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 하린 (시인)
21. 상상 테마20 - '00성'을 바탕으로 상상하며 시 쓰기
@ 소재나 모티브가 갖는 특징과 상상 적용 방법
우리나라 말에는 ‘성(性)’자가 뒤에 붙어서 고유한 성질을 뜻하는 단어가 많다. 주관성, 객관성, 보편성, 합리성, 진취성, 소극성, 적극성, 일관성, 편파성, 인과성, 사실성, 미학성, 주체성, 이기성, 이타성, 사물성, 대칭성, 창의성, 상대성, 절대성, 불모성, 불완전성, 나약성, 시간성, 공간성, 물질성, 은폐성, 개방성, 필요성, 가능성, 일회성, 비극성, 심미성, 근대성, 현대성, 진실성, 회귀성, 고유성, 난해성, 다의성, 역사성, 감수성, 계급성, 대중성, 무의미성, 지속성, 순환성, 단순성, 다양성, 완결성, 투명성, 이중성, 진정성, 점진성, 비약성, 모호성, 한계성, 자율성, 우월성, 실험성, 통일성, 폭력성, 육체성 등의 단어가 있는데, 이 단어 앞에 상상을 통해 예상치 못한 ‘○○의’를 만든 후 시를 쓰면 나만의 시를 쓸 수 있다. 예를 들어 ‘과일의 비극성’ ‘봄의 편파성’ ‘악몽의 회귀성’ ‘어머니의 불모성’ ‘연탄의 계급성’ ‘구름의 인과성’ ‘아버지의 난해성’ ‘검정의 한계성’ 등처럼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을 결합시키면 상상적 글쓰기가 자동적으로 형성되게 된다. 시를 다 쓴 다음에는 제목을 다르게 바꾸어도 좋다. 예를 들어 ‘어머니의 불모성’에 대해 썼다면 제목은 ‘불모성’ 또는 ‘불모’ 등으로 붙여도 괜찮다.
필자의 시를 통해 그 소재가 어떻게 상상과 만나 펼쳐지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자.
객관성 / 하린
흔들리는 것 뒤에 흔들리지 않는 게 있다고 한 번 더 믿는다 녹슨 못이여, 여행이란 말을 걸어놓고 패배자를 추궁하지 마라
태초에 요일은 나눌 필요가 없었고 숫자는 한 가지 색깔로 한심해졌어야 했는데
전국일주가이드북은 3년 전에 버려야 했는데
벽 대신 내가 두꺼워지고 말았으니
패배자의 생각 안에 구멍을 뚫고 창문을 그리지 마라
창문이 흔들리는 건 바람 탓이 아니다
무모하게 하루 만에 불행해진 광장에 대해
삶이 온전히 자기만의 것이라고 중얼거리는 주관성에 대해
비난하지 마라, 항상 머뭇거림이 병이다
방을 빠져나가는 순간 객관적으로 나는 증명된다
어제도 오늘도 나는 ‘루저’일 뿐이니까 ― 「1초 동안의 긴 고백」, 문학수첩, 2019.
1단계 - 스스로 점검하기 – 메시지 분명히 하기+내 시만의 장점 찾기
이 시는 철저히 주목받지 못한 사람인 ‘루저’의 존재성을 확연히 드러내기 위해 창작되었다. ‘루저’는 말이나 행동, 외모가 볼품없고 능력과 재력도 부족하여 어디를 가건 대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을 뜻한다. 어느 날 이런 루저를 증명하는 것은 주관성일까 객관성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루저’라고 스스로 느끼는 것은 주관성이지만 그 상황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객관성이다. 그래서 객관성을 띤 주변 사물과 현상을 통해 ‘루저’의 본질을 극명하게 드러내려고 했다. 따라서 이 시의 장점은 소외된 존재성을 냉철하게, 극명하게 나만의 직관을 통해 보여준 점이다.
2단계 - 객관적 상관물(현상)을 찾기+관찰과 조사 정밀하게 하기
이 시에서 객관적 상관물은 “여행이란 말을 걸어놓고 패배자를 추궁”하는 녹슨 못, 3년째 방치한 전국일주가이드북, 벽, “패배자의 생각 안에 구멍” 같은 창문, 어떤 시도도 해보지 못하게 “하루 만에 불행”해지게 만드는 광장이다. 이 상관물들은 화자인 ‘나’의 상태를 간접적으로 증명해주는 역할을 한다. 화자는 방 안에서만이라도 ‘주관성’을 인정받고 싶지만 본인의 상태를 암시하고 있는 상관물들마저도 감상적인 주관성을 허용하지 않는다.
3단계 - 확장하기 – 상상적 체험을 극적으로 하기
객관성의 반대말이 주관성이다. 그런데 그런 주관성은 온전히 자기 자신만을 따로 떼어놓고 봤을 때 100% 확실해진다. 자신과 연계된 사물이나 현상, 타자가 있을 땐 곧바로 희석되고 만다. 이 시는 그런 사유에 대한 상상적 체험으로 탄생했다. 눈을 감고 주목받지 못한 ‘루저’의 생활 공간과 심리 상태를 상상해봤다. 자신만의 공간이 있음에도 주관성은 확보되지 않고 오히려 방 안의 사물들이 객관성을 자꾸 증명하려고 드는 현상이 감지됐다. 그럴 때 드러날 수 있는 심리를 추리하면서 ‘루저’를 나만의 시선으로 체험했다.
* 또 다른 예문
식물성 / 유해영
급하게 소환되는 나무
나의 식욕이 고장난 것은 합리적인 의심이다 나는 동물성을 반환한다 먹히고 먹혀도 걷고 걸어도 언제나 일시정지가 되고 만다 아무리 지껄이고 있어도 입 다물어지고 마구마구 잎새로 피어나 쉽게 낙엽이 된다 한없이 뒤척이며 절규하지만 바람에 나부낀다고 하는 예보는 나에게만 들린다
파란과 소란을 갉아먹기 위해 벌레가 굼틀거린다 박박 긁는다 아무도 나의 가려움에 반응하지 않는다 세상과 이어진 인대까지 헐거워진 나 끝끝내 자발적 감금 증후군이다 눈동자만 남고 다 굳어버린 뭄뚱이 아작아작 먹잇감을 산 채로 씹고 있는 엽기적인 식성에 원초적으로 반응하는 동공 허물어지는 자존감에서 슬며시 눈을 뜬다 실물인간이란 말뜻을 나는 모르는데 나는 여전히 야성적으로 움직이는데 왜 당신만 보지 못하는가 가장 두려운 것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당신의 마음인데... - 『잘라내기는 또 어딘가에 붙여넣기를 하고』, 천년의 시작, 2020.
국지성(局地性) / 이범근
며칠째 흔들리던 앞니가 사라졌다 자고 일어나니 혀가 문득 추웠다 모래 더미에 한 손을 넣고 오래 두드리면 문짝도 없는 헌 집을 얻을 수 있었다 그 집에서 흐느끼면 동네가 다 알 것 같았다 석순(石筍)이 자라는 속도로 앞니가 있던 자리에 혀를 대었다 살아 있던 사람들만이 살아남았다 아무도 죽을 생각이 없었다 갈대 숲 너머로 던진 돌이 오늘 아침에서야 먼 강물에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수면과 돌은 서로의 밤을 맞대고 팽팽했다 찬밥을 뭉쳐 맹물에 말아먹었다 밥맛이었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눈물이 아직 몸속을 떠도는 안개였을 때 흐느낌이 아직 어린 소사나무 분재(盆栽)의 흔들림이었을 때 문을 열어둔 채 너는 집을 나갔다 -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16년 1월호
- 출처 : 『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더푸른, 2021.09)
* 하린 시인 1971년 전남 영광 출생.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박사 학위. 1998년 〈광주매일〉신춘문예 시 당선, 2008년 《시인세계》 등단. 시집 『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 『서민생존헌장』 『1초 동안의 긴 고백』. 연구서 『정진규 산문시 연구』 시 창작 안내서 『시클』 시 창작 제안서 『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이것만 알면 당신도 현대 시조를 쓸 수 있다』 청마문학상(2011), 송수권시문학상(2015), 한국해양문학상(2016),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2020) 수상. 현재 중앙대 문화예술대학원 전문가과정 시 창작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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