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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신선사(道信禪師)의 동산법문(東山法門)
1. 해제(解題)
도신선사(道信禪師 580 ~ 651)는 중국선종의 제4대 조사이다. 3조인 승찬(僧璨)선사로부터 법을 전해받아 5조 홍인(弘忍)선사에게 법을 전했다. 도신대사의 스승 승찬대사는 사공산(思空山)에 은둔하여 제자도 많이 두지 않고 오직 도신대사 한 사람만 제자로 키웠는데 도신은 12년동안 승찬대사를 시봉했고 승찬은 9년만에 도신의 견성(見性)을 인가(印可)했다. 승찬대사는 나뭇가지를 손으로 잡고 서서 입적했다.
초조 달마, 2조 혜가, 3조 승찬대사까지는 수행처가 작은 암자에 불과했으며 탁발、유랑하며 수행했으나 도신대사 때 쌍봉사(雙峯寺)에 큰 가람이 만들어져 이때부터는 스님들이 절에 머물면서 수행했고, 수행대중도 천여명에 이르렀다. 산중에서 천여명이나 되는 대중을 탁발로는 식량을 공급하기 어려웠으므로 도신대사는 탁발하지 않고 산중에서 농사를 지어 수행대중들이 자급자족하도록 하는 방편을 썼다. 백장스님의 청규보다 백년이나 앞서서 농선쌍수(農禪雙修)의 전통을 수립한 것이다.
도신대사는 산에서 약초를 캐고 직접 맛을 보아 초목집성(草木集成)이라는 의학서도 저술했다고 하며 도신의 의술은 탁월하여 당시 백성들에게 옴이 유행할 때 이 병을 치료해 주었고 당 태종 이세민의 옴을 처방전을 써서 고쳐주기도 했다. 나중에 대의선사(大醫禪師)라는 시호를 내릴 정도였다. 태종은 도신대사에게 고마워서 도성으로 초청했으나 대사는 세 번이나 거절했다. 태종은 진노해서 4번째로 칙사를 보내서 이번에도 명을 받들지 않으면 목을 베어오라고 했다. 칙사는 도신대사에게 가서 황제의 명을 전하고 칼을 빼들었다. 그러자 대사는 안색을 변하지 않고 칙사 앞에 목을 쭉 내밀고 베라고 말했다. 칙사는 할 수 없이 그냥 돌아가 태종에게 고했는데 이 말을 들은 태종은 더욱더 대사를 존경하게 되었다. 전등록에는 도신대사가 옆구리를 바닥에 대지 않고 눕지 않은 것이 60년이라고 말하고 있다.
중국 선종(禪宗)이 교단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것은 도신대사 때부터다. 현재 도신대사의 법문은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 능가사자기는 능가경(楞伽經)이 선종의 소의경전이라고 보고, 이 능가경이 전해진 선종의 법통(法統)을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본다.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 => 보리달마(菩提達磨) => 혜가(慧可) => 승찬(僧璨) => 도신(道信) => 홍인(弘忍) => 신수(神秀)
능가사자기에서는 도신선사의 법문이 전체 분량의 절반가량을 차지할 정도로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다. 도신대사는 입도안심요방편법문(入道安心要方便法門)이라는 저술을 남겼다고 하는데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능가사자기에 전해지는 법문이 곧 이 입도안심요방편법문의 내용이 아닌가 추측되고 있다.
도신대사 법문의 핵심은 문수반야경(文殊般若經)의 일행삼매(一行三昧)이다. 능가사자기에서는 또한 능가경(楞伽經)의 유심(唯心)도 핵심사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도신대사는 선관(禪觀)과 염불(念佛) 수행을 따로 보지 않고 하나의 수행으로 회통(會通)하여 설하고 있으며 궁극적인 목적은 안심(安心)을 이루는 것이다.
일행삼매(一行三昧)는 문수반야경에서 설한 법문인데 요점을 말하면 2가지이다. 첫째는, “법계일상, 계연법계, 시명일행삼매(法界一相, 繫緣法界, 是名一行三昧. )이니 즉, 법계가 한 모양임을 관찰하여 여기에 마음을 묶는 것을 이름하여 일행삼매라고 한다. 또한 일행삼매를 얻기 위해서는 먼저 반야바라밀의 가르침대로 공(空)의 뜻을 닦아 배우고 난 후에 일행삼매를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좌선(坐禪), 관행(觀行)의 수행법이고 이치로 들어가는 이입(理入)의 수행이다. 또한 염불선(念佛禪) 또는 실상염불(實相念佛)에 해당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둘째는, ( 欲入一行三昧, 應處空閑, 捨諸亂意, 不取相貌, 繫心一佛, 專稱名字. 隨佛方所, 端身正向, 能於一佛念念相續, 即是念中, 能見過去、未來、現在諸佛. ) “일행삼매에 들어가고자 하면 응당히 비고 한적한 곳에서, 모든 어지러운 뜻을 버리며, 모양(相貌)을 취하지 아니하고, 마음을 한 부처님에 매어(繫心一佛) 오로지 부처님 명호를 부르며(專稱名字), 부처님께서 계신 방향을 따라, 몸을 단정히 하고 바로 향하여 능히 한 부처님을 끊임없이 계속 생각하면(念念相續), 곧 이 생각 중에 능히 과거、미래、현재의 모든 부처님을 보느니라.”
이것은 행으로 들어가는 행입(行入)의 수행으로서 염불수행인데 4가지 염불(稱名, 觀像, 觀想, 實相) 가운데 칭명염불에 해당한다. 이렇게 일행삼매의 법문은 좌선、관행과 염불수행을 포괄하며 또한 염불에서도 실상염불과 칭명염불을 포괄하는 종합적인 수행법이다.
참고 글
일행삼매(一行三昧) - 문수반야경(文殊般若經)
https: //blog.naver.com/dhammatruth/222021752318
일행삼매(一行三昧) - 문수반야경(文殊般若經)
일행삼매(一行三昧)는 세존께서 문수반야경(文殊師利所說摩訶般若波羅蜜經)에서 설하신 것이다. 이 일행삼...
blog.naver.com
2.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에 나타난 도신선사의 법문
第五. 唐朝蘄州雙峯山道信禪師後. 其信禪師. 再敞禪門. 宇內流布. 有菩薩戒法一本. 及制入道安心要方便法門.
제오. 당나라(唐朝) 기주(蘄州) 쌍봉산(雙峯山)의 도신선사(道信禪師). 도신선사는 선문(禪門)을 다시 높이 세워 중국에 유포했다. 도신선사는 보살계법(菩薩戒法) 1권과 입도안심요방편법문(入道安心要方便法門)을 지었다.
爲有緣根熟者. 說我此法. 要依楞伽經. 諸佛心第一. 又依文殊說般若經. 一行三昧. 即念佛心是佛. 妄念是凡夫.
인연이 있고 근기가 성숙한 자를 위하여 나의 이 법을 설한다. 나의 법요(法要)는 능가경(楞伽經)의 “제불심제일(諸佛心第一)”에 의거한다. 또한 문수반야경(文殊說般若經)의 “일행삼매(一行三昧)”에 의거하고 있다. 이것은 곧 “염불하는 마음 이것이 부처요(念佛心是佛), 망념 이것이 범부다(妄念是凡夫)”라는 도리이다.
☞ 주(註) 여기서 염불심(念佛心)은 실상염불(實相念佛)을 말하는 것이니, 곧 여래의 법신(法身)인 진여(眞如)를 바르게 관찰하는 마음이다. ☜
文殊說般若經云. 文殊師利言. 世尊. 云何名一行三昧. 佛. 法界一相. 繫緣法界. 是名一行三昧. 如法界緣不退不壞. 不思議無礙無相.
문수반야경에서 다음과 같이 설한다. 문수사리가 “세존이시여, 어떤 것을 일행삼매라고 합니까? ”라고 묻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법계가 한 모양(法界一相)이다. 그러한 법계에 마음을 묶는 것이 바로 일행삼매라 한다. ( 만약 선남자、선여인이 일행삼매에 들기를 바란다면, 마땅히 먼저 반야바라밀을 듣고서 그 가르침대로 닦아 배워야 한다. 그렇게 하면 능히 일행삼매에 들어가 ) 법계를 반연하여 물러나지 않고(不退), 무너지지 않고(不壞), 불가사의하며(不思議), 걸림없고(無礙), 모양없음(無相)을 얻게 될 것이다.”
善男子善女人. 欲入一行三昧. 應處空閑. 捨諸亂意. 不取相貌. 繫心一佛. 專稱名字. 隨佛方便所. 端身正向. 能於一佛. 念念相續. 即是念中. 能見過去未來現在諸佛.
“선남자、선여인이 일행삼매에 들기를 바란다면, 마땅히 비고 한가로운 곳에 거처하여, 모든 어지러운 생각을 버리고, 부처님의 상호(相貌)를 생각하지 말고, 마음을 한 부처님에게 묶어(繫心一佛) 오로지 그 이름만을 부르며(專稱名字), 그 부처님이 계시는 방향으로(隨佛方便所) 몸을 바르게 향하여, 능히 그 부처님에 대하여 생각 생각이 끊어지지 않고 상속하게 하면 바로 그 생각 가운데 능히 과거, 미래, 현재의 모든 부처님들을 보게 된다.”
何以故. 念一佛功德無量無邊. 亦與無量諸佛功德無二. 不思議佛法等分別. 皆乘一如. 成最正覺. 悉具無量功德. 無量辨才. 如是入一行三昧者. 盡知恒沙諸佛法界. 無差別相. 夫身心方寸. 舉足下足. 常在道場. 施爲舉動. 皆是菩提.
“왜냐하면, 한 부처님을 생각하는 공덕이 무량하고 무변하며, 또한 무량한 모든 부처님들의 공덕도 다름이 없으니, 불가사의한 불법(佛法)과 평등하여 분별이 없고, 하나인 진여법계를 타고(乘一如) 최정각(最正覺)을 이루어, 무량공덕과 무량변재를 다 갖추게 된다. 이와 같이 일행삼매에 드는 것은 갠지스강의 모래수와 같은 모든 부처님들의 법계가 차별상이 없음을 남김없이 아는 것이다.” ( 문수반야경 )
무릇 몸과 마음의 방촌(方寸)과 발을 올리고 내리는 등의 모든 동작은 항상 도량에 있는 것이며, 거동 하나 하나가 모두 보리(菩提)다.
普賢觀經云. 一切業障海. 皆從妄想生. 若欲懺悔者. 端坐念實相. 是名第一懺併除三毒心攀緣心覺觀心念佛. 心心相續忽然澄寂. 更無所緣念.
보현관경(불설관보현보살행법경)에 이르기를 “일체 업장의 바다는 모두 망상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니, 진실로 참회하려거든 단정히 앉아 실상(實相)을 생각하라.” 고 설하셨다.
이것을 이름하여 제일가는 참회로서 삼독심(三毒心)과 반연심(攀緣心)과 각관심(覺觀心)을 함께 없애는 염불이라고 말한다. 마음과 마음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서 홀연히 청정하고 고요해지면(忽然澄寂) 다시는 바깥 경계를 반연하는 생각이 없는 것이다.
☞ 주(註)
삼독심(三毒心) : 탐욕(貪), 성냄(瞋), 어리석음(癡)의 독한 마음. 이 3가지는 모든 번뇌와 망상의 뿌리(원인)이 되는 마음이다.
반연심(攀緣心) : 형상、소리、냄새、맛、감촉、법의 육진경계를 쫓아가는 마음.
각관심(覺觀心) : 일으킨 생각(尋.覺)과 지속적 고찰(伺.觀)이 있는 마음. 이 각관(심사)로 인하여 말(言說)을 하게 된다. 사선(四禪) 가운데 초선(初禪)에는 이 각관(심사)가 모두 있고, 중간선(中間禪)에는 각(심)은 없고 관(사)는 있다. 제이선(第二禪) 이상은 각관(심사)가 모두 없다.
삼매에는 유심유사삼매(有尋有伺三昧)와 무심유사삼매(無尋有伺三昧)와 무심무사삼매(無尋無伺三昧)의 3가지가 있는데 이 염불삼매는 이 가운데 무심무사삼매에 속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정토오부경(淨土五部經) 가운데 하나인 능엄경의 대세지보살염불원통장(大勢至菩薩念佛圓通章)에 나오는 도섭육근, 정념상계입삼마지(都攝六根, 淨念相繼得三摩地)와 같은 뜻이다. 즉, “육근을 거두어들여, 부처를 생각하는 청정한 생각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서 염불삼매를 얻는다.”는 뜻이다. ☜
大品經云. 無所念者. 是名念佛.
대품반야경에 이르기를 “생각할 대상(所念)이 없는 것, 이것을 이름하여 염불(念佛)이라고 말한다.”고 설하셨다.
何等名無所念. 即念佛心名無所念. 離心無別有佛. 離佛無別有心. 念佛即是念心. 求心即是求佛. 所以者何. 識無刑. 佛無刑. 佛無相貌. 若也知此道理. 即是安心. 常憶念佛. 攀緣不起. 則泯然無相. 平等不二. 入此位中. 憶佛心謝. 更不須徵.
어떤 것을 이름하여 ‘생각할 대상이 없다’고 하는가? 이것은 곧 염불하는 마음(念佛心)이니 이것을 이름하여 ‘생각할 대상이 없다’고 한다. 마음을 떠나서 별도로 있는 부처는 없다. 부처를 떠나서 별도로 있는 마음도 없다. 부처를 생각하는 것(念佛)은 곧 마음을 생각하는 것(念心)이다. 마음을 구하는 것(求心)은 곧 부처를 구하는 것(求佛)이다. 왜냐하면 식(識)은 형체가 없고 부처도 또한 형체가 없기 때문이다. 부처는 모습과 얼굴(相貌)이 없다. 이 도리를 알면 곧 이것이 안심(安心)이다. 항상 기억하여 형상 없는 부처를 염(念)하면 반연(攀緣)이 일어나지 않아서 곧 모든 상(相)이 없어져서 평등하고 둘이 아닌 자리에 이른다. 이 지위에 들어가면 부처님을 생각하는 마음까지도 사라져서 다시 부처님 명호를 부를(徵) 필요가 없다.
☞ 주(註) 무소념(無所念) : 생각할 대상(所)이 없다. 여기서 소(所)는 소연(所緣)이니 즉 마음의 대상, 생각의 대상이다. 생각할 대상이 본래 없기 때문에, 일체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 생각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은 곧 모양이 있고 실체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체법의 실상(實相)은 무상(無相)이고 공(空)이니 즉, 모양이 없고 실체가 없다. 그러므로 이 공과 무상을 깨닫고 나면 대상이 없어서 더 이상 생각할 수 없다. ☜
即看此等心. 即是如來眞實法性之身. 亦名正法. 亦名佛性. 亦名諸法實性實際. 亦名淨土. 亦名菩提金剛三昧本覺等. 亦名涅槃界般若等. 名雖無量. 皆同一體. 亦無能觀所觀之意.
이 마음을 보면 곧 이것이 여래의 진실한 법성의 몸(法性之身)이다. 또한 이름하여 정법(正法)이라고 한다. 또한 이름하여 불성(佛性)이라고 한다. 또하니 이름하여 제법실성、실제(諸法實性、實際)라고 한다. 또한 이름하여 정토(淨土)라고 한다. 또한 이름하여 보리(菩提)、금강삼매(金剛三昧)、본각(本覺) 등이라고 한다. 또한 이름하여 열반계(涅槃界)、반야(般若) 등이라고 한다. 비록 이름은 한량없이 많지만 모두 같은 하나의 체(體)다. 또한 능관(能觀)과 소관(所觀)이 없다는 뜻이다.
如是等心. 要令清淨. 常現在前. 一切諸緣. 不能干亂. 何以故. 一切諸事. 皆是如來一法身故. 經是一心中. 諸結煩惱. 自然除滅. 於一塵中. 具無量世界. 無量世界集一毛端. 於其本事如故. 不相訪礙. 花嚴經云. 有一經卷. 在微塵中. 見三千大千世界事.
이와 같은 마음을 반드시 ‘청정한 자성이 항상 현재 눈앞에 나타나 있도록’ 하면 일체의 모든 인연이 간섭하거나 어지럽게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일체의 모든 일은(一切諸事) 모두 이것이 여래의 한 법신(如來一法身)이기 때문이다. 이 일심(一心) 가운데서는 모든 번뇌가 자연히 없어진다. 한 티끌 가운데 무량세계가 갖추어져 있으며, 무량세계가 한 털 끝에 모여있다. 그 본래 일(本事)이 이와 같기 때문에 서로 방해하거나 장애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화엄경에 이르기를 “한 경전이 한 티끌 가운데 있으니 삼천대천세계의 일을 본다.”고 설했다.
☞ 주(註) 한 티끌 가운데 무량세계가 갖추어져 있으며, 무량세계가 한 털 끝에 모여있다. 이것은 화엄경의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다. ☜
略舉安心. 不可具盡. 其中善巧. 出自方寸. 略爲後生疑者. 假爲一問. 如來法身若此者. 何故復有相好之身. 現世說法. 信曰. 正如來法性之身. 清淨圓滿. 一切類悉於中現. 而法性身. 無心起作. 如頗梨鏡懸在高堂. 一切像悉於中現. 鏡亦無心. 能現種種.
이상 간략하게 안심(安心)을 말했고 이것을 다 말할 수는 없다. 그 가운데 선교방편은 방촌(方寸. 심장속의 한치)에서 나온다. 간략히 후학자들의 의심을 풀기 위해 가정하여 하나의 질문을 세운다.
“만약 여래의 법신이 이와 같다면 어째서 다시 상호(相好)를 가진 몸이 있어서 현세에 설법하는가? ” 도신이 답한다. 여래의 법성신은 청정하고 원만하여 일체 중생지류가 그 가운데 나타난다. 그러나 법성신은 마음을 일으키거나 조작함이 없다. 마치 수정 거울이 집 높은 곳에 걸려있어서 일체의 모습이 그 가운데 나타나지만 거울은 무심하게 능히 가지가지 모습을 나타내는 것과 같다.
經云. 如來現世說法者. 衆生妄想故. 今行者若修心盡淨. 則知如來常不說法. 是乃爲具足多聞. 聞者一無相也. 是以經云. 衆生根有無量故. 所以說法無量. 說法無量. 說法無量故. 義亦名無量義. 無量義者. 從一法生. 其一法者. 則無相也. 無相不相. 名爲實相. 則泯然清淨是也. 斯之誠言. 則爲證也
경에 이르기를 “여래가 현 세상에서 설법하는 것은 중생의 망상 때문이다.”고 설했다. 지금의 수행자들이 만약 마음을 닦아 청정해지면 곧 여래는 항상 설법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이 다문(多聞)을 구족하는 것이니, 듣는다는 것(聞者)는 하나의 무상(無相)이다. 이것을 경에서 이르되 “중생의 근기가 한량없이 많으므로 설법도 무량하다. 설법이 무량하기 때문에 그 뜻을 이름하여 ‘무량한 뜻(無量義)’이라고 한다. 무량한 뜻은 일법(一法)으로부터 생겨나는데 그 일법이란 곧 무상(無相)이다. 무상은 상(相)이 아니니 이것을 이름하여 실상(實相)이라고 한다. 자취가 없어서 청정한 것이 곧 이것이다. 이것은 진실한 말이니 곧 증거가 된다.
坐時當覺. 識心初動. 運運流注. 隨其來去. 皆令知之. 以金剛慧徵責. 猶如草木無所別知之無知. 乃名一切智. 此是菩薩一相法門. [猶如草木,無所別知,知無所知]
좌선시 알음알이의 마음(識心)이 처음 움직여 흘러감을 깨닫고, 그 오고 감에 따라 모두 이것을 안다. 금강의 지혜로서 밝혀 규명한다. 마치 초목이 아는 것이 없는 것과 같이 아는 가운데 안 자취가 없음(知之無知)을 이름하여 일체지(一切智)라고 한다. 이것이 보살의 일상법문(一相法門)이다.
問. 何者是禪師. 信曰. 不爲靜亂所惱者. 即是好禪用心人. 常住於止心則沈沒. 久住於觀心則散亂. 法華經云. 佛自住大乘. 如其所得法. 定惠力莊嚴. 以此度衆生.
묻기를, “어떤 사람이 선사(禪師)입니까? ”
도신이 답하기를, 조용함과 어지러움에 흔들림 없는 사람이 곧 훌륭한 선사이다. 마음을 쓰는 사람이 항상 지(止)에만 머물면 마음은 곧 침몰한다. 오랫동안 관(觀)에 머물면 마음은 곧 산란해진다. 법화경에 이르기를 “부처는 스스로 대승에 머물고, 얻은 법과 같이 정혜(定慧)의 힘으로 장엄하여 이로서 중생을 제도한다.” 하였다.
云何能得悟解法相. 心得明淨. 信曰. 亦不念佛. 亦不捉心. 亦不看心. 亦不計心. 亦不思惟. 亦不觀行. 亦不散亂. 直任運. 亦不令去. 亦不令住.
“어떻게 능히 법상(法相)을 깨달아서 마음이 밝고 청정해집니까? ”
도신이 답하기를 또한 염불하지도 않고, 또한 마음을 붙잡지도 않고, 또한 마음을 보지도 않는다. 또한 마음을 헤아리지도 않고, 또한 사유하지도 않으며, 또한 관행(觀行)하지도 않고, 또한 산란하지도 않다. 곧바로 흘러가는 대로 맡기되 또한 보내지도 않고, 또한 머물게도 하지 않는다.
獨一清淨. 究竟處心自明淨. 或可諦看. 心即得明淨. 心如明鏡. 或可一年. 心更明淨. 或可三五年. 心更明淨. 或可因人爲說. 即悟解. 或可永不須說得解.
이렇게 홀로 청정하면 끝에 가서는 마음은 스스로 밝고 청정해진다. 혹은 자세히 보면 마음은 곧 밝고 청정하여 마음이 마치 밝은 거울과 같다. 혹은 일년을 지내면 마음은 다시 밝고 청정해진다. 혹은 3년, 5년이 지나면 마음은 더욱더 밝고 청정해진다. 혹은 사람으로 인해 설법하면 곧 깨닫는다. 혹은 오래 설하지 않아도 깨달을 수 있다.
經道. 衆生心性. 譬如寶珠沒水. 水濁珠隱. 水清珠顯. 爲謗三寶. 破和合僧. 諸見煩惱所污. 貪嗔顛倒所染. 衆生不悟心性本來常清淨. 故爲學者. 取悟不同. 有如此差別. 今略出根緣不同. 爲人師者. 善須識別.
중생의 심성(心性)을 비유하자면 보배구슬이 물속에 빠져있는 것과 같으니, 물이 탁하면 구슬이 숨고, 물이 맑으면 구슬이 나타난다. 삼보를 비방하고, 화합승을 파괴하며, 모든 사견과 번뇌에 오염되고, 탐욕과 성냄과 전도망상에 오염되어 중생들은 심성(心性)이 본래 항상 청정하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학자마다 깨달음이 같지 않으니 이와 같은 차별이 있어서 이제 간략히 근기와 인연이 같지 않음을 나타냈으나 남의 스승이 된 선지식이라야 잘 식별할 수 있을 것이다.
華嚴經云. 普賢身相. 猶如虛空. 依如如. 不依佛國. 解時佛國皆亦即如國皆不依.
화엄경에 이르되 “보현의 몸의 모양이 마치 허공과 같아서 여여함(如如)에 의지하고 불국토에 의지하지 않는다” 하였다. 깨달을 때는 불국토뿐 아니라 또한 여여함과 국토 모두에 의지하지 않는다.
涅槃經云. 有無邊身菩薩. 身量如虛空. 人之有善光故. 猶如夏日. 又云. 身無邊故. 名大涅槃. 又云. 大般涅槃. 其性廣博故.
열반경에 이르되 “끝이 없는 몸의 보살이 있으니, 몸의 양이 허공과 같다. 이 사람에게 훌륭한 빛이 있는 고로 마치 여름의 태양과 같다.”고 하였으며 또 이르되 “몸이 끝이 없기에 이름하여 대열반이라고 한다.”고 하였으며 또 이르되 “대반열반이라 하니 그 성품이 넓고 넓기 때문이다.”
知學者有四種人. 有行有解有證. 上上人. 無行有解有證. 中上人. 有行有解無證. 中下人. 有行無解無證. 下下人也.
도를 배우는 학자(學者)에 네 종류의 사람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행(行)도 있고 해(解)도 있으며 증(證)도 있는 사람은 상상인(上上人)이다. 행(行)은 없고 해(解)와 증(證)이 있는 사람은 중상인(中上人)이다. 행(行)과 해(解)는 있으나 증(證)이 없는 사람은 중하인(中下人)이다. 행(行)은 있으나 해(解)와 증(證)이 없는 사람은 하하인(下下人)이다.
☞ 주(註) 행(行) : 실천, 해(解) : 이해, 증(證) : 체험. ☜
問. 臨時作若爲觀行. 信曰. 眞須任運. 又曰. 用向西方不. 信曰. 若知心本來不生不滅. 究竟清淨. 即是淨佛國土. 更不須向西方. 華嚴經云. 無量劫一念. 無量劫. 須知一方無量方. 無量方一方. 佛爲鈍根衆生. 今向西方. 不爲利根人說也.
묻기를 “임종시 관행을 해야 합니까? ” 도신이 답했다. 되는 대로 하라. 또 물었다. “서쪽을 향해야 합니까? ” 도신이 답했다. 만약 마음이 본래 불생불멸이고 구경에 청정함을 알면 곧 불국토를 청정하게 함이라. 다시 서방을 향할 필요가 없다. 화엄경에 이르기를 “무량겁이 곧 일념이요, 일념이 곧 무량겁이다”고 설했다. 그러니 한 방위가 곧 무량한 방위요, 무량한 방위가 곧 한 방위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부처님께서 근기가 둔한 중생을 위하여 서방을 향하라고 하신 것이지, 근기가 예리한 사람을 위해서 설한 것이 아니다.
深行菩薩. 入生死化度衆生. 而無愛見. 若見衆生有生死. 我是能度. 衆生是所度不名菩薩. 度衆生如度空. 度空何曾有來去. 金剛經云. 滅度無量衆生. 實無有衆生得滅度者.
깊이 수행하는 보살은 생사(生死)에 들어가서 중생을 제도하되, 좋아하는 견해를 내지 않나니, 만약 중생에게 생사가 있음을 보고 ‘나는 저 사람을 제도한다. 저 사람은 나에게 제도된다’고 생각한다면 보살이라고 이름할 수 없다. 중생을 제도한다는 것은 공(空)을 제도한다는 말과 같다. 공(空)을 제도함에 어떻게 오고 감이 있겠는가? 그래서 금강경에 이르되 “무량중생을 제도하여 열반에 들게 하였으나 실로 한 중생도 열반에 든 중생이 없다.”고 하셨다.
所初地菩薩. 初證一切空. 後證得得一切不空. 即是無分別智. 亦是色. 色即是空. 非色滅空. 色性是空. 所菩薩修學空爲證. 新學之人. 直見空者. 此是見空. 非眞空也. 修道得眞空者. 不見空與不空. 無有諸見也.
초지보살은 처음으로 일체공(一切空)을 깨닫고 나중에 일체불공(一切不空)을 깨닫는다. 이것은 곧 무분별지(無分別智)이니 또한 이것은 색(色)이다. 색은 곧 공이다. 색이 사라져서 공이 아니고, 색의 성품(色性), 이것이 공이다. 보살은 공을 닦아 배워서 깨닫는다. 처음 배우는 사람은 곧바로 공을 보지만(直見空) 이것은 공을 보는 것(見空)이지, 참된 공(眞空)이 아니다. 도닦음(修道)에서 참된 공을 얻으면 공(空)을 보지도 않고 불공(不空)을 보지도 않는다. 모든 견해(諸見)가 없기 때문이다.
善須解色空義. 學用心者. 要須心路明淨. 悟解法相. 了了分明. 然後乃當爲人師耳. 復須內外相稱. 理行不相違. 決須斷絕文字語言. 有爲聖道. 獨一淨處. 自證道果也
모름지기 색공(色空)의 뜻을 잘 이해해야 한다. 마음 쓰는 법을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마음의 길(心路)이 밝고 청정해야 하며 법상(法相)을 깨닫되 철두철미 분명해야 한다. 그런 연후에 마땅히 남의 스승(人師)이 될 수 있다. 또한 안과 밖이 서로 맞아서(內外相稱) 이치(理)와 행위(行)가 서로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 결단코 문자와 말을 끊어야 한다. 유위의 성도(聖道)는 홀로 청정한 곳에서 스스로 도과(道果)를 증득한다.
☞ 주(註) 내외상칭(內外相稱) : 안과 밖이 서로 맞음. 이치를 이해한 그대로 말하고 행동함. 아는 것과 말、행동이 일치함. 해행일치(解行一致). 지행일치(知行一致). ☜
或復有人. 未了究竟法爲相. 名聞利養教導衆生. 不識根緣利鈍. 似如有異. 即皆印可. 極爲苦哉. 苦哉大禍. 或見心路. 似如明淨. 即便印可. 此人大壞佛法. 自誑誑他. 用心人. 有如此同異. 並是相貌耳. 未爲德心. 眞德心者. 自識分明.
혹 어떤 사람은 궁극적인 법(究竟法)을 깨닫지 못하고, 명예와 이익을 구하는 마음으로 중생을 교화하며, 근기의 예리함과 둔함을 알지 못하여, 조금 보통사람과 다른 점이 있는 듯하면 곧 모두 깨달음을 인가(印可)한다. 지극히 괴롭구나! 괴롭도다, 큰 재앙이여! 혹은 마음길(心路)을 보아서 밝고 청정한 듯 보이면 곧바로 인가한다. 이 사람은 크게 불법을 파괴하는 자이니 스스로를 속이고 남도 속인다. 마음 쓰는 사람은 이와 같이 같고 다름이 있지만 이 두 가지 모두 상모(相貌)일뿐이라 덕의 마음(德心)이 되지 못한다. 참 덕의 마음(眞德心)인 자는 스스로 분명히 아는 것이다.
久後法眼自開. 善別虛之與僞. 或有人計身空無. 心姓亦滅. 此是斷見人. 與外道同. 非佛弟子. 或有人. 計心是有不滅. 此是常見人. 亦與外道同.
오래 지나면 법안(法眼)이 스스로 열려서 거짓과 허위를 잘 분별한다. 혹은 어떤 사람이 몸이 비어 없다고 헤아리고(計身空無) 심성도 아예 없다(心性亦滅)고 헤아린다면 이 사람은 단견인(斷見人)이라 외도와 다름이 없으며 부처님 제자가 아니다. 혹은 어떤 사람이 마음은 곧 불멸이라고 헤아린다면(計心是有不滅) 이 사람은 상견인(常見人)이라 이 또한 외도와 같다.
今明佛弟子. 亦不計心性是滅. 常度衆生. 不起愛見. 常學智慧. 愚智平等. 常作禪定. 靜亂不二. 常見衆生. 未增是有. 究竟不生不滅. 處處現形. 無有見開. 了知一切未曾取捨. 未曾分身. 而身通於法界
이제 참된 불제자의 견해를 말한다면 ① 심성이 아예 없다고 헤아리지 않아서, ② 항상 중생을 제도하되 좋아하는 견해를 내지 않고, ③ 항상 지혜를 배우되 어리석음과 지혜가 평등하며, ④ 항상 선정을 닦되 고요함과 어지러움이 둘이 아니다. ⑤ 항상 중생을 보되 본래 있었던 적이 없다고 본다. ⑥ 끝내 생겨남도 없고 사라짐도 없으나(不生不滅) 또한 곳곳에 형체가 나타난다. ⑦ 일체법을 취하거나 버림(取捨)도 일찍이 없었음을 깨달아 안다. ⑧ 몸을 나눔(分身)이 없었으나 또한 몸이 법계에 두루 통한다.
又古時智敏禪師訓曰. 學道之法. 必須解行相扶. 先知心之根原. 及諸體用. 見現分明無惑. 然後功業可成. 一解千從. 一迷萬惑. 失之毫釐差之千里. 此非虛言.
또한 옛날 지민선사(智敏禪師)가 훈계하여 말하기를 “道를 배우는 데에는 반드시 이해(解)와 행동(行)이 부합하여야 한다. 먼저 마음의 근원과 마음의 본체(體)와 작용(用)을 알고 나서, 바른 견해(見)가 현재 분명하여 미혹이 전혀 없는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공업(功業)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하나를 깨달으면 천 가지(千)를 알게 되고, 하나에 미혹하면 만 가지(萬)가 미혹하니, 털끝만치의 잘못이 있으면 나중에는 그 차이가 천리(千里)나 어긋나게 된다.”고 했다. 이것은 빈 말(虛言)이 아니다.
無量壽經云. 諸佛法身. 入一切衆生心想. 是心作佛, 是心是佛. 當知佛即是心. 心外更無別佛也.
무량수경에 이르기를 “모든 부처님들의 법신(法身)은 일체중생의 마음속 생각(心想)에 들어 있으며, 이 마음이 부처를 만드는 것이고(是心作佛), 이 마음이 바로 부처다(是心是佛).” 라고 설했다. 그러므로 부처는 바로 이 마음이고(佛即是心), 마음 밖에 다시 별도의 부처가 없다는 것(心外更無別佛)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 주(註) 여기서 무량수경은 관무량수경 즉, 불설관무량수불경(佛說觀無量壽佛經)이다. ☜
略而言之. 凡有五種. 一者. 知心體. 體性清淨. 體與佛同. 二者. 知心用. 用生法寶. 起作恒寂. 萬惑皆如. 三者. 常覺不停. 覺心在前. 覺法無相. 四者. 常觀身空寂. 內外通同. 入身於法界之中. 未曾有礙. 五者. 守一不移. 動靜常住. 能令學者. 明見佛性. 早入定門
간략히 말하자면 5가지가 있으니
첫째, 마음의 본체를 아는 것(知心體)이다. 마음의 체성(體性)이 청정하여 그 체(體)가 부처와 같다.
둘째, 마음의 작용을 아는 것(知心用)이다. 마음이 작용하여 법의 보배(法寶)를 낳고, 마음은 끊임없이 작용하지만 언제나 고요하며, 만 가지 미혹속에서도 항상 그대로여서 변함이 없다.
☞ 주(註) 끊임없이 작용하지만 언제나 고요하다(起作恒寂)는 것은 작용 가운데 본체를 보는 것이다. 마치 파도를 보고 물의 젖는 성품이 움직임이 없이 항상 그대로라는 것을 아는 것과 같다. 파도를 보고 움직이는 것만 보고 그 본체(젖는 성질)가 고요하고 변함이 없다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은 범부이고, 파도가 출렁이지만 그 본체가 고요함을 보는 것은 지혜로운 자이다. 마음의 작용은 법성게(法性偈)의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과 같다. ☜
셋째, 언제나 깨달아 알지만 한 곳에 머물지 않는 것(常覺不停)이다. 깨닫는 마음은 항상 앞에 있지만(覺心在前), 깨닫는 대상은 모양이 없다(覺法無相).
넷째, 항상 몸이 텅 비고 고요함을 관찰하는 것(常觀身空寂)이다. 안과 밖이 통하여 하나가 되면 몸은 법계(法界)로 들어가 일찍이 걸림이 없었음(未曾有礙)을 안다.
☞ 주(註) 몸을 ‘나’ 또는 ‘내 것’이라고 보는 전도망상과 집착(我見.我執) 때문에, 또한 몸이라는 실체가 있다는 전도망상과 집착(法見.法執) 때문에 몸 안과 몸 밖이 나누어지게 된다. 그러나 몸이 본래 실체가 없어서 텅 비었다고 보면 경계가 사라져서 허공과 같이 안과 밖이 따로 없고 온 우주법계가 하나가 된다. ☜
다섯째, 하나를 지켜 움직이지 않는 것(守一不移)이다. 움직임과 고요함이 항상 머물러(動靜常住), 수행자로 하여금 佛性을 명확히 볼 수 있게 하고, 빨리 선정의 문(定門)에 들어가게 한다.
☞ 주(註) 동정상주(動靜常住) : 움직임이 있지만 그 본체를 보면 움직임이 없어 조용하고, 본체로는 움직임이 없어 조용하지만 또한 현상으로는 움직임이 나타나니 움직임과 조용함이 한 몸(一體)으로서 상주한다. 마치 조용한 물에 바람이 불면 파도가 치고, 바람이 없으면 다시 조용해진다. 파도가 있건 없건 오직 물일뿐이다. ☜
諸經觀法備有多種. 傅大師所說. 獨舉守一不移. 先修身審觀. 以身爲本. 又此身是四大五蔭之所合. 終歸無常. 不得自在. 雖未壞滅. 畢竟是空.
모든 경의 관법(觀法)이 여러 가지를 설하고 있으나 부대사(傅大師)가 설한 것과 같이 홀로 하나를 지켜서 움직이지 않으려면(守一不移) 먼저 몸을 닦아 자세히 관찰해야 한다. 몸이 근본이 된다. 또한 이 몸은 사대(四大)와 오온의 화합일뿐이며 마침내 무상으로 돌아가고 마는 것이라 자재하지 못하다. 비록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마침내 공(空)하다.
維摩經云. 是身如浮云. 須臾變滅. 又常觀自身. 空淨如影. 可見不得. 智從影中生. 畢竟無處所. 不動而應物. 變化無窮空中生六根. 六根亦空寂.
유마경에 이르되 “이 몸은 뜬 구름과 같아서 순식간에 변해 사라진다.” 하였다. 또한 항상 자기 몸을 관찰하되 비고(空), 청정하다(淨)고 보라. 그림자와 같아서 볼 수는 있으나 얻을 수는 없다(可見不得). 지혜(智)는 몸이라는 그림자 가운데 생겨나지만 마침내 처소(處所)가 없다. 본체는 움직이지 않으나 사물에 응하여 변화가 무궁하고, 공(空) 가운데 육근이 생겨나지만 육근 또한 공적(空寂)하다.
所對六塵境. 了知是夢幻. 如眼見物時. 眼中無有物. 如鏡照面像. 了極分明. 空中現形影. 鏡中無一物. 當知人面不來入鏡中. 鏡亦不往入人面. 如此委曲. 知鏡之與面. 從本已來. 不出不入. 不來不去. 即是如來之義.
마주 대하는 육진경계를 꿈이나 허깨비와 같다고 깨달아 알아야 한다. 눈으로 형상을 볼 때 눈 가운데는 물건이 없으니, 마치 거울에 얼굴을 비추는 것과도 같다. 공(空) 가운데 형체의 그림자가 나타나지만 거울 가운데는 한 물건도 없다. 사람의 얼굴이 거울 가운데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거울 역시 사람의 얼굴에 출입하는 것도 아니다. 이와 같이 거울과 얼굴을 알면 본래부터 나감도 없고 들어감도 없으며,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다. 이것이 곧 여래(如來)의 뜻이다.
如此細分判. 眼中與鏡中. 本本常空寂. 鏡照眼照同. 是故將爲比. 鼻舌諸根等. 其義亦復然. 知眼本來空. 凡所見色者. 須知是他色. 耳聞聲時. 知是他聲. 鼻聞香時. 知是他香. 舌別味時. 知是也味. 意對法時. 知是他法. 身受觸時. 知是他觸. 如此觀察知. 是爲觀空寂.
이와 같이 미세하게 판단하면 눈 가운데와 거울 가운데가 본래 항상 비고 고요하다(空寂). 거울이 비추고 눈이 비추는 것은 같다. 그러므로 이것으로 비유했다. 코와 혀 등 모든 근(根) 등도 그 뜻이 역시 이와 같다. 눈이 본래 공(空)한지라 보이는 형상은 이것이 다른 형상임을 알고, 귀로 소리를 들을 때 이것이 다른 소리임을 알며, 코로 냄새를 맡을 때 이것이 다른 냄새임을 알고, 혀로 맛을 볼 때 이것이 다른 맛임을 알고, 뜻으로 법을 대할 때 이것이 다른 법임을 안다. 몸으로 감촉을 느낄 때 이것이 다른 감촉임을 안다. 이와 같이 관찰하여 알면 이것이 공적(空寂)을 관찰하는 것이다.
見色知是不受色. 不受色即是空. 空即無相. 無相即無作. 此見解脫門. 學者得解脫. 諸根例如此. 復重言說. 常念六根空寂. 爾無聞見. 遺教經云. 是時中夜. 寂然無聲. 當知如來說法以空寂爲本. 常念六根空寂. 恒如中夜時. 晝日所見聞. 皆是身外事. 身中常空淨
형상을 보되 눈이 형상을 받아들이지 않음을 알아서 형상을 받지 않으면 곧 이것이 공(空)이다. 공은 곧 무상(無相)이다. 무상은 곧 무작(無作)이다. 이렇게 보는 것이 해탈문이다. 수행자가 해탈을 얻으면 모든 근(根)의 예도 이와 같다. 다시 말하자면 항상 육근이 공적함을 생각하면 듣고 보는 것이 없을 것이다. 유교경에 이르기를 “이때 한밤중에(中夜) 고요하여 소리가 없듯이 여래의 설법도 공적(空寂)을 근본으로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항상 육근이 공적함을 생각하되 항상 한밤중과 같이 낮에도 보고 듣는 것이 모두 몸 밖의 일이라 보면 몸 가운데 항상 비고(空) 청정(淨)할 것이다.
☞ 주(註) 삼해탈문(三解脫門)이 있으니 즉, 공해탈문(空解脫門), 무상해탈문(無相解脫門), 무작해탈문(無作解脫門.無願解脫門)이다. ☜
守一不移者. 以此淨眼. 眼住意看一物. 無問晝夜時. 專精常不動. 其心欲馳散. 急手還攝來. 以繩繫鳥足. 欲飛還掣取. 終日看不已. 泯然心自定.
하나를 지켜 움직이지 않는 것(守一不移)은 이 텅 비고 청정한(空淨) 눈으로 눈에 머문 뜻으로 한 물건(一物)을 보며, 낮과 밤의 구별이 없이 오로지 전념하고 정진하여 항상 움직이지 않게 하는 것이다. 마음이 흩어질 듯할 때는 급히 다시 거두어들여 돌아온다. 마치 새의 발을 묶어서 날아가려 하면 속히 끈을 끌어당기는 것처럼, 하루종일 잘 지켜서 쉼이 없으면 자연히 마음은 스스로 안정하게 된다.
維摩經云. 攝心是道場. 此是攝心法. 法華經云. 從無數劫來. 除睡常攝心. 以此功德. 能生諸禪定. 遺教經云. 五根者. 心爲其主. 制之一處無事不辦. 此是也.
유마경에서 “마음을 거두어들이는 것(攝心)이 바로 도량이다.”라고 설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섭심(攝心)의 방법이다. 법화경에서 “무수겁 이래로 잠자는 시간 이외는 언제나 마음을 거두어들여, 그러한 공덕으로 능히 모든 선정을 일으킨다”고 설한다. 유교경에서 “오근(五根) 가운데 마음이 그 중심이다. 마음을 한 곳에 제어하면 어떤 일이라도 해결되지 않는 일이 없다.”고 설한다. 이러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前所說五事. 並是大乘正理. 皆依經文所陳. 非是理外妄說. 此是無漏業. 亦是究竟義. 超過聲聞地. 眞趣菩薩道. 聞者宜修行. 不須致疑惑.
앞에서 설한 5가지 일은 모두 대승의 바른 이치이고, 모두 경문에 의거하여 나열한 것이며 바른 이치 외의 허망한 설이 아니다. 이것은 무루업(無漏業)이고 구경의 뜻(究竟意)여서 성문의 지위를 초과한 진정한 보살도이니 듣는 사람은 마땅히 수행해야 할 것이고 의혹을 일으키지 말라.
如人學射. 初大准. 次中小准. 次中大約. 次中小的. 次中一毛. 次破一毛作百分. 次中百毛之一分. 次後前射前. 筈筈相柱. 不令箭落. 喻人習道. 念念注心. 心心相續. 無暫間念. 正念不斷. 正念現前.
마치 사람이 활쏘기를 배울 때, 처음에는 큰 과녁을 맞추고, 그 다음으로는 중간과녁、작은 과녁을 맞추고, 그 다음으로는 중간 다발、작은 다발을 맞추고, 그 다음으로는 중간 표적、작은 표적을 맞추며, 그 다음으로는 한 털을 맞추고, 그 다음으로는 한 털을 백가닥으로 나누어 그 나눈 털조각을 맞춘다. 다음으로는 앞의 화살을 뒷화살로 맞추되, 서로 지탱해서 화살이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도를 배워 익히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생각 생각에 마음을 집중하고 마음과 마음이 상속하여 잠깐도 다른 생각이 끼어들지 않게 하여, 정념(正念)이 끊어지지 않으면 정념이 현전(現前)하는 것이다.
又經云. 以知惠箭. 射三解脫門. 筈筈筈於柱勿令落地.
또한 경에 이르되 “지혜의 화살로 삼해탈문을 맞추되, 화살이 연달아서 지탱하여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又如鑽火. 未熱而息. 雖欲得火. 火難可得.
또한 불을 피우는 것과 같으니 아직 열이 나지 않았는데 쉰다면 비록 불을 얻으려고 하더라도 불을 얻기 어려운 것이다.
又如家有如意珠. 所求無不得. 忽然而遺失. 憶念無忘時.
또한 집에 여의주가 있어서 무엇이든 구하는 대로 얻을 수 있는데 홀연히 잃어버리는 것과 같으니 항상 기억하여 잊어버리는 때가 없어야 한다.
又如毒箭入肉. 竿鏃猶在. 如此受苦痛. 亦無暫忘時. 念念在心. 其狀當如此.
또한 마치 독화살이 살에 박혀서 화살촉이 아직도 있는 것과 같으니 이와 같이 받는 고통이 잠깐도 잊을 때가 없는 것과 같다. 생각 생각에 마음에 있음이 그 모양이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
法祕要. 不得傳非其人. 非是惜法不傳. 但恐前人不信. 淊其謗法之罪. 必須擇人. 不得操次輒說. 慎之慎之
이 법은 비밀하고 긴요한 것이니 선근이 성숙한 사람이 아니면 함부로 전하지 말라. 이것은 법을 아껴서 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단, 듣는 사람이 믿지 않고 함부로 법을 비방하는 죄에 빠질 것이 두려운 것이다. 반드시 사람을 선택해서 전해야 하고 다가오는 사람에게 쉽게 빨리 설하지 말라. 조심하고 조심해야 한다.
法海雖無量. 行之在一言. 得意即亡言. 一言亦不用. 如此了了知. 是爲得佛意
법의 바다가 비록 무량하지만 행하는 것은 곧 한 마디 말에 있다. 뜻을 얻으면 말을 잊어야 하니, 한 말도 또한 필요가 없다. 이와 같이 확철하게 안다면 이것은 곧 부처님의 뜻을 얻은 것이다.
若初學坐禪時. 於一靜處. 眞觀身心. 四大五蔭. 眼耳鼻舌身意. 及貪嗔癡. 爲善若惡. 若怨若親. 若凡若聖. 及至一切諸狀. 應當觀察. 從本以來空寂. 不生不滅. 平等無二. 從本以來無所有. 究竟寂滅. 從本以來. 清淨解脫.
초학자가 좌선할 때는 조용한 곳에서 몸과 마음을 다음과 같이 관찰하라. 사대, 오온, 눈、귀、코、혀、몸、뜻과 탐진치 혹은 선과 악 혹은 원(怨)과 친(親), 혹은 범(凡)과 성(聖), 내지 일체제법을 마땅히 하나하나 관찰해야 한다. 본래부터 공적(空寂)한 것이어서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평등하여 둘이 아니며, 본래부터 무소유(無所有)이고, 구경에 적멸(寂滅)한 것이며, 본래부터 청정하고 해탈한 것임을 관찰해야 한다.
不問晝夜. 行住坐臥. 常作此觀. 即知自身猶如水中月. 如鏡中像. 如熱時炎. 如空谷響. 若言是有. 處處求之不可見. 若言是無. 了了恒在眼前. 諸佛法身. 皆亦如是.
낮과 밤을 막론하고 행주좌와에 항상 이렇게 관찰한다면, 곧 자신의 몸이 마치 물속에 비치는 달그림자(水中月)와 같고, 거울 속의 영상(鏡中像)과 같고, 더운 날 보이는 아지랑이(熱時炎)와 같고, 인기척이 없는 골짜기의 메아리(空谷響)와 같음을 깨달을 것이다. 만약 그런 것이 있다고 말하면 여기저기 그것을 찾아도 찾을 수 없으며, 그것이 없다고 말하면 뚜렷하게 언제나 눈앞에 존재한다. 제불(諸佛)의 법신(法身)은 모두 이와 같다.
即知自身從無量劫來. 畢竟未曾生. 從今已去. 亦畢竟無人死. 若能常作如此觀者. 即是眞實懺悔. 千劫萬劫. 極重業. 即自消滅. 唯除疑惑. 不能生信. 此人不能悟入.
그러므로 자신은 무량겁 이래로 필경 태어난 일도 없고, 앞으로도 필경 죽는 일도 없다는 것을 안다. 만약 능히 이와 같이 관찰한다면, 그야말로 진실한 참회이니 천겁, 만겁의 지극히 무거운 악업이 곧 스스로 소멸될 것이다. 다만 여기에 의혹을 일으켜 믿음을 내지 못하는 사람은 제외한다. 이러한 사람은 깨달음에 들어갈 수 없다.
若生死信依此行者. 無不得入無生正理. 復次. 若心緣異境. 覺起時即觀起處. 畢竟不起. 此心緣生時. 不從十方來. 去亦無所至. 常觀攀緣. 覺觀妄識. 思想雜念. 亂心不起. 即得麁住.
만약 믿음을 일으켜 이를 행하는 자는 무생(無生)의 바른 이치(正理)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가 없다. 또한 마음이 이상한 경계를 만날 때에는 곧 그 일어난 곳을 관찰해서 필경 일어남이 없다고 관찰해야 한다. 이 마음이 일어날 때엔 시방(十方)에서 온 것도 아니고, 마음이 사라질 때는 가는 곳도 없다. 항상 반연과 각관(覺觀)의 허망한 알음알이(妄識)와 여러 잡념을 이와 같이 관찰하여 어지러운 마음이 일어나지 않게 하면 곧 거칠게 머무름(麁住)을 얻은 것이다.
若得住心. 更無緣慮. 即隨分寂定. 亦得隨分息諸煩惱. 畢故不造新名. 爲解脫看. 心結煩熱. 悶亂昏沈. 亦即且自散適. 徐徐安置. 令其得便. 心自安淨. 唯須猛利. 如救頭然. 不得懈怠. 努力努力.
안정된 마음을 얻으면 다시는 반연하는 생각이 없어져서 곧 일정 부분의 적정(寂定)이 되며 또한 모든 번뇌가 일정 부분 쉬게 된다. 옛것은 끝나고 새로운 번뇌를 짓지 않게 됨을 이름하여 해탈이라고 한다. 마음의 맺힌 번뇌와 열기와 고민과 혼란과 혼침 또한 곧 스스로 흩어져서 서서히 안치하면 마음은 스스로 안정되고 청정해진다. 오직 맹렬하고 예리하게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이 하여 게으름 피우지 말고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한다.
初學坐禪看心. 獨坐一處. 先端身正坐. 寬衣解帶. 放身縱體. 自按摩七八翻. 令心腹中嗌氣出盡. 即滔然得性清虛恬淨. 身心調適然. 安心神則. 窈窈冥冥. 氣息清冷. 徐徐斂心. 神道清利. 心地明淨. 觀察不明. 內外空淨. 即心性寂滅. 如其寂滅. 則聖心顯矣.
초학자로서 좌선하여 마음을 보려면, 홀로 한 곳에 앉아 먼저 몸을 단정하고 바르게 앉는다. 옷과 허리띠를 풀어 편하게 하며, 몸의 긴장을 풀고 스스로 일곱 번 내지 여덟 번 문지르고, 뱃속의 숨을 전부 내쉬어 나가게 하면 곧 물이 차 오르듯 정신이 맑고 비며 편안해진다. 몸과 마음을 조화시켜 정신을 안정시키면 깊고 그윽한 가운데 호흡이 맑고 차가워지고 서서히 마음이 거두어져서 정신이 맑고 예리하며 마음바탕(心地)이 밝고 청정해진다. 관찰은 분명하고 안과 밖이 비고 청정하면 심성이 적멸해진다. 마음이 적멸해졌을 때 거룩한 마음(聖心)이 나타나는 것이다.
性雖無刑. 志節恒在然. 幽靈不竭. 常存朗然. 是名佛性. 見佛性者. 永離生死. 名出世人.
성품은 형체가 없지만 지절(志節)은 항상 존재하고 있으며, 깊고 영험한 지혜의 활동은 다하지 않아서, 항상 밝게 존재하나니 이것을 이름하여 불성이라고 한다. 불성을 보는 자는 영원히 생사를 벗어나니 이름하여 출세인(出世人)이라고 한다.
是故維摩經云. 豁然還得本心. 信其言也. 悟佛性者. 名菩薩人. 亦名悟道人. 亦名識理人. 亦名得性人.
이런 까닭에 유마경에 이르기를, “활연히 본심(本心)을 되찾는다.”고 하였다. 이 말씀은 그대로 믿을 만한 말이다. 불성을 깨달은 자는 보살인(菩薩人)이라고 이름하고, 또한 오도인(悟道人), 식리인(識理人), 득성인(得性人)이라고 이름한다.
是故經云. 一句深神. 歷劫不朽. 初學者前方便也. 故知彼道有方便. 此聖心之所會.
이런 까닭에 경에 이르기를 “한 구절(一句)의 깊은 정신은 겁을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초학자를 위한 최초의 방편이다. 그러므로 그 도(道)에는 방편이 있어서 이 성심(聖心)을 만나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凡捨身之法. 先定空空心. 使心境寂淨. 鑄想玄寂. 令心不移. 心性寂定. 即斷攀緣. 窈窈冥冥. 凝淨心虛. 則幾泊恬乎. 泯然氣盡. 住清淨法身. 不受後有.
무릇 몸을 버리는 법(捨身之法)은 먼저 공(空)하고 공(空)한 마음으로 마음과 경계(心境)를 고요하고 청정하게 하는 것(寂淨)이다. 현묘하고 고요함(玄寂)을 생각하고 단련하여 마음이 움직이지 않게 해야 한다. 심성(心性)이 적정(寂定)하면 곧 반연(攀緣)이 끊어져서, 깊고 깊으며 그윽하고 그윽하여, 엉긴 청정한 마음이 텅 비면(虛) 편안하고 고요하게 머무르지 않겠는가? 완전히 사라져서 기운이 다하면 청정한 법신(法身)에 머물러서 후생의 존재(後有)를 받지 않는다.
若起心失念. 不免受生也. 此是前定心境. 法應如是. 此是作法. 法本無法. 無法之法. 始名爲法. 法則無作. 夫無作之法. 眞實法也.
만약 마음을 일으킬 때 정념을 잃어버리면 다시 태어남(受生)을 면하지 못한다. 이것은 앞의 선정의 마음과 경계이니 법이 응당 이와 같아서 이것은 작위가 있는 법(作法)이다. 법은 본래 법이 없다. 법이 없는 법을 비로소 이름하여 법이라 한다. 법은 곧 작위가 없는 것이니(無作), 작위가 없는 법이 진실한 법이다.
是以經云. 空無作無願無相. 則眞解脫. 以是義故. 實法無作. 捨身法者. 即假想身橫看. 心境明地. 即用神明推策.
그러므로 경에 이르되 “공(空)、무작(無作)、무원(無願)、무상(無相)이 곧 해탈이다.” 하였다. 그러므로 진실한 법은 작위가 없다(無作). 몸을 버리는(捨身) 법은 곧 가상(假想)하여 몸을 멀리서 좌우로 보는 것이다. 마음의 경계가 밝은 경지이면 곧 정신을 써서 밝게 추책(推策)하는 것이다.
大師云. 莊子說. 天地一指. 萬物一馬也. 法句經云. 一亦不爲一. 爲欲破諸數. 淺智之所聞. 謂一以爲一. 故莊子猶滯一也.
대사가 이르되 “장자(莊子)가 설했다. ‘천지는 하나의 손가락이고 만물은 하나의 말이다.’ 그러나 법구경에 이르기를 ‘하나도 또한 하나라고 할 수 없다.’고 했다. 이것은 모든 수(數)를 깨뜨리기 위한 것이다. 지혜가 얕은 사람이 들으면 하나를 말하면 하나라고만 안다. 그러므로 장자(莊子)도 오히려 하나에 막힌 것(滯一)이다.”
☞ 주(註) 莊子 內篇에 以指喻指之非指, 不若以非指喻指之非指也;以馬喻馬之非馬, 不若以非馬喻馬之非馬也. 天地一指也, 萬物一馬也. 라는 구절이 있다. 진정으로 하나가 되었다면 일체 분별이 끊어져 하나라는 것도 세울 수 없다. 분별이 있을 때 수(數)가 있고, 분별이 없으면 수도 없다. ☜
老子云. 窈兮冥兮. 其中有精. 外雖亡相. 內尚存心. 華嚴經云. 不著二法. 以無一二故. 維摩經云. 心不在內不在外. 不在中間即是證. 故知老子滯於精識也.
노자(老子)가 이르기를 “깊구나! 그윽하구나! 그 가운데 정(精)이 있으니 겉으로는 비록 모양이 없지만 안으로는 오히려 마음이 있다.”
화엄경에 이르기를 “두 법에 집착하지 않으니, 하나도 없고 둘도 없기 때문이다.” 하였다.
유마경에 이르기를 “마음은 안에 있지도 않고 밖에 있지도 않으며 중간에도 있지 않다.”고 했으니 이것이 증거가 된다. 그러므로 노자(老子)는 정식(精識)에 막힌 것이다.
☞ 주(註) 노자는 겉(外)과 안(內)이라는 분별에 떨어진 것이고, 안팎이 없이 허공처럼 툭 트인 심성(心性)을 보지 못한 것이다. ☜
涅槃經云. 一切衆生有佛性. 容可說. 牆壁凡石. 而非佛性. 云何能說法.
열반경에 이르되 “일체중생에게 불성이 있다.”고 하였다. 그 설함은 인정할 수 있으나 장벽과 바위는 불성이 아니니 어떻게 능히 설법하리요.
☞ 주(註) 여러 경에서 무정설법(無情說法)을 말씀하셨다. 능엄경에서 임목지소개연법음(林木池沼皆演法音)이라 했으며 무량수경에서는 극락의 보배나무에서 법음(法音)을 설한다고 했다. 그런데 열반경에서는 일체중생에게만 불성이 있다고 했으니 무정(無情)이 설법한다는 뜻에는 못 미친다는 말이다. ☜
又天親論云. 應化非眞佛. 亦非說法者.
또한 천친론에 이르되 “응신과 화신은 참 부처가 아니다. 또한 법을 설하는 도 아니다.”고 하였다.
☞ 주(註) 천친론(天親論)이란 세친(世親)의 금강반야바라밀경론(金剛般若波羅蜜經論) 3권을 말한다. 논에 이 게송이 있다. “應化非眞佛, 亦非說法者, 說法不二取, 無說離言相.” ☜
第六. 唐朝蘄州雙峯山幽居寺大師. 諱弘忍. 承信禪師後. 忍傳法. 妙法人尊. 時號爲東山淨門. 又緣京洛道俗稱歎. 蘄州東山多有得果人. 故□東山法門也.
제육. 당나라(唐朝) 기주(蘄州) 쌍봉산(雙峯山) 유거사(幽居寺)의 홍인(弘忍)대사는 도신선사의 후대로서 홍인은 법을 전해받고 이 미묘한 법으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이때 호를 동산정문(東山淨門)이라고 불렀다. 또한 수도 낙양의 승(道)과 속(俗)이 다 함께 스님의 법문을 칭찬하고 탄복했으며 기주의 동산(東山)에는 견성한 사람이 많이 나왔다. 그러므로 동산법문(東山法門)이라고 칭하게 된 것이다.
☞ 주(註) 동산법문의 개창자(開創者)는 4조 도신선사이고, 흥성자(興盛者)는 5조 홍인선사이다. 쌍봉산(雙峯山)은 서봉(西峯)과 동봉(東峯)이 있는데 도신대사는 서쪽 산에 있는 절에서 주석했고, 홍인대사는 동쪽 산에 있는 절에서 주석하며 법을 전했으므로 동산법문이라고 한 것이다. ☜
[출처] 도신선사(道信禪師)의 동산법문(東山法門) - 일행삼매, 염불선|작성자 지견청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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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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