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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에 오래 살다 보니 이제 세속 밖의 사람이 되고 말았다.우연한 기회에 전에 적어 두었던 글들을 뒤적이다가 마음에 드는 것이 있기에 기록하여 조그만 책자로 엮고 그 속에 나의 뜻을 붙여 ‘야언(野言)’ 이라 이름 하였으니, 이는 나의 살아가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적은 것이다. 야언이란 전원에 사는 사람의 꾸밈없는 이야기라는 뜻이니, 야인을 만나 함께 이야기해 볼 만한 것이라 하겠다.
입 속에 세상에 대한 비평을 담지 않고 미간에 번뇌의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으며 세속에 살아도 신선이라 이를 것이다.
마음이 내키는 대로 꽃이나 대나무를 기르고 성미에 맞게 새나 물고기를 기르는 것, 이것이 산림에 묻혀 사는 사람의 생활이라 할 것이다.
한나라 양자운1)의 정자에는 배를 몰아 글을 배우러 오는 사람들이 많았고, 진나라 도연명2)의 국화 길에는 술병을 들고 찾아와 사립문을 두드리는 손님들이 많았다. 하지만 생ㄱ각하면 다 번거로운 일, 쑥대밭 속에 묻혀 살던 후반 때의 장중울3) 이나, 눈 속에 갇혀있어도 태평스럽게 누워 죽음을 기다리던 후한의 명신 원안4)의 처지가 차라리 낫지 않겠는가.
모든 병은 고칠 수 있으나 속기(俗氣)만은 고칠 수 없는 것. 다만 책이 그것을 고칠 수 있다.
술을 마시는 데는 진정한 아취가 있는데, 그것은 취하는 데에 있지 않고 취하지 않는 데에도 있지 않다. 한 잔 술에 얼굴이 발그스름해지는 사람으로는 송나라의 소요부를 들 수 있고,흠뻑 취하는 사람으로는 서진의 유백륜5) 을 들 수 있다.
세속을 떠난 이의 고상한 행적과 숨어사는 이의 절묘한 운치에 대해서 마음에 맞는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나 또한 절로 신기에 접하게 된다.
소탈한 친구와 만나면 나의 속됨을 고칠 수 있고, 통달한 친구를 만나면 나의 편벽됨을 깨칠 수 있고, 박식한 친구를 만나면 나의 고루함을 바로 잡을 수 있고, 인품이 높은 친구를 만나면 나의 타락한 속기(俗氣)를 떨쳐버릴 수 있고, 차분한 친구를 만나면 사치스러워지려는 나의 허영심을 깨끗이 씻어낼 수 있다.
사람이 명예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면 처자식 앞에서도 뽐내고 싶은 법, 그러나 마음 속 깊이 숨어 있는 그 욕심을 쫓아낸다면 잠을 자도 청초한 꿈을 꿀 수 있을 것이다.
일은 어느 정도 마음에 흡족하다고 생각할 때 그만 둘 줄 알아야 하고, 말은 자기 마음에 흡족하다고 생각할 때 멈출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허물과 후회가 자연히 적어질 것이다. 어디 그 뿐이겠는가? 그 속에 담긴 의미가 또한 무궁할 것이다.
일을 주선하다 보면 낭패를 보는 수가 있다, 무엇을 좋아하다 보면 결점이 나타나고, 욕심에 끌려 지나치게 연연하다 보면 어려운 일에 봉착하게 되고 마는 법이다.
책을 읽는 것은 이로움만 있고 해로움이 없으며, 산과 물을 사랑하는 것ㅇ은 이로움만 있고 해로움이 없으며, 꽃과 달과 바람과 대나무를 완ㅅ강하는 것은 이로움만 있고 해로움이 없으며, 단정하게 앉아서 고요히 입을 다무는 것은 이로움만 있고 해로움이 없다.
물이 끓고 차의 향기가 맑게 번질 때 마침 문 앞에 손님이 찾아온다. 얼마나 기쁜 일인가. 하지만 새가 울고 꽃이 이우는데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슬퍼하지 말라. 오히려 거기에 유연한 맛이 있나니, 진원(眞源)은 맛이 없고 진수(眞水)는 향취가 없는 법이다.
구름은 희고 산은 푸르며, 시냇물은 졸졸, 바위는 우뚝, 새들의 노랫소리를 꽃이 홀로 반기고, 나무꾼의 콧노래를 골짜기가 홀로 화답한다.
사방이 이렇듯 고요하니 사람의 마음조차 절로 한가롭구나.
뜻을 다 표현한 다음에 말을 마치는 것은 천하의 지언(至言)이다.
그러나 말을 마쳐도 듯은 다함이 없어 은은한 여운을 남기는 것은 더욱 지언이라 할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하루에 착한 말을 한 가지라도 듣거나, 착한 행동을 한 가지라도 보거나, 아니면 스스로 착한 일을 한 가지라도 행한다면 그 날은 결코 헛되이 산 것이 아니라 할 것이다.
시는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맞게 쓸 일이다. 지나치면 고달파진다. 술도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정도로 그쳐야 할 일이다. 지나치면 오히려 정신이 혼미해진다.
아름다운 풍류를 즐긴다 해도 지나고 나면 늘 슬퍼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말고 고요한 시골에서 노닐게 되면 갈수록 더 깊은 정취를 맛보게 된다.
화려한 꽃은 향기가 없고, 향기로운 꽃은 색이 화려하지 못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귀를 자랑하는 자는 인품의 향기가 없고, 인품의 향기를 뽐내는 자는 쓸쓸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러나 군자는 백세에 향기를 전할지언정 한 시대의 아름다운 자태로 남기를 원치 않는다.
한 시대의 사람들 모두에게 영합하기 위하여 지은 문장은 훌륭한 문장이라고 할 수 없고, 한 시대의 사람들 모두에게 영합하기 위하여 다듬어진 인물은 참된 인물이라고 할 수 없다.
산 속에서 사는 것이 좋기는 좋으나 조금이라도 그것에 매여 연연해하면 이는 시장 바닥이나 조정안에서 사는 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서화를 사랑하는 것이 아취가 있는 일이긴 하지만 조금이라도 이를 탐하는 마음이 있으면 또한 장사치와 다를 것이 없다. 한 잔 술을 마시는 일이 즐겁기는 하지만 한 순간이라도 남의 흥취에 따라가게 되면 또한 감옥 속처럼 답답하고, 손님을 좋아하는 것이 화통한 일이긴 하지만 조금이라도 속된 흐름에 떨어지게 되면 또한 고해(苦海)와 다를 것이 없다.
재주가 뛰어난 사람은 공경하고 삼가는 마음을 배울 것이며, 총명한 사람은 침착하고 중후함을 배울 것이다.
저속한 말은 장사치에 어울리고, 간드러진 말은 기생에 어울리고, 농담은 광대에 어울린다. 사대부가 이 가운데 어느 한 가지에라도 관계된다면 위엄을 잃고 말 것이다.
후덕하게 하느냐 아니면 야박하게 하느냐의 여부가 장단(長短)의 열쇠가 되고, 겸손하게 하느냐 아니면 교만하게 하느냐의 여부가 화복(禍福)의 열쇠가 되며, 양생(養生)을 하느냐 아니면 욕심대로 사느냐의 여부가 사람으로 남느냐 귀신으로 돌아가느냐의 갈림길이 된다.
이름을 날리게 되면 반드시 중책을 맡게 되지만, 잔재주를 부리게 되면, 반드시 뜻밖의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
보통사람을 보는 요령은 큰 대목에서 나대지 않는가를 살피는 데 있고, 호걸을 보는 요령은 작은 대목에서도 소홀히 함이 없는가를 살피는 데 있다.
노래와 여자를 너무 밝히면 허겁(虛怯)병에 결리고, 재물과 이익을 너무 밝히면 탐도병에 걸리고, 업적을 쌓는 데에만 골몰하면 정도를 이탈하는 주작(走作)병에 걸리고, 명예에만 집착하다 보면 과격하게 일을 처리하는 교격(矯激)병에 걸리고, 옛것을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지나치면 맹목적으로 남을 모방하는 호로(葫虜)병에 걸린다.
손님들은 흩어지고 대문은 닫히고 바람은 선들거리고 해는 떨어지는데, 술동이에 남은 술 기울이니 문득 시상(詩想)이 떠오르네. 산 속에 숨어사는 사람이 바라는 것이 이 밖에 더 무엇이 있겠는가?
긴 행랑 널찍한 정자, 굽이굽이 흐르는 강물, 휘어져 돌아오는 오솔길, 거기 흐드러지게 핀 들꽃, 울창한 대 숲, 산새와 갈매기, 그리고 질화로에 향을 사르고 설경을 바라보며 선(禪)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산중생활의 진정한 경계요 담백한 삶의 모습이라 하겠다.
해서 되는 것이 있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는 것, 이것이 세간(世間)법이다.
해서 되는 것도 없고 해서은 안 되는 것도 없는 것, 이것은 출세간(出世間)법이다.
사슴은 정(精)을 기르고 거북이는 기(氣)를 기르고 학(㶅)은 신(神)을 기른다.
그래서 장수하는 것이다. 고요한 곳에서는 기를 단련하고 움직이는 곳에서는 신을 단련하다.
군자는 일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고 해서 그 사람을 모욕하지 않으며, 무식하다고 해서 그 사람을 부끄럽게 만들지 않는다.
그래서 군자에게는 원망이 적은 것이다.
봄도 장차 저물어 가는데 숲 속으로 들어가니 굽은 길은 어슴푸레 뚫려있고, 소나무와 대나무가 마주 보고 있다.
들꽃은 향기를 뿜어내고 산새들도 즐겁게 지저귄다.
거문고를 안고 바위에 앉아 두서너 곡을 타니, 심신은 변하여 통천(洞川)의 신선인 듯, 그림속의 사람인 듯.
뽕나무 밭과 보리밭은 위아래에서 서로 아름다움을 다투고, 장끼는 따스한 봄볕 속에 짝을 부르고, 비둘기는 아침 보슬비 속에 노래한다. 전원에 묻혀 사는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참다운 경치란 이 밖에 무엇이 있겠는가.
때로는 스님과 함께 솔밭 바위에 앉아 인과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공안6)에 대하여 설왕설래하다 보면 어느덧 시간은 흘러 소나무가지 끝에 달이 걸린다. 이윽고 길에 비친 나무 그림자를 밟으며 집으로 돌아온다.
마음에 맞는 벗들과 한께 산에 올라 가부좌를 틀고 앉아, 내키는 대로 이야기하다가 그것도 따분해지면 바위 끝에 벌렁 누워 푸른 하늘에 두둥실 떠가는 흰 구름을 본다. 그러고 있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기쁨이 밀려와 스스로 유유자적의 경지에 노닐게 된다.
서리가 내려 나뭇잎이 성긴 숲 속을 홀로 거닐다 나무 등걸에도 앉아 본다.
단풍잎은 흰 소매위에 떨어지고 산새는 가지에 날아와 유심히 내려다 본다. 이 쓸쓸한 대지가 나에겐 오히려 맑고 넓기만 하구나.
문을 닫고 마음에 드는 책을 읽는 것. 문을 열고 마음에 맞는 손님을 맞이 하는 것, 문을 나서서 마음에 드는 경치를 찾아 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사람이 추구해야 할 세가지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서리가 내린 바위는 우뚝하고 못물은 고요하고 맑기만 하다.
깎아지른 절벽 끝에 담쟁이가 휘감은 고목 두서너 그루, 모두가 물 속에 거꾸로 그림자를 드리운다.
지팡이를 짚고 이곳에 이르니 마음이 함께 맑아지는 것 같다.
거문고는 오동나무 가지에 바람이 일고, 시냇물 소리가 들리는 곳에서 타야 어울린다. 자연의 음향이라야 거문고와 서로 잘 조화되기 때문이다.
살구꽃에 성긴 비가 듣고 버드나무에 산들바람이 불 때, 흥이 나면 흔연히 홀로 길을 나선다.
분주한 세상 밖에서 한가로움을 맛보고, 부족한 시간 속에 살면서 만족할 줄 아는 것은 은둔 생활의 정취요, 봄날 잔설을 쓸어내고 꽃씨를 뿌리는 것과 밤에 향을 피워 놓고 예언서를 보는 것은 은둔생활의 또 다른 기쁨이다.
문필생활은 흉년을 모르고 술이 있는 곳은 언제나 봄, 이것이 은둔생활의 참다운 맛이다..
쾌적한 밤 편안히 앉아 등불에 엷은 비단을 씌워 불빛을 은은히 밝히고 차를 끓인다.
밤은 깊어 아무 소리도 없이 사위가 그저 적막하기만 한데 개울물 소리만 간간이 들린다. 이런 밤 이부자리를 펴기 전에 잠시 책을 보는 것,
이것이 은둔생활의 첫 번째 즐거움이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은 대문을 닫고 방 청소를 한다. 문밖에는 사람들의 왕래가 이미 끊어져 사방은 고요하고 실내 또한 적막하다.
이럴 때 앞에 가득히 쌓인 책 가운데서 마음이 내키는 대로 이것저것 뽑아서 펼쳐본다.
이것이 은둔생활의 두 번째 즐거움이다.
텅 빈 산 속에 한 해가 저무는데 고운 눈발은 사방으로 흩날리고 안상한 나뭇가지조차 바람에 몸을 떤다.
추위에 놀란 새들이 들판에서 우는데 빈방에서 질화로를 기고 앉아 있노라니, 차는 끓어 향기롭고 술은 익어 그윽하다.
이것이 은둔 생활의 세 번째 즐거움이다.
첫댓글 소탈한 친구와 만나면 나의 속됨을 고칠 수 있고, 통달한 친구를 만나면 나의 편벽됨을 깨칠 수 있고, 박식한 친구를 만나면 나의 고루함을 바로 잡을 수 있고, 인품이 높은 친구를 만나면 나의 타락한 속기(俗氣)를 떨쳐버릴 수 있고, 차분한 친구를 만나면 사치스러워지려는 나의 허영심을 깨끗이 씻어낼 수 있다.
이 구절이 가장 눈에 들어 옵니다.
그 놈의 俗氣, 그걸 없애야 하는데...
전형적인 선비 스타일의 이분은 누구신가요?
이 글을 쓰신 신흠선비죠. ㅎㅎ 51호에 올린 '아픔이 머물러...' 잘 봤습니다. 작품 활동 꾸준히 하시기 바랍니다.
신흠 선비에 대한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51호를 받지 못해 알밤 선생님의 글을 아직 읽지 못했습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차제에 '작가이야기'에 올려 주셔서 여러분이 읽게해 주시는것이 어떠신지요? ㅎㅎ
이정구(李廷龜)·장유(張維)·이식(李植)과 함께 '월상계택'(月象谿澤)이라 통칭되는 조선 중기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경숙(敬叔), 호는 상촌(象村)·현헌(玄軒)·방옹(放翁). 아버지는 개성도사 승서(承緖)이며, 어머니는 은진송씨로 좌참찬 인수(麟壽)의 딸이다. 7세 때 부모를 잃고 장서가로 유명했던 외할아버지 밑에서 자라면서 경서와 제자백가를 두루 공부했으며 음양학·잡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개방적인 학문태도와 다원적 가치관을 지녀, 당시 지식인들이 주자학에 매달리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이단으로 공격받던 양명학의 실천적인 성격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