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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선 아래에 글을 올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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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서대문형무소를 쓰고는 너무 길어 반만 올리고 나머지 반은 이제야 올립니다)
안양교도소엔 '3총각'이라는 유명한 청년들이 수형을 살고 있어 그들은 고생은 되었겠지만 대학이나 일반 사회에서
잘 만나기 힘든 기라성같은 스승들에 24시난 둘러 쌓여 있었으니 스승찾아 삼만리 갈것도 없이 어찌보면 젊은 시절
참으로 좋은 기회속에 있었다고도 볼수있다.
이수병은 경희대 학생회장으로서 언변이 뛰어나 강연회와 정치집회에 많은 초청을 받았다. 특히 기억에 남을 명연설은
군사쿠테타가 일어나기 사흘전인 '61년 5월 13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렸던 '통일촉진궐기대회'에서 학생대표로 행한 연설이었다.
그날 그가 외친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이땅이 뉘땅인데 오도 가도 못하나!'라며 토한
열변은 청중을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으며 우리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통일운동의 상징 구호가 된다. 그 구호를
듣고 가슴이 뛰지 않는 이가 있었을까. 동감이든 자신의 처지를 위협하는 구호로 받아들여 벌벌 떨어서 이던.
그 때 벌벌 떨던 이들 중엔 미국이 있었으니 강대국의 입김에 예속되지 말고 자주 통일을 하자는 주장은 미국을
긴장시켰고 미국은 한국인들이 민족주의 감정에 고무되는것을 원치 않았다. 그리고 그 몇일 후 일어난 군사구테타
의 박정희는 그 후 미국의 우려를 확실하게 잠재워 준다. 미국의 입장에선 동북아의 반공을 위해 한국이 일본과 손
잡아 주길 바랬는데 박정희는 그 구도에 딱 맞아 떨어진 인물이었던 것이다. 박정희는 한일협정을 이루어 내기 위
해 그 후 결국 1965년 비상계엄령까지 동원하여 한일협정을 체결해 미국의 요구에 부응한다.
이수병은 언론의 역할을 주목하고 그 당시 새로 생긴 가장 획기적 언론인 민족일보 기자 공채에 응시하여 지원자
5백여명가운데 유일하게 혼자 합격하였다. 조용수 사장(5.16직후 혁명재판이란 이름으로 박정희에 의해 구속
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됨)이 그의 출중한 능력과 훌륭한 민족정신을 인정하여 채용한것이라 한다.
부산 사범학교를 나와 56년 부산대교육학과에 입학하여 (59년 경희대 경제학과에 편입할때까지) 부산대 정치과의
아버지강의도 청강하고 가르침도 있었다 하니 그는 어떤 필연적인 인연이 있었던것 같다. 5.16후 검거된 그는 학생
으로선 역사상 최고형인 무기징역을 구형받고 실형 15년을 선고받는다. 65년 12월에 많은이들이 형집행면제로 풀려
났지만 그 세젊은이들은 특A급으로 분류되어 2년을 더 살다가 68년 4월에야 7년만에 석방된다.
이수병은 안양교도소에서도 아량이 넓고 따뜻한 품성으로 유명했는데 그는 안양교도소에서 병이든 혁신계 인사에 대한
교도소측의 부당한 처우에 항의하다 징벌방에 수감되기도 하고 선배 스승들에 대한 겸손한 배움의 자세와 학습정진에
게을리 하지 않는 자세등으로 교도관들까지 감화될 정도로 모범적이었다. 나는 간수들(교도관)이라면 일제시대부터
잔인하고 기득세력들의 개들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그곳에 가보니 그들은 대학의 행정과를 갓 졸업한 사회의 새내기
들이라 20대 중후반의 나와 별로 몇살차이도 아닌 젊은이들이었다. 어쩐지 그들은 내게 참으로 호의적으로 항상 미소를
보내고 있었고 혁신계 정치범들에게 늘 고개를 숙이고 스승님에게처럼 극진한 존경을 표하고 있었다.
가끔 이수병은 영내에서 멀리서나 가까이에서 볼수 있었는데 그는 수수한 서민적인 풍모로 내게 얼굴 가득 웃음을
띄며 반가워해 주었다. 그의 웃는 모습은 항상 마치 볼이 통통한 귀여운 아이 같이 귀엽고 순진해 보여서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미소로 답해 주던 기억이 난다. 하긴 내가 3학년 때 그는 겨우 27세 였으니 지금 생각하면 그는 그 때 얼마나
어린 나이 였던가.
나는 매 토요일마다 한번도 빠지지않고 아버지 면회를 가는 것으로 유명해져서 (모두 빨라야 2,3주나 한달에 한번
멀리 가난한 시골에선 일년에 한번만 면회 오기도 힘들기 때문에) 유명해져 있었는데 교도관들 뿐 아니라 일반
잡범들 마저 내게 지극한 존경과 호의를 표하고 있었다. 물론 나의 아버지도 그 안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사중 한분
이라는 점도 작용했지만.
지금 여기서 처음으로 고백하건데 나는 그때 교도소에서 큰 범법행위를 저지르고 있었다. 잡범들이란 대개 절도행위를
저지른 자들로서 밤에 남의 집에 들어가 티비를 훔쳐내왔다던지 모두 극심한 가난으로 인한 절도가 죄였다. 나는 그
때 사흘 굶고 담을 넘는 사람들이 어찌 민족을 배신하고 자신의 배만 채우는 자들에 비해 죄가 더 클 수 있겠는가
싶어 동정심을 느끼고 있었다.
면회하러 들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50미터쯤 떨어진 들에서 곡괭이나 삽으로 땅을 파는 걸 보고 미리 준비해간 담배
한갑을 풀숲에 슬쩍 던져주었다. 그런데 멀리서 보고 그들은 고개를 끄떡거리며 고맙단 표시를 하는데 나중에 고무신을
신고 돌아가며 허리를 구부리거나 무얼 줍는 행동은 철저히 금지하고 있는데 어찌 모두 가져 가는지 신기하였다.
형무소살이중 가장 괴로운 것중 하나가 담배라는데 나는 내가 잡히면 형을 살 각오를 하고 있었다. 가장 끊을 수
없는 고통이라는 담배를 왜 그렇게 금해 더욱 큰 고통을 보태는가 이해가 안갔다. 담배가 몸에 해로우니 어쩌니해도
정신적으로 그런 고통을 준다는 사실에 비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외국의 많은 나라들 교됴소에선 담배에 대한
규제가 없다
그런데 나중에 곰곰 생각해보니 그렇게 매번 저지르는 범법행위를 교도관이 전혀 모를리는 없었을텐데 아마도
그들은 나는 구속하지 않으려 눈을 감아준 것 아닌가 싶었다. 어차피 교도소에서 담배란 어떤 경로를 통하던
근절되진 않을거고. 그들 자신도 담배를 피우고 있으니 잘 이해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혹시 그 사실은 소문
으로 다 퍼져있는데 모르는 이는 교도소 소장과 나뿐이었는지도 모른다 싶다.
한번은 두부한모를 아버지께 드리려 서울서부터 사들고 왔는데 내가 화장실 씽크대에 올려두고 잠깐 나와 아차하고
다시 가보았더니 그 사이에 깜쪽같이 두부가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교도소의 딱딱한 음식보다 부드럽고 영양있는
음식을 더 요리할 필요도 없이 혼자 드실 수 있는 것으로 적합하다싶어 가져 왔는데 금방 사라지다니 잡범 중
모범수라고 뽑힌 이들은 일반수와는 달리 자유롭게 밖의 건물에도 드나들 수 있었으므로. 내가 두부가 없어졌다며
복도에서 언성을 높혔더니 한 교도관이 내게 와서 마주 소리를 질러 그냥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간수앞에선
재소자들이건 가족들이건 일체 입을 다물고 있어야야 하는 법이니까. 그들은 강자들이고 우리는 약점을 콱 잡히고
있는 약자라 혹시 그 안의 재소자들에게 해가 갈 수 있으므로.
그런데 다음주 토요일에 그 새내기인 교도관이 내게 달려와 미안하다며 슬슬 기는 거 아닌가. 동료 교도관들이
모두 나에 대해 설명을하며 내게 사과를 하라는데 자기도 깊이 감동을 하여 거듭 죄송하다고 하여 오히려 내가
미안하였다.
나중에 아버지는 출옥한 후에 말씀하시기를 나때문에 그안에서 많이 편했다고 하셨다. 교도소내 재소자들을 위한
작업은 일체 재소자들을 동원하였는데 밖에 있을 때 온갖부문에서 다양한 일들을 했기 때문에 못하는 분야가없다고.
그거보면 정치범들은 실생활에선 별로 할줄 아는 것이 없어 무용지물이었다. 머리 하나 못깎고 밭에 쟁기질도 서툴고
그안의 공장일도 별로 못하고..사흘 굶어도 가족들을 위해 담하나 넘을 줄도 몰랐으니. 조선조 내내 양반입네하며
책만 읽을 줄 알고 실생활은 아무것도 몰라 차려주는 밥상만 받아먹을 줄 알았으니 빛좋은 개살구들이었다.
예를 들어 그안에서 이발소도 모두 능숙하게 경영하는데 아버지가 이발소로 들어가시면 기다리는 줄 맨끝에
서계셔도 그 젊은 잡범들이 그 아버님이 오셨다며 재빨리 달려와서 서로 써비스를 해드리려 경쟁적으로 모셔갔다
한다.
그중에 교도소장 바로아래 직위인 교무부장이 대구의 청구대학(나중에 대구대학과 합쳐 영남대학이 됨)을 나왔는데
학창시절에 아버지에게 배웠다며 모든 교도관들에게 교수님에겐 매일 하는 감방검사같은 것도 일체 면제시키고
많은 특혜를 드렸다한다. 대단히 훌륭한 교수님이시니 모두 특별히 정성을 다해 모시라면서. 지금 생각하니 나의
담배공급은 그덕에 눈감아 준 것 아닌가도 싶다.
이얘기는 생략하려 했는데 교도소얘기가 나온김에 끝내기 전 한가지를 더 털어놓으려한다. 그동안 매년 년말이
되면 위문음악회를 열어 내가 사회를 보았는데 그것이 얼마나 그들의 심금을 울렸던지 재소자들은 물론 교도관들도
눈물을 흘리고 특히 정치범아닌 잡범들까지 자기들의 처지를 이해해준다며 (그들에겐 너무나 다른 계층에 있는 것
같은 여대생이.. ) 경내에서 나를 마주치면 얼굴을 바로 보면 큰일난다는 듯 징벌을 받기때문에 안보는 척 힐끗힐끗
미소를 가득 담아 보는데 나도 미소를 가득 담아 그들을 바라봐주었다.
그래서 아버지도 어딜 가시던지 '사회자 아버님' 으로 통해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커다란 친절과 환대를 받으셨다한다.
각 종교단체에서도 위문음악회랍시고 많이 오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한때 죄를 범했지만 이제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
라는둥 자존심을 팍 상하는 말을 하여 인기가 없었다. 그냥 나가 앉아 있으라니까 나가고 일반인들 구경하는 맛으로.
하긴 그들은 대부분 기독교단체들이었으니 정치범들의 높은 수준에 기독교인들이 눈에 찼을리도 없다. 기독교인들
이란 대개 그분들이 그토록 경원하시던 친일파 친미파들과 한패들아닌가. 말도 안되는 교회이론들은 두째 치고라도.
정치범 30여명이 특사로 나오는 해 나도 졸업을 하여 그 분들이 모두 나와서 그 유명한 태화관에서 우리에게 졸업
축하를 겸해 그동안 위문왔던 학생들을 위한 감사파티를 열어주었다. 그동안 가장이 교도소에 있어 가족들이 가난
하기 짝이 없었고 마악 세상에 나와 여전히 가난할 텐데도 그 중에서도 자기들끼리 돈을 모아 그 비싼 요릿집에서
우리를 접대하신 것이라 가슴이 아팠다. 우리도 아직 직장을 못잡아 가난하긴 마찬가지였지만. 그분들은 앙상한
몸으로 우리를 하나하나 포옹해 주며 고마웠다며 눈물을 흘리시었다. 우리 모두는 마음속에 그 3총각은 아직 교도소
에 남겨두었다는 자괴감에 가슴이 쓰라렸지만 아무도 그것을 굳이 말로 표현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떤 것들은 말로
꺼낼 때 오히려 그 농도가 떨어지는 법이니. 억지로 가슴속에 가둬놓고 있는 슬픔의 둑을 누군가 건드려 터트리지
않기를 암암리에 바라면서. 수년간 같은 지붕아래서 한솥밥을 먹으며 같은 이념으로 고통을 겪어온 동지들이란 이미
한 가족보다 더 진한 사이들이리라. 속세에선 쉽게이해할 수 없는. 게다가 그들은 한참 나이어린 제자들 아닌가.
그분들은 모두 참으로 멋진 신사였고 나라를 위해 한몸을 바칠 줄 아는 조선의 진실된 사나이들이었다. 조국을 침범한
일본에 대항하여 평생 싸웠으니 그들은 바로 친일파들의 숙적이었고 평생 그렇게 억압당해오다 눈을 감았다.
그분들은 모두 젊어서부터 일제하에 지독한 고문을 많이 받아와서 오래사시지는 못하였다. 그중 가장 오래사신 나의
아버지도 말년에 17년간이나 중풍으로 누워 고생하시다가 87세에 세상을 떠나신다. 그렇다해도 오랫동안 불편하게
말도 잘 못하고 누워계셨으니 그것이 과연 살아있다는 복인가 의심스러울 때가 많았다. 전립선이란 병으로도 몹시
고통스러워 하실 때는 먼저 가신 동지들보다 낳은 것인지.. 가족들의 고통도 차라리 아버지가 감옥살이하실 때보다
덜하지 않았다.
그분들 모두의 한결같은 소원은 죽기 전에 통일을 한번 보고싶다는 것이었는데.. 바로 그 '통일'이란 단어 하나 때문에
그들은 박정희에 의해 잔인한 세월에 시달리다 가셨다. 그 혁신세력 모두 박정희가 나타나자 잠깐동안 내심 기뻐하였다
한다. 박정희는 남북쪽에 다 가담해보아서 어느한쪽에 편향되지않고 우리민족을 위한 진실한 길인지를 알아 올바른
처신을 할거라면서. 닳은 자본주의론자들에 비해 사회주의자들은 훨씬 순진하다더니. 내 생각엔 아예 모르는 이라면
몰라도 어느 한쪽의 인간적 장점과 사랑을 깊이 한번 맛본 사람이 그 동지들을 배신하고 혼자 살아난다는 그 무서운
이기심과 잔인성이 이해되지 않는다.
그렇게 정신이 흐릿해질 때에도 일심으로 고집을 놓치 않으신 것은 '민족'과 '통일'이라는 두 단어였다. 임종하시는
날 제자들이 방문하고있었는데 한사람이 손을 잡아드리고 있으니 그 손바닥에 미음(ㅁ)을 천천히 쓰시다가 손을 슬
놓고 의식을 잃으시더라고. 그 말을 듣고 우리모두는 아버지가 무엇을 쓰려 하셨던가를 너무나 잘 알수 있었다.
'민족 통일'이란 것을.. 그것은 당신님 평생의 화두였고 의지하던 하나의 꿈과 희망이였던 것이다.
첫댓글 잘 보앗읍니다........다극화 파고 속에 펼처진 첨단 기술의 잔치.......향후 무엇이 올까? 이해관계가 상반되는 세력간에 격열한 다툼 후에 그날이 올려나? 다툼은 시작되어 곳곳에서 목도 되고 잇는 것 같군요...
감사합니다. 잘보았습니다.
그날이 오면!!!
삼천리 강산도 들에핀 꽃들도
새들의 울음 소리도
지금과는 다를거야
그날이 오면~~~
먹먹하네요.
오천만 우리 민족이 모두 일어나 두둥실 춤을 출 그날이
가까워 졌습니다~~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는군요...
우리 부모 조부모 세대들이 그토록 보고싶어하던 그날이~~
형무소생활,
잘 보았습니다
조국통일,
그날은 꼭 옵니다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아버님이 언니를 잘 키우셨는지 언니가 스스로 영리하여
아버님을 지켜 드렸는지 둘다 같은 생각입니다
지금도 통일을 보고 죽어야지 하면서 광화문 미문화원 앞에서
투쟁을 하시고 계시는 동지분들이 계십니다
부디 소원이 빨리 이루어 지길 빕니다
글 내용이 아주 좋아서 단번에 읽었습니다
글이 잘 써지지 않는다고 제게 말씀하셨지만
아직 거뜬히 잘쓰고 계십니다 ㅎ수고 하셨습니다 .
글이란 글재주로 써지는 게 아니라 역사적 진리나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 힘이라는 생각이 들어.
내가 아무리 이런 글을 써도 정주가 광화문 미
문화원앞에 나가서 한번 외치는 것과는 비교가
안될거야.
통일을 한번 보고 죽기를 그리도 바라던 많은 이들
을 생각해서라도 앞으로도 더욱 열심히 하기를.
그 힘있는 멋진 시집은 다 되어가겠지..
그래도 그당시는 합방이 가능했고 노역도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합방은거녕 독방에 노역을 신청해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하루 1시간운동 나가는 그 잠깐의 시간동안 같이 나가는 옆방 죄수와 한마디 하면 교도관이 득달같이 달려나와 무슨 말을하느냐고 닥달을합니다.
어찌보면 그당시가 순수하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지금은 교도소의 교도관들도 담배는 출근할때 교도소 밖에 놓고 출근합니다.
...
아득한 옛 이야기...
사상범을 잡범들과 함께 있게하면 그 방안에있는 모든 사람들을 교화시켜버립니다.
ㅎㅎㅎ
경험입니다.
...
좋은글 감사합니다.
당시 창밖으로 보는 재소자들의 산보하는 모습을 보면 나란히 일정한 거리의 풀밭을 왔다갔다 왕래하며 담소를 나누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요즘은 훨씬 퇴보했군요. 매우 잔인하고 비인간적이 되었다 할까요...
교도소란 있어선 안될 존재입니다. 북처럼 한두달 간 사상교육소 정도가 효과적일텐데. 그곳에서 숙식을 하며 낮엔 강의교육을 받고 퇴근후엔 밭농사도 지어먹는다던데.. (북을 방문했던 한 서양인의 보고서에서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는 교도하고 교육시키는 곳보다는 어떻게하면 고통을 주나를 연구하는 곳 같습니다. 그러면서 왜 교도소라 이름을 붙였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