 만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부터 대림절 내내, 오실 메시아가 어떤 분인지 전해주는 이사야서는 오늘 그 메시아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하지요.
"그분께서 민족들 사이에,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시리라.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이사 2,4)
이렇게 세상의 평화를 이룩하실 메시아를 만나러 가자고 오늘 이사야는 또 이렇게 얘기하지요.
"모든 민족들이 그리로 밀려들고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 오면서 말하리라.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이사 2,3)
그렇습니다.
백부장은 이렇게 메시아를 만나기 위해 주님의 산으로 오르고, 주님의 집으로 달려간 모든 민족과 백성의 대표이고 본보기입니다.
백부장은 주님의 산 등산가이고, 우리도 주님의 산 등산가여야 합니다.
이때 떠오르는 유명한 시편이 있지요.
"주님의 산에 오를 이 누구인고?
그 손은 깨끗하고 마음 정한 이, 헛군데에 정신을 아니 쓰는 이로다.
너희는 열어라, 정의의 문을.
주님께 듭시려 하노니, 야곱의 하느님이!"
그래서 저는 오늘도 정신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이 대림절에 헛군데에 정신을 아니 쓰는 이가 되자고.
주님께서 드시도록 문을 여는 이가 되자고.
그래서 다른 산을 오르지 않고 주님의 산을 오르고, 다른 사람이 드나드는 문이 아니라 주님이 오시는 문을 열자고.
- 작은형제회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우리는 대림의 첫 월요일을 맞이했습니다.
대림시기는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합니다.
곧 예수님의 ‘첫 번째 오심’을 묵상하며, 동시에 마지막 날에 ‘다시 오심’을 준비하는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첫 번째 오심’과 ‘다시 오심’은 둘 다 거룩하고 신비로운 변형이 일어나는 구원의 만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구원의 만남을 우리는 오늘 복음의 백인대장에게서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중풍으로 누워있는 종은 백인대장의 ‘집’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집’은 예수님을 모시기에는 자격이 없는 이방인의 지붕 아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 한 번도 하신 적이 없는 당혹스런 일을 벌이십니다.
지금까지는 당신을 찾아오거나 당신께 데려온 병자들을 고치셨지만, 이번에는 당신이 먼저 발 벗고 나서십니다.
그의 ‘집’, 곧 주님을 모실만한 자격이 없는 죄인 이방인의 집으로 가시겠다고 나서십니다.
“내가 가서 그를 고쳐주마.”
(마태 8,7)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먼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찾아 나서기도 전에 우리를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분명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 오심’으로 이미 ‘인류의 집’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마치 자캐오에게 “오늘은 내가 너희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루카 19,5) 하시며, 모든 이들이 매국노의 ‘집’이라고 손가락질하고 침 뱉고 피해가던 그 ‘집’으로 들어오셨듯이 말입니다.
오시어 우리를 고쳐주시고 새롭게 탄생시키시고 변형시키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 주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모실 자격이 없는 저희 ‘마음의 집’에 들어오시겠다고 하십니다.
마치 <묵시록>의 말씀에서처럼 말입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묵시 3,20)
그러니 오늘 제 마음이 기뻐 설렙니다.
우리 주님께서 오시어 제 마음에 ‘당신의 집’을 지으신 까닭입니다.
지금 이 시간, 바로 여기에, 당신 몸과 피로 하늘나라의 잔칫상을 차려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마태 8,11)
또한 당혹스럽고 놀라운 것은 백인대장의 말입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마태 8,8)
그렇습니다.
그는 진정한 참된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알았던 것입니다.
필시 그는 이미 이 구원을 체험하였을 것입니다.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하지 못한 이방인의 처지였지만 바로 그 속에서 이미 자비와 사랑의 위력을 알기에 믿음의 굳셈을 당당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이 구원을 이루는 힘임을 믿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자신의 힘이 아니라 말씀의 권능으로부터 진정한 참된 힘이 온다는 사실을 분명히 믿고, 말씀의 힘에 승복하고 의탁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마태 8,8)
주님!
당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게 하소서!
당신이 ‘오라’ 하면 오고, ‘가라’ 하면 가게 하소서!
당신을 머리 위에 두고 살게 하소서.
당신은 머리 위에 계시되 속박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유를 주십니다.
당신께 온전히 속한 자로, 자유를 누리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토 수도회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에 대해 묵상한다고 다 믿음이 증가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이 나옵니다.
백인대장은 예수님께 중풍에 걸린 자신의 종을 고쳐달라고 청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서 고쳐주시겠다고 하시자, 그는 굳이 오시지 않아도 한 말씀만 하시면 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신도 아랫사람에게 시키면 그들이 알아서 하는 것처럼, 병을 고치실 수 있는 분이시다면 분명 그분의 종들이 알아서 해 줄 것을 믿은 것입니다.
이것은 깊은 묵상으로 얻어진 믿음이기에 예수님은 이렇게 칭찬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우리도 마지막 때에 주님께 참믿음으로 살고 왔다는 칭찬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백인대장은 자신의 종을 위해 하느님의 대리자라 여기는 그리스도께 무릎을 꿇고 청할 줄 아는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백인대장처럼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 될까요?
우선 묵상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도 묵상했습니다.
무슨 차이일까요?
우선 우리 묵상이 ‘주님은 계신가, 계시지 않은가?’를 확정하는 방향이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이 계신 것을 믿는다고 믿음이 아닙니다.
주님이 계심을 믿어도 지옥에 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계심을 믿는 사람들은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지는 않습니다.
우리 믿음의 걸음을 받쳐줄 믿음은 하느님의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의 성품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어떤’ 성품을 더 묵상하느냐에 따라 믿음의 모습이 달라집니다.
하느님의 성품을 묵상한다고 믿음이 다 증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요즘 넷플릭스에서 흥행하는 ‘지옥’이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천사가 나타나서 어떤 사람이 몇 날 몇 시에 지옥에 갈 것이라고 알려줍니다.
그러면 괴물이 나타나서 그 사람을 지옥으로 데려갑니다.
정진수라는 인물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런 일들을 목격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죄에서 벗어날 것을 설파합니다.
‘새진리회’라는 종교단체까지 생겨나고 그를 추종하는 세력이 커집니다.
그를 이상하게 여기는 형사도 있습니다.
그런데 형사의 딸이 새진리회의 추종자입니다.
어머니를 살해한 사람이 정신이상 판정을 받아 10년밖에 살지 않고 출소한 것에 대해 불만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지옥을 만드신 분이 반드시 정의를 실현한다는 새진리회의 교리가 마음에 듭니다.
그런데 정진수란 인물도 사실 고지를 받은 상태였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공포 속에 ‘나는 무슨 죄를 지었나?’를 되새기며 그 고지가 틀렸기만을 바라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공포가 자신을 죄짓지 않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죄로부터 구원하는 것은 죽음의 공포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형사의 딸과 함께 범죄를 저지릅니다.
죗값을 다 치르지 않고 나온 형사 딸의 어머니를 살해한 범인을 함께 납치합니다.
그리고 지옥의 사자가 하는 것처럼 똑같이 그 사람을 불태웁니다.
어차피 지옥의 사자가 그런 정의를 집행하거나 자신들이 그런 정의를 집행하거나 다를 게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렇게 점점 더 세상은 지옥이 되어갑니다.
이것을 통해 돈을 버는 새진리회, 그리고 자신이 고지받은 것을 알면 가족이 다칠까 봐 몰래 죽으려고 외딴곳으로 숨는 사람들, 또 그런 신의 계시를 방해하는 이들을 또 방해하는 세력들.
이렇게 세상은 정말 지옥이 되어간다는 내용입니다.
세상이 지옥으로 변하는 이유는 하느님을 믿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정의에만 집중하고 묵상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도 하느님의 자비보다 정의에 집중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무서운 분으로 믿었습니다.
하느님이 정의로우신 분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믿었다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것도 믿음이 아니고 하느님을 무서운 분으로 믿는 것도 믿음이 아닙니다.
지옥에 있는 것들도 하느님의 존재를 믿습니다.
그렇다고 구원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무서운 분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백인대장은 하느님의 자비를 묵상한 사람입니다.
자신과 같이 유다인이 아니어도 좋은 것을 청한다면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말씀만으로도 자기 종의 병을 낫게 하실 분임을 알았습니다.
그는 믿음은 자비가 곧 하느님이시고, 그 하느님은 전능하심을 믿은 것입니다.
유튜브 ‘우와한 비디오’에 ‘반도의 유일한 1946년생 근육할아버지’란 제목의 비디오가 있습니다.
70이 다 되어가시는 근육 할아버지의 근육은 젊은 사람들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완벽합니다.
그만큼 큰 노력을 한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50년간 소싸움을 하는 직업을 가졌었습니다.
그런데 그 싸움에서 지고 나면 그 패배감을 술과 담배로 채우려 했습니다.
그러다 건강 악화로 위, 장, 쓸개, 맹장 수술을 해야 했고 아내는 할아버지의 병수발과 함께 생계도 책임져야 했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크게 깨달은 할아버지는 아내의 고생하는 모습에 자신도 땀 흘릴 수 있는 길을 택했습니다.
아내는 할아버지가 건강하기만 하면 된다며 할아버지의 근육을 보며 힘을 얻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상대의 부정적인 면을 묵상하고 정의로워지려고 하지만, 이 두 부부는 서로서로 상대의 고생을 묵상한 것입니다.
상대의 자비와 사랑을 묵상한 것입니다.
이렇게 가정은 천국이 되었습니다.
살다 보면 상대에게 서운하지 않은 것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머리가 긍정적인 것을 묵상하느냐 부정적인 것을 묵상하느냐에 따라 믿음이 생기게도 하고 사라지게도 합니다.
하느님의 정의도 자비를 묵상하기 위해 우리가 알아야 하는 상황이지 그것만을 묵상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밝은 면, 자비와 사랑을 묵상할 때만 커집니다.
부정적인 것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어차피 내가 믿는 사람에 대한 ‘사랑’을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부정적인 것을 묵상하고 믿으면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이 감소합니다.
믿음을 성장시키려면 항상 하느님의 긍정적인 속성을 묵상하여 더 사랑하려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믿음으로 부르나이다>
오래전의 일입니다.
대전 공설 운동장에서 한국성체대회가 거행되던 날, 하늘은 눈부시도록 파란 하늘이었고 태양은 강렬한 빛을 발하고 있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의 파견 강복이 있기 직전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추기경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거기 뭐 나타났어요?”
그 말씀에 자극을 받아 참가자 모두가 환호하며 하늘을 바라보았고 저도 태양을 보았습니다.
그야말로 성체모양으로 빛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그런 현상에 부정적인 저였지만 저도 모르게 성호경을 그으며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를 반복하였습니다.
그때 추기경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은 보고라도 믿어야죠!”
예수님의 능력은 언제 어디서나 한결같으셨지만, 당신을 의심하는 고향 사람들 앞에서는 별로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마태 13,58).
주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셨지만, 그 말씀의 능력은 믿음을 바탕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살아있는 말씀이 힘을 내느냐 못 내느냐는 그 말씀을 듣는 우리에게 달렸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믿고 행하면 능력의 혜택을 입게 됩니다.
믿음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라 하시면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시고 명하는 것은 못할 것이 없습니다.
믿고 행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의 모든 것을 받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그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사람을 유다인이 아닌 한 이방인 백인대장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유다인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그들의 미움을 사게 된 것은 당연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소위 열심하다고 하는 사람, 활동을 많이 하고 본당의 여러 직책을 맡은 사람들, 성직자나 수도자도 믿음을 자신할 수는 없습니다.
지식으로 아는 것은 많을지 모르나 주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믿음에는 소홀할 수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참된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그분께서 계시다는 것과 그분께서 당신을 찾는 이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히브 11,1. 6)
믿음으로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기도로 마칩니다.
“오 하느님,
믿음으로 당신을 부르나이다.
인간이 되신 당신 아드님을 통하여 당신을 선포하신 아드님의 일생을 통하여 제게 불어 넣어주신 그 믿음으로 오 하느님! 당신을 애타게 부르나이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시(詩)와 꿈 - 하느님의 시인(詩人)이, 꿈쟁이가 됩시다>
한국인은 물론 소띠인 제가 아마 가장 좋아하는 동물은 소일 것이고 가장 좋아하는 나무는 소나무일 것입니다.
둘 다 소씨입니다.
어제 구상 시인의 절친이었던 화가 이중섭(1916-1956)의 ‘소의 말’이란 글이 생각납니다.
무엇보다 한국의 소를 많이 사랑했고 많이 그린 소의 화가 이중섭입니다.
“높고 뚜렷하고/참된 숨결/나려 나려/이제 여기에/고웁게 나려
두북 두북/쌓이고 철철/넘치소서
삶은 외롭고/서글프고/그리운 것/아름답도다
여기에 맑게/두눈 열고/가슴 환히 헤치다”
더불어 김종삼(1921-1984) 시인의 ‘묵화(墨畫)’란 시도 생각났습니다.
정말 시의 장면이 묵화 같습니다.
“물 먹는 소 목덜미에/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서로 적막하다고”
시와 꿈이 사라져가는 시대입니다.
말씀(言)의 사원(寺)이 시(詩)입니다.
그러니 진짜 시인은 마음 안에 말씀의 사원을, 하느님을 모시고 사는 참 그윽한 깊이의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시와 꿈이 있어 참으로 사람이 됩니다.
사람만이 시와 꿈을 지닙니다.
참으로 사람답게, 살아있게 하는 것이 시와 꿈입니다.
아주 예전에 써놨던 시가 생각납니다.
“밖에서는 모른다/살았는지 죽었는지/잎들 다 진 겨울나무들이 그렇다
그러나 보라!/살아 있지 않은가/봄되니/피어나는 꽃들/짙어져가는 신록들
아! 꿈이 있어야 산다/꿈있어 겨울 추위 견뎠다
꿈없으면 죽는다/꿈은 생명이다
가슴에 담았던 꿈/활짝 피어내니/아름다운 생명이다”
성서의 예언자는 물론이고 예수님 역시 시인이자 꿈쟁이였습니다.
부단히 하늘나라를 꿈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지난 주 제1독서의 주인공 다니엘 예언자가 시인이자 꿈쟁이이듯 대림 제1주 계속될 이사야 예언자도 시인이자 꿈쟁이입니다.
시와 꿈은 함께갑니다.
꿈에서 샘솟는 시요 시가 꿈을 키웁니다.
아, 꿈도, 희망도 키워야 합니다.
우리 믿는 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키우는 데 시편 노래 기도에 바탕한 전례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이래서 하늘나라의 꿈을, 희망을 부단히 키우기 위해서 평생 날마다 끊임없이 바치는 시편 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임을 깨닫습니다.
시(詩)중의 시가 생명과 빛과 희망을 노래한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 ‘시편’이요, 꿈중의 꿈이 하늘나라 꿈’임을 깨닫습니다.
평생 시편을 노래하다 보니 세상 시 맛을 잃은 지 오래입니다.
어제는 아침 성무일도 후렴 셋을 노래하며 많은 시간을 지냈습니다.
모두가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의 꿈을, 희망과 기쁨을 노래한 싯구입니다.
모두가 하늘나라 꿈을 앞당겨 살게 하는 기도노래입니다.
“그날에 모든 산에서 단 것이 방울져 내리고 언덕들에서 젖과 꿀이 흐르리라.
알렐루야.”
“들이여 주님 앞에서 흥겹게 우쭐거리고 숲을 이룬 나무들도 손뼉을 쳐라.
주께서 오시어 영원히 다스리시리라.
알렐루야.”
“보라, 위대한 예언자가 오시어, 새 예루살렘을 세우시리라.”
한결같이 아름답고 하늘나라 꿈과 희망을 북돋아 주는 시적 표현들입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 예언자의 ‘영원한 평화’에 대한 꿈과 시는 얼마나 고무적인지요!
참으로 하느님의 시인이자 꿈쟁이인 이사야 예언자입니다.
해설이 필요 없다 싶어 어느 하나 생략할 수 없어 통째로 인용하니 감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은 모든 산들 위에 굳게 세워지고 언덕들보다 높이 솟아오르리라
모든 민족들이 그리로 밀려들고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 오면서 말하리라.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이는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
주님의 산이, 주님의 집이, 시온이, 예루살렘이 상징하는 바, 대림시기 미사가 거행되는 바로 오늘 지금 여기, 하느님의 산 불암산 기슭 요셉 수도원 성전입니다.
이사야의 꿈은 바야흐로 대림시기 주님의 말씀을 배우고 주님의 길을 걷는 우리를 통해 실현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주님이 바라시는 꿈은 평화의 꿈입니다.
바로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파스카의 예수님이 재판관이자 심판관이 되는 세상입니다.
“그분께서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 심판관이 되시리라.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얼마나 아름다운 평화의 꿈인지요!
영적 야곱의 집안에 속하는 형제자매님들,
이 은혜로운 대림시기 오늘 하루도 주님의 평화가, 주님의 시인이, 주님의 꿈쟁이가 되어 주님의 빛속에 걸어가는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바로 이런 평화의 하늘나라 꿈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통해 또 이 은혜로운 대림시기를 통해 실현됩니다.
바로 예수님은 백인대장을 통해 이사야의 평화의 꿈을 실현시킵니다.
꿈과 희망을 잃었을 때 온갖 영육의 질병이 엄습합니다.
영육의 면역력 강화에 하늘 나라의 꿈과 희망보다 더 좋은 영적 식(食)과 약(藥)은 없습니다.
하늘나라 꿈의 실현인 예수님과 백인대장의 만남이 감동적입니다.
백인대장의 종의 치유에 앞서 전제되고 있는 백인대장의 종에 대한 사랑과 예수님께 대한 겸손한 믿음이 치유에 결정적 역할을 했음을 봅니다.
다음 대화는 늘 들어도 새롭고 감동적입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바로 이에 근거한 미사 중 영성체 전 우리의 고백입니다.
백인대장의 겸손한 사랑과 믿음에 감동하신 예수님의 은총의 응답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와,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칭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겸손한 믿음을 통해 앞당겨 실현되는 평화의 꿈, 치유의 꿈입니다.
종파를 초월하여 참으로 하늘 나라를 꿈꾸는 겸손한 믿음의 모든 사람들에게 활짝 열려 있는 하늘나라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바로 하늘나라 꿈의 실현입니다.
겸손한 믿음으로 예수님을 만날 때 치유되는 우리들이요 우리 또한 하늘나라 꿈의 실현이 되어 살 수 있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하느님의 시인이, 하느님의 꿈쟁이가 되어 오늘 지금 여기서 주님의 평화를 실현하며 하늘 나라를 살게 하십니다.
산티아고 순례시 참 많이 바쳤던 오늘 화답송 시편 후렴입니다.
“주님의 집에 가자 할 제, 나는 몹시 기뻤노라.”
(시편 122,1)
아멘.
- 성 베네딕토회 성 요셉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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